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5권 11화 – 검의 천재가 탄생한 현장

검의 천재가 탄생한 현장

월터 일행은 말을 타고 이동했기에 점심식사 시간이 되기도 전에 다란툼에 도착할 수 있었다.

팔바의 경우, 이곳 영지의 고위 관료와 안면을 터놓은 사이다. 그렇기에 그는 관료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게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 성 쪽으로 달려갔다.

식사 시간이 되려면 아직 한참의 여유가 있었기에 그의 면담 요청은 곧바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그는 관료에게서 뜻밖에도 놀라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팔바는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는 펍(Pub)으로 곧장 돌아왔다. 나머지 일행들은 팔바가 오기를 기다리며 가벼운 안주와 함께

지하실에서 갓 가지고 올라온 시원한 맥주를 즐기고 있던 중이었다.

“어서 와. 여기 맥주 엄청 시원해.”

동료들이 반갑게 맞이했지만 팔바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다급히 월터에게 말했다.

“대규모 학살사건이 있었답니다.”

“학살?”

팔바의 말에 의하면 도시 밖에 자리 잡고 있던 샐러맨더 파의 근거지 하나가 박살이 났다는 것이다. 영주와 그렇고 그런 관계를 맺고 있었던 샐러맨더 파가 커다란 피해를 입은 만큼, 노발대발한 영주가 병사들을 동원해 그 흉수를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모양이다.

“위치는 어딘지 알아뒀습니다. 지금 바로 가시죠.”

팔바의 채근에 동료들이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밥은?”

“사건이 일어난 곳을 먼저 둘러보고 난 뒤 돌아와서 먹으면 되지. 여기서 그리 멀지도 않은 곳이래.”

월터 일행이 샐러맨더 파가 구축해 놓은 작은 요새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삼백여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사건 현장을 조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월터 일행이 봤을 때 병사들은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고 있다기보다, 시체를 뒤져 뭔가 쓸 만한 게 나오면 자신의 주머니 안에 챙겨 넣기에 바빴다.

“거기서라!”

요새로 다가오는 월터 일행을 발견하자마자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활을 장전해 겨누며 소리쳤다. 중무장한 일행의 모습을 보자

경계심이 생긴 것이다.

“너희들은 누구냐?”

팔바가 얼른 앞으로 나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여주며 대꾸했다.

“우리는 행정관님의 부탁을 받고 현장을 조사하기 위해 나온 모험가 파티일세.”

행정관이라는 말에 활을 겨눴던 병사들은 황급히 활을 내려놨다.

“이리 오십시오. 저희도 이제 막 현장수색을 시작한 참이라 아직 쓸 만한 물증을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

현장은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70여 구에 달하는 시체들. 문제는 단 하나도 온전한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게 없다는 데 있었다. 도대체 어떤 놀라운 마도구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갑주는 물론이고, 방패, 병기들까지 예리하게 잘려져 있었다.

병사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런 만행을 저지른 범인은 단 한 명이었다. 팔바 일행들은 시체를 둘러본 뒤 그걸 알았기에 더욱

놀라워하고 있었다.

“이렇게 잔인할 수가………….”

“이건 이미 인간이 아니야.”

“악마에게 홀린 게 아닐까요?”

“설마 언데드의 소행이라는 건가?”

팔바 일행은 자신들의 추측에 대해 서로 쑥덕거리며 의견을 나누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월터는 경이로운 시선으로 시체들에 남아있는 검흔을 쫓고 있었다. 목책 가까이에 있는 시체들이 잘게 여러 토막이 나 있었다면, 요새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시체에 남겨져 있는 검흔은 단순하게 바뀌어 가고 있었다.

