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7권 검정중원(劍定中原)편 :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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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7권 검정중원(劍定中原)편 : 7화


제63장. 심처탐색(深處探索)

진산월이 매종도의 행방을 찾아 화산으로 들어온 지 보름이 지났다. 그동안 그는 화산의 북동쪽 계곡을 집중적으로 들어다녔다. 하나 성과는 전혀 없었다. 임독양맥이 타통된 후에 그는 더 이상 추위 때문에 고생하지도 않았고, 눈길 위를 바람처럼 달릴 수 있었으나 매종도의 흔적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매종도는커녕 사람이 살아 있는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이런 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움막이나 작은 암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것들이 있기에는 화산의 북동쪽 계곡은 너무 가파르고 험준했다. 충분히 준비했다고 생각한 건량도 절반 이상이 소모되었다. 아무리 임독양맥이 타통되었다고 해도 허기까지 메워지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건량은 앞으로도 꾸준히 줄어들 것이다. 진산월은 남은 건량으로는 앞으로 잘해야 십여 일밖에는 더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점차로 초조해졌다. 진산월은 자신이 처음부터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이제와서 중단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지금 진산월이 있는 곳은 화산제일봉인 선인봉의 뒤쪽 계곡이었다. 선인봉 뒤쪽은 예로부터 화산에서도 가장 험악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천길 낭떠러지가 도처에 있고, 끝도 모를 벼랑 사이에 이름모를 계곡들이 수없이 산재해 있어 진산월은 은근히 이쪽에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나 그만큼 신중하고 조심스런 행동이 요구되었다. 자칫 미끄러져 낭떠리지 아래로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금강동인(金剛銅人)이라 할지라도 박살날 것이 뻔했다. 선인봉 뒤쪽은 언뜻 보기에도 도끼로 찍어 놓은 듯한 커다란 계곡이 십여 개에 달했고, 작은 계곡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 모든 계곡을 돌아보려면 열흘이 아니라 최소한 몇 달은 걸릴 것이 분명했다. 진산월은 능선과 계곡의 위치를 잘 헤아려 본 다음 그중 열 곳을 집중적으로 조사해 보기로 했다. 나머지 계곡들은 너무 그늘진 곳에 있거나 계곡의 풍광(風光)이 좋지 않아 자신 같아도 그런 곳에서 머무를 생각이 별로 들지 않을 것 같았던 것이다.

첫번째 계곡에서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 계곡은 멀리서 볼 때에 비해 너무 크고 넓기만 해서 첫인상부터 그리 좋지 않였는데, 혹시나 하여 한나절 동안 둘러보았으나 결과는 예상한 대로였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계곡에서도 성과는 없었다. 그때에는 진산월도 기운이 빠져서 잠시 몸을 쉬어야만 했다. 눈을 내리지 않았지만 계절은 겨울의 정점을 지나고 있어 날은 몸서리쳐질 정도로 추웠다. 진산월은 생사현관이 타통된 덕분에 큰 추위는 느끼지 못했지만 바닥이 꽁꽁 얼어 이동하는 데 상당한 불편을 느껴야만 했다. 그는 눈 아래 펼쳐져 있는 화산의 설경(雪景)을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내려다보았다. 도처에 솟아 있는 기암괴석과 눈 덮인 송림(松林)들이 그야말로 천하에 보기 힘든 절경을 이루고 있었으나, 그것을 보아도 별다른 흥취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속의 시름이 점점 커져서 커다란 한숨이 되어 흘러 나올 것만 같았다. 진산월은 더 있다가는 기분이 가라앉을 것 같아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어 막 한걸음을 내디디려 할 때 갑자기 발 밑이 무너져 버렸다. 원래 그가 머물러 있던 곳은 절벽의 가장자리에 툭 불거져 나온 바위 위였다. 그런데 바위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 사실은 꽁꽁 언 얼음기둥이었고, 그가 무의식중에 발에 힘을 주자 얼음기둥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엇?”

진산월은 황급히 몸을 뒤로 솟구치려 했으나 그때 발이 미끄러져서 중심을 잃고 말았다. 진산월은 다급한 와중에 오른발로 왼발의 발등을 찍으며 몸을 위로 빼 올렸다. 이어 절벽에 몸이 닿자 오른손을 쭈욱 내밀었다.

팍!

오른손이 차가운 절벽의 한 귀퉁이를 뚫고 들어갔다. 발 밑의 얼음기둥은 이미 완전히 무너져 까마득히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진산월은 간일발의 차이로 얼음기둥과 같이 떨어지지 않고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절벽에 붙어 있을 수 있었다. 하나 그 바람에 천길 벼랑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신세가 되었다. 절벽의 표면은 얇은 얼음이 깔려 있어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주변에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나 있지 않아서 의지할 곳도 보이지 않았다. 진산월은 절벽의 요철 부분에 오른손을 박고 있어서 당장 떨어지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상황에 몰리고 말았다. 벽호공(壁虎功)이라도 배웠으면 이런 때 도움이 되었으려만, 진산월은 아직 배우지 못했다. 원래 그는 신법 방면에는 별로 소질이 없어서 그다지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진산월은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없나 하여 밑을 내려다보았다. 아찔한 벼랑만이 눈에 가득 들어올 뿐이었다. 다시 위를 올려다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그는 막막한 심정이 되어 절벽에 매달린 채 가만히 있었다. 그때 갑자기 위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흠칫 놀라 보니 그것은 넝쿨을 이어서 만든 밧줄이 아닌가? 허공에서 밧줄이 떨어지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진산월이 어리둥절할 때 위에서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여보시오, 아직 살아 있으면 그걸 잡고 올라오시오.”

