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9권 풍운기혜(風雲起兮)편 : 2화
제79장. 만상공자(萬象公子)
“호호호……”
서문연상은 짤랑짤랑한 교소(嬌笑)를 터뜨렸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통쾌해서 웃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비쩍 마르고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흉악한 외모의 사나이가 엄청난 음식값에 망연자실하여 쩔쩔매는 광경이 눈앞에 선했던 것이다.
“그 음식값 갚으려면 적어도 몇 달은 주방에서 허드렛일을 해야 될걸. 어쩌면 관가(官家)에 끌려가 험한 꼴을 당할지도 모르고…… 아니지!”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가 갑자기 거두어졌다.
“그놈이 자기 자식만 남겨 두고 몰래 도망치면 어쩌지? 만일 그렇다면 그 어린아이가 너무 불쌍해지는데……”
그녀는 혼자 제멋대로 상상하더니 이내 도리질을 했다.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자가 자식을 팽개치고 그럴 리는 없지. 아무튼 그놈이 당할 걸 생각하니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네.”
그녀는 다시 배시시 웃으며 날씬한 자기의 배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다 무엇을 보았는지 아름다운 봉목(鳳目)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에게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몇 명의 인물들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무림인(武林人)들임이 분명한 삼십대 중후반의 장한 네 명이 일자(一字)로 걷자 별로 넓지 않은 길이 거의 가로막히는 꼴이 되어 버렸다. 몇몇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자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황급히 길의 한쪽으로 비켜서서 그들에게 길을 내주고 있었다. 서문연상은 네 장한의 안하무인격의 행동이 눈꼴시어서 일부러 길의 한복판으로 가서 몸을 멈춰 세웠다. 네 명의 장한들은 양팔을 휘적거리며 활개치듯 걸어오다 길의 정중앙에 누군가가 서 있자 일제히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들은 자신의 앞을 막아선 사람이 두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녀 임을 보고는 일제히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그들 중 가장 우측의 텁석부리 장한이 그녀의 전신을 쓰윽 훑어보더니 입가에 징그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흐흐…… 소저, 우리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소?”
말은 제법 정중하게 하는 것 같았으나, 그의 눈길은 쉬지 않고 그녀의 가슴과 허리 부분을 훑고 있어서 그녀는 마치 몸에 송충이가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못된 놈, 잠시 후에 그 야비한 눈알을 후벼파 주고야 말 테다.’
서문연상은 속으로는 여자답지 않은 흉악한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장한을 슬쩍 쳐다보더니 이내 옥(玉) 구슬이 쟁반 위를 굴러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 아가씨가 오늘 모처럼 이곳에 유람을 왔는데, 당최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겠군요. 이 일대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을 찾고 있는데, 혹시 그런 사람을 알고 있나요?”
처음 입을 열었던 텁석부리 장한이 어처구니가 없는지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니, 이년이 지금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길 안내를 하라는 거야?’
그가 막 화를 내려는 순간, 그의 옆에 있던 쥐눈의 장한이 재빨리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앞으로 나섰다.
“그렇다면 소저는 운(運)이 좋은 거요. 우리는 장안(장안)의 토박이로, 이 일대의 명승고적을 누구보다도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들이오.”
쥐눈의 장한은 말을 하며 텁석부리 장한의 옆구리를 툭 쳤다. 그제서야 텁석부리 장한은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재빨리 맞장구쳤다.
“맞소, 맞아. 소저는 사람을 제대로 찾았소.”
다른 두 장한도 서로 은밀한 눈짓을 교환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서문연상은 그들의 작태를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방긋 미소지었다.
“잘넸네요. 이 아가씨가 수고비를 두둑이 줄 테니 당신들은 볼 만한 곳을 빠짐없이 안내하도록 해요.”
