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8권 고목생화(枯木生花)편 : 11화
제77장. 거자필반(去者必返)
오늘따라 대왕루는 기이한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아직 저녁이 되려면 멀었는데 미시(未時)경부터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해서 신시(申時)가 되자 빈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대왕루가 비록 이 일대에서 가장 번성한 주루라고 해도 이런 일은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었다.
그것은 모두 한 가지 소문 때문이었다.
- 오늘 저녁에 누군가가 대왕루를 접수하기 위해 찾아온다!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누구나가 처음에는 반신반의(半信半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왕루는 원래 종남파의 소유였다가 반년 전부터 초가보에게 넘어갔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초가보는 요사이에 강북무림에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신흥세력이었다. 성급한 사람들은 그들이 섬서성의 패자(覇者)인 화산파와 자웅을 겨룰 만하다고까지 말하고 있었다.
그러한 초가보에 공개적으로 도전장을 내민 자가 있으니 세인들의 이목이 집중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모두들 그 무모한(?) 도전자를 보기 위해 앞을 다투어 대왕루로 모여든 것이다.
대왕루를 관장하는 사람은 초가보에서 파견된 인물이었는데, 다들 삼총관(三總官)이라고만 부를 뿐 그의 진정한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평상시에도 식사 때만 되면 번잡하고 시끄러웠던 대왕루는 오늘 그야말로 시장바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음식을 주문하는 사람, 소리를 지르는 사람, 낄낄거리며 웃는 사람, 심지어는 벌써부터 술에 취해 탁자에 코를 처박고 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들의 흥분은 유시(酉時)에 가까워 올수록 점점 커졌고, 그에 따라 장내의 소란도 더욱 거세어서 종내에는 옆 사람과 대화를 할 때도 소리를 질러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이었다.
“왔다!”
누군가의 외침이 터져 나오자 시끌벅적하던 주루 안이 갑자기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침을 튀기며 떠들어대던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주루의 입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과 귀가 온통 쏠린 가운데 한 사람이 천천히 주루 위로 걸어 올라왔다. 그는 커다란 죽립(竹笠)을 눌러쓴 남자였다.
죽립인의 체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걸음걸이는 절도가 있었고 태도도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죽립인은 허리춤에 한 자루의 검을 차고 있었는데, 이상한 것은 왼쪽 팔이 조금 부자연스럽게 흔들린다는 것이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은 죽립인이 왼팔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외팔이에 가깝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죽립인은 주루로 올라와서는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았다. 죽립 사이로 두 줄기의 성광(星光)같이 예리한 안광이 흘러 나왔다.
점소이 하나가 죽립인의 앞으로 다가왔다.
“지금은 빈자리가 없으니 다음에 다시 오십시오.”
점소이답지 않은 퉁명스런 태도였다.
죽립인은 짤막하게 말했다.
“장방을 불러오시오.”
점소이는 얼굴에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장방이 와도 빈자리가 없으면 없는 거요.”
죽립인은 다시 말했다.
“손익(孫翼)을 불러와.”
그 말에 점소이가 처음으로 움찔하는 기색을 보였다.
“지금 누구라고 했소?”
죽립인은 더 이상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점소이는 어찌해야 할지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그때 차가운 음성이 들려 왔다.
“왕종(王宗), 손님에게 무례하면 안 된다.”
얼굴이 네모지고 싸늘한 눈빛을 가진 중년인이 천천히 사람들 틈을 뚫고 앞으로 나왔다.
점소이는 즉시 머리를 조아렸다.
“장방님.”
“너는 그만 가 보거라.”
점소이가 물러나자 중년인은 죽립인을 쓰윽 훑어보았다. 심장이 오그라들 만큼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내가 여기의 방장이오. 당신은 나를 어떻게 알고 있소?”
죽립인의 음성은 처음과 변함이 없었다.
“칠살추명조(七煞追命爪) 손익이 초가보의 삼총관으로, 현재 대왕루를 관장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소?”
