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9권 풍운기혜(風雲起兮)편 : 12화
제89장. 천하무궁(天河無窮)
대왕루에 하나둘씩 등불이 내걸렸다. 주위가 점차로 어둑어둑해지면서 저녁식사를 하려는 사람들로 대왕루는 초만원을 이루었다. 주루 안이 장터처럼 소란스러운 가운데 한쪽 구석에 앉아서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진산월이었다.
그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소년 방화를 소지산과 방취아가 새로 마련한 거처에 데려다 놓고는 다시 대왕루를 찾아온 것이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몇 가지 요리와 술 한 병을 시켜 놓고 앉아 있었지만, 무한정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벌써부터 점소이 하나가 한 시진째 죽치고 앉아 있는 그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진산월은 앞으로 반시진만 더 기다리자고 생각했다.
벌써 이틀이 물처럼 지나갔다. 진산월은 초조해지지 말자고…… 굳게 다짐했지만 점차로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방취아에게는 오 일이라고 했지만, 그는 내심 내일까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생존자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방, 계성…… 너희들은 어디 있는 거냐? 중산, 당신도 변을 당했단 말인가?’
술잔을 내려다보니 그 안에 우울한 눈빛의 사나이가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아내 흔들려서 낙일방으로도 보였고, 응계성으로도 보였다. 진산월은 천천히 그 술잔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마치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돌아오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때 주루의 입구에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진산월은 고개를 돌려 들어온 사람을 보았다. 이내 그의 얼굴에 엷은 실망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들어온 사람은 뚱뚱한 화복(華服)중년인이었다. 어찌나 살이 쪘던지 제법 널따란 주루의 입구각 그 한 사람으로 인해 거의 가로막히는 것 같았다. 키는 일반 사람과 비슷했는데, 오직 옆으로만 살이 쪄서 더욱 뚱뚱해 보였다.
게다가 턱밑으로는 어울리지 않게 세 가닥의 염소수염을 기르고 있어서 왠지 우스꽝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뚱뚱보 중년인은 주루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울상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손님이 가장 많을 때여서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침 지나가던 점소이 하나가 그에게 다가왔다.
“합석이라도 하시겠습니까?”
“아쉬운 대로 그렇게라도 해야겠네. 가급적이며 탁자가 넓은 곳으로 안내해 주게.”
점소이가 사람들 사이를 뚫고 그를 데리고 간 곳은 마침 진산월이 앉아 있는 자리였다.
“손님, 합석을 해주셔야겠습니다.”
진산월은 그 점소이가 조금 전에 못마땅한 눈으로 자신을 흘겨보고 간 자임을 알아보았다. 그래서인지 점소이의 표정은 합석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투였다.
“그렇게 하게.”
진산월이 고개를 끄덕이자 점소이는 뚱뚱보 중년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이 자리는 비록 구석에 있지만, 탁자가 넓어서 손님이 앉으시기에는 불편함이 없을 겁니다. 무얼 드시겠습니까?”
뚱뚱보 중년인은 미리 생각해 놓은 것이 있는지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우선 잘 구운 닭 세 마리만 가져다 주게. 그리고 생선요리 두 가지와 돼지고기 튀김 세 접시, 잉어탕도 가져오게. 참, 만두 스무 개하고 기름국수도 잊지 말게. 술은 필요 없네.”
점소이는 뚱뚱보 중년인의 엄청난 주문에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속으로 부지런히 주문을 되뇌며 주방 쪽으로 걸아갔다.
그제서야 뚱뚱보 중년인은 안심한 듯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더니 문득 진산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합석시켜 주어서 고맙네.”
“어차피 넓은 탁자를 혼자 차지하고 있기 미안하던 참이었소.”
뚱뚱보 중년인은 토실토실한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나는 봉가(鳳家)이고 당양(當陽) 출신일세. 자네는?”
“진가(陳家)이고, 고향은 보계요.”
“좋은 곳에서 왔군. 이곳에 온 지는 얼마나 됐나?”
“십 년쯤 되오.”
“오래됐군. 나는 오 년밖에 안 되었네.”
“오 년도 짧지는 않은 세월이오.”
“물론 그렇지. 하지만 뒤돌아보면 바로 엊그제 일 같단 말씀이야.”
뚱뚱보 중년인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는 그래도 세상이 좁다 하고 돌아다녔는데, 지금은 자네도 보다시피 이렇게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뚱보가 되고 말았다네. 유일한 낙(樂)이라고는 먹는 것뿐이니 살이 찌는 건 당연하지.”