그녀는 아예 아랫사람을 대하듯 거리낌없이 말하며 자신이 먼저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네 명의 장한들은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묘한 미소를 짓고 있더니 이내 하나둘씩 그녀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걱정스런 얼굴로 수군거렸으나, 그녀는 아는지 모르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활기찬 걸음으로 저만큼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리따운 미소녀의 뒤를 네 명의 험상궂게 생긴 장한들이 어슬렁거리며 따라가는 광경은 마치 굶주린 늑대들이 침을 흘리며 먹이를 쫓아가는 장면을 연상케 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태롭고 불안한 느낌이 들게 했다. 거리를 거의 지나가자 장안성(長安省)의 남문(南門)이 보이기 시작했다. 서문연상은 그 남문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오늘은 저쪽 부근을 돌아보고 싶은데, 저 근처에 볼 만한 곳이 어디 있지요?”
쥐눈의 장한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소저의 안목은 참으로 대단하시오. 장안 남문(長安南門) 일대는 원래 명승(名勝)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오. 그중에서도 으뜸이라면 역시 취미사(翠微寺)가 있는 태화곡(太和谷)이라고 할 수 있지요.”
“취미사? 들어 본 것 같기도 한데……”
서문연상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쥐눈의 장한이 열심히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원래 당(唐)이 고조(高祖)가 만든 궁(宮)인데, 워낙 경치가 뛰어나고 아름다워서 고조 이래로 당의 황제들이 피서지로 삼았던 곳이오. 거리는 조금 멀지만 그야 말로 장안의 제일경(第一景)이라 할 수 있으니 반드시 가서 볼 만한 가치가 있지요.”
그녀는 흥미가 끌리는지 다시 물었다.
“궁이라면서 왜 절 이름이 붙었지요?”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당의 현종(玄宗)이 그곳에 피서를 왔다가 마음에 들어 아예 절로 바꾸어 버렸소. 그 절의 음식도 아주 정갈하고 맛있기로 소문이 자자하오.”
쥐눈의 장한이 제법 친절하게 설명해 주자 그녀는 마음이 동한 듯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곳으로 가요.”
쥐눈의 장한은 동료들과 의미 모를 웃음을 주고받더니 그녀를 안내해 남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절은 비록 한겨울이었지만, 날씨는 제법 청명해서 나들이 하기에는 더할 수 없이 좋았다.
그녀는 콧노래라도 부를 것 같은 표정으로 네 명의 장한들과 함께 남문을 통해 장안성을 빠져 나왔다.
장안성의 남문을 나오자 탁 트인 벌판과 그 앞에 우뚝 솟은 거대한 산맥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병풍처럼 높은 봉우리들이 끝도 없이 광활하게 솟아 있는 그 산맥은 바로 진령(秦嶺)이었다.
진령은 그 길이가 수천 리에 달해 있었으며, 어디서 보건 늘 웅위한 자태를 느낄 수 있었다.
성문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나가는 행인들의 모습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그에 따라 네 명의 장한들의 표정도 조금씩 바뀌어 갔다.
하나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천진한 표정을 지으며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탄성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천하제일의 명승이 장안에 있다 (천하형세지위자:天下形勢之偉者, 재장안:在長安) 라고 하더니 과언이 아니구나. 정말 눈앞이 시원해지는 게 경치 한번 좋네.”
쥐눈의 장한이 히죽 웃으며 서쪽의 유난히 높은 산세를 가리켰다.
“소저는 그 다음 시구도 기억하시오? 장안의 명승은 종남에 있다 (장안형승지거자:長安形勝之巨者, 재종남:在終南) 라는 속담의 종남산이 바로 저기요. 태화곡은 저 산자락 밑에 있소.”
“그렇군요. 빨리 보고 싶으니 어서 가요.”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빨리 했다.
네 명의 장한은 혹시라도 그녀가 엉뚱한 곳으로 가 버릴까 봐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쥐눈의 장한은 앞서 달려가는 그녀의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눈쎱을 찡그렸다.
‘이 계집애의 무공이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호랑이 아가리에 들어온 토끼에 불과하다.’
순식간에 그녀는 십여 리를 바람처럼 달려 진령의 산자락 부근에 도착했다.
네 명의 장한은 그녀를 뒤쫓느라 얼굴이 벌겋게 상시된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소…… 소저! 천천히 좀 갑시다.”
텁석부리 장한이 다급히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진령의 깊은 계곡까지 갔을지도 몰랐다.
그제서야 서문연상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무슨 남자들이 겨우 그거 달리고 헉헉대는 거예요? 그렇게 허약해서야 길 안내라도 잘할 수 있겠어요?”
