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1권 혈사지미(血事之迷)편 :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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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1권 혈사지미(血事之迷)편 : 8화


제108장. 미궁지로(迷宮之路)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주위에 하나둘씩 등불이 켜지면서 주루도 조금씩 소란스러워 갔다.
섬서성의 겨울바람은 유난히 매서워서 해가 떨어지면 거리에 인적(人跡)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 주루 앞에는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이 남자들이었으며, 그들의 시선이 집중된 곳은 주루의 입구였다.
두 필의 말을 타고 주루 앞에 막 내려선 두 명의 인물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끈 것이다.
그들은 여인들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눈에 번쩍 뜨이는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좌측의 여인은 계란형의 얼굴에 유난히 하얀 피부를 지니고 있었고, 우측의 여인은 발랄하면서도 깜찍한 용모의 미소녀였다.
서안에 비록 미녀들이 많다고는 해도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들은 결코 흔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런 미녀들이 늦은 저녁 시간에 주루에 나타났으니 뭇 남자들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 중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여인은 태연한 표정으로 주루 안으로 들어섰다.
방금 전만 해도 왁자지껄하던 주루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중인들의 시선은 온통 두 여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꿀꺽!

그러다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를 시작으로 다시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시 소란스럽게 떠들기 시작했고, 술을 권하는 소리와 고함치는 소리가 뒤섞여 시장바닥을 연상케 했다.
하나 그러는 와중에도 사람들의 시선은 알게 모르게 두 명의 여인들을 향하고 있었다.
여인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빈자리를 찾지 못하자 잠시 당혹해하는 모습이었다.
아직 저녁시간이 되지도 않았는데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확실히 이 주루는 유난히 장사가 잘되었다.
길목이 특별히 좋은 것도 아니고 주변이 번화한 것도 아니었지만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녀들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점소이 하나가 그녀들에게 달려왔다.

“두 분뿐이십니까?”

발랄한 용모의 미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식사를 하려고 왔는데 마땅한 자리가 없군요.”

점소이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층으로 올라가시죠. 마침 좋은 자리가 있습니다.”

점소이는 그녀들을 이층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들이 점소이를 따라 이층의 계단을 올라가자 곳곳에서 사람들의 한숨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이었다.

“휴우… 제길.”

“결국 오늘도 좋은 꽃들이 꺾이겠구나.”

여기저기서 들려 오는 탄식 소리가 그녀들의 귀에 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 웬일인지 두 여인은 아무 소리도 못 들은 것처럼 점소이를 따라 이층으로 올라갔다.
이층은 소란스러운 일층과는 달리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벽면의 장식부터 일층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널찍한 이층도 빈자리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는데, 특이하게도 중앙에 있는 유달리 커다란 탁자 주위에만 달랑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자는 화려한 장포를 입고 구레나룻을 기른 중년인이었다.
점소이는 그 중년인이 앉아 있는 탁자 앞으로 다가가더니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손님, 합석을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구레나룻의 사나이는 점소이 뒤에 있는 미녀들을 힐끔 쳐다보더니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게.”

점소이는 다시 미녀들을 돌아보았다.

“이분 자리가 제법 넓으니 이곳이면 두 분도 편하게 식사를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여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다가 구레나룻의 사나이 앞에 가서 앉았다.
점소이가 물었다.

“무얼 드시겠습니까?”

여인들이 음식을 주문하자 점소이는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그동안에도 구레나룻의 사나이는 두 여인을 찬찬히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 고개를 돌린 발랄한 용모의 미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뜻밖에도 미소녀는 그를 향해 방긋 미소를 짓는 것이 아닌가?

“합석에 응해 줘서 고마워요.”

구레나룻 사나이는 점잖게 웃었다.

“별말씀을. 그렇지 않아도 넓은 탁자를 혼자 쓰고 있어서 조금 미안했던 참이었소.”

이번에는 그녀가 구레나룻 사나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구레나룻 사나이는 얼굴이 유난히 붉었는데, 제법 남자답게 생긴 용모에 호감 가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단지 양쪽 귀의 크기가 서로 다른 짝귀인 것이 조금 아쉬워 보였다.
구레나룻 사나이는 미소녀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지 여전히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서로 통성명이나 하는 것이 어떻겠소?”

미소녀는 다시 배시시 웃었다.

“여인에게 이름을 물어 보는 것은 실례라는 것도 모르세요?”