“먹는 걸 즐기는 건 결코 나쁜 일이 아니오.”
진산월의 말에 뚱뚱보 중년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좋은 말일세. 문제는 너무 먹기만 한다는 거지.”
그는 진산월의 비쩍 마른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다시 미소지었다.
“아무래도 자네는 먹는 걸 즐겨하는 사람은 아니군. 기분 같아서는 내 살 중 절반쯤 떼어주고 싶은 심정일세.”
“나는 이대로 만족하오.”
“그건 정말 대행스러운 일이로군. 사람이 자신의 현실에 만족하면서 지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아쉽게도 나는 결코 만족스럽지 못하다네.”
뚱뚱보 중년인은 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해냈다.
“요즘에는 더욱 그렇다네.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어서 식욕이 뚝 떨어지고 말았지. 그래서 요리도 평소의 반밖에는 시키지 않았네. 정말 비참한 일이야.”
진산월은 뚱뚱보의 가공할 먹성에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점소이가 낑낑거리며 요리를 들고 왔다. 뚱뚱보 중년인이 시킨 양이 워낙 많아서인지 넓은 탁자가 순식간에 가득 채워졌다. 요리들을 보자 뚱뚱보 중년인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자네는?”
“나는 이미 식사를 했소.”
“그럼 나 혼자 먹겠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뚱뚱보 중년인은 무서운 속도로 요리들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진산월은 어제 보았던 나타개 소방방이 지금까지 가장 먹성이 좋은 줄 알았는데, 뚱뚱보 중년인은 그보다 몇 배나 대단했다. 양손을 질풍같이 휘둘러서 접시들을 비워 나가는 그의 모습에 진산월은 물론이고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순식간에 탁자 위에 가득 놓여 있던 요리들은 모두 그의 뱃속으로 사라지고 빈 접시만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제서야 뚱뚱보 중년인은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손놀림을 멈췄다.
“쩝…… 먹다 만 느낌이군. 하지만 과식(過食)은 몸에 해롭다고 했으니 이쯤에서 참아야겠지.”
뚱뚱보 중년인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옆에 중인들이 킥킥거렸다. 뚱뚱보 중년인은 남들이 그러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고 다시 점소이를 불렀다.
“이보게, 여기 차 좀 가져오게. 주전자로 다섯 동이면 될걸세.”
점소이가 멍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러나자 뚱뚱보 중년인은 진산월을 쳐다보며 히죽 웃었다.
“아쉬운 대로 물배라도 채워야겠네. 돈도 절약되고 좋은 일 아닌가?”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등불이 흔들리며 다시 누군가가 주루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에 들어온 사람은 모두 두 사람이었다. 체구가 건장한 장한 한 사람이 여인을 업은 채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장한의 등에 업힌 사람은 백발이 성성한 늙은 여인이었는데, 장한의 등에 머리를 처박은 채 연신 기침을 해대고 있었다.
“콜록…… 콜록……”
장한은 등뒤의 여인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참으세요. 이제 곧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따끈한 연자탕(燕子蕩)을 드실 수 있을 거예요.”
보아하니 늙은 여인과 그 장한은 모자(母子) 사이인 모양이었다. 아마도 병든 노모(老母)가 연자탕을 먹고 싶어하자 아들이 그녀를 업고 주루로 모셔온 것 같았다. 마침 근처에서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나가는 바람에 빈자리가 생기자 장한은 그녀를 업은 채 자리로 갔다.
“여기 연자탕 하나와 만두 한 접시만 주시오.”
주문을 마친 장한은 노모를 의자에 앉힌 후 자신도 그 앞에 앉았다. 장한의 덩치가 워낙 커서인지 노모는 그에 가려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뚱뚱보 중년인은 그들을 보고 있다가 진산월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정말 요즘 보기 드문 효자로군. 그렇지 않나?”
장한이 주루에 나타날 때부터 진산월의 얼굴에는 한 줄기 기이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빛을 담은 표정이었다. 하나 뚱뚱보 중년인이 돌아보았을 때는 그의 얼굴은 어느새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진산월은 한동안 그들을 응시하고 있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보기 드문 사람들인 건 확실하오.”
뚱뚱보 중년인은 그의 말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다시 한 번 그를 쳐다보았다. 그때 진산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려는가?”
“식사를 마쳤으니 이제 그만 가야겠소. 다음에 다시 봅시다.”
뚱뚱보 중년인은 히죽 웃었다.
