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5권 10화 – 진화하는 라이의 검술

진화하는 라이의 검술

코비는 다급한 어조로 라이를 여관에 안내했던 소년에게 물었다.

“오늘 오후에 그들이 움직일 거라고 잭에게 전했나? 그리고 그쪽으로 가는 지도도 말이야.”

“잭은 만나지 못했지만, 그가 데리고 있는 여자애에게 전달했습니다.”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그놈에게 직접 전해야 한다고 말이야.”

“하지만 여관에 그자가 없는 걸 어쩝니까? 마냥 기다릴 수도 없고, 그래서 일단은 여자애에게 전달했죠, 뭐.”

그러면서 소년은 릴리라는 소녀에게서 들었던, 얼마 전에 여관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 자세히 말했다. 잭이 지금 경비병들에게 쫓기고 있는 상황이기에 직접 전달할 수 없었다는 변명과 함께. 대신, 릴리가 그와 연락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방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멍청한 새끼! 일을 하러 온 놈이 경비병들에게 쫓기기부터 하다니…………… 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다란툼 지부장 코비는 어이가 없었다. 암살을 하러 왔다는 놈이 임무를 수행하기도 전에 사고를 쳐서 경비병들에게 쫓기고 있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거기다가 아직 솜털도 다 벗겨지지 않은 듯한 앳된 얼굴. 잭이란 녀석에 대한 그의 믿음이 바닥을 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코비 지부장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두목께서는 어쩌자고 저런 놈에게 중책을 맡기신 건지…

잭이 가져온 부두목의 편지에는 앞으로의 행동 요령에 대해서 자세히 써져 있었다. 우선 잭과 조장들을 임무에 투입하라고 되어 있었다. 조장들은 잭을 신주 받들듯 받들고 있었지만, 부두목의 지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부두목은 잭을 버리는 돌로 쓰고 있었다. 샐러맨더와 블랙울프 파를 이간질 시키기 위한………….

그 때문에 잭에게 건네준 지도는 블랙울프 파 쪽에서 만든 것처럼 꾸며 놨다. 하지만 그것 하나만으로 잭을 블랙울프 파에서 보낸 암살자라고 샐러맨더 쪽에서 속아 줄까?

모든 건 잭의 실력에 달려있었다. 그가 두목을 암살할 ‘뻔’ 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완전히 엉터리라면 지도를 보고도 믿을 놈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부두목은 조장들을 잭과 함께 보내라고 했는데, 잭에게 연락도 되지 않는 형편이다. 이렇게 되면 첫 부분부터 부두목의 지시에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젠장. 연락이 안 되는데, 어떻게 하면 되지?”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조장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가서 잭이 공격할 때, 그들에게 함께 돌격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부두목에게 보고서를 올리려면 자신이 직접 확인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 그게 가장 확실할 테니까.

“요새에서 온 손님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벌레 먹은 사과에 계실 건데요?”

‘벌레 먹은 사과’라는 말에 코비 지부장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진다. ‘벌레 먹은 사과’라는 곳은 뒷골목에 위치해 있는 술집

이름이었다. 반쯤 벌거벗은 작부(酌婦)들이 술 시중을 들어주는 퇴폐적인 분위기의 술집이었는데, 요새 쪽에서 간부급이 오면 꼭

들리는 곳이기도 했다.

“이런 젠장, 대낮부터 퍼마시러 갔어? 이야~, 팔자들 좋구먼. 뭐, 좀 있다 죽을 놈들이니…………”

잠시 투덜거린 코비 지부장은 소년에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튀어오라고 해. 급한 일이 생겼다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벌레 먹은 사과에서 작부들과 어울려 실컷 퍼마시던 도중에 끌려나와 산행을 시작했으니 모두들 죽을 지경이었다. 중무장한 채 산길을 비교적 빠른 걸음으로 30여 분씩이나 걸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목적지는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도 술이 덜 깼는지 혀 꼬부라진 소리로 해리슨이 투덜거렸다.

“아직도 멀었냐?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 되냐?”

“거의 다 왔어. 저 위로 올라가면 보일 거야.”