텁석부리 장한은 약이 바짝 오른 모습이었으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내 입가에 징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흐흐…… 길 안내 같은 건 원래 적성에 맞지 않아서 못한다. 대신에 잘하는 건 따로 있지.”
그의 말투도 어느새 거칠게 변해 있었다.
서문연상의 눈꼬리가 상큼하게 치켜 올라갔다.
“그게 뭐죠?”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다.”
텁석부리 장한이 느물거리며 계속 다가오자 서문연상은 날카롭게 소리쳤다.
“멈춰요. 지금 뭐 하려는 수작이죠?”
“보면 모르냐? 내가 잘하는 걸 하려는 거다.”
서문연상은 그제서야 무언가를 느낀 듯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세 명의 장한은 어느새 그녀의 퇴로를 교묘하게 막아 서고 있었다.
이곳은 태화곡으로 들어서는 초입(초입)이어서 비록 깊은 계곡은 아니었으나, 주위는 제법 높은 산등성이로 둘러싸여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한겨울이어서 인적을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이런 곳에서 네 명의 험상궂게 생긴 장한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면 누구라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웬걸?
주위를 한차례 둘러본 서문연상의 얼굴에는 두려움은커녕 오히려 입가에 한 줄기 야릇한 미소마저 떠올라 있는 것이 아닌가?
텁석부리 장한은 벌벌 떨 줄 알았던 서문연상의 이런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쥐눈의 장한을 돌아보았다.
“저년이 미쳤나? 왜 실실거리며 웃는 거지?”
쥐눈의 장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나 보지.”
“아직도 사태를 모르는군.”
텁석부리 장한은 음산하게 중얼거리더니 다른 두 명의 장한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두 명의 장한이 즉시 손을 내밀어 서문연상의 양팔을 양쪽에서 붙잡아 왔다.
어찌된 일인지 서문연상은 조금도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양팔을 붙잡혔다.
텁석부리 장한은 내심 약간의 긴장을 하고 있다가 이 광경을 보자 득의만면한 미소를 떠올렸다.
‘흐흐…… 별것도 아닌 걸 괜히 불안해했군.’
한데 바로 그때였다.
“으앗!”
“아이구!”
한 손으로는 그녀의 양팔을 한쪽씩 움켜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으려던 두 명의 장한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않는 것이었다.
그들의 팔은 각기 괴이한 모습으로 꺾여져 있어 한눈에 보아도 관절이 부러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네놈들이 이럴 줄 알았다. 먼저 수작을 부린 것은 너희들이니 본 아가씨의 손이 맵다고 탓하지 마라.”
서문연상은 입꼬리에 차가운 미소를 매단 채 두 팔을 허리에 대고 매서운 눈으로 텁석부리 장한을 쏘아보았다.
텁석부리 장한은 그녀가 무슨 수로 두 사람의 팔을 꺾어 놓았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직감적으로 일이 자신의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나 그가 채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서문연상의 백옥(白玉)같이 고운 손이 허공을 날아 그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텁석부리 장한은 흠칫 놀라 황그빟 옆으로 몸을 피했다.
하나 그녀의 손은 어느사이엔가 그의 앞가슴 옷자락을 길게 찢어버렸다.
찌익!
텁석부리 장한은 가슴이 훤히 드러난 채로 안색이 변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서문연상의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그의 귓속을 칼날처럼 후비고 들어왔다.
“호호…… 잘하는 걸 보여 준다고 하더니 겨우 도망 다니는 거였군?”
“이런 찢어 죽일 년이……”
텁석부리 장한은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허리춤에 차고 있는 장도(長刀)를 뽑아 들었다.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재미나 좀 보고 놔주려고 했더니 네년이 스스로 화(禍)를 자초하는구나. 순순히 가랑이를 벌리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쥐눈의 장한도 병기를 뽑아 들고 서문연상의 뒤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서문연상의 몸이 부르르 떨리며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명문세가에서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귀하게만 자라온 그녀가 이런 모욕적인 말을 언제 들어 보았겠는가?
그녀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텁석부리 장한을 향해 곧장 몸을 날렸다.