그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칠살추명조 손익은 흑도무림(黑道武林)에서 그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고수였다. 그는 열 개의 손가락만으로 수많은 고수들을 비명횡사케 한 살인마였으며, 냉혹하고 심계가 깊기로도 유명한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대왕루를 운영하는 초가보의 삼총관이 설마 그 살명(殺名)이 자자한 칠살추명조 손익이었을 줄은 몰랐는지라 모두들 호기심과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장방을 쳐다보고 있었다.
손익은 중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나도 자네가 누구인지 알겠군.”
손익은 갑자기 말투를 바꾸었다.
죽립인은 묵묵히 그를 쳐다보았다.
사람들은 손익이 죽립인의 정체를 말하리라고 생각하고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그의 입을 주시했다.
그런데 그의 입이 열리며 나온 말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자네는 바보일세.”
“……!”
“자네는 본보(本堡)가 얼마나 열심히 자네를 찾고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걸세. 지난 몇 달 동안 자네의 행방을 알지 못해 본보의 많은 사람들이 초조해하고 있었네. 그런데 이렇게 제 발로 내 앞에 나타나다니 실로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손익의 말을 듣건대, 그는 죽립인에 대해 상당히 자세하게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더구나 그 말 속의 뜻을 보면 죽립인은 초가보와 적대 관계에 있음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 죽립인은 스스로 호굴(虎窟)로 뛰어든 것일까?
손익은 한동안 죽립인을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특유의 냉랭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아마도 숨어 지내야만 하는 생활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겠지. 젊은 나이이니 충분히 이해할 법도 하네. 하지만 그래도 어리석었네. 아무리 갑갑해도 여기를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의아한 얼굴이었으나, 그들 중 안목이 있는 사람들은 손익의 말로 죽립인의 정체에 대한 단서를 파악했는지 흥미진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죽립인이 모처럼 입을 열었다.
“내가 여기로 찾아온 것은……”
손익은 물론이고 주루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죽립인에게 고정되었다.
“어제 말한 대로 이곳의 운영권을 돌려 받기 위해서요.”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나 주시하고 있다가 이 말을 듣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했다. 개중에는 아예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던지는 이들도 있었다.
손익의 입가에도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게 뜻대로 될까?”
죽립인은 그의 냉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대왕루는 세워진 후 줄곧 본파(本派)의 소유였소. 그런데 초가보에서 비합법적인 수단을 사용해 대왕루를 빼앗았소. 나는 그걸 바로잡겠다는 거요.”
그 말을 듣자 그제서야 중인들 속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 저 사람은 종남파의 제자다!”
그 말은 조용한 호수에 커다란 돌멩이를 던진 듯한 파문을 일으켰다.
“종남파의 제자라구?”
“종남파의 제자가 살아 있었어?”
“어디? 제자 중 누구야?”
“혹시 실종되었다던 장문인은 아닐까?”
삽시간에 주위가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소란스러워졌다. 지난 몇 달 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은연중에 금기(禁忌)시 되었던 ‘종남파’라는 이름을 지금은 너도나도 내뱉고 있었다.
심지어는 환호성을 지르고 손뼉을 치는 사람도 있었다.
“갈(喝)!”
갑자기 손익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중인들은 귀청이 떨어질 것만 같아 귀를 틀어막았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건 멀리 떨어진 사람이건 똑 같은 반응을 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장내에는 무림의 고수들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그들은 손익이 단 일갈로 소란스럽던 주위를 침묵시키자 내심 그의 고강한 공력(功力)에 혀를 내둘렀다.
‘과연 대단하구나. 공력이 저 정도일진대, 조법(爪法)은 또 얼마나 무서울까? 오늘 종남파의 제자는 살아서 이곳을 벗어나기 힘들겠구나.’
주위가 다시 처음의 정적(靜寂)을 되찾자 손익은 차가운 눈으로 죽립인을 쏘아보았다.
“이제야 자네 속셈을 알겠군.”
“……”
“자네는 소란을 피워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려는 거야. 종남파가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려는 거지. 그 생각은 기특하지만 결국 모두 헛수고에 불과할 뿐이야.”
