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6권 서장격변(西藏激變)편 : 2화
제49장. 살수무궁(殺手無窮)
수강루(水江樓)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진산월은 한동안 수강루의 주위를 서성이며 인기척을 찾아보았으나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상원건과 낙일방 등이 기다리기로 했는데, 그들은 고사하고 지나가는 행인조차 없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문 한쪽 구퉁이에 조그맣게 쓰인 몇 개의 글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섬서성(陝西省) 안강(安康) 북방(北方) 귀화정(鬼火井)으로 감. 상(常) >
가을날의 오후는 어김이 없었다.
서쪽 하늘이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하더니, 신시(申時)경이 되자 붉은 기운이 점차 강해져 마침 내는 온 하늘이 불타오르는 듯한 노을로 뒤덮여 버렸다.
황혼(黃昏)이 지는 안강(安康)의 거리는 온통 술에 취한 듯 했다.
지나가는 행인(行人)들의 얼굴도 술에 취한 듯 붉어 보였고, 처처(處處)히 늘어선 상점과 주루들도 붉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석양의 긴 그림자를 밟으며 안강성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한 인영이 있었다.
피곤한 걸음걸이로 금시라도 쓰러질 듯 흐느적거리며 걷고 있는 그는 남루한 의복을 걸친 비렁뱅이 노인이었다.
비렁뱅이 노인의 까치집처럼 헝클어진 백발 성성한 머리카락에는 비듬이 수북했고, 얼굴에는 찌든 가난과 굶주림으로 인한 흔적들이 구석구석에 짙게 배어 있었다.
비렁뱅이 노인에게 있어 붉은 석양은 이제 곧 밤이 다가오고, 자신은 잠자리를 구해야 한다는 고달픈 신호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비렁뱅이 노인의 느린 걸음은 안강성의 남문대로(南門大路)를 따라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졌다.
그 남문대로가 거의 끝나는 곳에 한 채의 허름한 주루가 자리하고 있었다.
<열빈루(悅賓樓)>.
손님을 기쁘게 맞는다는 이름답지 않게 주루는 작고 지저분했으며, 다른 주루들처럼 밖에 나와서 손님을 맞이하는 점원도 없었다.
간판은 여기저기 금이 가고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어서 바람만 세게 불어도 어디론가로 날려가 버릴 것만 같았고, 입구는 빗질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지저분한 쓰레기더미들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주루 안을 들어가 보면 더욱 한심했다.
때가 꼬질꼬질한 탁자 너댓 개가 손님도 없이 덩그라니 놓여져 있었고, 오른쪽에 유일하게 뚫려 있는 창문은 여기저기 구멍이 마구 뚫려 있어 비라도 내리면 비바람이 그대로 안으로 들이칠 것이 분명했다.
점원도 없는지 입구에 쓸쓸하게 놓여져 있는 계산대 앞에는 주방장 겸 주인인 듯한 중늙은이 하나가 멍한 눈으로 문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 텅빈 눈에 담겨 있는 것은 간신히 억눌러 참고 있는 권태와 허무, 그리고 삶에 찌들대로 찌든 암담한 절망 뿐이었다.
그때 한 사람이 비실거리며 주루 안으로 들어왔다.
모처럼 찾아온 손님이니 반색을 하며 반길 법 한데도 중늙은이는 힐끗 들어온 사람을 보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주루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한 눈에 보기에도 거지임을 알 수 있는 비렁뱅이 노인이었다.
비렁뱅이 노인은 금시라도 쓰러질 듯한 힘없는 걸음으로 입구에서 가까운 탁자로 다가가더니 간신히 의자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리고는 쭈글쭈글한 손으로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쓸쓸하게 중얼거렸다.
“배가 고프니까 걷는 것조차 힘들구나. 이럴 때 따끈한 국물에 찐만두라도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비렁뱅이 노인은 주섬주섬 자신의 품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참동안이나 뒤적거리던 노인이 누런 구리동전 하나를 찾아내더니 반색을 하며 주방장을 향해 손을 마구 흔들었다.
“이보시오. 어서 이리 와서 주문을 받으시오.”
주방장은 귀찮다는 듯 눈쓸을 찌푸리더니 노인이 다시 소리쳐 부르자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마치 굼벵이가 기어가는 듯 느린 걸음으로 노인에게 다가와서는 퉁명스런 어조로 물었다.
“무얼 드시겠수?”
“여기 따끈한 닭국물 하나와 찐만두 일인분만 주시오.”
주방장은 노인의 위 아래를 쓰윽 훑어보고는 다시 물었다.
“돈은 있수?”
노인은 손에 들고 있는 구리 동전을 들어 보였다.
“이거면 되지 않겠소?”
“그걸로는 닭국물과 찐만두 중 하나밖에는 시킬 수 없소.”
노인은 울상을 지었다.
“그새 가격이 많이 올랐나보군. 어쩌지? 닭국물도 먹고 싶고 찐만두도 먹고 싶은데…”
노인은 끙끙거리며 고민을 하더니 주방장을 올려보며 누런 이를 드러내고 히죽 웃었다.
“이러면 안되겠수? 닭국물 반 그릇에 찐만두 반인분…”
주방장은 눈썹을 찡그리며 거절하려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휑하니 몸을 돌려 주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노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탁자 위에 피곤한 몸을 비스듬히 기대었다.
잠자리는 몰라도 일단 하루의 배고픔은 해결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이제는 동전 한 잎 남아 있지 않아서 내일부터는 또 다시 구걸을 해서 연명해야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일 걱정해야 할 문제였다.
그저 오늘 하루를 배고프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으며 지낼 수만 있다면 그 이상의 욕심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때 다시 한 사람의 손님이 주루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에 들어온 사람은 허름한 마의(麻衣)를 입은 장삿꾼이었다.
등에 작은 봇짐을 맨 장삿꾼의 어깨와 머리 위에는 뽀얀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어 제법 먼 길을 걸어왔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장삿꾼은 주루 안을 한 차례 둘러보더니 창문 가에 있는 탁자로 가서 앉았다.
등에 맨 봇짐을 내려놓고 어깨와 머리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 장삿꾼은 어깨가 뻐근한 지 잠깐 기지개를 켜더니 주방쪽을 쳐다보았다.
그때 마침 구수한 냄새와 함께 주방장이 김이 모락모락나는 쟁반을 들고 주방에서 걸어나왔다.
노인은 흐뭇한 눈초리로 주방장이 탁자 위에 닭국물이 담긴 그릇과 다섯 개 가량의 찐만두가 얹혀 있는 접시를 내려 놓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허겁지겁 음식에 달려들줄 알았던 노인은 느릿느릿한 손길로 닭국물이 담긴 그릇을 들더니 코에 갖다대고 깊이 들이마셨다.
“흐음… 정말 좋군. 이 냄새는 언제 맡아도 식욕을 돋군단 말이야.”
노인은 다시 몇 차례나 숨을 들이마신 다음에야 비로소 천천히 닭국물을 한 모금 마시기 시작했다. 닭국물이라고 해야 닭뼈를 푹 삶은 물에 약간의 양념을 한 것에 불과했지만, 노인은 그것이 천하에 다시 없는 진미(珍味)라도 되는 양 한 모금 마시고는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노인은 다시 찐만두 하나를 잡더니 그 끝을 조금 뜯어 입속에 집어 넣고 우물거렸다. 질기디 질긴 소고기라도 씹는 것처럼 수십 번이나 씹은 다음에야 간신히 찐만두 조각을 삼키고는 입맛을 몇 번 다시더니 다시 닭국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처음처럼 닭국물의 냄새를 깊이 들이마시더니 천천히 한 모금을 마시는 것이었다.
주방장은 노인의 이런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더니 갑자기 새로운 손님이 왔다는 것을 깨달은 듯 장삿꾼에게 다가갔다.