“호오, 정말 놀라운 적응력인데? 짧은 시간 동안 검흔이 이렇게까지 급격하게 바뀌다니. 재수가 좋군. 검의 천재가 탄생한 현장을 목격하는 행운을 얻게 될 줄이야…………”

이런 놀라운 인물을 누가 키워낸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치로 본다면 알카사스에서 키운 거라고 단정 짓기 쉽지만, 월터의 생각은 달랐다. 델카의 지하에서는 한정된 공간 안이라 찾아낼 수가 없었던 스텝의 흔적들이 이곳에는 군데군데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널찍한 전장을 치달리며 정신없이 싸우게 되면 오랜 세월 검술을 익혀오며 습관이 되어 버린 스텝들이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크라레스인가? 하지만 크라레스에 이런 파괴적인 검법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능구렁이가 다 된 노련한 검객이라면 자신이 익힌 검법을 변형시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헷갈리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스승의 품을 갓 벗어난 새파란 애송이가 이토록 복잡한 검식에 변형을 주거나, 새롭게 만들어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만큼 여기 흩어져 있는 흔적들은 상대가 익힌 원형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고 봐야 했다.

“이해를 할 수가 없군.”

“뭐가 말입니까?”

“실전 경험을 시켜주기 위해서 밖에 내보내기도 하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소중한 인재의 첫 출진을 혼자 보낸다는 건…….”

‘우리 코린트에서도 하지 않는 미친 짓’이라는 말이 하마터면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그리고 그건 크라레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첫 실전에서 너무 긴장을 하거나 상대를 경시하다가 제 실력을 제대로 발휘해 보지도 못하고 비명횡사 당하는 애송이가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결론은 한 가지뿐이다. 그를 지원해 줄 사람이 은밀히 뒤따르고 있던지, 아니면 함께 하던 동료와 불의의 사고로 떨어진 경우. 하지만 저만한 실력자를 지원해 주기 위해 뒤따르는 자라면 애송이보다 월등한 실력을 지닌 사람일 가능성이 큰 만큼, 사고로 헤어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만약 월터가 이곳에서 라이를 만났다면 이렇게까지 착각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는 사건을 저지른 범인이 얼마 전에 키메라 오크 떼에 던져 놓고 왔던 라이라는 소년일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는 라이 일행이 이미 키메라 오크 떼에 죽임을 당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실력으로는 절대 그 지옥 같은 상황에서 살아나올 수 없을 게 뻔했으니, 월터의 머릿속에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젠장, 괜히 시간만 낭비했네.”

월터가 미련 없이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애송이의 실력이 델카의 지하실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 정도라면 결코 혼자 실전 경험을 하고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먼 거리에서 지켜보고 있다고 봐야 했다. 애송이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인재였으니까. 이 정도 성장속도라면 몇 년 내에 이름 있는 국가의 근위기사로 채용될 게 확실했다.

월터는 주변을 빙 둘러봤다. 눈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기감(氣感)을 통해 주위에 위협이 될 만한 실력자가 있는지를 훑은 것이다. 하지만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누군가가 기척을 감추고 숨어 있을 수도 있긴 하지만, 월터는 주변에 그런 존재는 없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이 보호할 애송이의 뒤를 따라 이미 이곳을 떠난 지 오래일 테니까.

“조금만 빨리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면, 어느 쪽에서 키운 녀석인지 확인이 가능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군.”

그때 월터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젠느가 슬그머니 말을 걸어왔다.

“범인은 벌써 튄 것 같은데, 혹시 다란툼으로 돌아간 건 아닐까요? 빨리 다란툼으로 가보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월터는 씁쓸하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더 이상 범인을 추적한다는 건 의미가 없는 일인 것 같군. 자네들의 헌신적인 협조에 정말 감사하네. 내 신분이 신분인지라 공식적인 치하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말일세.”

월터는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일을 시킨 만큼, 적당한 대가를 지불해 줄 생각인 것이다. 그는 의뢰비로는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의 금화를 꺼냈다. 기사단의 일을 도왔으니, 이 정도는 지불해 줘야 격이 맞는 것이다.

“이건・・・ 너무 많습니다. 월터님.”

화들짝 놀라는 팔바를 향해 월터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왕국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데, 이 정도 보상은 당연한 것이지.”

