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5권 4화 – 어차피 곧 죽을 놈
어차피 곧 죽을 놈
요새도시 델카는 산맥 쪽에서 내려오는 몬스터들을 저지하기 위해 영지의 동쪽 끝단에 건설되어 있었고, 영주의 성이 위치해 있는 다란툼은 비교적 몬스터들로부터 안전하고 농작물 생산에 유리한 서쪽 끝단 가까이에 건설되어 있었다. 도보로 걸어가기에는 제법 거리가 있다고 봐야 했다.
물론, 국가 단위도 아니고 영지 안에서의 이동인 만큼 멀다고 해 봐야 부지런히 걸으면 반나절이면 목적지에 도착하기에 충분했다. 그들이 출발하고 한 20분쯤 흘렀을까? 요새도시에서 그들보다 늦게 출발한 사람들에게 따라잡혔다. 달톤 일행이 중무장을 한 탓에 걸음이 느렸다면, 그쪽은 마차로 이동하고 있었기에 속도가 훨씬 빨랐다. 말 한 필이 끄는 작은 마차였는데, 비바람을 막기 위한 포장을 둘러쳐 놨기에 그 속에 뭘 싣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달톤 일행이 마차가 지나가도록 길옆으로 비켜섰는데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로 접근해 온 마차는 앞서나가지 않았다. 힐끗 보니 마차를 몰고 있는 건 5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중년사내였다.
그는 여행객들이 즐겨 입는 두툼한 로브로 몸을 감싸고 있었고, 로브를 뒤로 젖혀 얼굴이 훤히 드러나도록 하고 있었기에
중년사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까지 잘 보였다.
그의 목 아래쪽으로 얇은 가죽갑옷이 튀어나와 있었다. 굳이 가죽갑옷이 살짝 보이도록 입고 있는 걸 보면, 자신이 비무장이 아님을 상대에게 과시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즉, 저자는 겉보기와 달리 겁 많은 상인이라는 말이다.
“혹시…, 다란툼으로 가십니까?”
요새 정문을 나온 후, 산맥 쪽으로 들어가려면 북쪽으로 갈라지는 길로 올라간다. 하지만 그들이 계속 서쪽으로 걸어가는 걸 보고는 황급히 뒤쫓아 온 모양이다. 달톤은 일부러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대응했다.
“핫핫, 다란툼에 가지러 갈 게 있어서 말이죠.”
다란툼으로 간다는 말에 중년사내는 반색하며 합류를 요청했다.
“잘 됐군요. 괜찮으시다면 함께 가도록 하죠.”
정비가 잘 되어 있다고는 하나 언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산골이다. 그런데 완전무장을 갖춘 사냥꾼 5명과 함께 갈 수 있다면 중년사내로서는 그 이상 좋을 게 없는 것이다.
“가지러 가신다는 게 혹시 사냥도구입니까?”
“핫핫, 예. 몬스터 사냥용으로 특별 주문한 대형 쇠뇌지요. 상당한 돈을 들여 장만한 것인데, 성능이 좋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습니다.”
“다란툼을 오가는 상인에게 운송을 부탁하지 않으시고…………?”
“쇠뇌만이라면 그렇게 했겠지요. 그 외에도 이것저것 구입할 것도 있고, 또 거기 가서 팔아치울 것도 있고 해서 말이지요.” 그러면서 달톤은 등에 지고 있던 커다란 배낭을 툭툭 쳤다.
탐색차 이리저리 얘기를 나누던 중년사내는 이들이 사냥꾼이라는 걸 확신하자마자 그제서야 깨달았다는 듯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아참, 이거 얘기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모두들 무거운 짐들을 지고 가시는 걸 알아채지 못했네요. 마음 같아서는 모두들 함께 마차에 타고 가시라고 하고 싶습니다만, 보시다시피 짐이 많아서 그럴 수는 없겠고…, 들고 계신 짐이라도 마차에 싣지 않으시겠습니까?” “아, 고맙습니다. 날도 더운데, 덕분에 살았습니다.”
