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5권 촉로지난(蜀路之難)편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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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5권 촉로지난(蜀路之難)편 : 2화


제41장. 사천행로(四川行路)

진산월이 숙소에 도착한 것은 동쪽 하늘이 조금씩 밝아오고 있는 새벽 무렵이었다. 숙소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차가운 새벽 공기가 그의 몸을 따라 화악 실내로 밀려 들어갔다. 그 공기는 이내 한 사람의 몸에 부딪히며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진산월은 무심코 대청 안으로 들어서다 우뚝 멈춰섰다. 채 닫히지 않은 문틈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새벽의 여명(黎明)이 그의 얼굴에 깊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었다.

“사매. 아직 자지 않고 있었어?”

뜻밖에도 대청 안의 구석진 의자에 임영옥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던 것이다. 흐릿한 어둠 속에 드러나는 그녀의 얼굴은 약간 창백해 보였으나, 그것이 그녀의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과 묘하게 어울려 보는 사람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짜릿한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었다. 임영옥의 별빛처럼 맑은 눈빛이 진산월과 마주쳤다.

“사형이 너무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아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게 아닌가하고 생각했었어요.”

소근거리는 듯한 음성. 그 음성을 듣자 진산월은 마음이 한없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진산월은 그녀에게 다가가며 빙그레 웃었다.

“내가 길이라도 잃어 버렸을까 봐 걱정했던 거야? 사매는 바보로군. 내가 길눈이 얼마나 밝은 지는 사매도 알잖아?”

임영옥은 자신의 앞에 앉는 진산월의 얼굴을 응시하며 물었다.

“정말 별 일 없었어요?”

“그래. 철이 든 후부터는 나도 내 한 몸은 그런대로 지킬 수 있게 되었지.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잠도 안자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달빛이 너무 밝아서 잠이 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형이 돌아오면 이야기나 할까 하고 생각했던 거에요.”

진산월은 나직히 혀를 찼다.

“쯧… 그런데 내가 너무 늦게 와 버렸군. 아무튼 나는 정말 꼭 필요할 때는 쓸모가 없는 밥통이라니까.”

갑자기 진산월은 몸을 숙여 그녀에게 얼굴을 바짝 갖다대며 소근거렸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말하고 싶은게 있으면 이야기 해. 내가 모두 들어줄테니.”

임영옥의 얼굴에 잠깐 웃음이 스쳤다.

“바보. 그런건 때가 있는 거에요. 나는 이미 사형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지난 밤동안 몽땅 다 해버렸어요.”

진산월도 그녀를 따라 활짝 웃었다.

“사매 마음속으로 말이지? 하지만 사매가 나에게 한 마디 안했어도 나는 사매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있지.”

“그래요?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요?”

진산월의 두 눈이 그녀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숨결이 코 끝에 닿을 정도가 되도록 그녀에게 바짝 얼굴을 갖다댄 진산월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임영옥은 피하지 않고 그의 눈 속을 들여다 보았다. 한없이 영롱하게 반짝이는 그녀의 눈망울 속에 진산월의 모습이 선명하게 투영되었다. 진산월은 그녀의 눈 속에서 웃고 있었다.

“사매가 말을 안해도 내가 알 수 있듯이, 내가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사매도 알고 있잖아….”

진산월은 말을 하는 도중에 야릇한 충동을 느낀 듯 입술을 내밀었다. 임영옥의 얼굴에 언뜻 홍조가 피어올랐다. 막 진산월의 입술이 그녀에게 닿으려는 순간, 그녀의 뱅어같이 고운 손가락 하나가 그의 입술을 막았다.

“사매…”

진산월이 뜨거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임영옥의 입술과 그의 입술 사이에는 그녀의 손가락 하나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임영옥은 그런 자세로 그의 눈을 쳐다보더니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오른손을 뒤로 감추고 있던데 이제 오른손을 내놔 보세요.”

진산월은 허를 찔린 듯 한 줄기 낭패스런 표정을 지었다.

“손가락을 치우면 보여주지.”

“심술쟁이…”

그녀의 입가에 언뜻 미소가 어리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 그녀의 손가락이 마술처럼 없어졌다. 진산월이 급히 입술을 내밀었으나, 그때는 이미 그녀의 얼굴은 저쪽으로 가 있었다. 진산월로서는 살짝 그녀의 입술이 닿은 촉감을 느낀 것 만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진산월은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그녀의 입술이 닿았던 자신의 입언저리를 매만졌다. 아주 잠깐 동안의 접촉이었지만, 그 순간의 짜릿함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조금 전보다는 한결 단호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오른손을 내놓으세요.”

진산월은 큰 누나에게 다친 상처를 보여주는 어린 소년처럼 히죽 웃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가 대충 옷자락을 찢어 동여맨 탓에 상처에서 흐른 피가 반쯤 배어나와 있었다. 임영옥은 조심스런 동작으로 동여매어진 옷조각을 풀었다. 상처를 들여다 본 그녀의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심하군요. 당분간 검을 쥐지 못할 것 같아요.”

“이삼일이면 돼. 사매도 알잖아. 난 다쳐도 빨리 아무는 체질이라구.”

진산월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그녀의 얼굴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호구는 한 번 찢어지면 쉽게 아물지 않아요. 설사 아문다 해도 충격을 받으면 다시 상처가 벌어지고 말거에요.”

“괜찮다니까. 다친 살에 새 살이 돋아나면 더욱 단단해 진다고 하잖아.”

그녀는 일어나서 방안으로 들어가더니 금창약을 가지고 나와 그의 상처에 발라주었다. 채 아물지 않은 상처에 약이 닿자 몹시 쓰라렸으나 진산월은 조금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오히려 빙긋 웃었다.

“이렇게 사매의 치료를 받고 있으니 옛날 생각이 나는군. 기억 나? 내가 처음 다쳤을 때 사매가 나를 고쳐주었잖아.”

“잊을 리 있겠어요? 사형이 내 앞에서 묘기를 보여준다고 까불다가 뒤통수를 땅에 쳐박았잖아요.”

“하하… 그래, 맞아. 사매에게 멋지게 보일 욕심에 아직 익숙하지도 않은 초식을 펼치다가 그렇게 됐지. 그때도 꽤 아팠는데, 사매의 손길이 닿자 금새 통증이 가시더라구. 지금처럼 말이야.”

임영옥은 그의 상처를 깨끗한 붕대로 잘 동여매며 피식 웃었다.

“사형의 능청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군요. 그때도 아파 죽겠으면서도 겉으로는 히죽히죽 웃었죠. 그래서 내가 머리에 붕대를 매면서 이렇게 했었죠.”

“아야!”

진산월이 갑자기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가 붕대를 동여매던 손에 힘을 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녀는 금새 손길을 늦추었으나 진산월은 조금전과 같은 느긋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쩔쩔 맸다.

“사매의 심술도 여전하군. 그때도 사매가 붕대를 세게 매는 바람에 거의 죽는 줄 알았었는데…”

진산월은 임영옥이 매어준 오른손을 이러저리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사매의 붕대매는 솜씨는 정말 일품이란 말이야. 단단하면서도 전혀 불편하지 않군.”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다치게 되었어요?”

