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8권 고목생화(枯木生花)편 : 5화
제71장. 소년고행(少年苦行)
음식은 정말 맛이 있었다.
단순한 찐만두와 닭다리튀김이었으나 유소응에게는 천하의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더욱 맛있게 느껴졌다.
한동안 유소응은 정신없이 양손과 입을 놀려 음식을 먹는 데만 열중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 듯 고개를 돌려 한쪽 구석을 쳐다보았다.
괴인과 주인은 주루의 가장 후미진 구석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부분 말을 하는 사람은 주인이었고, 괴인은 주로 듣기만 하다가 간혹 짤막한 질문을 던질 뿐이었다.
두 사람의 음성이 나직해서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주인이 간혹 눈물을 흘리거나 때로는 분노해하는 것을 보면 무척 심각한 일임이 분명했다.
괴인은 주인의 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별반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크게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고, 화를 내거나 흥분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주인이 이야기를 모두 마쳤을 때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을 뿐이다.
“살아 있다면 언젠간 만날 수 있겠지. 그들도 그렇게 믿고 있을 거야.”
유소응은 그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으나, 그 말을 듣는 순간 공연히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그 음성 속에 무언가 형용하기 어려운 비애(悲哀) 같은 것인 느껴졌던 것이다.
괴인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한동안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이 견디기 힘들었는지 주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씻으셔야지요? 목욕물을 준비하겠습니다. 조그만 기다리십시오.”
괴인은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주인은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고는 주방 안으로 사라졌다.
유소응은 탁자 위에 음식이 조금밖에 남지 않은 것을 보고는 그에게 이것이라도 먹으라고 해야 하나 잠시 고민을 했다.
아직 뱃속이 완전히 찬 것은 아니었지만, 괴인은 한 점도 먹지 않았는데 자신이 몽땅 먹어치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먹다 남은 것을 그에게 내밀기도 쑥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있을 때 괴인이 갑자기 그를 손짓해 불렀다.
“이리 와라.”
유소응은 움찔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예.”
유소응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가까이 다가오자 괴인은 턱으로 자신의 앞자리를 가리켰다.
“앉거라.”
유소응은 의자의 끝 부분에 엉덩이를 간신히 걸친 채로 괴인을 쳐다보았다.
괴인이 왜 갑자기 자신을 불렀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괴인은 한동안 유소응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윽고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원래는 너와 함께 어디로 가려 했다. 그곳에서 네가 혼자의 힘으로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너와 함께 있으려 했다.”
“…!”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바뀌어서 너를 그곳으로 데려갈 수 없게 되었다.”
유소응은 고개를 떨구었다.
고개를 숙인 그의 목덜미는 유난히 가늘고 애처로워 보였다.
“너를 이곳 주루에 계속 두는 것도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도 미봉책(彌縫策)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그때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며 몇 명의 인물이 주루 안으로 들어왔다.
“저깁니다. 저 꼬마가 맞지요?”
중년인 한 사람이 유소응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그 뒤에는 화려한 화복(華服)을 입은 비쩍 마른 중늙은이와 네 명의 장한이 뒤따르고 있었다.
중늙이를 본 유소응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했다.
그 중늙은이는 다름아닌 유화상단에서 그를 감시했던 전 노대였던 것이다.
유소응을 발견한 전 노대는 반색을 하며 중년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했네.”
전 노대는 작은 비단주머니를 중년인에게 내밀었다.
중년인은 재빨리 비단주머니를 받아들고는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린 다음 재빨리 주루를 벗어났다.
전 노대는 네 명의 장한을 이끌고 유소응과 괴인이 앉아 있는 탁자로 다가왔다.
그의 시선이 훑듯이 괴인의 전신을 스쳐지나가더니 이내 유소응에게 고정되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유소응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그런데 의외로 전 노대는 그를 향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는 것이었다.
“소공자(小公子), 여기 계셨군요. 노주인(老主人)께서 몹시 찾고 계셨습니다.”
유소응은 그의 행동에 놀라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전 노대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공자께서 말씀도 없이 본가(本家)를 떠나신 후 노주인께서는 크게 상심(傷心) 하셔서 무슨 일이 있어도 소공자를 다시 찾아서 모셔오라고 말씀하셨지요.”
이어 그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노주인께서는 소공자를 너무 아끼셨지만 혹시라도 소공자께서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실까 봐 당분간 소공자에게 궂은 일을 시키기로 하셨던 것입니다. 다소 가혹한 처사이긴 했지만, 노주인께선 소공자가 큰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고난쯤은 감당할 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하신 겁니다. 그런데 소공자께서 갑자기 사라지시니 노주인께서 심려(心慮)가 크셨습니다.”