“다시 만날 순간을 기대하고 있겠네.”
진산월은 주루 입구로 걸어갔다. 공교롭게도 장한과 여인이 앉아 있는 자리는 그가 나가는 방향과 같은 쪽이었다. 사람들이 워낙 붐벼서인지 진산월은 사람들에 떠밀려 한차례 휘청거리며 장한이 있는 탁자에 가서 부딪혔다.
하나 이내 몸을 추스르고는 간단한 사과의 말을 남기고 그들을 지나쳐 주루를 빠져 나왔다.
주루를 나오자 주위는 어느새 어두워져서 하늘에는 별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고 있었다. 진산월은 대왕루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길에 선 채 우두커니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비단을 두른 듯한 하늘에는 갑자기 별들의 숫자가 많아지더니 종내에는 마치 보석을 뿌린 듯 수많은 별들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진산월은 그 많은 별들이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인기척이 들리며 누군가가 다가왔다. 진산월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동중산의 얼굴을 보았다.
동중산은 변장했던 여인의 가발을 벗지도 않고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을 깜박거리지도 않은 채 하염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마치 눈을 깜박거리기라도 하면 그의 모습이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린다는 듯이. 그의 주름진 눈에는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고여 있었다.
진산월은 말없이 그에게로 다가갔다. 동중산은 허물어지듯 그의 앞에 엎드렸다.
“제자 동중산이 장문인을 뵈옵니다.”
진산월은 흐느끼는 듯한 그의 음성을 들으며 어느새 반백으로 변해 버린 그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살아 있었구나. 고맙다.”
동중산은 아무 말 없이 계속 엎드려 있었다.
진산월 또한 말 못할 감회에 그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동중산은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하나 등뒤로 돌린 그의 소맷자락은 어느새 흠뻑 젖어 있었다.
그때 또 다른 누군가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여자로 분장을 한 동중산을 업고 대왕루로 왔던 장승표였다. 장승표의 수염이 텁수룩한 얼굴은 쉬지 않고 실룩거리고 있었다.
“자네 진 아우 맞지? 자네가 종남파의 장문인이었나?”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잡았다.
“오랜만이오, 장 형. 그동안 잘 있었소?”
장승표는 진산월을 다시 만났다는 반가움과 그가 동중산이 애타게 찾던 종남파의 장문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으로 어찌할 줄을 모르는 모습이었다. 하나 이내 그는 진산월을 와락 끌어안았다.
“어디 갔다가 이제야 나타났나. 자네를 정말 보고 싶었다네.”
진산월은 자신의 품에 안겨 어린아이처럼 흐느끼는 장승표의 어깨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그를 떼어놓았다.
“할 말이 많지만 우리의 회포는 다음에 풀도록 합시다.”
장승표의 눈물 젖은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올랐다.
“진 아우, 왜……”
그때 동중산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와 함께 어디선가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흐흐…… 세 분의 재회를 방해해서 미안하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감격적인 장면이긴 하지만 밤이슬을 맞으며 언제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말이오.”
그들이 서 있는 골목의 입구에 몇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다섯 사람이었다. 중앙의 인물은 얼굴이 유난히 네모지고 눈빛이 싸늘한 중년인이었다. 그를 보자 동중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중년인은 초가보의 삼총관이며 대왕루의 책임자인 칠살추명조 손익이었던 것이다.
손익은 얼굴에 냉랭한 미소를 지은 채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우리가 나타나서 뜻밖인가? 하지만 대왕루가 당신네 안마당도 아닌데 마음대로 들락거리며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너무 순진한 일 아니겠소?”
그의 시선은 동중산을 지나 진산월에게로 고정되었다.
“며칠 전부터 대왕루에 출입했던 괴인이 설마 오래 전에 실종되었던 종남파의 장문인일 줄은 몰랐군. 미처 알아보지 못한 점을 사과드리겠소.”
말과는 달리 그의 얼굴에는 추호도 미안해하는 빛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진산월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흐흐…… 진 장문인은 말을 잘해서 삼절무적이라고까지 불린다고 하더니 오늘은 영 꿀 먹은 벙어리로군. 일전의 일도 있고 해서 우리도 오늘은 신경을 썼소.”
손익은 자신의 좌우에 서 있는 네 명의 장한들을 가리켰다.