진산월은 히죽 웃었다.

“여자를 잘못 만나서 그래.”

임영옥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게 무슨 말이죠?”

진산월은 자신이 부상을 입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으나, 그의 말을 듣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점차로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진산월의 말대로라면 종남파의 장문인인 그가 서장에서 온 여고수 하나를 당해내지 못하고 손아귀가 찢어지고 말았다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그런 여고수를 물리친 사람이 다름 아닌 일개 호위 무사라니… 진산월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남보기 부끄러워서라도 이런 일을 태연히 이야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진산월은 조금도 숨기지 않고 모두 말해 주었다. 임영옥은 그의 말이 모두 끝나자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희목염이라는 여자를 물리친 사람이 누구인지 알겠군요. 사형도 짐작하죠?”

“그래. 아마 그는 절정도(切情刀) 배민(裵旻)일거야.”

“내 생각도 그래요. 사랑했던 여자 때문에 엄청난 빚을 지고, 그 빚을 갚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팔았다는 배민 말고 그런 사람이 있을리 없죠. 그리고 호반을 상대했다는 그 세 명은 낙양삼검(洛陽三劍)일거에요.”

“낙양삼검? 친구를 위해서라면 끓는 물 속에라도 들어간다는 낙양의 그 세 호걸들 말이야?”

“그래요. 그들은 배민의 둘도 없는 친구들이라 배민이 석성의 호위 무사가 되자 자청해서 석성의 밑으로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그렇군. 어쩐지 그들의 검술도 예사 솜씨가 아니었어. 그들은 일부러 호반에게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 같았거든.”

낙양삼검은 낙양 일대는 물론이고 하남성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들이었다.

그들 세 명의 검객들이 진짜 낙양삼검이었다면, 그들 중 어느 누가 나서도 호반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강호에서의 신분과 지위로 남의 밑에 들어간다는 것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그들은 친구를 위해서 기꺼이 그렇게 한 것이다.

“강호란 확실히 묘하단 말이야. 한없이 무정(無情)한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언제나 정(情)이 흐르고 있지.”

진산월의 말에 임영옥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문제는 때때로 그 정이 변하여 한(恨)이 된다는 것이죠…”

진산월은 묵묵히 그녀를 쳐다보다가 붕대를 맨 오른 손을 내밀어 그녀의 고운 손을 움켜잡았다.

“우리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임영옥도 그를 올려보았다. 잔잔한 정이 어린 눈빛이 서로 교차되었다. 조금씩 밝아오는 새벽 빛이 그녀의 얼굴에 비추이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뿜어나왔다. 진산월이 그녀의 몸을 끌어안자 그녀는 한 마리 작은 새처럼 그의 넓은 품속으로 들어왔다. 진산월은 향기로운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으며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듯 힘주어 말했다.

“진정한 정(情)이란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변하지 않는 법이거든.”

진산월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을 때, 이미 대청 안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날 늦잠을 자다니 장문사형 답지 않군요.”

낙일방이 히죽 웃으며 진산월을 향해 다가왔다. 그러다 진산월이 우측 손에 붕대를 매고 있는 것을 보고는 안색이 변해 소리쳤다.

“어? 장문사형, 다치셨어요?”

낙일방의 외침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진산월의 손으로 향했다. 진산월은 피식 웃으며 낙일방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

“녀석. 쓸데없는 일에는 눈도 밝구나. 별로 심한 건 아니니 신경 쓸 것 없다.”

“하지만…”

낙일방이 가벼운 상처가 아닌 것 같다고 말하려 했으나, 진산월은 이미 대청 밖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오늘은 날씨도 좋은 것 같은데 여기서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모두 나가서 신선한 아침 공기나 마시도록 하자.”

중인들은 서로 멀뚱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하나 둘씩 밖으로 나왔다. 가을 하늘은 한없이 청명(淸明)했다. 숭산의 시릴 듯 파란 가을 하늘이 눈을 찌르자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차갑고 신선한 공기를 폐 속 깊숙이까지 가득히 들어 마시자 무슨 일이 닥쳐도 능히 해치울 것 같은 자신감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진산월은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눈동자가 빛나는 것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이제 다들 준비가 된 것 같구나. 조금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아침 식사를 하고 슬슬 움직여 보도록 하자.”

식사를 하자는 말에 낙일방은 물론이고 평소 심술을 잘 부리던 응계성도 한결 표정이 밝아졌다. 예나 지금이나 출출할 때 주루를 찾는 것은 가슴 설레면서도 흥겨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모두 희희낙락하여 주루가 밀집해 있는 초조암 앞의 공터로 걸음을 옮겼다. 진산월은 그들에 조금 뒤쳐져 걷다가 슬쩍 상원건의 곁으로 다가갔다.

“상대협.”

상원건은 진산월이 자신에게로 다가올 때부터 그가 자신에게 무언가 용무가 있는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목소리를 죽여 나직하게 물었다.

“내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소?”

“상대협은 감숙 일대에서 주로 활동하셨으니 서장의 무림계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겠지요?”

상원건은 진산월이 묻는 의도를 몰라 궁금한 생각이 들었으나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환하게 꿰뚫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어느 정도는 알고 있소.”

“그렇다면 혹시 홍갈자 희목염이란 여자를 알고 계십니까?”

상원건은 흠칫 하는 눈으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서장의 유명한 고수들인 십육사의 일인으로, 무음비도(無音飛刀)의 명수요. 그런데 진장문인이 그녀를 어떻게 알고 계시오?”

십육사가 비록 서장에서는 우는 아이의 울음도 그치게 할 정도로 대단한 명성을 날리고 있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장에 국한된 이야기였다. 중원의 고수들은 대체로 서장이나 신강(新疆)의 고수들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쪽 무림계의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했다. 진산월은 조용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제 우연히 그녀의 무음비도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상원건의 시선이 진산월의 붕대를 감은 손으로 향했다.

“그럼 혹시 그 상처도…”

상원건은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자칫 자신의 물음이 진산월에게 커다란 결례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스스럼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녀의 비도는 정말 무섭더군요. 그녀가 날린 여덟 개의 비도에 손이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진산월이 부끄러워 하거나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당당하게 사실을 밝히자 상원건도 한결 마음이 개운해져서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희목염의 무음비도는 서장 일대에서도 제대로 받아내는 사람이 없는 형편이오. 몇 년 전에 대과벽(大戈壁) 일대를 주름잡던 회랑단(灰狼團)의 회의칠랑(灰衣七狼) 일곱 사람도 그녀의 비도를 당해내지 못하고 모두 쓰러지고 말았소.”

진산월은 회의칠랑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이름을 어렴풋이나마 들은 적이 있었다. 회랑단은 장성(長城) 너머에서는 상당히 널리 알려진 도적 집단이었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모두 일곱 사람인데, 하나같이 짙은 회의를 즐겨 입고 다니며 인명(人命)을 마구 살상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일곱 마리의 늑대, 칠랑(七狼)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아 세인들의 의혹을 불러 일으켰었는데, 그들이 모두 희목염의 손에 쓰러졌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 상원건은 희목염이 회의칠랑도 이긴 무서운 고수이니 그녀에게 부상당한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니라는 뜻에서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하나 그렇다면 그런 희목염을 단지 몇 번의 칼질만으로 놀라 도망치게 한 절정도 배민의 무공은 또 얼마나 대단한 것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런 배민조차도 일개 상인의 호위 무사밖에 되지 않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이래저래 진산월로서는 입맛이 쓸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조금도 얼굴을 붉히거나 안색이 변하지 않고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십육사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습니까?”