그의 두 눈에서는 금시라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노주인께선 어찌나 크게 낙담을 하셨는지 소공자께서 사라지신 후 몸져누우시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사방에 사람을 풀어 소공자님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운 좋게도 조금 전의 그자가 이곳으로 들어오는 소공자님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유소응은 정신이 멍한 상태가 되어 일시지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단 한 번 만났을 뿐이지만 유방현의 모습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매의 눈처럼 차갑고 매서운 눈매와 자신을 쳐다볼 때의 그 무정(無情)하고 혐오스런 표정, 그리고 표독한 음성이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던 유방현이 자신을 걱정해서 자리에 눕고 말았다니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전 노대는 이번에는 괴인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아마도 대협께서 저희 소공자를 보살펴 주신 모양이군요. 노주인을 대신해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괴인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묵묵히 유소응을 응시하고 있었다. 유소응의 작고 여윈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것이 뜻밖의 사실에 대한 기쁨 때문인지 아니면 불현듯 화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나 그의 마음이 세차게 요동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전 노대는 다시 고개를 숙이며 정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대협께선 외인(外人)이시니 본가의 자세한 사정을 모르시겠지만, 소공자는 노주인께서 가장 아기시던 셋째 공자님의 유일한 혈육(血肉)입니다. 더구나 소공자님은 어려서 고아(孤兒)가 되셔서 지금은 혈혈단신, 달리 갈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다소 서운하시더라도 소공자님이 본가로 돌아오시도록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괴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를 따라가겠느냐?”
유소응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린아이답지 않은 수심(愁心)이 가득했다. 하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그만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럴게요.”
괴인은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다시 물었다.
“정말 따라가겠느냐?”
“예.”
“따라가기 싫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
“저도 아저씨와 같이 있는 것이 좋지만, 어차피 아저씨는 저와 함께 있을 수 없잖아요.”
“…!”
유소응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저를 도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어제 일은 오랫동안 잊지 못할 거예요.”
이어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전 노대의 곁으로 가서 나란히 섰다.
“할아버지가 편찮으시다니 이제 가 봐야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괴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유소응은 그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는 자신이 먼저 몸을 돌렸다. 전 노대는 괴인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더니 네 명의 장한을 데리고 유소응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이 주루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괴인은 그 자리에 못박인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깊게 가라앉은 그의 두 눈만이 텅 빈 주루 안을 공허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주루 밖으로 나오니 한 대의 마차(馬車)가 기다리고 있었다.
“타시지요.”
전 노대는 마차의 문을 열고 유소응을 오르게 했다. 유소응은 마차를 타 본 적이 없었는지라 몹시 어색한 자세로 마차에 올랐다. 전 노대가 눈짓을 하자 두 명의 장한이 마부석으로 올라갔고, 다른 두 명은 전 노대와 함께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유소응은 자신도 모르게 창문에 매달려 마차 밖을 내다보았다. 주루 안은 어두컴컴해서 괴인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나 그는 마치 괴인이 금시라도 주루에서 뛰쳐나올 것만 같았는지 창문에 매달린 채 하염없이 주루를 쳐다보고 있었다. 괴인은 나오지 않았다. 점점 멀어지는 주루를 바라보는 유소응의 눈빛은 한없이 우울해졌다. 마침내 모퉁이를 돌자 더 이상 주루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유소응은 창문에 머리를 댄 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목덜미에 굉장한 아픔이 느껴지며 동시에 숨이 턱 막혀 왔다.
“이 쥐새끼 같은 놈! 어딜 감히 도망을 쳐?”
조금 전만 해도 그를 향해 공손한 표정을 보이던 전 노대가 눈을 무섭게 부릅뜨며 그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던 것이다. 그와함께 다른 두 명의 장한이 밧줄을 꺼내 그의 몸을 꽁꽁 묶기 시작했다. 전 노대는 얼굴을 흉신악살처럼 일그러뜨리며 유소응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짝!
“이 후레자식 같은 놈! 네놈 때문에 내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 아느냐? 이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
짝! 짝!
전 노대는 쉬지 않고 유소응의 뺨을 때렸다. 삽시간에 유소응의 작은 얼굴은 시뻘겋게 부어 올랐고, 입술이 터져 비가 흘러 나왔다. 그래도 전 노대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그 거렁뱅이놈이 검을 차고 있지만 않았다면 벌써 그 주루에서 네놈을 요절내 버렸을 것이다. 그놈이 무림인(武林人)인 것 같아 팔자에도 없는 연극을 했다만, 이제 도와 줄 놈도 없으니 단단히 각오해라!”