“그렇구려. 하지만 나는 여인이 아니니 기꺼이 이름을 밝히겠소. 나는 노해광이라 하오.”

“당신이 선뜻 이름을 밝히니 우리도 그냥 있을 수는 없군요. 나는 누씨(누氏)이고 이 언니는 유씨(劉氏) 에요. 이 정도로도 괜찮겠죠?”

그녀의 말과 행동이 너무 깜찍스러워서 노해광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허허… 물론 그것으로 충분하오. 오늘 두 분 소저를 만난 것은 나의 홍복(洪福)이라 아니할 수 없구려.”

누씨 소녀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노해광을 보며 물었다.

“노 대협은 무얼 하는 분이세요?”

노해광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대협이라니… 내가 무림인이라고 생각하오?”

누씨 소녀는 여전히 방실방실 미소지었다.

“물론이지요. 그것도 아주 상당한 실력을 지닌 고수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틀렸나요?”

노해광의 눈이 번쩍 빛났다.

“왜 그렇게 생각하오?”

“우선 당신의 눈빛은 보통 사람에 비해서 유난히 힘이 있게 빛나고 있어요. 그건 아주 정순(精純)한 내공을 지닌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안광이죠. 더구나 당신의 양쪽 태양혈(太陽穴)은 불룩하게 솟아나 있어 그 사실을 뒷바침해 주고 있어요.”

“…”

“둘째로 당신의 손을 보니 손가락이 길면서도 손마디마다 근육이 박여 있어요. 그건 오랫동안 검을 잡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징이죠. 마지막으로 당신이 앉아 있는 자세를 들 수 있죠. 언뜻 두 다리를 살짝 벌리고 오른쪽 뒤꿈치를 들고 있군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지 않은 것도 아주 좋은 자세예요. 내가 잘못 본 건가요?”

노해광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가 돌연 한숨을 토해냈다.

“아니오. 소저는 아주 정확히 보았소.”

“그런데 왜 한숨을 쉬고 있죠?”

노해광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건 소저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오. 눈앞의 고수를 몰라본 내 자신이 너무도 한심스러워서 그런 거요.”

누씨 소녀는 짤랑짤랑한 교소(嬌笑)를 터뜨렸다.

“호호… 눈앞의 고수라니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인가요?”

노해광은 번쩍이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물론이오. 이 세상에서 천봉선자를 고수라고 하지 않으면 누구를 고수라 부를 수 있겠소?”

누씨 소녀의 입가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요?”

“두 분의 성씨와 용모를 보고도 모른다면 강호인(江湖人)이라고 할 수 없겠지. 그런데도 나는 처음에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으니 이런 내 자신이 너무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오.”

노해광은 돌연 그녀들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소. 나는 강호에서 철면호(鐵面狐)라 불리는 노해광이라 하오.”

“우리도 제대로 소개하지요. 나는 누산산이라 하고, 이 언니는 유화화라고 해요.”

“말로만 듣던 천봉팔선자 중의 옥봉과 비봉을 직접 보게 되니 실로 영광이오.”

“우리도 산해루(山海樓)의 주인을 만나게 된 걸 기쁘게 생각하고 있어요.”

노해광은 다시 한 방 먹은 표정이었으나 이내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이거 창피막심하게 되었구려. 내가 이곳의 주인인 것도 알고 있었다니 완전히 부처님 손다박 안의 손행자(孫行者)가 된 기분이오.”

누산산은 피차간에 서로 정체가 들통나자 오히려 마음이 편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듣자하니 노 대협께서는 여인들에게 식사 대접하기를 즐겨한다는데 오늘 우리에게만 예외를 두지는 않겠죠?”

“그것도 알고 계셨소? 물론 이 노해광은 그렇게 소심한 사람이 아니오. 오늘 두 분의 저녁식사는 당연히 내가 대접해 드리겠소.”

“고마워요. 모처럼 푸짐한 식사를 하겠군요.”

노해광은 돌연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두 분이 이곳에 온 것은 단순히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아닌 것 같은데, 내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거요?”

누산산은 살짝 눈웃음을 쳤다.

“여인에게 그렇게 노골적으로 묻는 것은 큰 실례예요.”

