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5권 촉로지난(蜀路之難)편 : 6화

랜덤 이미지

군림천하 5권 촉로지난(蜀路之難)편 : 6화


제45장. 사찰풍운(寺刹風雲)

<동광사(東光寺).>

군데군데 금이 간 낡은 간판이 동그마니 걸려 있는 허름한 사찰.
차가운 가을 바람이 주위를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가자 주위는 한층 더 을씨년스러워졌다.

휘이이…

다시 한 차례 매서운 바람이 자욱한 먼지와 함께 밀려 들었다.
절 주변에 널려 있던 메마른 낙엽들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바삭!

그 낙엽 중 하나가 바닥에 내려앉자마자 미약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그때 낙엽을 밟으며 동광사의 경내(境內)로 들어서는 한 인영이 있었다.
그 인영은 동광사의 반쯤 부서진 편액을 올려다보더니 천천히 대문으로 다가왔다.
낡고 허름한 동광사의 대문은 세게 흔들면 금시라도 부서져 버릴 것 같았다.
그는 머리에 도관(道冠)을 쓰고 전신에는 푸른 도포를 걸친 청년도사(靑年道士)였다.
이목구비가 아주 수려했고, 눈빛이 영롱해서 준수하기 이를데 없는 모습이었다.
청년도사의 등 뒤에는 파란 색의 수실이 달린 검이 삐죽 솟아 나와 있었다.
도사가 절간을 찾아오지 말라는 법은 없으나, 여간해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도 청년도사는 별로 스스럼없는 모습으로 동광사의 대문 앞에 다가오더니 돌연 대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것이었다.

쾅쾅!

바람소리 외에는 죽은 듯이 고요했던 사찰의 정적이 그 때문에 깨어졌다.
잠시 후,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열리며 머리를 박박 밀은 중년승려의 모습이 나타났다.
중년승려는 청년도사가 문앞에 서 있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미타불. 도우(道友)께선 본사에 무슨 일이십니까?”

청년도사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빈도(貧道)는 마침 이 근처를 지나다가 저녁 때가 되었길래 하룻밤 신세를 질까하고 들렸습니다.”

중년승려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떠올랐다.

“허. 그러시군요. 하지만 지금 본사에서는 약간의 일이 있어 외인(外人)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청년도사는 허리를 굽신거렸다.

“불가(佛家)와 도가(道家)는 모두 속세를 벗어난 사이이니 어려울 때는 서로 돕고 사는 처지가 아닙니까? 이 근처에는 객잔은커녕 집 한 채도 구경하기 힘들어 자칫하면 노숙(露宿)을 해야할 판입니다.”

“평상시라면 물론 도우의 부탁을 들어드리겠으나 지금은…”

“이런 날씨에 노숙을 하면 얼어죽기 십상입니다. 귀사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나, 빈도의 사정이 너무 급하니 도와 주십시오.”

“글쎄 도우의 사정은 알겠지만 지금 본사에 심각한 일이 생겨서…”

중년승려는 계속 거절을 했으나 청년도사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빈도는 그냥 조용히 잠만 자고 아침 일찍 떠나겠습니다. 빈승이 이렇게 귀사를 찾아온 것도 어찌 보면 귀문(貴門)에서 말하는 인연(因緣)이 닿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중년승려가 다시 고개를 저으며 무어라고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지원(知元). 무슨 일이냐?”

차가운 음성과 함께 중년승려의 뒤에서 다시 비쩍 마른 얼굴의 승려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원이라 불리운 중년승려는 황급히 그에게 인사를 했다.

“사숙. 이분 도우께서 오늘 밤만 묵고 갈 수 없느냐고 하십니다.”

비쩍 마른 승려는 냉랭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본사에 오늘 중요한 일이 있어서 손님을 받을 수 없다는 걸 모른단 말이냐?”

지원은 찔끔 놀라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물론 저는 안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분 도우께서 계속 사정을 하시는지라…”

비쩍 마른 승려의 시선이 힐끗 청년도사에게로 향했다.
청년 도사는 수려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가볍게 인사를 했다.

“무량수불. 안녕하십니까? 이곳이 아니면 꼼짝없이 노숙을 해야겠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부탁을 드립니다. 내일 해가 밝는 대로 일찍 떠날테니 잠만 재워주실 수 없는지요.”

비쩍 마른 승려는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이며 청년도사의 전신을 쓰윽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은 청년도사의 등뒤에 삐죽 삐져나온 장검의 손잡이에 잠깐 머물렀다가 이내 다시 청년도사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어느 도관(道觀)에서 오신 분이시오?”

“악성(鄂城) 벽운관(碧雲觀)에서 왔습니다.”

악성의 벽운관은 이곳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는 유명한 도관으로,
그곳에서 배출된 도사들은 모두 인물됨이 정명(正明)하고 도심(道心)이 깊다고 소문이 났다.
비쩍 마른 승려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벽운관에서 오신 분이라면 특별히 사정을 봐드리겠소. 하지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숙소에서 절대로 밖으로 나오면 안되오. 만일 이를 어길 시에는 어떤 변을 당하더라도 책임지지 않겠소.”

청년도사는 활짝 웃으며 거듭 사례를 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사의 말씀대로 만일 제게 불상사가 생긴다면 모두 제 책임이며, 결코 대사나 귀사(貴寺)를 탓하지 않겠습니다.”

비쩍 마른 승려는 그의 말이 조금 묘하다고 생각했는지 한동안 물끄러미 청년도사를 쳐다보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지원. 그를 객당으로 안내해라.”

지원은 비쩍 마른 승려가 설마 청년도사의 부탁을 수락할 줄은 몰랐는지 당혹스런 표정으로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잠깐만. 나도 신세 좀 집시다.”