손익의 얼굴에는 음성만큼이나 차가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사람들은 승자(勝者)밖에는 기억하지 않아. 패자(敗者)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곧 잊고 말지. 저들이 환성을 질렀다고 종남파의 부활을 환영하는 줄 알면 오산이야. 저들은 단지 오랫동안 들어왔던 이름을 다시 듣게 되자 무의식중에 반응한 것뿐이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
“종남파란 존재는 이미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워져 가고 있어. 아무리 되살리려 해도 불가능하지. 죽음을 각오하고 종남파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알리려는 자네의 용기는 높이 평가하지만, 그것도 알고 보면 필부(匹夫)의 만용(蠻勇)일 뿐이야. 여기서 자네가 내 손에 죽는다 해도 누구도 기억해 주지 않아. 오늘 저녁에 심심풀이로 잠시 입에 오르내렸다가 내일부터는 까맣게 잊어버리겠지. 이게 바로 세상 인심(人心)이야.”
손익은 천천히 뒷짐진 손을 풀었다.
“결국은 모두 공염불이란 말이지.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
죽립인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죽립을 벗었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추레한 청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비록 겉모습은 볼품없어 보였지만 청년의 눈빛은 침착했고, 얼굴 표정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손익의 냉혹한 말에도 흔들린 것 같지 않았다.
손익은 청년의 두 눈을 한동안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자네 이름이 기억났어. 자네는 소지산이지?”
청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남파의 장문인이 실종된 후 자네가 실질적으로 종남파를 이끌고 있다고 들었네. 자네는 혹시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없나?”
“무얼 말이오?”
“자네의 장문인이 왜 갑자기 말도 안 하고 사라졌는지 말이야.”
소지산은 짤막하게 되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명색이 그래도 일파(一派)의 존주(尊主)라는 사람이 왜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사라졌을까? 누구나가 의문을 가져 봄직하지 않나?”
“…!”
“내 생각을 말해 줄까? 자네 장문인은 도망친 거야.”
손익은 소지산의 표정을 살피려는 듯 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의 장문인은 도저히 종남파를 되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절망하여 도망치고 만 거야. 문파를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문파를 끌고 나갈 자신이 없었던 거지. 그래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슬그머니 사라진 거야.”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아까보다는 한결 나직한 소리였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속삭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손익은 이번에는 사람들의 소란을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듯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마저 머금고 있었다.
“자네도 겉으로는 부인해도 속으로는 내 말이 맞다는 걸 시인(是認)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 자네 혼자 아무리 여기서 종남파가 어쩌니저쩌니 떠들어도 모두 소용없는 짓이라구. 종남파는 자기네 장문인에게서조차 버림받은 문파인 거야.”
장내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손익의 말에 동조하는 음성들이 여기저기서 들려 왔다.
소지산은 문득 고개를 들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고개를 떨구었을 때, 그의 입가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손익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왜 웃는 거지?”
소지산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는지 알았소.”
손익의 눈이 무섭게 번뜩였다.
“내 말이 어처구니가 없다고?”
소지산은 그의 대꾸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두렵기 때문이오. 본파가 다시 재건될까 봐 두려운 거요.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그 싹을 뿌리째 뽑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거요.”
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조용한 울림을 담고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주위의 웅성거림이 다시 잦아들었다.
“본파가 생긴 지는 사백 년이 넘었소. 그러한 전통은 결코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없어지지 않지. 당신은 그러한 전통을 없애기 위해 사람들에게 종남이 영원히 재기할 수 없는 문파라는 인식을 심어주려 한 거요. 하지만 당신은 한 가지 모르는 게 있소.”
“…!”
“본파의 전통은 결코 다른 누가 세워 준 것이 아니오. 바로 본파의 제자들이 스스로 세운 것이오. 본파에 단 한 명의 제자만 살아 있어도 본파는 언제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소. 마치 긴 겨울이 지나고 새봄이 오면 온 세상이 다시 초록색으로 뒤덮이는 것처럼.”
손익의 눈꼬리가 부르르 떨렸다. 이번에는 소지산이 그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그의 마음속 격동을 그대로 꿰뚫어 보겠다는 듯이.
“본파의 장문인은 반드시 다시 돌아오실 거요. 만난 사람이 언젠가는 헤어지듯 떠난 사람도 언젠가는 돌아오게 되어 있소. 그게 세상의 이치(理致)요. 그리고 그때까지 나를 비롯한 종남파의 제자들은 종남파를 꿋꿋하게 지켜 나갈 것이오.”
