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0권 양대호리(兩大狐狸)편 : 2화
제91장. 살인지령(殺人指令)
“다시 한 번 말해 보게.”
천개방은 당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해천팔검의 종적이 묘연합니다. 아무리 사람들을 풀어 장안 일대를 찾아봤어도 그들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곡수는 좀처럼 냉정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눈살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으나, 곡수의 평소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천개방은 절로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었다.
곡수의 심기가 극도로 불편할 때 나타나는 현상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행적이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은 언제인가?”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그저께 대왕루에 나타나 식사를 한 것이 마지막입니다. 하나 어제 태화곡 근처에서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어서 확실치는 않습니다.”
“태화곡이라…… 그렇다면 취미사로 갔던 모양이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마도 혈겁이 벌어진 현장을 직접 조사하려던 것이었겠지요. 하지만 그 뒤로는 아무도 그들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곡수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천개방은 그의 생각을 방해할 수 없어 묵묵히 그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곡수는 화산파에서도 특이한 신분의 소유자였다.
그는 정식으로 화산파에 입문(入門)하지도 않았고, 화산파와 혈연관계(血緣關係)에 있지도 않았다.
하나 화산파의 누구도 그를 외인(外人)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와 화산파의 인연은 삼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곡수의 사부는 당시 섬서성에서 가장 유명한 고수 중 한 사람인 신풍수사(神風秀士) 갈수독(葛修獨)으로, 그는 당시의 화산파 장문인이었던 검중선(劍中仙) 사마원(司馬原)과 둘도 없이 막역한 사이였다.
하나 갈수독은 사십을 갓 넘긴 나이에 뜻하지 않은 질병을 얻어 유명(幽冥)을 달리하고 말았다.
당시 곡수의 나이는 열네 살로, 혼자서는 도저히 강호에서 활동할 수 없는 어린이였다.
더구나 곡수는 천애고아여서 달리 돌보아줄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사마원은 그를 화산파에 기거하게 했던 것이다.
그는 엄연한 갈수독의 의발전인(衣鉢傳人)이므로 화산파에 입문할 수도 없어서 화산파의 제자도 아니고 남도 아닌 어정쩡한 신분으로 계속 지내게 된 것이다.
그런 세월이 수십 년을 흐르자 곡수는 어느덧 화산파에서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가 되었다.
그는 갈수독 못지않은 치밀한 두뇌와 깊은 심계를 지니고 있어 맡겨진 일을 단 한 번도 소홀히 처리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마원의 뒤를 이어 화산파의 장문인 자리에 오른 용진산은 그를 중용(重用)하여 화산파의 집법(執法)을 담당하는 자리에 임명했던 것이다.
곡수는 주위의 기대에 전혀 어긋남이 없이 지금까지 주어진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 왔다.
이번에 소요검객 사익의 갑작스런 죽음을 연락 받았을 때, 용진산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사태의 책임자로 파견한 것도 그의 능력을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곡수이기 때문에 화산파의 촉망받는 일대제자인 천개방도 그의 앞에서는 몸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곡수는 문득 고개를 쳐들어 천개방을 향해 물었다.
“만상공자 이존휘가 사 장로님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 그와 같이 있던 여자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그녀가 누구인가?”
천개방은 그가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자신이 아는 대로 상세하게 대답했다.
“이름은 모르지만, 이존휘와는 상당히 친한 듯 했습니다. 나이는 십팔구 세 가량 되어 보였는데, 상당히 뛰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행동거지나 말하는 투가 명문세가 출신인 것 같았습니다.”
“결국 그녀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모른다는 말이로군.”
천개방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죄송합니다.”
“자네를 탓하려는 게 아닐세. 다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처음부터 다시 조사해 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네. 시신을 처음 발견한 네 사람 중 이존휘는 제일 첫날에 만나 보았고, 조일평과 다른 한 사람도 어제 만났네. 오직 그녀만 아직 만나지 못했으니, 하루라도 빨리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네.”
천개방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이존휘와 조일평에게도 별다른 점을 밝혀내지 못했는데, 그녀를 만난다고 뾰쪽한 수가 있겠습니까?”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아무튼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지 않나?”
천개방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제자들을 풀어 그녀를 수소문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네. 그리고 개방에서는 아직 아무런 움직임이 없나?”
“그게 이상합니다. 장안분타주인 소방방이 의문(疑問)의 변사(變死)를 했는데도 이틀이나 지나도록 개방에서 다른 고수가 파견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곡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들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 지금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그리 많지 않네. 그녀를 만나서도 흉수에 대해 별다른 점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남은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뿐일세.”
