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7권 검정중원(劍定中原)편 :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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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7권 검정중원(劍定中原)편 : 5화


제61장. 성심지록(星尋之錄)

다음 날 아침, 진산월은 풍성한 요리를 준비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난 낙일방과 방취아는 식탁 위에 차려진 산해진미(山海珍味)를 보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장문사형, 이걸 다 언제 준비했어요?”

진산월은 양손으로 음식이 가득 담긴 쟁반을 들고 들어오며 빙긋 웃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조금 서둘렀지.”

방취아는 신기한 듯 식탁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재잘거렸다.

“역시 장문사형이 돌아오니 먹을 복이 터졌군요. 그동안 내가 식탁을 차렸는데 영 볼품이 없었거든요.”

낙일방이 그 말을 듣고 킬킬거렸다.

“흐흐…… 사매 음식 솜씨야 내가 잘 알지. 매 사형과 소 사형이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안 봐도 짐작이 가는군.”

방취아는 쌀쌀맞은 표정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그래도 내가 밥 해주면 다들 아무 소리 없이 잘 먹었단 말이에요.”

“그야 거기서 사매한테 뭐라고 한마디했다가 사매가 토라지기라도 하면 사형들이 직접 자기 손으로 밥을 지어먹어야 하니 그랬겠지.”

“정말 자꾸 내 속을 박박 긁을 거예요? 여자가 이쁘고 술 잘 먹으면 됐지, 요리는 잘해서 뭐 해요?”

낙일방은 어이가 없는지 피식피식 웃기만 했다.

그때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면서 안으로 들어오던 응계성이 눈을 크게 떴다.

“어? 이게 웬일이지? 오늘이 무슨 날인가?”

낙일방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무슨 날이긴요. 우리가 무사히 돌아온 걸 축하하려고 장문사형이 모처럼 솜씨를 부린 거지요.”

“그래? 아무튼 잘됐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별로 먹은 게 없어서 출출했는데……”

응계성이 자리에 앉자 때마침 동중산도 모습을 드러냈다. 방취아가 그를 손짓해 자신의 옆자리로 불렀다.

“동(董) 사질(師姪), 이리 와서 앉아요. 장문사형이 음식 솜씨 하나는 기가 막히다니까요.”

그녀는 동중산을 어제 처음 소개받았는데, 워낙 사교성이 좋고 성격이 쾌활해서 금세 동중산과 친하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동중산의 나이가 자신보다 훨씬 많은데도 그녀의 입에서는 대뜸 ‘사질’ 이란 단어가 튀어나올 정도였다.

종남파의 제일 막내인 방취아는 항상 자신보다 항렬이 높은 사형들만 상대하다가 비록 나이는 많지만 자신의 아래 항렬이 생기자 무척 신이 난 모양이었다. 동중산도 그런 그녀가 그다지 싫지 않은지 빙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고맙습니다, 사고(師姑).”

난생처음 들어보는 ‘사고’라는 말에 방취아의 얼굴에는 복사꽃 같은 화사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탐스럽게 튀겨진 닭다리 하나를 동중산에게 내밀었다.

“어서 먹어.”

“하지만 장문인께서 아직 자리에 앉지도 않으셨는데……”

동중산이 난색을 표하자 방취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조잘거렸다.

“괜찮아. 우리 종남파는 먹는 거 가지고는 위아래를 안 따져. 그냥 아무 때나 자기가 먹고 싶을 때 먹으면 돼.”

동중산은 강호의 유수한 명문정파 중 하나인 종남파의 법도가 자신의 당초 생각과는 너무도 틀린 것에 놀라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니까. 이게 모두 장문사형이 만든 규칙이야. 자기가 배고플 때 언제든지 먹을 수 있도록 아예 규칙을 바꿔 놓았다니까.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먹어.”

방취아가 아예 닭다리를 동중산의 입가로 가져가서 강제로 입 속에 쑤셔 넣을 기세이자 옆에서 보고 있던 낙일방이 낄낄거렸다.

“헤헤…… 방 사매가 아주 신이 났군. 사매 말이 틀린 건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말고 먼저 먹어요. 장문사형은 그런 거에는 신경도 쓰지 않을 거예요.”

동중산은 다시 응계성의 눈치를 살폈으나, 응계성은 이미 입안 가득 생선튀김을 집어넣고 우물거리고 있었다.

동중산의 시선은 다시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진산월은 괜찮다는 듯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동중산은 방취아의 손에서 닭다리를 건네받아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닭다리를 입에 넣고 몇 모금 씹던 동중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취아가 그 광경을 보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내 말이 맞지?”

“이거 정말 맛있군요. 이 요리 이름이 뭡니까?”

“남전계퇴라는 것인데, 장문사형이 특히 잘 만드는 요리 중 하나이지. 사저가 좋아했었는데……”

방취아는 무심코 입을 놀리다 안색이 굳어졌다. 낙일방과 응계성이 그녀에게 추궁 어린 눈짓을 보냈으나 이미 그녀의 입에서 말이 튀어나온 후였다. 그들은 너나할 것 없이 음식을 먹다 말고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진산월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별반 표정 없는 얼굴로 몇 가지 요리를 식탁 위로 올려놓고 있었다.

응계성은 방취아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입 조심 하라는 시늉을 했다. 방취아는 혀를 낼름거렸으나, 조금 전과는 달리 한결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장내의 분위기가 약간 어색해졌을 때 마침 소지산이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소지산은 여전히 까치집처럼 헝클어진 머리에 옷자락은 구깃구깃해서 며칠 동안 그대로 입고 잔 것 같은 추레한 모습이었다. 꾀죄죄한 그의 몰골을 보자 방취아는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고, 응계성은 코웃음을 날렸다. 낙일방만이 멋쩍게 웃으며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소 사형, 앉으세요.”

소지산은 진산월에게만 고개를 까닥거려 인사를 하고는 이내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는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아서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그가 벙어리거나 아니면 무언가에 단단히 화가 났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낙일방 등은 이미 그의 이런 행동에 익숙해져 있는지라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동중산은 여러모로 어색한지 자꾸 소지산을 힐끔거렸다.