진산월이 올려보니 십여 장의 절벽 귀퉁이에 털모자를 쓰고 수염이 가득 난 남자가 불쑥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곳은 절벽 꼭대기에서 삼십 장이나 내려온 지점인데, 그 남자는 용케도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산월은 더 생각할 겨를이 없이 밧줄을 잡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밧줄은 칡넝쿨을 꼬아서 만든 것인데, 상당히 오랫동안 사용한 듯 손떼가 반질반질하게 묻어 있었다. 게다가 보기보다 굉장히 질기고 튼튼해서 장정 두세 사람이 버텨도 끊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밧줄을 잡고 십여 장쯤 오로라가자 남자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남자가 있는 곳은 절벽이 약간 갈라진 틈 사이의 작은 공간이었다. 그 틈은 절벽 꼭대기에서 이어져 있었는데, 상황을 보니 남자는 절벽에 난 틈을 타고 여기까지 내려와서 진산월을 향해 밧줄을 던진 모양이었다.

“고맙소, 덕분에 살았소.”

진산월은 느닷없이 나타난 남자의 정체가 궁금했으나 우선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말을 전했다. 남자는 털북숭이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며칠째 짐승 한 마리 못 만났는데, 그래도 사람 하나를 건져서 다행이군. 하하…”

보아하니 남자는 사냥꾼인 모양이었다. 입고 있는 털옷도 곰의 가죽을 벗겨서 만든 것이고, 모자와 신발 또한 짐승의 가죽이었다. 등에는 화살이 담긴 화살통을 메고 있었고, 허리춤에는 어른의 손바닥만한 단도 십여 개가 꽂힌 단도집을 차고 있었다. 얼굴이 온통 수염으로 뒤덮여 있어서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언뜻 보기에도 삼십은 넘은 것 같았다. 남자는 밧줄을 주섬주섬 끌어올려 둘둘 말더니 다시 자신의 허리춤에 꿰어찼다.

“이놈이 내 생명줄이오. 당신뿐만 아니라 내 목숨도 여러 차례 구했지.”

진산월은 그의 갑작스런 출현에 의혹이 일었는지라 가만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혼자 무어라고 계속 중얼거리다 진산월의 의중을 읽었는지 수염 가득한 얼굴에 환한 미소를 떠올렸다.

“내가 아주 공교롭게 나타나서 이상하오? 사실은 며칠째 당신 뒤를 쫓고 있었소. 당신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구려.”

뜻밖의 대답에 진산월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왜 내 뒤를 쫓은 거요?”

“내 구역에 들어온 버릇없는 작자가 누구인가 궁금해서지.”

“그게 무슨 말이오?”

“며칠 전에 저 아래 골짜기에서 당신 발자국을 처음 발견했소. 난 처음에는 다른 지방의 사냥꾼이 이곳에 온 줄 알고 당신을 내쫓기 위해서 당신을 쫓기 시작한 거요.”

남자는 진산월의 위아래를 빠른 눈으로 훑었다.

“그런데 당신 몸이 상당히 날래더군. 원래 이런 눈 속에서는 산짐승도 내 추적을 피할 수 없는 법인데, 당신 뒤를 쫓느라 아주 고생했소. 어제가 되어서야 간신히 당신 뒤를 밟을 수 있었는데, 의외로 당신은 사냥꾼이 아니더군. 짐승 잡는 일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일부러 험준한 곳으로만 골라 다니니 말이오.”

그제서야 진산월은 사정을 짐작하고 쓴웃음을 머금었다. 진산월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남자는 궁금한 듯 호기심 어린 시선을 그에게 던졌다.

“그런데 당신은 왜 이 엄동설한에 여기에 온 거요? 사냥꾼도 아니고, 그렇다고 약초(藥草)를 찾는 것 같지도 않고…… 얼굴을 보니 아직 나이도 많지 않은데 속세를 떠날 생각으로 은거지를 찾을 리도 없고……”

마지막 말에 진산월은 귀가 번쩍 뜨였다.

“이 근처에 사람이 은거할 만한 곳이 있소?”

남자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럼 정말 은거할 생각이란 말이오? 실연(失戀)이라도 당했소? 아니면 잘못을 저지르고 도망 다니는 중이오?”

진산월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이 사냥꾼에게 사실을 말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하나 순박하나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사냥꾼에게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자세한 속사정까지 알려줄 수 없어서 절반만 밝히기로 했다.

“그게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이 부근에 은거한 선배고수의 행방을 찾고 있는 중이오.”