천개방은 급히 물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곡수의 눈빛이 유난히 번쩍거렸다.
“검심각으로 가서 서문동회를 직접 만나는 것이지.”
천개방의 안색이 무겁게 변했다.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군요.”
“그렇지. 그래서 일이 거기까지 가기 전에 반드시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 걸세.”
“정말 속상해 죽겠네.”
서문연상은 고운 아미를 잔뜩 찌푸리며 볼멘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나만 쏙 빼놓고 대체 어디를 간 거야?”
그녀가 불평하는 대상은 그녀의 숙부뻘인 해천팔검의 세 사람이었다.
어제 저녁, 그들은 그녀에게 잠깐 확인할 것이 있다면서 자신들의 숙소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그런데 벌써 밤이 지나고 다음 날의 하루가 거의 지나도록 그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참다못한 그녀는 숙소를 나와 장안의 거리를 헤매고 다녔으나, 그들의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화가 나기도 하고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해서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그들의 무공을 생각하면 별다른 일이 있을 리 없다고 스스로를 위안해 보았지만,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고 천방지축인 그녀였으나, 막상 일이 이렇게 되자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녀는 이존휘를 찾아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부탁할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이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이 공자가 만약 우리가 검보의 사람들이란 것을 알면 경계심을 잔뜩 품을 거야. 그런 상태라면 도와 준다고 해도 찜찜해서 오히려 더 불안해질 게 틀림없어.’
그렇다고 장안에 달리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고민을 하며 걷던 그녀는 문득 자신의 발길이 예전에 괴인을 만났던 그 허름한 주루로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내심 흠칫 놀랐다.
‘내가 왜 여기로 가고 있지? 설마 그 괴인을 만나서 도움이라도 청할 생각이었던 거야?’
그에 대한 해답은 그녀 자신도 정확히 내릴 수가 없었다.
주루 앞에 도착하자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우연히 보았던 괴인이 저 주루에 계속 있다는 보장도 없고, 또 운 좋게 괴인을 만난다고 해도 그에게 무어라고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한동안 주루 앞에서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던 그녀는 마음을 결정한 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일이 닥치면 그때 가서 생각하는 거야. 고민이 많으면 빨리 늙는다는데, 괜히 먼저 고민할 필요 없잖아.’
일단 마음을 정하자 오히려 홀가분해졌는지 그녀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경쾌한 걸음으로 주루를 향해 걸어갔다.
“어서 오십……”
주루 안으로 들어오는 손님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던 정산은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하나 이내 얼굴에 성난 표정이 떠올랐다.
“당신은……”
그가 채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그녀는 고개를 쳐들고 도도한 얼굴로 그를 스치고 지나가더니 중앙에 있는 빈 탁자에 가서 앉았다.
“손님이 왔는데 주문 안 받고 뭐 해요?”
그녀가 오히려 호통을 치자 정산은 어이가 없는지 입을 반쯤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점차로 얼굴이 붉게 상기되며 코에서 거친 숨소리가 흘러 나왔다.
“이…… 이런……”
“여기에 녹두활어(綠豆活魚)하고 청초육사, 그리고 연화탕(蓮花蕩) 하나만 갖다 주세요. 음식은 짜지도 맵지도 않게 간을 하고, 식초는 절대로 넣지 말아야 해요. 알았죠?”
정산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지건 말건 그녀는 자기 할말만 하고는 그는 쳐다보지도 않고 주루 안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은은한 실망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주루 안에는 괴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한쪽 구석에서 털북숭이 장한과 애꾸눈의 사나이가 궁상맞은 모습으로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은 식사시간도 아니었고, 이곳은 중심부에서 많이 벗어난 외진 곳이라 손님이 거의 없다는 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녀는 왠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짐을 느꼈다.
정산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분간이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확인해 봐도 일전에 음식값을 떼어먹고 몰래 도망친 소녀가 분명한데 이리도 당당하게 나오니 오히려 자기가 무언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가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을 결정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을 때, 그녀가 힐끗 그를 돌아보더니 싸늘하게 쏘아붙이는 것이었다.
“빨리 가서 음식 만들지 않고 거기서 뭐 하는 거예요? 설마 내가 음식값도 없이 주문을 했을까 봐서 그래요?”
정산은 울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어 표정이 이상야릇하게 변했다. 그녀는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금화 한 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봤어요? 빨리 안 만들어 오면 그냥 나가버릴 거예요.”