“무얼 드시겠수?”
“저 노인처럼 닭국물 하나하고 찐만두 한 접시, 그리고 잘 구운 닭 한 마리와 술 한 병 갔다 주시오.”
주방장은 조금 전에 노인의 주문을 받았을 때처럼 장삿꾼의 아래 위를 쓰윽 훑어보더니 물었다.
“돈은 있수?”
장삿꾼은 품속을 뒤적거리더니 이내 은화 한 잎을 꺼내 주방장의 코앞에 대고 흔들어 보였다.
“여기서는 꼭 돈을 보여줘야 음식을 먹을 수 있단 말이오? 거 참 인심 한 번 고약한 동네로군.”
주방장은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별반 표정없는 얼굴로 장삿꾼이 들고 있는 은화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그때 다시 주루 안으로 두 사람이 들어왔다. 아무래도 저녁 때가 가까워 오는지라 이토록 허름하고 볼품없는 주루에도 손님들이 조금씩 몰려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번에 들어온 사람은 한 쌍의 젊은 부부였는데, 이곳에 올 손님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의복을 입고 있었다. 남편은 비쩍 마른 체구에 신경질적으로 생겼으나, 이목구비는 제법 수려한 편이었다. 반면에 여자는 육감적인 입술에 선정적이고 야릇한 표정을 지닌 미인이었으나, 몸매가 조금 풍만한 것이 아쉬움을 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꼬옥 잡은 채 주루로 들어와서는 눈쌀을 잔뜩 찌푸렸다. 그도 그럴것이 명색이 음식을 파는 주루치고는 너무나 더럽고 지저분한데다, 있는 손님이라고는 꾀죄죄한 몰골의 노인 한 명과 행색이 초라한 상인 뿐이었으니, 이런 곳에서 음식맛이 제대로 날 리가 없었다.
남자는 다시 몸을 돌려 나가려 했으나, 여자가 살짝 그의 손을 잡아 끌었다.
“그냥 있어요. 이런 곳이 의외로 음식 맛은 좋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육감적인 몸매 만큼이나 끈적끈적하고 달콤한 것이었다. 남자는 연신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손에 이끌려 구석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주방장이 주방에서 나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주방장은 양 손에 커다란 접시 두 개를 낑낑거리며 들고 오더니 장삿꾼의 탁자 위에 올려 놓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짓도 이제는 힘들어서 못해먹겠군. 다 때려치고 농사나 하러 갈까?”
음식을 먹기도 전에 주방장이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손님이라도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장삿꾼은 못마땅한 눈으로 주방장을 흘겨보고는 이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주방장의 행태를 보아서는 음식 맛도 별로 신통치 않을 것 같았는데, 그런대로 먹을만 한지 구운 닭과 찐만두를 먹는 장삿꾼의 얼굴이 한결 누그러졌다.
구석의 자리에 있던 여자가 주방장을 손짓해 불렀다.
“이리 좀 와봐요.”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유곽(遊廓)에서 기녀가 손님을 부르는 것으로 착각할 만큼 그녀의 음성이나 태도에는 교태가 흐르고 있었다. 주방장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오자 그녀는 뱅어같은 손으로 장삿꾼을 가리켰다.
“저기 저 사람이 먹고 있는 찐만두가 맛있어 보이는군요. 저 찐만두하고 청초육사(靑椒肉絲) 하나만 해줘요. 당신은 무얼 먹을래요?”
그녀의 옆에 시큰둥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비쩍 마른 남자가 힐끗 주방장을 올려보더니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청증가어(靑蒸加魚)와 녹두활어(綠豆活魚)…”
하나 그가 채 요리 이름을 반도 말하기 전에 주방장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우리 집에서는 그런 요리는 안되니 다른 걸 시키시오.”
남자는 이래저래 성에 안차는 듯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런 기초적인 것도 안된다니… 그럼 포어편탕(鮑魚片湯)과…”
“생선 요리는 안되오.”
남자의 눈이 심술궂게 반짝거렸다.
“그럼 홍배웅장(紅배熊掌)나 삼사타봉(三絲駝峰)은?”
홍배웅장이란 곰의 발바닥을 삼일 동안 찐 요리이고, 삼사타봉은 낙타의 혹으로 만든 요리였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북경이나 금릉의 커다란 요리점에서나 간신히 맛볼 수 있는 희귀한 것들이니, 당연히 이런 작고 허름한 주루에서 만들 리가 없었다.
“그것도 안되오. 돼지고기와 닭 요리만 되오.”
“그럼 취계(醉鷄)와…”
남자가 다시 심술궂은 표정으로 무언가 복잡한 요리를 시키려 하자 여자가 그의 팔을 살짝 꼬집으며 웃었다.
“호호… 그만 해요. 이 사람은 계란탕과 볶음밥을 주세요.”
남자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볶음밥은 싫어. 그냥 찐만두나 먹겠어.”
“그럼 그렇게 하세요. 여기 찐만두 이인분과 청초육사 하나만 해주세요.”
주방장은 쭈삣거리며 무어라고 말하려 했다. 아마도 이 두 사람에게도 음식 시킬 돈이 있느냐고 물어보려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그때 여인이 품속에서 금화 한 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음식 값은 이거면 충분할 거에요.”
주방장은 멀뚱한 눈으로 금화와 그녀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거슬러 줄 돈이 없는데…”
금화 한 냥이면 은화 스무 냥에 해당하니 웬만한 가족이 육개월은 족히 생활할 수 있는 거액이었다.
여인은 야릇한 눈웃음을 쳤다.
“음식이 맛없으면 물론 거스름돈을 받겠지만, 입맛에 맞는다면 거스름돈은 필요없어요.”
주방장은 귀가 번쩍 뜨이는 지 한 번 더 금화를 유심히 내려다 보고는 이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기다리시오.”
주방장이 주방안으로 사라진 후 주루 안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비렁뱅이 노인은 여전히 닭국물 한 모금 마시고 찐만두를 조금 찢어 먹는 단조로운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건만 그는 이제 겨우 찐만두 두 개를 먹었을 뿐이었다.
아마 이런 식으로 이곳에서 밤을 세우려는 의도가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에 비해 장삿꾼은 찐만두와 닭 한 마리를 눈 깜짝할 새 모두 먹어치우고는 느긋한 표정으로 술을 따라 마시고 있었다.
주루 안이 조금 지저분하고 비좁다는 것 외에는 여느 주루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풍경이었다.
적어도 또 다른 손님이 들어올 때까지는….
이번에 들어온 손님은 여러 가지 면에서 먼저 들어온 다른 손님들과 틀렸다.
우선 그는 등에 커다란 파풍도(破風刀)를 메고 있어서 한 눈에 무림인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체구는 건장했고 턱 밑으로 검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눈빛이 어찌나 날카롭고 매섭던지 마치 한 자루의 날이 시퍼렇게 선 칼날을 보는 것 같았다.
파풍도의 사나이는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더니 입구 쪽에 있는 빈 자리로 가서 털썩 앉았다.
그가 앉음과 동시에 장내의 공기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비렁뱅이 노인은 지금까지 느리게 먹고 있던 찐만두 세 개를 한꺼번에 입 속에 우겨넣었다.
그 모습은 마치 지금 먹지 못하면 영원히 그 만두들을 먹지 못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장삿꾼은 남아 있던 술병을 목구멍에 모두 부어 넣었다.
그 모습 또한 영락없이 지금 마시지 못하면 영원히 술병을 비우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는 술꾼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두 명의 부부만이 아무 일 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는데, 여인은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연실 방글방글 미소짓고 있었고, 남자는 오히려 화가 난 사람처럼 퉁명스런 표정이었다.
파풍도의 사나이는 누구를 기다리는지 연신 입구 쪽을 쳐다보았다.