남자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오! 그럼 당신도 무림인(武林人)인 모양이구려. 어쩐지 몸이 무척 날쌔다 싶었소. 조금 전에도 얼음기둥이 무너져 당신이 죽은 줄 알았는데 용케도 절벽에 붙어 있다 싶었더니 무림인이라서 그런 재주가 있는 모양이구려.”

“변변치 않은 실력이요. 귀하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아마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이오.”

“하하…… 이런 게 바로 하늘의 뜻이란 거요. 당신을 내쫓으려고 내가 쫓아오지 않았다면 어찌 도와줄 수 있었겠소? 그나저나 하필이면 이런 한겨울에 선배 고수의 은거지를 찾다니 당신도 참 별난 사람이구려.”

진산월도 빙긋 미소지었다.

“사정이 있었소. 그런데 이 부근에 사람이 은거할 만한 곳이 있는지 아시오?”

남자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건 너무 막연하구려. 평생을 화산에서 사냥만 하고 지낸 나도 여기를 구석구석까지 다 뒤져보지는 못했소. 그 선배고수란 양반이 어느 봉우리 근처에 은거한지만 알아도 도와줄 수 있겠는데 말이오.”

“아쉽게도 알지를 못하오.”

“이것 참…… 그런데 그 선배고수는 누구 고생을 시키려고 경치 좋고 다니기 좋은 곳을 다 놔두고 이런 험준한 지역에 은거한단 말이오?”

진산월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말이오.”

“이 부근이 확실하다면 사람이 은거할 만한 곳은 몇 군데 되지 않소. 하지만 길이 이래서 찾기가 수월치 않을 텐데……”

“상관없소. 대략이라도 알려주면 많은 도움이 되겠소.”

남자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다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서너 군데쯤 가 볼 만한 곳이 있소. 하지만 그곳에 당신의 선배인가 하는 사람이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소.”

“그곳이 어디요?”

남자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산월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남자는 씨익 웃었다.

“당신 같은 초보자에게 말로 설명했다가는 밤을 새워도 모자랄 테니 차라리 내가 직접 안내해 주는 게 더 나을거요.”

“하지만……”

“갑시다. 서두른다면 오늘 안으로 한두 곳쯤은 찾아가 볼 수 있을 거요.”

남자는 진산월이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절벽에 난 틈을 통해 위로 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진산월은 뜻하지 않은 그의 친절을 고마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난감했으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그의 뒤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어차피 자기 혼자의 힘으로 이 넓은 산을 모두 뒤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그를 만나게 된 것도 그의 말대로 하늘의 뜻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절벽을 올라가자 남자는 어느 한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쪽 봉우리 아래 유난히 푸른 기가 감도는 곳이 보이오?”

진산월은 그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항아리처럼 위가 볼록하고 밑으로 가파른 형상을 취한 곳 말이오?”

“그렇소. 저곳은 청호곡(靑壺谷)이라고 하는데, 계곡 자체가 호로병처럼 생겨서 안에는 사시사철 푸른 나무가 우거져 있는 곳이오. 이 부근에서 그래도 사람이 살기 가장 좋은 곳이라면 바로 저기를 꼽을 수 있소. 우선 저 청호곡으로 가 봅시다.”

진산월이 생각하기에도 청호곡은 은거하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유심히 보기 전에는 절대로 발견하지 못할 만큼 은밀한 곳에 자리한 데다, 특이한 형태 때문에 기후가 온난해서 사람이 살기에 좋았다. 남자는 이 일대의 지리에 훤한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가파른 벼랑을 내려갔다. 그의 동작이 어찌나 민첩하던지 무공을 익힌 진산월이 그의 뒤를 따르기에도 벅찰 지경이었다. 한참을 내려가던 남자는 문득 고개를 돌려 진산월을 쳐다보더니 이내 빙그레 웃었다.

“초보자치곤 쓸 만하군. 나중에 특별히 할 일이 없으면 나한테 와서 사냥을 배우는 게 어떻겠소? 당신은 소질이 있어 보이거든.”

진산월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소? 내가 보기엔 영 아닌 것 같은데……”

“이 일대에서 겨울에 나보다 빨리 산을 타는 사람은 없소. 그런데 당신은 벌써 반시진 동안이나 내 뒤를 따라오면서도 뒤처지지 않으니 그만하면 상당히 뛰어난 실력이라고 할 수 있소.”

“이건 내가 산을 타는 데 소질이 많아서가 아니라 무공을 익혔기 때문이오.”

남자는 심드렁하게 웃었다.

“무공을 익혔다고 아무나 다 겨울산을 잘 타는 줄 아시오? 당신은 이렇게 미끄러운 길에도 몸의 중심을 잘 잡는데, 그게 바로 산을 타는 데 소질이 있다는 증거요. 내 눈은 정확하니 그렇게 아시오.”

남자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진산월도 더 무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는 단지 한차례 어깨를 으쓱거렸을 뿐이다. 남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뭐 무림인이라면 사냥에 별로 관심이 없겠지만 그냥 당신 재질이 안타까워서 하는 소리요. 요새는 쓸 만한 사냥꾼을 찾기가 힘들거든.”