짐을 실으려고 마차 뒷면 포장을 걷으니, 그 안에 1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빨강머리 소녀가 앉아있는 게 보였다. 낡고 허름한 옷,
주근깨가 얼굴 전체에 가득한 평범한 얼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시골 소녀였다.
“이런, 아가씨가 한 명 더 있으셨군요. 미안하구나. 안 그래도 좁은데, 짐을 더 싣게 돼서 말이다.”
소녀는 싹싹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이리 주세요.”
달톤 일행은 등에 지고 있던 짐을 마차에 싣고 나니 한결 걷기가 쉬워졌는지 걷는 속도가 빨라졌다. 라이는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짐도 없었고, 낡은 가죽갑옷 한 벌만을 입고 있었기에 별 차이가 없었지만 말이다.
“따님을 데리고 이런 시골을 떠도시다니…,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대화를 주도하는 건 주먹코 사내 달톤이었다. 생긴 것과 달리 넉살이 좋고 말주변이 상당히 뛰어났다. 만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음에도 중년사내와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담소를 나누는 걸 보면 말이다. 달톤의 물음에 중년사내는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어쩔 수 없죠. 어렸을 때 어미가 병으로 일찍 죽는 바람에 어디 맡길 곳도 없고 해서 데리고 다녔던 게 이렇게 됐습니다. 다 큰 처녀를 데리고 산길을 다니는 게 썩 좋은 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어디 방법이 있어야지 말이죠.”
“보아하니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데, 어떻게 아직까지 기반을 제대로 못 잡으셨소?”
“가진 재주도 없고 집안도 별 볼 일 없다 보니 별수 있습니까. 이렇게 보따리장수로 상행을 하며 벌 수 있는 돈이라고 해 봐야 뻔하니 말입니다. 그나마 끼니 거르지 않고 지금껏 살 수 있었던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지요.”
한동안은 서로 농담도 주고받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런데, 함께 이동한 지 30분쯤 흘렀을까? 달톤이 갑자기 주머니를 뒤져 뭔가를 불쑥 꺼내며 앞으로 내밀었다.
“그런데, 이보십쇼. 혹시, 이런 거 본 적 있습니까?”
“어떤 거 말입니까?”
달톤이 주머니에서 꺼낸 건 아주 작은 물건이었는데, 그걸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었기에 중년사내는 그 물건을 자세히 보기 위해 허리를 숙여 얼굴을 들이밀었다.
바로 그때였다. 방금 전까지 신이 나서 얘기를 나누고 있던 달톤이 갑자기 단검을 뽑아 중년사내의 얼굴을 쑤셔버린 것이다.
“허억!”
달톤의 예리한 단검은 중년사내의 왼쪽 관자놀이를 꿰뚫고 들어가 반대편으로 삐죽이 빠져나와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이 일에 멍하니 달톤을 바라보던 중년사내의 몸이 스르르 무너지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마차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뒤늦게 아버지의 변고를 깨달은 소녀가 짐칸에서 뛰어내려 중년사내에게로 달려가 시체를 부둥켜안으며 오열했다.
“아빠, 안 돼. 죽으면 안 돼. 어서 눈을 떠봐.”
울며 몸부림치는 소녀의 처지가 안타깝긴 했지만, 라이로서는 끼어들어야 할지 어떨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상인은 죽어 버렸고, 저 망할 녀석들에게 다란툼까지의 길 안내를 받아야 했다. 아직 쓸모가 있는 이상, 그들과 다툼을 벌여 봐야 좋을 게 없다. 라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바라보고 있자 달톤이 소녀를 번쩍 들어 올려 옆구리에 안았다. 소녀가 발버둥을 쳤지만 달톤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달톤은 소녀를 들고 마차 뒤쪽으로 가며 동료들에게 말했다.
“흐흐, 잠시 재미 좀 보고 있을 테니까 누가 마차 좀 몰아. 그리고 마차에서 쓸 만한 것이 있나 살펴보고 말이야.”
