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6권 서장격변(西藏激變)편 : 9화
제56장. 기사회생(起死回生)
한 잎 두 잎 낙엽이 떨어지고 있었다. 중원은 가을을 지나 겨울에 접어들고 있는데, 이곳은 아직 매서운 추위보다는 늦가을의 분위기가 더욱 짙게 풍기고 있었다. 텅 빈 정원에 노란 낙엽이 쌓이는 광경은 보는 사람의 마음에 묘한 공허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딱… 딱…
멀리서 들려오는 목어(木魚)와 독경(讀經) 소리가 주위의 풍경과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이곳 보광사(寶光寺)에는 적지 않은 건물들이 있었지만, 대웅전을 지나 후원의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이곳에는 출입하는 사람도 거의 없고 아주 조용해서 늦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휘이잉…
다시 한차례 바람이 불자 쌓였던 낙엽들이 허공으로 솟구쳐 이리저리 휘날렸다. 연아(燕兒)는 창가에 턱을 고이고 앉은 채 사방을 날아다니는 낙엽들을 보고 있었다. 연아는 올해 열여섯의 소녀이다. 이 나이의 소녀에게 가을은 봄과 또 다른 느낌을 갖게 하는 계절이었다. 연아는 특별히 사귀었던 사람이나 아름다운 추억도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지금 창 밖을 보면서 야릇한 그리움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한동안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연아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이마를 탁 쳤다.
“내 정신 좀 봐.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그녀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렴을 열고 안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잠시 후 밖으로 나온 그녀의 양손에는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쟁반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쟁반을 든 채로 작은 대청을 지나 내실로 향했다.
그녀가 들어간 곳은 좁은 복도를 지나 가장 안쪽에 있는 방이었다. 그 방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고, 한쪽에 커다란 침상이 놓여 있어 아늑해 보였다. 방으로 들어서자 진한 약향(藥香)이 코를 찔렀다. 연아는 침상으로 다가가 쟁반을 침상 옆의 탁자에 놓고 침상에 걸터앉았다. 침상 위에는 얼굴을 붕대로 친친 감은 인물이 누워 있었는데, 전혀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살아 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 침상 위의 인물을 바라보는 연아의 눈에는 측은한 동정심과 야릇한 호기심이 함께 담겨 있었다.
“정말 불쌍한 사람이야.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을까?”
연아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그의 얼굴에 감겨 있는 붕대를 살짝 만져 보았다. 붕대는 너무 세지도 않고 그렇다고 약하지도 않게 잘 매어져 있었는데, 붕대 사이로 보이는 피부는 울긋불긋한 반점 같은 것이 돋아 있어 징그러워 보였다. 하나 자세히 보면 피부에 아직 탄력이 죽지 않아서 그리 나이가 많지 않은 젊은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붕대로 감지 않은 몸의 나머지 부분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얇은 이불 밑에 가려져 있었다.
그 생각을 하자 연아의 고운 얼굴은 엷은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버렸다. 연아는 처음 이 방에 들어온 것은 열흘 전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녀는 자신이 왜 이곳까지 불려왔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보광사는 성도에서도 이름있는 절로, 그녀도 가끔 향화(香火)를 드리러 온 적은 있었지만, 후원까지 온 것은 처음이었다. 이 방에 들어와서야 그녀는 자신이 환자를 간호하기 위해 불려왔음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그녀는 상대가 얼굴을 온통 붕대로 감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놀랐고, 그가 전혀 아무런 의식도 없는 식물인간이라는 것에 재차 놀랐다. 미약하나마 그의 숨결이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가 이미 죽어 버린 시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의 하루 일과는 무척 단순했다. 하루에 두 번, 그에게 특수 제조한 보약을 먹이고, 매일 저녁 그의 붕대를 갈아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붕대는 얼굴 부위에만 감겨 있어서 별달리 거북스러운 점은 없었다. 얼굴 아래의 나머지 부위는 다른 남자가 매일 여러 가지 약재를 혼합한 약수(藥水)로 씻겨 주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처음에 그녀가 그를 보았을 때만 해도 몸의 여기저기에 끔찍한 흉터가 많았는데, 대부분의 흉터가 검붉은 딱지만을 남긴 채 사라져 버렸고, 검은 색이 감돌았던 피부도 조금은 원래의 혈색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몸은 곳곳이 검고 하얀 부분으로 얼룩이져 있었고, 얼굴의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았다. 그의 몸에 나 있는 검고 하얀 얼룩들은 그의 몸 속에 있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맹독(猛毒)의 기운들이 뭉친 흔적이었다. 그중 어느 한 얼룩이 갑자기 커지면 그의 몸은 독성을 이기지 못하고 녹아 버리고 말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아직도 처음 그의 얼굴에서 붕대를 벗겨냈을 때의 가슴 떨리던 순간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얼굴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얼굴의 피부 대부분이 꿰맨 자국투성이었고, 살점이 떨어져 나간 부분도 군데군데 있었다. 특히 왼쪽 빰은 살이 썩어서 허연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였다. 나중에야 그녀는 그나마 그 얼굴이 여러 차례의 수술로 많이 나아진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그 끔찍한 얼굴을 보고도 용케도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것은 어려서부터 여러 종류의 환자(患者)들을 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 그래도 매일 그의 붕대를 감을 때가 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리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한동안 침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붕대로 감은 인물을 응시하고 있던 연아는 의미 모를 한숨을 내쉬며 쟁반 위에 올려 있는 그릇을 집어들었다. 