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9권 풍운기혜(風雲起兮)편 : 5화
제82장. 평안객잔(平安客棧)
오늘 평안객잔은 결코 평안하지 않았다. 평상시라면 인적이 끊기고 사위(四圍)가 고요한 적막 속에 잠겨 있을 텐데, 오늘은 어찌된 일인지 늦은 시간까지 손님이 끊이지 않고 계속 몰려들었다. 지금도 전칠(田七)이 막 한 떼의 손님을 방으로 안내한 후 채 숨을 돌리기도 전에 다시 객잔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전칠은 평안객잔에서 십 년도 넘게 점원 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오늘같이 손님이 많이 밀려든 날은 아직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손님들이란 것이 하나같이 험상궂게 생기고 병장기를 휴대한 무림인들이어서 공연히 가슴이 조마조마해지고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제대로 잠자기는 틀린 것 같구나.”
전칠은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 들어온 손님은 세 명이었는데, 하나같이 무릎까지 오는 검은색 피풍의(避風衣)를 두르고 머리에는 죽립(竹笠)을 깊게 눌러썼으며, 손에는 길다란 장검을 들고 있었다.
“조용한 방을 주게.”
그들 중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전칠은 죽립 사이로 번뜩이는 사내의 눈빛이 너무 매서워서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따…… 따라오십시오.”
전칠은 세 사내를 후원의 한쪽으로 안내했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와하하!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나 벽력태세(霹靂太歲) 마진광(馬振光)이 오늘 진하게 회포를 푸는구나.”
“그러게 말일세. 자네와 나 태행일객(太行一客) 황평(黃平)이 강동(江東) 일대에서 악명이 자자한 하삭삼귀(河朔三鬼)를 제거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칠 년의 세월이 흘렀군 그래.”
세 명의 사내 중 체구가 가장 왜소한 사내가 냉소를 날렸다.
“아주 자기가 누구인지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놈들이로군. 저런 놈들을 볼 수 없는 곳으로 안내해 주게.”
전칠은 어색한 웃음을 날렸다.
“오늘은 이해해 주셔야겠습니다. 오늘따라 손님들이 너무 많이 오셔서 남은 방이 몇 개 되지 않습니다.”
전칠이 그들을 데려간 곳은 후원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에 있는 별채였다.
“이곳은 비록 그다지 넓진 않지만 다른 곳과 제법 떨어져 있어서 그래도 조용하게 지내실 수 있을 겁니다. 이곳보다 큰 방이 있기는 하지만……”
우두머리 죽립인이 그의 입을 막았다.
“여기면 됐네. 우리는 아침 일찍 떠날 테니 자네는 우리에게 더 신경 쓸 필요 없네.”
“술이라도 갖다 드릴까요?”
“됐네. 그만 가 보게.”
우두머리 죽립인은 요금을 계산하고는 전칠이 나가자마자 방문을 걸어 잠갔다. 전칠은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쓴웃음을 머금었다.
“오늘은 정말 이상한 손님들이 많네. 남자들끼리 무슨 할 얘기가 있다고 저렇게 꽁꽁 틀어박혀 있으려고 하는지……”
그때 다시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이고, 이거 난리로군, 난리야.”
전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황급히 대문으로 달려갔다. 이번 손님도 세 사람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여자들이었다. 하나같이 목 아래까지 내려오는 면사(面紗)를 쓰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으나, 전칠은 오랫동안의 경험으로 그들이 모두 빼어난 미녀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들의 체구는 늘씬했고, 몸에서는 말로 형용키 어려운 그윽한 향기가 풍겨나오고 있었으며, 면사 사이로 내비치는 눈빛은 사람의 넋을 빼놓을 듯했다.
“조용하고 깨끗한 방을 주세요.”
세 미녀 중 가장 키가 큰 여인이 소곤대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음성을 듣자 전칠은 당장에라도 뼛골이 녹아 내리는 것만 같아서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마침 딱 맞는 방이 있습니다.”
세 명의 여인은 미끄러지듯 조용히 전칠을 따라 움직였다. 전칠은 그녀들의 몸에서 나오는 향기에 취해서 마치 꿈속을 거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안내한 곳은 두 개의 방이 연결되어 있는 후원의 안채 중 하나로, 이곳은 단골이나 귀빈이 갑작스럽게 찾아올 때를 대비해서 예비로 남겨놓은 곳으로, 이런 미녀들이 아니었다면 전칠은 절대로 안내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에 드십니까?”