주위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도 모두들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하나 장내의 분위기는 조금 전과는 어딘지 모르게 달라져 있었다. 손익은 그걸 알아차렸는지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네 장문인이 언변(言辯)과 배짱, 심계가 좋아서 삼절무적(三絶無敵)이라고 불렸다더니 네 말재주도 그에 못지않구나. 하지만 강호에서의 일은 말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양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실력을 동반하지 않는 말재주는 사자(死者)의 독백(獨白)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거무스름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성명절기(盛名絶技)인 칠살조공(七煞爪功)을 끌어올릴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 칠살조공으로 펼쳐지는 칠살추명조는 많은 무림인들에게 죽음과 공포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손익은 양손을 반쯤 쳐든 채로 천천히 소지산을 향해 다가왔다.
“네 몸에 열 개의 구멍이 뚫린 다음에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면 그때는 네 말에 일리가 있다고 인정해 주지.”
소지산은 쓸모 없는 왼팔을 흔들거리지 않게 허리춤에 묶은 다음 오른손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창!
예리한 검명과 함께 그가 손에 검을 쥐자 주변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뒤로 물러났다. 그 바람에 장내에는 반경 삼 장 정도 되는 공간이 생겨났다. 소지산은 검을 잡고 몸을 똑바로 편 채로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서 당신은 그렇게 말이 많은 거요?”
손익의 두 눈이 활활 타오르는 횃불처럼 무섭게 번뜩였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은 허공을 압축하여 소지산에게 쏘아져갔다.
쐐쐐쐑!
그의 양손이 움직이며 마치 화살이 날아가는 듯한 음향이 터져 나왔다. 이것은 그만큼 손익의 손이 움직이는 속도가 빠르다는 뜻이었다. 소지산은 그 자리에 못박인 듯 꼼짝도 않고 서 있다가 수중의 장검을 곧장 앞으로 찔렀다.
깡!
손익의 손가락과 소지산의 검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소지산은 주춤 뒤로 한걸음 물러났고, 손익은 몸을 약간 휘청거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소지산이 약세인 것 같았다. 하나 손익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더욱 차갑게 굳어 있었다. 손익이 맨손으로 소지산의 검을 피하지 않고 맞서 간 것은 그만큼 자신의 내공(內功)이 소지산을 압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부딪쳐 본 결과 그는 손가락에 상당한 통증을 느껴야만 했다. 게다가 칠살조공으로 보호된 그의 양손가락은 금석(金石)을 부술 정도였는데도 소지산의 검을 부러뜨리지 못했다.
‘어린 녀석의 내공이 상당하군.’
손익은 상대를 너무 경시했다가는 의외의 낭패를 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몸을 날렸다.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환영(幻影)만이 여기저기에 나타났다. 손익이 단순히 칠살추명조만으로 이름을 떨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지금 시전하는 귀영무(鬼影舞) 신법 또한 강호를 진동시키기에 족한 것이었다. 지금도 중인들은 손익이 지금 어디를 공격하려는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주위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이 정도니 실제로 직접 겨루는 사람은 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나 손익에게는 운이 나쁘게도, 그와 상대하는 사람은 종남파의 모든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침착하고 과묵한 소지산이었다. 소지산의 본신 실력은 매상에게 뒤질지 몰라도 참을성과 침착성만큼은 종남파의 누구보다도 뛰어난 것이었다. 소지산은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정신없이 나타나는 손익의 환영에 당황하지 않고 두 눈을 반개(半開)한 채로 귀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사사삭!
옷자락이 스치는 미약한 소리가 연신 들려 왔다. 하나 소지산이 찾는 것은 그 소리가 아니었다.
칙!
마침내 옷자락 스치는 소리 가운데에 미약하나마 휘파람 소리 비슷한 것이 들렸다. 그 소리는 조금 전에 손익이 칠살조공을 발출할 때 났던 것과 같은 소리였다. 그제서야 소지산의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은데 그의 검은 점점 빨라져서 순식간에 자신의 왼쪽을 쓸어 가고 있었다. 그의 검이 움직이는 방향에서 누군가의 헛바람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예측대로 손익은 그쪽에서 공격해 들어왔던 것이다.