그릇 안에는 우윳빛 액체가 담겨 있었는데, 달콤하면서도 향긋한 향기가 풍겨 나왔다. 연아는 그 액체를 숟갈로 떠서 붕대로 감은 인물의 입에 조심씩 흘려주었다. 이 액체는 열두 가지의 몸에 좋은 약재들을 혼합하여 만든 것으로, 의식이 전혀 없는 그를 위하여 굳이 삼키지 않아도 식도로 흘러들어가 체내에 흡수될 수 있게끔 제조된 것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런 손길로 한 숟갈 한 숟갈씩 액체를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릇이 비워지자 그녀는 쟁반을 한쪽에 놓고는 천천히 그의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그 손길은 차분하면서도 능숙한 것이었다. 붕대가 풀리면서 그의 얼굴이 점차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살점이 떨어졌던 곳에서 새로운 살이 돋아나면서 생긴 붉은 반점이 군데군데 보였고, 이리저리 꿰맨 자국이 마치 뱀이 기어가는 듯한 끔찍한 흉터를 남겨놓고 있었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처음 보았을 때보다 한결 나아진 모습이었다. 살이 썩어 들어가서 광대뼈까지 드러나 보였던 왼쪽 빰만이 아직도 완전히 아물지 않아서 보기 흉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연아는 붕대를 모두 풀고 나서 가만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흉터와 반점으로 괴물 같은 모습이었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목구비는 의외로 뚜렷함을 알 수 있었다. 나이는 그녀보다 훨씬 많아 보였지만, 그렇다고 서른을 넘은 것 같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의 나이가 이십대 중반쯤 될 거라고 예상했다. 한창때의 젊은 나이에 이런 몰골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자의 운명은 너무도 기구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아는 마음속 깊이 그에 대한 동정심을 느꼈다. 그를 치료한 의원은 분명한 음성으로 잘라 말했다.
-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을지, 아니면 이대로 영원히 식물인간으로 살아갈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어쩌면 내일 당장이라도 몸에 잠복해 있는 독기(毒氣)가 발작하여 한줌의 핏물로 변해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우리는 치료를 계속해야 한다. 그게 우리의 본분(本分)이다.
그녀는 그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붕대를 모두 풀고 난 연아는 품속에서 작은 병을 꺼내 들었다. 그 안에는 느르스름한 연고가 담겨 있었는데, 그녀는 그 연고를 그의 얼굴에 정성껏 발라 주었다. 그 연고는 그녀의 집안에서만 내려오는 비전(秘傳)의 성약(聖藥) 중 하나로, 새살을 돋게 하고 죽은 피부를 살리는 데 놀라운 효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그나마 지금 정도로 얼굴이 좋아진 것도 그녀가 매일 이 귀한 재생고(再生膏)를 그에게 발라 주었기 때문이다. 재생고를 그의 얼굴 구석구석까지 모두 바르고 나자 그녀는 잠시 재생고가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새로운 붕대를 꺼내 그의 얼굴에 감시 시작했다.
“흐흠…”
그녀는 나직하게 콧노래를 부르며 익숙한 손길로 붕대를 감아 나갔다. 한데 그녀가 막 붕대의 마지막을 마무리하고 있을 때였다. 지금까지 시체처럼 미동도 않고 있던 그의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처음엔느 자신이 잘못 보았다고 생각했다. 하나 그의 손끝이 재차 떨리더니 이내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켰다.
“어머…”
그녀가 깜짝 놀라 경악성을 터뜨릴 때, 그의 손이 떨림이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 몸 전체가 떨리기 시작했다. 이어 굳게 감겨 있던 그의 눈이 돌연 번쩍 뜨여지며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갑자기 쏜살같이 밖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아버지! 깨어났어요. 그가 깨어났어요!”
그녀의 흥분에 가득 찬 음성이 조용하던 주위의 공기를 산산이 깨뜨리고 있었다. 그것이 무림제일신의 철면군자 노방의 무남독녀 외동딸인 노소연(盧小燕)이 훗날 강호의 전설(傳說)이 된 한 사나이를 처음으로 만나게 된 순간이었다.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온통 시뻘건 색 뿐이었다. 눈을 다시 감았다. 짙은 암흑(暗黑)이었다. 다시 눈을 떴다. 세상은 여전히 붉은 색이었다. 다시 한차례 눈을 감았다가 뜨자 그제서야 붉은 색이 점차로 가시기 시작했다. 하나 여전히 얼마간의 붉은 빛은 없어지지 않았다. 원래 세상은 이렇게 핏빛이었던가?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보려 했으나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거대한 떨림이 일어나 몸 전체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한없이 차가운 오한(惡寒) 때문인 것도 같았고, 뼛속 깊숙이 느껴지는 지독한 통증 때문인 듯도 했다. 떨림은 점차로 거세어지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오히려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고 있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 왜 이곳에 누워 있는지, 그리고 자신에게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나 그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문이 갑자기 벌컥 열리며 몇 명의 인물들이 안으로 뛰어들어 왔던 것이다. 가장 앞서서 들어온 사람은 짙은 청의를 입고 가면을 쓴 듯 표정이 딱딱한 중년인이었다. 그의 뒤에는 머리를 양쪽으로 땋은 귀여운 얼굴의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서 있었다. 청의중년인은 빠른 걸음으로 침상 옆에 다가오더니 그의 얼굴을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움직일 수가 없어서 그저 멍하니 청의중년인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청의중년인의 얼굴 근육이 가볍게 실룩거렸다. 그것은 그가 마음속 격동을 억누르지 못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마침내 깨어났군.”