처음에 입을 열었던 여인이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더니 예의 그윽한 음성으로 말했다.
“방이 두 개뿐이어서 아쉽긴 하지만 그런대로 쓸 만하군요.”
“헤헤…… 간단한 요기라도 하시겠습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따로 부를 테니 우리가 부르기 전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못하도록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전칠은 마음 같아서는 계속 그녀들과 함께 방에 있고 싶었으나 떼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움직여 방을 나와야만 했다.
“휴우…… 면사 속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봤으면 소원이 없겠네.”
전칠은 지극히 남자다운 생각을 하며 혼자 히죽거렸다. 하나 손님의 행렬은 아직도 끝난 게 아니었다.
탕탕!
누군가가 요란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전칠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빈방도 없는데 큰일이군.”
이번에도 역시 세 사람이었고, 모두 남자였다. 두 명의 청년과 한 명의 중년인. 그들은 이제서야 겨우 장안에 도착해 숙소를 찾으려는 조일평과 풍시헌, 그리고 남호였다. 남호는 전칠이 무어라고 할 사이도 없이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며 후원 쪽으로 걸어갔다.
“휴우…… 피곤하군. 깨끗한 방 세 개하고 간단한 술상이나 봐주게.”
전칠은 우거지상을 하며 그의 소매를 잡았다.
“방이 없는데요, 손님.”
남호는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흘겨보았다.
“이 객잔이 이 일대에서 제일 큰 곳인 줄 내가 모르는 줄 아나? 웃돈을 바라는 모양인데, 그거야 자네가 하는 행동을 봐서 마음이 내켜야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그게 아닙니다. 오늘따라 손님들이 많이 오셔서 정말로 방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전칠의 표정이 절실한 것을 본 남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비상시에 쓰려고 남겨 둔 방이 있지 않나? 수고비는 섭섭지 않게 줄 테니 그 방으로 안내하게.”
“그 방도 조금 전에 나갔습니다.”
남호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정말 이러긴가? 오늘이 무슨 명절도 아니고 장안에 볼 만한 구경거리가 벌어진 것도 아닌데 평안객잔에 빈방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의 언성이 점차로 높아지자 전칠이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아이고, 나으리.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지금 방이 깊어서 대부분의 손님들이 주무시고 계십니다.”
“이거 정말 너무하는군. 내가 이래봬도 이 객잔을 내 집 문턱 드나들 듯 드나든 사람일세. 그런데 방 하나 못 구하고 그냥 간대서야 말이 되는가?”
전칠은 아무리 보아도 남호의 모습이 별로 눈에 익지 않자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어쩌다 뜨내기로 한두 번 들렸겠지. 별걸 다 가지고 생색을 내는군.’
그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남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물론 알구말굽쇼. 방 세 개는 힘들지만 세 분이 쉴 만한 큰 방 하나는 구할 수 있을 듯하니 제발 목소리 좀 낮춰 주십시오.”
“남자 셋이 한 방에서 자라는 소린가? 그게 말이 되는가?”
전칠은 아예 울상을 하며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아이고, 손님. 제발 제 사정도 좀 봐주십시오. 방이 있다면 제가 왜 안 드리겠습니까? 하지만 오늘은 정말 남은 방이 달랑 하나밖에는 없습니다. 그곳이 싫으시다면 별 수 없이 다른 곳으로 가셔야겠습니다.”
전칠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남호가 난감한 표정으로 조일평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자의 말이 거짓은 아닌 듯한데 큰일일세. 지금 이 시각에 다른 객잔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조일평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괜찮으니 그 방으로 하는 게 좋겠소.”
남호는 히죽 웃었다.
“역시 그게 낫겠지? 어서 방으로 안내하게. 술이나 한잔하고 자야겠네.”
전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전칠이 안내한 방은 제법 커서 칠팔 명은 족히 묵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침상도 네 개나 있어서 오히려 자리가 남을 정도였다. 남호는 방안을 둘러보고는 만족한 듯 미소지었다.
“하룻밤 묵고 가기에는 괜찮군. 맛난 안주 몇 가지와 술 두 병만 가져오게.”
“알겠습니다.”
전칠이 밖으로 나가자 그제서야 남호는 한쪽 침상에 가서 벌렁 드러누웠다.
“오늘은 별로 돌아다닌 데도 없는데 피곤하군.”
조일평과 풍시헌도 각기 다른 침대에 가서 앉았다. 남호는 침상에 비스듬히 누운 채 그들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들은 이상한 생각이 안 드나?”