상원건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중간 이상은 아닐 것이오.”

“그렇습니까?”

“그녀의 십육사에서의 서열은 열 두 번째인가 열 세 번째로 알고 있소. 물론 십육사의 서열이 순수하게 무공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녀의 무공이 십육사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하오.”

희목염의 비도는 진산월로서는 좀처럼 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비도의 소유자 보다 강한 고수가 열 명이나 있다는 십육사라는 인물들에 대해 호기심이 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십육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십육사란 사실 신강과 청해(靑海), 서강(西康) 일대에서 활약하는 사파(邪派)의 고수들 중 가장 명성이 알려진 열여섯 사람을 통칭하는 이름이오. 그래서 그들의 나이나 지위, 실력 등은 굉장히 판이하오.”

진산월이 그의 말을 경청하겠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자신을 주시하자 상원건은 한 차례 헛기침을 한 후 말을 이었다.

“그들 중 가장 연장자인 서천노사(西天老邪)는 거의 백 세가 넘는 나이에 무공 또한 신(神)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명실상부한 신강 제일의 고수요. 그에 비해 십육사 중 가장 젊은 탁극(卓剋)은 나이로 보아 그의 손자뻘도 되지 않을 거요. 하지만 탁극은 한 자루 혈린도(血鱗刀)로 자달목(紫達木) 일대를 완전히 석권하고 있는 무서운 고수로, 십육사에서의 서열은 다섯 번째라고 하오. 이런 식으로 십육사는 다채로운 인물들이 마구 뒤섞여 있기 때문에 그들간의 우열을 가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오.”

“……!”

“개중에는 은거지에 칩거한 채로 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자들도 있어서 서장 무림에서도 십육사의 정체를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소. 나도 그들 중 가장 이름이 널리 알려진 열 명 정도의 인물들만을 알고 있을 뿐이오.”

진산월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무공도 다르고 지역이나 배분도 판이한 인물들이 십육사라는 이름으로 함께 불리우고 있다는 게 정말 신기하군요. 그것에 특별한 내력이라도 있습니까?”

“그렇소. 사실 십육사란 이름을 처음 만들어낸 사람은 서장 제일의 지략가라는 천애치수(天涯痴秀) 단목초(段木焦)요. 오년 전, 단목초는 서장 무림에서 중원의 사마구봉(四魔九峯)에 견주어도 될만한 고수가 누구냐는 친한 친구의 물음에 십육사와 십이기(十二奇) 정도면 충분히 그들과 자웅을 겨루어 볼 수 있다고 대답했다고 하오. 그 뒤로 십육사라는 이름이 서장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오.”

천애치수 단목초는 지략과 두뇌가 비상한 인물로 중원에까지 그 명성이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어리석은(痴) 늙은이(秀)’ 라는 별호 답지 않게 그는 천하에서 가장 아는 것이 많은 사람중 한 명이며, 특히 중원의 무학(武學)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정통하다고 했다. 단목초 같은 인물이 함부로 허언(虛言)을 할 리는 없으니, 그의 말대로라면 십육사와 십이기 는 현 중원무림의 최고 고수들인 우내사마와 무림구봉에 능히 견줄만한 실력의 소유자들임이 분명할 것이다.

“십육사가 사파의 인물들이라고 하니 십이기는 정파에 소속된 고수들이겠군요?”

“그렇소.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들 중 대다수는 정사(正邪)가 불명한 자들이니, 어쩌면 중원인들의 눈에는 그들도 십육사와 같은 사파의 무리로 보일지도 모르겠소.”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물었다.

“중원에는 사마구봉 말고도 그 위에 일령과 삼성이 있는데, 단목초가 그들은 비교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지 않을 리 있겠소? 단목초는 쌍괴(雙怪)와 사불(四佛)이라면 능히 중원의 일령과 삼성에 견줄 수 있다고 했다고 하오.”

“그들은 어떤 인물들입니까?”

“쌍괴란 성숙해(星宿海)의 제왕이라 불리우는 성숙이괴(星宿二怪)를 말하고, 사불은 천룡사의 사대불법존자(四大佛法尊子)를 가리키는 이름이오.”

진산월은 빙긋 웃었다.

“단목초의 서장 무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군요. 꼭 중원의 고수들보다 더 많은 숫자의 고수들을 거론하니 말입니다.”

상원건도 그를 따라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런데 그들 중 서장의 최고 고수이며 아난대활불의 후계자인 야율척이 빠졌군요?”

지금까지 진산월의 물음에 시원스럽게 답변해주던 상원건이 웬일인지 잠시 멈칫거리다가 약간 어색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야율척은 제외한 거요. 그는 서장에서 절대적인 존재이니 단목초는 그를 열외로 하고 그외의 나머지 고수들만 가지고 비교한 것이오.”

진산월은 이내 상원건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차렸다.

“혹시 단목초는 중원에서 야율척에 비견될만한 고수가 없다고 생각한 게 아닙니까?”

상원건은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한 차례 으쓱거렸다.

“아마 그랬을지도… 아니면 모용대협만이 야율척에 견줄 수 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소. 모용대협도 중원에서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오?”

“하지만 모용대협은 이미 오랫동안 남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아마 어쩌면 단목초의 머리 속에는 모용대협이 이미 죽은 사람으로 간주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원건은 내심 그의 말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 단목초 뿐이겠는가? 대다수의 무림인들도 모용단죽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설사 살아있다 할지라도 결코 예전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단지 그들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마음 속의 우상(偶像)이 필요했기 때문에 십 년 가까이 강호에 나타나지 않은 모용단죽을 지금도 무신(武神)으로 추앙하고 있는 것이다.

진산월은 상원건을 돌아보며 웃었다.

“아무튼 서장 무림에도 인재가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단목초가 소문대로 비범한 사람이라면 이번의 결전이 결코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게 분명하군요.”

상원건은 진산월과는 달리 표정이 점차 어두어졌다.

“그래서 걱정이오. 이곳에 모인 군웅들은 너무 낙관하고 있소. 그들은 심지어 무림구봉의 몇 사람만 나서도 야율척 정도는 쉽게 물리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소.”

“야율척에 대해서는 아시는 게 있습니까?”

상원건의 얼굴에 한 줄기 고소가 떠올랐다.

“그에 대해서는 나도 거의 아는 바가 없소. 서장에서는 그에 관한 모든 것이 철저한 비밀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함부로 거론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오.”

“그래도 그가 아난대활불의 수제자로 이십 여년동안 활동했으면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이 적지 않았을텐데요.”