진산월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남자는 그래도 미련이 남는지 진산월을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

“나중에라도 생각이 있으면 북봉 아래의 백석촌(白石村)에 와서 장승표(張乘豹)를 찾으시오.”

“장승표…… 그게 당신 이름이오?”

“그렇소. 당신은 말로만 고맙다고 하고 아직 은인의 이름도 안 물어보았는데, 나는 이쯤에서 내가 구해 준 사람이 누구인지 이름이라도 알고 싶소.”

진산월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거 정말 미안하오. 경황이 없어서 귀하의 이름도 묻지 못했소.”

장승표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흐흐…… 내가 장난친 거니 신경 쓸 필요 없소. 그나저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하면 안 되겠소?”

진산월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나는 진산월이라 하오.”

장승표는 다시 웃었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참 여자 같은 이름이구려. 하하…… 미안하오. 내가 실없는 소리를 잘해서……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내 이름은 장승표요. 남들은 비표(飛豹)라고도 부르오.”

비표! 말그대로 그의 동작이 나는 표범처럼 빠르고 민첩하다고 하여 붙여진 별명 같았다.

“나는 올해 서른셋이오. 당신은?”

“나는 스물둘이오.”

“오, 나보다 한참 어리군. 결혼은 했소?”

“아직 하지 않았소. 귀하는?”

장승표는 투박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순박하게 웃었다.

“아직 미혼이오. 나 같은 사냥꾼에게 시집올 요자가 있겠소? 그나저나 귀하라는 호칭은 영 이상하군. 나이가 열한 살이나 차이가 나니까 아저씨라고 부르든지, 그게 싫으면 그냥 장 형(張兄)이라고 하시오.”

“그러면 당신이 너무 손해보는 게 아니오?”

“호칭이야 어떻든 무슨 상관이오? 당신 표정을 보아하니 당신 입에서 아저씨 소리 듣기는 힘든 것 같고, 앞으로는 장 형이라고 부르시오. 나는 당신을 아우라고 부르겠소.”

진산월은 자기 멋대로 남이 부를 호칭까지 결정하는 장승표의 우격다짐에 실소가 흘러 나왔다. 한 문파를 이끌고 있는 장문인이라는 신분만 아니었다면 자신보다 열한 살이나 많은 장승표를 아저씨라고 부르지 못할 것도 없었다. 더구나 장승표는 자신을 구해 준 은인이 아닌가? 하나 장승표는 이미 자기 멋대로 호칭을 결정하고는 대뜸 진산월을 불러 제끼는 것이었다.

“이보게, 진 아우! 내가 이렇게 불러도 상관없겠지?”

진산월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오.”

장승표는 호탕하게 웃으며 진산월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하…… 역시 시원시원한 친구로군. 모처럼 아우가 생겼는데 그냥 있을 수 없지. 조금 있다 내 집에 가서 코가 삐뚤어지도록 실컷 마셔 보세.”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그 대접은 후일로 미뤄야겠소. 지금은 우선 선배고수의 은거지를 찾는 게 더 급하니 말이오.”

장승표는 자신의 이마를 탁 쳤다.

“그렇지, 내 정신 좀 보게. 아무튼 나는 한꺼번에 두 가지 생각은 못한다니까. 그런데 진 아우.”

장승표가 자신을 부르자 진산월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장승표는 돌연 진지한 음성으로 물었다.

“자네의 그 선배고수가 이 근처에 은거해 있는 게 확실한 건가?”

진산월은 흠칫 놀라 되물었다.

“그건 왜 물으시오?”

“나는 이 일대를 수십 년 동안이나 이 잡듯 뒤지고 다닌 사람일세. 그런데 이 북동쪽 계곡에 누가 은거해 있다는 말은 아직 들어본 적이 없었네. 물론 화산에 은거하는 기인(奇人)들은 많겠지만……”

그는 손으로 서남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들은 대부분이 저기 보이는 연화봉과 낙안봉(落雁峯) 부근에 거처를 정한다네. 저쪽이 경치도 훨씬 좋고 사람 살기에 적합하거든. 이 일대는 너무 지형이 험하고 삭막해서 나 같은 사냥꾼이나 들락거리지 일반인들은 아예 출입도 안 한다네.”

진산월도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나 그렇기 때문에 매종도는 사람들이 빈번하게 들락거리는 서남쪽을 택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더구나 그쪽은 화산파의 본거지가 있는 곳이 아닌가? 하나 그러한 사정을 장승표에게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일전에 선배고수 한 분이 이쪽에 은거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오.”

“그렇다면 확실하겠군.”

장승표가 자신의 말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믿어 버리자 진산월은 솔직히 그에게 일말의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하나 그렇다고 문파의 중대사(重大事)를 외인(外人)인 그에게 사실대로 밝힐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장승표는 걸음을 빨리 했다.

“이제 거의 다 와 가는군. 저기 보이는 능선을 넘어 아래로 내려가면 바로 청호곡이 나오네.”