그의 말투에는 죄의식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늘상 해 오던 짓이었기에, 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리라. 그건 다른 동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 해리슨.
“이런 발정 난 개자식! 그 애를 볼 때부터 흑심을 품고 있었구만.”
“당연하지. 마차를 뺏으면 걷는 것보다 훨씬 빨리 다란툼에 도착할 수 있을 거 아냐. 그리고 동시에 재미까지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살살 다뤄 사창가에 넘길 때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면 말이야.”
“걱정마. 이런 일 어디 한두 번 해 보나.”
그러자 털보사내 해리슨이 투덜거리며 마부석에 앉았고, 랜은 중년사내의 시체 옆에 쭈그리고 앉아 본격적으로 뒤지기 시작했다. 돈주머니만 뺏을 줄 알았는데, 가죽갑옷은 물론이고 낡은 옷가지까지 다 벗기고 있었다.
달톤이 왜 중년사내의 관자놀이를 찔러 죽인 것인지, 라이는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벗겨낸 중년사내의 옷에는 단 한 방울도 피가 묻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짜증스럽다는 듯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피터가 으르렁거렸다.
“우리가 뭐하려고 다란툼에 가는 건지 벌써 잊어버렸어? 쓸데없는 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도 시원찮을 판에 사건을 만들어, 사건을! 만약 정기적으로 다란툼과 요새를 오가던 상인이었다면, 이 마차를 알아볼 사람이 수두룩할 게 뻔하잖아!” “아 씨발, 걱정도 팔자네. 다란툼 근처에 가면 헐값이라도 마차는 처분해 버릴 테니까 그만 찡얼거려.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어쨌거나 나는 재미 좀 보고 있을 테니까, 가자고!”
달톤은 반항하는 소녀를 어거지로 짐칸에 밀어 넣고, 그 자신도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히 알고 있는 라이로서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껏 이렇게 제대로 된 산적 패거리와 어울린 것은 처음이었기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도저히 억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 야 이 개자식아, 지금 이게 사람이 할 짓이냐?”
그 소리에 짐칸 위로 올라가려던 달톤의 몸이 흠칫 굳었다.
달톤은 천천히 뒤로 고개를 돌려 라이를 노려보며 이죽거렸다.
“내가 뭘 잘못들은 건가? 방금 개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설마 네놈이 나에게 뭐라고 한 소리는 아니겠지?”
“생긴 대로 논다더니, 너 같은 놈을 두고 한 말인 듯싶다. 썩어빠진 새끼.”
라이의 반응에 달톤은 히죽 웃으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행동 하나하나가 여유만만했다. 자신의 실력을 절대적으로 믿는 자들이나 할 수 있는 여유로운 움직임.
“오호, 이 애송이 새끼가 부두목 믿고 까부는 모양인데. 그런 거라면 번지수를 잘못 짚었어, 새꺄.”
이미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달톤의 모습에 피터는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앞으로 나섰다.
“이봐, 일 크게 만들지 마. 나중에 부두목에게 뭐라고 변명하려고 그래?”
“빌어먹을, 이런 애송이 하나조차 어쩌지 못할 내가 아냐! 몬스터한테 죽었다고 둘러대면 부두목도 뭐라 못할 거야.”
달톤은 라이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으르렁거렸다. 목소리는 아주 낮았지만,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런 개새끼! 부두목을 믿고 감히 까부는 모양인데, 그 뻣뻣한 모가지를 내가 비틀어주마.”
그러자 당혹스런 표정으로 피터가 다급히 말했다.
“뭐 하고 있어? 지금 당장 용서를 빌어.”
그러자 라이는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흥! 용서? 너희들이 빌어야지. 만약 용서를 구한다면 임무 때문이라도 이번만큼은 내 특별히 넘어가 주도록 하지.”
“이런 미친 새끼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드는 달톤. 하지만 검을 휘두르기에 앞서 슬쩍 피터의 눈치를 살폈다.