못 이기는 척 월터가 내민 금화들을 얼른 품속에 넣은 팔바의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져 있는 걸 보면 꽤나 흡족한 모양이다. “그럼, 여기서 헤어지도록 하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예, 언젠가 다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잠깐이었지만 저희 파티가 국왕폐하를 위해 일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만약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월터는 애송이가 누군지 끝까지 쫓아가서 확인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런 작은 의문이나 해소시키느라 낭비하고 있을 시간 여유 따윈 없었다. 이곳을 둘러보며 웬만한 건 이미 다 파악했다고 그는 생각했으니까. 이미 주인이 정해져 있는 인재라면 굳이 뒤쫓아 가서 만나봐야 헛것인 것이다. 자라나는 새싹을 잘라 버리기 위해 쫓아가는 거라면 혹 몰라도.

그리고 여관에 던져놓은 미끼를 둘러싸고, 주변 상황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슬슬 걱정이 되기도 했다. 작은 수정구에 아직 그 어떤 변화도 없는 걸 보면, 아직까지는 아무런 일이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언제 대어가 미끼를 향해 달려들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 바닥이라는 게 그리 넓은 것만은 아니니까, 조만간에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특히나 크라레스라면……”

“과연, 기사단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통이 크시구만. 이렇게 많이 주실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통이 큰 게 아니라, 들고 있던 주머니가 넉넉한 거겠지?”

“어쨌거나 그게 그거지. 나는 언제 저렇게 돈을 팍팍 써보나.”

“혹시 누가 알아? 숨겨진 던전이라도 찾아내 크게 한몫 잡게 될지.”

“젠장, 꿈은 그런데 현실은 허접한 산적들이나 때려잡고 있어야 하다니…”

팔바 일행이 다란툼에 돌아온 것도 벌써 하루가 지나 있었다. 월터와 헤어진 후, 식당에 가서 실컷 퍼마신 후 그 다음 날 오후까지 푹 쉬었다. 여관에 딸린 식당에서 늦은 식사를 끝낸 후, 델카 요새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나선 참이다.

“뭐 더 필요한 건 없어? 델카는 이쪽보다 물가가 훨씬 더 비싸더라. 필요한 게 있으면 빨리빨리 말해. 월터 씨 덕분에 돈은

풍족하니까 말이야.”

희희낙락하며 시장 쪽으로 향하고 있을 때, 그들은 우연히도 눈에 익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팔바, 저 사람!”

눈썰미 좋은 전직 레인저 류크가 제일 먼저 발견했다. 사람들 사이를 약간 빠른 속도로 걸어가고 있는 소년의 모습을.

“어?”

류크와 거의 동시에 소년을 발견한 마법사 젠느는 곧바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녀의 주문이 완성되었을 무렵, 소년의 모습은 이미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린 후였지만 젠느는 시동어를 외쳤다.

“뷰 마나 포스!”

인파 속에 숨어 버린 후라고 해도 마나의 기척을 숨길 수는 없다. 곧이어 젠느는 소년의 단전에 뭉쳐져 있는 밝게 빛나는 마나 덩어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 전체를 휘감고 있는 밝은 마나의 기운까지도.

하지만 젠느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무시무시한 검법을 쓸 수 있는 고수라고 하기에는 색의 밝기가 너무 약했기 때문이다. 저 정도 마나량이라면 동료인 팔바와 별 차이를 느끼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문제는 팔바 혼자서 그토록 무시무시한 살육극을 벌일 수 있느냐 하면, 그건 전혀 아니었다.

“검법의 힘인가?”

무심결에 중얼거린 젠느의 말에 팔바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검법의 힘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방금 전에 그 애의 마나를 측정해 봤는데, 예상과 달리 별 볼일이 없어서 말이야. 너보다도 못한 거 같더라고.”

그 말에 팔바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학살의 현장을 직접 목격한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그 끔찍한 현장이 아직까지도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고 있는데 그런 짓을 한 사람이 팔바와 동급이라고? 리더인 팔바와 함께 해온 게 몇 년인데, 팔바 혼자서 저런 짓을 저지를 능력이 되지 못한다는 건 모두들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정말이라니깐.”