냉정한 음성이었으나, 말꼬리가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청의중년인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런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청의중년인은 어떤 일이 있어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철면(鐵面)의 사나이로 이름이 높았던 것이다. 청의중년인은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무표정하고 딱딱한 원래의 얼굴로 되돌아왔다.
“지금 자네 눈에는 모든 것이 붉게 보일걸세. 눈에 있는 실핏줄이 터져서 그런 것이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네. 얼마의 시일이 흐르면 눈으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네.”
그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고, 말을 하고 싶어도 입을 벌릴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몸 속에 있는 신경조직이 모두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청의중년인은 그의 그런 상태를 잘 알고 있다는 듯 두툼한 손으로 그의 가슴을 가볍게 눌렀다.
“지금은 몸을 움직일 수 없을 테니 무리하게 움직이려 하지 말게. 궁금한 게 많을 테지만 우선은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하는 게 급선무라네. 얼굴의 상처도 많이 아물었으니 며칠만 더 지나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걸세.”
얼굴? 내가 얼굴을 다쳤었나?
청의중년인은 자신의 등뒤에 있는 소녀를 앞으로 끌어내었다.
“이 아이는 내 딸인 연아일세. 자네가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이 아이가 자네를 돌볼걸세.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이런 일에는 제법 경험이 있으니 자네를 크게 불편하게 하지 않을 것이네.”
청의중년인에게 반강제로 끌려나온 소녀는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그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노… 노소연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부탁? 이런 상황에서 그 말은 대상이 바뀌지 않았나? 소녀는 자기 입으로 말해 놓고도 부끄러운지 다시 청의중년인의 등뒤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청의중년인은 다시 그에게로 몸을 숙여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한자 한자 분명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명심하게. 우선은 아무 생각 말고 몸을 회복시키는 것에만 신경을 집중시키게. 체내의 독기가 완전히 빠지지 않았으니 자칫 방심하다가는 다된 밥에 코를 빠뜨릴 수도 있네.”
독? 내가 독에도 중독되었단 말인가?
청의중년인은 한동안 물끄러미 그의 눈을 응시하고 있다가 이윽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럼 푹 쉬도록 하게. 조금 전에 그에게 연락했으니 아마도 내일쯤이면 그가 여기 올 걸세.”
그라니? 대체 누구를 말하는 건가?
청의중년인은 노소연이라 밝힌 소녀의 손을 잡고는 방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막 방문을 열고 나가려다 그는 문득 생각나 듯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와 내기를 했지. 나는 자네가 살아날 수 있다는 데 걸었네. 자네는 이정문을 패배시킨 최초의 사람일세. 그러니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걸세.”
그 말을 끝으로 청의중년인과 소녀는 방문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의식 저편에 있던 기억들이 차례로 떠오르며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머리 속 아주 깊은 곳에 숨어 있던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진산월은 번뜩이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이정문이란 말이지…’
이정문은 방문 밖에서 약간 망설였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도 지금의 자신의 모습이 우습게 여겨졌다. 그는 한차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별로 넓지 않는 방안에는 커다란 침상만이 동그마니 놓여져 있었다. 침상 위에 한 사람이 비스듬히 앉은 채 안으로 들어오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정문은 그의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비틀며 웃음을 보냈다. 좀처럼 웃지 않는 그인지라 어색하긴 했으나 어쨌든 웃음은 웃음이었다.
“생각보다 좋아 보이는군. 불편한 곳은 없소?”
침상 위의 사람은 진산월이었다. 진산월은 얼굴 전체에 둥여맸던 붕대를 풀고 왼쪽 빰과 이마에만 작은 붕대를 맨 상태였다. 얼굴 여기저기에 꿰맨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고, 벌거벗은 상반신을 뒤덮고 있는 상처에는 검붉은 딱지가 앉아 있어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진산월은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럭저럭 견딜 만하오.”
그의 음성은 낮게 잠겨 있어 마치 납덩이라도 삼킨 것 같았다. 이정문은 침상 옆으로 다가왔다.
“다행이오. 많이 걱정했었소.”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문은 그의 얼굴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 장문인의 도움으로 무사히 단목초를 제거할 수 있었소. 덕분에 서장무림과의 싸움을 한결 우리 쪽으로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었소.”
진산월은 가장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서장무림과의 싸움은 끝났소?”
“그렇소.”
“결과는?”
“어느 쪽의 승리도 아니오.”
“어느 쪽의 승리도 아니라니?”
이정문은 진산월의 궁금증을 풀어 주려는 듯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진 장문인이 이곳에 누워 있는 동안 우리는 단목초를 제거한 여세를 몰아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었소.”