돌연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그들을 향해 소리치는 것이었다. 막 절 안으로 들어가려던 비쩍 마른 승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돌아보니 근처의 나무 뒤에서 체구가 커다란 청년 한 사람이 성큼성큼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청년은 제법 고급으로 보이는 황의를 입고 있었는데, 얼굴은 전체적으로 평범했으나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머금고 있어서인지 첫 인상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키도 크고 혈색이 좋아서 언뜻 보기에는 마치 부잣집 귀공자 같기도 했다. 황의청년의 허리춤에는 장검 한 자루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는데, 장검이 매달린 모양새나 황의청년의 휘적거리는 걸음걸이로 보아 장식품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황의청년은 중인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얼굴 가득 활짝 웃으며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 저도 마침 오늘 저녁을 보낼 장소를 찾고 있던 참입니다. 이분 도사께서 하루를 묵으신다니 저도 함께 신세를 지면 안되겠습니까?”

비쩍 마른 승려는 예의 날카로운 눈으로 황의청년을 주시하더니 불쑥 물었다.

“시주는 어디서 오셨소?”

황의청년은 뒷통수를 긁적이며 멋적은 웃음을 흘렸다.

“태어난 곳은 강소성(江蘇省)이며, 자라난 곳은 안휘성(安徽省)입니다. 주로 사는 곳은 섬서성이고, 지금은 하남성에서 오는 길입니다. 답변이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비쩍 마른 승려는 어이가 없는지 멀거니 그를 쳐다보다가 이내 눈쌀을 살짝 찡그렸다.

“본사는 아무 외인이나 손님으로 받지 않소. 시주가 사실대로 밝히지 않는다면 나도 어쩔 수 없소.”

황의청년은 커다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제 말은 모두 분명한 사실입니다. 제가 왜 쓸데없이 대사를 속이겠습니까?”

이어 그는 제법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룻밤만 재워주신다면 내일 떠나기 전에 부처님 앞에 성의를 보이겠습니다. 아울러 이분 도사님처럼 저도 제 신상에 무슨 일이 닥쳐도 절대로 대사나 귀사를 원망치 않을테니 대사께선 안심하십시오.”

보아하니 황의청년은 나무 뒤에서 그동안의 일을 모두 들은 모양이었다. 사정이 이러니 비쩍 마른 승려도 어쩔 수 없었는지 고개를 까닥거렸다.

“들어오시오.”

황의청년은 밉지 않게 웃으며 우두커니 서 있는 지원의 어깨를 툭 쳤다.

“고맙습니다. 과연 불가(佛家)에 계신 분들은 다르군요. 이분 대사는 생긴 외모부터 자비가 넘치시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지원은 움찔 놀라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 사이에 황의청년은 지원의 옆을 지나쳐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황의청년이 나타날 때부터 기이한 눈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던 청년도사도 재빨리 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지원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다시 비쩍 마른 승려를 돌아보았다. 비쩍 마른 승려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서야 지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문을 닫고는 황의청년과 청년도사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동광사의 안은 겉에서 보던 것보다는 훨씬 넓고 건물도 많았다.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하여 칠 팔개의 전각이 있었고, 그중에는 제법 커다란 건물도 두 개나 있었다. 지원이 그들을 안내한 곳은 그중 가장 외진 곳에 있는 허름한 전각이었다. 이름도 없는 전각의 뒤로 돌아가니 넓은 선방 서 너개가 줄지어 있는 객당(客堂)이 나타났다. 지원은 그들을 가장 끝 쪽의 두 방으로 데리고 갔다.

“밤중에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더라도 절대로 나와 보면 안되오.”

지원은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하고 나서야 돌아갔다. 두 사람만 남게 되자 황의청년은 히죽 웃으며 청년도사를 향해 물었다.

“도사께선 어느 쪽 방을 쓰시겠습니까?”

청년도사는 그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두 눈을 반짝이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황의청년은 낮짝이 어지간히 두꺼운지 청년도사의 그런 시선을 받고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청년도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자는 아주 심계(心計)가 깊은 인물이거나 아니면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인물일 것이다. 이자의 정체가 과연 무엇일까?’

그는 번개같이 생각을 굴리며 입을 열었다.

“빈도는 아무 방이나 좋으니 시주께서 먼저 고르시지요.”

황의청년은 주저하지 않고 끝쪽에 있는 방을 가리켰다.

“그럼 제가 저 끝방을 쓰겠습니다. 참, 도사께선 악성 벽운관에서 오셨다고요?”

청년도사의 눈에 한 차례 기광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그렇습니다.”

“듣자하니 벽운관주(碧雲觀主)께서는 도력(道力)이 깊어서 젊었을 때는 천하를 떠돌며 사람을 해치는 이무기와 괴수(怪獸)들을 없앴고, 나이가 들어서는 벽운관에 칩거하며 훌륭한 인재들을 양성한다고 하던데, 도사께서도 벽운관주의 제자이시라면 금수(禽獸)를 다스리는 법을 배우셨겠군요.”

“시주께서는 본관(本觀)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청년도사가 뜻밖이라는 듯 되묻자 황의청년은 뒷통수를 긁적이며 웃었다.

“귀동냥을 했을 뿐이지요. 호광(湖廣)일대에서는 벽운관주의 명성이 널리 알려있지 않습니까?”

뒷통수를 긁적이는 것은 황의청년의 무의식적인 습관인 모양이었다. 청년도사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빈도는 아직 사부님의 진전(眞傳)을 완벽하게 이어받지 못해서 그저 흉내만 낼 뿐입니다. 그런데 시주께서는 어디를 가시는 길이었습니까? 이 일대는 외져서 특별히 구경할 만한 명승(名勝)도 없는데…”

“없긴요. 단하의 풍경도 멋지고 유명한 형자관도 가까운 곳에 있지 않습니까?”

청년도사의 얼굴에 더욱 수상쩍어 하는 빛이 떠올랐다. 단하나 형자관의 풍경이 물론 형편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뛰어난 경승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게다가 단하나 형자관은 이곳 동광사와는 상당히 떨어진 곳이어서 그곳들을 구경하러 일부러 이쪽으로 왔다는 것은 조금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때 황의청년이 갑자기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사실은… 이 근처에서 여자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오지 않아 별수 없이 이곳 신세를 지게 되었군요.”