풍시헌은 그가 또 무슨 헛소리를 하나 하는 표정이었고, 조일평은 묵묵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호는 더욱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듯 말했다.
“왜 장안 일대의 공기가 흉흉해지며 주루란 주루에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는지 말일세. 게다가 그들 중 대부분은 외지(外地)에서 온 무림인들이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 아닌가?”
조일평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우리도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오.”
“물론 그렇지만 그 사람들이 모두 자네처럼 헤어진 친구를 만나기 위해 왔을 리는 없지 않겠나? 게다가 이 평안객잔에 빈 방이 없다는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일세.”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단 말이오?”
“물론이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왜 힘들게 자네들을 앉혀 두고 이런 소리를 지껄이겠나?”
남호는 자신이 말해 놓고도 우스운지 싱겁게 웃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요즘 장안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풍운(風雲)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는 사실은 알겠지? 그건 모두 요즘 들어 세력을 무섭게 확장한 초가보가 오랫동안 섬서무림을 지배해 왔던 화산파와 격돌할 거라는 소문 때문일세.”
“그건 알고 있소.”
“그런데 최근에 와서 상황이 조금 더 긴박해졌단 말일세. 며칠 후에 초가보에서는 강북삼보의 회동이 열리는데, 그 회동 직후 초가보가 바로 화산파에 공개적으로 도전장을 내밀 거라는 소문이 자자하네. 화산파는 화산파대로 이런 초가보를 경계하기 위해서 장안의 유력한 가문들과 친분을 맺고 문하 제자들을 계속 파견하고 있는 실정일세.”
“화산파가 친분을 맺었다는 가문이 어디요?”
“유화상단과 대응표국(大鷹票局)과는 이미 혼인을 해서 혈연관계가 되었고, 요즘에는 장안대호 이세적의 마음을 끌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모양일세.”
유화상단은 섬서성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상인가문(商人家門)이었고, 대응표국은 장안에 있는 열다섯 개의 표국 중에서도 가장 큰 표국이었다. 거기에 이세적까지 가세한다면 장안 일대는 친(親) 화산파가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세적은 초가보에서도 계속 추파를 보내고 있는 실정이라 아직 어느 쪽도 편들지 않고 있네. 그는 중립(中立)을 지키겠닥 했지만, 상황이 급박해지면 둘 중 어느 한곳으로 기울지 않을 수 없을 걸세.”
남호는 목이 타는지 옆에 있는 탁자에서 차를 따라 마신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이미 멸문(滅門)된 것으로 알려진 종남파의 제자가 나타나 초가보가 관장하는 주루에서 소동을 일으켰다고 하네. 몇몇 사람들은 종남파가 다시 재기하려는 신호라고 떠들고 있는데, 별로 신빙성은 없어 보이네.”
조일평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다만 풍시헌이 무언가 말하고 싶어 좀이 쑤시는 모습이었으나, 남호가 계속 입을 열자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최근에 장안 일대에 무림인들이 모여드는 것은 두 문파의 대결을 보기 위해서도 있지만, 초가보에서 거금(巨金)을 들여 대대적으로 고수들을 포섭하고 있다는 소문 때문일세. 한마디로 자신의 값어치를 최대한 끌어올려 팔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셈이지. 지금 장안은 용호(龍虎)가 꿈틀거리고 살기가 넘쳐흘러서 가히 폭발 직전의 화약고라고 할 수 있네. 무언가 사소한 일이라도 벌어져 불똥이 튀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 중원 전체를 휩쓸어 버릴걸세.”
그때 조일평이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불똥은 이미 일어났소. 그것도 아주 강력한 것으로 말이오.”
남호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때 마침 전칠이 술상을 가지고 왔다. 전칠이 몇 가지 안주와 술병을 놓고 물러나자 남호는 술병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조일평을 향해 채근했다.
“무얼 알고 있나? 이 장안에서 나도 모르는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조일평은 자신들이 오후에 취미사에서 본 일을 말해 주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남호의 표정은 점점 심각하게 굳어지더니 종내에는 무거운 신음을 토하고 말았다.
“으음…… 그건 단순한 불똥 정도가 아니라 아예 커다란 불기둥이 솟구친 셈이로군. 이런 시기에 화산파의 장로가 의문의 살해를 당하다니 말일세.”
“더욱 큰 문제는 그 혈겁이 벌어진 장소가 취미사라는 것이오.”