단목초는 서장무림에서는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자 실질적인 이번 격전의 총책임자였다. 그가 없어진 이상 서장무림은 지휘체계에 혼선이 일어났고, 필연적으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태로 좀더 시일이 흘렀다면 서장무림은 지리멸렬했을 것이고, 무림맹은 손쉬운 승리를 낚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 일 전에 한 가지 뜻밖의 일이 벌어져서 모든 일이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말았소.”
그가 말한 뜻밖의 일이란 실로 ‘경천동지(驚天動地)’ 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놀라운 일대사건이었다.
바로 서장무림의 절대적인 존재인 야율척과 중원무림의 대표격인 모영봉이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격전을 벌였던 것이다.
그 승부를 누가 먼저 제안했는지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두 사람이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곳에서 서로 만났고, 서장과 중원의 운명을 걸고 처절한 격투를 벌였다는 것만이 세상에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들의 승부는 꼬박 일주야(一晝夜)를 끌었다고 한다.
이정문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진산월을 응시하며 돌연한 질문을 던졌다.
“그들의 승부가 어떻게 되었을 것 같소?”
진산월은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짤막하게 말했다.
“양패구상(兩敗俱傷).”
이정문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진 장문인은 예리한 사람이오. 양패구상까지는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끝까지 승부를 가리지 못했소. 결국 그들은 삼 년 후에 다시 만나 승부를 마무리짓기로 하고 헤어지고 말았소.”
진산월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어찌 보면 이정문이 무슨 말을 하든 전혀 흥미를 못 느끼는 것 같기도 했고, 달리 보면 무언가 깊은 사색에 빠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이정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이정문은 적어도 그가 몹시 놀라거나 아니면 실망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의 싸움이 끝난 후 서장무림은 중원에서 철수했고, 무림맹 또한 더 이상 그들을 뒤쫓지 않았소. 일이 조금 싱겁게 되긴 했으나, 어쨌든 덕분에 사천성이 피로 뒤덮이는 참혹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모두 다행이하고 생각하고 있소.”
어쩌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무림에서 거대한 세력과 세력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일은 별로 없다.
너무나 많은 인명이 희생당해 이긴 쪽이든 진 쪽이든 출혈(出血)이 심할 뿐 아니라, 자칫하면 관(官)의 주목을 받아 쫓기는 신세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서장과 중원이 검각에서 결전을 벌이기로 했으나,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싸우게 될지는 아무 것도 결정된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식의 싸움은 항상 수뇌부간의 격전으로 그 승패(勝敗)가 결정되는 것이 관례였다.
오십 년 전에 아난대활불이 천룡사의 승인들을 이끌고 중원을 침략했을 때도 승부는 아난대활불과 모용단죽, 두 사람간의 싸움으로 판가름이 났다.
그후에 벌어진 세 번의 싸움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장무림이 이번의 싸움에서 절대적인 자신을 가졌던 것도 모용단죽이 노쇠하여 더 이상 야율척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모용단죽이 비록 모용봉이라는 후계자를 남겼으나,
그가 모용단죽을 능가한다는 것은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모용봉이 야율척과의 정면승부에서 동수(同手)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것은 서장무림뿐만 아니라 천하의 모든 사람들을 경악케 하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서장무림이 의기소침하여 급히 중원을 떠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무림맹에서도 별다른 큰 피해 없이 그들의 침략을 막을 수 있어서 결코 불만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개중에는 후환(後患)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서장까지 추적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모용세가의 건재함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만족감을 느꼈다.
모용봉이 앞으로의 세상을 책임질 거라는 모용단죽의 말은 결국 허언(虛言)이 아니었다.
모용봉이 건재하는 한, 서장무림이 아무리 도발한다 해도 능히 물리칠 수 있을 거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한결 같은 생각이었다.
“검각에 모여들던 무림맹의 고수들은 며칠 전부터 각자의 집으로 귀향(귀향)하고 있고, 나도 돌아가려던 참이었소. 이런 때 마침 진 장문인의 의식이 돌아왔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소.”
이정문은 긴 이야기를 마치고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만에 하나 진 장문인이 잘못되었다면 나는 평생 마음의 무거운 짐을 벗지 못했을 것이오.”
진산월은 여전히 처음의 자세 그대로 묵묵히 침상 위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그가 아무런 대꾸가 없자 이정문은 다소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때 처음으로 진산월이 빙긋 웃었다.
비록 흉터투성이의 얼굴에 왼쪽 뺨에는 아직도 붕대를 감고 있었으나, 입술이 올라가면서 하얀 이가 드러나는 그 모습은 분명 웃고 있는 것이었다.
이정문은 그 웃음의 의미를 몰라 순간적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대체 이자는 왜 웃고 있는 거지?’
진산월이 웃을 때 얼굴의 흉터가 움직이며 그의 전체적인 얼굴 인상을 묘하게 바꾸어
놓았다.
그 전에 진산월은 항상 느긋한 표정에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왠지 모르게 차가우면서도 냉정해 보였다.
이정문은 그것이 얼굴의 흉터 때문인지 아님녀 그의 심정이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침내 이정문은 참지 못하고 불쑥 물었다.
“무슨 우스운 일이라도 있소?”
진산월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그치지 않았다.
“갑자기 어떤 일이 생각났소. 그러자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구려.”