청년도사는 뜻밖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황의청년은 아무런 사심(邪心)없는 얼굴로 웃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 천진해 보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남들에게는 말하지 마십시오. 공연히 창피를 당하기 싫으니까 말입니다.”

“물론이지요.”

황의청년은 한 차례 기지개를 켜더니 고개를 까덕거리며 인사를 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서 쉬어야겠습니다. 먼길을 왔더니 제법 피곤하군요.”

“그러십시오.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황의청년은 커다란 몸을 돌려 끝쪽 방으로 사라졌다. 청년도사는 그때까지도 그 자리에 선 채로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서야 자신도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자신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여자 때문이라… 그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군. 표정이 진지하다 못해 절실해 보이니 말이야.”

이경(二更) 무렵. 사위(四圍)는 고요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 동광사의 후원도 짙은 어둠에 휩싸인 채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어디선가 예리한 호각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삐-익!

그 호각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주위가 워낙 조용한지라 아주 멀리까지 선명하게 퍼져나갔다. 호각소리는 이내 사라졌지만, 그 여운은 상당히 오랫동안 후원의 어두운 밤공기 속에 남아 있었다. 어느 순간, 청년도사가 묵고 있는 방의 창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청년도사는 문 밖으로는 나오지 않고 창문을 반쯤 연 채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어찌 보면 잠이 오지 않아 별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는 밤하늘을 구경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니면 선잠에 들었다가 때아닌 호각소리에 잠이 깨어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짙은 어둠 속을 응시하는 청년도사의 눈빛이 밤하늘의 별빛보다도 더욱 영롱하게 반짝거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청년도사의 방은 후원에서도 구석진 곳에 위치해 있는지라 창문 너머로 볼 수 있는 공간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청년도사는 한동안 묵묵히 어둠에 잠긴 후원을 쳐다보고 있더니 문득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시주도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인데, 우리 잠시 이야기나 나누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방 창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그거 좋은 생각이로군요.”

창문 가에 황의 청년의 모습이 나타났다. 황의 청년은 창문에 턱을 괸 채로 허공을 응시하더니 조용히 웃었다.

“정말 조용하군요. 날은 제법 차가운데 별빛이 너무 선명합니다. 따끈한 술이라도 한 잔 마시면 좋을 밤이로군요.”

“시주께선 술을 즐기시나 보군요. 아쉽게도 빈도는 술을 마시지 못합니다.”

“안타깝군요. 그런데 저는 여자 때문에 심사(心思)가 복잡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도사께서는 무엇 때문에 늦은 시간까지 주무시지 않았는지 궁금하군요.”

“허허… 곤란한 질문이로군요. 우리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서로 곤란한 질문은 피차 하지 않기로 하는 것이…”

황의청년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좋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들렸던 호각소리는 조금 특이하군요. 듣고 있으니 마음이 이상야릇해 지는 것 같더군요. 도사께선 그런 느낌을 받지 못하셨습니까?”

청년 도사의 눈에서 한 순간에 예리한 신광이 흘러나왔다. 그는 잠시 황의 청년이 있는 창문 쪽을 쳐다보았으나, 창문에 가려 황의 청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청년도사는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시주의 귀는 무척 예민하군요. 그것은 쇄혼각(碎魂角)이라는 특이한 호각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쇄혼각에는 인간의 심령(心靈)을 제압하는 효능이 있어서 내공이 약하거나 심지(心志)가 굳지 못한 사람이 그 호각소리를 들으면 정신을 잃고 만다고 합니다.”

황의 청년은 짐짓 탄성을 토해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절에서 듣기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소리 같군요.”

“쇄혼각은 사실 중원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물건입니다. 멀리 대막이나 신강 땅에서 신호용으로 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황의 청년은 그 말에 놀란 듯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나 곧이어 의아한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도사께선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십니까?”

“예전에 그쪽 지방을 돌아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곳 원주민들이 쇄혼각을 이용하여 서로 소식을 주고 받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렇군요. 도사께선 정말 견문(見聞)이 풍부하시군요. 그런데…”

황의 청년이 막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였다.

삐익!

예의 그 호각성이 다시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이번의 호각소리는 처음의 것보다 한결 나직했고, 여운도 짧았다. 하나 두 사람은 모두 똑똑하게 들을 수 있었다. 황의 청년의 음성이 이어졌다.

“이상하군요. 대막이나 신강에서만 이용하는 물건을 누가 중원의 한복판에서 사용하고 있는 걸까요? 더구나 이런 야심한 시각에 말입니다.”

청년 도사의 눈에 다시 번쩍하는 신광이 뿜어 나왔다.

“시주께선 그 점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황의 청년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솔직히 호기심이 동하기는 합니다.”

청년 도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빈도와 함께 탐색을 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뜻밖의 제안인 듯 황의 청년은 나직한 감탄성을 발하더니 이내 가볍게 웃었다.

“허! 좋습니다. 어차피 잠도 오지 않는 밤이니까 말입니다.”

청년 도사의 신형이 한 차례 흔들렸다. 그와 함께 그의 몸은 어느 새 창문을 빠져나와 황의 청년의 창문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정도로 놀라운 신법(身法)이 아닐 수 없었다. 황의 청년은 눈앞에 무언가가 번쩍인다 싶은 순간 청년 도사의 모습이 자신의 코 앞에 나타나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

아주 어리숙한 모습이었으나, 청년 도사는 황의 청년이 겉보기보다는 그렇게 놀라지 않았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무엇보다도 황의 청년의 눈동자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자세도 아주 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자는 좀처럼 무언가에 놀라거나 겁을 집어먹을 사람이 아니로군. 성격이 둔한 걸까, 아니면 배짱이 좋은 걸까?’