금화 한 냥이면 은화로 스무 냥이 되니 음식값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먼젓번의 음식값까지 같이 계산해도 오히려 자기가 적지 않은 금액을 거슬러 줘야 할 판이었다.
‘좋아, 이따가 계산할 때 보자. 일전의 몫에 이자까지 받아내고야 말 테니…’
정산은 속으로 단단히 벼르며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혀를 낼름거리고는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금화를 재빨리 도로 품안에 집어넣었다. 한쪽 구석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털북숭이 대한과 애꾸눈의 중년인이 자기들끼리 무어라고 나직하게 소곤거렸다.
‘네놈들이 이 금화를 탐내는 모양인데, 허튼수작을 부리려 했다간 이 아가씨에게 호된 경을 치고야 말 것이다.’
그녀는 그들의 행동을 지레짐작하고는 쌍심지를 세우며 그들을 쏘아보았다. 그때 한 사람이 주루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체구가 왜소하고 안색이 창백한 십칠팔 세 가량 된 소년이었다. 소년은 무심코 주루를 들러보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갑자기 얼굴이 새빨갛게 된 채 허겁지겁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서문연상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뭐 저렇게 수줍음 많은 사람이 다 있어? 나보다 한두 살 어린 것 같은데, 있는 집에서 신주 단지 모시듯 귀하게 자란 티가 팍팍 나는군.’
그녀는 마치 자신이 노련한 강호인(江湖人)이기라도 한 것처럼 소년의 나약한 모습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렇게 부잣집 귀공자 같은 녀석이 이런 허름한 주루에는 웬일이지? 가출(家出)이라도 한 걸까?’
그녀는 자신의 처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소년에 대해 제멋대로 이런저런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부모가 자기 말대로 안 해주는 게 있으니까 홧김에 뛰쳐나온 걸거야. 아무튼 이래서 아무리 자식이 귀하다고 너무 곱게만 키워서는 안 된다니까. 조금만 크면 다들 제멋대로 하려고 하니……’
그녀의 상상은 점점 깊어져 갔다.
‘막상 집을 나오긴 했는데, 돈은 떨어지고 그렇다고 자존심을 굽히고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으니 이런 곳을 전전하는 것이겠지. 아마 며칠 못 버티고 훌쩍거리면서 집으로 돌아갈 게 틀림없어.’
소년은 쭈삣거리더니 한쪽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털북숭이 대한과 애꾸눈의 사나이에게로 다가갔다.
‘어? 벌써 돈이 떨어져서 구걸을 시작했나?’
그녀의 고운 아미가 상큼하게 찌푸려졌다.
‘나한테까지 오면 어쩌지? 나도 남은 거라곤 달랑 이 금화 한 냥밖에 없는데…’
그녀가 걱정 아닌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소년은 애꾸눈의 사나이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애꾸눈의 사나이는 소년을 힐끔 쳐다보더니 턱으로 앞에 있는 빈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라. 뭐라도 먹어야지. 뭘 먹을 테냐?”
소년은 조금 망설이다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아무거나 시켜 주세요.”
털북숭이 대한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흐흐…… 젊은 녀석이 피죽도 못 얻어먹었나? 목소리가 왜 그 모양이냐? 너 같은 녀석에게는 사슴 피와 곰 쓸개가 최고인데, 다음에 내가 집에 돌아가면 네놈이 평생 먹을 만큼 구해 주겠다.”
소년은 얼굴이 빨개져서 도리질을 했다.
“아니에요. 저한테 신경 쓰지 마세요. 전 그런 거 못 먹어요.”
털북숭이 대한은 고리눈을 부릅떴다.
“아무 소리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해. 남의 성의를 무시하면 못쓰는 법이다.”
소년은 고개를 푹 처박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애꾸눈의 사나이가 조용히 그를 제지했다.
“사람마다 취향이 틀린데 무작정 장 형의 생각만 고집할 수는 없지 않소? 저 아이의 천성인 듯 하니 내버려 둡시다.”
털북숭이 대한은 연신 투덜거렸다.
“아니, 진 아우의 주위에는 왜 맨 저런 녀석들밖에 없는 거야? 어제 그 꼬마 녀석도 참 이상한 놈 아니오? 열 살밖에 안된 녀석이 과묵하기가 완전히 다 늙은 노인네 같으니 어린아이다운 귀여운 구석이 한군데도 없단 말이오.”
애꾸눈의 사나이는 빙그레 웃었다.
“내가 보기엔 무척 귀엽고 총명한 아이인데 왜 그러시오?”