그녀의 눈가에 소녀답지 않은 흉광이 번뜩이는 것으로 보아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살심(殺心)이 발동한 것이 분명했다.
텁석부리 장한은 비록 입으로는 큰소리를 쳤어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그녀에 대한 경계심을 갖고 있는지라 바짝 긴장하여 전력을 다해 칼을 휘두르며 맞서 갔다.
쥐눈의 장한 또한 그녀가 텁석부리 장한에게만 신경을 기울이는 것 같자 소리도 없이 그녀의 뒤쪽으로 빠르게 접근해 갔다.
팡!
가죽북을 치는 듯한 음향과 함께 텁석부리 장한이 다급한 외침을 토하며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허헉!”
텁석부리 장한이 쥐고 있던 장도는 이미 그의 손을 벗어나서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그는 가슴을 움켜쥔 채 연신 비틀거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서문연상은 장난 같은 가벼운 손짓으로 텁석부리 장한의 칼을 날려 버리고 그의 앞가슴에 벼락 같은 일장(一掌)을 격중시킨 것이다. 그 동작이 어찌나 빠르고 민첩했던지 텁석부리 장한은 영문도 모른 채 가슴팍이 빠개지는 듯한 통증에 우거지상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하나 그때는 쥐눈의 장한은 이미 서문연상이 지척까지 다가가서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그녀의 뒷등을 향해 장검을 내찌르고 있었다.
‘네년도 끝장이다.’
막 그의 장검이 그녀의 가녀린 뒷등을 꿰뚫으려는 순간, 그의 눈앞에 있던 그녀의 모습이 허깨비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쥐눈의 장한은 무언가 빠르고 강력한 것이 자신의 양쪽 뺨을 후려갈기는 것을 느꼈다.
쫙! 쫙!
“처음부터 네놈의 상판때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쥐눈의 장한은 그녀의 손에 열다섯 번이나 따귀를 맞고 얼굴이 퉁퉁 부어 올랐다.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멍청히 그 자리에 선 채로 따귀를 맞던 쥐눈의 장한은 결국 통증을 참지 못하고 서 있는 자세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끄응!”
그제서야 서문연상은 그이 뺨을 후려갈기던 손을 멈추었다.
쥐눈의 장한은 벼락을 맞은 고목처럼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의 얼굴은 어찌나 많이 부어 올랐는지 도저히 원래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도 그녀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날카로운 눈으로 텁석부리 장한을 쏘아보았다.
텁석부리 장한은 가슴을 움켜잡은 채로 놀란 눈으로 그녀와 쥐눈의 장한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고 있다가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소…… 소저, 이번 일에는 아무래도 무언가 오해(오해)가 있었던 같소……”
“오해는 무슨 얼어죽을……”
서문연상은 냉랭하게 쏘아붙이며 텁석부리 장한을 향해 섬섬옥수를 쳐들었다.
“소…… 소저,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 온 것은 소저였소. 나는 단지 소저에게 길 안내를……”
“그렇게 길 안내를 하고 싶거든 저승길 안내나 해라.”
서문연상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쳐들었던 오른손을 빠르게 휘둘렀다.
팡!
“어이쿠!”
텁석부리 장한은 다시 옆구리에 일장을 맞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서문연상은 다시 삼 장을 연거푸 날렸고, 그때마다 텁석부리 장한은 피하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장력을 맞고 여기저기로 굴러다녀야 했다.
서문연상은 그를 단단히 괴롭히려는지 장력에 삼 성(三成)의 공력만을 실었기 때문에 텁석부리 장한은 쥐눈의 장한처럼 기절도 하지 못하고 태풍 앞의 가랑잎처럼 계속 나뒹굴었다.
그렇다고 손속이 느린 것도 아니어서 텁석부리 장한으로서는 피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순식간에 십여 장을 얻어맞자 텁석부리 장한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 쭈욱 누워 버렸다.
“차…… 차라리 나를 죽이시오!”
텁석부리 장한이 금시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음성으로 쥐어짜듯 소리치자 서문연상은 싸늘하게 웃었다.
“호호…… 그렇게 말하면 이 아가씨가 못할 줄 아느냐? 당장 죽여 주겠다.”