때때로 그의 눈에서 번쩍하는 섬광이 이글거리며 뿜어나오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에 바짝 긴장해 있거나 아니면 마음 속에 살심(殺心)이 들끓고 있는 듯 했다.
그때 다시 주방에서 주방장이 찐만두가 가득 담긴 쟁반과 구수한 냄새가 풍기는 접시를 들고 나왔다.
주방장은 구석의 젊은 남녀에게로 가서 탁자 위에 쟁반과 접시를 올려 놓았다.
“냄새가 좋군요.”
여인은 재빨리 젓가락을 들고 찐만두 하나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는 입을 오물거리며 만두 하나를 맛있게 먹고는 이내 옆의 남자에게 손짓을 했다.
“당신도 먹어요. 이집 음식이 맛이 괜찮네요.”
남자는 뚱한 얼굴로 마지 못해 찐만두를 집어 들었으나 선뜻 입에 넣지 않고 물끄러미 만두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밥 먹기 싫어하는 어린 아이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여인은 찐만두와 청초육사를 번갈아 먹고 있다가 이 광경을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먹기 싫으면 관둬요. 이럴 때는 꼭 어린애 같다니까.”
남자는 입술을 삐죽거렸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찐만두를 먹기 시작했다.
일단 하나를 먹자 그래도 제법 먹을만한지 표정이 조금 누그러지며 연거푸 몇 개를 더 집어 먹기 시작했다.
그제 서야 주방장은 마음이 놓이는지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놓인 금화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여인이 별다른 제지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주방장은 재빨리 금화를 손에 쥐고는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조금만 더 지체하면 당장이라도 여인이 금화를 돌려달라고 할까봐 두려워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때 갑자기 입구 쪽에 앉아 있던 파풍도의 사나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막 주방안으로 들어가려던 주방장은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아마도 자신이 주문을 받지 않자 그가 화를 내는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파풍도의 사나이의 시선은 줄곧 주루의 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주방장은 사나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주루의 밖 거리에는 마침 두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짙은 남의와 황의를 걸친 인물들이었는데, 키가 조금 작고 얼굴이 가무잡잡하다는 것 외에는 별달리 특이한 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을 보는 파풍도의 사나이의 가슴이 연신 크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으로 보아 마음 속의 격동이 크게 일어남을 알 수 있었다.
주방장은 파풍도의 사나이가 당장이라도 밖으로 달려나가리라고 생각했다.
하나 이번에도 주방장의 짐작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금시라도 칼을 뽑아 들고 달려나갈 것만 같았던 파풍도의 사나이가 돌연 그 자리에 다시 털썩 주저 앉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고개를 돌려 주방장을 보더니 손짓해 부르는 것이었다.
“이봐. 여기 주문 안받아?”
주방장은 막 주방 안으로 들어가려다 할 수 없이 그에게로 비실비실 다가왔다.
“뭘 드시려우?”
파풍도의 사나이는 주위를 둘러 보더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찐만두를 먹고 있는 것을 보고는 퉁명스런 어조로 말했다.
“찐만두 일인분. 최대한 빨리 갔다줘.”
주방장은 이번에도 돈을 먼저 보여달라고 하려다 파풍도의 사나이가 그만 가보라는 듯 손을 내젓고는 다시 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한 차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주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파풍도의 사나이의 시선은 다시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두 명의 인물에게로 쏠려 있었다.
그들을 보는 파풍도 사나이는 조금 전과는 달리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때였다.
길을 걸어가던 두 명의 인물이 갑자기 서로 쑤근거리더니 주루 안으로 불쑥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파풍도의 사나이는 움찔 놀라는 기색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보는 척 했다.
두 명의 인물은 주루 안으로 들어오더니 주위를 둘러보고는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토록 낡고 허름한 주루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 뜻밖이었던 모양이다.
아닌게 아니라 탁자라고는 다섯 개뿐인 코딱지만한 주루에 이미 네 개의 탁자가 모두 차 있으니 평상시라면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두 명의 인물이 막 마지막으로 남은 탁자에 가서 앉으려 할 때 다시 또 한 사람이 주루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번에 들어온 사람은 누런 황의를 걸치고 체구가 건장한 청년이었다. 먼 길을 달려온 듯 머리와 어깨에 먼지가 수북하게 앉았고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가득해서 초췌해 보일 법도 한데, 의외로 순박한 표정에 눈빛이 맑아서 별로 누추하다거나 추레한 느낌이 없었다. 황의 청년은 주루 안에 들어와 주위를 둘러보고는 난처한 듯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주루 안에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다시 돌아나가려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 차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장내를 한 차례 둘러보았다. 그러다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혼자 앉아 있는 파풍도의 사나이에게로 다가갔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합석(合席)을 해도 되겠습니까?”
파풍도의 사나이는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 상념에 잠겨 있다가 퍼뜩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먼지가 잔뜩 묻은 얼굴 하나가 그를 내려다 본 채 미소 짓고 있었다. 덩치가 커서 조금 둔해 보였으나,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이 부드럽고 온화해서 친근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파풍도의 사나이는 귀찮은 듯 조금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게.”
“감사합니다.”
황의 청년은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그의 앞에 털썩 앉았다. 커다란 몸집의 그가 앉자 의자가 견디지 못하고 가느다란 비명을 내질렀다. 황의 청년은 멋적게 웃더니 다시 파풍도의 사나이를 쳐다보며 웃었다.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이 무척 많군요. 이 집 음식이 맛있는 모양입니다.”
파풍도의 사나이는 퉁명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난 모르네. 이 집이 처음이니까.”
“그러시군요. 저도 처음입니다.”
황의 청년이 계속 말을 걸어올 것 같자 파풍도의 사나이는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의 청년은 다시 뒷통수를 긁적거리더니 이번에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래도 혼자 멍하니 앉아 있기는 심심했던 모양이었다. 비렁뱅이 노인은 어느 새 찐만두를 다 먹고 닭국물이 조금 남아 있는 그릇을 아쉬운 듯 내려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을 핥아 먹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장삿꾼 또한 음식을 거의 모두 먹고 마지막 남은 술잔을 홀짝거리고 있었고, 젊은 남녀들도 이미 음식을 대부분 먹어 치운 상태였다. 비렁뱅이 노인은 마침내 결심한 듯 코를 그릇에 처박고 소리를 내며 핥기 시작했다. 황의 청년은 그 모습을 보고 한심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 다시 주루에서 주방장이 찐만두를 들고 나타났다. 주방장은 새로 몇 사람의 손님이 늘어난 것을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손님이 늘면 좋은 일이건만, 주방장은 그보다는 일거리가 늘어난 것이 더 싫은 모양이었다. 주방장은 파풍도의 사나이 앞에 찐만두를 내려놓고는 황의 청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무얼 시키겠느냐는 의미가 담긴 시선이었다. 파풍도의 사나이가 찐만두 하나를 막 집어 들고, 황의 청년이 음식을 주문하려 할 때였다. 갑자기 옆 자리에 있던 두 명의 인물이 벼락 같은 기세로 파풍도의 사나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의 공세는 너무도 갑작스럽고 느닷없이 벌어진 일이라 파풍도의 사나이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그의 전신은 거의 무방비 상태로 두 사람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다. 더구나 그때 파풍도의 사나이는 찐만두를 먹느라 오른손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칼을 뽑아 반격할 엄두도 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파파팍!
손그림자가 허공을 가득히 뒤덮으며 세찬 경풍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손그림자가 사라지자 장내의 광경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파풍도의 사나이는 양손을 두 명의 인물들에게 각기 붙잡힌 채 의자에서 엉거주춤하게 일어난 상태로 굳어 있었다. 그의 크게 뜨여진 눈과 반쯤 벌어진 입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가 얼마나 크게 놀랐는지를 여실히 나타내 주고 있었다. 주루 안의 다른 손님들은 모두 경악과 공포의 표정을 짓고 있었고, 주방장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탁자 밑으로 몸을 숨기며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난리냐?”