“취미사? 취미사라면 역사가 제법 오래되고 명소(名所)로 이름이 나 있기는 했지만 무림과 무슨 특별한 연관이 있는 곳은 아닌데……”
“물론 취미사 자체는 그냥 평범한 여느 사찰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오. 하지만 취미사의 당대(當代) 주지는 조금 특이한 인물이오.”
남호가 채 무어라고 묻기도 전에 아까부터 입을 열 기회를 노리고 있던 풍시헌이 재빨리 끼여들었다.
“그러고 보니 사형께선 일전에도 그 주지스님이 특별한 신분을 가진 사람처럼 말씀하셨는데, 그가 대체 누구입니까?”
“그분은 일곱 살 때 불문(佛門)에 귀의하여 평생을 불경(佛經)을 연구하는 데 보내셨다. 무공과는 담을 쌓았지만 경전을 독해하는 데는 누구보다 탁월하셨지. 이십 년 전에 오랜 친우의 부탁으로 취미사를 맡게 되었는데, 그후 한 번도 취미사 밖을 나가 본 일이 없으셨다.”
“그러니까 그분이 누구신데요?”
“굉지(宏志), 뜻이 높고 깊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
풍시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굉지? 그런 이름의 고승(高僧)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요.”
하나 그때 남호가 갑자기 눈을 빛내며 급히 물었다.
“강호에서 굉자 배(宏字輩)를 쓰는 곳은 오직 한 군데 뿐인데, 그분이 취미사에 오시기 전에 계셨던 곳이 혹시 소림사가 아닌가?”
조일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분은 소림사의 전대(前代) 방장(方丈)이셨던 굉요대선사의 사제(師弟) 이셨소.”
“아!”
풍시헌과 남호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탄성을 터뜨렸다. 장안에서도 구석에 처박힌 취미사의 주지가 살아생전에는 무림제일생불(武林 第一生佛)로 명성이 드높았던 굉요대선사와 같은 항렬이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둘 중 그래도 빨리 정신을 수습한 사람은 남호였다.
“자네 말대로라면 확실히 소요검객 사익의 죽음보다 더욱 파장이 클걸세. 소림사에서 굉자 배라면 당대의 장문인인 대방선사의 사숙이란 말인데, 자칫하면 소림사까지 이번 일에 전면적으로 나서게 될지도 모르겠군.”
“굉지선사는 취미사로 오신 후 소림사를 찾아간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소림사에서는 일 년에 몇 번씩 사람을 보내 안부인사를 하곤 했었소. 그러니 그분의 죽음이 소림사에 알려지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오.”
“흉수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굉지선사의 정체를 알고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라면 그 의도가 심히 궁금하군.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혈겁을 저지른 것일까?”
그것은 남호뿐 아니라 조일평과 풍시헌도 같이 느끼고 있는 의문이었다. 대체 흉수는 누구인가? 그는 무엇 때문에 그런 참혹한 짓을 저지른 것일까? 그리고 이 일의 여파는 과연 어디까지 퍼지게 될 것인가? 남호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픈지 평상시의 모습답지 않게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조일평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자네는 용케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군. 취미사의 주지가 설마 굉요 대선사의 사제일 줄은 소식통이 밝다고 자부하는 나도 전혀 모르고 있었던 일인데……”
“별로 대단할 건 없소. 굉지선사에게 취미사의 주지 자리를 부탁한 사람이 바로 내 사부님이셨소.”
“엥? 그런 거였군.”
“굉지선사는 평소에 교우(交友) 관계가 거의 없어서 가까운 벗이라고는 사부님이 거의 유일했소.”
풍시헌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볼멘 소리를 했다.
“사형, 그런데 왜 나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지요?”
“두 분이 비록 벗이라고 해도 가끔 서신(書信) 왕래를 하고 몇 년에 한 번 만나는 사이였다. 나도 어렸을 때 사부님을 따라 굉지선사를 딱 한 번 뵌 일이 있을 뿐이니 네가 모르는 게 당연하지.”
남호는 가슴이 답답한지 옆에 있던 술병에서 술을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크흐, 좋군. 복잡한 생각은 내일 하면 되는 일이고, 오늘은 술이나 마시세. 소림과 화산이 지지고 볶든 난리를 치든 우리와는 상관도 없는 일이니 우리가 그들 대신 고민할 일이 아니지 않나?”
하나 그의 말은 틀린 것이었다. 세 사람이 막 첫 번째 술잔을 돌리려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르렸다.
똑똑…
남호는 술병을 든 채로 물었다.
“누구요?”