그녀는 아예 작심을 한 듯 허공을 훌훌 날아 텁석부리 장한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아이고, 소저! 제발 살려 주시오.”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할 것처럼 바닥에 쫙 뻗어 있던 텁석부리 장한은 무슨 힘이 남았는지 벌떡 일어나더니 그녀를 향해 마구 머리를 조아렸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보였는지 서문연상의 입가에 언뜻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져 버렸다.
하나 텁석부리 장한을 향해 내뻗는 손길은 여전히 빠르고 매서운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휘익!”
어디선가 한 줄기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는 가슴을 시원하게 씻어 주는 듯이 청량(淸凉)했으며,
상당한 힘이 담겨 있어 바로 옆에서 부는 것처럼 똑똑하게 들렸다.
‘누군지 내공(內功)이 몹시 정심(精深)한 사람이구나.’
서문연상은 움찔 놀라 내뻗었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곧 눈 덮인 산등성이의 한편에서 하나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몇 차례 신형을 움직여 순식간에 장내에 가까이 다가왔다.
그 신법이 어찌나 표홀(飄忽)하던지 마치 한 마리 학(鶴)이 날개를 펄럭이며 움직이는 것 같았다.
다가온 사람을 본 서문연상은 더욱 놀랐다.
나타난 사람은 얼굴이 관옥(冠玉)같이 준수한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짙은 청삼(靑衫)을 입고 이마에는 영웅건(英雄巾)을 두른 그 청년의 모습은 그야말로 임풍옥수(臨風玉樹)라 할 만했다.
허리에는 옥대(玉帶)를 두르고 있었는데, 은은한 옥색(玉色)이 청삼과 너무도 잘 어울려 보였다.
청삼청년은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안녕하시오, 소저.”
그 절제된 태도와 단아한 모습만 보아도 명문세가의 귀공자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서문연상은 평소에 콧대가 세고 남자 알기를 길가에 굴러가는 돌멩이로밖에 보지 않는 도도한 성격이었으나, 지금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전신에 기품이 넘치는 미남자의 인사를 받자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하나 그녀는 겉으로는 여전히 쌀쌀맞은 표정을 한 채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이자들과 아는 사이인가요?”
청삼청년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빙긋 웃었다.
“불초가 갑자기 끼여들어 소저께서 오해한 모양이구려. 불초는 이자들과는 일면식(一面式)도 없는 사이요. 단지……”
“단지 뭐죠?”
“무슨 연유인지 모르나 소저 같은 분이 백주(白晝)에 남정네들에게 손찌검을 하는 모습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부득이 나서게 되었소. 기분이 나쁘셨다면 용서해 주시오.”
상대가 이렇게까지 정중하게 나오는데 서문연상도 언제까지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예로부터 여인은 군자(君子)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런 면에서 서문연상도 어디까지나 여인이었다.
예의를 잃지 않으면서도 기품 있는 청삼청년의 모습에 방심(芳心)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청삼청년은 그녀의 얼굴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진 것을 보고는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텁석부리 장한과 다른 세 명의 장한들을 둘러보았다.
“보아하니 이자들은 소저께 무례한 짓을 하려 한 것 같은데, 이 정도 혼이 났으면 정신을 차렸을 테니 불초를 보아서 이쯤에서 그치는 것이 어떻겠소?”
서문연상은 솔직히 청삼청년의 모습에 호감이 가기는 했으나, 아직 장한들에 대한 분노가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을 용서해 주라는 청삼청년의 말에 순간적으로 욱하는 기분이 들어 날카로운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왜 당신을 봐서 그들에게 사정을 봐줘야 한단 말이죠?”
그녀의 쌀쌀맞은 대꾸에도 청삼청년은 전혀 어색해하거나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재차 포권을 했다.
“이런, 이런…… 인사가 늦었구려. 불초는 이존휘(李尊煇)라 하오. 대대로 장안에서만 살아온 터라 소저께서 이런 일로 장안에 대한 인식이 나빠질까 걱정되어 주제넘게 끼여들었소.”
“이존휘?”
그 이름이 어딘지 모르게 귀에 익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서문연상의 눈빛이 갑자기 반짝 빛났다.
