묵향 34권 3화 – 설마, 키메라?
설마, 키메라?
오크의 소굴인 점을 감안한다면 오크 발자국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동굴 밖에 오크 발자국들이 거의 없었던 것은 며칠 전에 쏟아졌던 폭우에 씻겨 버린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동굴 내부에까지 발자국이 거의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상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상하네. 오크가 이렇게까지 자신들의 흔적을 지운 이유가 뭘까?”
“혹시 비어 있는 동굴인지 알고 보금자리로 삼으려고 들어온 동물들을 잡아먹으려는 것인지도 모르죠.”
후미에서 천천히 따라오던 마법사 지크펠은 신관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반문했다.
“설마 오크들의 지능이 우리 인간과 비슷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뭐, 백번 양보해서 어쩌다 똘똘한 놈이 태어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래 봐야 오크 소굴에서 얼마나 지독한 악취가 풍기는데 그걸 속일 수……………”
여기까지 말하던 지크펠은 주위를 둘러보며 빠르게 코를 킁킁거렸다.
“어? 그러고 보니 여기서는 오크 냄새가 하나도 안 나는데? 원래 오크가 서식하는 동굴 근처에만 가도 악취가 코를 찌르는데 말이야.”
지크펠의 의문에 앞서 가던 카렙이 곧바로 대답했다.
“지금 바람이 밖에서 동굴 안쪽으로 불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오크 냄새가 나지 않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긴 합니다.”
카렙은 레인저인 만큼, 바람의 방향 같은 것에 아주 민감했던 것이다.이때, 동굴 안쪽에서 갑자기 귀를 찢는 듯한 호각(號角)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삐이이익!
거의 반사적으로 칼을 뽑아들며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 들어가는 두 사람, 앤트러스와 브레이였다. 지크펠은 마법으로 만든 광구(光球)를 앞쪽으 로 움직여 그들의 시야를 밝혀 줬다. 환한 빛을 뿜어내는 광구가 동굴 안쪽으로 움직이자 오크 두 마리가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호각을 요란스레 불어대던 오크들은 사람이 접근해 오자 호각 불기를 멈추고 무기를 꼬나들었다. 아주 잘 제련된 창이었다.
“저런 창을 어디서 구한 거지?”
“모험가들을 해치우고 얻은 것인지도 모르죠.”
지크펠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보기에는 상태가 너무 좋은 거 같은데………….”
“사람들을 붙잡아 놓고 노예로 부리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뒤에서 화력지원을 해 줘야 할 지크펠이 신관과 한가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앞서 달려간 두 사람과 오크들과의 접전이 시작됐다. 브레이의 경 우 암살조 조장이기에 그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을 거라고 사람들이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앤트러스가 보여준 놀라운 칼놀림은 지켜보는 이 들을 압도했다.
발검과 동시에 오크의 오른팔을 잘라 버린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반전하여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왼쪽 어깨에서부터 시작해 오른쪽 허리로 이어 지는 깊은 상처를 입혔던 것이다. 팔이 잘리는 순간 오크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선 탓에 두 토막을 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즉사라고 판단해도 될 만 큼 깊은 상처였다. 그 짧은 순간에 이렇게나 빠르게 오크를 숭덩숭덩 썰어 놨다는 것이 보는 이들에게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한 마리는 확실하게 해치웠다고 생각한 앤트러스는 동굴 속에서 다른 오크들이 달려 나오기 전에 브레이가 상대하고 있는 나머지 한 마리도 확실하 게 해치워 버리기 위해 옆으로 돌아섰다. 일반적인 오크와 달리 이곳에 서식하고 있는 오크들은 덩치만 큰 게 아니라 무기를 다루는 솜씨도 뛰어났 다. 물론 그래 봐야 브레이와 맞상대가 가능할 정도로 실력이 좋다는 건 아니었지만, 브레이는 여유롭게 오크를 밀어붙이고 있는 중이었다.
앤트러스는 시간을 끌 것 없이 뒤쪽에서 칼을 날려 단숨에 오크의 목을 날려 버렸다. 그런데 그때 옆쪽에서 카렙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뒷쪽을 조심하십쇼!”