청년 도사는 새삼 황의 청년에 대해 호기심이 점점 더 짙어지는 것을 느꼈다. 청년 도사는 황의 청년을 향해 어서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황의 청년은 뒷통수를 긁적이더니 창문을 움켜잡고는 천천히 빠져나왔다. 가뜩이나 다른 사람보다 커다란 몸집의 그가 좁은 창문을 낑낑거리며 빠져나오는 모습은 우스꽝럽기조차 했다. 황의 청년은 간신히 창문을 빠져나온 다음 입을 벌리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청년 도사를 향해 멋적은 웃음을 날렸다.

“창문이 조금 작군요. 제가 도사님 체격만 되었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말입니다.”

청년 도사는 설마 그가 신법을 펼치지 않고 이렇게 무모한 동작으로 창문을 빠져나올 줄은 몰랐는지라 당혹스러움과 의아함을 동시에 느꼈다.

‘설마 이 자는 무공을 모른단 말인가?’

그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의 청년은 기세도 당당하게 먼저 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자, 그럼 대체 누가 오밤중에 잠도 안자고 호각을 삑삑 불어대는지 알아보기로 합시다.”

황의 청년은 장검 하나를 옆구리에 매단 채로 양 팔을 휘적거리며 후원을 가로질러 갔다. 청년 도사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퍼뜩 정신이 들어 황급히 그에게 다가가며 그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그쪽이 아니라 이쪽으로 갑시다.”

청년 도사가 그를 끌고 간 곳은 그들이 지원에게 안내를 받고 들어왔던 방향이 아니라, 후원의 더욱 깊숙한 곳이었다. 황의 청년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청년 도사가 이끄는대로 순순히 따라왔다. 청년 도사는 황의 청년의 소매를 잡고 짙은 어둠 속을 허깨비처럼 유유히 헤쳐나갔다. 얼핏 보기에는 이곳의 지리를 훤히 꿰뚫고 있는 것 같았지만, 가끔씩 발길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 보는 것으로 보아 청년 도사도 이곳이 처음임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대웅전과 전각들이 있는 정면으로 가지 않고 굳이 후원을 삥 돌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년 도사는 한참을 더 걸어가서 후원의 담벼락이 끝나는 곳까지 온 다음에야 황의 청년의 소매를 놓으며 나직하게 소근거리는 것이었다.

“정면 쪽은 지키는 사람이 있소. 이쪽으로 돌아가면 비록 거리는 멀지만 들키지 않고 대웅전 쪽으로 갈 수 있을거요.”

황의 청년도 덩달아 목소리를 죽여가며 물었다.

“이곳에 오신 적이 있습니까?”

청년 도사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이오.”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이곳의 지리를 안단 말이오? 그건 이 일대의 절은 모두 비슷한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오. 비록 이 절에 온 것은 처음이지만, 이와 비슷한 절은 여러 번 둘러본 적이 있소.”

청년 도사는 빠르게 말을 한 후 황의 청년이 채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자신의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대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쉿! 저 모퉁이를 돌아가면 대웅전이 보일거요. 그러니 지금부터는 전음(傳音)을 사용하던가 아니면 그냥 눈으로 구경만 하고 있으시오.”

이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 또한 황의 청년의 귓전에만 들리는 전음성(傳音聲)이었다. 황의 청년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과연 후원의 담벼락이 끝나는 곳에 위치한 작은 월동문을 지나자 멀리 어둠 속에서 시커멓게 누워 있는 몇 채의 전각이 보였다. 그중에도 유난히 눈에 띄이는 것은 분명 지원을 따라 객방으로 올 때 보았던 대웅전이었다. 청년도사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웠고, 특히 대웅전의 주위는 건물의 그림자 때문인지 더욱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스윽!

청년 도사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허공을 움직여 월동문 위로 올라갔다. 황의 청년도 질새라 그의 뒤를 따라 월동문 위로 몸을 움직였다. 하나 그는 신법을 펼친 것이 아니라 큰 키를 이용해서 담벼락을 잡고 몸을 끌어올렸던 것이다. 이것을 본 청년 도사가 깜짝 놀라 황급히 그의 몸을 잡아끌어 올렸다.

“미쳤소? 그러다 담 위의 벽돌이라도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청년 도사가 다급한 전음성을 날렸으나, 황의 청년은 뒷통수를 긁적이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마치 그런 줄 알면서 왜 진작 도와주지 않았느냐고 되묻는 것 같은 천연덕스러운 모습이었다. 청년 도사는 잠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가 무공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러는지, 아니면 정말로 무공을 모르고 있는 것인지를 탐색하려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한데 그때 갑자기 대웅전 일대가 환하게 밝아왔다. 두 사람이 움찔 놀라 돌아보니 어느 사이에인지 대웅전 앞에 몇 개의 유등(油燈)이 내걸려 있었다. 유등 앞에는 몇 명의 인물들이 어른거리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들 중 승복(僧服)을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수는 모두 다섯 명이었는데, 대부분이 짙은 흑의경장을 입은 장한들이었고 오직 한 명만이 짙은 붉은 색 홍포를 걸치고 있었다. 홍포인(紅袍人)은 멀리서 보기에도 제법 기골이 장대함을 알 수 있었는데, 뒷짐을 진 채로 흑의경장 사내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청년 도사는 청력을 돋구어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이내 황의 청년을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황의 청년이 그에게 묻는 시선을 보내자 청년 도사의 전음성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저자들은 중원인(中原人)이 아닌 것 같소.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구료.”