그때 진산월이 마지막 요리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는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모두 온 것 같으니 즐겁게 먹자꾸나.”

방취아가 입 안 가득 음식을 집어넣은 채로 물었다.

“매 사형이 아직 안 왔잖아요.”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모두 온 거야.”

방취아는 그 말에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듯 오물거리던 입을 다물었다. 응계성과 낙일방 또한 의아한 얼굴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진산월은 천천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낙일방은 그를 향해 무어라고 입을 열려 했으나 결국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묻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진산월은 중인들이 자신을 쳐다본 채 아무도 식사를 하지 않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음식이 맛이 없나? 왜 모두들 그러고 있지?”

방취아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장문사형…… 매 사형은 어디 있어요?”

진산월은 젓가질을 멈추지 않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그는 떠났어.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 말에 방취아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했다. 낙일방은 혹시나 했던 자신의 불안감이 그대로 적중한 것을 알고 안색이 핼쑥하게 변했고, 응계성은 이를 악문 채 눈을 감았다. 소지산은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헝클어진 앞머리카락이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진산월은 다시 중인들의 얼굴을 한번 훑어보고는 이내 빙긋 웃었다.

“내 음식이 그렇게 맛이 없나? 모두 우거지상을 하고 있게. 지금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즐겁게 먹자구. 그래야 힘을 내서 본 파를 다시 재건(再建)할 수 있을 테고, 그러면 떠났던 사람들도 다시 돌아올 것 아냐?”

응계성이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던졌다.

“장문사형은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 거요?”

“물론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내가 왜 아침부터 이런 수선을 피웠겠어? 자, 다들 맛있게 먹고 기운을 차리자구.”

그 말에 중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들 중 가장 낙천적이고 쾌활한 성격을 지닌 낙일방이 이내 활짝 웃으며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장문사형 말이 옳아요. 먹어야 힘을 쓰죠. 식사를 한 후에는 대청소를 하는 게 좋겠어요. 어제 보니까 구석구석에 먼지가 많이 쌓여 있고, 대전(大殿)의 천장에는 거미줄까지 쳐 있더군요.”

진산월은 낙일방을 쳐다보며 미소지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 그러고 보니 청소를 안 한 지도 상당히 오래되었는걸.”

“그렇죠? 대전하고 연무장(鍊武場)은 나하고 응 사형에게 맡기세요. 아주 새로 단장한 것처럼 깨끗하게 치워놓을 테니까요.”

응계성이 그를 쏘아보았다.

“너 혼자 해. 거기에 왜 나를 끌고 들어가?”

“응 사형, 그 넓은 대전하고 연무장을 나 혼자 어떻게 해요? 그러면 응 사형 혼자 대전을 치울래요? 아니면 다른 사람하고 같이 하든지……”

응계성은 방취아와 소지산을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관두자. 그래도 다른 놈들보단 네가 더 낫다.”

방취아가 뾰쪽한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내가 어때서요? 나도 청소라면 일가견이 있다구요.”

“넌 입다물고 한쪽 구석에 가만히 있어. 일이나 저지르지 말고.”

“내가 뭘 어쨌다고 툭하면……”

종알거리던 방취아는 응계성이 험악한 표정으로 노려보자 움찔하여 입을 다물었다. 하나 그래도 고개를 돌리고 조그맣게 소곤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자기는 낙 사형한테 일 다 시키고 혼자 빈둥거릴 거면서……”

“자꾸 떠들래?”

“어마, 들렸어요?”

방취아는 짐짓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들갑을 떨더니 이내 혀를 낼름거렸다.

“들리면 들리라지.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뭐라고?”

응계성의 목소리가 높아지려 할 때 진산월이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떠드는 것을 보니 배가 고프지 않은 모양이구나. 대충 먹었으면 이제 치워야겠다.”

방취아는 황급히 접시에 코를 박았다.

“아니에요. 난 아직 멀었어요.”

응계성 또한 궁시렁거리면서도 정신없이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진산월의 음식 솜씨는 뛰어난 점이 있었다. 아침에는 원래 가볍게 먹는 법인데 다들 배가 부르도록 잔뜩 먹고도 별로 속이 거북하지 않았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녹차(綠茶)를 한잔씩 마시자 조금 전의 울적했던 기분이 가시며 모두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진산월은 그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계성과 일방은 조금 전에 말한 대로 대전과 연무장을 청소하고, 지산은 중산과 함께 후원과 침실을 맡아라.”

방취아가 잽싸게 물었다.

“저는요?”

“취아, 넌 내 설거지를 도운 다음 빨래를 해야 한다.”

방취아의 귀여운 코끝이 쫑긋거렸다.

“빨래는 나보다 낙 사형이 더 잘하는데……”

“오늘은 네가 해야 한다.”

“설거지가 끝나면 장문사형이 도와주실 거죠?”

옆에서 듣고 있던 응계성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투덜거렸다.

“문파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군. 넌 장문인에게 빨래를 시키겠다는 거냐?”

“뭐 어때요? 사람도 별로 없어서 아무나 닥치는 대로 해야 된단 말이에요. 더구나 빨래는 대부분이 남자들 거잖아요. 그거다 빨았다가는 온몸이 쭈글쭈글해질 거예요.”

낙일방이 피식 웃었다.

“걱정 마. 내가 빨리 청소 끝낸 다음에 도와줄게.”

진산월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라. 난 따로 할 일이 있다.”

방취아는 궁금한 듯 재빨리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장경각(藏經閣)을 정리해야겠다.”

방취아의 얼굴에 주름살이 잡혔다.

“거기 무척 지저분할 텐데요. 벌써 어랫동안 사용한 사람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청소를 하려고 한다. 찾아볼 자료도 좀 있고……”

방취아는 귀가 솔깃한지 눈을 반짝거렸다.

“그거 내가 도와줄까요?”