앤트러스는 반사적으로 재빨리 옆으로 피한 후, 자신의 뒤쪽을 살펴봤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방금 전에 자신이 처치했다고 생각했던 오크가 상반신 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창을 들고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놈이 앤트러스를 향해 창을 찌르는 것을 본 카렙이 경고성을 발한 것이다.
“어떻게 저럴 수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는데도 불구하고 살아 있다는 게 놀라웠다. 하지만 그의 놀라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깊게 베인 상반신에서 줄줄 흐르던 피의 양이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몸속의 피가 다 빠져나가게 되면 더 이상 나올 게 없으니 피의 양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 한 사실. 하지만 앤트러스가 깜짝 놀란 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트롤과도 몇 번이나 싸워봤던 앤트러스다. 몸속의 혈액이 모자라서 피가 그치는 것과 상처가 급속도로 아물며 흘러내리던 피가 지혈이 되는 것과의 차이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트롤?”
앤트러스는 그제야 어지럽게 얽혀 있던 모든 상황들이 한 마디로 귀결되는 것을 느꼈다. 오크의 형태를 하고 있으면서 트롤의 재생력을 지니고 있 고, 또 잘 손질된 창뿐만이 아니라 제대로 된 창술까지도 익히고 있다. 그렇기에 해밀턴 팀이 당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런 경우 떠오르는 단 하나의
이름, 그것은 바로 키메라였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지크펠의 머릿속에도 똑같은 생각이 떠오른 모양이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키메라?”
앤트러스는 복잡한 상념을 억누르고 일단 자신에게 덮쳐오는 오크의 창을 피하며 가볍게 목을 잘랐다. 트롤과도 같은 재생력을 지닌 키메라라면 목 을 잘라야 완벽하게 죽일 수 있었으니까. 브레이는 질린 얼굴로 쓰러져 있는 오크들의 시체를 발로 툭툭 차며 정말로 죽었는지 확인한 뒤에야 앤트러 스를 향해 물었다.
“이게 키메라라고요?”
“어, 어쩌면 저 동굴 안쪽에 고대의 던젼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브레이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앤트러스가 아닌 마법사 지크펠이었다. 그의 얼굴은 어느샌가 흥분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당장 동굴 속으로 달려 들어갈 기세였다. 그런 그를 앤트러스가 제지했다.
“던젼이 아닐세. 고대의 던젼이라면 키메라들이 가지고 있는 창이 저렇게 반짝거리는 새것일 수가 없지.”
그제서야 흥분이 가라앉았는지 고개를 끄덕이던 지크펠의 안색이 뭘 생각했는지 삽시간에 허옇게 질려 버렸다. 그런 지크펠의 얼굴을 바라보며 앤 트러스는 침중한 음성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던젼을 지키는 키메라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던젼을 벗어나지 않아. 만들 때 그렇게 세뇌를 시켜놓으니 말이야. 그런데 이것들은 동굴에서 나와 맥 스팀을 추적하기까지 했어. 그 와중에 해밀턴 팀까지 학살하고 말이지.”
“던젼이 아니라면 이곳은 대체 뭐하는 곳이라는 말입니까?”
지크펠은 신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앤트러스를 향해 황급히 말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겠습니다. 만약 저 안에 던전이 아닌 비밀연구소가 있는 게 맞다면 저희들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을 테니까요.” 앤트러스는 고개를 끄덕인 뒤 대원들을 향해 명령했다.
“내 생각도 그렇다네. 자, 빨리 여기를 벗어나자! 서둘러!”
삐이이익! 삐익!
귀를 찢는 듯한 호각음에 마를린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랍게도 또다시 침입자가 침투해 들어온 것이다. 그녀는 아직 자신의 가마를 들고 되돌아오던 키메라들과 감찰부의 선발대가 충돌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교활하기 짝이 없는 키메라들이 푸짐한 한 끼 식사를 한 후, 그 사실을 그녀에게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대비는 되어 있었다. 얼마 전에 침입자가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설마 이런 외진 곳에 위치한 연구소에 침입해 들어올 자가 있을 거라고 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간혹 식인식물이 슬그머니 들어왔다가 키메라 오크들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쫓겨났을 뿐, 사람은 연구소 근처에 얼씬 도 하지 않았으니까.
