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4권 무림연맹(武林聯盟)편 :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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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4권 무림연맹(武林聯盟)편 : 8화


제38장. 기남기녀(奇男奇女)

남삼 중년인들이 진산월을 안내한 곳은 소림사 후원의 천방 중 하나였다. 하나 어제 천봉궁의 인물들을 만났던 곳은 아니었다. 진산월은 자신이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고 있음을 깨닫고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한심하군… 대체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던 거지?’

선두에 섰던 남삼 중년인이 걸음을 멈춘 곳은 천방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한 어느 작은 선방(禪房)이었다. 겉으로 보아서는 평범하다 못해 오히려 초라해 보일 정도였는데, 안으로 들어서니 밖에서 보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실내는 깔끔하고 단아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우아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은 아마도 별다른 장식이 없는 벽면에 걸린 몇 개의 수묵화(水墨畵)와 한쪽에 쳐진 병풍 때문일지도 몰랐다. 수묵화들은 얼핏 보기에도 대가(大家)의 솜씨임을 알 수 있는 명품(名品)들이었고, 다채로운 글씨가 쓰여 있는 팔 폭 병풍 또한 진품(眞品)중의 진품이었다. 병풍 앞에는 조촐한 술상이 차려져 있었는데, 안주는 그리 많지 않았으나 하나같이 정갈하면서도 맛깔스러운 요리들 뿐이어서 진수성찬에 못지 않았다. 술상 주위에는 서너 사람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가, 진산월이 들어오자 모두 그에게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들 중 우선 진산월의 눈에 들어온 것은 중앙에 앉아 있는 모용봉이었다. 모용봉은 이런 자리에서도 여전히 망사가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 진산월은 모용봉의 챙 넓은 모자 아래로 그의 수정같이 맑고 차가운 두 눈이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진산월은 피하지 않고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언뜻 그 눈이 가늘어지며 웃음기를 떠올리는 것 같았다. 이어 모용봉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서 오시오. 미리 마중을 나가지 못한 것을 용서하시오.”

진산월은 그의 음성을 두 번째로 듣는 것이지만, 들을 때마다 정말 듣는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맑고 깨끗한 음성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산월은 자신도 그처럼 청량한 음성을 지녔으면 좋겠다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별 말씀을. 이렇게 초대해 준 것만으로도 영광이오.”

망사 사이로 모용봉의 조용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하… 일전에는 자세한 사정을 미처 모르고 실례를 범한 것 같아 항상 마음이 불안했었소. 나중에 백봉 정소저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진장문인과 귀파의 고수들이 그 물건 때문에 적지 않은 고생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웃음 소리만으로도 사람을 매혹시킬 수 있다면 바로 모용봉의 웃음이 그러할 것이다. 같은 남자인 진산월이 듣기에도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감미로운데, 하물며 여인이 들었다면 어떻겠는가? 진산월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한 차례 헛기침을 했다.

“험. 그건 모두 지나간 일이며 우리는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니 모용공자는 염두에 둘 필요 없소.”

“그렇더라도 나로서는 사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소. 늦게나마 내 물건을 지키느라 힘써주신 것에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이오.”

천하에 대명이 자자한 모용공자의 입에서 감사하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면 누구라도 기쁘고 감격스러워 할 것이다. 그러나 진산월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왠지 모용공자의 사례가 짐을 대신 들어다 준 일꾼에게 하는 의례적인 말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의 착각일 것이다. 하나 모용공자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진산월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진산월은 자신이 그를 질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산월은 굳이 그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적어도 남자라면 모용봉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모용봉은 남자라면 누구나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에게 질투심을 느낀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런 질투심과 함께 자신의 가슴속으로 소리없이 파고드는 자격지심(自激之心)이란 놈이었다. 자신이 남보다 뒤쳐진다는 느낌! 그것은 무림인이라면 자만심보다도 오히려 더욱 무서운 마음의 병(病)이었다. 그 때문에 진산월은 모용봉이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을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기 힘들어진 것이다. 진산월은 억지로라도 그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말씀은 잘 받아두겠소. 그런데 이미 손님들이 몇 분 와 계신 것 같은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소개해 주시지 않겠소?”

“실례라니 당치않은 말이오. 그렇지 않아도 진장문인께 소개해 드리려던 참이었소.”

이어 모용봉은 자신의 좌측에 앉아 있는 인물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뜻밖의 말을 했다.

“이 사람은 유장령(劉長靈)이라 하오. 나의 몇 안되는 적수(敵手) 중 하나요.”

진산월은 좀처럼 놀라지 않은 성격이었으나, 모용봉의 말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정한 모습으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이 친구가 아니라 사실은 적(敵)이라니… 게다가 몇 명 되지 않는 적수중 하나라는 말 속에는 묘한 어감(語感)이 숨어 있었다. 그것은 당금 강호에서 자신의 적수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눈앞의 인물이 바로 그들 중 하나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모용봉은 모용단죽이 공언(公言)한 미래의 천하제일고수였다. 그의 현재 실력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그가 지금 당대 무림에서 가장 강한 고수 중 하나라는 것에는 누구도 이견(異見)을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모용봉이 스스로의 입으로 적수라고 말한 것만 보아도 상대방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여실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나 진산월이 놀란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진산월은 유장령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진산월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모용봉의 좌측에 앉아 있는 사람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는 전신에 눈부신 백의를 걸친 이십 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얼굴은 강퍅할 정도로 말랐고, 머리는 반쯤 풀어헤쳐졌으며, 그다지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코는 매부리코에 입술은 백지장처럼 얄팍했고, 턱은 뾰족했다. 허리춤에는 볼품 없는 철검(鐵劍) 하나를 달랑 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는 떠돌이 낭인(浪人) 같았다. 하나 진산월은 그의 메마른 얼굴에 박힌 두 개의 눈이 얼음장처럼 차갑고 냉정하게 굳어 있음을 발견했다. 진산월은 한동안 그를 찬찬히 응시하다가 불쑥 물었다.