그때 다시 대웅전의 문이 열리며 두 명의 인물이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처음의 홍포인과 비슷한 붉은 색 장포를 입고 있었는데, 흑의 사나이들을 지휘하고 있던 홍포인과 무언가 이야기하더니 세 사람 모두 다시 대웅전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남아 있는 네 명의 흑의인들은 이미 사전에 철저한 지시를 받았는지 대웅전의 곳곳에 유등을 걸어놓아 주위를 환하게 밝히고는 대웅전의 앞에 일렬로 나란히 서 있었다. 보아하니 그들은 누군가를 영접하기 위해 나와 있는 모양이었다. 밤바람이 제법 차가워서 사방에 걸린 유등은 끊임없이 흔들렸고, 그에 따라 대웅전 앞마당에 드리워진 흑의인들의 그림자들이 이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갈 곳을 잃은 허깨비들이 정처없이 유영(遊泳)하고 있는 듯해서 왠지 귀기(鬼氣)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때 갑자기 세찬 바람이 대웅전과 그 앞에 서 있는 흑의인들의 전신을 한 차례 휘감고 지나갔다. 그 바람에 유등들이 금시라도 꺼질 듯 불빛이 어두어지다가 다시 환하게 밝아졌다. 그 순간, 마치 거짓말처럼 흑의인들 앞에는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장내의 누구도 그 사람이 언제 무슨 수로 대웅전 앞에 나타났는지를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남다른 안력을 지녔다고 자부하는 청년 도사도 느닷없이 나타난 그 인물의 신법에 경악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것이 불빛이 비추이는 거리는 적게 잡아도 십 장은 족히 되는데, 그렇다면 그 사람은 불빛이 깜박이는 짧은 순간에 십 여장의 거리를 육박해 왔다는 말이 아닌가? 그 사람은 전신에 눈부신 백색 무복(武服)을 걸치고 있었는데, 머리에 턱밑까지 내려오는 차양이 달린 커다란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있어서 아쉽게도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네 사람의 흑의인은 느닷없는 백의인의 출현에 흠칫 놀라더니 이내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백의인은 그들의 인사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대웅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흑의인들은 제지하기는커녕 오히려 대웅전의 문을 열어주기까지 했다.

탁!

백의인이 대웅전 문을 닫고 안으로 사라지자 흑의인들은 다시 형형한 눈빛을 번뜩이며 대웅전 앞마당을 일렬로 선 채 주위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청년 도사는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가 황의 청년을 향해 전음성을 발했다.

“아무래도 저 안에서 무언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소? 지금도
호기심이 동하시오?”

황의 청년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모습 같기도 했고, 꼭 저 안에 들어가 봐야 되겠다는 나름대로의 각오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청년 도사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다시 전음성으로 보내왔다.

“아무래도 저자들에게 발각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기란 불가능한 일인 것 같소. 내가 저자들의 시선을 끌테니 그동안 당신은 재주껏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시오.”

황의 청년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청년 도사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 걱정은 할 필요 없소. 그들을 따돌리고 곧 당신 뒤를 따라 가겠소.”

이어 황의 청년이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담을 박차고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올렸다. 황의 청년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돌담을 솟구친 청년 도사의 신형이 검은 하늘을 날아 순식간에 칠팔 장 밖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밤하늘을 날아가는 한 마리 야조(夜鳥)와 다를 바가 없었다.

황의 청년은 돌담 위에 납작 엎드린 자세를 유지하면서 청년 도사가 무슨 수로 흑의인들을 유인하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무언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똑… 똑…

그것은 너무도 미약해서 평상시 같으면 알아듣기 힘들었으나, 지금은 주위가 워낙 조용한지라 네 명의 흑의인들은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흑의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그중 두 명이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소리는 대웅전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약왕전(藥王殿)의 뒤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쪽은 불빛이 미치지 않아 유달리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두 명의 흑의인은 약왕전 앞까지 와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소리가 들려온 뒤쪽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나머지 두 명의 흑의인들은 여전히 대웅전 앞에 서 있었지만, 신경을 온통 약왕전 쪽으로 집중시키고 있는 표정이 역력했다.

똑… 똑…

두 명의 흑의인들이 약왕전 뒤쪽으로 갔지만, 소리는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어찌 보면 처음보다 더욱 크게 들리는 것도 같았다. 시간이 흘러도 어둠 속으로 들어간 두 명의 흑의인이 나오지 않자 남아 있는 흑의인들은 점차 긴장된 모습이었다. 그들은 자신들끼리 무어라고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자신들도 그쪽으로 가야할지, 아니면 상부에 연락을 해야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때 약왕전 뒤쪽의 어둠 속에서 하나의 인영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는 처음에 들어갔던 두 명의 흑의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 흑의인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어 보였다. 대웅전 앞에서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던 흑의인들은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는지 서로 어깨를 치며 가볍게 웃었다. 그런데 약왕전 뒤쪽에서 걸어나오던 흑의인이 갑자기 몸을 휘청거리며 금시라도 쓰러질 듯 비틀대기 시작했다.

“엇?”

두 명의 흑의인들은 짤막한 경호성을 터뜨리더니 자신들도 모르게 그를 향해 달려왔다. 그 바람에 그들은 자신의 뒤쪽에 있는 어둠 속에서 황의 인영 하나가 빠르게 대웅전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바닥에 고꾸라질 듯 하던 흑의인의 몸이 비스듬히 회전하며 그들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것은 너무도 갑작스럽고 느닷없이 벌어진 일이라 흑의인들은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입과 눈을 크게 뜬 채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흑의인들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신들의 코앞으로 맹렬하게 돌진해 오는 동료의 모습이었다.