유소응은 얼굴이 부어 오른 아픔보다는 너무도 급변하는 사태에 놀랐는지 반쯤 혼이 나간 모습이었다. 마차는 장안성(長安省)을 지나 거리를 가로질러 한 채의 호화로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는 저택의 넓은 장원을 지나 후원의 입구에 있는 커다란 월동문 앞에 멈춰 섰다. 마차의 문이 열리며 전 노대가 나오고 이어서 두 명의 장한이 밧줄에 꽁꽁 묶인 유소응을 들쳐 메고 나왔다. 유소응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입가로는 핏자국이 선명했다.
유소응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모습이었다.
전 노대와 두 명의 장한은 월동문을 지나 후원으로 들어갔다. 후원에는 세 채의 누각이 있었는데, 전 노대의 발길은 그중 가운데 있는 가장 화려한 누각으로 향하고 있었다.
전 노대는 누각 앞에서 복장을 가다듬은 다음 또랑또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전방(錢龐)입니다.”
누각 안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잠시 후, 누각의 문이 열리며 시비 한 명이 쪼르르 달려나왔다.
“들어오시랍니다.”
전 노대는 두 명의 장한과 유소응을 밖에 둔 채 혼자 누각 안으로 들아갔다. 누각의 실내는 겉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호화스러웠다. 사방의 벽에는 한눈에 보아도 진품(眞品)임을 알 수 있는 고화(古畵)들이 걸려 있었고, 자단목(紫檀木)으로 된 기둥에 바닥은 좀처럼 보기 힘든 백대리석 (白大理石)이 깔려 있었다. 사방의 귀퉁이에는 활활 타오르는 화롯불들이 있어서 엄동설한임에도 불구하고 실내에서는 전혀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누각의 중앙에는 백호피(白虎皮)를 씌운 커다란 태사의가 있었는데, 태사의에 앉아 있는 사람은 유방현이었다.
그의 앞에는 머리가 허옇게 센 백의노인과 두 남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전방은 안으로 들어와서 유방현 앞에 넙죽 엎드렸다.
“노주(老主)를 뵙니다.”
유방현은 백의노인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놈은 끌고 왔느냐?”
“예.”
“데리고 가서 두 번 다시 쓸데없는 생각을 못하도록 단단히 혼을 내주어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나……”
유방현의 작은 두 눈에 한 줄기 악독한 빛이 떠올랐다.
“숨만 붙어 있으면 된다.”
전방은 감히 고개도 쳐들지 못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예.”
전방이 물러가려 할 때 유방현이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
“무슨 일이십니까?”
“그놈을 발견했을 때 같이 동행한 사람이 있다고 했지?”
“예, 허름한 옷을 입고 머리를 산발한 자였습니다. 신색(身色)은 남루했지만 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림인인 듯 했습니다.”
“그놈을 데려올 때 그자가 제지하지 않았느냐?”
전방은 고개를 저었다.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가고 싶으면 가라고 하더군요.”
유방현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그자의 인상착의를 자세히 말해 보아라.”
“앉아 있어서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키가 무척 크고 앙상하게 마른 몸매였습니다. 머리가 허리 아래까지 늘어져 있었고, 오랫동안 씻지 않았는지 가까이 가자 몸에서 심한 악취가 풍겼습니다. 나이는 삼십쯤 되어 보였는데, 그보다 조금 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알았다. 나가 보아라.”
전방은 다시 머리를 조아리고는 조심스럽게 바닥에서 일어나 누각을 빠져 나갔다. 전방이 나가자 유방현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백의노인을 쳐다보았다.
“어떻습니까? 혹시 그자가 종남파의 남은 인물들 중 하나가 아닐까요?”
백의노인은 머리가 눈부신 백발에 얼굴은 대추처럼 붉었다. 턱밑으로 새하얀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얼음장처럼 차갑게 번뜩이는 두 눈만 아니람녀 가히 선풍도골(仙風道骨)이란 말이 어울릴 만한 인상이었다. 백의노인은 자신의 턱에 난 수염을 쓰다듬으며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아닌 것 같소. 종남파의 제자들 중 그와 비슷한 인상을 가진 인물은 없다고 알고 있소.”
유방현은 조금 맥이 풀린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역시 그렇군요. 초가보에서 몇 달 동안 종남산 일대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녀도 찾지 못한 자들을 이토록 쉽게 만날 수는 없었겠지요.”
백의노인은 조용히 웃었다.