“귀하가 화산파의 외로운 독수리라는 화산독응(華山禿鷹) 유장령이오?”

백의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산월의 신분을 생각한다면 너무도 오만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그러나 진산월은 화를 내기보다는 오히려 입가에 빙긋 미소를 떠올렸다.

“귀하의 소문은 오래 전부터 듣고 있었소. 나는 종남파에서 온 진산월이라는 사람이오.”

진산월이 비록 강호 전체에 명성을 떨치는 인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종남파의 장문인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져 있었다. 더구나 화산파의 제자라면 진산월의 이름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백의인은 그의 이름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한 차례 고개만 끄덕이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누구라 해도 이런 상대를 만나게 되면 기분이 나빠질 것이 분명했다. 진산월도 필시 좋은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 진산월은 여전히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백의인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백의인은 화산파에서 자랑하는 최고의 후기지수(後起之秀)였다. 화산독응 유장령이라고 하면 적어도 섬서성 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검의 귀재(鬼才)였다. 그에 비견되는 사람은 진산월의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인 마검 조일평 뿐으로, 두 사람은 최근 들어 섬서성에서 배출된 최고의 검객들로 그 명성을 널리 떨치고 있었다. 특히 유장령은 화산파 내에서 백 년 전의 천하제일검이었던 신검 조일화 이후 제일가는 검재(劍才)로 기대를 한 몸에 모으고 있기도 했다. 단지 그 성격이 너무 싸늘하고 혼자 다니는 것을 좋아하여 남과 쉽게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이 유일한 단점으로 알려져 있었다.

진산월은 유장령의 성격에 대한 소문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무례해 보이는 태도에 대해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단지 그가 궁금해하는 것은 유장령이 허리에 차고 있는 저 평범한 철검이 일단 뽑히면 과연 강호에서의 소문처럼 그토록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것은 일단 겪어봐야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때가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진산월이 유장령을 향해 다시 무언가 물으려 했을 때 모용봉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상태이니 진장문인께서는 양해해 주시오.”

진산월은 침착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의 기분이 왜 좋지 않은지 알 수 있겠소?”

망사 사이로 비치는 모용봉의 눈길이 조금 가늘어졌다. 아마 웃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와 싸우지 못해서 그렇소.”

진산월은 흥미가 일어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나와 검을 겨루기 위해서였소. 하지만 내가 거절하여 그는 저렇게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앉아 있는 것이오.”

진산월은 다시 한 차례 유장령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화가 난 듯도 보였다. 모용봉 같은 인물이 단순히 유장령의 검이 두려워서 도전을 회피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진산월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모용공자께서 그의 도전을 거절하신 것에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소?”

모용봉은 웬일인지 선뜻 대답하지 않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진산월은 자신이 괜한 질문을 던져서 그를 난처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모용봉은 이내 특유의 청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이번 천룡사와의 일전(一戰)이 끝날 때까지 다른 일에 심력(心力)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소.”

진산월은 이 말을 듣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모용봉의 말은 바꿔 말하자면 유장령을 쉽게 이길 자신이 없다는 뜻이었다. 유장령을 상대하려면 적지 않은 심력을 소모해야 하기 때문에 천룡사와의 격전에 집중하기 위해서 그의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유장령이 비록 최근 들어 강호에서 혁혁한 명성을 떨치고 있기는 하나, 설마 모용공자마저 두려움을 느낄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런 유장령을 일개 제자로 거느리고 있는 화산파의 힘이란 대체 얼마나 가공스러운 것이란 말인가? 이러한 화산파가 눈에 가시처럼 여기며 말살(抹殺)시키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문파가 바로 종남파였다. 진산월로서는 유장령을 높게 평가하는 모용봉의 말이 결코 달가울 리가 없었다. 다행히 진산월은 자신의 마음을 숨기는데는 아주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 차례 빙그레 웃고는 모용봉의 우측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쪽에 앉아 있는 사람은 유장령과는 전혀 딴판으로 생긴 인물이었다. 나이는 이곳에 모인 사람 중에서는 가장 많은 삼십 대 중반으로 보였다. 전신에는 울긋불긋한 질 좋은 비단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어찌나 뚱뚱했던지 마치 비단을 두른 한 마리 하마를 연상케 했다. 두 눈과 코는 부풀어 오른 듯한 뺨에 가려져 제대로 보지도 않을 정도였는데, 반면에 입이 크고 입술도 두꺼워서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코밑으로 두 가닥의 가느다란 수염이 달려 있어 더욱 그러해 보였는지도 몰랐다. 뚱뚱보 중년인은 연신 땀을 비오듯 흘리며 손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닦고 있었는데, 오래전부터 닦고 있었는지 제법 커다란 손수건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뚱뚱보 중년인은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활짝 웃어 보였다. 그 바람에 가뜩이나 커다란 입이 더욱 벌어져서 어린 아이 머리통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산월은 모용봉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분도 모용공자의 적수요?”

모용봉은 나직하게 웃었다.

“하하… 아니오. 그는 나의 빚쟁이요.”

“빚쟁이?”

“그렇소. 그가 내게 갚아야 할 것이 두 가지 있고, 내가 그에게 주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소.”