“헉헉…, 이번에도 거짓말이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어허.., 내가 거짓말을 하고 싶어서 했겠냐. 너희들 힘내라고 그런 거였지. 자, 이제 다 왔다.”

코비 지부장의 말대로였다. 언덕 위에 올라서니 샐러맨더 파가 자리 잡고 있는 근거지가 비교적 자세하게 내려다보였다. 물론 언덕이 그리 높지 않았기에 목책 안쪽까지 관찰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거봐. 내가 말했지? 경계가 아주 삼엄할 거라고 말이야.”

코비 지부장은 경계에 대해서 얘기했지만, 조장들은 그 엄청난 규모에 입이 쩍 벌어져 있는 상태였다. 화물을 보관하는 창고 몇 개 정도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목책이 뻗어 있는 규모를 보니 이건 웬만한 마을보다도 더 넓을 것 같았던 것이다.

“여긴 도대체 뭐 하는 곳이야? 혹시 광산이라도 있는 거냐?”

코비 지부장은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알 수가 없어. 하지만 이쪽으로 공급되는 식량의 양을 조사해 봤을 때, 광산 같은 건 아닌 모양이야. 광산이라고 하기에는 공급되는 식량의 양이 너무 적거든.”

“약탈한 물품들을 보관하는 장소라고 하기에는 너무 넓잖아?”

“그건 아닐 가능성이 커. 생각을 해 봐. 영주가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는데, 아무리 약탈품이라고 해도 이런 곳에 보관해 둘 필요가 없잖아. 성 안에 보관한다고 해서 어떤 놈이 감히 딴지를 걸겠어?”

“그건・・・ 그러네.”

“넌 조사해 봤을 거 아냐? 뭐 하는 곳이냐? 엉덩이가 무거운 샐러맨더 파의 두목이 직접 와서 둘러보는 걸 보면 꽤나 중요한 곳인 모양인데 말이야.”

“일단 조사해 보긴 했는데 당최 알 수가 없어. 저걸 봐라.”

코비 지부장은 목책 사이사이로 높게 솟아올라 있는 감시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렇게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는데 저 안으로 어떻게 들어가겠냐?”

“꼴을 보니 시도도 안 해본 거 같네.”

“당연하지. 괜히 저런 데 어설프게 애들 보냈다가 붙잡히면 금방 들통 날 텐데. 그러다 내가 작살난다고. 게다가 내가 데리고 있는

꼬맹이들이 얼마나 눈치가 빠르고 영악한지 알아? 지가 죽을 거 같으면 금방 내가 시켰다고 주둥아리를 나불거릴 놈들이란 말이야.”

“하긴 철모르는 애들 데리고 지부랍시고 운영하는 네가 고생한다.”

“이야~ 그나저나 감시탑들을 아주 기가 막히게 세워놨네 사각(死角) 없이 주변을 확실하게 감시할 수 있겠는데?”

5미터 정도 높이의 목책 사이로 솟아올라 있는 감시탑들은 7~8미터 정도는 족히 되는 높이로 건설되어 있어 주변을 완벽하게 감시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감시탑에는 경비병들이 두 명씩 배치되어 있었기에 기회를 봐서 해치우고 침투하는 것도 무지 어려워 보였다.

목책으로 가려져 있었기에 안에 얼마나 많은 인원이 상주하고 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간혹 밖으로 휴식을 취하러 나온 패거리들의 입을 통해 백여 명 정도가 상주하고 있다는 것 정도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거기에다가 오늘은 두목 등 간부급 인물들이 행차한 만큼, 그들의 호위까지 가세해 있기에 얼마나 더 많은 숫자가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젠장! 저 안으로 쳐들어가 샐러맨더 파의 두목을 암살하겠다고?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만. 아무리 우리가 옆에서 도와준다 해도 근처에나 다가갈 수만 있어도 기적이다, 기적.”

코비 지부장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암살 계획으로 샐러맨더 파와 블랙울프 파를 이간질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두목과 부두목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계획을 행하다 개죽음 당하게 되면, 샐러맨더 쪽에서 의심부터 하지블랙울프파에서 암살자를 보냈다고 생각을 하겠는가.