“빨래는?”

방취아는 생긋 웃으며 혀를 낼름거렸다.

“낙 사형이 청소를 후다닥 해치우고 하면 되죠. 낙 사형은 그런 일에는 소질이 많단 말이에요.”

응계성은 더 듣고 있다가는 화병이 날 것 같았는지 씩씩거리며 밖으로 사라졌고, 낙일방도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재빨리 뛰어나갔다.

“그렇게는 못하지. 장문사형 말대로 빨래는 네 몫이다.”

“낙 사형!”

방취아가 애타는 음성으로 그를 불러 세웠으나, 낙일방은 어느사이에 응계성을 따라 밖으로 사라진 후였다.

“에이, 저럴 때만 재빠르다니까.”

진산월은 담담하게 웃었다.

“나도 네가 도와주는 건 반대다. 도와준답시고 잔뜩 어질러만 놓을 텐데 그 뒤치다꺼리하다 보면 언제 일이 끝날지 모를 테니 말이다.”

“장문사형!”

방취아가 소리를 빽 질렀으나, 그때는 진산월이 소리내어 웃으며 문밖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방취아는 약이 올랐는지 발을 세게 구르며 동동거리고 있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슬그머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이내 동중산에게 고정되었다. 하나 머리 속에 늙은 여우가 들어 있는 동중산이 그녀의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 사고도 수고하십시오. 사질은 소 사숙과 함께 후원을 정리하겠습니다.”

돌부처 같은 소지산도 그녀와 시비를 일으키기는 싫었는지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황급히 뒤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졸지에 혼자 남게 된 방취아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씩씩거렸다.

“남자들은 모두 똑같아. 하나같이 여자를 부려먹으려고만 해. 나같이 예쁘고 귀여운 여자한테 냄새 나는 빨래 더미를 맡기다니…… 아유, 속상해!”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를 빙빙 맴돌다가 어쩔 수 없이 떨어지는 발걸음을 옮겨 빨래터로 행해야만 했다.


“정말 지독하군.”

진산월은 눈살을 찌푸리며 코를 움켜잡았다. 장경각 문을 열고 들어서자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사정없이 코를 찔렀던 것이다. 이미 발과 어깨 위에는 자욱한 먼지가 수북하게 앉은 후였다.

어느 문파이든 문서를 보관하는 장경각은 있기 마련이다. 종남파에도 당연히 장경각은 있었다. 어느 문파이든 장경각은 소중히 관리하고 지키는 법이다. 하나 종남파는 장경각을 몇 년째 방치하고 있었다. 이유는 한 가지, 장경각에 쓸 만한 책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종남파가 한창 성세(聲勢)를 날릴 때에는 종남파의 장경각도 다른 문파의 그것처럼 가장 소중하게 여겨질 때도 있었다. 전설적인 소림사(少林寺)의 장경각만큼은 못되어도 상당히 뛰어난 각종 무공비급(武功秘?)과 기이한 절학(絶學)이 수록된 책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하나 종남파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장경각도 점차로 황폐화되었다. 종남파가 몰락하기 시작한 지는 벌써 이백 년 가까이나 되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장경각에 꽂혀 있던 절학들은 조금씩 유출되어 나갔고, 일부는 파손되거나 못 쓰게 되어 버려지기도 했다.

그래서 진산월이 종남파에 입문했을 당시에는 이름만 장경각이지 실제로 소장된 책들은 대부분이 무공과는 별 관계가 없는 일반 서적들뿐이었다. 게다가 그들 중 상당수는 너무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아 글자를 제대로 읽을 수 없을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진산월조차도 장경각에 들어온 것이 근 일년 만의 일이었겠는가?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끊긴 장경각 안은 지저분하다 못해 황량할 지경이었다. 두터운 먼지가 쌓이고 사방에 거미줄이 가득했다. 지난 여름의 폭우 때 지붕이 새었는지 책들은 곰팡이가 잔뜩 슬어 있었고, 개중에는 물에 녹아 제대로 형체를 찾아보기 힘든 것들도 있었다.

장경각 안을 한바퀴 둘러본 진산월은 절로 한숨이 흘러 나왔다. 마치 폐허처럼 변한 이 내부가 지금의 종남파의 신세를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문파의 장문인으로서 장경각이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해 두다니 돌아가신 선사(先師)를 뵐 낯이 없구나.”

진산월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탄식을 토해냈다. 그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먼저 꽉 막혀 있는 사방의 창문을 연 다음 본격적으로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먼지는 닦으면 닦을수록 어디선가 떨어져 내렸고, 바닥은 걸레질을 아무리 해도 원래의 색이 나오지 않았다.

사시(巳時)부터 미시(未時)까지 점심도 거르고 꼬박 청소를 하고 나서야 겨우 그런데로 장경각으로써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작은 군소 문파라도 장문인이 직접 걸레를 들고 바닥을 청소하는 광경이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진산월은 얼굴이 더럽혀지고 입고 있는 옷이 누더기처럼 변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마치 앞으로의 각오를 다지기라도 하는 듯 때가 덕지덕지 앉은 바닥을 닦고 또 닦았다. 청소는 오후가 되어서야 간신히 마칠 수 있었다.

“휴우…… 이것도 힘들군.”

진산월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청소는 대충 끝났지만 책장 정리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 사방으로 책들이 무질서하게 널려 있었다. 진산월은 아예 못 쓰게 된 책들은 한쪽으로 빼어 버리고 쓸 만한 책들을 책장에 꽂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무엇을 찾는지 가끔 다른 쪽의 책장을 둘러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책장 정리에 시간을 빼앗겼으나, 책장이 거의 정리될 즈음에서는 본격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는데 주력했다. 찾고 있는 책을 발견한 것은 신시(申時)도 거의 지나갈 무렵이었다.