장승표의 말대로 진산월은 곧 청호곡을 볼 수 있었다. 청호곡은 이름 그대로 호로병 모양을 한 계곡이었다. 입구는 좁고 깊었으며, 양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솟아 있어 가까이 가기 전에는 이런 곳에 계곡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 일대의 나무들은 사시사철 푸르름을 잃지 않는 상록수(常綠樹)들이어서 다른 곳과는 달리 흰눈을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어른 세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로 좁은 협곡(峽谷)을 지나자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푸른 계곡이 나타났다. 이상하게도 이곳에는 밖에서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전혀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매서운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은 지형이 특이해서 한겨울에도 그다지 춥지 않네. 그래서 산짐승들이 추위를 피해 자주 내려오기도 하지.”

장승표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덕분에 나도 가끔 이곳에 들러 사냥감을 구한다네. 이런 아름다운 곳을 사냥터로 만드는 것은 내키지 않지만 간혹 도저히 먹을 걸 구할 수 없을 때가 있거든. 사람이 굶어죽지 않으려면 무슨 짓을 못하겠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소.”

진산월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동의를 표했다. 장승표는 눈을 살짝 치켜 뜨고 진산월을 쳐다보다가 이내 히죽 웃었다.

“자네도 굶어 본 적이 있는 모양이군. 배고픈 건 정말 무서운 거야. 그렇지 않나?”

“그렇소.”

“아무튼 그래서 이곳을 잘 알게 되었단 말이지. 이곳은 제법 넓어서 나도 아직 구석구석까지는 살펴보지 못했네. 여기에 자네가 찾는 선배고수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장소 자체는 그럴듯하지 않나?”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마음 한구석으로는 은은한 실망감을 느꼈다. 청호곡 자체는 은거하기에 더할 수 없이 적합한 곳이었다. 하나 매종도가 정말로 이곳에 은거해 있었다면 이미 여러 번이나 이곳을 찾아왔던 장승표가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진산월의 짐작대로 청호곡에는 별다른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청호곡은 정말 아늑하고 포근한 곳이기는 했으나 매종도의 발길은 이곳까지 닿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두 시진 가까이 청호곡을 샅샅이 훑고 난 장승표는 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가 아닌 모양이군. 난 누군가가 이 일대에 은거하면 여기가 제일 적당할 거라고 생각해서 제일 먼저 자네를 데리고 온 것인데……”

“괜찮소. 아무튼 장 형 덕분에 좋은 곳을 알게 되었구려.”

“그렇지? 나중에 혹시라도 몸을 피해야 할 때가 있으면 여길 이용하라구. 여기는 나밖에는 모르니까 말일세.”

“그렇게 하겠소.”

장승표는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진산월의 어깨를 툭 쳤다.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으니 나머지는 내일 돌아보는 게 좋겠네. 마침 우리 집이 여기서 그리 멀리 않으니 우리 집에 가서 술이나 마시면서 몸을 녹이도록 하세.”

진산월은 사양하지 않았다.

“기꺼이 신세를 지겠소.”

“자네 체격을 보니 주량이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나도 술이라면 아직 누구에게 져 본 적이 없네. 마침 내게 담근 지 십년쯤 되는 머루주가 있으니 그걸로 자네와 주량을 겨루고 싶은데 괜찮겠지?”

“나는 술이 그다지 세지 않소.”

“이런…… 보기보단 약골이군. 하지만 뱃속에 술병 서너 개 정도 들어갈 공간은 있겠지?”

“물론이오. 남자 중에 그런 공간이 없는 사람도 있소?”

“흐흐…… 옳은 말일세. 그럼 더 늦기 전에 어서 돌아가세. 뱃속에서 술벌레가 요동을 치니 견딜 수가 없군 그래.”


다음 날 아침, 진산월은 숙취로 고생을 했다. 어젯밤에 장승표가 막무가내로 술을 권하는 바람에 적지 않게 취했던 것이다. 장승표의 집은 전형적인 사냥꾼의 거처답게 통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사방의 벽에는 그동안 그가 잡은 각종 동물들의 가죽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방 한쪽에는 그가 담가 놓은 술병들이 잔뜩 늘어져 있었는데, 그중 절반 이상을 하룻밤 사이에 마셔 버렸다. 그런데도 장승표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진산월이 머리를 부여 잡고 일어나자 벌써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자네, 정말 술은 그다지 세지 않더군. 겨우 그걸 마시고 뻗어 버리니 말이야.”

장승표가 히죽거리며 농을 걸어오자 진산월은 그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장승표가 내놓은 요리는 꿩고기를 잘게 찢어 약간의 야채를 넣고 끓인 간단한 것이었으나, 숙취로 속이 더부룩한 진산월에게는 훌륭한 아침 식사가 되었다. 더구나 이렇게 뜨거운 요리를 먹어 본 것이 얼마 만이던가? 장승표는 진산월이 커다란 솥단지 가득 있던 요리를 국물 한점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먹어치우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다가 이내 낄낄거렸다.