회의적인 코비 지부장과 달리, 그와 함께 온 세 명의 조장들의 생각은 약간 달랐다.

“달톤이 어떻게 죽었는지 네가 보지 못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정말 끔찍했어. 아직까지도 가끔씩 그 녀석이 조각조각 분해될 때의 모습이 떠올라 소름이 끼친다니까.”

“분해?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왠지 거슬리는 단어에 코비 지부장이 질문을 던졌지만 그 누구도 거기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표정이 확 일그러진 조장들은 그 단어를 꺼낸 해리슨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이런 씨팔, 안 그래도 요즘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죽겠구만.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지랄이야? 달톤의 이름이나 분해, 이딴 단어는 아예 입에 담지도 마.”

“쩝, 내가 잘못했다. 앞으로 조심하지.”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에 ‘분해’라는 게 어떤 뜻인지 코비 지부장이 재차 물어봤지만 조장들 중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망할 새끼들. 사람이 물어보면 대답을 해야지, 못들은 척 딴청이나 피우고………….”

투덜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던 코비 지부장의 눈에 숲 속에서 유유히 걸어 나오는 사람 하나가 눈에 띄었다. 순간, 그는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한 지점을 가리키며 황당하다는 듯 외쳤다.

“저게 뭐야! 저 새끼 미친 거 아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잭이 있었다. 숲에서 나온 그는 샐러맨더 파의 근거지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태연한 표정만 봤을 때는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듯했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조장들도 동요했다. 잭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백주대낮에 적진을 향해 어슬렁거리며 걸어 들어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잭이 야음을 틈타 안으로 침입하던지, 아니면 두목이 저곳에서 나와 숲으로 이동할 때 습격할 거라고 예상했었다. 자신들의 실력으로 잭의 습격을 돕지는 못하겠지만, 그가 도주할 때 도움은 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코비 지부장의 말에 넘어가서 그를 따라

이곳에 온 것이다. 물론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쥐죽은 듯 숨어 있다가 슬그머니 도망칠 생각이었고……………

게다가 잭의 무장은 허리춤에서 덜렁거리는 칼 한 자루가 전부였고, 방어구는 그를 처음 봤을 때 입고 있던 낡은 가죽갑옷뿐이었다. 저런 무장 상태나 장비로 봤을 때는 마치 죽여 달라고 지랄을 하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적들이 미치지 않은 이상, 습격해 온 잭을 칼로만 상대해 줄 리도 없고 말이다.

“저 자식 대체 뭐야? 너희들 저놈이 암살자라고 하지 않았어? 무슨 암살자가 이런 훤한 대낮에 적진을 향해 어슬렁거리며 걸어가?” 코비 지부장은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 함께 온 조장들에게 잭과 함께 행동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코비 지부장의 말처럼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누구냐고 몇 번 소리쳐 묻던 경비들 중 한 명이 느긋한 동작으로 활을 꺼내 들고 장전하는 게 보였다.

“내 저럴 줄 알았지.”

코비 지부장의 빈정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화살이 날아갔다. 화살은 놀라운 정확도로 잭을 향해 날아갔지만, 잭은 간단히 옆으로 한 발자국 옮기는 것만으로 그것을 피해 버렸다. 약이 바짝 오른 경비병이 두세 발의 화살을 더 날렸지만, 모두 헛되이 허공을 갈랐을 뿐이다.

옆에서 히히덕거리며 구경만 하고 있던 다른 경비들이 잭을 가리키며 뭐라 떠들더니 서너 명 정도가 활을 꺼내 사격에 가담하는 게 보였다. 이번에도 피할 수 있을까? 코비 지부장과 조장들은 손에 땀을 쥐고 바라봤다. 그 순간 경비병들이 제각각 사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것들 중 어느 하나도 잭을 맞추지 못했다.