그 책은 구석진 책장의 가장 위쪽에 아무렇게나 꽂혀 있어서 진산월도 하마터면 못 보고 그냥 지나칠 뻔했다. 책은 손가락 두 개를 합친 두께 정도였는데, 겉장이 너덜너덜해서 제목을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 성심록(星尋錄) – 태을종객(太乙從客) 장하민(張河岷) 수찬(手讚) >

태을종객 장하민은 진산월의 사조(師祖)인 천치검 하원지의 사부였다. 다시 말해서 진산월에게는 삼대조(三代祖)가 되는 인물이었다.

천치검 하원지는 종남파가 구대문파에서 축출당할 때의 장문인으로, 사람은 좋으나 능력이 없고 소심한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장하민은 하원지 외에도 모두 네 명의 제자를 두고 있었는데, 나이 오십을 막 넘었을 때 장문인직을 제자들 중 가장 무능력한 하원지에게 넘기고 자신은 은거에 들어가고 말았다.

당시의 사람들은 장하민이 늙지도 않아서 노망(노망)이 났다고 수군거렸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장하민이 장문인으로 있을 당시에도 종남파의 문세는 급격히 쇠퇴하고 있었다. 장하민은 누가 장문인이 되든 종남파의 몰락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제자들 중 그래도 가장 욕심이 없고 성격이 무난한 하원지를 선택한 것이다.

자칫 호승심 강한 인물이 종남파를 맡아 문파를 부흥시킬 욕심에 섣불리 강호에 나섰다가 화(禍)를 당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원지가 형산파의 고수들에게 수모를 당하는 바람에 종남파는 구대문파에서도 쫓겨나고 말았으니 장하민의 고심도 수포로 돌아간 셈이었다.

하지만 하원지가 순순히 물러났기에 종남파가 형산파에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지 않았음을 생각해 보면 장하민의 선택이 반드시 틀렸다고 할 수만도 없었다.

장하민이 오십대의 한창 나이에 장문인직을 하원지에게 인계한 것은 나름대로의 절실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장하민은 절정의 무공이 소실된 현재의 종남파로는 도저히 문파의 부흥이 어렵다고 보고 실전(失傳)된 종남파의 절학(絶學)을 찾기 위해 남은 여생을 바칠 결심을 한 것이다.

그는 종남파 사상 최고의 고수였으며 천하제일고수라고까지 불렸던 태을검선의 행적을 쫓기 시작했다. 패천검(覇天劍)이라는 자신의 별호마저 태을종객으로 바꾸어 버렸다. 태을종객이란 ‘태을을 쫓는 나그네’ 라는 뜻이다.

그가 별호를 이렇게 고친 것은 반드시 사라진 태을검선의 유학(遺學)을 찾고야 말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나타낸 것이었다. 장하민은 이십 년 동안이나 태을검선의 행방을 추적했다. 심지어 그는 종남파가 구대문파에서 쫓겨난 것을 알았음에도 자신의 일을 멈추지 않았다.

하나 그토록 집요한 그의 노력으로도 태을검선의 행방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태을검선은 이미 장하민의 백오십 년 전 사람이었다.

제대로 변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백오십 년 전 인물의 행방을 쫓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백사장에서 바늘 하나를 찾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장하민에게 문파에 대한 사명감과 이대로 끝낼 수 없다는 절박함이 없었다면 진작에 포기해 버렸을 것이다. 장하민은 칠십이 넘은 노구(老軀)를 이끌면서 단 하루도 쉬지 않고 태을검선의 행방을 찾는 데 주력했다. 그는 유난히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던 겨울날에 진령(秦嶺)의 어느 언덕에서 얼어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품속에서 발견된 것은 바로 이 <성심록> 이었다. 이것은 무슨 희대(稀代)의 무공비급도 아니고, 괴이막측한 신공절기가 적혀 있지도 않았다. 다만 이십 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꿈을 쫓은 한 인물의 구구절절한 피와 땀이 배어 있는 기록일 뿐이었다. 장하민의 죽음을 끝으로 더 이상 태을검선의 행방을 뒤쫓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태을비학이란 단지 전설(傳說) 속의 이야기일 뿐이며, 결코 현세(現世)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종남파의 부흥 또한 결코 기대할 수 없는 망상(妄想)에 불과하다고 했다. 장하민의 시체가 종남파로 돌아온 후, 장하민의 유작인 이 책도 종남파에 귀속되었다. 처음에는 몇몇 사람들이 호기심에서 이 책을 읽기도 했으나, 그들은 이내 실망 어린 표정으로 책을 집어던지고 말았다. 그 책에는 기대했던 태을검선의 행방은 적혀 있지 않았다. 단지 태을검선의 시대에 벌어졌던 여러 가지 일들이 서술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었다. 이미 백오십 년 전에 벌어진 일 따위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따라서 <성심록> 또한 점점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벗어나 장경각의 후미진 구석에 처박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오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삼대(三代)나 후대의 장문인의 손에 의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 별을 쫓다 꿈을 꾸었다. 꿈에서 별은 내 가까이 있었다. 손만 내밀면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손을 내밀 수 없었다. 내 손에 닿기만 하면 그 별이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꿈속에서도 별을 잡지 못한 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어야만 했다. 꿈에서 깨어난 내 눈가에는 의미 모를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과연 별을 잡을 수 있을까? 저 앞에 아스라이 보일 듯 말 듯 빛나고 있는 별을 쫓을 수 있을까? 하나 내게 다른 선택의 길은 없다. 별이 내 눈앞에 있는 이상, 나는 별을 쫓을 수밖에 없다. 설사 그 별을 영원히 잡을 수 없는 것이 내 운명(運命)임을 알고 있을지라도…… >