진산월은 그것들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다. 조금 전처럼 자칫 모용봉을 곤란하게 만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뚱뚱보 중년인이 게걸스럽게 웃었다.

“헤헤헤… 모용공자님의 말씀은 조금 틀렸습니다. 제가 받아야 할 것은 한 가지 뿐이지만, 제가 모용공자님께 빚진 것은 모두 세 가지입니다.”

그의 웃음소리는 코 밑에 나 있는 수염만큼이나 우스꽝스러웠다. 모용봉은 조용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이 갚아야 할 건 두 가지요.”

뚱뚱보 중년인은 웃다 말고 갑자기 울상을 해보였다.

“아닙니다. 세 가지입니다. 모용공자님. 제발 저를 난처하게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진산월은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남에게 빚을 지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닌데, 이 뚱뚱보 중년인은 모용봉에게 한 가지라도 더 빚을 지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 같아 보였다. 더구나 그런 뚱뚱보 중년인을 대하는 모용봉의 태도도 왠지 모르게 차갑게 느껴졌다. 뚱뚱보 중년인이 계속 모용봉에게 자신이 갚아야 할 빚이 세 가지라고 우기자 모용봉도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나 누가 보기에도 그것은 뚱뚱보 중년인의 말을 시인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문제로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기 때문임을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뚱뚱보 중년인은 모용봉의 태도를 자신의 말에 대한 수긍이라고 생각했는지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활짝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헤헤헤… 과연 모용공자님은 사리가 분명하신 분이군요. 조만간에 이 세 가지의 빚은 확실하게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모용봉은 더 이상 그와는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은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진산월은 뚱뚱보 중년인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귀하는 혹시 상인(商人)이 아니오?”

뚱뚱보 중년인은 비오듯 흐르는 땀을 연신 손수건으로 훔치며 메기입같이 커다란 입을 벌렸다.

“어? 그걸 어떻게 알았소?”

“귀하의 말투를 보고 짐작했소.”

“듣던 대로 진장문인은 아주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비상하구료. 진장문인이 본 대로 나는 장삿꾼이오.”

이번에는 진산월이 눈을 빛내며 되물었다.

“나에 대해 알고 있소?”

뚱뚱보 중년인은 다시 예의 괴상한 웃음을 흘렸다.

“우헤헤… 알고 말고. 진장문인은 종남파의 이십일대 장문인으로, 네 명의 사제들을 이끌고 이번 소림의 집회에 참석하지 않았소? 이곳에 오는 도중 용문에서 신목령의 고수를 격파하여 실력을 인정받은 것도 알고 있소.”

진산월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귀하가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소?”

“내 동생이 관련된 일인데 어찌 모를 수 있겠소?”

진산월은 더욱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귀하의 동생이 누구요?”

뚱뚱보 중년인은 목젖이 드러나도록 입을 있는대로 벌리며 우렁찬 웃음을 토해냈다.

“크헤헤헤… 내 동생은 석지명이라 하오. 듣자하니 얼마전에 진장문인의 일행에 합류했다고 하더군. 나는 그 녀석의 가장 큰형이오.”

하마처럼 뚱뚱한 중년인이 커다란 입을 벌리고 몸을 흔들며 웃고 있는 광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것이었으나, 진산월은 웃기는커녕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렇다면 귀하가 석가장의 십이지공자 중 대공자(大公子)인 석성(石星)이란 말이오?”

뚱뚱보 중년인은 토실토실하고 굵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계속 웃었다.

“그렇소. 천서(天鼠) 석성(石星)이 바로 나요.”

석성! 놀랍게도 이 뚱뚱하고 우스꽝스럽게 생긴 중년인이 강북에서 가장 부유한 석가장의 대공자였던 것이다. 석성은 단순히 석가장 십이지공자의 첫째일 뿐 아니라, 가주인 석곤에 못지 않은 이름난 상인이었다. 그는 십이지공자 중 가장 어린 나이에 도선출재의 관문을 통과하였고, 그 후로 이십 년 동안 크고 작은 사업을 모두 성공하여 아버지인 석곤에 못지 않은 부(富)를 쌓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석곤의 뒤를 이어 석가장을 잇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석성에 비하면 아직 도선출재의 관문조차 통과하지 못한 석지명은 그야말로 명월(明月) 앞의 반딧불 보다도 못한 존재에 불과했다. 진산월은 그에 대한 소문을 이미 오랫동안 들어왔기 때문에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자세히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알려진 바로는 석성은 어렸을 때부터 이재(理財)에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였고, 두뇌가 영민하고 계산이 정확하기로 십이지공자 중에서도 손꼽힌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석성이 이토록 뚱뚱하고 볼 품 없는 배불뚝이 중년인일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석성은 진산월이 자신을 유심히 살펴보자 이를 온통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일견 천진난만하고 우스운 모습이었으나, 진산월은 그렇게 웃고 있는 와중에도 그의 뺨에 파묻혀 있다시피 한 작은 두 눈이 칼날처럼 예리하게 빛나며 자신의 전신을 훑고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진산월이 석성을 관찰하는 것처럼 석성 또한 진산월을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석성은 갑자기 들고 있던 손수건을 양손으로 꽉 쥐어짰다. 그러자 흥건하게 적셔진 손수건에서 물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석성은 손수건을 꼭 짠 다음 다시 그것으로 턱과 목에 흐르는 땀을 닦기 시작했다. 지금은 계절이 가을을 넘어서는 중이라 해가 떨어진 다음에는 은근히 한기(寒氣)를 느낄만 한데도 이토록 땀을 비오듯 흘리는 것으로 보아 그는 몹시 특이한 체질의 소유자임이 분명 했다. 석성은 손수건으로 연신 땀을 훔치며 진산월을 향해 히죽 웃었다.