누산산의 나이는 아직 스물도 되지 않았으나 그 미태(美態)는 중년의 나이인 노해광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노해광은 원래 미녀를 좋아하는데다 누산산의 나이나 외모는 평소 그가 이상형으로 생각했던 여인과 흡사해서 그녀의 교태 어린 눈웃음을 보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다행히 노해광은 강호 경험이 풍부하고 두뇌가 명석한 인물이어서 흔들리려는 마음을 재빨리 다져잡았다.

“그렇구려. 오늘 두 분 소저를 보니 자꾸 실례만 저지르게 되는 것 같소. 당연히 두 분은 식사를 하기 위해 온 것이고 나는 기꺼이 두 분을 대접하는 것으로 두 분을 만난 기쁨을 대신하면 되는 것이니, 그외의 다른 일은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오.”

노해광의 음성은 당당한 가운데도 겸손을 잃지 않아서 누산산의 마음에 들었다.

‘이자는 생긴 건 거칠고 투박해 보이는데 의외로 섬세한 면이 있구나.’

그후로 노해광은 자신의 말처럼 그녀들이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一言半句)도 하지 않았다.
대신 식사를 하면서 온갖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여 그녀들의 흥미를 돋우었다.
노해광은 생긴 외모와는 달리 말을 잘할 뿐 아니라 좀처럼 듣기 어려운 희귀한 일들을 많이 알고 있어서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화제가 끊이지 않았다.
누산산도 다른 목적이 있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그의 이야기를 즐겁게 들었을 것이다.
하나 상당한 시간이 흘러도 그가 계속 다른 이야기만 하고 있자 조금씩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누산산이 아무리 영리하고 똑똑해도 강호에서 산전수전(山戰水戰)을 겪은 노해광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노해광은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얼굴에 초조한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계속 쓸데없는 이야기만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 내가 묘강(苗疆)의 동굴에서 본 것이 바로 금강신주(金剛神蛛)였소. 이것은 천하에서 가장 특이한 거미의 일종으로, 전신이 강철처럼 단단한 껍질로 둘러싸여 있을 뿐 아니라 사람의 말까지 알아듣는 영성(靈性)을 지니고 있어서 묘강에서는 신물(神物) 중의 신물로 떠받들고 있다고 하오.”

노해광은 입맛을 다셨다.

“이 금강신주를 새끼 때 사로잡아서 키우면 나중에는 주인의 말에 절대 복종한다고 하오. 진작에 그 사실을 알았으면 그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금강신주의 알이라도 훔쳐오는 것인데 그냥 도망쳐 나온 일이 두고두고 후회가 되오.”

“그렇군요.”

누산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 모습은 처음의 열기 띤 반응과는 너무도 판이한 것이었다.
노해광은 속으로 미소가 흘러 나왔으나 전혀 내색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금강신주보다 더 신기한 건 남해(南海)의 어느 무인도에서 보았던 삼목섬여(三目蟾여)라는 것이오. 이건 눈이 세 개 달린 두꺼비인데…”

마침내 누산산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노 대협은 원래 그렇게 말이 많아요?”

“그게 무슨 말이오?”

“어쩌면 한 시진이 넘도록 쉬지도 않고 입을 놀릴 수가 있어요? 정말 노 대협처럼 말 많은 남자는 좀처럼 보기 힘들 거예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여인에게서 이런 말을 듣고 얼굴이 붉어졌을 것이다.
하나 노해광은 오히려 껄걸 소리 높여 웃었다.

“하하… 가끔 그런 말을 듣기는 하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들으면 모두 더해 주기를 바라고 있소. 누 소저는 믿어지지 않겠지만 말이오.”

누산산은 속으로 충분히 믿어지는 일이라고 중얼거렸다.
누산산도 다른 목적이 있지 않았다면 노해광의 이야기를 계속 듣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만큼 노해광의 이야기 솜씨는 탁월한 것이었다.
누산산은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노 대협이 그렇게 세상일을 많이 알고 있다면 요즘 섬서성 일대를 뒤흔들고 있는 취미사에서 벌어진 혈사(血事)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겠군요.”

노해광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찔해졌다.

‘뭐야? 이게 목적이었나?’

하나 이내 노해광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말이오? 자랑이 아니라 적어도 서안 일대에서 나보다 더 많은 소식통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소. 오죽하면 내 별명이 순이통(順耳通) 이겠소?”

“조금 전에는 철면호라면서요?”

노해광은 넉살좋게 웃었다.

“그건 내 낯짝이 두꺼워서 친구들이 부르는 이름이고, 다른 사람들은 순이통이라고 부르기도 하오.”