<성심록>의 서두는 자못 비장하게 시작되었다. 진산월은 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채 두터운 <성심록)의 앞장부터 꼼꼼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성심록>을 찾으려고 결심한 것은 동광사에서 악자화를 만났을 때부터였다. 그때 악자화는 그에게 ‘태을비학’ 을 찾을 것을 권했으며, 진산월도 비로소 본격적으로 그것을 탐구해 볼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종남파의 절박한 사정이 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지금의 종남파는 군림천하를 꿈꾸기는커녕 문파의 존립 자체조차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었다. 당장 문하제자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전(失傳)되었던 절학을 찾아 실력을 배양하는 길만이 종남파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었다. 오십 년 전에 장하민이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걸었던 길을 지금 진산월도 걸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과연 장하민이 쫓던 별을 잡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장하민처럼 영원히 별을 쫓다 실패할지 모르고, 어쩌면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성공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이 쫓고 있던 별이 전혀 다른 것이었음을 깨닫고 새로운 길을 찾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산동성(山東省) 제남(濟南)은 예로부터 산자수명(山紫水明)하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뛰어난 인물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매종도가 태어난 것도 그 제남의 대명호(大明湖) 부근이었다. 매종도는 날 때부터 천재로 근방에서 유명했고, 특히 무술에 탁월한 재질을 발휘했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의 유명한 검객인 일자매화검(一字梅花劍) 매신(梅紳)이라는 인물이었는데, 매신은 매종도의 재질이 자신을 몇 배 능가하는 탁월한 것임을 알고는 어려서부터 좋은 스승을 찾아 천하를 헤매었다. 그러다가 그가 선택한 곳이 바로 종남파였다.

당시 종남파는 욱일승천(旭日昇天)처럼 무서운 기세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휘하에 뛰어난 실력을 지닌 검객들이 끊임없이 배출되는 명문정파였다. 사람들은 그들을 구대문파에서도 태두(泰斗)인 소림과 무당에 곧잘 비교했으며, 조만간에 종남파가 그들을 제치고 구대문파의 우두머리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하나 매신이 종남파에 주목한 것은 그러한 세인들의 칭송 때문이 아니었다. 당시 종남파의 장문인은 유백석(兪白石)이란 인물이었는데, 그는 실로 명망(名望) 있고 문무(文武)를 겸비한 탁월한 고수였다. 종남파의 문세가 갑자기 커진 것도 그의 역량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성격이 공평무사(公平無私)했으며, 검법도 종남파의 전설적인 인물이었던 곽일산 이후 최고로 인정받고 있었다. 특히 제자를 키우는 데 대단한 재질이 있어서 그의 손에서 배출된 이름난 검객만도 적지 않았다. 매신은 유백석을 직접 만나 그의 성품과 무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는 자신의 아들을 맡길 결심을 굳혔다. 유백석 또한 매종도를 보고 한눈에 그의 재질을 파악하고는 선뜻 제자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매종도가 유백석의 문하로 들어간 것은 그야말로 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다름이 없었다. 매종도의 진경(進境)은 가히 눈부신 것이어서 가르치는 유백석이 경악할 정도였다. 종남파에 입문한 이후 매종도는 일대제자들 중에서 단연 탁월한 기재(奇才)를 발휘하여 두각을 나타냈었고, 결국 자신보다 먼저 입문하여 명성을 떨치던 사형들을 능가하게 되었다.

당시의 유백석의 문하에는 정말 뛰어난 인재들이 많았는데, 그들 중에서도 다섯 명의 기재들이 단연 돋보이는 활약을 펼쳤다. 사람들은 그들을 종남오성(終南五星)이라 불렀다. 그중에서도 매종도는 검성(劍星)이라는 별호로 널리 알려졌으며, 은연중 종남오성의 우두머리로 인정받게 되었다.

말년에 유백석은 장문인의 직위를 누구에게 줄 것인가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공이나 명성만을 놓고 보자면 당연히 매종도에게 가야 했으나, 사문의 서열이란 것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이미 천하제일문파(天下第一門派)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거대해진 종남파를 이끌고 나가려면 단순한 무공 실력을 능가하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매종도는 너무 탈속(脫俗)하고 고고했다. 그는 성격적으로도 너무 완벽함을 추구했으며, 조그만 불의(不義)와도 타협하지 않으려 했다. 결국 유백석이 선택한 사람은 종남오성 중의 맏이인 소성(笑星) 우일기(于日琦)였다. 우일기는 별호 그대로 항상 얼굴에 미소가 끊이지 않는 사람이었고, 성격적으로 원만하면서도 인품이 대범해서 거대문파를 이끄는 장문인으로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인물이었다. 매종도조차도 우일기가 장문인이 된 것에 불만을 품지 않을 정도였다.

그후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종남오성은 종남파를 위해 헌신했고, 종남파의 명성과 더불어 그들의 이름 또한 점점 거대해졌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그들을 종남오선(終南五仙)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매종도의 별호도 검성에서 검선(劍仙)으로 바뀌었고, 종남파를 상징하는 ‘태을(太乙)’ 이라는 이름이 덧붙여졌다. 그렇게 그들의 성세는 끝없이 계속될 것만 같았다. 하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종남오선이 존재하는 한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았던 종남파의 영화(榮華)는 어느 순간에 갑자기 덧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 시초는 한 통의 서찰에서 비롯되었다.

<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은 내 마음속에 들어왔소. 가까이서 당신을 지켜보면서도 애태우던 순간이 너무 길었소. 이제 그 긴 기다림을 마치려 하오. 부디 애끓는 내 마음을 받아주기 바라오. >

서명도 없이 정성 들여 쓴 듯한 한 통의 편지가 종남오선 중의 유일한 여인인 비선(飛仙) 조심향(趙沈香)에게 전달된 것은 노을이 유난히 붉은 어느 가을 저녁이었다. 조심향은 곱게 접어 자신의 방문 앞에 놓여진 그 서찰을 읽고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필체가 자신이 오래 전부터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던 검선 매종도의 것임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조심향은 당시 뛰어난 무공과 절세(絶世)의 미모로 천하제일미녀(天下第一美女)라고까지 불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특히 신법(身法)에 특출난 재질이 있어서, 그녀가 일단 몸을 움직이면 누구도 따를 수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조심향은 매종도가 자신에게 연서(戀書)를 보낸 사실에 은근한 기쁨과 갈등을 함께 느꼈다. 그녀 또한 매종도 때문에 그동안 적지 않게 가슴을 앓아 왔던 것이다. 매종도는 너무 고결하고 당당해서 그녀는 때때로 그가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는 사람처럼 생각되었다. 그런데 자신과는 인연이 없는 줄 알았던 그가 스스로 먼저 사랑을 고백해 왔으니 아무리 조심향이 도도한 천하제일미녀라 해도 가슴이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 그때 그녀는 이미 같은 종남오선 중의 일인인 혈선(血仙) 정립병(丁立兵)과 은밀히 사귀고 있는 중이었다.