파풍도의 사나이의 오른손목을 움켜쥔 남의를 입은 인물이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 우리가 먼저 선수를 칠 줄은 몰랐겠지?”
파풍도의 사나이는 양손의 완맥이 제압당해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으나, 아혈(啞穴)은 짚히지 않은 듯 퉁방울만한 눈을 굴리며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나는 두 분과 일면식도 없는데 대체 왜 이러는 거요?”
남의를 입은 인물의 입가에 냉랭한 비웃음이 떠올랐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백리(百里)나 우리 뒤를 졸졸 따라왔으면서도 몰랐다고 한다면 누가 믿겠나?”
파풍도의 사나이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난 그런 적이…”
“강패(康覇)! 벽력도(霹靂刀)라는 이름이 아깝구나.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오리발을 내밀려 하다니…”
남의를 입은 인물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파풍도의 사나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더니 오히려 당당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새북쌍살(塞北雙煞)! 내가 비록 일순간의 방심으로 너희들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지만 내 입을 통해서는 단 한 가지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흐흐… 그거야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
남의를 입은 인물은 슬쩍 강패의 왼손을 잡고 있는 황의를 입은 사나이에게 눈짓을 했다. 황의를 입은 사나이는 그때까지도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묵묵히 서 있다가 남의를 입은 인물의 눈짓을 받자 이내 손을 내밀어 강패의 가슴팍을 가격했다.
팡!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펼쳐 강패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후려치는 그의 동작은 얼핏 보기에는 어린아이의 장난처럼 대수롭지 않아 보였으나, 강패의 얼굴은 이내 흙빛으로 변했다.
“흐윽!”
그는 양 손이 제압당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인데도 전신의 몸을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그의 눈이 부릅떠지고 입술이 악다물어지는 것으로 보아 겉보기와는 달리 황의의 사나이의 동작이 그에게 심한 통증을 가져다 준 모양이었다. 남의를 입은 인물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띄었다.
“내 동생의 이 수법은 분신음화(焚身陰火)라는 것인데, 그가 익힌 열 두 가지 고문수법 중에서 가장 약한 것이지. 이걸 견딘다면 나머지 열 한 가지 수법도 차례로 겪게 해주지.”
강패는 안면근육을 부르르 떨면서도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미 그의 몸에서는 비오듯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남의를 입은 인물은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 하고 있군. 하지만 아직 아무 것도 묻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입 다물고 있을 필요는 없네. 아프면 마음놓고 소리를 지르라구. 내가 물어본 다음에 입을 다물어도 늦지 않으니 말이야.”
주루에 있던 중인들은 때아닌 고문 장면에 놀라고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중에서도 젊은 여인은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며 남자의 품속에 반쯤 안긴 채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어찌나 두려웠던지 그녀는 아직도 만두를 집어 먹던 젓가락 두 짝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남의를 입은 인물은 강패의 수염이 덥수룩하게 나 있는 뺨을 톡톡 건드렸다.
“자. 그럼 우선 첫 번째 질문을 던지지. 자네의 고향은 어디인가? 대답을 하면 분신음화를 풀어주지.”
중인들은 남의를 입은 인물의 질문이 다소 뜻밖인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떠올렸다. 하나 이것이 원래 숙련된 고문자의 수법이었다. 처음에는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던져 상대방의 입을 열게 한 다음, 점차로 자신이 알고자 하는 사안을 캐내는 것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아무리 단단한 각오를 하고 있어도 일단 입을 열게 되면 의외로 순순히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이 사람의 생리였다. 강패는 과연 머뭇거리다가 이 정도라면 말해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했는지 반쯤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호북성(湖北省) 당양(當陽)이오…”
“오. 말이 통하는 친구로군. 나도 약속을 지키겠네.”
남의를 입은 인물이 턱짓을 하자 황의의 사나이가 다시 강패의 가슴을 조금 전과 같은 방식으로 쳤다. 그러자 강패는 그토록 자신의 전신을 불로 지지는 것 같았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안색이 조금 풀어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남의를 입은 인물은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어디서부터 우리 뒤를 따라왔나?”
강패의 얼굴에 다시 망설이는 빛이 역력했다. 남의를 입은 인물은 피식 웃었다.
“내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건 그저 자네에게 좀더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함이야. 설마 자네는 내가 그걸 몰라서 묻는다고 생각하는건 아니겠지? 물론 자네가 열 두 가지 수법을 모두 맛보고 싶다면 내 생각도 달라지겠지만.”
강패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백하(白河)부터요.”
“점점 자네가 마음에 드는군. 나도 자네가 백하에서 우리 뒤를 쫒아온다는걸 알았지. 하지만 전가령(錢家嶺)에서 자네를 따돌렸다고 생각했는데, 자네의 운이 좋은건지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된걸세.”
강패는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 운이 정말 좋았다면 어찌 이런 꼴이 되었겠소?”
“살아 있다는건 정말 운이 좋은거야. 우리가 자네를 죽이지 않고 이렇게 살려둔 것만 보아도 자네의 운이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지. 안그런가?”
“……!”
“그럼 이제 다음 질문을 던지겠네. 자네가 우리 뒤를 쫒아온 것은 누군가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일텐데, 그렇지 않나?”
강패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에게 우리를 뒤쫒으라고 지시한 사람이 누구인가?”
강패는 다시 머뭇거렸다. 남의를 입은 인물은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나직하면서도 위협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는 바보가 아닐세. 아까도 말했지만 정말 몰라서 자네에게 이런 걸 묻는게 아니야. 우리로 하여금 자네 몸을 걸레쪽처럼 너덜너덜하게 만들도록 하지 말게.”
강패는 안색이 변해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때마침 황의의 사내가 그의 손을 쓰윽 쓰다듬자 강패는 소름이 오싹 돋는 듯 진저리를 쳤다.
“마… 말하겠소. 그는 이정문(李正文)이오.”
남의를 입은 인물의 눈에서 번갯불같은 섬광이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역시 그렇군. 짐작대로야. 이제 자네는 그를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지만 말해주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네.”
강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가늘게 떨기만 했다. 그의 눈빛이 수시로 변하며 눈썹이 연신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음 속의 갈등이 극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의를 입은 인물은 입술을 비틀며 괴이하게 웃었다.
“흐흐… 말하기 싫다면 관두게. 우리의 방식으로 알아보면 되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황의의 사나이가 오른 손을 번쩍 쳐들었다. 강패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채 공포에 가득 찬 눈으로 황의의 사나이를 쳐다보았다. 막 황의의 사나이가 오른손으로 강패의 가슴을 가격하려는 순간, 또 다시 격변이 일어났다. 한쪽 구석에서 달달 떨고만 있던 비렁뱅이 노인이 느닷없이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황의의 사나이에게 집어 던졌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남의를 입은 인물의 뒤쪽에 있던 장삿꾼이 수중의 술잔을 남의를 입은 인물의 뒷통수를 향해 날렸다. 그들의 이 공격은 너무도 뜻밖이었을 뿐 아니라, 그릇과 술잔을 던지는 솜씨들이 어찌나 뛰어났던지 황의의 사나이와 남의를 입은 인물이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그들의 몸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후였다. 황의의 사나이는 강패의 가슴을 후려치려던 손을 비틀어 자신의 관자놀이를 향해 날아오는 그릇을 가격했다. 남의를 입은 인물은 자신의 뒷통수를 향해 매서운 경력이 무섭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황급히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파아아…
그릇이 박살나며 파편이 그들 주위를 자욱히 뒤덮었다. 그와 함께 술잔 하나가 무서운 속도로 남의를 입은 인물의 뒷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 상황은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채 신형을 안정시키기도 전에 두 가닥의 예리한 기운이 그들의 미간으로 날아들었다. 황의의 사나이와 남의를 입은 인물의 표정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희끗한 백선을 그리며 자신들의 미간을 향해 가공할 속도로 날아오고 있는 두 개의 물체가 바로 나무 젓가락임을 알아본 것이다. 평범한 나무 젓가락을 이와 같은 속도로 쏘아보낸다는 것은 절정의 실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나 그들이 놀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두 개의 나무 젓가락이 누구의 손에서 발출된 것인지를 깨닫자 문득 한 사람의 이름이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 순간 그들의 마음은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이얍!”