“허허…… 유노야(劉老爺)께서 그런 일까지 신경 쓰실 줄은 몰랐소. 종남파야 이미 무너진 문파이고, 몇몇 제자들이 남아 있다 해도 제 앞가림 하기도 힘든 애송이들이오. 초가보 입장에서야 그들이 눈엣가시 같겠지만 본파(本派)는 그들을 전혀 개의치 않고 있소.”
“해 대협(奚大俠)의 말씀이 옳습니다. 관중(關中) 일대에서는 이제 더 이상 종남파라는 이름을 입에 꺼내는 사람이 없는 형편입니다. 다만 초가보에서 그토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몇 남지 않은 종남파의 제자들을 제거하지 못한 게 의아스러울 뿐입니다.”
“그렇게만 생각할 게 아니오.”
유방현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초가보에서 겉으로는 종남파의 제자들을 찾는다며 법석을 떨고 있지만 사실은 다른 의도를 품고 있는 게 분명하오.”
“다른 의도라면?”
“초가보의 수석총관(首席總官)인 소면호리(笑面狐狸) 악종기(岳鍾起)는 잔꾀가 많기로 이름난 인물이오. 그는 이번 기회에 서안을 비롯한 섬서성의 서북쪽으로 세력 확장을 꾀하고 있소. 그래서 일부러 종남파의 제자들을 색출한다는 명목 하에 서안 일대에 고수들을 파견하고 있는 거요.”
“그런 복잡한 사정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백의노인의 눈에서 날카로운 섬광이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본파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들의 지나친 세력 확장을 주목하고 있었소. 그들이 아직까지는 본파의 세력권까지 진출하지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세력을 키워 간다면 조만간 본파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거요.”
유방현은 작은 눈을 짐짓 크게 치켜 떴다.
“그렇다면 머지않아 섬서성 일대가 큰 혼란에 휩싸이게 되겠군요.”
전혀 모르는 척 말하고 있지만 유방현은 사실 이와 같은 속사정을 익히 알고 있었다. 유방현이 이끄는 유화상단은 비록 섬서성 제일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적어도 서안 일대에서는 가장 알려진 상인(商人) 집안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섬서성에서 벌어질 급변에 대해 모를 리 없었다.
종남파를 무너뜨린 초가보가 세력을 키워 나가면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상대는 다름아닌 화산파(華山派)였다. 화산파는 원래 종남파와 섬서성을 양분(兩分)하고 있었는데, 이십 년 전에 종남파가 구파일방에서 쫓겨난 이후로 섬서성의 패자(覇者)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런데 종남산 구석의 군소문파에 불과했던 초가보가 세력을 무섭게 확장하여 자신들가 자웅을 겨룰 정도로 성장하게 되자 당연히 경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가보의 보주인 무영신군(無影神君) 초관(焦關)은 야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로서는 강호의 유력한 문파로 성장할 수 있는 이번 기회를 결코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화산파로서도 초가보가 자신들을 위협하는 위치로까지 성장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두 문파가 충돌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런 정세를 눈치 빠르게 파악하고 있던 유방현은 더 늦기 전에 자신이 화산파와 초가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함을 알았다. 고민 끝에 그가 선택한 것은 화산파였다. 아무래도 갑작스럽게 생긴 초가보보다는 유구한 역사의 명문정파인 화산파가 더 승산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화산파의 유력 인물 중 하나와 사돈 관계를 맺을 결심을 했다. 그가 선택한 사람은 화산파(華山派)의 십대장로(十大長老) 중 한 사람인 난매신검(亂梅神劍) 해정설(奚淨雪)이었다. 해정설의 손녀와 자신이 가장 아끼는 큰손자를 혼인시키기로 한 것이다. 화산파에서도 서안에서 제일가는 상인 가문과 연줄을 만드는 것을 싫어할 리가 없었다. 유방현은 해정설을 바라보며 은근한 음성으로 물었다.
“우리 명아(明兒)는 마음에 드십니까?”
해정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종명(宗明), 그 아이는 두뇌가 명석하고 어른을 공경할 줄 알아서 내 손주사위로 손색이 없소.”
유방현의 강퍅한 얼굴에 한 줄기 회색이 떠올랐다.
“해 대협같이 고명한 분의 눈에 들었다니 다행입니다. 사실 제 손자라서가 아니라 천부적으로 제법 총명한데다 어려서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서 그럭저럭 쓸 만은 합니다. 하나 아직 모자람이 많은 아이이니 어여삐 봐주시기 바랍니다.”
“이를 말이오? 내가 틈틈이 눈여겨볼 것이니 너무 걱정 마시오.”