대웅전 안은 사찰 특유의 내음이 짙게 배어 있었다. 유달리 높은 천장에 사방의 벽은 진홍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장정 두 사람이 서로 손을 잡아야만 간신히 닿을 정도로 두꺼운 나무 기둥이 벽의 양쪽에 줄지어 서 있었다. 한쪽 벽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높고 커다란 불단(佛壇) 위에는 사람의 크기만한 세 개의 불상(佛像)이 가지런히 앉아 있었고, 불상의 주위는 온통 수십 수백 개의 촛불들로 뒤덮여 있어 사찰 특유의 위엄과 함께 왠지 모를 몽환(夢幻)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불단의 여기 저기에 붉은 색 휘장이 널려 있다는 것이었다. 휘장은 폭이 석 자쯤 되었는데, 붉은 색이 어찌나 강렬하던지 마치 시뻘건 피로 물들여 놓은 것 같았다. 수백 개의 흔들리는 촛불에 비치는 붉은 색 휘장은 보는 이의 마음을 묘하게 뒤흔드는 마력(魔力)을 가지고 있었다. 불단 앞에는 휘장 만큼이나 붉은 색의 방석 다섯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중 세 개의 방석 위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가장 우측에 앉아 있는 사람은 풍채가 좋고 수염을 늘어뜨린 노승(老僧)이었다. 노승의 얼굴은 나이답지 않게 붉으스름한 혈색이 감돌고 있었는데, 눈을 움직일 때마다 연신 정광(精光)이 뿜어나오는 것으로 보아 정순한 내공의 소유자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노승의 옆에는 짙은 남포를 입은 사십 대의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남포중년인의 얼굴은 비쩍 마른데다 안색이 창백해서 얼핏 보기에는 몸에 커다란 병(病)이라도 있는 사람 같았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 놓여진 남포 중년인의 양 손은 온통 뼈와 힘줄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앙상하게 말랐는데, 이상하게도 손톱 끝이 검은 색으로 물들어 있어 섬뜩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세 번째 방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젋은 남자였다. 피부가 희고 입술이 유난히 붉어서 마치 남장여인(男裝女人)을 보는 것 같았으나, 목젖이 선명하게 튀어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남자임이 분명했다. 그는 알록달록한 화의(華衣)를 입고 있었는데, 단정하게 빚은 머리와 먼지 한 점 묻지 않은 깔끔한 옷차림이 무척이나 돋보였다.

세 사람의 뒤에는 조금 전에 대웅전 앞에서 흑의인들을 지시했던 세 명의 홍포인이 나란히 시립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마주하여 방금 대웅전으로 들어왔던 백의인이 우뚝 서 있었다. 백의인은 대웅전 안에서도 머리에 쓴 차양 넓은 모자를 벗지 않고 있었다. 뒷짐을 진 자세 그대로 대웅전의 중앙에 우뚝 서 있는 그의 모습에서는 광오(狂傲)하면서도 거칠 것 없는 당당한 기세가 느껴졌다. 장내에는 제법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촛불타는 소리만이 들릴 뿐, 조용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때 우측에 앉아 있는 노승이 나직한 기침을 하더니 자신의 앞에 놓인 두 개의 방석 중 하나를 가리켰다.

“쿨룩… 이제는 밤공기가 제법 차갑군. 시주는 이쪽으로 앉으시오.”

노승의 음성은 낮게 가라앉아 있어서 마치 커다란 고목(古木) 아래의 밑둥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백의인은 묵묵히 노승이 가리키는 방석으로 가서 앉았다. 노승은 모자를 깊게 눌러쓴 그를 심원(深遠)한 눈으로 응시하더니 혈색 좋은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못 본 사이에 시주의 안광에 정기(精氣)가 한층 더 충만해져 있구료. 그 사이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오.”

백의인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대사야 말로 신광(神光)이 안으로 잘 갈무리 되어 있고, 피부에 전에 없던 윤기가 흐르는 것으로 보아 신공(神功)을 대성(大成)하신 것 같으니 우선 축하드립니다.”

노승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아미타불. 시주의 눈은 정말 예리하구료. 얼마 전에 약간의 심득(心得)을 깨우쳐 작은 경지 하나를 간신히 넘을 수 있었소. 대성이랄 것까지는 없고 소성(小成) 정도는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게요.”

노승의 말은 겸손한 것이었지만, 그 음성과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에는 자신의 성취에 대한 자부심과 뿌듯함이 담겨 있었다. 백의인도 이를 알았으나, 노승의 그런 심정에 대해서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노승이 익힌 신공은 천하에서도 대성하기가 가장 어려운 공력(功力)중 하나로, 비록 소성이라고 해도 다른 신공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실력 향상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승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시주도 머지 않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게요. 지금 벌써 반쯤은 성취하지 않았소?”

“반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그보다 일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노승의 깊은 눈에 야릇한 빛이 감돌았다.

“시주는 어떠리라고 보시오?”

백의인은 가볍게 웃었다.

“하하… 쾌의당(快意黨)의 조직은 엄밀하고 행사는 치밀하기 그지 없어 그동안 단 한 번도 맡은 청부(請負)를 실패한 적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번 일은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었으니 잘 해결되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물론 어려운 일은 아니었소. 그자들은 특별히 무공이 뛰어난 고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머리가 특출나게 좋거나 재주가 많은 인물도 없었으니까.”

“그럼 청부가 완수되었습니까?”

노승은 의외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완수하지 못했소.”

백의인은 다소 뜻밖인 듯 안광을 빛내며 노승의 얼굴을 뚫어지게 살펴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자들 중에 미처 알지 못했던 실력을 지닌 고수가 숨어 있었습니까?”

“아니오.”

백의인은 다시 물었다.

“그럼 그자들이 제가 알려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까?”

“정확히 시주가 우리에게 알려준 방향으로 왔소.”

“그렇다면 그들 중 기문진식(奇門陣式)이나 용독(用毒)의 대가(大家)가 있어 일을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까?”

노승은 고개를 가로저았다.

“그런 사람은 없었소.”

백의인은 두 눈에 기광을 번뜩이며 재차 물었다.

“그들에게 방수(幇手:도와주는 일행)가 있었습니까?”

“없었소. 오히려 그들은 우리의 계획대로 서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소.”

백의인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었다면 어째서 청부를 완수하지 못했습니까?”

“계획은 완벽했소.”

“그런데요?”

노승은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우리의 계획은 완벽했소.”

백의인은 노승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그의 심원(深遠)한 두 눈을 응시하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런데 일은 실패했다는 말씀입니까?”

노승의 얼굴에 알 듯 모를 듯한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본당(本黨)의 일에 실패란 없소. 지금까지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오.”

“그렇다면 청부를 성공했다는 말씀입니까?”

노승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

“시주의 청부는 정확히 무엇이었소?”

백의인은 노승이 왜 이런 것을 묻는지 의아했으나 순순히 입을 열었다.

“대사께선 여자를 제 앞에 데려오시면 됩니다. 저는 오 일의 기한을 드렸고, 오늘이 바로 오일 째로군요.”