세브롱 요새에서 출발한 용기사들도 연구소 근처로는 아예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산세가 험한 오지 중의 오지를 택해 연구소를 비밀리에 건설해 놓은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침입자가 침투할 수도 있다는 게 확인된 후, 연구소의 경비는 비약적으로 강화되었다.
지금의 호각음이 그렇다. 예전에는 키메라 한 마리가 입구를 지키고 있었지만, 지금은 2마리로 증강되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성능이 좋은 호각까 지 주어졌다. 침입자를 발견하면 곧바로 경고성을 발할 수 있도록.
호각 소리를 듣자마자 마를린은 휴식을 취하고 있던 여분의 키메라 오크들을 몽땅 다 이끌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침입자는 이미 도망친 후였다. 제3통로를 지키고 있던 키메라 오크 둘은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보다 앞서 현장에 도착한 키메 라 여섯 마리가 사체들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서 막 뜯어먹으려고 하고 있던 참이었다.
“잠깐! 너희들 거기서 뭐 하는 거야?”
마를린의 접근을 안 키메라들이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그녀의 시야에 들어오는 두 마리 오크의 사체. 마를린은 오 크의 사체들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깨끗하게 절단된 상흔!
더군다나 어깨부터 시작해 허리까지 뼈 채로 단숨에 벤 자국은 마를린의 몸에 소름이 끼치게 만들었다. 놀라운 실력자가 들어왔다 간 것이다. 그리 고 동굴 입구 쪽에 찍혀 있는 여러 명의 발자국들. 이번 침입자의 숫자는 저번보다 두세 명이 더 많은 듯했다.
마를린은 지체하지 않고 대지의 기억을 읽어 내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일단 적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는 게 우선돼야 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앤트러스 특무대의 마법사인 지크펠은 대지의 기억을 읽기 위해 장시간 주문을 외우며 마나를 컨트롤해야 했지만, 마를린은 그걸 단시간 내에 해냈 다.
대지의 기억을 읽어 들이기 위해 설정한 면적이 지크펠이 할 때의 1/10도 채 되지 않았다는 게 가장 큰 원인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 둘의 실 력 차가 워낙 큰 탓이었다. 지금 마를린이 이런 오지에서 돌대가리 키메라들을 데리고 경비를 서고 있긴 하지만, 사실 그녀는 이런 일에 쓰기에는 아
까운 재원)이었다. 엄청난 경쟁을 뚫고 원로원 직속의 연구소에 채용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보통의 실력을 가지고는 불가능했기 때문이 다.
“마법사?”
키메라들을 향해 검을 뽑아들고 달려드는 두 사람. 그리고 그 뒤에서 한 명이 화살을 날릴 준비를 하는 게 보였고, 또 다른 두 명은 제일 뒤쪽에 처져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검을 들고 달려드는 두 사람의 앞쪽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는 구체였다. 자연적인 발화가 아닌 인공적인 빛을 뿌리는 구체, 바 로 마법이었다.
“이런 젠장!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침입자에 마법사가 끼어 있다면 절대로 시간 여유를 줘서는 안 된다. 마법통신으로 이곳에서 발견한 것을 누군가에게 보고할 수도 있고, 마법을 이 용하여 어딘가로 공간 이동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여유롭던 마를린의 안색이 이 사실을 깨닫자 다급하게 바뀌었다.
“침입자를 찾아라! 빨리!”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키메라 오크들은 괴성을 질러대며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마를린은 오크들을 따라 쫓아가면서 품속에 손을 넣어 수정 구를 꺼냈다. 수정구는 그녀와 긴밀하게 협조하며 작전을 펼쳐야 하는 내부 경비대장 롤프와 직통으로 연결시켜 주는 마법도구였다.
「무슨 일인가?」
느긋한 어조로 묻는 롤프에게 마를린은 황급히 대답했다.
“제3통로로 또다시 침입자가 들어왔어요.”
롤프는 심드렁한 어조로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 정도는 자네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지 않나? 그나저나 요즘 왜 이리 침입자들이 많아진 거야?」
“그렇게 쉽게 말할 사안이 아니에요. 이번에는 마법사까지 끼어 있단 말이에요.”