“지금 내가 너무 땀을 많이 흘린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소?”

진산월은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소.”

“하지만 나는 나보다 더 땀을 많이 흘리는 사람을 알고 있소.”

“그게 누구요?”

석성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반봉 혁리접이오. 그녀는 적어도 나보다 세 배나 더 많은 손수건을 가지고 있소.”

그말에 진산월은 내심 웃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반봉 혁리접은 혁리세가의 소공녀(小公女)로, 천하에서 가장 뚱뚱한 여인 중 한 사람이었다. 오늘의 대집회에서 진산월은 그녀를 처음 보았는데, 멀리서 보기에도 정말 비대하고 땀을 많이 흘리는 여인이었다. 하나 아무리 그래도 진산월은 그녀보다 석성이 더욱 뚱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석성은 이렇게라도 말하여 자신을 위로하고 싶었을 것이다. 진산월은 웃음을 참고 있는 와중에도 마음 한 구석으로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초대한 자리에 호적수와 빚쟁이를 동석시킨 모용봉의 의도가 적지 않게 궁금했던 것이다. 모용봉은 이들을 진산월에게 소개시키려고 일부러 부른 것일까? 아니면 그에게 또 다른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일까? 이유야 어찌 되었건 이번의 자리가 아주 특별한 자리임은 곧 분명하게 증명되었다. 왜냐하면 그때 다시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천천히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단봉공주였다. 그녀는 여전히 붉은 봉황이 수놓아진 궁장을 걸치고, 머리에는 붉은 망사를 쓰고 있었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르륵사르륵 하는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듣는 이의 가슴에 묘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은 마치 한 마리 붉은 봉황이 영롱하게 펼쳐진 깃털을 흔들며 다가오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녀는 방을 가로질러 모용봉의 옆으로 다가갔다. 석성이 쭈뼛거리며 무거운 몸을 일으켜 자리를 비켜주자,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모용봉의 오른쪽 자리로 가서 앉았다. 마치 애초부터 그곳이 자신의 자리였던 듯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진산월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한 표정이었으나, 속마음은 이상하리만치 씁쓸했다. 단순히 그녀가 모용봉의 옆에 앉은 것뿐인데도 그에게는 그녀가 허공을 훨훨 날아 모용봉의 가슴에 내려앉은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나란히 앉은 모용봉과 단봉공주는 누가 보기에도 완벽하게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두 사람의 외양 뿐만 아니라 풍기는 기질마저도 어딘지 모르게 비슷해 보였다. 단봉공주가 나타남으로 해서 장내의 공기는 미묘하게 바뀌어졌다. 그동안 어딘지 모르게 딱딱하고 어색했던 분위기가 왠지 모르게 부드럽고 생동감 있게 변한 것이다. 심지어는 석상(石像)처럼 무표정하기만 했던 유장령도 몇 차례 시선을 들어 단봉공주를 쳐다보고는 했다. 하나 망사 너머로 내비치는 그녀의 눈은 줄곧 모용봉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오늘 올 사람은 모두 온 건가요?”

그녀의 음성은 너무도 그윽해서 듣기만 해도 취해버릴 것만 같았다. 모용봉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한 사람이 오지 않았소.”

단봉공주는 그가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모용공자께서는 정말 찬성하시나요?”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 몰라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단지 모용봉만이 담담한 음성으로 조용하게 대답했을 뿐이다.

“그렇소.”

단봉공주는 흑요석(黑曜石)처럼 영롱한 눈으로 모용봉을 빤히 주시하며 다시 물었다.

“그에게는 몇 가지 안 좋은 소문이 있어요. 모용공자도 그걸 알고 있겠죠?”

“물론이오.”

“그런데도 찬성한단 말인가요?”

문득 모용봉의 눈이 가늘어지며 은빛 그물망사 사이로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하… 공주께서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소. 하지만 괜찮을거요.”

“공자께서 괜찮다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그의 직위는 어차피 한시(限時)적인 거요. 그가 설사 다른 엉뚱한 마음을 먹는다해도 그에게는 그것을 실행할 기회가 없을 것이오.”

단봉공주는 그의 말에 무언가를 깨달은 듯 더 이상 그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모용봉도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이 모두 입을 다물자 주위에 무거운 침묵이 드리워졌다. 그때 진산월이 모용봉을 향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확실히 강호에서 그는 때로는 거칠고 욕심이 많다고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리분별 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모용봉과 단봉공주의 시선이 모두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모용봉은 한동안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그라니 대체 누구를 말하는 거요?”

진산월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그야 물론 일장개천지 위지립을 말하는 거요. 두 분은 그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소?”

모용봉의 두 눈에서 두 가닥 실줄기 같은 안광이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모용봉은 이내 조용하게 웃었다.

“진장문인의 눈치는 몹시 비상하구료. 확실히 우리는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소.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소?”

“당금 무림에서 이번에 창설된 무림맹의 맹주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소. 그들 중 좋지 않은 소문이 있는 사람은 더더욱 그렇소.”

단봉공주는 한 차례 더 진산월을 힐긋 쳐다보다가 관심 없다는 듯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고, 모용봉은 진산월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며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진장문인의 예리한 추측에 경의를 보내는 바이오. 하지만 그 문제는 지금 꺼내기에는 복잡미묘한 점이 있으니 다음에 다시 거론하는 것이 어떻겠소?”