“그렇게 우스운 일이라면 나도 들어봅시다. 같이 웃을 수 있게.”
“나에게는 우스운 일이지만 다른 사람도 그 이야기를 듣고 웃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소.”
이정문은 눈을 반짝 빛냈다.
“진짜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누가 들어도 웃을 수 있을 거요.”
진산월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 그 이야기를 듣고 싶소?”
“그렇소. 어서 말해 주시오.”
“한 바보스런 사나이에 대한 이야기요.”
“바보 이야기라면 언제 들어도 재미있지.”
진산월은 천천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한 사나이가 있었소.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이 무척 똑똑한 줄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아주 미련하고 멍청한 바보 천치요. 그러던 어느 날, 이 사람은 진짜 똑똑하고 영리한 천재를 만나게 되었소.”
“…!”
“천재는 바보에게 한 가지 놀이를 하자고 했소. 그것은 죽은 사람의 관 속에 들어가서 숨어 있다가 죽은 사람의 가족이 문상(問喪)을 왔을 때 관 속에서 튀어나와 그들을 놀라게 하자는 것이었소. 바보는 그 놀이가 무척 재미있겠다고 생각하여 승낙을 했지. 하지만 사실 그 놀이는 천재의 짓궂은 장난이었소. 천재는 죽은 사람의 가족에게 바보가 관 속에 숨어 있음을 미리 알렸던 거요.”
진산월은 싱글벙글 미소를 그치지 않으며 말을 계속했다. 하나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정문의 표정은 그와는 반대로 점차 딱딱하게 굳었다.
“바보는 천재의 말대로 관 속에 숨어 있다가 때가 되자 튀어 나왔소. 그때 그가 본 것은 주위 사람들의 놀란 모습이 아니라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죽은 사람의 친척들의 성난 얼굴이었소. 그때서야 바보는 자신이 천재의 놀림에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때는 늦어서 결국 흠씬 얻어맞고 말았소. 어떻소? 재미있는 이야기 아니오?”
이정문은 전혀 재미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말없이 진산월을 응시하고 있더니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진 장문인의 말이 맞았소. 진 장문인에게는 그 이야기가 재미있을지 몰라도 나는 하나도 재미가 없구려.”
진산월의 입가에는 여전히 괴이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왜 그렇소? 그 이야기 속에 나오는 바보가 당신일까 봐 그렇소?”
이정문은 소태라도 씹은 것 같은 얼굴로 우두커니 있더니, 둘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제 그만하시오. 진 장문인이 바보가 아니며, 나도 천재가 아니오. 그랬다면 일이 이 지경으로 되지는 않았을거요.”
진산월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걷혔다. 미소가 사라진 그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한층 더 음울해 보였다.
“당신은 확실히 천재요. 솔직히 말하면 이번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치의 착오도 없이 당신의 계획대로 움직였던 거요.”
“아니…”
이정문이 무어라고 말하려 하자 진산월은 손을 내저어 그를 제지시켰다.
“당신을 탓하려는 건 아니니 굳이 부인할 필요 없소. 사실 내가 조그만 더 똑똑했더라면 당신의 제안을 처음부터 거절했거나, 아니면 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일을 진행했을 거요. 그랬다면 적어도 지금과 같이 보름씩이나 침대에 누워 있는 신세는 되지 않았겠지.”
이정문은 입을 다물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감종간이 상관욱의 시신을 관(棺)으로 운반할 것이라는 점에 착안해 단목초를 제거한다는 당신의 계획은 언뜻 그럴듯하게 들렸으나 자세히 뜯어보면 몇 가지 허점이 있었소. 우선은 감종간이 관을 산다고 해도 그 관을 꼭 왕방에게서 구입하라는 법이 있느냐는 것이오. 물론 왕방의 관이 가장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감종간이 왕방을 찾아갈 것이라는 절대적인 장담은 할 수가 없소. 왕방보다는 못해도 좋은 관을 만드는 사람은 만원현에서도 적지 않게 찾을 수 있소. 굳이 한나절이나 떨어진 대죽까지 갈 필요는 없었단 말이오.”
“…!”
“또 왕방의 기술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감종간 정도의 인물이라면 관에 만들어진 이중장치를 발견할 가능성이 다분히 있었소. 그런데도 당신은 그런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예 염두에도 두고 있지 않았소. 마치 그가 이중장치를 발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나 있었다는 듯이 말이오. 세 번째로 내가 감종간의 눈을 피해 관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에도 의문점이 있었소.”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감종간은 관에서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소.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관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음을 알고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했소. 하나 당신은 그러지 않았소. 당신은 느닷없이 나를 정체 모를 배로 데려갔고, 운(運)이 닿으려는지 당신이 나를 잠복시킨 선실에 감종간이 관을 보관해 두었소. 게다가 그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문까지 잠가서 나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관 속에 들어갈 수 있었소. 참으로 우연치고는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소?”
“…!”