“그럼 당신이 장안제일공자(長安第一公子)라는 만상공자(萬象公子) 이존휘란 말이에요?”
“하하…… 장안제일이란 것은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억지로 붙인 것이고, 불초가 만상공자란 과분한 칭호를 받고 있는 이존휘올시다.”
청삼청년의 정체를 알고 나자 서문연상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의 전신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만상공자 이존휘는 장안 최고의 세력가인 장안대호 이세적의 외아들로, 어려서부터 문무(文武)에 기재(奇才)가 출중하여 적어도 관중(關中) 일대에서는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기개가 헌앙할 뿐 아니라 부친의 후광(後光)에도 결코 오만하지 않고 예를 잘 지켜서 주위의 칭송이 자자했다.
장안의 이씨가문(李氏家門)은 수백 년 간 대대로 내려오는 명문(名門) 중의 명문으로, 문필(文筆)로 이름난 남전(藍田)의 여씨일가(呂氏一家)와 함께 섬서성 최고의 명문세가로 명성이 높았다.
특히 당금의 가주인 이세적은 관부(官府)와도 혈연(血緣)을 맺어 그 세도가 가히 하늘을 찌를 정도여서 무림의 거대한 문파인 화산파에서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종남파가 거의 유명무실해진 상태에서 화산파가 장안에 함부로 진출하지 못한 것도 바로 이세적 때문이었다. 그 유명한 이세적의 아들인 이존휘가 인적도 별로 없는 진령의 산자락 아래에 나타난 것은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존휘는 그녀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도 전혀 어색해하는 표정이 없이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오늘 날이 너무 청명하여 태화곡으로 가던 길이었소. 태화곡의 경치는 예로부터 천하의 절경으로 알려져 있으니, 소저께서 의향이 있으시다면 불초가 그곳으로 안내해 드릴까 하오.”
서문연상은 잠시 생각을 굴려 보았다.
‘태화곡이 명승(名勝)은 명승인가 보구나. 특별히 갈 곳도 없는데 이자와 함께 다니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그녀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이존휘의 준수한 얼굴에 머물렀다. 이존휘는 온화하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미소를 띤 채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차피 나도 그곳에 가려던 참이었으니……”
이어 그녀는 텁석부리 장한을 쏘아보았다.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이 공자만 아니었으면 네놈의 수염을 모조리 뽑아 버렸을 것이다.”
여인답지 않게 우악스런 말이었으나, 그녀의 입에서 나오니 톡 쏘는 듯한 상큼한 매력이 느껴졌다. 텁석부리 장한은 연신 그녀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다른 세 명의 장한들가 함께 허겁지겁 장내를 벗어났다. 잠시 그들의 멀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던 이존휘가 낭랑한 웃음소리를 내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하하…… 소저의 기개는 남자에 못지않구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소저의 방명(芳名)을 알 수 있겠소?”
서문연상은 눈을 한차례 깜박거린 다음 입을 열었다.
“나는 선상연(宣霜燕)이라고 해요.”
선(宣)이라는 성(姓)은 그녀의 어머니의 성이었고, 상연이란 이름은 자신의 본명을 뒤바꾼 것이었다. 그녀가 가명(假名)을 말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지 이존휘는 그녀의 이름을 몇 차례 나직하게 되뇌더니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상연이라…… 정말 소저의 모습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오.”
“아까 그자들도 태화곡이 제법 볼 만하다고 하더군요. 그곳에 무슨 절이 있다고 하던데……”
“취미사라는 절이 있소.”
“그 절에 가 보고 싶어요.”
“알겠소. 나를 따라오시오.”
두 사람은 곧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늦은 오후. 진산월은 유소응을 조용히 불렀다.
“오늘부터 본파의 무공을 가르쳐 주겠다.”
진산월의 말에 유소응은 흥분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항상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유소응이었지만,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무공을 배우게 된다고 생각하자 기쁜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무공의 기본은 내공심법(內功心法)이다. 먼저 운기토납법(運氣吐納法)을 배운 후, 그 다음에 본파의 가장 기본이 되는 태을신공을 익히도록 해라.”