“이들은 왼쪽부터 섬표(閃豹) 곽일명(藿一命), 폭호(暴虎) 고잔(固殘), 이쪽이 광마(狂馬) 철력(鐵力), 그리고 취원(醉猿) 이세기(易世琦)라 하오. 이들의 이름은 진 장문인도 들어 보았을 거요. 본보에서는 이들을 팔웅(八雄)이라고 부르는데, 남들은 팔수(八獸)라고 한다더군.”
그들의 이름을 듣자 동중산의 얼굴이 암담하게 변했다. 손익의 양옆에 서 있는 장한들이 설마 흉폭하기로 소문난 팔수 중의 네 사람일 줄은 예상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손익은 입가에 살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들만으로도 부족하다면 다른 분을 모셔올 수도 있소. 명색이 그래도 일파의 장문인이신데 그 정도 대접은 해드려야겠지.”
진산월은 문득 등 뒤에서 심상치 않은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들의 뒤에는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단 한 명이었지만 골목이 그 때문에 완전히 막혀 버린 것 같았다. 진산월은 그 인물이 조금 전에 자신과 같은 탁자에 앉아 있던 뚱뚱보 중년인임을 알아보았다.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뚱뚱보 중년인은 활짝 웃었다.
“여기서 다시 만났군. 정말 반갑네. 확실히 우리는 특별한 인연(因緣)이 있나 보네.”
진산월은 한동안 그를 쳐다보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귀하는 누구요?”
“아까 인사하지 않았나? 나는 봉가일세. 당양 태생이고, 오 년째 이곳에 와서 빈둥거리고 있는 한심한 존재일세.”
봉가라는 말에 동중산의 표정이 한층 경직되며 입으로 신음 같은 외침이 흘러 나왔다.
“권패(拳覇) 봉월(鳳月)?”
뚱뚱보 중년인은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웃으며 하얀 이를 드러냈다.
“확실히 비천호리란 명성이 허언이 아니군. 내가 바로 봉월이오.”
권패 봉월! 이 이름은 한때 강북제일권사(江北第一拳師)를 꿈꾸던 이름이었다. 하나 오년 전에 그는 한 사람에게 패했고, 그 뒤로 그의 모습은 강호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후로 사람들은 초가보의 최절정고수인 사패(四覇) 중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하고 다시 한 번 경악해야만 했다. 봉월의 등장은 동중산으로 하여금 절망감을 느끼게 했다.
‘손익과 사수만 해도 상대하기 벅차거늘 거기에 봉월이라니…… 장문인과 만나자마자 마지막 이별을 해야 한단 말인가?’
장안 한구석의 좁은 골목 안에 초가보의 절정고수 여섯 명이 동시에 나타났다. 그런데 그 상대는 무공을 전혀 모르는 사냥꾼과 제 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부상자, 그리고 삼년 동안 사라졌다 홀연히 나타난 초라한 행색의 장문인이었다.
이건 도저히 승부가 안 되는 싸움이었다. 최소한 동중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진산월에게 다가가더니 나직한 음성으로 소곤거렸다.
“제자에게 염황신탄(焰黃神彈) 세 개가 있습니다. 그걸 던진 다음 북쪽으로 적들을 유인할 테니 장문인은 남쪽으로 피하십시오.”
진산월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내게 너를 남겨 두고 도망가라는 말이냐?”
“청산(靑山)이 있는 한 땔감 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비록 치욕스러우시겠지만, 일단은 여기서 살아 나가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살아날 수만 있다면 언젠가는 지금처럼 다시 만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동중산은 비록 웃고 있었지만, 그의 음성은 비장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나에게 더 좋은 생각이 있다.”
“다른 수는 없습니다. 장문인, 제발……”
진산월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네가 본파에 입문(入門)한 지 몇 년이나 되었는데, 나는 아직 네게 단 한 번도 무공을 가르쳐 주지 못했다. 마침 적당한 상대들이 있으니 네게 본파의 무공을 가르쳐 줄 좋은 기회가 아니겠느냐?”
뜻밖의 말에 동중산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동중산이 멍하니 있는 사이 진산월은 그가 옆구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들었다.
“장문인!”
동중산이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하나 진산월은 태연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돌연 정색을 하며 물었다.
“중산, 천하삼십육검을 어디까지 배웠느냐?”
동중산은 그의 음성이 워낙 진지하여 얼떨결에 대답했다.
“중반의 이십사 초(二十四招)까지 입니다.”
“천하삼십육검의 정화(精華)는 바로 후반부의 열두 초식에 담겨 있다. 너는 이제부터 눈을 똑바로 뜨고 그 초식들의 변화를 지켜보기 바란다.”