진산월도 굳이 모용봉을 난처하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짐작이 맞았는지 확인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도록 하시오. 그런데 여기서는 자기가 알아서 술을 따라 마시는 거요? 아니면 남이 따라줄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거요?”

모용봉의 눈이 조금 커지더니 이내 다시 가늘어졌다.

“하하… 진장문인이 술을 즐기는 줄을 미처 몰랐구료. 내가 한 잔 따라드리겠소.”

모용봉은 자신의 앞에 있는 술병을 들어 진산월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진산월은 술잔을 들어 잠시 향기를 맡고는 천천히 술잔을 들이켰다.

“좋은 술이군. 이름이 뭔지 알 수 있겠소?”

“이건 본가(本家)에서 직접 담근 술인데, 일점향(一點香)이라고 하오.”

진산월은 술잔을 든 채로 빙긋 웃었다.

“한 줌의 향기라… 정말 이름 그대로요. 술을 마신 후에 남아있는 향기가 아주 그윽하군.”

“한 잔 더 드시겠소?”

진산월은 사양하지 않고 다시 술을 마셨다. 일점향의 향기는 은은하며서도 달콤했지만, 술 자체는 상당히 독했다. 두 잔의 술을 마셨을 뿐인데도 진산월은 약간의 취기를 느꼈다. 그래서 모용봉이 세 번째로 술병을 내밀었을 때,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된 것 같소. 나는 사실 그다지 주량이 센 편이 아니오. 나는 술 자체보다는…”

진산월의 말이 여기까지 이어졌을 때, 갑자기 누군가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술 자체보다는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즐기는 편이지.”

그와 함께 한 사람이 천천히 방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을 보자 진산월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키가 큰 회의인(灰衣人)이었다. 특이하게도 머리를 길게 묶어 허리로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더욱 훤칠하게 느껴졌다. 회의인은 양 손을 뒷짐 진 채 두 다리를 거의 움직이지 않고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줄을 묶고 허공을 미끄러져 오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것은 암향부동(暗香不動)이라는 상승의 신법이었다. 하나 진산월이 놀란 것은 회의인의 신법이 아니라 그의 정체 때문이었다. 회의인은 다름 아닌 악자화였던 것이다. 종남파를 뛰쳐나와 신목령의 고수가 된 악자화가 뜻밖에도 이곳에 나타나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악자화는 싸늘한 눈으로 진산월을 쏘아보았다.

“내가 경고 했을텐데. 더 이상 우리의 일에 개입하면 좋지 않을 것이라고.”

진산월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소.”

악자화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빛이 어찌나 차갑던지 주위가 삽시간에 차가운 빙굴(氷窟)로 화해 버린 것 같았다.

“그런데도 계속 우리의 일에 끼어드는 거냐?”

진산월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한결 차분해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봉황금시의 일은 다분히 우발적인 것이었소. 그리고 이제 그 문제는 물건이 주인을 찾아감에 따라 종료되었다고 생각하오.”

“내 말은 그것이 아니다. 일전에 너는 이수 강변에서 일곱째와 겨룬 적이 있지?”

악자화가 묻는 것은 봉황금시를 놓고 벌인 신목칠호 심옥당과의 결전을 말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그런 적이 있었소.”

“일곱째는 성격이 오만하고 너무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어 너에게 낭패를 보았다고 하더군. 평상시라면 너는 그 일로 신목령의 추살령(追殺令)을 받았을 것이다.”

만약 진산월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이 말을 들었다면 대번에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을 것이다. 신목령의 추살령은 강호에서는 염라대왕의 최명부(催命簿)와 같은 의미로 여겨졌다. 아직까지 강호에서 신목령의 추살령을 받고 살아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 진산월은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 말은 내게 아직 추살령이 발동하지 않았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악자화의 날카로운 눈빛이 화살처럼 진산월의 얼굴에 꽂혔다. 악자화는 한참동안이나 진산월을 뚫어지게 쏘아보다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일곱 째는 자신의 수치를 혼자의 힘으로 씻고자 한다. 조만간 그가 너를 직접 찾아올 것이다.”

진산월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띄고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신목칠호 심옥당과의 결투에서 진산월은 용케 기병(奇兵)의 묘(妙)를 살려 승리를 거두었으나, 실질적인 실력은 심옥당이 오히려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악자화의 말대로 심옥당이 패한 것은 그가 지나치게 자만하여 진산월을 경시했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가 다시 찾아온다면 처음과 같은 실수는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진산월은 과연 심옥당을 정당한 실력으로 물리칠 수 있을 것인가? 머리 속은 복잡했으나 진산월은 악자화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알려 주어서 고맙소. 그가 찾아온다면 좋은 말로 타일러서 돌려 보내겠소.”

진산월의 농담기 섞인 말에도 악자화는 전혀 웃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진산월을 쳐다보지 않고 찬바람이 날 정도로 냉랭하게 몸을 돌렸다. 분명히 그는 진산월의 앞에 있었는데, 몸을 돌린 순간 어느 새 모용봉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야말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절륜한 신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도 모용봉는 물론이고 그 옆에 앉아 있는 단봉공주도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이토록 뛰어난 악자화의 신법도 대단치 않게 보이는 것일까? 오히려 모용봉은 조용한 미소까지 보내는 것이었다.

“어서 오시오. 기다리고 있었소.”

이제 보니 오늘 아직 오지 않았다는 마지막 사람은 악자화임이 분명했다. 모용봉은 대체 무슨 일로 악자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 의문은 악자화의 다음 말로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었다.