애송이는 부두목하고 연결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손을 쓴다면 적당히 넘어가기는 힘들었다. 손을 써야 한다면 아예 죽여 없애는
게 후환이 없다. 어차피 죽은 놈은 말이 없고, 몬스터에게 죽었다는 둥 적당히 둘러대면 부두목 역시 중간보스인 자신들에게 뭐라 추궁하지도 못할 테니까.
한동안 그런 달톤의 모습을 지켜보던 피터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의 표시였다. 랜이 중년사내의 옷을 벗기다 말고 뒤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본 털보 해리슨이 짜증스런 어조로 소리쳤다. 마부석에 앉아 있다 보니 뒤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뭐 하고 있어? 빨리 안 벗기고……”
랜은 대답 대신 턱짓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그걸 본 털보 해리슨은 상체를 쭉 내밀어 뒤쪽을 바라봤지만, 마차의 포장에 가려 잘
보이지가 않았다. 해리슨은 마차에서 내리며 답답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턱짓만 하지 말고 말을 해, 말을! 준비 다 끝난 거야? 아니면 뭐야?”
마차에서 내린 해리슨은 뒤로 몇 걸음 채 옮기지 않았음에도 달톤과 대치하고 있는 애송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애송이의 표정은 여유로웠지만 달톤은 그렇지가 못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걸 보면 살심(心)이 극에 달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해리슨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달톤과 잭을 가리키며 피터에게 물었다.
“왜 저러는 거야?”
해리슨의 물음에 피터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뭐, 알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곧 죽을 놈인데…”
“미쳤어? 부두목이 직접 임무를 주며 부탁한 일이잖아!”
당황해서 대꾸하는 해리슨에게 피터는 마치 남의 일이기라도 하다는 듯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이젠 나도 몰라, 씨발. 달톤이 알아서 하겠지.”
피터와 말이 통하지 않자 해리슨은 검을 뽑아들고 살기를 뿜어내고 있는 달톤에게 외쳤다.
“야, 이 개새꺄! 너 미쳤냐? 왜 자꾸 사고를 치는 건데? 그리고 쟤를 죽여서 뭐하려고? 부두목에게 뭐라 변명을 할 거냐고!” 달톤은 살기에 가득 찬 눈빛을 해리슨에게 보내며 이죽거렸다.
“씨발, 잔소리 진짜 많네. 새꺄, 쫄리면 가만히 있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어쭈, 이 새끼 봐라? 엎드려 빌어도 시원찮을 판에…, 실실 쪼개고 있어? 간뎅이가 아주 부어 터졌구만.”
달톤이 시퍼런 장검을 뽑아들고 노발대발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라이는 여유만만했다. 될 수 있으면 이들과 충돌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꼬리를 말고 뒤로 빠질 생각은 없었다.
지금껏 타인과 다툼을 벌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라이였지만, 방금 전 달톤이 보인 인면수심과도 같은 행위에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있었던 것이다.
“빌어야 할 놈은 내가 아니라 네놈 같은데?”
느긋한 표정으로 천천히 검을 뽑으며 말하는 라이의 모습이 달톤의 성질을 더욱 건드린 모양이다.
“이 새끼가 곱게 죽여주려 했더니 아주 매를 버는구만. 오냐, 그 잘난 혓바닥도 함께 뽑아주마. 물론, 살아있는 채로 말이야.
크흐흐흣.
달톤이 어떻게 최대한 잔인하게 죽일 것인지를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을 때, 라이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꿈속에서 본 검법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건 36가지 초식(劍形)이었다. 그리고 그걸 약간씩 변형한 게 각 초식 당 4가지씩 있었다. 즉,
꿈속의 검법은 총 144개씩이나 되는 초식으로 이뤄진 검법이었던 것이다.
물론, 꿈속의 검법을 겨우 흉내 내기 시작한 라이가 그 모든 초식을 제대로 구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가 기억하고, 또 여왕벌의 둥지에서 연습(?)이나마 해 볼 수 있었던 건 고작 4개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그때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기운을 이렇게 움직이면서 그와 동시에 검을 이렇게 움직였었지?’