“그래서 검법의 힘이라고 한 거였구나.”

“응. 마법도 똑같은 3싸이클 급이라고 해도, 그 위력은 천차만별이니까. 검법도 그런 거 아니겠어? 안 그래, 팔바?”

“그건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애가 나보다 마나량이 떨어진다는 건 못 믿겠다. 너도 봤잖아? 그 처참한 광경을 말이야.”

“그건 모르지. 너도 만약 제대로 된 검법을 익혔다면 지금보다 더 엄청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지도 말이야. 그랬으면 우리 파티는 더 큰 위명을 떨칠 수 있었을 텐데…………”

자신도 그런 게 가능하다는 말에 팔바의 안색은 꿈을 꾸듯 몽롱해졌다. 입가가 빙긋 올라가 있는 걸 보면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로 돌아온 팔바는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설혹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누가 나한테 그런 엄청난 검술을 가르쳐 주겠냐. 바랄 걸 바래야지. 자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가자. 해지기 전에 델카 요새에 도착하려면 최대한 빨리 쇼핑을 끝내야 해.”

뷰 마나 포스는 전체적인 마나의 양을 보여주는 마법이다. 하지만 라이의 단전에 축적되어 있는 기운은 태허무령심법을 통해 순수하게 정제된 것이다. 잡스러운 기운이 섞인 마나에 비한다면 그 파괴력 자체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걸 알 리 없었기에 이런 오해가 생긴 것이다.

“이봐, 그런 허름한 여관에 어르신을 계속 묵게 해도 괜찮을까? 나중에 뭐라고 추궁이라도 당하는 거 아니겠지?”

라이의 놀라운 실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후, 코비 지부장은 지금껏 자신이 해왔던 게 찜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증거 조작을 위해 버리는 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의 실력은 진짜배기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은, 아무리 상대가 원한 것이긴 했지만 낡아빠진 3류 여관에 투숙하도록 했고, 심지어는 그 낡은 여관비조차도 지불해 주지 않고 나 몰라라 하고 있었지 않은가.

다른 조장들은 수심이 가득한 코비 지부장을 위로해 주기는커녕 비난하기 바빴다. 그렇게 옆에서 조언할 때는 들은 척도 하지 않다가, 이제야 저 난리를 치고 있는 걸 보니 한심했던 것이다.

“등신 같은 녀석. 그래서 우리가 입이 부르트도록 말했지. 어르신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시라고 말이야.”

“어르신께선 인내심도 참 대단하셔. 나 같으면 달톤 녀석 토막 치듯 네 녀석도 곧바로 토막을 쳐버렸을 텐데 말이지.”

“그럴 수는 없으셨겠지. 그때는 이용가치가 있었으니까 말이야. 그건 그렇고 너 이제 큰일 났다. 임무를 완수하셨으니 너의 이용가치는 이제 없어진 거잖아?”

놀리자고 하는 농담 같기는 했지만, 지은 죄가 있다 보니 아무래도 찝찝한 건 사실이다. 요새 안에 포진하고 있던, 잘 무장된 수십 명의 샐러맨더 파 조직원을 단숨에 육편으로 만들어 버린 절대 고수가 잭이지 않은가. 그의 기분 여하에 따라 자신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허걱! 그, 그럴지도 모르겠네. 지, 지금 어르신께선 어디에 계시지? 혹시 그 여관?”

해리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여관은 아닐걸. 그때 까분 놈들 손봐주신 후에 밖에서 기거하신다고 했잖아. 연락은 그 계집애가 하고 말이지.”

“젠장,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코비 지부장은 황급히 릴리가 묵고 있는 여관을 향해 달려갔다. 라이가 자신을 죽이겠다고 마음을 먹기 전에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서라도 용서를 받는 게 살길이었으니까.