노승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오늘이 청부의 마지막 날이오.”

백의인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런데 여자는 보이지 않는군요.”

노승은 빙그레 웃었다.

“시주는 성미가 급하군. 청부 날짜는 오늘이지만, 오늘이 모두 지나간 것은 아니오.”

백의인은 안광을 번쩍 빛냈다.

“대사의 말씀은 오늘 밤 자정까지 청부를 완수하겠다는 뜻입니까?”

“바로 그렇소.”

“자정이라고 해야 이제 겨우 반 시진(時辰)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한 시간이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정확히 자정이 되는 시간에 우리는 시주에게 그녀를 건네주겠소. 그리고 그것으로 이번 청부는 완료되는거요.”

모자 아래로 살짝 드러나는 백의인의 두 눈에 한 줄기 야릇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알겠습니다. 자정까지 기다리지요.”

노승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지. 그렇게 느긋한 마음을 먹는게 좋소. 아쉽게도 요즘 젊은이들은 왕왕 너무 서두르다가 일을 망치는 경향이 있지.”

백의인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노승은 다시 물었다.

“시주에게도 몇 명의 젊은 사제(師弟)들이 있다고 들었소. 그들도 모두 시주처럼 뛰어난 인물들이오?”

백의인은 짤막하게 말했다.

“그런대로 쓸만한 인물들입니다.”

“다행이군. 정말 다행이야. 시주의 말대로 그들이 쓸만한 인재들이라면 굳이 노납이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백의인의 시선이 다시 노승에게로 향했다.

“대사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요즘 세상은 너무 살벌해서 언제 무슨 변(變)을 당할 지 모른다오. 그들이 정말 쓸만한 인물들이라면 무슨 변이 닥쳐도 자기 한 몸 정도는 충분히 지킬 수 있을게 아니겠소?”

백의인의 눈빛이 두 줄기 칼날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그들에게 변이 닥치다니요?”

“노납은 그저 시주의 사제들이 어쩌면 시주처럼 뛰어난 인물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노파심 에서 한 말이니 너무 신경쓰지 마시오.”

노승은 다시 자애롭게 웃었으나, 백의인은 그 미소가 사갈(蛇蝎)의 독침이라도 되는 양 몸을 한 차례 움찔거렸다.

“대사께선 저의 사제들을 아십니까?”

“변황(邊荒)의 구석에만 쳐박혀 있던 노납이 시주의 사제를 어찌 알겠소?”

“그럼…”

“다행히 노납에게는 몇 명의 친구가 있는데, 그중 한 사람이라면 시주의 사제를 알고 있을 지도 모르겠구료.”

백의인은 급히 물었다.

“그가 누구입니까?”

노승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잠시후면 그를 직접 볼 수 있을테니 시주는 너무 궁금해 할 필요 없소.”

“그렇다면 대사의 친구가 이곳에 온단 말입니까?”

노승은 턱으로 비어 있는 하나의 방석을 가리켰다.

“그렇소. 그래서 그의 자리도 저렇게 마련해 놓지 않았소?”

그제서야 백의인은 이곳에 방석이 다섯 개가 놓여 있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원래 그는 방석이 하나 남은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정확히 이곳에 올 사람의 수를 계산하여 다섯 개의 방석을 갖다 놓은 것이었다.
백의인은 내심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졌다.
사소한 일이었지만, 이것 하나만 보아도 쾌의당의 행사가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고 치밀하다는 세간의 소문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백의인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그 뒤로 묵묵히 침묵을 지킨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때 갑자기 소리도 없이 대웅전의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그와 함께 한 줄기의 바람이 불어와 불단에 있는 수 백개의 촛불들이 마구 아우성을 쳤다.

“왔군.”

노승의 입에서 짤막한 음성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백의인은 대웅전의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 나타났는지, 대웅전의 입구에는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봉두난발을 하고 허름한 마의(麻衣)를 입은 사람이었다.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얼굴을 온통 뒤덮고 있어서 얼굴은 물론이고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마의 사나이의 허리춤에는 칼집도 없는 장검 하나가 달랑 메어져 있었는데, 녹이 잔뜩 슬어 있어 사람은커녕 무 한쪽도 베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마의 사나이를 보는 순간 지금까지 냉정할 정도로 침착을 유지하고 있던 백의인의 몸이 미약하게 떨리며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백의인은 곧 자세를 안정시켰으나 마음 속의 격동이 적지 않았던 듯 눈빛이 마치 활개치는 나방의 날개처럼 쉴 사이없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허깨비처럼 갑작스럽게 나타난 마의 사나이는 성큼성큼 대웅전 안으로 들어오더니 유일하게 남아 있는 방석으로 가서 털썩 주저 앉았다.
그것은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는 거칠 것 없고 자유분방한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말없이 앉아 있던 남포중년인과 화의 청년은 힐긋 눈을 들어 마의 사나이를 쳐다보았으나 이번에도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노승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갔던 일은 잘 됐는가?”

마의 사나이는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내가 갔는데 일이 잘 돼지 않았다면 정말 우스운 일 아니겠소?”

마의 사나이의 걸걸한 음성 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강한 자신감과 패기가 담겨 있었다.
우연인지 그때 노승은 힐긋 백의인을 돌아보았는데, 백의인을 쳐다보는 노승의 얼굴에는
진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래서 노납도 안심하고 자네를 보낸 것일세. 일을 처리하는데 걸리적거리거나 방해하는
사람은 없었나?”

“한 놈이 있기는 있었소.”

“그자는 어떻게 되었나?”

마의 사나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시큰둥한 어조로 대답했다.

“워낙 날다람쥐같이 재빠른 놈이라서 팔 하나만 남겨두고는 도망치고 말았소.”

그 말에 백의인의 몸이 다시 움찔거렸다. 노승은 나직하게 혀를 찼다.

“쯧쯧… 자네 손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면 제법 솜씨가 좋은 인물인 모양인데 팔병신이 되었다니 안타깝군. 전리품은 지금 어디 있나?”