외마디 고함소리와 함께 황의의 사나이와 남의를 입은 인물은 움켜잡았던 강패의 손을 놓으며 전력을 다해 몸을 비틀었다.
팍팍!
두 개의 나무 젓가락은 텅빈 공간을 가르며 지나가더니 반대쪽 벽면에 격중되었다. 한 뼘이 넘는 길이의 나무 젓가락이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만을 남긴 채 모두 벽을 뚫고 사라졌다. 삼 장이나 날아간 나무 젓가락의 위세가 이럴진데, 만약 이것이 사람의 몸에 격중되었으면 어떻겠는가? 새북쌍살도 가슴 한 구석이 써늘해 졌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두 사람이 손을 놓고 물러나는 바람에 강패의 몸은 자유스러운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도 강패는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아마도 새북쌍살 중 누군가가 뒤로 물러나면서 이미 그의 혈도를 제압해 놓은 모양이었다. 새북쌍살의 신형은 어느 새 허공으로 솟구쳐 주루 밖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하나 그들은 이내 다시 몸을 돌려 바닥에 내려서야만 했다. 어느 사이엔지 주루의 입구에는 비렁뱅이 노인과 장삿꾼이 우뚝 버티고 서 있었던 것이다. 조금 전만 해도 흐리멍텅했던 비렁뱅이 노인의 두 눈에서는 연신 번갯불같은 광망이 이글거리고 있었고, 술에 취한 듯 보였던 장삿꾼의 얼굴에도 사나운 기세가 가득했다.
“너희들은…”
남의를 입은 인물이 그들을 향해 무어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다시 그들의 뒷통수로 무언가 싸늘한 기운이 다가들었다. 남의를 입은 인물과 황의의 사나이는 별 수 없이 황급히 몸을 비틀어 그 기운을 피해야만 했다.
쐐애액!
그들이 서 있던 자리를 지나가는 것은 또 다른 두 개의 나무 젓가락이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양, 비렁뱅이 노인과 장삿꾼은 아무런 말도 없이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삽시간에 주루안은 장영(掌影)과 권풍이 휘몰아치는 격전장이 되고 말았다. 비렁뱅이 노인은 남의를 입은 인물과 치열한 육박전을 벌이고 있었고, 장삿꾼은 황의의 사나이와 불꽃튀기는 주먹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 싸움에 휘말리지 않는 사람은 혈도가 제압된 채 중앙에 우뚝 서 있는 강패와 탁자 밑에 기어 들어가 있는 주방장, 그리고 제일 마지막으로 주루 안으로 들어왔던 황의청년 뿐이었다. 주방장은 연신 부서지는 탁자와 의자들을 보며 안타까움과 두려움에 어쩔 줄을 몰라했고, 황의 청년은 때아닌 싸움에 흥미가 이는지 눈을 반짝이며 두 쌍의 격전을 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젊은 남녀는 한쪽 구석에 나란히 선 채로 장내의 격전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조금 전만 해도 두려움에 떨던 모습은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두 사람 모두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문득 젊은 여인이 남자를 돌아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보기에는 어때요?”
남자는 무엇이 그리도 불만스러운지 조금전과 같은 퉁명스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형편없군. 아주 엉망진창이야.”
“뭐가 그리 엉망진창이죠?”
남자는 턱으로 앞을 가리켰다.
“보라구. 우리는 가진 밑천을 드러내 보였는데도 저자들은 아직도 멀쩡하잖아. 이렇게 손해 나는 일을 하고 있으니 정말 멍청한 일 아니야?”
젊은 여인은 그에게 눈웃음을 치며 교태롭게 웃었다.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요. 밑천을 보였다고 해도 몽땅 드러낸 것도 아니고, 저자들도 아직 무사한게 아니에요. 누가 알아요?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고 오히려 일이 계획보다 더 잘 풀리게 될지…”
“그럴 리 없어. 내가 보건데 우리는 오늘 엄청난 손해를 입고 말거야.”
“당신은 다 좋은데 매사에 너무 비관적인게 흠이에요.”
남자는 못마땅한 표정이었으나 그녀의 말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대신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저자들은 언제까지 저렇게 투닥투닥 하고 있을 셈이지?”
“당신이 지루하다면 곧 끝나게 만들지요.”
젊은 여인은 손을 내밀어 탁자 위에 놓인 젓가락 통에서 몇 개의 젓가락을 꺼내들었다. 그녀는 뱅어같이 희고 고운 손가락으로 젓가락을 잡고는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슬쩍 손가락을 튕겼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놓여 있던 젓가락 두 개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다음 순간, 격전을 벌이고 있던 황의의 사나이가 펄쩍 뛰어 오르며 다급한 외침을 토해냈다.
“아앗!”
황의의 사나이는 비틀거리더니 이내 장삿꾼의 손에 옆구리를 가격당하고는 허리를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비렁뱅이 노인과 싸우고 있던 남의를 입은 인물이 황의의 사나이의 비명소리에 놀라 힐끗 고개를 돌리다 이 광경을 보고 이를 갈며 소리를 질렀다.
“육난음(陸蘭音)! 감히 뒤에서 암수(暗手)를 쓰다니 이러고도 네가 강호에서 고수로 행세한단 말이냐?”
젊은 여인은 상대의 욕설에도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입가에 요염한 미소를 매달았다.
“호호… 저 자가 지금 뭐라고 떠들고 있지요?”
남자는 퉁명스런 음성으로 대꾸했다.
“암습은 자기들만의 전용물이라고 하는 것 같군.”
“생긴 건 그렇지 않은데 정말 뻔뻔한 작자로군요.”
그녀는 다시 배시시 웃으며 손을 슬쩍 흔들었다. 비렁뱅이 노인과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그녀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남이를 입은 인물은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몸을 비틀어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하며 저만큼 옆으로 피했다. 하나 젓가락은커녕 아무 것도 날아들지 않았다. 젊은 여인은 풍만한 허리를 움켜잡고 웃었다.
“호호호… 낮짝만 두꺼운게 아니라 재롱도 많군요. 우리를 위해서 혼자 재주까지 부리다니…”
그제서야 남이를 입은 인물은 자신이 그녀에게 희롱당했다는 것을 알고 가뜩이나 차가운 얼굴이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나 그 바람에 그는 비렁뱅이 노인의 공격을 제대로 막지 못해 수세에 빠지게 되었다. 남이를 입은 인물은 이를 부드득 갈며 미친 듯이 손을 휘둘러 간신히 위기에서 빠져나왔다. 그때 젊은 여인이 다시 손을 휘두르는 광경이 언뜻 시야에 들어왔다. 남이를 입은 인물은 그녀가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찔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여인은 당대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암기(暗器)의 명수(名手)라 자칫 잘못했다가는 크나큰 낭패를 보기 때문이었다. 하나 이번에도 젓가락은 날아들지 않았다. 남이를 입은 인물은 좀처럼 냉정을 잃지 않는 성격이었으나 지금은 안색이 새파랗게 변해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육난음! 이 천한 년이 감히 나를 놀리려…”
바로 그 때였다. 느닷없이 싸늘한 기운 하나가 무서운 속도로 그의 미간을 향해 쏘아져 오는 것이 아닌가? 남이를 입은 인물이 그 낌새를 알아차렸을 때는 그것이 너무도 가까이 다가와 도저히 피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남이를 입은 인물은 전력을 다해 몸을 숙이며 왼손을 휘둘렀다.