“사부님의 말씀을 전하겠소. 본령은 이번 무림맹 창설에 관해 전혀 관심이 없고, 개입하고 싶지도 않소. 무림맹이 창설되면 그 뿐, 본령은 지금처럼 독자적인 길을 갈 것이오.”

모용봉은 이미 그러리라고 짐작한 사람처럼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들었소. 존자(尊子)께 안부를 여쭌다고 전해 주시오.”

악자화는 이것으로 용건이 끝났는지 추호도 머뭇거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신목령의 졸개란 말이지?”

무언가에 억눌린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 이빨과 이빨을 악다물고 한 자 한 자 씹어 삼키는 듯한 음성이었다.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그 음성이 들려온 곳으로 돌려졌다. 그 음성의 주인은 뜻밖에도 지금까지 심드렁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유장령이었다. 악자화의 칼날같이 예리한 시선이 유장령의 전신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그의 입가에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마치 유령의 미소처럼 냉혹하고 차가운 미소였다.

“누군가 했더니 화산파의 독수리인지 참새인지 하는 작자로군.”

항상 냉정하고 실언(失言)을 하지 않는 악자화로서는 드물게 보는 비웃음이 담긴 소리였다. 유장령은 여전히 처음의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심지어 텅빈 허공을 응시하는 눈빛조차 그대로였다. 그런 상태에서 입술이 거의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예의 억눌린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신목존자(神木尊子)라면 몰라도 신목령의 일개 수하 따위가 함부로 고개를 뻣뻣이 하고 내 앞을 지나가는 꼴은 두고 볼 수가 없다.”

악자화의 눈빛이 한층 더 서늘해졌다.

“나도 마찬가지야. 화산파의 허접쓰레기 같은 검법 몇 가지를 익혔다고 우쭐대는 애송이가 거들먹거리며 앉아 있는 꼴은 도저히 눈 뜨고 못 보겠군.”

유장령은 앉아 있는 상태에서 천천히 오른손을 늘어뜨렸다. 그의 손은 자연스럽게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철검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그렇다면 그 눈을 영원히 뜨지 못하게 해주지.”

단순히 검집을 잡았을 뿐인데도 갑자기 주위의 공기가 차갑게 변하며 금시라도 터질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넘쳐흘렀다. 악자화 또한 뒷짐 진 두 손을 천천히 풀었다.

“화산파의 검법이 얼마나 시시한지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주겠다.”

두 사람 사이에 맹렬한 기운이 휘몰아치며 탁자 위에 있던 음식과 술병들이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아직 누구도 손을 쓰고 있지 않았지만, 그들의 전신에서 뿜어나오는 강력한 기세들이 허공에서 마구 충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삽시간에 흉흉한 살기가 장내를 가득히 뒤덮었다. 단봉공주는 장내의 살벌한 광경에도 별로 흥미가 일지 않는 듯 무심한 모습이었고, 이와는 반대로 석성은 연신 땀을 닦으면서도 두 눈을 정신없이 굴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진산월은 의외로 담담한 표정이었다. 하나 그의 손바닥에 땀이 흥건히 고여 있다는 것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고오오오…

주위의 공기가 요동을 치며 동시에 칼날같이 예리한 기운들이 맹렬하게 솟구쳐 올라왔다. 이제 조만간에 경천동지할 격전이 벌어지게 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내가 너무 서운하니 술이라도 한 잔 받으시오.”

돌연 모용봉이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악자화 쪽을 향해 슬쩍 던졌다. 공교롭게도 모용봉이 유장령의 우측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던진 술잔은 악자화와 유장령의 중간 지점으로 날아가게 되었다. 술잔은 이상하리만치 완만하게 허공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매달린 채 미끄러져 가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은 그들이 뿜어내는 기세(氣勢)로 인해 폭발 직전의 화약고처럼 가공할 기운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술잔이 아니라 강철로 만든 금강동인(金剛銅人)이라 해도 그 기운에 부딪히면 산산이 부서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술이 가득 담긴 그 술잔이 허공을 유유히 날아 그들의 중앙을 통과하는 순간, 그토록 무서운 기세로 휘몰아치던 기운들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가운데를 지나친 술잔의 속도가 갑자기 빨라지며 쏜살같이 악자화에게 다가갔다. 그때까지도 악자화는 그 자리에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막 술잔이 그의 몸에 닿기 직전, 악자화는 불쑥 손을 내밀어 술잔을 잡았다.

척!

악자화는 물끄러미 자신의 손안에 잡힌 술잔을 내려다 보았다. 삼 장 가까이 허공을 날아온 술잔 속에는 여전히 술이 가득 담겨진 채 찰랑거리고 있었다. 한동안 술잔을 응시하던 악자화는 돌연 단숨에 술잔을 들이켰다. 악자화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가늘어졌다가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좋은 술이군.”