“감사합니다.”
유방현과 해정설이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쾅!
갑자기 누각 밖에서 요란한 폭음성이 터져 나왔다. 유방현과 해정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글쎄 말입니다.”
멀리서 사람들의 고함과 비명 소리가 들려 오자 유방현은 안색이 변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해정설은 눈썹을 찌푸리더니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두 명의 남녀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지 나가보고 오너라.”
“예.”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의 신형은 어느새 허공을 날아 누각 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듯한 놀라운 신법(身法)이 아닐 수 없었다.
그제서야 유방현은 마음이 가라앉았는지 굳었던 안색이 조금 풀어졌다. 그는 태사의에 앉은 채로 주위를 둘러보다 바닥을 세게 굴렀다.
“대체 무슨 난리람.”
유소응이 끌려간 곳은 지하에 있는 창고였다. 조그만 창문 하나만이 나 있을 뿐, 창고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창고 안은 오히려 바깥보다 훨씬 더 추웠다. 그를 그곳으로 끌고 온 장한들은 손발이 묶인 그를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전방이 들어왔다. 전방의 손에는 쇠가죽으로 만든 채찍이 들려 있었다.
“내가 단단히 각오하라고 했지? 두 번 다시 엉뚱한 짓을 할 생각이 없도록 만들어 주겠다.”
전방은 들고 있는 채찍으로 사정없이 유소응을 내리쳤다.
쫘악!
옷자락이 찢겨지며 유소응의 몸이 세차게 떨렸다. 찢겨진 옷사이로 핏물이 뿜어 나왔다. 쇠가죽 채찍은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지나가 얇은 유소응의 몸에 선명한 핏자국을 남겼다.
쫘악! 쫙!
채찍질은 계속되었다. 삽시간에 유소응의 옷은 넝마 조각처럼 변해 버렸고, 그의 상체는 피범벅이 되었다. 하나 유소응은 울지 않았다. 원래 부르칸족의 남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눈물을 흘르지 않는 법이다. 비록 나이는 어렸짐나 유소응은 자신도 엄연한 부르칸족의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피부가 갈라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도 참을 수 있었다. 하나 열한 살짜리 꼬마에게 이런 식의 채찍질은 너무도 가혹한 것이었다.
유소응은 이를 악물며 버텼으나 점차로 눈앞이 흐려져 갔다.
이대로 눈을 감고 잠들고만 싶었다.
눈을 감으면 그리운 할아버지, 부쿠 메르겐의 얼굴이 떠오를 것 같았다.
‘할아버지, 너무 아프지만 난 울지 않아요. 그런데 자꾸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져요.’
그때 갑자기 커다란 폭음과 함께 담벼락이 부서지며 한 사람이 뛰어들었다.
“웬 놈이냐?”
전방과 두 며의 장한이 놀라 고함을 질렀으나 그 사람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유소응을 바라보았다.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유소응을 보는 순간, 그의 눈에서는 형용키 어려운 무시무시한 눈빛이 번뜩거렸다.
그 눈빛을 보자 전방과 장한들은 오금이 저려서 감히 덤벼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이 오른손이 슬쩍 휘둘러지자 유소응을 묶었던 줄이 끊어지며 유소응의 몸이 허공을 날아 그에게로 왔다.
전방과 장한들은 이 놀라운 광경에 입을 딱 벌렸다.
유소응은 감겨지는 눈을 간신히 떠서 자신을 안고 있는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 유소응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올 줄 알았어요…… 아저씨가 나를 구하러 올 줄 알았어요……”
유소응을 안아든 그 사람은 유소응의 피투성이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더니 이내 전방을 쏘아보았다.
“어린아이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전방은 그 사람이 주루에서 보았던 괴인임을 알고 무릎을 달달 떨었다.
그는 황급히 피 묻은 채찍을 버리고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아이고! 대협! 요…… 용서하십시오. 전 그저 노주께서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입니다.”
괴인은 당장에라도 그를 쳐죽이려는 듯 손을 쳐들었다.
하나 이내 다시 손을 내렸다.
“죽이기도 아까운 자로다. 네 죄과는 훗날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이어 그는 유소응을 안고 몸을 날렸다.
휘잉!
그가 소맷자락을 펄럭이자 세찬 바람이 일어나며 반쯤 무너졌던 창고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아이구!”
전방과 장한들은 바람에 몸을 휘청거리다가 바닥을 기다시피 하여 간신히 무너져 가는 창고를 빠져 나왔다.
콰앙!
때를 맞춰 창고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전방이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괴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전방은 자신이 지옥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왔음을 깨닫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