“흐흐…… 자네, 먹기는 정말 잘 먹는군. 아무래도 자네 뱃속에는 술벌레는 몇 마리 없고 식충(食蟲)만 잔뜩 든 모양이야.”

진산월은 입맛을 다시며 빙긋 웃었다.

“예로부터 먹는 것을 앞에 두고는 성인군자(聖人君子)가 따로 없다고 했소. 그런데 꿩을 먼저 끓여서 국물을 버리고, 다시 야채로 국물을 낸 다음 고기를 잘게 찢어 넣었으면 더욱 맛있을 뻔했소. 그랬다면 더욱 담백하여 속을 풀기에 좋았을 거요.”

장승표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한차례 먼저 끓여서 꿩고기의 기름기를 먼저 제거한단 말이지? 그거 괜찮은 방법이군.”

이어 그는 신통방통한 얼굴로 진산월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자네도 요리에는 제법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군?”

“그저 먹는 걸 좋아할 뿐이오.”

“먹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 아무튼 그렇게 솜씨가 좋다면 오늘 저녁은 자네가 한번 차려 보게. 허구한 날 나 혼자 해 먹었더니 내가 만든 음식은 꼴도 보기 싫다네.”

진산월은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좋소. 대신 재료는 장 형이 준비해야 하오.”

“그야 이를 말인가? 그렇다면 오늘 저녁은 모처럼 근사하게 먹을 수 있겠군.”

장승표는 생각만 해도 신이 나는지 입가에 싱글벙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대충 먹은 것 같은데 이제 슬슬 떠나 볼까?”

“좋소. 그런데 오늘은 어디를 가 볼 생각이오?”

“어제 갔던 청호곡에서 북쪽으로 이십 리쯤 되는 곳에 그럴 듯한 계곡이 두 개 있네. 두 계곡이 거리상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았으니, 먼저 그 두 곳을 들러 본 다음 그래도 없으면 다른 곳을 찾아보도록 하세.”

진산월은 내심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으나, 그가 채 내색하기도 전에 장승표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행여라도 고맙다거나 수고한다는 말 따위는 아예 하지 말게. 그렇지 않아도 요새는 사냥도 잘되지 않아 심심했던 참이라 내가 좋아서 내 발로 움직이는 것이니 그런 생각은 할 필요가 없네.”

진산월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장승표가 진산월을 안내한 곳은 각각 선영곡(仙影谷)과 불영곡(佛影谷)이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 진산월이 이름의 유래를 묻자 장승표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사실 그 이름들은 내가 붙인 것일세.”

“그게 정말이오?”

“이렇게 사람 발길 하나 없는 계곡에 이름이 있을 리 있겠나? 그냥 나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심심해서 계곡마다 이름을 붙인 것이지. 두 계곡이 이렇게 은밀한 곳에 서로 나란히 마주보고 있으니 하나는 도가(道家)의 신선(神仙)이 사는 곳이고, 또 하나는 불가(佛家)의 부처가 사는 곳이라고 생각하여 내멋대로 지은 것일세. 어떤가? 나름대로 운치가 있지 않은가?”

진산월은 따라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과연 그렇소.”

예상했던 대로 선영곡과 불영곡에도 매종도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두 계곡 모두 지리적인 위치와 모양이 좋았으나, 매종도 같은 인물이 오래도록 은거하기에는 공간이 조금 협소했다. 어제에 이어 자신 있게 안내한 계곡들이 모두 허탕을 치자 장승표의 얼굴에도 서서히 불안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만만치 않군. 이제 남은 계곡들은 여기보다는 격이 많이 떨어지는데…”

장승표가 느끼는 실망감은 진산월에 비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겉으로는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수고해 주시오.”

장승표는 화를 벌컥 내었다.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수고는 무슨 얼어죽을 수고인가? 아무튼 몇 군데 더 가 보세.”

그날 장승표와 진산월은 선영곡과 불영곡 외에도 다섯 군데의 계곡을 더 찾아다녔다. 말이 다섯 개이지, 수십 리나 떨어진 곳에 있는 계곡들을 이리저리 둘러본다는 것은 엄청난 강행군이나 마찬가지였다. 임독양맥이 타통된 진산월도 피곤을 느낄 정도였으니, 장승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마지막 계곡마저 허탕을 치자 장승표는 땀에 젖은 얼굴에 실망 어린 빛을 감추지 않았다.

“정말 이상하군. 여기도 아니면 이 근처에서는 사람이 머무를 만한 데가 없는데……”

그가 너무 낙심하는 것 같아 오히려 진산월이 그를 위로해야 할 지경이었다.

“내일 하루만 더 찾아봅시다.”

“그래도 못 찾으면?”

진산월의 얼굴은 여전히 담담했으나,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는 장 형은 다시 자기가 하던 일을 하면 되오. 나도 내가 할 일을 할 테니……”

장승표는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그의 표정이 너무도 엄숙한지라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숙소로 돌아오자 장승표는 조금 전의 우울함을 떨치려는 듯 뒤뜰의 움막에서 꽁꽁 언 커다란 사슴의 뒷다리 하나를 꺼내 왔다.