파악!
“큭!”
선혈이 뿌려지며 짤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남이를 입은 인물은 비록 젓가락에 미간을 궤뚫리는 참변은 면했지만 대신 왼손이 피범벅이 되었다. 젓가락이 손등을 관통하는 바람에 시뻘건 피가 상반신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남이를 입은 인물은 땀을 뻘뻘 흘리며 왼손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은 고통과 분노로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의 앞으로 젊은 여인과 남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젊은 여인은 손가락에 두 개의 나무 젓가락을 들고 장난처럼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웃고 있었다. 남자의 마음을 움직일만한 요염하고 자극적인 미소였으나, 남이를 입은 인물의 눈에는 사갈(蛇蝎)보다 더욱 차갑게 느껴졌을 것이다. 젊은 여인은 남이를 입은 인물의 일 장 앞까지 다가와서 붉은 입술을 살짝 열었다.
“몇 가지 묻고 싶은게 있는데, 친절하게 답변해주면 나도 당신에게 친절을 베풀겠어요.”
남이를 입은 인물은 이를 악물고 손등을 뚫고 손바닥으로 삐져나와 있는 젓가락을 잡아 뽑았다. 핏물이 하늘높이 솟구치며 그의 신형이 다시 한 차례 휘청거렸다. 하나 그는 한 마디도 신음을 내지 않고 오히려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육난음. 으시대지 마라. 내 입에서 무어라도 알아낼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을 것이다.”
젊은 여인, 육난음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빙긋 웃었다.
“그건 당신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게도 내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으니.”
그녀의 말은 조금 전에 남이를 입은 인물이 강패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남이를 입은 인물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육난음. 네가 무림의 고수라면 고수답게 행동해라. 우리같은 사람에게 시시한 협박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겠죠. 나는 다만 당신이 생긴 것 만큼이나 남자다워서 나중에라도 그 생각이 바뀌지 않기를 바랄 뿐이에요.”
육난음이 느긋할수록 남이를 입은 인물의 얼굴에는 초조한 표정이 떠올랐다. 육난음은 요염한 외모와는 달리 강호무림에서는 누구나가 두려워마지 않는 무서운 살성(殺星)이었다. 그녀는 비단 수법이 교묘할 뿐 아니라 손속이 악랄하고 심기가 깊어서 웬만한 고수들은 소호리(笑狐狸) 육난음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내두를 정도였다. 그녀의 암기술은 강호일절(江湖一絶)이라 할만한데, 그것은 그녀가 백 년 내 여자 중에서 제일가는 고수라는 천수관음의 다섯 명의 제자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녀는 특별한 암기 없이 어떠한 것이라도 자유자재로 암기로 사용하는 재주가 뛰어나서,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물건이라도 일단 그녀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가공할 암기로 돌변하게 되는 것이다. 남이를 입은 인물은 새북쌍살 중의 한 사람으로, 요수광(寥修光)이라 했다. 그는 의동생인 시명해(柴冥奚)와 함께 장성(長城) 이북에서 적지 않은 명성을 떨치고 있는 고수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육난음에게 뜻하지 않은 낭패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육난음은 젓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우리가 뒤쫒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들이 기를 쓰고 이쪽으로 온 것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겠죠? 그가 누구인지만 말해주면 나도 성의를 보여주죠.”
요수광은 눈을 부릅뜨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마라. 우리가 이번에 중원으로 온 것은 단지 이름난 명승(名勝)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공연한 트집을 잡아 우리를 암습한 것이다.”
육난음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세상에는 꼭 관(棺)을 봐야만 눈물을 흘리는 족속들이 있는데, 당신이 바로 그런 무리로군요.”
육난음의 손속은 확실히 매서웠다. 그녀의 수중에 있던 두 개의 젓가락 중 하나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더니 이내 장내에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으악!”
장삿꾼의 손에 쓰러져 있다가 겨우 바닥에서 일어나고 있던 시명해가 돌연 옆구리를 움켜잡은 채 다시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의 옆구리에는 손가락이 들어갈만한 구멍이 뚫린 채 붉은 선혈을 뿜어내고 있었다. 육난음이 내던진 젓가락이 시명해의 옆구리를 관통해 버렸던 것이다. 시명해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바닥을 뒹굴며 연신 신음을 토하고 있었고, 요수광은 두 눈에 벌건 핏발이 선 채로 그녀를 잡아먹을 듯이 무섭게 쏘아보았다.
“유… 육난음! 이 악독한 년! 대항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살수를 쓰다니…”
육난음은 상대의 욕설을 듣고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나로 하여금 손을 쓰도록 만든 것은 당신이에요. 한 번만 더 유람을 왔다느니 하는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옆구리가 아니라 그의 몸 전체에 구멍을 뚫어주겠어요.”
“네년이 감히…”
요수광은 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육난음이 말없이 옆의 탁자에서 한웅큼의 나무 젓가락을 움켜쥐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육난음은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강호에 알려진 그녀의 성정(性情)은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 요염하고 간드러진 외모와는 달리 일단 입밖에 내뱉은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실천 한다고 해서 천금낭자(千金娘子)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말 한 마디가 천냥의 금(金)과 맞먹는 다는 뜻이다.
육난음은 젓가락을 손에 잔뜩 움켜쥔 채로 다시 요수광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들이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은 누구죠?”
요수광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는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자신의 의형제를 내려다 보다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이 입을 열지 않으면 육난음은 시명해를 향해 손을 쓸 것이고, 시명해는 몸에 수십 개의 구멍이 뚫린 채 숨이 끊어지고 말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육난음은 손에 들고 이는 젓가락들을 부채꼴 모양으로 폈다.
그런다음 희고 고운 손가락으로 그 젓가락들을 하나씩 만져보더니 이윽고 손가락을 오무려 금시라도 내던질 듯한 자세를 취했다.
요수광은 마침내 안색을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고 말았다.
“그는… 상관욱(上官旭)이다.”
육난음은 눈을 반짝 빛내더니 이내 배시시 웃었다.
“역시 당신은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군요. 사실 우리도 당신들이 만나려는 사람이 그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요수광은 어두운 표정으로 묵묵히 서 있었다.
육난음은 그를 향해 다시 자극적인 미소를 보냈으나, 요수광의 얼굴은 조금도 펴지지 않았다.
“이제 한 가지만 더 알려주면 당신들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어요. 상관욱은 어디 있죠?”
요수광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모른다.”
육난음은 젓가락을 가득 든 손을 슬쩍 흔들었다.
“나로 하여금 다시 손을 쓰도록 하지 마세요.”
“그가 어디 있는지는 우리도 모른다. 단지 우리는 안강으로 가서 그를 만나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육난음은 요수광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려 있는 것을 보고 그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묻는 방향을 조금 달리했다.
“그를 어디서 만나기로 했죠?”
“그것도 모른다. 안강에 가면 그가 우리를 찾아올거라고 했다.”
육난음은 그의 말의 진위(眞僞)를 파악하려는 듯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젊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당신 생각은 어때요?”
남자는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당연한거 아냐? 이자들은 상관욱의 얼굴도 한 번 본 적이 없을 거야. 그러니 그의 행방을 알고 있을 리가 없지.”
“상관욱은 천애치수 단목광의 둘째 제자로, 재주가 많고 임기응변에 능해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번이 그를 잡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내 계산이 틀린 모양이군요.”
남자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으나, 의외로 말투는 무덤덤했다.