마법사가 있다는 말에 롤프의 표정이 순식간에 심각하게 바뀌었다.
「침입자들이 어디까지 들어왔나? 설마 연구소 내부까지 들어왔다 간 건 아니겠지?」
“그렇지는 않아요. 제3통로 입구 쪽만 기웃거리다 도망친 것 같으니까요. 그런데 입구에 보초로 세워 둔 키메라 두 마리를 깔끔하게 처치한 걸 보면 꽤나 실력이 있는 것 같아요.”
연구소 내부까지 들어오지는 않은 것 같다는 말에 롤프의 안색이 스르륵 풀린다.
「그건 다행이군. 어찌 되었든 이곳에서 키메라를 발견한 것을 외부에 떠들지 못하도록 철저히 막아야 해.」
“그래서 말인데, 1호와 2호의 사용을 허락해 주세요.”
1호는 놀로 제작된 키메라로 모델 번호 CE001을 뜻하는 것이었고, 2호는 코볼트로 제작된 키메라로 CEOO2를 말하는 것이다. 둘 다 소형 몬스터를 기반으로 제작했기에 저렴한 가격에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치명적인 문제점 또한 지니고 있었다.
오크를 베이스로 제작한 키메라들에 비해 지능이 형편없이 떨어졌기에 간단한 명령 몇 가지 정도밖에 내릴 수가 없는데다가, 자기 절제력은 오크보 다도 훨씬 더 떨어졌다. 즉, 피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놈들인 것이다.
당연히 경비 임무에는 도저히 써먹을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비싼 돈을 들여 제작한 그것들을 그냥 폐기해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혹시 필요할 때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한쪽 구석에 처박아 두고 있던 참이었다.
좋아. 사용하도록 하게.」
마를린이 요청한 CEO01과 CEOO2의 숫자는 각기 200마리와 100마리였다. 승낙을 얻은 마를린은 옆에 대기하고 있던 키메라 오크에게 명령했다. “너는 지금 가서 당장 1호와 2호들을 이끌고 나한테로 와. 알겠냐? 내 말 이해하겠어?”
“취익”
짧은 다리 탓에 뒤뚱거리며 동굴 속으로 달려 들어가는 키메라 오크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도 그녀는 도통 믿음이 가지를 않았다. 제어술식의 도움 으로 사람의 말을 어느 정도 알아듣긴 했지만, 원활한 의사소통까지 되는 건 아니었다. 이 경우, 저놈이 자신의 명령을 제대로 못 알아들었으면 큰일 인 것이다.
어쨌거나 마를린 역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저놈이 제시간에 맞춰 지원부대를 끌고 오던 그렇지 않건 그건 운명에 맡겨야 했다. 놈을 믿지 못 하겠다고 그녀 자신이 직접 달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침입자들을 쫓아간 키메라 오크들이 지닌 능력을 100% 발휘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 접 지휘해야만 했다.
‘잘 데리고 올 거야.’
솟구쳐 오르는 불신감을 애써 달래며 마를린은 자신의 몸에 근력증가와 속도증가의 보조마법부터 걸었다. 침입자들을 찾아내 끝장내기 위해서……………
***
다급히 동굴 밖으로 나간 후에도 앤트러스의 달리는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모두들 헐레벌떡 그의 뒤를 쫓아 죽어라 달려갔다.
“이봐,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말일세.”
“헉헉…, 마…, 말씀하십쇼.”
앤트러스의 뒤를 쫓아가는 지크펠은 지금 숨이 턱까지 차서 죽을 지경이었다. 근력증가 마법을 자신에게 걸긴 했지만, 그렇다고 지치지 않는 건 아 니다. 자신의 기본적인 체력은 마법을 걸건 말건 변함이 없었으니까. 즉, 단거리라면 어떨지 몰라도 이렇듯 장거리 달리기가 되면 마법사의 허약한 체력이 버티지를 못하는 것이다.
“이런 산골짜기에 저런 엄청난 키메라를 만들 만한 연구소를 건설할 수 있는 단체가 뭐가 있을까? 뭐, 생각해 보나마나겠지. 원로원 말고 그 어떤 단 체가 저런 능력을 가지고 있겠나? 그런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왜 저런 훌륭한 성과를 내고도 가만히 있었던 걸까?”