“이건 내가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먹으려고 보관해 둔 것일세. 저녁은 자네가 책임진다고 했으니 이걸로 멋지게 솜씨를 발휘해 보게.”

진산월은 잘 손질되어 얼려 있는 사슴의 뒷다리를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장 형 말대로 좀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사용하도록 하시오. 오늘은 그냥 간단하게 먹읍시다.”

장승표는 정색을 하며 눈을 부라렸다.

“이렇게 자네를 만나게 된 게 특별한 일이 아니고 뭐겠나? 자네는 설마 이런 산골짜기에 이 이상 더 특별한 일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진산월은 어쩔 수 없이 사슴 다리를 들고 주방으로 향해야만 했다.

진산월은 사슴 다리 하나로 다섯 가지의 요리를 했다. 연하고 부드러운 넓적살은 얇게 저며서 살짝 구웠으며, 종아리 부위는 삶은 다음에 겉에 양념을 재워 놓았다가 튀겨 냈다. 발목 부위는 공들여서 오랫동안 푹 삶았다가 고명을 올려놓았으며, 연골이 있는 부위는 잘게 다져서 갖은 양념을 하여 기름에 튀겨냈다. 그리고 사슴 뼈 자체는 국물을 우려내어 그것으로 시원하면서도 얼큰한 화과(火鍋)를 만들었다. 장승표는 방에 누워 있다가 진산월이 들고 온 요리를 보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이게 모두 자네가 만든 것인가?”

진산월은 요리를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왜 부족하시오?”

“아니…… 그게 아니라…… 자네 혹시 요리사 출신이 아닌가? 아니면 지금도 요리사겠지? 그렇지?”

진산월은 피식 웃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니오.”

장승표는 요리와 진산월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다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야. 아무리 봐도 자네는 요리사 체질이야. 요리한 걸 보니 알겠군.”

“일전에는 사냥꾼 체질이라고 하더니 그새 마음이 바뀌었소?”

“그게 그거야. 사냥꾼이 사냥한 동물을 그냥 내버리겠나? 모두 자기가 요리해 먹지. 사냥꾼은 원래 요리사를 겸하는 법이야. 자네는 정말…… 천부적인 사냥꾼 요리사일세.”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음식이나 드시오.”

장승표는 주저하지 않고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젓가락으로 하나하나 집어먹더니 일단 맛을 보고는 정신없이 양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거 정말 맛이 기막히군. 자네 당장 음식점을 차리게. 내가 성공을 보장하지…”

장승표는 쉴사이없이 먹으면서도 계속 떠들어댔다. 진산월은 입 안에 음식물을 가득 집어넣고도 음식 한 점 튀기지 않고 수다를 떠는 사람을 방취아 이후 처음 보았다. 순식간에 탁자 위에 가득했던 요리들이 모두 사라지고 접시가 바닥이 났다. 장승표는 냄비에 가득 담긴 화과를 국물까지 싹싹 긁어먹고 나서야 겨우 손을 멈추었다.

“아이구, 배불러…… 나 좀 살려 주게. 정말 배가 터지겠군.”

장승표는 한동안 엄살을 떨더니 계면쩍은 얼굴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나 때문에 자네는 얼마 먹지도 못했군. 미안하네. 모처럼 음식다운 음식을 보게 되니 정신이 나갔나 보네.”

진산월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맛있게 먹었다니 다행이오. 나는 음식을 만들면서 조금 집어먹어서 괜찮소.”

“자네 정말 음식 솜씨 하나는 대단하네. 나도 가끔은 산 아래의 마을에 있는 주루에 가서 음식을 먹기도 하는데, 아직까지 자네가 만들어 준 요리보다 맛있는 걸 먹어 본 적이 없네.”

“배가 고팠기에 그런 걸 거요.”

“아니야.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어. 자네는 정말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요리를 잘하는 사냥꾼 체질이네.”

포만감에 만족한 표정으로 배를 두드리고 있던 장승표가 돌연 정색을 했다.

“그런데 자네는 정말 내일까지 선배의 거처를 못 찾으면 그냥 돌아가려나?”

“그렇소.”

장승표는 무엇 때문인지 잠깐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네만, 내가 알고 있는 계곡 중 자네가 말한 곳과 부합되는 곳은 이미 모두 보여 주었네. 다시 말해서 내일 하루를 더 돌아다녀도 별로 신통한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을 거란 얘기지.”

진산월은 이미 그 점에 대해 짐작하고 있던 터라 담담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는 일이오.”

“그래서 말인데……”

장승표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자네 혹시 ‘사냥꾼의 무덤’ 이란 곳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못 들어보았소.”

장승표는 혀로 입술을 축인 후 조금 전보다 훨씬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이건 화산에서만 평생을 살아온 사냥꾼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傳說) 같은 이야기일세. 별로 믿는 사람도 없고, 그런 곳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도 없지만, 아무튼 분명 존재하기는 하는 곳일세.”

진산월은 그의 말에 점차 흥미가 이는 것을 느꼈다.