“뒷뜰에 갔다 놓았소.”

“수고했네.”

노승은 자애롭게 말하고는 다시 백의인을 쳐다보았다.

“아직 자정이 되지는 않았지만 이제 슬슬 청부를 마무리할 시간이 된 것 같군. 시주 생각은 어떠시오?”

백의인은 그때까지도 마의 사나이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돌연 지금까지와는 다른 냉랭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대사 말대로 일을 더 질질 끌 필요가 없겠소. 사람은?”

“물론 넘겨 주겠소. 하지만 그 전에 계산을 확실하게 끝내야겠지.”

백의인은 성광(星光)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노승을 쳐다보다가 품속에서 둘둘 말은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들었다.

“물건은 여기 있소. 사람만 넘겨주면 약속대로 물건을 드리겠소.”

노승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시주는 노납이 만난 사람 중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똑똑한 사람이오. 그러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게 아니겠소?”

백의인의 눈쌀이 찌푸려졌다.

“부족하다니… 분명 청부는 사람과 지도(地圖)를 맞바꾸기로 한 것 같은데 그새 대사의 기억력이 흐려졌단 말이오?”

“물론 당초의 약속은 그러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소.”

“달라지다니…”

“사람 하나와 지도 하나를 바꾸기로 했지만, 지금은 두 사람이 추가 되었소.”

“그게 무슨 말이오?”

“우리 측에서 두 사람의 목숨의 빚이 추가되었다는 말이오.”

“일을 진행하다가 벌어진 손실까지 보상해 주겠다는 약속은 한 적이 없소.”

노승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으나, 조금전과는 달리 어딘지 모르게 비틀린 듯한 웃음이었다.

“시주는 똑똑해서 말이 쉽게 통하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청부 도중 벌어진 피해는 물론 보상할 필요가 없소. 하지만 그들 두 사람은 종남파 고수들에게 당한 게 아니오.”

“……!”

“목극등과 막익(莫翊)은 나습고찰의 십대호령에 속해 있는 인물들이오. 그들 두 사람의 목숨에 대한 빚은 따로 계산해 주어야 겠소.”

백의인은 이내 퉁명스런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그 빚을 왜 내가 계산해야 한단 말이오?”

노승의 눈에서 갑자기 섬전(閃電)을 방불케 하는 안광이 폭사해 나왔다. 그와 함께 노승의 두 눈을 중심으로 얼굴 표정이 마치 철갑을 씌운 듯 차갑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온화한 모습과는 다른 섬뜩하고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다.

“시주는 목극등과 막익만 제거하면 사람도 빼앗고 지도도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강호란 그렇게 녹록한 곳이 아니오.”

노승의 음성 또한 어느 새 빙굴(氷窟)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냉혹하고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목극등과 막익의 행방이 없어진 후 우리는 이 일대 백여리를 이잡듯이 뒤졌소. 그래서 북쪽 청죽림(靑竹林)에서 그들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지. 그들의 시신에 혈라인의 흔적을 남긴 것은 너무 경솔한 행동이었소.”

노승의 시선은 두 개의 칼날처럼 백의인의 얼굴에 못박히듯 고정되었다. 그와 함께 지금까지 무심히 앉아 있던 남포중년인과 화의 청년의 자세가 묘하게 변화를 일으켰다. 그들은 여전히 방석 위에 앉아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방석의 위치가 바뀌어 백의인의 퇴로를 교묘하게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방석이 저절로 움직였을리는 없으니, 이것은 다시 말하면 두 사람의 무공이 마음먹은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경지에 올라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누구라 할지라도 이런 고수들을 앞에 두게 된다면 오금이 저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백의인은 마치 하나의 석상(石像)처럼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흠… 그것은 모두 그 밥통같은 내 사제의 실수요. 그토록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 했는데, 목적을 이룬 것에 너무 기뻐한 나머지 화골산(化骨散)으로 시체를 없애야 한다는 것을 깜박 했던 거요. 내가 그토록 신신당부를 했거늘…”

백의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녀석은 일전에도 실수를 저질러서 일부러 만회할 기회를 주었던 것인데 또 다시 실수를 하다니… 팔병신이 된 것도 당연한 일이지.”

노승은 차갑게 웃었다.

“시주는 똑똑한 인물인데 왜 중요한 일은 남의 손에 맡기지 말라는 무림계의 격언을 무시했는지 모르겠군.”

백의인은 피식 웃었다.

“내 천성(天性)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이번 일을 당신들에게 맡기지도 않았을거요. 진작에 내 손으로 해결했겠지.”

노승은 묘한 눈으로 백의인을 쏘아보았다. 조금 전만 해도 의기소침해 보였던 백의인이 자신의 음모가 발각된 후로는 오히려 한층 더 여유있고 느긋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천성이군. 아무튼 그 때문에 우리는 약간 애를 먹었으니, 시주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루어야 할거요.”

백의인은 돌연 정색을 했다.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소?”

“목숨의 빚은 목숨으로 받는다는 것이 본당(本黨)의 철칙(鐵則)이오. 시주는 우리에게 두 사람의 목숨을 빚졌으니 두 개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오.”

“내 목숨을 내놓으라는 말이오?”

노승은 묘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가 달란다고 시주가 선뜻 내놓을 리 있겠소?”

“그럼 누구의 목숨을 달라는거요?”

노승은 돌연 대웅전 위에 걸쳐진 커다란 들보를 가리켰다.

“저 위에 숨어 있는 두 사람이오.”

그 말을 끝으로 장내에는 괴이한 정적이 감돌았다. 백의인은 여전히 그 자리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그런데도 장내의 공기는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어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그대로 터져나갈 것 같았다. 들보 위에서 두 개의 인영이 떨어져 내린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휙!

대웅전의 중앙에 내려선 인영들은 다름아닌 황의 청년과 젊은 도사였다. 청년 도사는 자신들의 종적이 발각된 것이 약간은 부담스러운 듯 표정이 조금 굳어 있었고, 황의 청년은 멋적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