까깡!
손익이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그의 손과 소지산의 검은 다시 허공에 격돌했다. 소지산은 세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손익도 이번에는 한걸음 물러섰다. 손익은 어이가 없는지 무서운 눈으로 소지산을 쏘아보다가 이내 입꼬리를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좋아, 장난은 이제 그만하겠다. 이번에는 제대로 상대해 주겠다.”
손익의 몸이 다시 허공을 날아 소지산에게로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조금 전과 같은 환영은 일으키지 않았다. 다만 곧장 일직선으로 소지산에게로 쏘아져 오고 있었다. 소지산의 표정은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하나 그의 마음은 납덩이를 매달아 놓은 듯 무겁기만 했다. 조금 전의 격돌 때 그는 하마터면 손에서 검을 놓칠 뻔했다. 그런데 이제 그보다 더 강력한 공격이 날아온다면 자신이 과연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하나 생각은 길고 행동은 짧았다. 그는 조금도 피하지 않고 손익에게 맞서 갔다.
소지산의 검법은 종남파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단순했다. 분명 같은 검법인데도 그가 펼치면 이상하게도 간단명료해 보였다. 두기춘이 보여 주는 화려한 변화도 없고, 응계성 같은 치열함도 없었다. 물론 매상같이 살기 어린 맛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도 그와 비무(比武)를 하는 사람들은 쩔쩔매야만 했다. 소지산의 검이 상대의 약한 부분을 기가 막히게 파고들기 때문이었다. 나중에야 사람들은 소지산의 검이 단순해 보이는 것은 그가 일체의 허식을 배제하고 지극히 실용적으로 검결을 운용하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손익과 맞서는 그의 검은 손익이 펼치는 칠살추명조의 틈 사이로 계속 노리고 있었다. 손익 또한 조금 전의 두 번째 격돌 때 하마터면 손가락이 잘려질 뻔했는지라 그의 검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은 될 수 있으면 자제하고 초식의 변화로만 상대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격전은 조금 전보다 훨씬 다채롭고 볼 만하게 펼쳐졌다. 반면에 초반 격돌 때의 팽팽한 긴장감은 다소 느슨해진 상태였다. 하나 언제까지 이런 식의 대결이 펼쳐질 리가 없었다.
먼저 짜증이 난 사람은 손익이었다. 손익은 자신의 아들뻘밖에 되지 않는 청년과 수십 초나 싸우고 있다는 사실에 슬슬 호가 치밀어 올랐다. 물론 그 이유는 가급적이면 자신이 다치지 않고 소지산을 제압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면 격돌을 자제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생각을 수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지산은 자기가 대충 상대해서 쓰러뜨릴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내공은 둘째치고 그의 침착한 대응과 허점을 노리고 파고드는 검초는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이도 어린 녀석이 싸우는 모습은 완전히 평생을 굴러먹은 노강호(老江湖)로군. 보주(堡主)가 남들 앞에서는 되도록 살인을 삼가라고 해서 참았는데, 정 피가 보고 싶다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손익은 마음속에 억눌렀던 살심(殺心)이 들끓어 올라 눈빛이 흉흉해졌다. 손익은 한창 시절에는 양 손가락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던 인물이었다. 일단 살심이 발동하자 펼치는 초식 하나하나가 그렇게 살벌할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수비는 도외시한 일방적인 공격인 것 같았다. 하나 소지산은 섣불리 공격하지 못했다. 전력을 기울여 공격한다면 손익에게 어느 정도의 부상은 입힐지 몰라도 뒤이어 자신의 몸이 그의 손가락에 꿰뚫리고 말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일단 약세를 보이자 팽팽하던 판세가 급격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원래 내공도 뒤떨어진 데다 대전(對戰) 경험마저 일천(日淺)한 소지산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자 도저히 반격할 기회를 찾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소지산이 아마 강호의 경험이 좀더 풍부했다면, 손익이 전력을 기울이기 전에 약간의 부상은 감수하고라도 이런 식으로 그를 몰아붙였을 것이다. 그랬다면 승리를 거둘 수도 있었다. 하나 지금은 상황이 반대가 되었다.