“물론 극히 일부의 사실은 알 수 있소. 예를 들면 그가 아난대활불의 제자가 되기 전에 천애 고아였으며, 아난대활불이 그를 처음 보는 순간 손뼉을 치며 고함을 내질렀다는 일견박장후(一見拍掌吼)의 전설, 그리고 아난의 제자가 된 후 불과 팔 년만에 아난대활불의 사제들이며 천룡사의 최고 고수들이었던 사대불법존자를 모두 격파하여 그들로부터 불법왕(佛法王)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는 팔년불법왕(八年佛法王)의 신화… 하지만 이 정도는 서장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가 알고 있는 것들이오. 그 외에 그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거의 전무하오.”

일견박장후와 삼년불법왕의 소문은 진산월도 들은 적이 있다. 아난대활불은 서장의 제일인답게 평소 과묵하고 쉽게 경동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아난대활불이 일개 어린 소년을 만난 순간 격동을 참지 못하고 손뼉을 치고 소리를 내지른 것만 보아도 그가 야율척을 보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여실히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무공에 입문한지 불과 팔 년 만에 서장의 제일인자가 된 그의 무학(武學)에 대한 천재성은 가히 가공스럽다고 밖에는 표현할 말이 없을 것이다.

상원건은 침중하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맺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과거의 모용대협이라 해도 이제는 야율척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오.”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상념에 잠겼다. 상원건의 말은 바꿔 말하면 중원 무림에서 과거의 모용단죽을 능가하는 고수가 나타나지 않는 한, 야율척을 꺾을 자는 없다는 뜻이었다. 사마구봉은 물론이고 그들 위에 있는 일령삼성 또한 예전부터 모용단죽의 적수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가 있어 야율척을 상대할 것인가? 모용단죽의 예언대로 모용봉이 과연 야율척의 적수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야율척을 상대할 고수가 없다면 아무리 많은 고수들이 몰려간다 할지라도 어찌 승리를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진산월은 새삼 이번의 서장행(西藏行)이 쉽지 않은 길임을 절감할 수 밖에 없었다.

진산월 일행이 아침 식사를 모두 끝내고 초조암 앞에 갔을 때 공지에는 이미 수많은 무림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서로 무림맹의 앞날과 누가 과연 초대(初代) 무림맹주가 될 것인가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초대 무림맹주에 대한 의견은 너무나 분분해서 곳곳에서 언성이 높아지는 경우도 곧잘 눈에 띄었다. 하나 그러한 소란은 무림대회의 진행을 맡고 있는 대현의 모습이 나타나자 삽시간에 열광적인 환호와 박수소리로 바뀌어 졌다.

“와아아…!”

대현은 군웅들의 열띤 환호성을 받으며 대의 중앙에 우뚝 섰다. 이어 주위를 돌아보며 특유의 침착하면서도 낭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오늘은 어제 말씀드린대로 이번에 새로 창설된 강호무림영웅연맹을 이끌어 나갈 수뇌부를 선출하는 날입니다. 먼저 어제 조직된 십대지단을 결성하도록 하겠습니다.”

십대지단의 수뇌부를 선출하는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십대지단은 원래 강호무림을 단순히 열 개의 지역으로 나눈 것이 아니라 각 문파와 고수들을 적절히 배분하여 조직한 것이기 때문에, 구파일방을 비롯한 당대의 거대문파가 골고루 소속되어 있었다. 당연히 십대지단의 수뇌부는 구파일방의 대다수 문파 장문인들이 선출되었고, 그외에 각 지역에서 오랫동안 명성을 날리고 있는 패주(覇主)들과 강호의 명숙들이 나머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락지단은 소림사와 개방의 고수들이 대거 수뇌부에 들었는데, 막상 단주 자리는 엉뚱하게도 패왕창(覇王槍) 전괴(典魁)에게 돌아갔다. 전괴가 비록 한 자루 창으로 대강남북을 뒤흔들었던 일대의 고수라고 해도 소림사의 장문인이나 개방방주의 위세를 능가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전괴가 단주에 선출된 것은 소림사의 장문인인 대방선사와 개방의 용두방주인 만리무영개 나자행이 단주 자리를 극구 사양하고 오히려 전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그 뿐 아니라 당연히 무당파의 장교인 현령이 차지할 줄 알았던 화중지단의 단주 자리는 대홍산(大洪山)의 괴걸인 비룡신군(飛龍神君) 위해동(威海動)의 손에 돌아갔고, 화산파의 차지일 줄 알았던 관서지단도 감숙성의 제일고수인 신편(神鞭) 갈태독(葛太獨)이 단주로 선출되었다. 그들 외에도 대부분의 지단에서 의외의 인물들이 단주로 선출되어 무림인들을 놀라게 했다. 유일하게 당초 예상한 인물이 단주로 뽑힌 곳은 강동지단 뿐으로, 강동지단은 강남의 유력한 가문인 남궁세가의 당대 가주인 남궁탄이 중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단주로 선출되었던 것이다. 낙일방은 하나 둘씩 발표되는 십대지단의 수뇌부 명단을 듣고 있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하군요. 어째서 열 개나 되는 지단의 단주들 중 구파일방의 장문인이 한 사람도 없는 거죠?”

정해가 심사숙고하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건 아마도 그들이 굳이 단주가 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굳이 단주 자리에 오르지 않아도 지단을 자신의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면 누가 남들의 경계심을 자극하면서까지 단주가 되려 하겠어?”

낙일방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히죽 웃었다.

“설마요. 아무리 구파일방의 힘이 강하다고 해도 지단 하나에 모인 고수들의 수가 얼마인데 자기들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겠어요?”

정해가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상원건이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 쉽게 생각할 것만은 아니네. 각 지단의 수뇌부를 잘 살펴보면 단주와 극소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구파일방을 비롯한 강호 거대문파의 고수들로 이루어져 있네. 게다가 단주의 선출이 지단에 소속된 무림인들의 적극적인 지지 때문이라기 보다는 구파일방 장문인들의 암묵적인 지원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감안한다면 아무리 단주라 하더라도 구파일방의 뜻을 함부로 무시할 수가 없을 것이네.”

낙일방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정말 그럴까요? 하지만 단주에 선출된 고수들도 하나같이 당대 무림에서 유명한 인물들이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문제는 그들 중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력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일세. 결국 수뇌부에서 다수결로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면 지단이 누구의 뜻대로 움직이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 아닌가?”

아닌게 아니라 강동지단의 단주인 남궁탄을 제외한 다른 아홉 개 지단의 단주들 중 문파를 거느리고 있는 고수는 아무도 없었다. 무림인들은 그들이 특별한 소속이 없기 때문에 무림맹의 일을 공정하게 맡을 수 있으리라고 보고 그 점에 대해 환영하는 분위기였는데, 상원건의 말을 빌자면 그것이 오히려 그들의 발목을 잡는 약점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낙일방은 상원건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얼굴에 불안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당초에 우리가 걱정하던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요?”

“아직은 확실히 그렇다고 장담할 수 없지. 무림맹주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지도 모르니까 말일세.”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상원건 자신도 별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 몇 명의 인물들이 대 위로 올라왔다. 상원건은 무심코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무엇을 보았는지 안광을 예리하게 번뜩였다. 묵묵히 그쪽을 쳐다보고 있던 상원건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렇군. 결국 이렇게 되는군.”