진산월은 돌연 장검을 든 채로 손익과 사수가 서 있는 곳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에 동중산은 몸이 굳어 버렸다. 다른 사람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손익은 진산월이 검을 뽑아 든 채 자신들에게 날아오자 움찔 놀라더니 이내 비릿한 냉소를 날렸다.
“일파의 장문인답게 장렬(壯烈)하게 죽겠단 말이지? 소원대로 해주지.”
그는 즉시 사수에게 눈짓을 하더니 진산월을 향해 맞서 갔다. 다른 네 명의 고수들도 앞뒤로 산개(散開)하여 진산월을 에워쌌다.
“잘 봐라, 이것이 후반 십이 초의 첫번째 초식인 천하밀밀(天河密密)이다.”
진산월의 외침과 함께 그의 검이 한차례 흔들리더니 가공할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수십, 수백 개의 검영(劍影)이 구름처럼 일어나 십시간에 주위를 휩쓰는 것이 아닌가?
쏴쏴쏴쏴쏴!
마치 폭포수같이 쏟아지는 그 검영이 손익과 사수를 단숨에 에워싸 버렸다. 손익은 무심코 달려들다 이 광경을 보자 안색이 대변해 황급히 자신의 절기인 칠살추명조를 펼쳐냈다.
까까깡!
그의 손톱이 검영과 부딪치며 마구 불똥을 튕겨냈다.
“큭!”
손익은 손톱이 부러지는 듯한 충격과 동시에 앞가슴이 화끈거리는 통증을 느끼고 눈을 부릅떴다. 그토록 전력을 기울였는데도 그의 앞가슴은 어느새 검영에 베어져 질펀한 피를 뿌리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치명상은 면했으나, 손익은 모골이 송연해져서 뒤로 정신없이 물러났다. 사수 중의 섬표 곽일명은 이 광경을 보자 손익을 구하기 위해 진산월의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의 몸놀림은 섬표라는 외호답게 그야말로 번개가 무색할 정도로 빨랐다. 하나 그가 채 진산월의 옆에 도달하기도 전에 진산월의 검세가 갑자기 급격한 변화를 일으켰다.
“천하제탄(天河薺彈)!”
쉬아압!
자욱하던 검영이 갑자기 사라지며 기이한 파공음이 들려 왔다. 그 파공음의 정체를 채 알기도 전에 곽일명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아악!”
진산월의 장검이 어느새 곽일명의 목덜미를 뚫고 앞까지 튀어나왔다. 곽일명은 학질 걸린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더니 그대로 숨이 끊어져 버렸다. 누구보다도 빠른 신법을 자랑하며 섬서성 일대를 누비고 다녔던 곽일명으로서는 너무도 허망한 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사수의 남은 세 사람은 눈을 부릅뜨고 이 광경을 지켜보더니 죽기 살기로 진산월에게 덤벼들었다.
“이놈!”
평소에 곽일명과 가장 절친했던 폭호 고잔은 미친 듯한 고함을 내지르며 진산월의 앞가슴을 향해 뛰어들었다. 설사 팔다리가 하나쯤 잘린다고 해도 진산월의 가슴에 구멍을 뚫어 놓고야 말겠다는 무시무시한 공격이었다. 진산월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고잔의 눈에 진산월의 가슴이 훤하게 들어왔다.
‘죽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고잔이 쾌재를 부르며 더욱 빠르게 다가가는 순간,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 왔다.
“안 돼!”
다음 순간, 고잔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눈앞에 있던 진산월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음을 깨달았다. 그가 채 몸을 돌리기도 전에 무언가 차갑고 예리한 것이 그의 가슴을 가르고 지나갔다.
‘이…… 이렇게 무서운 검법이 있었다니……’
고잔은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야 자기의 행동이 얼마나 무모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봉월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좁은 골목 안은 온통 검광(劍光)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진산월은 가볍게 몸을 움직이며 검을 휘두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장내의 누구도 그의 일검을 받아내지 못하고 맥없이 쓰러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손익이 피투성이가 되어 물러나고 곽일명과 고잔이 한줌의 고혼(孤魂)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 봉월이 보고 있는 사이에 광마 철력과 취원 이세기가 결사적으로 진산월의 검에 대항하고 있었다. 하나 진산월의 검이 기이한 선회를 그으며 날아들자 이세기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연신 휘청거리고 있는 그의 아랫배는 쩌억 갈라진 채 시뻘건 핏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쿵!