노해광이 이렇게 말한 것은 누산산을 자극시키기 위해서였다.
과연 누산산은 즉각 그의 꼬임에 넘어갔다.

“그럼 노 대협은 취미사 혈사의 흉수(兇手)가 누구인지 알고 있단 말이에요?”

“그걸 안다면 순이통이 아니라 만리신통(萬里神通)이라고 불러도 될 거요.”

“안단 말이에요, 모른단 말이에요?”

노해광은 피식 웃었다.

“물론 모르오. 아마도 흉수 본인만이 누가 범인인지 알고 있을 거요.”

누산산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면서 그렇게 큰소리를 친 거예요?”

“취미사 혈사는 당금 무림의 최대 현안(懸案) 중 하나요. 그건 단순히 흉수가 누구냐 하는 문제가 아니오. 그 혈사 안에 숨어 있는 내막은 마치 양파 조각처럼 껍질을 벗길수록 더욱 복잡미묘해서 누구도 정확한 내막을 모르고 있소.”

누산산은 그의 말이 일전에 남호가 했던 말과 일맥상통함을 깨달았다.
남호도 그렇고 노해광도 그렇고 취미사 혈사의 흉수가 누구인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과연 이들은 그 혈사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
누산산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시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혈사에 숨은 내막이 무어라고 생각해요? 아니, 혈사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이 있으면 숨기지 말고 말해 보세요.”

그녀는 마침내 속마음을 내비쳤다.
노해광은 속으로 웃으면서도 겉으로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라고 무슨 뾰쪽한 수가 있겠소? 그저 남들 아는 정도밖에 모르오.”

“그 남들 아는 정도라도 말해 보세요.”

노해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차례 어깨를 으쓱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건 모두 세 가지요. 첫째로 취미사 혈사를 일으킨 범인은 한음지기(寒陰之氣)의 신병(神兵)을 흉기로 사용했으며 그것은 검보의 빙백검일지도 모른다는 것, 둘째로 흉수는 취미사를 자주 왕래하는 사람이나 적어도 굉지선사와 차를 마실 정도로 친한 사이의 인물이라는 것, 그리고 셋째로 흉수는 혼자가 아니며 적지 않은 수의 집단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 이 정도는 지금 서안에 사는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알 수 있는 사실들이오.”

노해광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노해광이 말한 것은 취미사 혈사에 대해 한 번이라도 이야기를 들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누산산은 그가 남들이 뻔히 아는 사실만 이야기한 것이 얄미워서 쌀쌀맞은 음성으로 말했다.

“순이통이니 뭐니 자랑하면서 결국 남보다 더 알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군요. 주루 경영만 잘하면 뭐해요? 정작 중요한 건 하나도 모르면서.”

노해광으로서는 그녀의 이런 면박에 화를 낼 법도 했으나, 오히려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심술궂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던 것이다.

“더 아는 게 없어 미안하오. 하지만 누가 범인인지는 모르지만 누가 범인이 아닌지는 알고 있소.”

누산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죠?”

“말 그대로요. 흉수를 모른다면 흉수가 아닌 사람부터 하나씩 혐의에서 지워 나가는 것도 흉수를 색출하는 좋은 방법일 것이오.”

누산산은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의 접근 방법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너무 흉수를 찾는 데만 신경을 기울이느라 그 반대가 되는 상황은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노해광은 생각에 잠겨 있는 누산산을 바라보며 느긋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우선 검법을 익히지 못한 권장(拳掌)의 고수들은 흉수가 아니오. 절정의 검객이 아니라면 사익을 단 일검에 해칠 수 없기 때문이오.”

누산산은 수긍을 했다.

“둘째로 사마외도(邪魔外道)에 속해서 악명을 떨쳤던 인물들도 흉수가 될 수 없소. 그런 인물들이라면 굉지선사가 자신의 방으로 초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익이 경계를 소홀히 했을 리가 없소. 그리고 소저도 알다시피 사익 같은 고수가 경계하고 있다면 누구라도 그를 단 일검에 살해할 수 없소.”

그것도 그녀는 인정을 했다.

“셋째로 아무런 세력에 속해 있지 않고 혼자 떠도는 사람도 제외되오. 아까도 말했다시피 취미사 혈사의 흉수는 거대한 세력을 지닌 인물이기 때문이오.”