찌익!
소지산의 옆구리가 손익의 손가락에 찢겨져 맨살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드러난 옆구리의 피부는 검게 죽어 있었다. 직접 닿지 않고 옷자락만 찢어졌는데도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아마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소지산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검세가 좀더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이 녀석이 제대로 된 사부 밑에서 좀더 체계적인 수련을 했다면 내가 어려울 뻔했다.’
손익은 더 화근이 되기 전에 싹을 잘라야겠다는 생각에서 두 눈 가득 살기를 띤 채 양손을 번갈아 가며 다섯 번이나 휘둘렀다. 칠살추명조 중에서도 살초(殺招)로 이름난 오마색명(五魔索命)이었다. 소지산이 더 버티지 못하고 다시 어깨 부분에 피를 뿌리며 휘청거렸다.
‘이놈! 이제 마지막이다!’
손익은 한 마리 붕새처럼 허공을 날아 아직도 신형이 흔들리고 있는 소지산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의 손에서 흘러 나오는 칠살조공이 막 소지산의 머리에 열 개의 구멍을 뚫으려 할 때였다.
“불이야!”
갑자기 무언가 타는 냄새와 함께 여인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려 왔다.
“뭐? 어디야? 어디?”
삽시간에 장내는 난장판이 되었다. 넋이 나간 것처럼 격전을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주루를 빠져 나가기 위해 뛰쳐나왔다. 하나 주루의 입구는 하나이고 사람은 평소보다 훨씬 많이 들어왔는지라 빠져 나가는 것이 수월할 리 없었다. 입구는 순식간에 서로 빠져 나가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어디선가 자욱한 연기가 뿜어 나와 주루 안을 뒤덮자 장내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사람 살려!”
너도나도 고함을 치는 바람에 더욱 정신이 없었다. 그나마 창문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창문을 뚫고 나갔지만, 이층에 있거나 주변에 창문이 없는 사람들은 좁은 입구로 몰려들어 엎지고 자빠지고 난리가 아니었다.
그 소동의 한가운데에서 손익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그의 손에 목숨을 잃을 뻔했던 소지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불이라고 처음 소리친 순간에 손익은 멈추지 않고 소지산의 머리통부터 부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여섯 개의 비도(飛刀)가 날아들었던 것이다. 손익이 소지산의 머리를 박살내는 순간 여섯 개의 비도 또한 그의 몸에 여섯 개의 피 구멍을 만들어 놓을 것이 분명했다. 할 수 없이 손익은 손을 거두고 물러나야만 했다. 그 틈을 노려 소지산은 순식간에 사람들 틈에 섞여 사라져 버렸다. 손익은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비도가 어디서 날아들었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때는 이미 장내가 아비규환의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한 가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비도에 정교한 조각이 새겨져 있고, 붉은 수실이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비도의 주인이 여인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었다. 손익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필시 처음에 불이 났다고 소리친 년일 것이다. 사람들 틈에 숨어 있다가 그 녀석이 위기에 처하자 그런 수작을 부린 것이 분명하다.’
손익은 두 눈을 무섭게 번뜩이고 있다가 이내 입꼬리에 냉소를 매달았다.
‘흐흐…… 하지만 그래 보았자 부처님 앞의 손행자(孫行者)일 뿐이다. 너희만 잔머릴 쓰는 줄 아느냐?’
그의 모습은 점차로 자욱해지는 연기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소지산은 여인의 손을 잡고 좁은 골목 사이를 미친 듯이 치달려갔다.
“됐어요, 사형. 아무도 안 쫓아와요.”
여인이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제서야 소지산은 걸음을 멈추었다. 여인은 한차례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이내 갸르르 웃었다.
“호호…… 불이 났다고 했을 때 그 사람들의 난리치는 모습이라니…… 나중에 불이 난 게 아니라 기름 먹인 이불 한 채가 탄 걸 알면 다들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
여인은 조잘거리다가 소지산이 무거운 표정을 하고 있자 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너무 실망하지 말아요. 왼팔이 멀쩡했다면 소 사형은 그 손익인지 뭔지 하는 놈을 보기 좋게 쓰러뜨렸을 거예요.”