웬만한 상처는 즉시 회복해 버리는 막강한 재생력! 그것만 해도 놀라운데, 강인한 근력에 민첩성, 그리고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흉포함까지…………. 비 록 자신의 국왕파와는 시시때때로 대립각을 세우곤 하지만 원로원 역시 마법왕국 알카사스를 지탱하고 있는 커다란 축이었다. 나라에 엄청난 전력이 될 수 있는 이런 특급 정보를 모든 정보를 총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감찰부에서 아직 모른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앤트러스의 질문에 연신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지크펠은 망설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모르죠. 어쩌면 저런 흉악한 놈들을 몰래 대량으로 생산해 우리 뒤통수를 치려고 했는지도 말입니다.”
지크펠의 말에 앤트러스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 걸 느꼈다. 그렇다. 권력이란 그만큼 인간의 본성을 뒤바꿀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욕망의 원 천이다. 지금껏 권력에 눈이 어두워 나라를 배신한 놈들을 한두 명 본 게 아니다. 원로원 역시 다를 게 없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이런 놀라운 성과를 거두고도 감찰부조차 알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숨겼을 리가 없는 것이다. 저런 엄청난 능력의 키메라들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만 있다면 지금껏 균형 을 이뤄오던 권력의 추가 단숨에 원로원 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앤트러스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를 따라 달려가던 대원들은 앤트러스를 따라 걸음을 멈췄다. 그 잠시의 틈을 이용해 체력이 약한 사람들은 헐떡거리며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심지어 주저앉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황이 너무 안 좋아. 일단 공간이동을 할 수 있게 빨리 마법진을 그리게. 분명 추격자들이 따라붙을 테니 말이야.”
“예? 그건…….”
머뭇거리는 지크펠에게 앤트러스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지크펠은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대지의 기억을 읽는 대마법을 쓴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도중에 간단한 보조마법도 몇 가지 썼고 말입니다. 이렇게 보여도 지금 저 는 정신적으로 아주 피곤한 상탭니다. 저 혼자라면 몰라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공간이동 시키는 건 솔직히, 자신 없습니다.”
“짧은 거리라도 상관없네. 우리의 흔적만 차단하면 그걸로 족하니까.”
“죄송합니다.”
어지간하면 상관의 요청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공간이동 마법이라면 얘기가 틀리다. 작은 실수 하나만이라도 떼몰살을 당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강 압적으로 공간이동을 시킨다면 자신은 빠지고 할 것이다. 그만큼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친 지금 쓰기에는 위험한 마법이 공간이동 마법이었 다.
앤트러스는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지. 공간이동이 가능할 때가 되면 내게 말하도록. 그때까지는 최대한 빠르게 이곳을 벗어나도록 한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면목없습니다.”
“뭘. 오크들이라고 만만하게 보고 그냥 쳐들어간 내 잘못이 크지. 어쨌거나 만일을 대비해 현 상황을 본부에 보고해 두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지크펠은 품속에서 수정구를 꺼내 숯가루를 뿌렸다. 통신마법으로 본부에 현 상황을 보고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카렙이 손가락으로 방금 전 자신들이 빠져나왔던 동굴 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대장님, 저것 보십쇼!”
황급히 시선을 돌린 앤트러스는 동굴 안에서 수십 마리에 달하는 키메라 오크들이 괴성을 질러대며 달려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젠장!”
잠시 고심하던 앤트러스는 곧 결단을 내렸다는 듯 지크펠에게 물었다.
“자네 혼자라면, 이곳에 남아서 통신을 끝낸 다음에 탈출할 수 있겠나?”
현 상황이 그만큼 위급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만약 자신들이 잘못되더라도 키메라에 대한 정보만큼은 반드시 본부에 알려야 했다. 지크펠은 주문을 외우고 있는 중이었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부탁하네.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통신만 끝나면 곧바로 탈출하도록 하게. 그럼 우리는 먼저 가 보겠네.”
카렙이 그런 지크펠을 걱정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브레이에게 속삭였다.
“차라리 통신이 끝날 때까지 보호하고 있다가 함께 탈출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쯧, 네 걱정이나 해. 마법사는 도망치려고 마음먹으면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도망칠 수 있는 족속이니까. 그것보다 우리가 문제군. 저 망할 오크 새 끼들 내달리는 속도를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따라 잡히겠어.”