“마지막으로, 당신은 단목초가 관 뚜껑을 열었을 때 내가 상관욱의 시신 뒤에 숨어서 그를 공격하면 그는 피하지 못할 거라고 했었소. 하나 직접 겪어 본 단목초의 무공은 나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어서, 나의 검술 실력으로는 그의 가공할 호신기공(護身氣功)을 도저히 뚫을 수 없었소. 다시 말해서 아무리 내가 완벽하게 관 속에 숨어 있다 할지라도 내 실력으로는 애초에 단목초를 죽이는 것이 무리였던 거요. 그런데도 당신은 굳이 나를 살수(殺手)로 썼소. 단목초의 무공이 어느 정도이고 내 실력이 어떠한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당신이 말이오.”
이정문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고, 진산월은 힐끗 그를 응시한 다음 다시 말을 계속했다.
“이런 여러 가지 의문점에 대해 내가 조금만 더 진지하게 생각했다면 이 계획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는지를 알아차렸을 거요. 그런데 나는 알지 못했소. 그러니 바보 소리를 들어도 당연한 거요.”
“…!”
“애초부터 당신의 계획에서 단목초를 죽이는 역할은 내가 아니었소. 단목초 정도의 절대 고수가 관 속에 숨은 이류검객의 손에 죽을 가능성은 처음부터 아예 없었지. 난 그저 주위의 이목을 끌고 당신의 계획을 완벽하게 하기 위한 도구에 불가했을 뿐이오.”
자신을 한없이 비하(卑下)시키는 말을 하면서도 진산월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당신이 노린 사람은 감종간이었소. 감종간은 단목초의 대제자이며 그이 신임을 받고 있는 인물이오. 만약 감종간으로 하여금 단목초를 배신하고 당신에게 협력하게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단목초를 죽일 수 있는 최고의 적임자를 얻게 되는 거요. 그래서 당신은 상관욱의 시신을 일부러 밀방에 가져다 놓은 것이오.”
이것은 하나의 아주 정교하고 복잡한 고도의 심리전(心理戰)이었다.
상관욱과 그의 몇몇 측근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밀방의 비밀처소에서 감종간은 상관욱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가 시체를 발견하고 처음에 느낀 것은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하나 그는 곧 자신의 생각을 수정했다. 함정에 빠졌다면 응당 닥쳐야 할 매복이나 암습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다시 상관욱이 부상을 입은 와중에 필사적으로 혼자의 힘으로 밀방까지 도망쳐 왔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은 언뜻 타당한 것 같았다.
감종간은 하마터면 거의 그 생각을 굳힐 뻔했다. 하나 마지막 순간에 그는 제삼(第三)의 가능성을 생각해 냈다.
만약 이 모든 상황이 누군가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알리기 위한 신호였다면? 일부러 극소수의 사람들밖에 모르는 밀방의 구석진 방에 상관욱의 시신을 가져다 놓음으로써 자신에게 무언가 암시룰 주려 한 것이었다면?
그렇다면 과연 누가 무슨 이유에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일까? 그리고 그 암중(暗中)의 인물이 자신에게 보내는 신호는 무엇일까?
감종간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안에 담긴 의미를 파악해 냈다.
상관욱을 죽인 사람은 이정문일 것이다.
이정문은 일부러 상관욱의 시신을 감종간이 찾을 수 있는 밀방에 가져다 놓았다.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뜻한다.
첫째는 밀방의 존재를 알 정도로 이정문은 상관욱의 조직을 훤히 꿰뚫고 있으며, 이미 그 조직을 완전히 궤멸했거나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이정문은 감종간이 상관욱을 찾아 이곳까지 올 것을 예상하고 있으며,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이곳에 매복을 두고 언제라도 감종간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두 번째 의미였다.
이정문은 얼마든지 감종간을 죽일 수 있었다. 밀방같이 페쇄적인 공간에 매복이 숨어 있다면 감종간이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정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감종간은 그 이유를 오직 한 가지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이정문은 그에게 제의를 해오고 있는 것이다. 자신과 협력하라고.
그렇기 때문에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매복을 하지 않은 것이다.
감종간은 자신이 파악한 이 신호가 과연 정확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자신이 과연 올바로 판단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상관욱의 시신이 밀방에 있는 것은 단순한 우연에 불과한데, 자신이 너무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닌가?
이정문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안 들이고는 둘째 문제였다.
우선은 그런 제의가 실제로 존재하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 감종간은 다음 행동에 돌입했다.
이정문이 상관욱의 시체를 가져다 놓은 것은 감종간으로 하여금 그 시체를 운반해 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시체는 필연적으로 관으로 운반한다. 그렇다면 이정문이 감종간에게 진짜 운반시키고 싶은 것은 시체가 아니라 관일 것이다.
그것도 아주 특수한 관!
그러자 감종간은 왕방을 떠올렸다.
특수한 관이라면 왕방이 적임자였다.
만일 이정문의 신호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왕방을 찾아가면 보다 확실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감종간은 한나절 거리에 있는 왕방의 집을 찾아간 것이다.
왕방이 만든 관을 감종간은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정문이 보내는 두 번째 신호를 발견했다.
그것은 이중문(二重門)이었다.
왕방의 관은 위 뚜껑 외에도 옆면의 장식을 따라 교묘하게 또 다른 문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 문은 비록 정교하게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장식과 비밀문 사이의 마무리가 조금 서툴게 되어 있었다.
이런 흔적을 감종간 같이 눈이 날카로운 사람이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왕방은 누구나가 공인하는 최고의 실력가였다.
그런 왕방이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실수가 아니라 왕방이 일부러 만든 흔적일 것이다.