소지산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여인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소지산의 음성은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알 수 있어, 직접 싸워 보았으니까. 그자의 무공은 확실히 나보다 한 수 위야.”
“…!”
“그런 정도의 고수가 초가보의 일개 총관에 불과해. 초가보에는 대체 뛰어난 고수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 걸까?”
여인의 얼굴에도 순간적으로 수심(愁心)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 그녀는 이내 방긋 웃으며 소지산의 팔짱을 꼈다.
“그래도 오늘은 그놈들에게 보기 좋게 한 방 먹였잖아요. 그놈들을 골탕먹이고 본파가 건재하다는 걸 알린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에요.”
소지산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표정은 별로 밝아지지 않았다.
여인은 짐짓 쾌활한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아무튼 몇 달 동안 좁은 절간에만 처박혀 있다가 밖에 나오니 정말 좋군요. 사형도……”
그녀의 음성이 갑자기 끊겼다.
소지산은 마음이 심란해 있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여인은 입을 반쯤 벌린 채 꼼짝도 않고 있었는데,
그 열려진 동공(瞳孔)에는 공포와 두려움의 빛이 담겨 있었다.
소지산은 떠오르는 것이 있어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좁은 골목의 담벼락 위에 한 명의 중년인이 우뚝 선 채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지산은 그 중년인이 대왕루에서 보았던 점소이임을 알아차렸다.
점소이는 그들을 보고 징그럽게 웃었다.
“흐흐…… 이럴 줄 알았지. 네놈에게 일행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미리 주루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보람이 있었다.”
점소이의 손에는 호각이 쥐어져 있었다.
“아무리 얕은 수작을 부려도 명년 오늘이 너희들의 제삿날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흐흐……”
점소이는 손에 든 호각을 입으로 가져갔다.
소지산은 점소이가 호각을 부는 날에는 자신들이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음을 알았으나 호각을 부는 것을 제지할 방법이 없었다.
그가 아무리 빨리 달려들어도 점소이가 서 있는 담벼락에 도달하려면 약간의 시간이 소용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어디선가 살랑 바람이 불었다.
빠악!
피비린내가 짙게 풍기며 점소이의 몸이 담벼락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그의 머리통은 이미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소지산과 여인이 깜짝 놀라 보니 조금 전에 점소이가 서 있던 자리에 어느 사이엔가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키가 무척 크고 앙상하게 마른 사람이었다.
담벼락에 올라서 있으니 더욱 커서 기괴스러울 정도였다.
얼굴은 차갑고 비정해 보였는데, 이상하게도 눈빛이 눈에 익었다.
괴인은 담벼락에 선 채로 말없이 두 남녀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두 사람 또한 이상한 예감에 괴인을 쳐다보았다.
먼저 몸을 움직인 사람은 여인이었다.
여인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이다가 눈이 점점 커지더니 이내 전신을 격하게 떨었다.
그리고는 비명 같은 외침을 토하며 괴인에게로 달려들었다.
“장문사형!”
괴인은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있다가 품속으로 뛰어든 여인을 가만히 끌어안았다.
여인은 그를 끌어안은 채 한없이 오열했다.
괴인은 여인의 탐스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취아야, 오랜만이구나.”
여인, 방취아는 그 음성을 듣자 더욱 목놓아 울었다.
그동안 가슴속에 맺힌 한(恨)을 떨어내려는 듯이 아무 말도 못하게 계속 울기만 했다.
그녀를 안고 있는 괴인의 눈빛도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소지산이 그에게 다가왔다.
항상 돌부처처럼 표정이 없던 그의 눈가에도 엷은 물기가 고여 있었다.
소지산은 한참이나 괴인을 바라보더니 머리를 숙였다.
“돌아오셨군요.”
진산월은 한동안 묵묵히 서 있었다.
자신을 끌어안고 흐느끼는 방취아와 눈물을 보이기 싫어 고개를 숙인 소지산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혼잣말처럼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오기 마련이지(거자필반 : 去者必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