실수하지 않도록 계속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되뇌이고 있는 라이. 검을 움직일 때, 거기에 맞춰 몸속의 기운도 함께 움직여야 제대로 된 위력이 터져 나온다. 그 파괴력의 차이는, 라이 자신조차도 그 검식을 자신이 발현했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무기나 갑주는 물론이고, 벽이나 기둥조차도 터져 나가 버릴 정도였으니………….
꿈속의 여인이 했던 걸 따라 하는 것만으로도 급급한 상황이었기에, 달톤의 움직임 따위는 전혀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지금 상념에 잠겨있는 라이의 빈틈을 치고 들어오기만 하면 끝장이 나는 상황이었지만, 다행히도 싸움이라곤 무기를 휘두르는 것밖에 모르는 달톤이었기에 라이에게 그런 빈틈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라이에게 겁을 주기 위해 쉴 틈도 없이 주둥아리를 놀리기 바빴다. 어떻게 보면 달톤이 허접했기에 주어지고 있는 연습기회라고 봐야 했다.
달톤이 공격을 개시한 순간, 라이도 검식의 전개를 시작했다.
그가 쓴 것은 꿈속 검술의 첫 번째 초식이었다.
라이의 검은 기괴한 각도로 움직이며 달톤의 검을 쳐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곧바로 상대의 몸을 휘저어 버렸다. 옆에 서 있던 피터와 해리슨의 눈에는 라이의 검이 뽑힘과 동시에 붉은 빛줄기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터져 나오는 것 정도만 보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산적질을 오랫동안 해온 그들조차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방금 전까지 살아 있던 달톤이 수십 토막으로 잘린 채 검압에 뒤로 튕겨 날아가 마차 뒷면에 시뻘건 혈흔을 만들며 아래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그것도 그가 입고 있던 갑주와 함께.
몬스터의 일격조차도 막아내던 철판으로 보강된 든든한 갑주가 마치 썩은 무처럼 토막토막 잘려 있는 광경은 두 사람의 눈을 의심케 했다. 이게 지금 현실인가?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고?
그들은 입만 쩍 벌렸을 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서로 얼굴만 멀뚱히 마주보다 다시금 수십 토막의 고깃조각으로 변해 버린, 한때 동료였던 자의 사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들의 눈은 자신들의 동료를 이 모양으로 만든 젊은 애송이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직접 자신들의 두 눈으로 똑똑히 봤음에도 그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저 애송이 녀석이 이토록 잔인하고 흉악스런 짓을 한 당사자라는 것을. 어느새 두 사람의 눈에는 잭이라는 녀석이 처음 뒷골목에 발을 내디딘 애송이가 아닌, 악마처럼 보이고 있었다. 더군다나 잭이 들고 있는 롱 소드에는 놀랍게도 피 한 방울조차 묻어 있지 않았다.
꿀꺽!
기가 질려버린 두 사람은 동료를 죽인 잭에게 분노를 일으킬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그저 그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이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대 몬스터용의 중무장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그런 것처럼, 작금의 사태에 얼이 빠져있는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라이 또한 경악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여왕벌의 둥지에서 살육극을 벌였을 때, 라이는 자신의 검술이 이토록 처참한 결과물을 만든다는 것을 미처 느끼지도 못했다. 처음 얼마간은 주위의 적들을 보고 검을 휘둘렀지만, 점차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면서 검술의 발현에만 집중했었기 때문이다.
스승에게 자세한 강의를 들은 것도 아니었지만, 라이는 검술의 극히 세밀한 부분까지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는 자신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검을 휘두르는 방법만이 아니었다. 검을 휘두르는 그 순간, 몸속의 기운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 것까지도 마치 눈앞에 그린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물론 알고 있는 것과 눈에 보이지도 않는 기운을 직접 움직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였지만 말이다.