깡패조직의 중간보스답게 다란툼 지부장 코비는 단단한 신체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 지부를 오랫동안 이끌면서

아랫사람들을 턱 끝으로 부리는 강력한 카리스마까지. 물론 그의 휘하에 있는 건 소매치기나 하며 정보를 물어오는 꼬맹이들밖에 없었지만………….

어쨌거나 그런 그에게 있어서 고아 소녀 따위 눈에 차지도 않았다. 그의 밑에는 그런 소녀들이 몇 명이나 있었으니 그건 당연한 것이었다. 문을 열고 나온 릴리에게 코비는 거만하게 물었다.

“어르신께서는 어디에 계시냐?”

릴리는 코비 지부장의 눈치를 살피며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저한테 말씀하시면…….”

코비 지부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릴리의 말을 자르며 으르렁거렸다.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려야 할 일이다.”

릴리는 할 수만 있다면 이 무서운 방문객을 잭에게로 안내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안내를 할 게 아니겠는가. 릴리는 필사적으로 용기를 쥐어짜서 항변했다.

“하…, 하지만 어디에 계시는지는 저도 모르는 걸요. 이쪽에서 신호를 보내면 그걸 보시고 나중에 은밀히 찾아오셔요.”

릴리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에 코비 지부장도 더 이상 뭐라 밀어붙일 수가 없었다. 과연 뛰어난 암살자였다. 자신의 존재를 저렇듯 감쪽같이 숨기다니…………… 아군조차도 위치를 모르고 있는 만큼, 적들은 아예 그의 존재조차 알 수 없으리라.

“허, 참..”

그러면 어떻게 한다? 이리저리 궁리하던 코비 지부장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임무를 완료하셨으니 더 이상 이런 누추한 곳에 묵으실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고 전하거라. 요새로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다란툼에서 가장 좋은 곳에 모시고 싶거든. 알겠냐? 내 마음을…..”

“예,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으리.”

“오냐. 부탁하마.”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물러 나온 코비 지부장. 그는 자신의 아지트로 돌아가려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함께 나온 소년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품속에서 은화 몇 개를 꺼내 건네주면서.

“이걸로 맛있는 음식을 사서 아까 그 계집애한테 가져다주도록 해라. 돈을 한 번에 다 쓰지는 말고. 그러니까, 하루에 4번 정도 여관에 들러서 그때마다 그 계집애가 필요한 게 있는지 물어본 뒤 사 주라는 말이야. 내 말 이해했냐?”

처음에는 맛있는 음식을 하나 가득 사주며 자신에게 좋은 얘기를 어르신에게 해주길 바랬지만 코비 지부장은 생각을 바꿨다. 잭 어르신을 모셔 오려면 계속 릴리와 접촉할 필요가 있다는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적당한 수준의 당근을 여러 번에 걸쳐 나눠서 주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짠돌이 두목이 웬일인가 싶어 다시 한 번 쳐다보긴 했지만, 소년은 재빨리 대답했다. 안 그러면 주먹이 날아온다는 걸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이다.

“예, 두목.”

“그리고 그 계집애가 잭 어르신께서 나를 만나고 싶다고 전하면 곧바로 내게로 보고하란 말이야. 혹시 그 돈 다 쓰면 더 달라고 하고. 나중에 잭 어르신에게서 조금이라도 말이 나왔다가는 너는 나한테 죽을 줄 알아. 알겠어?”

“알겠습니다, 두목.”

“빨리 가봐.”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소년은 은화를 움켜쥐고 시장을 향해 달려갔다. 달려가는 부하 녀석의 뒷모습을 보며 코비 지부장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젠장, 내가 저런 계집애한테까지 아부를 떨어야 하다니………………”

그 꼬마 계집이 제대로 일 처리를 안 해준다면 잭이 떠난 뒤 아예 사창가에 팔아 버리겠다고 다짐하는 코비 지부장이었지만, 사실 그건 이렇게까지 아부를 떨어야 하는 처지로 몰린 것에 대한 자기 위안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