방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며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남호는 들어온 사람들이 곰보중년인과 아리따운 여인인 것을 보고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당신들은……”
곰보중년인이 번갯불 같은 눈으로 세 사람을 훑어보더니 냉랭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화산파의 일대제자인 천개방이라 하오. 세 분 중 마검 조일평이 누구요?”
조일평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요.”
천개방의 시선이 못박이듯 그에게 고정되었다.
“야밤에 불쑥 찾아온 점을 사과드리겠소. 우리가 찾아온 이유는 아시리라 믿소만……”
조일평의 태도는 의외로 담담했다.
“언젠간 당신들이 나를 찾으리라 생각했었지.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미처 몰랐소.”
“사안(事案)이 워낙 중대하여 본파로도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소. 본파의 고수 이십 명이 장안 일대를 이 잡듯이 뒤진 끝에 귀하를 찾아낸 거요.”
화산파가 이렇듯 총력을 기울여 조일평을 찾아온 것은 물론 소요검객 사익의 죽음에 대한 내막을 알기 위해서였다. 하나 조일평도 그것에 대해서는 그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남호는 조일평의 처지가 곤란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산파에서 이렇듯 다급하게 찾아온 이상 조일평의 말 한마디만으로 순순히 물러날 리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천개방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호젓한 곳에 귀하를 모실 준비를 해두었소. 같이 가 주셨으면 하오.”
조일평의 입꼬리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나를 심문(審問)할 장소를 구해 두었단 말이지? 그래서 나보고 순순히 따라 오라는 거요?”
천개방의 얼굴은 철갑을 씌운 듯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굳이 숨기고 싶은 생각은 없소. 그곳에는 귀하를 꼭 만나고 싶어하는 분이 계시오. 귀하가 그분께 모든 일을 사실대로 밝힌다면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요.”
“내가 말한 것을 그가 납득하지 못한다면?”
“귀하가 모든 일을 숨기지 않고 이야기한다면 그분이 납득하지 못할 리가 없소.”
“만일 그렇지 못하면?”
“그건 귀하의 상상에 맡기겠소.”
조일평의 입꼬리에 걸려 있는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그와 함께 그의 얼굴은 냉막하고 차갑게 변해 있었다.
“결국 내가 사실대로 말하든 그렇지 않든 그곳에서 나를 기다린다는 자가 만족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도 없다는 말이로군? 정말 지극히 화산파다운 방식이야.”
천개방의 음성은 칼로 자르듯 단호했다.
“이제 선택하시오. 나를 따라가겠소, 아니면 이곳에 남겠소?”
“나는 굳이 당신을 따라갈 필요성을 못 느끼겠소. 정 나를 만나고 싶거든 그자에게 직접 오라고 하시오.”
천개방의 눈빛이 눈에 띄게 싸늘해졌다.
“귀하가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오.”
주위가 삽시간에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여 버렸다. 남호와 풍시헌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고, 천개방의 뒤에 있던 백수함도 검의 손잡이를 움켜쥔 채 언제든지 출수(出手)할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천개방은 조일평을 뚫어지게 응시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조일평은 양손을 자연스레 늘어뜨린 채 다소 방심한 듯한 자세였다. 그런데도 중인들은 전신의 모공(毛孔)이 곤두서는 듯한 살벌함을 느껴야 했다. 일촉즉발의 순간, 갑자기 남호가 들고 있던 술병을 세차게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탕!
“언제부터 강호(江湖)가 술 한잔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는지 모르겠군.”
금시라도 검광이 난무할 것 같던 장내의 분위기가 갑자기 일변했다. 천개방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고, 심지어 조일평조차도 두 눈에 기광을 번뜩인 채 남호를 주시했다. 남호가 술병을 내려놓는 동작 자체는 단순한 것이었으나, 그 시기가 절묘하여 천개방과 조일평의 대결 흐름을 교묘하게 깨뜨려 버렸던 것이다. 아마 그가 술병을 내려놓는 시기가 조금만 늦었다면 둘 중 누군가가 출수했을 것이고, 조금만 빨랐다면 오히려 그 자신이 공격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일단 팽팽한 긴장감이 끊어지자 오히려 분위기는 더욱 맥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남호는 천개방을 향해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예로부터 화산파는 절대 제자로 하여금 함부로 검을 뽑지 못하게 철저히 가르친다고 들었소. 아직 조 소협이 흉수라는 증거도 없는데 일방적으로 그를 몰아붙인다는 것은 대(大) 화산파 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오.”
천개방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귀하는 누구시오?”