“그거야 나이 어린 사제(師弟)가 생긴 재미에 빠져 동 형의 눈이 잠시 삔 거겠지. 아무튼 어린 녀석이 둘씩이나 있어 귀여워해 주려고 했더니 한 놈은 늙은 영감 같고, 다른 한 놈은 분냄새 풍기는 계집아이 같으니 이거야 원…”
그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소년이 갑자기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털북숭이 대한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뭐라고?”
소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나직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뭐라고 해도 좋은데 나를 여자와 비교하지 마세요. 나는 당신에게 그런 모욕을 당할 이유가 없단 말이에요.”
털북숭이 대한은 어이가 없는지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애꾸눈의 사나이가 옆에서 조용히 웃었다.
“이번에는 장 형이 한 대 맞았구려. 하하……”
“이거 정말……”
털북숭이 대한은 쓴입맛을 다시더니 돌연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 말이 맞다고 해두자. 그런데 그런 말을 할 때는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하는 게 예의다. 그렇게 고개를 처박고 입 속으로 우물거리고 있으면 누구라도 나처럼 생각할 거란 말이다.”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는 털북숭이 대한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털북숭이 대한은 그의 아래턱이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앞으로는…… 나한테 여자 같다는 말을 하자 마세요.”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소년은 아마 마음속의 용기를 있는 대로 끄집어내었을 것이다.
털북숭이 대한은 고리눈을 부릅뜨고 소년의 두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소년은 입술을 악다문 채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언뜻 털북숭이 대한의 얼굴에 엷은 미소 같은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좀 남자다워졌군. 알았다, 앞으로는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으마.”
소년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애꾸눈의 사나이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네 심정을 이해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너에게 어떤 대접을 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너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너를 괄시한다고 그 사람을 탓하기 전에 네 자신의 행동에 잘못된 점은 없는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순서 아니겠느냐?”
“…”
소년은 가타부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나 애꾸눈의 사나이는 고개를 떨군 소년의 유난히 길다란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털북숭이 대한이 싱겁게 히죽 웃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된통 혼이 났군. 이래서야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지 콧구멍으로 넘어가는지 모르겠소.”
“어느 쪽으로 넘어가든 장 형의 뱃속으로 들어가긴 마친가지이니 신경 쓸 것 없지 않소?”
“어? 그런가?”
두 사람은 다시 낄낄거리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한쪽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서문연상은 잠시 묘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거칠고 우락부락해 보이는 털북숭이 대한은 의외로 대범한 구석이 있었고, 냉정하고 차가워 보이는 애꾸눈의 사나이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 같았다.
그리고 겁 많고 소심한 소년은 뜻밖에도 자존심 강한 성격이었던 것이다.
서문연상은 그들 세 사람이 잘 어울려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주 조금이지만 부럽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녀 주위에는 저렇게 거칠고 투박해 보이면서도 잔정을 지닌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때 정산이 주방에서 음식들이 담긴 쟁반을 들고 나왔다.
정산은 음식들을 그녀의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멀지 않은 곳에 앉아서 그녀를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영락없이 그녀가 음식을 먹고 그전처럼 내빼지 못하도록 지켜보겠다는 무언(無言)의 시위였다.
그녀의 눈꼬리가 매서워졌다.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요?”
정산은 턱을 고인 채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앉아 있는 거요. 소저는 식사나 하시오.”
“당신의 그런 얼굴을 보고 있으면 음식이 넘어갈 것 같아요? 생긴 것도 밥맛 없게 생겨 가지고 하는 짓도 왜 저러는지 몰라.”
정산의 얼굴이 휴지 조각처럼 구겨졌다.
‘아니, 이 계집애가 보자보자 하니까 정말……’
정산이 참지 못하고 벌컥 화를 내려 할 때, 마침 애꾸눈의 사나이가 그를 불렀다.
“여기도 주문 좀 받으시오.”
정산은 서문연상을 잔뜩 노려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고는 애꾸눈의 사나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문연상은 새침한 표정으로 젓가락을 들더니 녹두활어를 집어먹기 시작했다.
“생긴 건 저래도 음식 맛은 제법이네.”
그녀가 혼자 중얼거리면서 음식을 먹고 있을 때 다시 누군가가 주루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이번에 들어온 사람은 모두 두 사람이었다.
우측의 인물은 머리를 뒤로 단정하게 묶고 짙은 남색 장포를 입은 삼십대 중반의 인물이었고, 좌측의 인물은 그와는 반대로 헝클어진 머리에 몸에는 거친 마의(麻衣)를 걸친 이십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두 사람의 행색은 서로 판이했으나, 전신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이상하리만치 비슷했다.