바닥에 쓰러진 이세기는 몇 번 몸을 꿈틀거리더니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봉월은 자신의 손끝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사수는 결코 만만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자신의 실력으로는 물론 그들 개개인을 충분히 물리칠 수 있지만, 네 사람의 합공(合功)을 이긴다는 보장은 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자신과 거의 비슷한 수준인 손익이 가세했는데도 너무도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싸움이 아니라 거의 학살(虐殺)에 가까웠다. 어찌 이러한 검법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게 천하삼십육검이라고? 이런 새빨간 거짓말을……’
중얼거리던 봉월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광마 철력은 어느새 질퍽한 피바다 속에 쓰러져 있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부상을 당한 손익과 자신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물러서고 싶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에게 이번 일을 지시한 사람은 분명히 일을 마무리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의 기대를 벗어나느니 차라리 목숨을 잃는 것이 나았다. 어차피 결과는 마찬가지지만 최소한 치욕은 피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의 시선이 한쪽에 서 있는 손익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서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결연한 표정으로 진산월을 향해 달려 들었다.
쉬악!
가볍게 말아 쥔 주먹이 움직이자 마치 두 개의 뇌전(雷電)이 번뜩이는 것 같았다. 봉월의 주먹은 정말 무서웠다. 그 뚱뚱한 몸에서 어떻게 이런 위력의 주먹이 나올 수 있었는지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더구나 그의 공격은 수비는 완전히 도외시한 것이어서 더욱 살인적인 위력을 담고 있었다. 손익 또한 죽기 살기의 심정으로 칠살추명조의 가장 무서운 초식만을 계속 펼쳐냈다. 두 절정고수의 공세는 그야말로 톱니바퀴처럼 맞아들어서 주위 사방이 온통 그들의 뿜어내는 권풍(拳風)과 조영(爪影)에 휘감겨 버렸다. 진산월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 거센 회오리 속으로 날아들었다. 그의 옷자락이 세찬 바람에 금시라도 찢어질 듯 마구 펄럭였다. 그와 함께 그의 손에 들린 검이 크게 흔들리더니 열두 개의 검영이 나타났다. 그 열두 개의 검영은 무서운 속도로 사방으로 확산되어 가더니 다시 각각의 검영이 세 개의 검화(劍花)를 만들어 냈다. 순식간에 삼십육방(三十六方)이 온통 검의 그림자 속에 갇혀 버렸다. 봉월은 자신이 펼쳐낸 가공할 권력(拳力)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며 자신의 주위가 온통 검으로 뒤덮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예리한 검날뿐이었다.
‘이것은 환상이다……!’
그는 눈을 부릅뜨며 무어라고 소리지르려 했다. 그 순간, 그는 온몸이 작살로 관통당하는 듯한 화끈한 통증을 느꼈다. 비명은 내지르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몸 속에 있는 모든 피들이 모공을 뚫고 밖으로 뿜어져 나가는 생생한 느낌에 전율할 뿐이었다. 숨이 끊어지기 전에 봉월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누워 있는 손익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검광과 자욱한 혈무(血霧)가 걷혔다. 진산월은 천천히 검을 거두고 동중산의 앞에 내려섰다.
“이것이 천하삼십육검의 마지막 초식인 천하무궁(天河無窮)이다.”
담담한 그의 음성을 듣는 순간, 동중산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입을 열기만 하면 무언가 처량한 소리가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처음 이궐용문의 이름 모를 동굴 앞에서 진산월을 만났을 때부터 소림을 거쳐 사천으로 향하던 일, 임영옥을 잃고 진산월마저 부상을 당한 채 초라한 모습으로 종남산으로 돌아오던 일…… 깨어진 현판과 사라진 장문인, 절망에 빠져 있는 제자들…… 그리고 초가보의 공격으로 비참하게 쫓겨다니던 일들이 방금 전에 벌어진 일들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모든 고통과 좌절이 바로 이 순간을 보기 위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종남은 강하다. 우리는 절대로 잘못된 것이 아니다!’
진산월은 그에게 검을 돌려주었다.
“소 사제와 방 사매가 기다리고 있다. 돌아가자.”
동중산의 얼굴 근육이 가볍게 떨렸다.
“그…… 그들을 만나셨습니까?”
“그렇다. 그들도 너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동중산의 얼굴에 모처럼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길고 긴 기다림은 이제 끝이 났다. 남은 일은 본산을 되찾고 앞으로 달려나가는 일뿐이다. 군림천하의 대망(大望)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