그 말도 맞는 말이었다.
자은사에 보관해 놓은 스물두 구의 시체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만 보아도 흉수의 배후에는 큰 세력이 있음이 분명했다.
노해광은 다시 말했다.

“넷째로 대머리도 흉수가 될 수 없소.”

뜻밖의 말에 누산산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네?”

하나 노해광은 잘못 말하거나 농담을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흉수가 굉지선사와 사익을 살해한 수법은 전설적인 살인수법이라는 탈혼검 중의 측탈혼이란 무공이오. 이 탈혼검을 익힌 사람은 미간에 희미한 푸른 선이 생기게 되오.”

“그건 왜 그렇죠?”

“탈혼검은 천하에서 가장 극음(極陰)의 음공(陰功)을 기반으로 하는 수법이기 때문에 체내의 음맥(陰脈)이 과도하게 발달하게 되오. 그중에서도 이마를 지나는 음맥이 피부에서 제일 가깝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거요.”

“그게 대머리와 무슨 상관이…”

“생각해 보시오. 대머리라면 이마의 푸른 힘줄이 대번에 남들 눈에 띄지 않겠소? 그러면 아무리 흉수가 종적을 숨긴다 해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탈혼검을 익힌 것이 들통나게 될 거요. 그리고 탈혼검은 그 무공의 특성상 대머리는 익힐 수 없소. 아니, 탈혼검을 익히면 어떠한 경우라도 대머리가 되지 않는다고 해야 옳겠지. 체내의 음기가 강해져서 머리카락이 쉽게 자라기 때문이오. 여자들 중에 대머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겠지.”

누산산은 그의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안색이 변해 펄쩍 뛰었다.

“그러면 이마에 푸른 선이 나 있는 사람을 찾으면 되겠군요!”

그건 정말 간단한 논리(論理)였다.
대머리가 탈혼검을 익힐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탈혼검을 익힌 사람은 이마에 푸른 음맥이 두드러지게 된다.
그렇다면 결국 흉수는 이마에 푸른 선이 나 있는 인물이란 말이 아닌가?
누산산은 자신이 발견한 사실에 너무 흥분하여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노해광은 그녀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러니 누 소저는 이제부터라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마를 유심히 살펴보기 바라오. 하나 이마에 푸른 선이 나 있다고 해서 모두 흉수는 아니오. 그것은 단지 탈혼검을 익혔다는 흔적일 뿐이니 자칫 실수해서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모는 일은 없어야 하오.”

누산산은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지 계속 혼자서 생각에 잠겼다.

‘이마에 푸른 선이 있는 사람이라면 찾기 쉬울 거야. 일단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없고…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사람들 중에도 전혀 없지. 이존휘도 없고… 그렇다면 이존휘가 흉수가 아니란 말인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의 눈이 번쩍 빛났다.

‘가만, 흉수가 이마에 푸른 선이 나 있다면 남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가리고 다닐지도 모르잖아. 그렇다면 복면을 하고 다니는 걸까? 늘 복면을 하고 다니면 너무 갑갑할 테고, 죽립(竹笠)을 쓰고 다니는 걸까? 아니면 그냥 두건이라도… 두건?’

누산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래, 그거야! 이존휘는 늘 이마에 영웅건을 쓰고 다녔어! 그 영웅건을 벗겨서 확인해 봐야 돼!’

그녀는 갑자기 다급한 생각이 들었다.
이존휘가 흉수라는 확증은 없지만 그가 흉수일 가능성은 다분히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그 단서가 하나 더 늘어나지 않은가?
분명한 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존휘의 영웅건을 벗겨서 그의 이마를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금교교는 아무 것도 모르고 이존휘를 만나기 위해서 이씨세가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더 늦기 전에 알려야 돼! 금 언니에게 이 사실을 전해야 돼!’

누산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늘은 정말 즐거웠어요. 다음에는 내가 식사 대접을 할게요.”

그녀는 노해광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하고 어리둥절해하는 유화화를 끌다시피 하여 허겁지겁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노해광은 멀어져 가는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빙그레 미소지었다.

“정말 소문대로 귀여운 아가씨로군. 성질도 듣던 대로이고. 그나저나 이렇게 귀중한 정보를 넘겨준 대가를 받긴 받아야 할 텐데…”

중얼거리던 노해광은 누군가가 이층으로 올라오는 소리를 듣고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이층으로 막 올라오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를 향해 엷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사람은 백동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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