“그렇게 쉽게 잡을 수 있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
육난음은 그의 팔짱을 끼며 다시 웃었다.
요수광을 향해 지었던 웃음과 비슷했으나, 어딘지 달라 보였다.
좀 더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이었다.
“상관욱은 이번에 상대를 잘못 만난 거에요. 그도 지금쯤은 당신이 자신의 뒤를 쫒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테니 마음이 몹시 초조하고 불안할게 틀림없어요.”
남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어찌 보면 멍청해 보이는 듯한 모습이었으나, 육관음은 이것이 남자가 무언가 심사숙고할 때 짓는 표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남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심통 사납고 우둔해 보였으나, 사실은 누구보다도 예리하고 날카로운 머리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녀가 그를 좋아하게 된 것도 바로 이 평범 속에 감추어진 비범함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들이 쫓고 있는 상관욱 또한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서장 무림의 전설적인 존재이며 제일가는 두뇌로 알려진 천애치수 단목광이 가장 아끼는 네 명의 제자중 한 사람으로, 온갖 사술(邪術)에 능하고 계략에 뛰어나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단목광은 검각에서의 대회전(大會戰)을 앞두고 중원무림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천하 각지에 밀정들을 파견했는데, 그 밀정들의 총 책임자가 바로 상관욱이었다.
새북쌍살 또한 단목광의 지시를 받고 호북성 일대의 정세를 정탐한 후 상관욱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안강으로 왔다가 육난음에게 사로 잡히게 된 것이다.
무림맹에서는 단목광에게 대항하기 위해 무림구봉 중의 일인(一人)이며 강호제일의 신비인 (神秘人)으로 알려진 번신봉황(飜身鳳凰) 이북해(李北海)를 군사(軍師)로 초빙했는데, 육난음과 남자 일행은 이북해의 지시를 받고 상관욱을 제거하기 위해 상당기간 동안 그의 뒤를 쫓고 있었다.
상관욱은 변장술의 천재로 알려져 있어, 누구도 그의 진면목을 알지 못했다.
이번에 육난음과 남자 일행은 굉장히 정교한 계획을 세워 새북쌍살이 상관욱과 접선하기 직전까지 추적해 들어갔으나, 결국 마지막 순간에 다시 상관욱의 종적을 놓쳐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남자는 별로 실망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동안 허공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돌연 옆에 있는 탁자에 털썩 주저 앉더니 주방장을 부르는 것이었다.
“이리 오시오.”
주방장은 그때까지도 탁자 밑에 기어들어간 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남자는 탁자를 세게 쳤다.
탕!
“내말이 들리지 않소?”
그제 서야 주방장은 화들짝 놀라며 엉금엉금 기어나왔다.
“예… 예… 대협.”
남자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대협이라니… 누가 대협이란 말이오?”
“그… 그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술이나 한 병 가지고 오시오.”
“예? 예…”
주방장은 엉거주춤하게 허리를 구부리더니 미기적미기적 주방쪽으로 걸어갔다. 남자는 주방장이 주방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무엇이 그리도 못마땅한지 입술을 삐쭉 내밀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공교롭게도 남자가 앉은 의자는 황의 청년의 맞은 편이라 고개를 돌리자마자 바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게 되었다. 황의 청년은 담담한 표정이었고, 남자는 무언가 수상쩍은 듯 시선을 위 아래로 움직여 황의 청년의 전신을 살펴보았다. 황의 청년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내가 의심스럽소?”
남자는 부인하지 않았다.
“귀하는 너무 공교로운 시기에 이곳에 나타났소.”
“나는 그저 식사를 하기 위해 이곳에 왔을 뿐이오.”
남자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새북쌍살도 비슷한 말을 했지.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소.”
황의 청년은 빙긋 웃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하겠소?”
“그래서 나도 고민하는 중이오. 당신이 이곳에 온 것은 정말로 우연일까, 아니면…”
남자의 눈 속에 날카로운 빛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무언가 다른 곡절이 있는 것일까 하고 말이오.”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서 상대방의 의심을 사게 된다면 가슴이 떨리거나 얼마쯤 언짢아질 것이다. 자신이 떳떳하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그런데도 황의 청년은 별다른 거리낌없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부드럽게 미소짓는 것이었다.
“당신의 심정을 이해하오. 나도 이런 경우라면 그랬을 것이오.”
“그래서 말인데… 당신이 상관욱이 아니라면 그 증거를 보여 주었으면 하오.”
“어떻게 말이오?”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면 되지 않겠소?”
황의 청년은 여전히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내가 누구라고 말하면 믿어 줄거요?”
“그야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하하… 이거 무섭군. 말 한 마디 잘못하면 호되게 경을 치겠는데… 나는 진산월이란 사람이오.”
남자는 한동안 조용히 황의 청년을 응시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산월이라… 남자 이름 치고는 몹시도 여성적인 이름이군.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오직 한 명 밖에 없소.”
황의 청년은 호기심이 이는 지 급히 물었다.
“그게 누구요?”
남자는 황의 청년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한 자 한 자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종남파의 이십일대 장문인이오.”
황의 청년, 진산월은 활짝 웃으며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남자는 예의 탐색하는 듯한 시선으로 진산월의 얼굴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았다. 남들 같으면 무안함을 느꼈거나 화를 냈을 텐데 진산월은 빙긋 웃으며 넉살좋게 물었다.
“내가 너무 평범하게 생겨서 실망했소?”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남자에게 중요한 건 얼굴이 아니지. 소문으로 듣자하니 당신은 천성적으로 게으르고 남과 싸우는 걸 싫어해서 나보살이라고 불리운다고 하더군.”
진산월은 여전히 웃었다.
“그런 말을 들은 것도 같소.”
“뿐만 아니라 당신의 무공 실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아서 이미 몇 차례의 패배를 당했을 뿐 아니라, 다른 문파의 이대 제자에게도 낭패를 당했다고 하더군.”
진산월은 부인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런 적이 있었소.”
남자의 두 눈에서는 기이한 안광이 번쩍거렸다.
“하지만 당신은 배짱이 좋고 심계가 깊으며 말솜씨가 대단해서 모두들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이라고 들었소. 심지어는 선하령의 괴물인 변천붕과 오만하기 짝이 없는 운자추도 당신에게 당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진산월은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내가 그들에게 당한 건 기억나는데, 그들이 내게 당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는 일이오. 그나저나 당신은 나에 대해 이토록 자세하게 아는데, 나는 아직 당신의 이름도 모르고 있으니 조금은 불공평한 일이라고 생각되는구료.”
남자는 순순히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나는 이정문이라고 하오.”
진산월은 눈을 빛내며 새삼스러운 듯 그를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귀하의 이름은 여러번 들었소. 듣자하니 귀하는 일곱 살 때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독파하고 열 다섯 살 때 당대의 석학(碩學)인 문경선생(文經先生)과의 논쟁에서 승리하여 글로는 누구도 따라오기 힘든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더군.”
이번에는 남자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산월은 다시 말을 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뒤로 천하의 기서(奇書)들을 탐독하고 다방면에 노력을 기울여 당대 무림에서 첫 손에 꼽히는 재사(才士)가 되었다고 들었소.”
“……”
“게다가 귀하는 강호의 제일가는 기인(奇人)인 번신봉황 이북해, 이대협의 아들로 이번에 새로 창설된 무림맹에서 부친인 이대협을 도와 무림맹의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오?”
남자는 뜻밖에도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나에 대해 그렇게 상세하게 알고 있을 줄은 몰랐군. 당신의 말은 모두 사실이오.”
“그렇게 유명한 분을 직접 만나게 되니 영광이오.”