검을 움직이고, 그에 따라 몸속에 있는 무형의 기운을 움직이고…………. 검술을 펼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던 라이는 자신이 펼친 검술로 인해 주변이 어떻게 붕괴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파악도 하지 못했었다. 모든 게 끝났을 때는 횃불이고 뭐고 다 꺼져버려
지하실 전체가 짙은 암흑의 공간이 되어 있었으니까. 유일하게 그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짙은 피비린내뿐이었다.
“꿀꺽…
하지만 이렇게 정신줄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눈앞에 중간보스 두 명이 서 있는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저들까지 죽여야만 할지도 모른다.
라이는 부두목이 자신에게 붙여준 사람들을 더 이상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배에 힘을 꽉 주고, 방금 전의 살인이 마치 별것도 아니라는 듯 퉁명스럽게 물었다.
“네놈들도, 내게 덤빌 건가?”
라이의 느긋한 목소리에 피터와 해리슨은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다음 이어진 라이의 중얼거리는 듯한 혼잣말에 죽음에 대한 공포로 몸이 벌벌 떨림을 느껴야만 했다.
“하긴 다란툼까지의 안내라고 해 봐야, 한 놈만 살아 있어도 충분하겠지………
그 순간 피터와 해리슨은 양손을 번쩍 치켜든 뒤 연신 고개까지 흔들며 싸울 의사가 없다는 뜻을 분명하게 알렸다.
“덤비다뇨. 무슨 그런 당치도 않은 말씀을…………”
“귀하와 싸울 의사 따윈 절대로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믿어 주십쇼.”
“내가 네놈들의 동료를 죽였는데도?”
이때, 피투성이 휘장이 옆으로 젖혀지며 주근깨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는 작은 칼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아마 마차 안에 내던져진 직후 칼을 찾아들고 달톤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신을 욕보이려면 어쩔 수 없이 갑옷을 벗을 수밖에 없을 테고, 기회를 봐서 기습을 한다면 어쩌면 아빠의 원수를 갚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달톤은 마차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때, 밖에서 들려온 말이 ‘내가 네놈들의 동료를 죽였는데도?”하는 것이었다.
도저히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던 소녀는 뒷면 휘장을 살짝 열고 바깥의 동정을 살폈다. 그녀의 눈에 띈 것은 칼을 들고 산적 같은 어른들을 막아서고 있는 청년의 뒷모습이었다.
두터운 갑주로 중무장하고 있는 어른들에 비해 청년은 얄팍한 가죽갑옷만 착용하고 있었기에 훨씬 왜소해 보였다. 그리고 그가 뽑아들고 있는 길고 얇은 검.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우직스런 무장과 비교한다면 너무나도 형편없게만 보였다. 하지만 청년을 바라보고 있는 중년사내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대체 왜 저러지?’
그 순간, 소녀는 그녀 주위에서 풍기는 짙은 피비린내를 느낄 수가 있었다.
“흡!”
코를 막고 주위를 둘러본 소녀는 그제서야 자신이 잡고 있던 마차의 휘장 바깥 부분이 온통 피와 자잘한 살점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이…, 이게 도대체 ··?”
그다음 순간 그녀는 볼 수 있었다. 마차 아래쪽에 흩어져 있는 사람의 시체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형상의 고깃덩이들을.
“꺅!!”
그와 동시에 그녀는 기절해 버렸다. 마차 안에서 소녀가 풀썩 쓰러졌지만, 라이 외에 그 누구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피터와 해리슨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다. 아니, 전의를 상실한 정도가 아니었다. 만약 라이가 명령했다면, 아마 그의 발바닥이라도 기꺼이 핥았으리라. 그만큼 그들은 절대적인 공포에 질려 있었다.
방금 전에는 옆에서 두 눈 뻔히 뜨고 지켜봤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달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보지도 못했다. 검술인지, 아니면 뭔가 마법을 부린 것인지…………… 어쩌면 마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검의 궤적이 붉은빛이 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저 젊은 애송이가 달톤처럼 자신들도 저렇게 피떡으로 만들어 버릴 만큼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다, 당신은 대체 누, 누구십니까?”