잭이 천천히 걷고 있긴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 간의 거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서로 간의 거리가 줄어든 만큼 화살을 피하기는 더 힘들어졌음에도 잭은 단 한 발의 화살도 맞지 않고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서너 명이 집중 사격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맞추지 못하자 경비병들은 바짝 약이 오른 모양이다. 급기야 경비병 중 몇 명이 감시탑 아래로 달려 내려가더니 잠시 후 석궁을 가져왔다. 석궁은 활에 비해 장전속도는 느리지만 정확도와 파괴력은 훨씬 뛰어나다. 웬만한 철판갑옷쯤은 그냥 꿰뚫어 버리니까. 더군다나 석궁에 장전되는 화살은 크기가 아주 작기 때문에 눈으로 보고 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잭은 석궁의 화살조차도 피해냈다. 이번에는 그도 힘에 부치는지 아슬아슬하게 석궁 한발을 피함과 동시에 장검을 뽑아드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화살과 달리 석궁의 화살은 피하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다음 날아오는 화살부터는 검을 휘둘러 막아냈다. 잭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잭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자 화살을 쏘던 경비병들이 당황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 경비병은 석궁을 장전하다 실패했는지 다시 장전하느라 허둥지둥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장들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헤 벌리고 바라보고 있는 코비 지부장을 향해 해리슨이 그것 보라는 듯 으스대며 말했다.

“봐. 우리들이 한 말이 정말이지?”

“도와드려야 하지 않을까?”

“우리들이 저기 끼어들어서 뭐하려고? 괜히 잭 어르신의 방해만 될 뿐이야.”

그들이 잡담을 주고받는 잠시의 시간 동안 상황은 더욱 놀랍게 변해 가고 있었다. 목책 앞까지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간 잭이 마치 새라도 된 듯 목책 위로 날아오르는 게 보였다. 높게 둘러쳐져 있는 목책을 뛰어넘는 것만 해도 입이 쩍 벌어질 지경인데, 잭의

움직임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잭의 몸은 목책에서 멈추지 않고 더욱 높이 뛰어 올라갔다. 잭의 몸이 멈춘 곳은 높디높은 감시탑 안이었다. 단칼에 감시탑 안에서 화살을 쏘고 있던 경비병들을 베어버리는 잭.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있을까?

순식간에 감시탑을 정리한 잭은 주저하지 않고 곧장 아래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다음에 벌어진 일방적인 학살극에 블루썬더 패거리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이, 이런 미친. 제발 지금 보고 있는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말을 해줘.”

코비 지부장의 넋이 나간 듯한 중얼거림에 해리슨 역시 입을 떠억 벌리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잭 어르신의 실력이 엄청나다는 건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두목은 대체 어떤 조직을 끌어들인 거야?”

지하실에서 학살극을 벌였을 때는 사방이 어두컴컴한데다 좁기까지 해서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적을 반사적으로 죽이느라 라이는 자신이 살인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었다.

그때는 검술이고 뭐고 살아남는 것에만 온 정신이 팔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훤한 대낮에, 상대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핏방울 하나하나는 물론이고, 처참하게 일그러진 상대의 표정까지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처절하게 울려 퍼지는 단말마의 비명까지. 아직 살인이라는 감각에 내성이 없었던 라이로서는 정신이 반쯤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살인이 거듭될수록 그 충격이 점차 완화된 덕분일까. 아니면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맑은 평정심을 유지시켜주는 태허무령심법(太虛無靈心法)의 효용 덕분일까.

어느 순간, 라이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상황에 맞지 않는 강맹한 공격을 무턱대고 날리는 것에서 벗어나, 상대의 위치와 방어에 맞는 초식을 떠올려 적절하게 힘 조절을 하며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허접한 실력을 가진 적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았기에 생겨난 행운이었다. 더군다나 적들은 자신들의 두목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사방에서 달려들고 있었고, 그들의 뒤쪽에서는 무수한 궁수들이 화살을 쏴대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 요 며칠 지붕을 뛰어다니며 몸을 움직이는 요령과 기법을 터득하지 못했다면 목책을 넘기도 전에 라이는 온몸에 화살이 꽂혀 마치 고슴도치 같은 꼴을 하며 쓰러졌으리라.