진산월은 웃으면서 말했지만 그의 말은 결코 허언(虛言)이 아니었다. 강호에서 이정문의 명성은 진산월에 비할 수 없는 혁혁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천하제일기인(天下第一奇人)이며 자신은 천하제일문(天下第一文)이고, 강호의 수많은 젊은 층의 고수들에게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겉으로 보기에 우둔하고 심통 사나운 외모 때문에 그에게는 산수재(散秀才)라는 외호가 붙었지만, 그의 예리한 두뇌는 적어도 강호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진산월은 상관욱에 대해서는 거의 들은 바가 없기 때문에, 이정문과 적수가 된 그를 위해 약간의 애도하는 마음이 생겼다. 이정문은 결코 마음이 넓거나 인정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의 총명이 과인(過人)하여 오히려 비정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정문은 진산월의 말에는 별반 반응이 없이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런 곳에서 진장문인을 만나게 되다니 나로서도 뜻밖이오. 아무튼 이것으로 한 가지 고민은 해결이 되었군.”
“내가 상관욱과 한패가 아닐까 하는 고민 말이오?”
“그렇소.”
“정말 상관욱이 이 근처에 있다고 생각하시오?”
진산월은 별 생각없이 물었는데 의외로 이정문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뿐만 아니라 그는 이 주루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소.”
진산월은 뜻밖인 듯 눈을 살짝 치켜 떴다.
“그걸 어떻게 아시오?”
“사실 나는 그전부터 이 주루를 주목하고 있었소.”
“그건 왜 그렇소?”
“새북쌍살이 안강으로 온 것은 물론 상관욱을 만나기 위해서요. 그렇다면 안강에 상관욱의 거처가 있다는 말인데, 사람을 만나는 곳으로는 주루가 제일 적당하오. 그래서 나는 안강 일대의 모든 주루에 대해 샅샅이 조사했소.”
이정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진산월에게는 다른 어떤 사람의 음성보다 똑똑하고 선명하게 들렸다. 그것은 아마도 이정문이 말꼬리를 흐리는 법이 없이 분명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안강에는 모두 마흔 한 개의 주루가 있는데, 그중 스물 일곱 곳은 이미 삼십 년전부터 주인이 바뀌지 않았소. 열 한 개는 생긴 지가 십 년에서 이십 년쯤 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이곳의 토박이로, 외지인(外地人)들이 아니었소. 나머지 세 곳 중 두 군데는 오늘 오후에 들려 보았는데, 그중 한 곳은 무당파와 연줄이 있고, 다른 한 곳의 주인은 공교롭게도 나와 약간의 친분이 있는 인물이었소. 오직 이 주루만이 불과 일 년전에 생겼으며, 주인도 외지인이라 주위의 누구도 그에 대해 자세한 것을 모르고 있소.”
진산월은 입을 딱 벌렸다. 이정문이 새북쌍살의 뒤를 추적해 왔다면 그가 안강에 도착한 것은 오늘 오전이었을 것이다. 불과 반나절만에 마흔 한 개의 주루에 대한 것을 이토록 상세하게 조사할 수 있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신들은 미리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로군요.”
“그렇소. 조금 전 새북쌍살은 강패를 발견하고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오. 그들은 이곳이 상관욱을 만나기로 한 접선지라서 들어온 것이고, 그때 마침 강패가 이곳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참지 못하고 그에게 손을 썼던 거요. 만약 미리 강패를 보았다면 그들은 일부러라도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갔을 거요.”
진산월은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렇다면 상관욱이 이곳에 있다는 말인데, 이곳에는 당신들 외에는 아무도 없지 않소?”
이정문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과 우리말고 또 있소. 한 사람이.”
그제 서야 진산월은 무언가를 느낀 듯 안색이 약간 변했다.
“그렇다면 조금 전에 술을 가지러 간 주방장이…”
이정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보니 주방장이 술을 가지러 주방으로 간 지가 한참 되었는데 아직도 그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진산월은 주방으로 가서 확인해 볼 필요도 없이 그가 이미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음을 알 수 있었다. 진산월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은 그가 상관욱임을 알면서도 왜 그를 도망치게 내버려 두었소?”
이정문의 표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상관욱이 아니오.”
진산월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상관욱이 아니라면…”
“상관욱은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처럼 행사(行事)가 비밀스럽고 조심성이 많은 인물이오. 그러니 그가 새북쌍살을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할지라도 어찌 직접 모습을 드러냈겠소?”
“그렇다면 그는 누구란 말이오?”
이정문의 메마른 얼굴에 언뜻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비수처럼 차갑고 싸늘한 웃음이었다.
“그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소. 중요한 건 그가 나를 상관욱에게 데려다 줄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이오.”
그때 주루 안으로 하나의 인영이 불쑥 나타났다. 그는 허름한 마의(麻衣)를 입은 평범한 인상의 사나이였다. 마의 사나이는 재빨리 이정문의 앞으로 오더니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자는 지금 남문(南門)을 빠져나가 남서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십일호(十一號)와 십이호(十二號)가 지금 계속 그자의 뒤를 쫓고 있습니다.”
진산월은 흠칫 놀랐다. 주루로 들어오기 전에 그 사나이가 근처의 철물점에서 농기구를 고르는 광경을 보았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이제 보니 이자들은 이미 철저한 준비를 해 놓았었구나.’
그제 서야 진산월은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차리고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이정문의 일처리는 소문 만큼이나 탁월한 것이었다. 그는 이미 정확히 사태를 궤뚫어 보고 나름대로 철저한 복안(腹案)을 세워 두었던 것이다.
“두 시진 단위로 추적하는 자들을 새로운 인물로 바꾸고, 그때마다 내게 경과를 보고해라.”
“알겠습니다.”
마의 사나이는 다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빠르게 주루를 벗어났다. 이정문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허공을 올려다 보더니 이내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어떻소? 함께 가지 않겠소?”
“어디를 말이오?”
이정문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린 아이처럼 소박한 웃음이었으나, 그렇다고 순진해 보이지는 않았다.
“여우사냥 말이오. 이번 사냥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재미있을 것 같구려.”
진산월은 그러고는 싶지만 자신은 가야할 곳이 있어서 안된다고 사양하려 했다. 그런데 그의 그런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나 있는 듯이 이정문은 다시 입을 열었다.
“진장문인은 아마 무림맹의 집결지인 귀화정으로 가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지금 귀화정으로 가보았자 아무 것도 없을거요. 무림맹의 다음 집결지는 사천성(四川省) 만원현(萬源縣)이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곳에서 남서쪽이지. 그러니 어차피 진장문인은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소.”
진산월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합시다.”
이정문은 그가 승낙할 것을 예상이나 했다는 듯 이내 고개를 돌려 장삿꾼을 쳐다보았다.
“한형(韓兄)은 새북쌍살 두 사람을 오일 간만 데리고 있다 놓아주시오.”
장삿꾼은 마치 황제의 어명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더할 나위없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정문은 다시 비렁뱅이 노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유노인(劉老人)은 강패와 함께 움직이시오. 만원현에 도착하기 전에 다시 연락을 취하겠소.”
“예.”
비렁뱅이 노인은 공손하게 대답을 한 후 강패를 이끌고 주루 밖으로 벗어났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자 이정문은 천천히 기지개를 켰다.
“아… 잠이 슬슬 오는군. 하지만 더 늦기 전에 우리도 여우사냥을 떠나야겠지?”
육난음은 배시시 웃으며 그에게 다가와 다정하게 팔짱을 꼈다.
“그렇게 해요, 잠꾸러기 양반.”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도 몸을 일으키던 진산월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새북쌍살과 주방장이 상관욱을 만나기 위해서 움직이는 방향은 공교롭게도 무림맹의 관서지단 고수들이 이동하는 경로와 일치했다. 이것은 우연인가, 아니면… 진산월은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우연 따위는 없다.’
상관욱은 무림맹 고수들의 이동경로를 훤히 궤뚫고, 그들과 함께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