어딘지 모르게 음침하고 칙칙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지금도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 들어오자 주루 안의 분위기가 갑작스레 썰렁해지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앉은 자리는 마침 서문연상과 마주보는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서문연상은 싫든 좋든 그들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아야만 했다.
서문연상은 그들을 힐끔거리고는 고운 입술을 삐죽거렸다.
‘음식 맛 다 달아나네. 얼굴에 철가면이라도 뒤집어 썼나? 왜 저렇게 표정이 무미건조한 거야?’
아닌게 아니라 두 사람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아서 보기에 따라서는 섬뜩한 느낌마저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때 우연인지 남색 장포의 중년인과 그녀의 시선이 미주쳤다.
그 순간, 남색 장포의 중년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를 보자 서문연상은 왠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싸늘한 냉기가 솟구쳐 올라왔다.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은데 입가에만 엷은 미소를 짓고 있어서 마치 유령(幽靈)의 미소를 보는 것 같았던 것이다.
서문연상은 기분이 나빠져서 이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정산이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얼 드시겠습니까?”
남색 중년인의 얄팍한 입술이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살짝 열리며 얼굴 표정만큼이나 무심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만두 한 접시, 술 한 병.”
‘제길, 두 사람이 와서 겨우 만두 하나만 시키는 거야?’
정산은 속으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으나, 왠지 껄끄러운 생각이 들어 두말없이 주방으로 물러났다.
서문연상은 음식을 더 먹고 싶은 생각도 없고, 언제까지 이곳에 앉아서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괴인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주방에서 만두와 술을 가지고 나오던 정산이 이 모습을 보자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음식들을 두 사람의 탁자에 내려놓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그녀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그녀는 그의 속마음을 훤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전혀 모르는 척 태연하게 물었다.
“측간이 어디예요?”
정산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그녀는 좀더 그를 약올리려다 그럴 기분도 나지 않아서 품속에서 금화를 꺼내 들었다.
“당신 얼굴을 보니 가고 싶은 생각도 없어졌어요. 계산이나 해요.”
정산은 귀가 번쩍 뜨여 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일전에 소저가 먹은 음식 값도 포함해서요?”
“그럼 내가 그깟 몇 푼 되지도 않는 음식값을 떼어먹을 사람으로 보여요? 참, 당신 혹시 그들 부자(父子)에게서 음식값을 받은 건 아니겠죠?”
정산은 그녀가 말한 부자(父子)가 누구를 말하는지 몰라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들 말이오? 안심하시오. 그들에게는 한푼도 받지 않았소.”
그녀는 수상쩍은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당신 말을 어떻게 믿어요? 혹시 다른 사람에게 이미 음식값을 받아놓고 나한테 또 바가지를 씌우려는 건 아니겠죠?”
정산은 절로 찔끔하는 심정이 되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때의 음식값은 방취아가 지불했던 것이다.
하나 그렇다고 이 얄미운 소녀를 그냥 보낼 수도 없지 않은가?
정산은 눈을 딱 감고 거짓말을 했다.
“안 받았소. 나는 소저가 다시 이곳에 찾아와서 계산해 주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소.”
“나를 속일 생각은 아예 꿈도 꾸지 말아요. 나중에라도 내가 사실을 확인해 봐서 당신이 이중으로 돈을 받았으면 아예 이 코딱지만한 주루의 기둥뿌리를 뽑아 버릴 테니까.”
그녀는 여인답지 않은 험악한 소리를 하며 그를 협박했다.
정산은 공연히 걱정이 되기도 했으나, 지금 안 받으면 이 맹랑한 아가씨에게 언제 돈을 받겠느냐 싶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그녀가 그런 사실을 무슨 수로 확인해 보겠는가?
“물론이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소저를 고모님이라고 부르겠소.”
서문연상은 냉랭하게 웃었다.
“당신 같은 조카는 필요 없어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요. 고모님이 뭐야, 고모님이? 아예 할머님이라고 부르는 게 더 낫겠네.”
그녀가 무어라고 자꾸 궁시렁거리자 정산은 그녀의 마음이 변할까 싶어 재빨리 금화를 들고는 은화 열두 냥을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일전의 음식값 여섯 냥과 오늘의 음시값 두 냥 해서 모두 여덟 냥을 제외한 나머지요. 확인해 보시오.”
그녀는 세지도 않고 은화를 품속에 집어넣은 후 한 번 더 날카로운 눈으로 정산을 요리조리 쏘아보았다.