왜 왕방은 이중문을 만들면서 일부러 흔적을 남겼을까?
감종간은 어렵지 않게 그 해답을 알 수 있었다.
왕방이 혼자 이런 짓을 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왕방은 틀림없이 이정문의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지시대로 이중문을 만들면서 이런 흔적을 남겨놓은 것이다.
말하자면 그 흔적은 감종간에게 보내는 이정문의 통고였다.
자신과 협력하자는…
이제 감종간은 자신의 마음을 결정할 때가 되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이정문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그와 손을 잡는 길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는 비단 목숨을 부지할수 있을 뿐 아니라, 흥정 여하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또 한 가지의 길은 이정문의 제의를 묵살하는 것이다.
하나 그렇게 된다면 이정문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척살(擲殺)하려 할 것이고, 이미 행적이 완전히 노출된 그로서는 도저히 이정문의 은밀한 살수(殺手)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이 길이 있다.
그것은 위험한 도박과 같은 것이며, 많은 노력가 기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배신(背信)의 길이었다.
이정문의 제의를 수락하는 척하며 사실은 기회를 보아 그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매력적인 방법이었다. 하나 또한 가장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이기도 했다.
이정문 같은 사람이 이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감종간이 제의를 수락한다면 이정문은 필시 그가 도저히 배신할 수 없게끔 방법을 강구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강구해 낸 방법은 감종간으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수법일 것이다.
그렇게 할 자신이 없었다면 이정문은 결코 감종간을 향해 제의의 손짓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정문이 신호를 보낸 그 순간부터 감종간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정해져 있는 셈이었다.
감종간으로서는 도저히 그 길을 피할 수도 없고 빠져 나갈 수도 없었다.
감종간이 상관욱을 찾아 밀방으로 발을 들여놓은 순간, 이미 그는 이정문이 쳐놓은 올가미에 빠져들고 만 것이기 때문이다.
감종간은 왕방의 관을 마차에 싣고 상관욱의 시신을 둔 객잔으로 돌아왔다. 예상대로 그 객잔은 이미 이정문에게 포섭되어 있었다. 감종간이 어떤 객잔에 머물렀어도 그 객잔은 이정문의 손길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상관욱의 시신을 마차에 싣고 객잔을 떠날 때, 객잔 주인은 그에게 식량을 준비할 거냐고 물었다. 감종간은 그것이 이정문이 보내는 세 번째 신호임을 알아차렸다. 식량을 달라고 하면 이정문의 제의를 수락한다는 뜻으로, 두 사람은 계속 협력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식량을 거절하고 그냥 간다면 감종간은 대죽을 벗어나기 전에 싸늘한 시신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감종간은 주저하지 않고 사 일치의 식량을 부탁했다. 감종간이 식량을 받는 것을 보고 이정문은 그가 자신의 제의를 수락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한결 느긋한 마음으로 마차의 뒤를 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날 저녁, 건량을 먹던 감종간은 배신을 막기 위해 이정문이 준비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건량을 먹을 때는 몰랐는데, 무심코 건량과 함께 준비된 식수(食水)를 마신 순간 그는 자신이 중독되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혹시라도 이런 일이 있을 것에 대비해서 그는 사전에 건량과 식수를 철저히 조사했었다. 건량과 식수는 모두 깨끗했다. 그래서 그는 안심하고 그것들을 먹었던 것이다. 문제는 건량이나 식수 중 하나만 먹으면 괜찮지만, 두 가지를 모두 복용하면 두 음식에 섞인 특수한 성분이 혼합되어 무서운 극독(劇毒)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감종간이 이를 알았을 때는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린 후였다. 이 독은 이정문이 특수하게 만든 독이므로 해약(解藥)은 오직 그만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되면 그때 비로소 감종간에게 해약이 건네질 것이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착오가 생긴다면 이정문은 해약을 주지 않을 것이며, 감종간은 한 구의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버릴 것이다. 감종간은 새삼 이정문의 치밀함에 전율하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이정문의 손에 빠져든 이상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이다. 이정문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정문이 노리는 것은 자신의 사부이자 서장무림의 최고 두뇌인 단목초의 목숨이었다. 하지만 단목초는 유가술(瑜伽術)을 연마하여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죽일 수가 없었다. 도검(刀劍)으로 찔러도 그의 몸에서 피 한 방울 낼 수가 없는 것이다. 감종간이 아무리 단목초의 수제자라고 해도 그 가공할 유가술을 파헤치고 단목초를 죽일 실력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단목초에게는 양벽과 나안이라는 수신쌍위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어 암습 자체가 불가능했다. 결국 감종간은 하고 싶어도 단목초의 목숨을 제거할 방법이 없었다. 하나 이정문은 간단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다음날 감종간 앞에 하나의 향로가 전해졌다. 그 향로는 겉으로 보아서는 평범한 청동향로였으나, 속에는 전혀 다른 물질이 담겨져 있었다. 그 물질의 정체를 알고 난 감종간은 그제서야 비로소 단목초를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 후의 일은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진행되었다. 