“사냥꾼의 무덤이 대체 뭐요?”

“나도 아주 오래 전에 들었네. 내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내 할아버지에게 어렸을 적에 들은 이야기이지. 내 아버지도 사냥꾼이었고, 내 할아버지도 물론 사냥꾼이었네. 그때 할아버지는 나를 무릎에 앉혀 놓고 말씀하셨지. ‘너도 조만간에 사냥꾼이 되겠지.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이 세계에도 나름대로의 철칙(鐵則)과 금기(禁忌)가 있다는 것을’.”

“사냥꾼의 철칙은 때가 되면 네 아버지가 너에게 하나하나 설명해 줄 것이다. 오늘 이 할아비는 네게 ‘금기’에 대해 말해주려 한다.”

아직 여덟 살의 꼬마였던 장승표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할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금기가 뭐예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장승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란다. 절대로 어겨서는 안 되는 것이지.”

“그런 게 있어요?”

“있단다. 하지만 딱 한 가지뿐이니 그것을 지키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그게 뭔데요?”

할아버지는 주름 가득한 눈으로 장승표의 얼굴을 쳐다보며 한자 한자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 곳에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장승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냥꾼은 어디든 갈 수 있다고 할아버지가 그러셨잖아요. 그게 사냥꾼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그랬지. 하지만 아무리 날랜 사냥꾼이라도 결코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곳이 있다. 거기를 제외하고는 아무리 금성철벽(金城鐵壁) 같은 곳이라도 우리의 발길을 막을 수 없지.”

“그곳이 어딘데요?”

“그곳은 ‘사냥꾼의 무덤’ 이라는 곳이다.”

“사냥꾼의 무덤?”

장승표가 귀여운 음성으로 되묻자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름지고 심연(深淵)처럼 깊은 할아버지의 눈에는 알 수 없는 빛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어떤 사냥꾼이든 그 안에 들어가면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다. 그래서 그런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왜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죠?”

“그건 아무도 모른다. 이 할아비의 할아비 때부터 그 안에 들어간 사람은 아무도 살아 나오지 못했다. 처음에는 몇몇 용감한 사냥꾼들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들어갔으나, 그들 중 누구도 다시 나온 사람은 없었지. 그런 세월이 오래 흐르자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그곳을 ‘사냥꾼의 무덤’ 이라고 불렀다.”

할아버지는 장승표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자상하면서도 엄격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는 이 할아비와 약속할 수 있겠지? 어떤 일이 있어도 ‘사냥꾼의 무덤’ 에는 가지 않겠다고.”

장승표는 어린 나이에 호기심이 일기도 했으나, 할아버지의 당부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요, 전 절대 그곳에 가지 않겠어요.”

할아버지는 그의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그래, 그 금기만 깨지 않는다면 너는 좋은 사냥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장승표의 말은 여기에서 끝이 났다. 말을 마치고 난 장승표는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진산월은 장승표의 말이 시작될 때부터 눈을 빛내고 있다가 지금은 오히려 차분한 표정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하나 장승표는 그가 마음속의 격동을 억누르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왜 자네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지 알겠지?”

“장 형은 ‘사냥꾼의 무덤’ 이 혹시 내가 찾는 그곳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거요?”

“그렇네. 자네의 선배고수가 이 부근에 은거한 것이 확실하다면 이제 가 볼 만한 곳은 오직 그곳밖에는 없네.”

진산월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은 어떤 확신 비슷한 것이었다. 만에 하나 그곳에서도 매종도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면, 매종도가 화산에 은거했으리라는 진산월의 처음의 추측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장승표는 진산월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불쑥 물었다.

“자네는 그곳에 가 보겠나?”

진산월의 대답은 당연한 것이었다.

“기꺼이.”

“나는 원래 자네에게는 이 이야기를 끝까지 하지 않으려 했네. 자네가 그곳에 간다면 자네도 그 안에서 뼈를 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지. 하지만 자네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는 건 더 괴로운 일이더군.”

“아니오. 잘 이야기해 주었소.”

“자네의 얼굴에 다시 희망의 빛이 떠올라 있는 것을 보니 말해 주기를 잘한 것 같긴 하군. 마음 같아서는 자네를 ‘사냥꾼의 무덤’ 까지 데려다 주고 싶지만, 나는 할아버지와의 약속 때문에 그곳에는 갈 수 없네.”

“이해하오.”

장승표의 얼굴에는 울적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만약 그곳에서 나오게 되면 다시 나를 찾아와 주겠나?”

진산월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당연히 그렇게 하겠소.”

“다시 나를 위해서 저녁을 지어 줄 텐가?”

“물론이오.”

장승표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을 듣고 안심했네.”

이어 그는 진산월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자네는 나와 약속한 거야, 반드시 살아서 다시 나를 찾아오기로. 자네는 나에게 다시 저녁을 지어 줄 때까지 절대로 죽으면 안 돼.”

진산월은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그렇게 하겠소.”

“사나이와 사나이의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소.”

그제서야 장승표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이제 말해 주지. ‘사냥꾼의 무덤’ 이 있는 곳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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