“아무리 봐도 미심쩍어. 당신같이 눈썹이 가늘고 입술이 두꺼운 사람은 전형적인 좀도둑 상이란 말이야. 아무튼 내가 나중에 분명히 확인해 볼 테니까 거짓말이면 단단히 각오하고 있는게 좋을 거예요.”
정산은 그녀의 말을 더 듣고 있다가는 혈압이 올라서 쓰러져버릴 것 같았는지 오만가지 인상을 찡그리더니 휑하니 몸을 돌려 주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서문연상은 한 번 더 그에게 무어라고 해주려다가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주루 밖으로 나왔다.
막상 주루를 나오긴 했으나 뚜렷이 갈 데도 없어서 망설이고 있던 그녀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지금쯤 숙부님들이 돌아오셨을지도 모르겠는걸.’
그 생각을 하자 절로 마음이 급해져서 그녀는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한시라도 빨리 숙소로 가기 위해 골목길로 접어들던 그녀의 몸이 갑자기 우뚝 멈춰졌다.
별로 넓지도 않은 골목의 한쪽 구석에 거렁뱅이 하나가 거적때기 위에 쭈그리고 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던 것이다.
날씨가 비록 그리 춥지 않다고 해도 엄연히 한겨울인데, 맨바닥에 거적때기 하나를 깔고 졸고 있다니 얼어죽기 딱 좋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품속에서 은화 한 냥을 꺼내 거렁뱅이의 앞에 던져주었다.
“이봐요, 여기서 졸지 말고 이 돈 가리족 객잔이라도 들어가서 자도록 해요.”
땡그랑!
동전 떨어지는 소리에 거렁뱅이는 잠이 확 깨었는지 황급히 동전을 집어들더니 이로 깨물어 보는 것이었다.
“아이고, 진짜구나.”
호들갑을 떨던 거렁뱅이는 그녀는 향해 연신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었다.
“고맙소, 소저. 소저는 정말 복 많이 받을 거요.”
거렁뱅이는 머리카락에 백발이 성성했는데, 의외로 얼굴에는 수염도 거의 나지 않았고, 주름살도 별로 없어 피부가 맨들맨들했다.
하나 코에 빨갛게 주독(酒毒)이 올라 있어 조금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녀가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거렁뱅이는 그녀를 올려다보더니 손뼉을 탁 치는 것이었다.
“소저의 상을 보니 조만간에 틀림없이 멋진 배필을 만나게 될 거요. 더구나 귓볼이 두툼한 것이 결혼만 하면 아들딸을 쑥쑥 낳아서 자손이 만대(萬代)로 번창할 상이니 정말 행복한 말년을 보낼 수 있을 거요.”
그녀의 얼굴이 쌀쌀맞게 변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아요.”
“정말이오. 이 노화자(老化子)는 지금까지 동냥질할 때 외에는 거짓말을 해 본 적이 없소.”
거렁뱅이가 제법 정색을 하며 말하자 그녀는 화를 낼 수도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지금 하는 건 동냥질이 아닌가요?”
“어? 그런가? 그럼 동냥질하지 않을 때만 거짓말을 한다오.”
“풋!”
그녀가 짤막하게 웃음을 터뜨리자 거렁뱅이는 누런 이를 드러내면서 따라 웃었다.
“소저의 웃는 모습이 정말 예쁘구려. 누가 소저의 배필이 될지는 모르지만 정말 복 받은 친구요. 그런데 소저는 저 골목을 지나려고 하오?”
거렁뱅이가 때가 꼬질꼬질한 손가락으로 골목 안쪽을 가리키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거렁뱅이의 얼굴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표정이 떠올랐다.
“그 길은 좋지 않소. 돌아가시오.”
서문연상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무심결에 되물었다.
“뭐라고요?”
“돌아서 큰길로 가시오. 저 골목은 아주 좋지 않은 냄새를 풍기고 있소.”
그녀는 거렁뱅이가 또 농(弄)을 하는 줄 알고 빙긋 웃었다.
“그게 무슨 냄새인데요?”
거렁뱅이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까치집같이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두 개의 눈빛이 유성(流星)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피와 죽음의 냄새.”
뜻밖의 말에 서문연상의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거렁뱅이의 농담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나 거렁뱅이의 안색은 진지하다 못해 심각해 보였다.
“노화자의 말을 허투르 듣지 마시오. 소저가 이 골목을 지나가려 하다가는 피와 죽음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오.”
그녀는 조금 겁이 나기도 했으나 이내 태연한 척 웃었다.