중인들은 의아한 얼굴로 상원건의 눈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대 위로 올라온 인물들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그들 중 가장 앞에서 걷고 있는 인물은 당당한 체구의 짙은 남포를 걸친 중년인이었고, 그의 뒤에는 각양 각색의 옷을 입은 네 명의 인물들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상원건의 시선은 그 중에서도 선두의 남포 중년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남포 중년인은 멀리서 보기에도 키가 크고 건장했으며, 당당한 위엄과 사나이다운 기개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바짝 면도를 해서인지 수염은 전혀 보이지 않았으나, 이마와 뺨에 그어진 몇 가닥의 주름살과 깊게 패어진 눈, 그리고 짙은 속눈썹이 묘한 조화를 이루어 중년 특유의 침착함과 자신만만한 패기를 함께 느끼게 했다. 그를 보고 있으면 마치 자신감의 화신(化身)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정말 사나이답게 생긴 사람이군요. 저 자가 누구죠?”

낙일방이 남포 중년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묻자 상원건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위지립.”

그 말에 중인들의 얼굴에 일제히 경악 어린 빛이 떠올랐다.

“손바닥을 한 번 휘두르기만 하면 천지(天地)를 뒤엎는다는 일장개천지 위지립 말인가요?”

“바로 그 위지립일세.”

낙일방은 새삼스런 눈으로 남포 중년인의 전신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일장개천지 위지립은 당대 무림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장공(掌功)의 제일인자였다. 그는 비단 무림구봉의 일인일 뿐 아니라, 지난 십 년동안 크고 작은 수십 번의 싸움에서 단 한 번도 지지 않은 무적(無敵)의 고수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성명절기(聲名絶技)인 건곤십팔장(乾坤十八掌)은 천하에 산재한 수천 가지 장공(掌功) 중에서도 십이대장공(十二大掌功)에 속하는 최절정의 절학이었다. 또한 그는 어려서부터 아주 체계적인 내공수련을 쌓은데다 몇 가지 기연(奇緣)이 겹쳐 강호 무림에서 가장 강한 내공(內功)의 소유자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낙일방은 모든 무림인들이 꿈에서라도 한 번 만나보기를 염원한다는 무림구봉 중의 한 사람을 직접 보게 되자 가슴이 설레는지 준수한 얼굴을 붉게 상기시킨 채 정신 없이 위지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상원건을 돌아보며 급히 물었다.

“그런데 상대협의 조금 전 그 말씀은 무슨 뜻이에요?”

상원건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별 일 아닐세. 그냥 그가 등장한 것을 보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을 뿐이네.”

“그 생각이 뭔데요?”

“그건 잠시 후에 알게 될 걸세. 내 생각이 단순한 억측일지도 모르니…”

낙일방은 원래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으나,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더는 무어라고 물어보지도 못하고 혼자 답답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때마침 대의 중앙에 서 있던 대현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번에 선출된 열 개 지단의 수뇌부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초대 무림맹주의 추천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모두 네 분이 추천되셨기에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웅성거리던 주위가 갑자기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동시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대현의 입에 고정되었다.

눈치 빠른 일부 군웅들은 지금부터 대현의 입에서 흘러나올 말이 초대 무림맹의 맹주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솟구치는 흥분을 억누르는 모습들이었다. 대현은 한 차례 숨을 고른 후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 분들은 무당파의 장문인이신 현령진인과 개방의 용두방주이신 나자행 대협, 그리고 무림구봉의 한 분이신 일장개천지 위지립, 위지대협과 본사의 장문인이신 대방선사 이십니다.”

대현이 한 사람씩 호명을 할 때마다 군웅들 사이에서 환호성과 탄성이 터져나왔다. 대현이 거론한 네 사람이 현재 당금 무림에서 가장 막강한 위명을 떨치는 인물들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었다. 강호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라 할 수 있는 소림사와 무당파의 장문인, 강호 제일의 거방인 개방의 용두방주, 그리고 무림 최고의 고수들인 무림구봉 중의 일인! 그야말로 무림 역사상 최초로 탄생한 무림맹의 초대 맹주를 뽑는 후보로는 완벽하게 구색이 짜여진 진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 중 누가 무림맹주로 선출된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고, 오히려 떨어진 사람에 대한 아쉬움이 더 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군웅들은 대현의 다음 말을 듣고도 별다른 거부감이나 경각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 분들 중 본사의 장문인과 무당파의 현령진인께서는 이번에 벌어지는 천룡사와의 결전에 심력(心力)을 기울이기 위해 맹주의 지위에 오르기 보다는 뒤에서 헌신하시겠다며 고사(固辭) 하셨고, 나방주님 또한 천룡사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데 총력을 다하느라 도저히 맹주의 지위를 맡기는 무리라고 사양의 뜻을 밝히셨습니다.”

대현의 말은 누가 듣기에도 타당한 것이었으며,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소림사와 무당파, 개방은 이번 천룡사와의 결전에 있어 중원무림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세 개의 축(軸)이었다. 따라서 그들 문파의 장문인들이 앞에서 나서기 보다는 문파를 잘 이끌어 무림맹을 뒤에서 지원하겠다는 것은 현명하고 올바른 판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분이 모두 맹주 지위를 사양함에 따라 수뇌부에서는 위지대협께 중임(重任)을 맡아 주십사 고 부탁드렸고, 위지대협께서는 오늘 이 자리에서 자신의 생각을 밝히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일장개천지 위지립, 위지대협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대현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조금 전에 미리 대 위에 올라와 있던 위지립이 당당한 걸음으로 대의 중앙으로 걸어나왔다. 군웅들은 위지립의 모습을 보자 이내 벼락이 치는 듯한 우렁한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

“저 사람이 십 년전에 단 세 번의 손짓으로 황산삼귀(黃山三鬼)를 격살시킨 위지립이구나!”

경탄과 흠모의 고함 소리가 주위를 뜨겁게 달구었다. 강호 무림에 퍼진 위지립의 명성은 대단한 것이었고, 그의 등장 또한 뜻밖이었기 때문에 많은 무림인들의 호응을 얻은 것이다. 위지립은 정광(精光)이 번뜩이는 눈으로 군웅들을 한 차례 둘러본 후 천천히 입술을 떼기 시작했다.

“먼저 불초불민한 이 사람을 초대 무림맹의 맹주로 지명해 준 것에 대해 모든 무림동도(武林同道)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소. 강호무림에 처음으로 탄생한 무림맹을 떠맡게 된다는 중책이 너무 부담스럽지만, 무림정의(武林正義)를 구현하기 위해 이 한 몸을 기꺼이 희생한다는 각오로 무림맹주의 지위를 수락하는 바이오.”

일부분의 사람들은 다소 어리둥절한 모습이었고, 극소수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언제 그를 무림맹주로 지명했는가 하고 의아해 한 것이고, 코웃음을 친 사람들은 평소 위지립의 품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원치 않는 일을 억지로 떠맡는 듯한 그의 인사치레 말에 조소를 보낸 것이다. 하나 대부분의 군웅들은 열띤 환호성을 지르며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와아! 무림맹 만세!”