악자화는 짧게 중얼거리며 술잔을 옆에 있는 탁자 위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려 장내를 벗어났다.
그의 훤칠한 신형이 사라지는 동안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그와 한바탕 드잡이질을 하지 않으면 참지 못할 것만 같았던 유장령마저 묵묵히 침묵을 지킨 채 떠나는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악자화의 몸이 방문을 넘어가는 순간,

“파스스…”

악자화가 탁자 위에 내려놓은 술잔이 먼지처럼 잘게 부서져 버렸다.
사실 술잔은 악자화와 유장령의 중간지점을 통과하는 순간에 그들의 몸에서 발출된 가공할 경력으로 인한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이미 완전히 부서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그 형태를 잃지 않았던 이유는 술잔을 내던질 때 담겨져 있던 모용봉의 공력이 그만큼 심후했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부서진 술잔에 들어 있는 술잔이 쏟아지지 않은 것도 놀랍지만,
그런 술잔을 손으로 받아들고 술을 들이킨 악자화의 실력도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멀어지는 악자화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진산월의 마음 속에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악자화는 그와 동문수학(同門修學)한 사이였다.
적지 않은 세월동안 그들은 서로 경쟁 관계에 있었으면서도 나름대로는 친밀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호에 출도하여 악자화를 두 번째 만난 지금, 진산월은 자신과 그와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음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히 그와의 사이가 소원해 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종남파에 있을 때, 악자화의 실력은 비록 진산월보다 뛰어나기는 했으나 진산월이 무리를 한다면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즉, 두 사람의 실력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몇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악자화는 진산월이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절정고수가 되어
있었다.
처음의 만남에서도 그걸 느꼈지만, 이번에야말로 진산월은 자신의 부족함과 그의 일취월장(日就月將)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검을 뽑지도 않은 상태에서 조금 전과 같은 강력한 기세를 발휘한다는 것은 평범한 고수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한 무형지기(無形之氣)는 평생을 검과 함께 보내온 노검사(老劍士)도 발출하기 힘든 것으로, 진산월은 물론 사부인 태평검객 임장홍조차도 감히 도달하지 못한 경지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강력하게 발출된 무형지기를 자유자재로 거두어 들인다는 것이었다.
무형지기를 마음대로 수발(收發)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절정의 검객이 되어 있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악자화는 까마득히 아득한 곳에 위치한 머나먼 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진산월은 악자화의 그러한 성장을 기뻐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야릇한 심정이 되었다.
의당 기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종남파의 무공에 대한 회의(懷疑)와 함께 자신은 어쩌면 영원히 악자화를 넘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떠오르고 있었다.
당장의 뒤쳐짐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러한 격차가 세월이 흐를수록 좁혀지기는커녕 더욱 커질 것이라는 것에 있었다.
신목령의 무공은 종남파로서는 도저히 넘볼 수 없는 고강한 것이란 말인가?
그뿐이 아니었다.
앉아 있는 상태에서 서 있는 악자화에 조금도 뒤지지 않고 맞선 유장령의 기세는 더욱 놀라운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단지 술잔 하나만으로 두 절세 고수의 경력을 제어시킨
모용봉의 무공은 지금의 진산월로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이 진산월보다 불과 몇 살 차이나지 않는 젊은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진산월이 느끼는 좌절감이 더욱 컸는지도 몰랐다.

‘언젠가는…’

진산월은 속으로 조용히 뇌까렸다.

‘언젠가는 본파의 무공으로 이들을 능가하고 말리라.’

하나 과연 그 날이 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진산월은 예전과 같은 확고한 자신이 없었다.
자신은 물론 최선을 다할 것이다.
종남파의 무공을 완벽히 익혀 강호를 군림할 수 있을 때까지 그는 자신의 모든 능력과 힘을 다 기울일 것이다.
그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나 과연 최선을 다하는 것 만으로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그 날은 영원히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강호에 출도한 후 처음으로 진산월은 자신의 꿈에 대해,
종남파의 미래에 대해 희미한 불안감을 느꼈다.

묵묵히 앉아 있던 유장령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서니 그의 키는 생각만큼 크지 않았다.
오히려 진산월보다 조금은 왜소하고 깡말라 보였다.
그런데도 그를 보는 사람은 그의 체구가 작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두 팔이 유난히 길고, 허리가 한 자루 창날처럼 꼿꼿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허리춤에 아무렇게나 매달린 채 흔들거리고 있는 철검이 이상하게도 보는 사람의 마음에 묘한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그 철검은 비록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일단 그것이 검집에서 뽑혀 나오면 천하의 어떤 신검(神劍)보다 더욱 날카롭고 무서울 것이 분명했다.
모용봉은 여전히 그 의자에 앉은 채로 조용히 물었다.

“가려는거요?”

유장령의 고개가 거의 알아차릴 수도 없을 만큼 살짝 끄덕여졌다.
웬일인지 유장령은 조금 전에 악자화와의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는 약간 의기소침해 진 것처럼 보였다.
모용봉이 술잔 하나로 자신과 악자화의 경력을 소멸시킨 것이 적지 않게 충격을 준 모양이었다.
유장령은 누가 뭐래도 현재 화산파에서 가장 촉망받는 후기지수였고, 강호의 젊은 층 고수들 중에서 선두에 서 있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런 만큼 자신의 검술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 자부심이 오늘 여지없이 구겨지고 만 것이다.
유장령은 모용봉은 물론이고 다른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묵묵히 걸음을 옮겨 장내를 벗어났다.
그는 비록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중인들은 모두 그가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하나 상처란 언제고 아무는 법.
마음 속의 상처가 아물었을 때 유장령은 지금보다 한층 더 강해져 있을 것이다.
유장령마저 떠나자 장내의 분위기는 더욱 무겁고 어색하게 가라앉았다.
진산월은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자신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도 이만 가봐야겠소.”

모용봉은 그의 그런 행동을 예상한 듯 담담하게 대꾸했다.

“오늘 대접이 소홀한 것 같아 아쉽소. 다음에 다시 만나길 기대하겠소.”