앤트러스와 대원들은 지크펠을 놔둔 채 죽어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지크펠에 대한 미안함은 빠른 속도로 희석되어 사라졌다.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없을 만큼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기 시작했으니까.
간신히 통신마법이 완성되었다. 주변 상황이 워낙에 급박하게 돌아가다 보니 신경이 분산되어 하마터면 주문이 실패할 뻔한 상황. 평소보다 조금 시 간이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주문이 성공한 게 어디겠는가.
주문이 성공했다고 해서 곧바로 상대가 수정구에 비치는 건 아니다. 상대가 받아 줘야 하는 것이다. 그 몇 초의 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 었다. 지크펠은 수정구와 동굴 쪽을 번갈아 바라보며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이런 씨팔! 빨리 좀 받아라. 허억! 이런 젠장!”
이때, 지크펠의 두 눈이 경악으로 인해 휘둥그레졌다. 동굴 속을 빠져나오자마자 곧바로 날아오르는 여자 마법사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실수였다. 키메라 오크들이 워낙 흉흉하게 쫓아오다 보니, 원로원 소속 마법사들이 이렇듯 빠르게 대응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게다가 비행마법을 저렇게 빠른 속도로 실행하는 것만 봐도 자신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마법사일 게 뻔하다. 지크펠의 얼굴에 짙은 절망감이 어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수정구가 희미한 빛을 내뿜는 듯하더니 그 빛이 사라지는 순간, 수정구 속에 검은 제복을 입은 늙은 마법사의 모습이 그려졌 다. 그는 지크펠이 자기 쪽을 보지도 않고 어딘가 다른 데를 보고 있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어? 자네는 지크펠이로군. 그래, 무슨 일인가?」
그제야 통신이 연결된 걸 알고 곧바로 수정구에 얼굴을 들이밀고 보고를 시작하는 지크펠. 비록 비행마법을 쓰며 날아오른 마법사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설혹 이곳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맡은 임무만큼은 완수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긴급 보고입니다. 현 상황은…….”
바로 그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통신마법진이 깨진 건 물론이고 그 중심축에 있던 수정구조차 튕겨 날아가 버렸다. 보고를 시작하던 지크펠은 멍한 표정으로 통신마법진이 있던 곳을 바라봤다. 이렇게 정확하게 통신마법진부터 날려 버리다니! 다시 한 번 상대 마법사와의 수준차를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상대는 일격에 통신마법진은 물론이고, 지크펠조차도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였다. 만약 허접한 마법사였다면 이런 큰 주문을 외 우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 테고, 그동안 지크펠은 중요한 정보를 어느 정도는 상부에 보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최악이로군…….”
자신을 향해 쏜살같이 다가오고 있는 여마법사의 악귀와도 같은 모습을 보며 지크펠의 얼굴에 절망이 피어오른다.
해밀턴 팀은 어처구니없을 만큼 허무하게 키메라 오크들에게 짓밟혀 버렸지만, 앤트러스와 대원들은 그렇지 않았다. 오크들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재생력이 좋은 키메라라는 것을 미리 파악한 상태였기에 방심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놈 한 놈 확실하게 모가지를 날려라. 그렇지 않으면 되살아난다.”
대원들 모두 잘 알고 있긴 했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키메라 오크들 역시 본능적으로 자신의 약점이 어딘지 잘 알고 있었기에 목에 대한 방어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오크만 뒤쫓아 왔다면 그리 큰 피해 없이 도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만한 실력의 소유자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오크들의 뒤를 쫓아 모습을 드러낸 놀과 코볼트 떼는 대원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특히 그들에게 절망을 안겨 준 것은 코볼트 떼였다. 생긴 것은 놀과 그리 다르지 않았지만, 놀과 달리 입에 독샘이 발달하지 않은 것은 그럴 필요성 을 못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덩치가 놀의 두 배쯤 큰 만큼 훨씬 더 막강한 공격력을 지니고 있었고, 놈들의 송곳니는 가죽갑옷쯤은 쉽게 꿰뚫어 버릴 만큼 날카로웠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