진산월은 내공심법의 근간(根幹)이 되는 운기토납법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는 남들이 볼 때 불필요해 보이는 기본 원리까지 아주 세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는데, 그것은 어떤 무공이든 기초가 잘 닦여야 대성(大成)할 수 있다는 평소의 지론(持論)에 따른 것이었다. 덕분에 잔뜩 기대했던 유소응이 첫날에 배운 것은 달랑 운기토납법의 기초 원리와 몇 차례의 간단한 시범뿐이었다.
“오늘부터 아침에 한 시진씩 운기토납을 하도록 해라.”
“예.”
유소응은 진산월이 그 말만을 하고 나가려 하자 머뭇거리다 용기를 내어 물었다.
“태을신공은 언제부터 배울 수 있나요?”
“네가 운기토납법에 익숙해진 다음이다.”
“그게 언제쯤이나 될까요?”
“빠르면 열흘, 늦으면 한 달이 걸릴지도 모른다.”
유소응의 얼굴에 한 줄기 실망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나 오래요?”
진산월은 묵묵히 그를 내려보고 있다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오래가 아니지. 오늘 배운 운기토납법은 앞으로도 계속 연마해야 한다. 최소한 십년 이상 공(功)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태을신공도 마찬가지다. 몇 년 익힌 정도로는 제대로 써먹을 수도 없다.”
유소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산월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무공이란 정직한 것이다. 네가 정성을 기울인 만큼 과실을 얻을 수 있다. 본파의 무공의 기조가 되는 태을신공과 천하삼십육검(天河三十六劍), 장괘장권 구식(長掛掌拳九式)들은 모두 오랜 동안의 피나는 각고(刻苦) 없이는 절정에 이를 수 없는 것들이다. 네가 본파의 제자로 입문(入門)한 이상 대성(大成)하고 싶다면 결코 일석이조(一石二鳥)에 많은 것을 이루려고 해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유소응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진산월은 그의 작은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조급함은 처음 무공을 익히는 사람에게는 가장 큰 함정이다. 너는 그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진산월은 유소응을 방에 두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유난히 짙은 노을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진산월은 잠시 후원의 뜰 한쪽에 선 채로 점점 번져 가는 붉은 노을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그때 그의 얼굴에는 무어라고 표현하기 힘든 쓸쓸한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문득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 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요?”
진산월은 돌아보지 않아도 그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과연, 어두운 그늘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방취아였다. 그녀는 짙은 남색 치마에 자주색 저고리를 입고 있었으며, 머리는 궁형(宮型)으로 틀어 올렸다. 그래서인지 새하얀 얼굴이 더욱 돋보였고, 화사하면서도 요염한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
진산월은 한동안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고 있더니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취아도 어느새 여인(女人)이 되었구나……”
이 소리를 들었는지 방취아는 흰자위가 드러나도록 그를 흘겨보았다.
“그걸 이제 아셨어요? 장문사형은 항상 나를 어리게 보았지만, 나는 예전부터 여인이었어요.”
삼 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은 게 아니었다. 그 세월은 풋내나는 어린 소녀를 성숙한 여인으로 변모시킬 수도 있고, 멀쩡한 문파를 풍비박산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평범한 고수를 강호무림의 최절정고수로 만들 수도 있었다.
방취아는 사락사락하는 옷자락 스치는 소리를 내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와 함께 사람의 마음을 취하게 하는 듯한 야릇한 향기가 풍겨 왔다.
“대답해 봐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진산월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녀에게서 다시 붉은 노을로 시선을 돌렸다. 방취아는 그의 칼자국이 나 있는 수척한 뺨과 술에 취한 듯 붉은 빛으로 어른거리는 그의 깊은 눈을 바라보고 있다가 속삭이는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사저를 생각하고 있었죠? 장문사형의 눈빛만 봐도 난 다 알 수 있다고요.”
진산월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취아도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왠지 그에게 너무 가혹한 질문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상념에 잠겨 있었다. 진산월의 두 눈은 더욱 깊게 가라앉았고, 방취아의 얼굴에도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침울함이 감돌았다. 그러다 그녀는 마음속의 우울함을 떨쳐버리려는 듯 얼굴을 활짝 피며 특유의 활기찬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장문사형이 가르쳐 준 천둔장법은 정말 재미있어요. 그 장법은 익히면 익힐수록 색다른 묘용(妙用)이 있더군요.”