“나는 남호라고 하는 무명소졸이오. 그보다 내게 한 가지 제안이 있는데 들어 보시겠소?”
천개방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당금 무림에서 그런 이름의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 해도 조금 전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함부로 무시하기에는 왠지 마음에 걸리는 인물이었다.
“말해 보시오.”
“오늘은 밤이 너무 깊었고 이곳은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객잔이니, 중요한 일을 처리하기에는 장소나 시기가 모두 좋지 않소. 게다가 귀파에서도 뜻밖의 일에 마음을 가라 앉히지 못해 자칫 쓸데없는 시비를 일으킬 우려가 있소. 그러니 추후에 따로 장소를 정해 만나는 것이 좋을 듯 하오.”
“우리보고 그냥 돌아가란 말이오?”
남호의 얼굴에 특유의 싱거운 웃음이 떠올랐다.
“누가 그냥 돌아가라고 했소? 약속을 정하고 가라는 소리지.”
천개방은 그의 의중을 탐색하려는 듯 시선을 그에게 고정시킨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 따가운 시선을 받고도 남호는 전혀 불안해하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해 보시오. 지금 여기서 실랑이를 벌여 보았자 서로 감정만 상할 뿐, 사태를 해결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소. 그러니 내일이나 모레쯤 서로 만나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다면 상대할 사람은 줄어들고 우리편은 늘게 되는 거요.”
천개방은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마검 조일평의 명성은 그도 익히 들어 왔던 터라 그와 검을 겨룬다고 해도 이길 자신이 별로 없었다. 설사 조일평을 강제로 끌고 간다고 해도 그가 순순히 입을 열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천개방은 슬쩍 조일평을 바라보았다.
“귀하의 생각은 어떻소?”
조일평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모레 신시(申時)에 대안탑(大雁塔)으로 가겠소.”
“자은사(慈恩寺)의 대안탑 말이오?”
“그렇소.”
천개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곳에서 귀하를 기다리겠소.”
이어 그에게 가볍게 포권을 하더니 이내 휑하니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나가는 것이었다. 백수함은 그의 태도를 미처 예상치 못했는지 당혹한 표정이 역력했다.
“천 사형……”
“그의 신분으로 허언(虛言)을 할 리가 없으니 우리는 이만 가자.”
“하지만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때는 누가 흉수인지 보다 자세히 알 수 있겠지.”
천개방의 말을 듣자 백수함은 그제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 순순히 그의 뒤를 따라 방을 벗어났다. 두 사람의 신형이 사라지자 그제서야 남호는 조일평을 향해 빙긋 미소지었다.
“내 체면을 살려줘서 고맙네.”
조일평이 거절하지 않고 자신의 제안을 따라준 것에 대한 감사였다.
“그건 오히려 내가 할 말이오. 덕분에 귀찮은 시비를 덜 수 있게 되었소.”
“그렇게 될지는 모레 가 봐야 알겠지. 그나저나 하고맣은 장소 중에 왜 하필이면 대안탑을 골랐나?”
“대안탑이 마음에 들지 않소?”
남호의 얼굴에 그답지 않은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게 아니라, 자은사의 주지와는 예전에 얼굴을 붉힐 만한 일이 있어서 말일세. 그래서 그 뒤로는 가급적 그쪽으로 가지 않으려고 한다네.”
조일평의 얼굴에 모처럼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 참 공교롭군. 마침 자은사의 주지도 사부님의 몇 안 되는 벗들 중 한 분이오. 그러니 이번 기회에 내가 두 분을 화해시켜 드리겠소.”
남호의 얼굴이 싹 바뀌었다.
“그건 안 되네. 그를 만나느니 나는 차라리 자네들과 헤어져 이대로 훌쩍 떠나버리고 말겠네.”
남호가 너무 정색을 했기에 조일평은 내심 의혹을 느꼈으나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알겠소. 그럼 그분은 우리들만 만나고 오겠소.”
남호는 자신의 반응이 조금 지나쳤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오해하지는 말게. 무슨 죽을 죄를 저질러서 도망다니는 건 아니니까. 다만 나는 불편한 자리에 있는 건 아주 질색이라서 말일세.”
“이해하오.”
남호는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한 가지는 확실해졌군.”
“그게 무엇이오?”
“이틀 후에 자네가 화산파의 고수들을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될 거라는 것이지.”
조일평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호는 그의 표정을 가만히 살펴보고 있다가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니 이틀 동안 자네는 무슨 수를 쓰든 흉수에 대한 단서를 잡아야 한단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