정립병은 종남오선 중에서도 가장 직선적이고 열정적인 성격이어서 남성적인 매력이 가득한 인물이었다. 일단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 때문에 손에 피가 마를 날이 없다고 하여 별호에 ‘혈(血)’ 자가 붙었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무공 실력은 매종도를 제외하고는 종남오선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으며, 강호 전체를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절대고수였다. 그는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답게 조심향에게 구애(求愛)를 했다.

조심향이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은 매종도였으나, 그녀는 정립병도 싫지는 않았다. 더구나 매종도는 워낙 말이 없고 고고해서 그녀는 그에게 어떤 벽(壁)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정립병의 솔직 대범한 성격과 남성적인 매력에 조심향은 마음을 열었고, 조만간에 기회를 보아서 그와의 관계를 공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뒤늦게 매종도의 연서를 받게 되었으니 조심향의 마음은 참으로 심란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맺고 끊음이 분명한 성격이었으면 별다른 일이 없었으련만, 아쉽게도 그녀는 그러지를 못했다.

결국 그녀는 정립병 몰래 이번에는 매종도를 만나기 시작했다. 그녀도 자신의 행동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일단 매종도를 향해 불타오르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하나 그런 일은 으레 꼬리가 잡히기 마련이었다. 결국 매종도와 세 번째 만났을 때 정립병에게 발각당하고 말았다.

정립병은 처음에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으나, 이내 발연 대로하여 매종도에게 도전을 신청했다. 매종도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정립병을 피했으나, 분노에 찬 정립병의 추궁은 집요한 것이었다. 더구나 매종도는 성격이 너무 고고해서 선뜻 정립병에게 머리를 굽히거나 사과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매종도는 정립병의 도전을 받아들였고, 두 사람은 종남산의 주봉인 태백산(太白山)에서 결투를 벌이게 되었다.
조심향은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후회했으나 이미 일은 벌어진 다음이었다.

막상 매종도와 겨루게 되자 정립병은 연적(戀敵)에 대한 질투심보다는 같은 무림인으로서의 호승심이 더 크게 일어났다.
더구나 정립병은 어려서부터 매종도에게 은연중에 경쟁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조심향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이번의 결전에 그야말로 자신의 일생(一生)을 걸다시피 했다.
매종도는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고수이지만, 정립병 또한 지금까지 남과 싸워 단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는 절대의 고수였다.

그와 매종도와의 싸움은 정확히 팔십 초 만에 결판이 났다.
매종도의 일검이 정립병의 오른쪽 가슴을 찌른 것이다.
다행히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이 아니어서 상처는 금세 나았지만, 정립병의 마음속 상처는 도저히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고 말았다.
정립병은 그 길로 종남산을 뛰쳐나갔다.
매종도 또한 자신이 여인과의 정(情) 때문에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던 동문 사형제를 쓰러뜨렸다는 자책감에 괴로워했다.
그는 조심향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자신도 종남산을 떠났다.

“언제고 내 마음이 가라앉는다면 다시 돌아오겠소.”

그 말만을 남기고 그는 홀연히 모습을 감추어 버린 것이다.
졸지에 사랑하던 두 명의 남자를 모두 잃어버린 조심향 또한 상심(傷心)하여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종남오선 중의 세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종남오선 중의 첫째이며 종남파의 장문인인 소선 우일기는 뒤늦게 사정을 알고 크게 고민했다.
그들 세 사람의 복잡하게 얽힌 애증(愛憎)도 문제지만, 그들이 너무도 갑작스레 떠남으로서 종남파에 생긴 힘의 공백도 큰 문제였다.
우일기는 고민 끝에 종남오선의 막내인 취선(醉仙) 하정의(夏靜毅)에게 장문인 직을 인계하고 자신은 그들 세 사람을 찾아 강호로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우일기조차 그 뒤로 두 번 다시 종남파에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천하를 떨쳐 울리던 종남오선이 한 사람만을 남기고 모두 실종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종남파의 몰락의 서막(序幕)이었다.

취선 하정의는 종남파를 현상 유지라도 하기 위해서 모진 노력을 기울였다.
하나 그 혼자만의 힘으로 거대한 문파를 이끌고 나가는 것에는 많은 애로점이 있었다.
더구나 그는 천성적으로 술을 좋아하고 마음이 너무 물러서 문파를 통솔하는 것에는 약점이 있었다.
그나마 그가 살아 있을 때는 종남파의 명성이 건재했지만, 그의 사후(死後)에 종남파는 급속도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매종도를 비롯한 종남사선이 사라지면서 각기 종남파의 최고 무공 한 가지씩을 가지고 간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들은 종남파가 모처럼 배출한 최고의 고수들이었다.
종남파의 선배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모든 수법들이 그들의 뇌리 속에 기억되어 있었다.
게다가 종남파 무공의 근간(根幹)이 되는 육합귀진신공(六合歸眞神功)이 소실된 것은 너무도 커다란 불행이었다.
육합귀진신공은 사실 특정한 한 가지 무공구결이 아니라, 각기 다른 여섯 가지 신공(神功)이 합쳐진 것이었다.
그중 한 가지만 없어도 육합귀진신공은 완성되지 못한다.
그런데 종남사선이 실종되면서 네 가지의 신공구결이 한꺼번에 실전되어 육합귀진신공은 그야말로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남아 있는 현천건강기와 태을신공, 두 가지만으로는 육합귀진신공 본연의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하정의는 죽기 직전까지 육합귀진신공의 나머지 네 가지 신공구결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이승을 떠났다.
육합귀진신공과 문파의 최고수법들을 모두 잃어버린 종남파의 미래는 뻔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이십 년도 되지 않아 종남파는 과거의 성세를 대부분 잃어버렸고, 백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평범한 여느 군소문파와 다를 바가 없는 존재로 영락(零落)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대체 매종도와 정립병, 조심향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리고 그들을 찾겠다며 강호로 나간 우일기는 왜 종남산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일까?
<성심록>의 뒷부분에는 그에 대한 장하민의 나름대로의 해석이 적혀 있었다.