그녀가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리자 진산월도 그제서야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천둔장법은 빠른 가운데 현기(玄機)를 담고 있어서 사매에게는 아주 적합한 무공이지. 잘 익혀 두면 나중에 요긴하게 쓸데가 있을 거야.”
“걱정 말아요. 그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완전히 터득하고 말 테니까. 그런데 소 사형이 아까부터 익히고 있던 건 무슨 검법이에요? 처음 보는 것이던데…”
“지산의 검법을 보았느냐?”
“그럼요. 오후에 사형에게 불려 나갔다 돌아오더니 그때부터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후원의 구석에 처박혀 미친 듯이 검만 휘두르고 있더군요. 그렇게 검로(劍路)가 변화무쌍한 검법은 처음 보았어요? 그것도 본파의 검법이에요?”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렇다. 낙하구구검이라는 것으로, 무궁한 변화 속에 예리함을 갖추고 있어서 한쪽 팔이 불편한 지산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익히게 한 것이다.”
방취아의 봉목(鳳目)이 크게 뜨여졌다.
“낙하구구검이라면…… 혹시 오래 전에 실전(失傳) 되었다던 삼락검 중 하나가 아닌가요?”
“알고 있었구나. 우연한 기회에 연(緣)이 닿아 입수할 수 있었다.”
방취아는 호기심과 흥분이 뒤섞인 얼굴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장문사형은 그동안 본파의 실전되었던 절기들을 찾아다녔던 거로군요. 내 말이 맞죠?”
진산월은 그 말에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고 돌연 엉뚱한 말을 했다.
“앞으로 닷새가 중요하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초가보에서는 대왕루에 모습을 드러냈던 지산의 행방을 찾으려고 대대적인 수색 작업을 할 것이다. 너희들이 일단 종남산에서 내려온 이상 아직 장안을 벗어나지는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객잔이란 객잔은 모두 뒤지고 다니겠지.”
방취아의 안색이 홱 변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곳도 그다지 안전하지 않겠네요.”
“그래서 정산에게 이 근처에 조용하고 남의 눈에 잘 띄지 않을 만한 민가(民家)를 구하라고 했다. 너와 지산은 소응을 데리고 그 민가로 가 있어라.”
“장문사형은요?”
“나는 따로 할 일이 있다.”
“그게 무언데요?”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일방이나 계성, 중산은 아직 생사(生死)를 모른다. 그 말은 곧 그들이 아직 살아 있을 확률이 절반이나 된다는 뜻이지. 그러니 그들 중 누군가가 살아 있다면 이번 대왕루의 소동을 듣지 못했을 리 없다.”
“아……!”
“종남파의 생존자가 대왕루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었다면 그들은 반드시 대왕루로 와서 사실을 확인하려 할 것이다.”
방취아는 참지 못하고 뾰쪽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장문사형은 대왕루에서 그들을 기다릴 생각이군요!”
“그렇다.”
“그건 너무 위험한 행동이에요.”
“지금의 우리에게 위험하지 않은 일이란 없다. 그리고 그 일은 위험을 무릅쓸 만한 가치가 있다.”
방취아는 여러 차례 안색이 변하더니 이윽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어 장문사형이 그들에게 발각 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진산월은 부드러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내 행색은 너도 알다시피 예전과 너무 많이 변해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내 한 몸을 지킬 자신이 있다.”
방취아는 수심(愁心)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올려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억지로 미소지었다.
“장문사형은 또 고집을 부리는군요. 그 고집을 누가 꺾겠어요?”
갑자기 생각난 듯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닷새예요? 본산을 공격하는 건 열흘 후가 될 거라고 하셨잖아요.”
“오 일(五日)이면 충분하다. 그동안에 아무도 안 나타난다면 그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종남산으로 이동해서 미리 거점(據點)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더 기다릴 시간도 없다.”
방취아는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사형 말씀이 맞겠군요. 이 오 일이 우리에게는 정말 중요한 오 일이 되겠네요.”
진산월은 담담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비단 중요한 뿐 아니라 길고도 지루한 시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