감종간은 망강의 강변에 있는 주루에서 점소이로 행세하고 있는 서장무림의 첩자에게 자신이 도착했음을 알리고 배를 부탁했다. 그 배는 항상 망강의 나루터에서 조금 떨어진 은밀한 곳에 정박해 있었다. 배가 도착하자 배의 가장 구석진 밀실에 관을 내려놓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잠갔다. 이정문에게는 미리 배의 위치를 알려주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대신해 바람막이가 되어 줄 살수를 이미 그 밀실 안에 잠복시켰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단목초가 숨어 있는 이왕묘의 구석진 건물에 도착한 감종간은 그중 창문이 하나만 뚫려 있는 방을 택해 관을 내려놓았다. 창문이 없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이 몸을 피하기가 힘들고, 창문이 많으면 자기말고 다른 사람도 몸을 피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청동향로에 향을 피우고 단목초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단목초가 수신쌍위와 함께 나타났다. 단목초는 가장 아끼는 제자의 죽음으로 마음이 크게 격앙된 상태였다. 아마 그가 평상시의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거나 경계를 늦추지 않았겠지만, 그러기에는 상관욱의 죽음이 준 충격이 너무 컸다. 단목초가 관을 열라고 하자 감종간은 자신이 청동향로를 들고 양벽과 나안에게 관 뚜껑을 붙잡게 했다. 그러므로써 단목초를 그림자처럼 호위하던 수신쌍위를 그에게서 떼어놓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단목초의 목숨을 앗아갈 향로를 자연스럽게 손에 들고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관 뚜껑이 열리고 모두의 시선이 관 속으로 향했을 때, 각본대로 상관욱의 시체 밑에 숨어 있던 살수가 단목초를 암습했다. 그자의 검은 정확히 단목초의 가슴을 찔렀지만, 예상한 대로 단목초의 놀라운 유가술에 막혀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하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단목초와 수신쌍위의 주의가 온통 그 살수에게 집중된 순간, 단목초의 뒤에 서 있던 감종간은 청동향로 속의 앙천지독을 단목초의 머리 위에 부어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는 단목초의 마지막 살수를 피해 미리 보아둔 창문을 넘어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서장무림 최고의 기인이자 제일두뇌라고 알려진 천애치수 단목초의 죽음에 담긴 진상(眞相)이었다.
“당신이 유일하게 걱정했던 것은 혹시라도 내가 살수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할까 하는 것이었소. 살수의 암습이 너무 보잘것없으면 단목초가 의혹을 느낄 테고, 감종간의 일이 어려워질 테니까 말이오.”
진산월의 음성은 여전히 변함없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서 당신은 계속 나에게 이번 일이 극도로 위험하며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임해야 한다는 언질을 주었소. 당신의 계획대로 나는 죽을 각오를 하고 단목초를 암습했고, 그의 주목을 받는 데 성공하여 감종간에게 보다 완벽한 기회가 오게끔 했던 것이오. 이 정도면 꼭두각시치고는 정말 훌륭하게 해냈다고 생각지 않소?”
한동안 무거운 침묵을 지킨 채 진산월의 말을 듣고만 있던 이정문은 씁쓸한 고소를 떠올렸다.
“진 장문인이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파악하고 있을 줄은 몰랐소. 하지만 진 장문인이 독에 중독되어 사경(사경)을 헤매게 된 것은 나도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소.”
진산월은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표정은 냉랭해 보였다.
“그렇지 않을걸. 당신은 그 방에 있는 사람이 결국에는 모두 앙천지독의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그래서 미리 철면군자 노방에게 도움을 청했던 거요. 단지 내가 그 전에 부시독에 중독되고 마지막 순간에 단목초의 근처에 있다가 폭혈마공에 피해를 입었다는 것만 알지 못했던 것이지. 어쨌든 당신은 내가 그 방에서 살아 나오지 못하리라고 본 거요.”
이정문은 억울한 듯 항변했다.
“솔직히 진 장문인이 앙천지독의 피해를 입으리라고는 예상했소. 그래서 진 장문인을 살리기 위해서 노방을 부른 것이오. 이 정도로 나를 용서해 줄 수 없겠소?”
“내가 용서한다고 하면 당신 마음이 편해지겠소?”
그 말에 이정문은 입을 다물었다. 진산월은 다시 웃었다.
“사실 용서하고 말고 할 것도 없소. 나는 이미 이번 일이 위험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것을 각오하고 당신의 부탁을 받아들인 것이니 말이오. 딩신의 계획은 확실히 효과적이었소. 다만…”
진산월이 갑자기 말을 끊자 무심코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던 이정문의 얼굴에 흠칫하는 기색이 어렸다. 비록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나, 진산월의 얼굴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냉랭해 보였던 것이다.
“강호에 믿을 만한 사람은 정말 찾기 힘들다는 누군가의 말이 이번처럼 가슴에 사무친 적은 없었소.”
이정문은 한차례 어깨를 떨었다. 그는 잠시 시선을 떨군 채 자신의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쳐들었다.
“아무래도 진 장문인의 심사(心思)가 많이 불편한 모양이구려. 그래서 진 장문인의 마음을 달래 줄 사람을 데리고 왔소.”
진산월의 칼날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이정문의 얼굴로 향했다. 이정문은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입가에 환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를 보게 된다면 진 장문인도 내가 결코 진 장문인을 소홀히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거요.”
이어 그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
짝!
그러자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 진산월은 그대로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