꿈속에서 배운 검술은 36초식의 기본 뼈대와 각 초식의 응용형이 4가지씩 존재하여 총 144초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금 라이가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건 기본뼈대를 이루고 있는 36가지 초식 정도. 그나마도 지금껏 실전에 써먹은 건 4개 초식도 되지 않았다. 지금껏 그가 상대했던 게 허접한 자들뿐이었기에 이런 형편없는 실력으로도 목숨을 잃지 않고 있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라이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때문에 그는 지금껏 사용하지 않았던 다른 초식들까지 실전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실험 대상은 눈앞에 잔뜩 있었다. 그 덕분에 라이는 초식이 가지는 위력과 효용을 몸으로 체득하며 급속도로 초식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갈 수가 있었다.

머릿속으로 그린 대로 눈앞의 적들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진다. 피와 살이 튀는 끔찍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라이는 자신의 강력한 힘에 황홀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강해졌다니………

마을에서 떠나온 이래 힘이 없어서 얼마나 모진 고생을 해야만 했던가. 비굴하게 엎드려 목숨을 구걸해야 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굴욕을 당하지 않을 거야. 아니, 그런 못된 새끼들은 몽땅 다 죽여 버릴 거야!’

그런데 이 상황에서 설마하니 안면이 있는 사람을 만날 거라고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호오, 이거 상당히 낯이 익은 분인 듯한데.”

“허억! 괴 괴물..”

“정말 반가워. 안 그래도 네놈 덕분에 내가 한동안 고생한 걸 생각하면…………. 이번에는 내 확실히 손을 봐 주지.”

여관 위층에서 만났을 때 낭심을 맞고 거품을 물었던 사내는 이미 공포에 질려 오줌을 지리고 있었다. 아니, 그때도 된통 두들겨 맞은

후에 지렸었던가?

“움직이면 죽을 줄 알아!”

주춤주춤 뒷걸음질치던 사내의 몸이 흠칫 굳어 버린다.

“여기서 근무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네. 그때 함께 하던 동료들은 다 어디 가고 혼자 있는 거지?”

“그, 그건….

사내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동료들은 이미 죽어버린 건지도 모르고, 아니면 벌써 도망쳐 버린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이에게 있어서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여기 두목은 어디에 있지? 그것만 알려주면 살려주마.”

사내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곧바로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쪽입니다! 저기 있습니다.”

“저쪽이라고?”

라이는 사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재차 확인했다.

살려주는 것을 담보로 원하는 정보를 얻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놈을 살려줄 생각은 없었다. 녀석으로 인해 검술의 궁극을 깨우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병사들에게 밀고를 해서 자신을 귀찮게 한 게 상쇄될 수는 없었으니까.

라이는 단칼에 녀석의 목을 날려 버렸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통과 분리된 사내의 머리가 땅바닥에 닿을 때쯤, 라이는 두목이 있다는 곳 근처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라이는 샐러맨더 파 두목의 인상착의를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주변 사람보다 좀 더 훌륭해 보이는 갑옷이나 무기를 지니고 있는 자들을 우선적으로 죽였다.

수많은 조직원들이 피를 뿌리며 죽어 나갔음에도 적들은 라이를 향해 미친듯이 공격을 끊임없이 가해왔다. 그에 대해 라이가 더욱 강맹한 공격을 펼치려 할 때였다. 지금껏 지치지 않고 그를 향해 돌진해 들어오던 샐러맨더 파 조직원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기 시작한 것은.

샐러맨더 파는 습격해 들어온 적이 혼자였기에 어떻게든 숫자로 밀어붙여 보려고 했다. 칼과 방패를 든 동료들이 적의 시선을 교란하는 동안, 뒤에서 활과 쇠뇌를 무수히 쏴댔다. 하지만 도저히 숫자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처참하게 쓰러져 있는 동료들의 수많은 시신들…………….

공포가 두목에 대한 충성심을 넘어서는 순간, 적들은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모두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다.

라이가 뒤쫓아 가서 몇 명 더 죽이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더 이상 적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모두들 전력을 다해 도망쳐 버린

후였다.

“이런… 젠장! 이럴 줄 알았다면 먼저 두목부터 찾아서 죽이는 것이었는데…”

괜히 검술을 조금이라도 더 익힌답시고 졸개들을 상대한 게 화근이었다. 과연 적의 두목은 죽었을까? 아니면 도망쳤을까?

라이는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