< 종남오선 같은 인물들이 단순한 치정(癡情) 때문에 문파를 등졌다는 것은 그들을 기리는 후대인(後代人)들에게는 너무도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종안오선의 실종에 대한 내막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문파의 최고고수들이 여인 하나를 놓고 싸움을 벌였다는 것을 누가 아랫사람들에게 알리려 하겠는가?
당시의 우일기와 하정의도 매종도와 정립병 등의 실종을 아랫사람들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고, 그것이 후대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행적조차 찾아볼 길 없는 암흑(暗黑)의 공간을 만들고 말았다.
종남파의 부흥을 염원하는 나로서는 참으로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나는 오랜 동안의 노력 끝에 그들의 행적에 대해 약간의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
그들 중 가장 먼저 행적이 드러난 사람은 정립병이었다.

정립병은 혈선이라는 외호처럼 성격이 불 같고 직선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매종도에게 패한 후 그를 꺾기 위해 절치부심(切齒腐心)하여 놀라운 성과를 이루어 냈다.
그가 종남산을 뛰쳐나온 지 삼년 후부터 강호에는 복면을 한 혈삼객(血杉客)이라는 신비의 고수가 출현했는데, 전후 사정을 보아 혈삼객은 혈선 정립병의 화신(化身) 임이 분명하다.>

정립병은 혈삼객으로 분해 강호의 여러 고수들과 싸움으로써 매종도를 꺾을 절학을 만들려 했던 것이다. 그의 노력은 얼마쯤 성과를 거두어서 혈삼객이 출몰한 지 이 년도 안 되어 혈삼객은 당시 무림인들에게 외경(畏敬)의 대상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태을검선과 비길 만한 고수라고 인정을 했다. 하나 그것만으로 정립병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정립병의 최대 목표는 매종도를 꺾는 것이었으나, 강호의 어디에도 매종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혈삼객은 매종도를 찾아 미친 듯이 강호를 뒤지고 다녔으나, 끝내 그의 행적을 발견하지 못하자 실망하여 다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그 뒤로 강호에서 혈삼객의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여기서 정립병의 행방에 대한 세 가지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쳐 본다. 첫째, 정립병은 매종도를 찾지 못하자 실망하여 속세(俗世)를 떠났을지도 모른다. 둘째, 정립병은 매종도를 찾아 헤맨 끝에 마침내 그를 발견하고 그와 다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결을 벌이나 결국 패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셋째, 정립병은 매종도를 찾기를 포기하지 않고 죽기 직전까지 천하를 주유(周遊)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마지막 발길은 종남산으로 향하지 않았을까…… 셋 중 어느 것도 가능성이 있지만, 셋 중 어느 것도 지금으로써는 흔적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조심향의 행적은 조금 더 까다로웠다. 나는 당시의 무림인들에 대한 자료를 조사한 끝에 그녀가 스스로의 잘못에 대한 자책과 회개(悔改)의 심정으로 속세를 등지고 불문(佛門)에 귀의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녀가 귀의했을 만한 장소도 세 군데로 압축된다. 첫째는 남해(南海) 보타산(普陀山)의 청조각(靑照閣)이다. 조심향은 평소에도 청조각의 검술에 관심이 많았으며, 청조각의 주인과 안면이 있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둘째는 황산(黃山)의 자죽림(紫竹林)이다. 자죽림에 사는 황산신니(黃山神尼)는 자타가 공인하는 당시의 공문(空門) 제일기인(第一奇人)이며, 평소에도 조심향을 무척 귀여워했었다. 셋째는 낙양(落陽)의 백마사(白馬寺)다. 낙양은 그녀의 고향이니 그녀는 고향에서 최후의 안식처를 찾았을지 모른다. 그녀가 어느 곳에 있든 백오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녀의 정확한 행적을 알기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우일기의 행적을 전혀 알 수가 없다. 순전히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나는 우일기가 매종도와 정립병 등을 찾아 강호를 떠돌다가 불의(不意)의 사고를 당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우일기가 종남산으로 돌아오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우일기는 종남파의 장문인이라는 직책을 충실히 수행해 낸 사람이었다. 그는 책임감이 강하고 절대로 허언(虛言)을 하지 않으며, 종남파를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종남파의 몰락을 뻔히 예측하면서도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불귀(不歸)의 객(客)이 되지 않는 한 설명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매종도가 남았다. 매종도야말로 나의 별(星)이다. 나는 그의 행방을 찾기 위해 일생을 걸었다. 내 일생이 보람이 있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허송세월이었는지 후대(後代)에 판가름이 날 것이다. 다만 나는 내 자신과의 약속에 충실한 사람이다.

  • 종남파의 부흥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바쳐 최선을 다하겠다!

이것이 내가 내 자신에게 내건 약속이었다. 나는 그 방법으로 매종도의 비학을 찾기로 결심했고, 그것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 것뿐이다.

내가 제일 먼저 매종도를 찾아 길을 떠난 곳은 산동선 제남이다. 그곳은 매종도의 고향이니, 그곳에 가면 매종도에 대한 단서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마음속으로는 종남산을 떠난 매종도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도 가지고 있었다. 하나 그 기대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매종도는 고향인 제남에서도 이미 잊혀진 인물이었다. 백오십 년 전의 사람인 데다, 고향을 떠나 종남파에 입문한 이후 한 번도 제남을 찾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전무(全無)한 형편이었다. 심지어는 내가 질문을 던진 사람들 중 대부분은 매종도가 제남 출신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정말 태을검선이 제남 사람이었소?”