“그래서 나한테 그걸 알려 주려고 여기서 졸고 있었던 거로군요.”
그녀는 농담 삼아 말했는데, 의외에도 거렁뱅이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았다면 이 추운 겨울날에 무슨 얼어죽을 일이 있다고 노화자가 여기에 쭈그리고 앉아 있겠소?”
“아니, 그럼 나를 만나려고 일부러 여기에 있었단 말이에요?”
“그렇소. 더 늦기 전에……”
갑자기 거렁뱅이의 얼굴이 홱 변했다.
“이거 큰일났군.”
그녀는 거렁뱅이의 시선이 자신의 등뒤를 향하고 있음을 깨닫고 황급히 몸을 돌렸다.
골목의 입구로 한 사람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 사람은 뜻밖에도 조금 전 주루에서 보았던 남색 장포를 입은 중년인이 아닌가?
그의 얼굴에는 예의 그 괴이하다 못해 소름이 끼치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 미소를 보자 그녀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때 그녀는 다시 등뒤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반대편 골목의 짙은 그림자 속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남색 장포의 중년인과 동행이었던 마의청년이었다.
도대체 마의청년이 무슨 수로 그들의 반대편에 가 있을 수 있었는지 의아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의혹보다는 공포(恐怖)가 더 강했다. 두 사람은 느릿느릿 거렁뱅이와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그드르이 전신에서 뿜어 나오는 괴이한 살기에 짓눌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그내의 귓전으로 거렁뱅이의 전음성(傳音聲)이 들려 왔다.
“노화자가 저들을 유인할 테니 소저는 전력을 기울여 조금 전의 그 주루로 도망치시오.”
그녀는 그가 상당한 무공을 지닌 고수임을 알고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개방이 고수란 말인가? 그런데 왜 죽장과 의결이 없지?’
그녀가 의혹 어린 눈으로 거렁뱅이를 쳐다보자 거렁뱅이의 얼굴에 다급한 빛이 떠올랐다.
“나를 믿고 따르시오. 그렇지 않으면 소저는 살아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거요. 저 두 괴물(怪物)은 나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단 말이오.”
그녀는 아직 내공이 약해 거렁뱅이처럼 전음을 펼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묻는 듯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거렁뱅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전음을 보냈다.
“나는 개방의 오의단(汚衣團) 소속의 옥취개(玉醉?) 송결(宋缺)이라 하오.”
그 말에 서문연상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오의단은 개방의 총단(總壇)에 직속해 있는 세 개의 비밀조직 중 하나로, 개방에서도 가장 실력이 뛰어난 고수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그들 개개인의 실력은 한 지방의 분타주에 못지 않으며, 장로(長老)급의 무공을 지닌 고수들도 적지 않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녀는 눈앞의 거렁뱅이가 설마 개방에서도 최정예 조직 중 하나인 오의단 소속의 고수일 줄은 몰랐는지 놀라움과 함께 짙은 의혹을 느꼈다. 대체 오의단의 고수가 이곳에는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리고 두 명의 괴인들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은 또 어떻게 안 것일까? 두 명의 괴인들은 대체 무슨 이유로 자신을 노리고 있단 말인가? 의혹이 구름처럼 일었지만 지금으로썬 어느 한 가지 속시원히 알 수가 없었다. 송결이라 정체를 밝힌 거렁뱅이는 자신들의 앞뒤에서 다가오는 두 명의 괴인들을 연신 훔쳐보더니 그들과의 거리가 점차로 가까워지자 조급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다시 그녀를 향해 전음을 날렸다.
“명심하시오. 내가 이들을 잠깐 막을 수는 있으나 이들은 곧 내 방해를 뚫고 소저를 쫓아갈 거요. 그러니 소저는 전력을 다해 이 골목을 벗어난 다음 조금 전에 나왔던 주루로 돌아가시오.”
그녀는 왜 하필이면 그 주루로 가라고 하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마음속을 짐작이라도 하듯 송결의 전음이 이어졌다.
“이들이 주루에서 소저를 살해하지 않은 것은 그곳에 이 악마(惡魔) 같은 자들도 함부로 하기 힘든 절정고수가 있기 때문이었소. 그러니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곳으로 도망가시오. 그것만이 소저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들에게로 다가오고 있던 남포중년인의 입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흐흐…… 하필이면 숨이 끊어질 장소로 이런 지저분한 골목을 택하다니 취향도 특이한 계집이군.”