“위지립 만세! 무림맹주 만세!”

그 함성은 초조암 전체를 뒤흔들었을 뿐 아니라 군웅들의 마음까지도 송두리째 사로잡았다. 군중심리란 묘한 것이어서, 일단 어떤 흐름을 타게 되면 걷잡을 수 없게 되는 법이었다. 군웅들은 너도 나도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목이 터져라 ‘무림맹주 만세’ 를 외치고 있었다. 위지립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이건, 그의 갑작스런 등장에 의혹을 느낀 사람이건 이제는 위지립이 무림맹주가 되는 것이 완전한 기정사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히려 무림인들 중 상당수는 현(現) 강호무림의 최고고수 중의 한 사람인 위지립이 무림맹주를 맡게 된 것에 감격해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상원건은 그중 적지 않은 군웅들이 흥분과 격한 감정에 못이겨 눈물까지 흘리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기도 했다.

“정말 대단하군. 대단해!”

낙일방이 그의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는지 붉게 상기된 얼굴로 그를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그렇지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는 무림맹주가 탄생하다니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상원건은 그가 자기의 말을 멋대로 해석하자 내심 쓴웃음이 흘러나왔으나 그냥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직 세상물정을 잘 모르고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보고 희희낙락해 하는 그를 굳이 깨우칠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일은 좀 더 많은 경험을 쌓게 되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였다. 어떤 면에서는 지금처럼 순진하고 아직 강호의 때가 묻지 않은 낙일방의 모습이 더욱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상원건은 옆에 있는 무림인들을 따라 발을 구르며 고함을 지르고 있는 낙일방을 웃음띤 눈으로 쳐다보더니 이내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떻소? 진장문인의 말씀대로 일이 진행되었는데, 그가 무림맹을 잘 이끌 것 같소?”

진산월은 담담한 모습이었다.

“그럴 겁니다. 그의 뒤에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으니까요. 또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진산월은 잠깐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가 잘 이끌어 나가지 않으면 강호무림의 안위가 너무나 위태로워지게 되니 말입니다.”

또옥!

풀잎 끝에 매달려 있던 이슬 방울 하나가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힘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무거운 이슬 방울 때문에 축 처져 있던 풀잎이 미처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도 전에 비참한 소리를 내며 이그러졌다.

파삭!

풀잎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발의 주인은 눈빛이 유난히 초롱초롱한 홍안의 미소년이었다.

“여긴 정말 공기가 맑고 신선하군요. 나들이라도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요.”

미소년은 바로 옆에서 걷고 있는 유난히 머리통이 큰 청년을 보며 씨익 웃었다. 여인의 그것처럼 붉은 입술 사이로 언뜻 내보이는 새하얀 이빨이 보는 이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청년은 커다란 머리통을 옆으로 기우뚱거리더니 이내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방. 자꾸 웃지 마라.”

미소년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요?”

“네가 웃는 모습을 보면 나까지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데 상소저나 다른 여자들이 보면 어쩌겠느냐?”

미소년은 물론 낙일방이었다. 낙일방은 정해가 자신을 놀리는 것을 알고는 힐끗 상소홍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상소홍은 그때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바람에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낙일방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정해를 흘겨 보았다.

“정사형은 가끔 엉뚱한 소리를 해서 사람 무안하게 만드는군요. 그런데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맞기는 맞는 건가요?”

“그렇다. 숭산에서 백토강(白土崗)으로 가는 길은 이곳이 제일 빠르지.”

정해는 문득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저기 멀리 높은 봉우리 하나가 보이지? 저곳이 마천령(摩天嶺)이다. 저곳을 넘으면 하루 이내에 백토강에 도착할 수 있다.”

낙일방이 정해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끝없이 이어진 구릉같은 산등성이 너머로 유난히 뾰쪽한 봉우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낙일방의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어이구. 저거 넘어 가기가 만만치 않겠는데요. 좋은 길 놔두고 왜 하필이면 이런 산길로만 가는 거에요?”

정해가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대뜸 응계성의 투박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 녀석아! 지금 우리가 어디 유람이라도 가는 줄 아느냐? 한 시라도 빨리 백토강에 도착해서 본진(本陣)에 합류하지 않으면 천룡사와의 싸움에 끼어들 여지도 없다는 걸 모른단 말이냐?”

낙일방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옆으로 슬금슬금 피해 달아났다.

“알아요, 알아요. 응사형 말이 맞아요. 우린 빨리 가야해요. 자, 좀 더 속도를 내서 갑시다.”

낙일방은 응계성이 당장 주먹이라도 날릴 것이 두려웠던지 일행의 가장 앞으로 나서서 열심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덕분에 조금은 느긋하던 일행의 이동 속도가 덩달아 빨라졌다. 순식간에 그들은 두 개의 작은 구릉과 하나의 제법 높은 봉우리를 넘어갔다. 다행히 그들은 모두 무공을 익힌 무림인들이라 지치거나 피곤해 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진산월 일행이 이토록 길을 재촉하는 것은 응계성의 말대로 백토강에 한시라도 빨리 도착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소림사에서 벌어진 사상 초유의 무림대집회는 결국 강호무림연맹이라는 이름의 무림맹 창설을 그 절정으로 하여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무림맹의 수뇌부들은 천룡사와의 결전을 벌일 장소로 사천성(四川省)의 검각(劍閣)을 지목하고 무림맹의 열 개 지단을 그쪽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했다. 하나 그것에는 몇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소림사에서 검각까지는 수천 리가 넘는 길이어서 많은 무림인들의 이동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결전장소를 사천성 내로 정함으로 인해 자칫하면 천룡사로 하여금 자연스레 중원에 들어올 구실을 줄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무엇보다도 절박한 것은 지금의 방대하기만 하고 느슨한 무림맹의 조직으로는 서장의 힘이 일치단결된 천룡사를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림맹의 수뇌들은 몇 일간 머리를 싸매고 숙의한 끝에 다음과 같은 방침을 발표하게 되었다.

<강호무림연맹 공문(公文) 제 일호(第一號). 일(一), 무림맹의 열 개 지단은 각각 다른 경로로 검각까지 이동하며, 각 지단마다 몇 개의 중간 집결지를 선정한다. 이(二), 자발적으로 이번 결전에 참여할 고수들을 선별하기 위해 이동은 각자의 자율의사에 맡기며, 불참하거나 이탈하는 고수들에게 죄를 추궁하거나 책임을 묻지 않는다. 삼(三), 수준이 떨어지는 고수들이 참여하여 헛된 희생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해진 시간까지 집결지에 도착하지 않는 고수들은 이번 결전에 무조건 제외시킨다.>

무림맹의 방침은 많은 무림인들의 호응 속에 즉시 실행에 옮겨졌다. 그리하여 무림맹주가 선출된지 이틀 후에 소림사에 모였던 수많은 무림인들은 각 지단으로부터 최초의 집결지와 도착시간을 전해듣고는 각자 무리를 지어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진산월 일행이 속한 관서지단의 최초 집결지가 바로 백토강이었다. 소림사에서 백토강까지는 관도(官道)를 따라 걷는다면 꼬박 열흘이 걸리는 제법 먼 거리였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은 불과 삼일 뿐이었다. 말을 타고 달려도 쉽지 않은 거리였으나, 진산월 일행은 관도보다는 산길을 타고 직선거리로 곧장 가는 방법을 택했다. 산길을 움직이는 것이 비록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하면 이틀 이내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이 정해의 생각이었고, 그의 건의를 진산월이 받아들인 것이다. 물론 그 속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관도를 택하지 않음으로서 불필요한 시비나 사건으로부터 피해 가겠다는 의도도 담겨져 있었다. 최소한 진산월의 오른손 부상이 완쾌될 때까지는 어떠한 시빗거리와도 부닥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종남파 고수들의 한결같은 바램이었다. 하나 항상 그렇듯 세상 일이란 왕왕 자신들의 뜻대로 진행되지는 않는 법이었다. 일행 중 가장 앞에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던 낙일방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그곳은 커다란 구릉의 꼭대기 부근이었다.