이 말이 내가 산동선을 뒤지고 다니면서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었다. 결국 산동성에서 매종도의 행적을 찾기를 포기한 나는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 돌아가지 않았다면 매종도는 과연 어디로 갔을까? 평생을 몸담았던 종남산을 떠난 그가 갈 수 있는 곳은 과연 어디일까? 나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고, 일일이 그 장소를 뒤지고 다니며 직접 확인을 했다.

나는 그중에서도 특히 두 가지 가능성이 가장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첫째로, 매종도는 결국 종남산을 떠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다. 매종도는 제남을 벗어난 이후로 종남파를 떠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종남파를 벗어난 매종도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종남파 고수들이 찾기 힘든 종남산의 은밀한 계곡 같은 곳에 은거해 있지 않았을까? 매종도쯤 되는 인물이라면 종남산에서 아무도 모르는 장소 같은 곳은 몇 군데 알고 있을 것이고, 그 장소에 기거하면서 가끔씩 종남파를 둘러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둘째로, 매종도는 조심향이나 우일기 등이 자신을 찾을 줄을 알고 그들이 도저히 자신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몸을 숨겼을 가능성도 있다. 다시 말해서 중원(中原)이 아닌 변방(邊方)의 외진 곳, 대막(大漠)이나 서장(西藏), 혹은 남만(南蠻)의 깊숙한 오지에 칩거해 있을지도 모른다.

두 가지 가능성은 서로 정반대의 길을 제시하고 있지만 둘 중 어느 것도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선 첫 번째 가능성에 매달리기로 했다.
두 번째의 가능성은 너무 포괄적이어서 평생을 두고 조사해도 확인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나는 종남산에서 평생을 살아온 늙은 사냥꾼에게서 종남산의 자세한 지도를 구할 수 있었다.
종남파에 몸담은 지 사십 년이나 되는 나도 잘 모르는 종남산의 구석구석이 상세하게 기록된 낡은 지도였다.
그 지도에 몸을 의지한 채 나는 이 년이란 세월 동안 종남산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찾을 수 있는 모든 곳을 찾아다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하나 어디에도 매종도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 년의 조사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매종도가 종남산에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나는 두 번째 가능성을 쫓아 천하의 외진 곳을 헤매고 다녔다.
그것은 정말 힘들고 외로운 길이었다.
그리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영원한 미로(迷路)이기도 했다.
이렇게 세월이 지나는 동안 내 머리에도 허연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고, 내 몸은 점점 늙어만 갔다.
아직 세상의 구석진 곳을 절반도 찾아다니지 못했는데, 내 수명은 이미 바람 앞의 등잔처럼 언제 꺼질지 모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요즘 들어서 나는 세 번째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떠올려 본다.
내가 매종도였다면?
종남파의 고수들이 이 잡듯 뒤지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과연 종남산에 몸을 숨겼을까?
아무리 은밀한 거처라도 우연히 남의 눈에 뜨이는 수도 있는데, 그런 위혐을 무릅쓰고 종남산에 계속 머물러 있으려 했을까?
그리고 아무리 종남파의 고수들이 찾을 것이 두렵다고 해도 천하제일고수의 신분으로 세상의 외진 구석까지 숨어들어갔을까?
누구보다도 고고하고 결백할 정도로 청정(淸淨)한 그의 성격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혹시 매종도는 종남파의 고수들이 절대로 찾아올리 없고, 그렇다고 변방의 외진 곳도 아닌 그런 장소를 찾아낸 것은 아닐까?
주변에 친귾나 말벗이라도 있으면 더할 나위가 없이 좋겠지……
이제 백발이 성성한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나는 당시 매종도의 친우(親友) 관계를 좀더 조사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하나 이 조사는 결국 끝맺지 못하고 말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지금의 나는 너무 늙고 쇠약해져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신세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어디선가 매종도가 친하게 지냈던 벗에 대한 글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 당최 어디에서 읽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한 가닥 길을 찾은 것 같기는 하지만 그 길을 걷기에는 너무 시간이 많이 흘러 버렸다.
아니면…… 이것도 잘못된 생각이고, 매종도는 그냥 신비스럽게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럴지도……
그렇다면 나는 애초부터 도저히 잡을 수 없는 별을 쫓아 평생을 헤매고 다닌 게 아닌가?


장하민의 기록은 거기에서 끝이 났다.
진산월은 조용히 <성심록>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그의 직감은 장하민이 마지막 순간에야 비로소 올바른 길을 발견했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장하민에게 몇 년의 시간만 더 주어졌다면 장하민은 틀림없이 매종도의 비학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최소한 진산월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렇다면 매종도가 몸을 숨길 만한 곳은 과연 어디인가?
종남산에서 그리 멀지도 않으면서 종남파의 고수들이 절대로 찾아올 수 없는 곳.
어쩌면 부근에 친한 말벗이 있을지도 모르고, 평생을 은거하며 지내도 별다른 불편함을 느낄 수 없는 곳.
매종도는 평소에도 조용하고 고적한 장소를 좋아했으므로 사람들이 붐비는 마을이나 시진(市鎭)은 아닐 것이다.
바다는 너무 멀고, 강도 번잡스럽기느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결국 산(山)이란 말인데……

그때 문득 진산월의 뇌리 속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너무도 느닷없이 떠오른 것이라 처음에는 진산월도 그 생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하나 다음순간 그는 이내 눈을 번뜩이며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그곳이 싫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부근에서 종남파의 사람들이 가장 가기 싫어하는 곳이 어디이겠는가?
종남파가 가장 싫어하는 곳!
종남파의 고수들이라면 누구나가 이를 갈며 미워하는 곳!
진산월의 입술을 뚫고 나직한 중얼거림이 흘러 나왔다.

“화산(華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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