겉모습은 애송이였지만 상대의 놀라운 실력을 본 이상, 피터는 급히 말투를 수정했다. 라이가 마음먹기에 따라 자신들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을 하이에나처럼 살아온 그들은 잘 아는 것이다.
“여기 올 때 말했을 텐데? 정 알고 싶으면 부두목에게 물어보라고 말이야.”
라이의 차가운 대꾸에 피터는 찔끔했다.
“아…, 알겠습니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너희는 나를 다란툼 지부까지만 안내해 주면 돼. 최대한 빨리.”
“다, 당연히 안내해 드려야죠. 지금 바로 출발할까요?”
소녀가 눈을 떴을 때는 마차는 흔들거리며 천천히 앞으로 가고 있었다.
따각, 따각………….
어렸을 때부터 오랜 시간 마차를 집삼아 살아온 그녀에게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는 자장가와도 같은 푸근함을 안겨줬다. 잠결에 그녀는 아빠의 등을 찾았다. 하지만 마부석에 앉아있는 건 아빠가 아니었다. 커다랗고 낯선 등판. 폭력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금속성의 갑옷. 그와 동시에 그녀의 뇌리에는 아빠가 살해당하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꺄아아악!”
그 순간, 마차의 뒷면 휘장이 젖혀지며 낯선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어났냐?”
손에 잡히는 대로 뭔가를 붙잡아 상대에게 집어 던지려던 소녀의 손이 일순 멈칫거렸다. 기절하기 직전의 광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억이 옳다면, 저 사내는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아빠를 살해했던 덩치 큰 사내를 마치 잘 다져놓은 고깃덩이로 만들어 놓은 악마…………
“히익!! 딸꾹! 딸꾹! 딸꾹!”
새파랗게 질린 채 연신 딸꾹질을 해대고 있는 빨강머리 소녀를 향해 라이는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토록 겁에 질린 애를 어떻게 달래줘야 할까? 안 그래도 말주변이 없는데, 더군다나 여자애를 달래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라이는 빨강머리 소녀가 알아듣든지 말든지 생각나는 대로 떠들었다.
“네 아빠의 원수는 내가 갚았다. 그리고 너를 해칠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 마음 푹 놓아도 괜찮아. 잠시…, 아주 잠시만 너를 구속할 거야. 네가 딴 데 가서 쓸데없는 소리라도 늘어놓으면 내가 해야 하는 일에 방해를 받게 되기에…………. 어쩔 수가 없구나. 이해해다오.”
상대의 대답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라이는 그 말을 끝으로 마차 밖으로 나갔다. 더 이상 할 얘기도 없었고, 하지만 라이는 빨강머리 소녀가 아빠를 잃은 슬픔에 연신 훌쩍거리면서도 마차 휘장 사이로 자신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그는 소녀 따위보다는 무장을 갖추고 있는 조장들의 행동에 더욱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그 후 2시간 정도를 이동하면서 일행 중 그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한동안 슬피 울던 소녀는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자 휘장 틈 사이로 마차 뒤를 따라 걷고 있는 청년을 몰래 훔쳐봤다.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듯한 앳된 외모였다. 그리고 그가 걸치고 있는 옷가지 또한 낡아빠진 싸구려들이다.
하지만 그의 겉모습만이 모든 게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청년의 뒤쪽에서 멀찍이 떨어져 따라오고 있는 중년사내 둘은 연신 청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오랜 세월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상행위로 단련된 그녀의 감각은 저 중년사내들이 청년을 향해 무한한 공포를 느끼고 있음을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녀 자신처럼……….
소녀는 저 청년이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죽인 남자를 포함, 다른 남자들과 한패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저들은 절대로 한패가 아니었다. 한패라면 저렇듯 경외와 공포를 담아 청년의 눈치를 살피고 있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