“저 앞에 주점이 있는데, 잠깐 쉬었다 가면 어떻겠어요?”

낙일방의 말에 정해가 재빨리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아닌게 아니라 구릉 꼭대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간이 주점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몇 개의 대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대충 천막을 친 곳이라 사실 주점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곳이었다. 입구에 내걸린 <주(酒)> 라고 쓰여진 붉은 깃발만 아니라면 누구라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중인들은 이곳까지 적지 않은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려왔기 때문에 얼마쯤의 피곤함과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주점을 보자 누구라도 잠시 쉬었다 갈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진산월은 그런 중인들의 심정을 알고 있는지라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꾸나. 나도 마침 목이 말랐던 참이었다.”

낙일방은 신이 나서 재빨리 주점으로 달려갔고, 정해가 그 뒤를 따랐다. 혹시라도 낙일방이 무슨 실수라도 할까봐 정해는 이번 여행 도중 줄곧 낙일방에게 바짝 붙어 있는 것이다. 가까이 가보니 주점은 더욱 허름했다. 그런데도 이미 몇 사람의 손님이 와 있었다. 낙일방은 재빨리 주위를 한 차례 둘러 보고는 바람이 잘 통하는 우측의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가 좋겠어요. 앞이 탁 트여서 시원하면서도 전망이 좋군요.”

탁자는 그리 깨끗하지 못했고, 의자도 세게 앉으면 금시라도 부서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하나 그래서인지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었다. 곧 주방에서 주방장이 나와 때가 꼬질꼬질한 수건으로 탁자를 대충 닦으며 물었다.

“무얼 드시겠소?”

주방장의 음성과 얼굴에는 피곤함과 권태가 뒤섞여 보는 사람이 짜증이 날 정도였다.

“빨리 되는 음식이 무엇이 있어요?”

“찐만두와 산채(山菜) 음식은 당장 준비할 수 있소. 하지만 모든 사람의 입맛에 맞는다고는 장담할 수 없으니 그리 아시오. 그외에는… 꿩구이와 버섯볶음….”

주방장이 손가락을 헤아려가며 음식 이름을 나열하자 정해가 재빨리 말했다.

“찐만두 구인분과 술 몇 병만 주시오. 술은…”

“여기서는 백건아(白乾兒) 밖에 없소.”

“그럼 백건아 몇 병만.”

주방장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으로 사라지자 낙일방이 어이없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

“명색이 주점이라고 깃발까지 내걸어놓고는 백건아 밖에 없다니… 이게 말이 되는 겁니까?”

백건아는 술 중에서도 가장 싸고 질이 떨어지는 하급품으로, 시큼하고 털털해서 술을 어지간히 좋아하는 낙일방도 평소에는 잘 먹지 않았다. 정해가 그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아무거나 목만 축일 수 있다면 됐지. 설마 이런 곳에서 산해진미를 기대했단 말이냐?”

“그런 건 아니지만…”

낙일방은 다시 무어라고 투덜거리려다 정해가 다시 눈짓을 하자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정해가 눈짓하는 곳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들에게서 탁자 두 개 건너편의 구석에 두 명의 죽립인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죽립을 깊게 눌러 쓰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다만 죽립 아래로 살짝 드러난 턱밑으로 몇 가닥의 수염이 나 있는 것으로 보아 삼십대 이상의 중년인들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처음에 낙일방은 그들의 어디가 이상해서 정해가 그렇게 눈짓을 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나 자세히 관찰해보니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눈에 들어왔다. 우선 두 사람 모두 죽립을 좀처럼 벗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죽립을 쓰고 다니는 사람이야 길바닥에 쓸어다 버릴 정도로 많겠지만, 식사를 하면서도 죽립을 쓰고 있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였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봇짐을 가지고 있었는데, 봇짐의 형태로 보아 안에 든 것은 병장기임이 분명했다. 병장기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야 이상할게 없지만, 그것을 봇짐처럼 싸서 숨겼다는 것이 무언가 미심쩍은 느낌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낙일방의 의심을 산 것은 두 사람의 손이었다. 젓가락을 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은 거칠고 투박했으며, 자잘한 상처가 많이 나 있었다. 그것은 낙일방이 익히 보아서 알고 있는 손이었다. 바로 무공을 익힌 전형적인 무림인들의 손이었던 것이다. 이런 인적이 드문 곳에서 봇짐 장사로 분장해 있는 무림인들을 만난다는 것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 무림인들이 적인지 우군인지를 판가름할 수 없을 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평상시였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응계성이라도 나서서 이자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내려 했을 것이다. 하나 지금은 아무도 선뜻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진산월의 부상이 낫기 전에는 쓸데없는 시비를 일으키지 말자는 무언(無言)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잠시 장내에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두 명의 죽립인들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듯 열심히 식사를 하다말고 진산월 일행이 있는 쪽으로 몇 번인가 고개를 돌렸다. 그때마다 죽립 아래로 그들의 번뜩이는 안광이 드러나 보였다.

‘정말 분장 솜씨 하나는 엉망진창인 놈들이군. 이왕 장삿꾼 행세를 하려면 좀더 그럴 듯하게 할 수도 있었을텐데…’

낙일방은 하마터면 그들을 위해서 한숨까지 내쉬어 줄 뻔 했다. 다행히 그때 주방의 문이 열리며 주방장이 커다란 쟁반에 만두를 수북히 들고 나왔다. 구인분의 만두인데도 사오십 개 밖에 되지 않았으나 만두 하나의 크기가 어른의 주먹만해서 결코 작은 양은 아니었다. 탁자 위에 만두를 올려 놓은 주방장은 다시 세 병의 술병을 놓고는 커다란 손바닥을 내밀었다.

“먹기 전에 계산부터 하시오.”

퉁명스런 주방장의 태도에 중인들의 얼굴에 못마땅한 표정이 떠올랐다. 정해가 재빨리 품속에서 전대를 꺼내며 물었다.

“모두 얼마요?”

“열 문이오.”