그 음성에 실린 진득한 살기는 그녀가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덜덜 떨려 왔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이토록 노골적인 살기를 뿜어내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체 그들은 무슨 이유로 자신을 살해하려 한단 말인가? 웃음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남포중년인의 신형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더니 그녀를 향해 미끄러지듯 날아왔다. 마치 유령이 움직이는 것처럼 가공스런 신법이었다. 이 광경을 보자 그녀는 까무러치듯 놀라며 소리쳤다.
“부영수형(浮影隨形)……!”
그것은 마도(魔道)에서도 전설적인 신법으로 알려진 부영수형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말로만 들었지 이러한 신법을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와 함께 등뒤에서 천천히 다가오던 마의청년이 갑자기 성큼 안으로 크게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자 사오 장의 거리가 갑자기 단축되며 그의 신형은 어느새 손을 뻗으면 그녀의 목덜미가 닿을 정도까지 바짝 접근되었다. 그녀가 만약 고개를 돌려 이 광경을 보았다면 더욱 크게 놀랐을 것이다. 이 특이한 걸음이야말로 도가(道家)의 축지성촌(縮地成寸)과 쌍벽을 이룬다는 마도의 마보일척(魔步一尺)이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그녀의 앞뒤로 두 명의 괴인들이 덮쳐 왔다. 바로 그 순간, 지금까지 바닥에 앉아 있던 송결이 벌떡 일어나며 깔고 있던 거적때기를 세차게 휘둘렀다.
쏴아아……
마치 폭우가 쏟아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거적때기에서 수백 개의 쇠털 같은 암기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백보신포(百寶神包)…… 개방의 거지였구나!”
남포중년인이 버럭 외치며 양손을 질풍처럼 휘둘렀다. 그러자 그토록 자욱하게 날아들던 쇠털들이 마치 태풍을 만난 나뭇잎들처럼 흩어져 버렸다. 송결은 계속 미친 듯이 거적때기를 흔들었다. 거적때기에서 뭉클한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갑자기 폭죽이 터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불똥이 마구 튀었다.
파파파팍!
그 불똥이 바닥에 닿자 땅에서 불길이 피어올랐다. 실로 무시무시한 화력(火力)이 아닐 수 없었다.
“비린화(飛燐火)로군.”
남포중년인도 그 불똥은 함부로 대할 수 없는지 이리저리 몸을 날려 불똥을 피했다. 뒤에서 다가오던 마의청년도 어쩔 수 없이 접근을 포기하고 불똥을 피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순간, 송결은 서문연상의 등을 세차게 떼밀었다.
“지금이오. 가시오!”
그녀의 몸이 사오 장을 질풍처럼 날아갔다. 남포중년인이 손을 내밀어 그녀를 제지하려 했으나 불똥이 계속 날아오는 바람에 일시지간 어쩌지를 못했다. 그녀는 아슬아슬하게 그를 스쳐 지나가며 계속 달려갔다.
“제법 약은 수를 쓴다만 어림없다!”
남포중년인이 냉랭하게 웃으며 양쪽 소매를 거세게 휘둘렀다.
콰앙!
벽력(霹靂)이 치는 듯한 폭음이 터지며 골목의 한쪽 벽이 우르르 무너져 버렸다. 남포중년인은 무너진 한쪽 벽면을 타넘으며 송결의 필사적인 제지를 뚫고 그녀를 쫓아왔다.
“이야압!”
송결은 주위가 떠나갈 듯한 고함을 내지르며 거적때기를 그에게로 집어던졌다.
남포중년인은 막 서문연상의 뒤로 바짝 다가서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거적때기가 들어왔다.
남포중년인은 미처 피할 사이가 없어 오른쪽 소매를 흔들었다.
팡!
거적때기가 그의 소맷자락에서 흘러 나오는 경풍에 휩싸여 하늘로 올라갔다.
다음 순간,
파아아아……
거적때기가 허공에서 그대로 폭발하며 반경 삼 장 이내를 자욱한 연기로 뒤덮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런 육시를 낼 거지새끼가!”
남포중년인이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지르며 양손을 질풍처럼 마구 휘둘렀다.
꽈르르릉!
서문연상은 골목 전체가 금시라도 무너질 듯 마구 뒤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더욱 다급하게 달려갔다. 조금만 발길을 늦추어도 남포중년인의 무시무시한 손이 자신의 목덜미를 움켜쥘 것만 같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가 막 골목을 벗어났을 때, 그녀의 귓전으로 들려 온 것은 송결의 처참한 비명 소리였다.
“으아악!”
그녀는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어두워 오는 거리를 미친 듯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