진산월은 그의 대답이 다분히 의례적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몸을 돌렸다.
의식적으로 그는 단봉공주 쪽으로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설사 단봉공주를 쳐다보았더라도 그는 실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단봉공주는 그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허공을 응시하며 무언가 상념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때 석성도 덩달아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어이구… 다들 돌아가는 분위기니 저도 이만 사라지겠습니다.”

“좋도록 하시오.”

석성은 좀처럼 움직여질 것 같지 않은 굵은 허리를 숙여 모용봉과 단봉공주를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그럼 두 분은 안녕히 계십시오.”

이어 땀으로 흥건히 젖은 손수건으로 연신 목 주위를 문지르며 진산월의 뒤를 따라 부지런히 걸음을 움직였다.
제딴에는 열심히 걷는 것 같았지만, 그의 행동은 뚱뚱한 몸집 만큼이나 굼떠서 진산월이 밖으로 나갈 때까지도 대청을 채 절반도 지나지 못하고 있었다.
석성은 모용봉과 단봉공자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더욱 빨리 걸어갔다.
마치 진산월이 사라지고 자기 혼자 이곳에 남게 되는 것이 두려운 듯한 모습이었다.

“헉헉…”

입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의 커다란 몸이 문을 지나 사라지자 장내가 갑자기 텅 빈 듯한 착각이 들었다.
조금 전만 해도 여러 명의 다채로운 인물들이 앉아 있던 실내에는 단지 모용봉과 단봉공주만이 동그마니 남게 되었다.
한동안 실내에는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상념에 잠겨 있는 듯 묵묵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단봉공주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공자는 그들 중 장래에 공자의 적수가 될만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모용봉은 망사 아래로 빙긋 웃었다.

“물론 있소. 한 사람.”

단봉공주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요?”

모용봉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유장령이오.”

단봉공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목오호는요? 조금 전에는 그의 기세가 유장령보다 조금 더 세다고 느꼈는데…”

“물론 조금 전에 그들이 겨루었다면 신목오호가 조금 더 우세했을 거요. 하지만 신목령의 휘하는 결코 내 적수가 될 수 없소.”

단봉공주는 그에게 묻는 시선을 던졌다.
모용봉은 특유의 침착하고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신목존자는 마음이 넓은 인물이 아니오. 그는 아무리 아끼는 제자라 할지라도 결코 자신의 최고 절학(絶學)을 전수해 주지 않을 거요. 따라서 그들의 성장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소.”

“……!”

“하지만 유장령은 다르오. 그는 화산파가 총력을 기울여 키우는 인물이기 때문에 머지않아 그들의 최고 수법을 배우게 될 거요. 그의 재질에 신검 조일화의 정수(精粹)가 전해진다면 충분히 나와 자웅을 겨루어 볼 수 있소.”

단봉공주는 내심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신검 조일화는 이미 전설(傳說)이 되어 버린 이름이었지만, 또한 가슴 설레는 신화(神話)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는 화산파가 배출한 사상 최고의 검객(劍客)으로, 백 년 전의 천하제일고수였으며 지금까지도 검(劍)으로는 무적(無敵)이었다고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비록 조일화의 몸은 이미 오래 전에 한 구의 해골이 되었지만, 그가 남긴 신검유보(神劍遺譜)는 화산파의 가장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다는 소문이 강호에 자자했다.
신검유보는 조일화가 구대문파를 굴종시키려다 실패한 후 죽기 직전의 심득(心得)을 적은 것으로, 그것을 익힌 자는 군림천하 할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하나 조일화가 죽은 후 백 년이 넘는 세월동안 화산파에서는 그에 비견될 만한 고수가 나오지 않았다.
그가 남긴 신검유보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초인적인 인내력과 함께 천고(千古)의 재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화산파에서는 십 년에 한 번씩 최고의 재질을 지닌 제자로 하여금 그 검보(劍譜)를 익히게 했으나, 그들 중 누구도 그것을 완성한 사람은 없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오히려 주화입마(走火入魔)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운 좋게 살아남은 몇몇 사람들도 의기(義氣)가 꺽이고 심한 절망과 좌절 때문에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스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화산파에서는 유장령에게 마지막 기대를 하고 있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오늘의 일이 유장령에게는 좋은 경험이 되었을거요. 그가 자만하지 않는다면 오년 내로 그는 조일화의 진전(眞傳)을 이어받을 수 있을 거요.”

단봉공주는 한동안 곰곰히 그의 말을 되새겨 보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종남파의 장문인은 어때요?”

모용봉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안되오.”

“왜 그런가요?”

“그는 비록 좋은 인재이긴 하지만 성격상으로 약간의 문제가 있소.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소.”

“그게 무엇인가요?”

“그가 바로 종남파의 장문인이라는 거요.”

모용봉의 말은 쉽게 알아차리기 힘들었지만, 다행히 단봉공주는 그의 말 속에 숨은 뜻을 파악해냈다.

“종남파의 무공으로는 아무리 익혀도 절정에 이를 수 없다는 건가요?”

모용봉은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그들의 무공으로는 절대로 대성(大成)할 수 없소.”

“그가 만약 다른 문파의 무공을 익힌다면?”

모용봉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요. 장문인이라는 신분 때문에라도 그는 종남파 이외의 무공은 익히려 하지 않을 거요.”

단봉공주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그의 한계겠죠.”

“그렇소. 종남파는 모처럼 좋은 장문인을 만났지만, 태생의 한계를 극복할 수는 없소.”

단봉공주는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만약 그가 한계를 극복하게 된다면?”

모용봉은 잘라 말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요.”

그의 단정적인 말투에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 후, 모용봉은 예의 조용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된다면… 그때 비로소 나는 적수다운 적수를 갖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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