정해가 계산을 마치자 그제서야 주방장은 어슬렁어슬렁 주방으로 돌아갔다. 정해는 성질 고약한 응계성이 화라도 낼까봐 짐짓 입맛을 다시며 제일 위에 놓인 만두를 집어 들고는 진산월을 향해 내밀었다.

“아주 맛있겠군. 장문사형. 먼저 드시죠.”

진산월은 정해가 내미는 만두를 받아들고는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더니 들고 있던 만두를 탁자 위에 그대로 내려 놓는 것이 아닌가?

“장문사형. 만두에 혹시 문제라도…”

정해가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듯한 얼굴로 급히 물었다. 진산월은 입에 배어문 만두조각을 몇 번 씹더니 억지로 삼키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만두는 멀쩡해. 단지 내 입맛에 별로 맞지 않을 뿐이야.”

낙일방은 아직 진산월이 먹는 음식을 가지고 이런 모습을 보인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자신도 다른 만두를 한 입 먹어 보았다. 미처 만두를 한 번 씹기도 전에 그는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입 속에 든 만두를 뱉어냈다.

“퉷! 무슨 맛이 이래?”

정해가 급히 물었다.

“왜? 만두에 뭐라도 들어갔니?”

낙일방은 혓바닥을 길게 내며 입속에 달라붙은 조그만 찌꺼기까지 모두 내뱉으며 울상을 지었다.

“너무 맛이 없어요.”

정해는 낙일방의 표정이 너무도 우스워서 나직이 웃으며 만두 하나를 집어 들었다.

“녀석. 별로 배가 고프지 않은 모양이구나. 음식투정을 다 하고…”

웃다 말고 정해의 얼굴이 이상야릇하게 변했다. 무심코 한 입 베어문 만두의 맛이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다. 만두의 속은 주위의 야산에서 따온 산나물을 반죽해 만들었는데, 양념을 전혀 하지 않은 듯 맹맹하기 그지 없었다. 게다가 만두피는 얼마나 질긴지 마치 고무가죽을 씹는 것 같았다. 그뿐이면 억지로라도 한 입 삼키겠는데, 만두 자체에서 퀘퀘한 악취 비슷한 냄새가 나는 바람에 비위가 약한 사람은 그 냄새만 맡아도 토할 지경이었다. 나중에야 정해는 그 냄새가 만두를 담고 있는 쟁반에서 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아마도 오랫동안 설거지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나는 악취인 모양이었다. 응계성은 코를 몇 차례 킁킁 거리더니 눈쌀을 찡그리며 험상 궃은 표정을 지었다.

“이걸 사람먹으라고 가져온거야? 어쩐지 그 산도둑같은 놈이 음식값을 미리 받는다 했더니 그게 다 꿍꿍이 속이 있었구나!”

상원건은 만두를 손에 들고 두 조각 내어 그 속에 든 음식을 조금 먹어보고는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주방장을 탓할 필요는 없네. 이건 잘못된 만두가 아니니까.”

낙일방이 어이없다는 듯 볼멘 음성으로 소리쳤다.

“이게 잘못된 만두가 아니라고요? 세상에 이런 만두는 없을 거에요.”

“이건 장족(藏族)의 방식으로 만든 것일세. 그쪽에서는 음식에 간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처음 먹는 사람들은 맛이 없다고 느끼는 것일세.”

낙일방은 신통한 물건이라도 보는 것처럼 만두 하나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살펴 보았다.

“장족의 방식으로 만든 만두라고요? 그 사람들은 이런 걸 맛있다고 먹는단 말입니까?”

“장족이 사는 지방은 땅이 척박해서 양념을 제대로 구하기가 힘들지. 그래서 이런 식의 음식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네.”

상원건이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으나 낙일방은 여전히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여기는 하남성 아닙니까? 장족의 음식이 왜 이런 곳에 있단 말입니까?”

“주방장이 장족 출신이겠지. 조금 전에 보니 말투나 억양이 중원인 같이 매끄럽지 못했네. 그래서 조금 퉁명스럽게 들리더군. 아무튼 그가 음식을 만들기 전에 입맛에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미리 경고까지 했으니 그를 탓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낙일방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차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만두를 바닥에 던져 버렸다.

“아무튼 세상에는 별 일도 다 있군요. 중원 한 복판에서 장족의 음식을 파는 곳이 있지 않나, 또 그런 음식을 맛있다고 먹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그 말에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구석에 있는 두 명의 죽립인에게로 쏠렸다. 아닌게 아니라 낙일방의 말대로 그들은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리며 열심히 음식을 먹고 있었다. 아무리 안목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지금 그들이 먹기 싫은 걸 억지로 먹는 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장족 출신의 주방장이 그들에게만 특별히 양념을 한 중원식의 음식을 만들어주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장족의 음식도 입맛에 맞는 신통한 식성이라도 가지고 있단 말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결론은 오직 한 가지 뿐이었다. 두 명의 죽립인은 장족 출신이거나, 장족의 음식을 자주 접해본 인물들일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그들이 어떠한 사람들인지를 알 수는 없었다. 하나 두 명의 죽립인은 진산월 일행이 자신들의 음식 먹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자 자신들의 정체가 발각되었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며 봇짐을 움켜 잡았다. 그야말로 도둑이 제 발 저린 꼴이었다.

차창!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그들의 손에는 봇짐에서 뽑아든 병기들이 쥐어져 있었다. 오른쪽 죽립인이 들고 있는 병기는 길이가 두자 반쯤 되었는데, 양쪽으로 초생달 모양의 둥그런 날이 달려 있었다. 왼쪽 죽립인은 다섯 개의 매듭으로 이어진 오절편(五節鞭)을 들고 있었는데, 각기 양쪽 끝의 매듭에는 날카로운 쇠못이 잔뜩 박혀 있었다.

두 명의 죽립인이 섬뜩한 병장기를 든 채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노려보자 진산월 일행은 내심 어이가 없었다. 진산월 일행의 숫자는 진산월을 비롯한 종남파의 제자 여섯 명외에도 상원건 부녀와 그리고 강호의 괴걸인 뇌일봉까지 아홉 명에 달했다. 원래는 석가장의 여덟 째 공자인 석지명도 이들 일행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이번에 사천으로 가는 길이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한 진산월이 그를 잘 타일러 석가장으로 돌려 보냈던 것이다.

그들 아홉 명은 모두 무공을 익힌 무림인일 뿐 아니라, 그들 중 몇몇 사람은 강호에서 일류고수라 불리워도 손색이 없는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러니 두 명의 죽립인들이 엄청난 실력을 지닌 절세고수들이 아닌 다음에야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아홉 명의 고수들이 손을 쓸 기색도 없이 멀건히 자신들을 쳐다보고만 있자 그제서야 두 명의 죽립인들은 자신들이 너무 성급했다고 생각했는지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어찌 해야 할지 망설이는 모습들이었다. 손을 쓰자니 상대의 숫자가 너무 많은데다 자신들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이대로 다시 의자에 앉는다는 것은 더욱 어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 편의 소극(笑劇)을 보는 것 같았다. 하나 곧 이어 장내의 상황은 돌변하고 말았다. 느닷없이 주점을 형성하고 있던 대나무들이 일제히 부러지며 천막이 그대로 무너져 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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