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2권 검기충천(劍氣沖天)편 : 7화
제119장. 차도살인(借刀殺人)
서안의 북쪽 거리에는 유난히 좁고 복잡한 골목이 많이 있었다. 이 일대는 작은 집들이 벌집처럼 오밀조밀하게 붙어 있었고, 작은 골목길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 있어서 이곳의 지리에 익숙한 토박이들이 아니면 좀처럼 이곳에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자칫 한눈을 팔았다가는 미로(迷路)와도 같이 복잡한 골목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오후의 햇살이 좁은 골목길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때였다. 서안에서도 복잡하기 그지없는 북서쪽 거리를 쏜살같이 달려가는 몇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골목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앞으로 전진해 갔다. 한참이나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 치달려가던 그들의 신형이 멈춰선 곳은 북서쪽에서도 가장 후미지고 허름한 어느 초옥(草屋) 앞이었다. 그들 중 가장 앞에 있는 사람이 턱짓을 하자 다른 네 사람이 초옥의 사방을 포위했다. 그들의 동작은 물 흐르듯 유연하면서도 신속해서 하나같이 뛰어난 실력을 지닌 고수들임을 짐작케 했다. 중앙의 사람은 한동안 날카로운 눈으로 초옥을 노려보다 천천히 초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휘잉!
마침 한차례 바람이 불자 그의 왼쪽 소맷자락 팔뚝 아랫부분이 바람에 세차게 펄럭거렸다. 이제 보니 그는 한쪽 팔이 없는 외팔이였던 것이다. 외팔이는 초옥 앞에 있는 사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사립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초옥 안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요?”
초옥의 문이 열리며 주름살투성이인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중년인은 방문 앞에 우뚝 서 있는 외팔이를 발견하고는 두 눈에 어리둥절한 빛을 떠올렸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소?”
“자네가 정산인가?”
외팔이의 물음에 중년인, 정산의 얼굴에 불안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그렇소만…”
“나와 함께 가 주어야겠네.”
외팔이의 오른팔이 움직이자 정산은 제대로 반항도 해보지 못하고 그대로 목덜미를 제압당했다. 정산은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외팔이를 더듬거렸다.
“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우리는 초가보에서 왔네.”
정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얼굴에는 암울한 절망감이 짙게 깔려 있었다. 외팔이는 혈도가 제압당한 정산을 다른 네 명의 장한 중 한 사람에게 맡기고 초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한데 그들이 막 초옥을 빠져 나오려 할 때였다. 언제 나타났는지 하나의 인영이 초옥의 입구에 우뚝 선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인영을 보자 외팔이의 얼굴이 가볍게 굳어졌다.
“자네가 여긴 웬일인가?”
그 인영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웬일은. 올 많나 일이 있으니까 왔지.”
외팔이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 인영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가 여기에 와야 할 일이 없을 것 같은데.”
“그거야 그쪽 생각이고 내 생각은 좀 다르지. 내 생각이 뭔지 알고 싶나?”
“말해 보게.”
그 인영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것은 마치 먹이를 앞에 둔 맹수의 웃음 같았다.
“존재가치가 없는 자들은 누가 뭐라고 하기 전에 스스로 죽을 자리를 고르는 것이 낫다는 거지.”
외팔이를 비롯한 다섯 사람의 얼굴이 모두 굳어졌다.
“뭐라고?”
“그런 점에서 너희들은 현명한거야. 이렇게 죽을 자리를 알고 제 발로 찾아 왔으니 말일세.”
“우리를 배반했구나!”
외팔이의 옆에 있던 장한이 이를 갈아붙이며 소리쳤다. 하나 그때 이미 그 인영은 몸을 날려 그들에게로 덮쳐 오고 있었다. 언제 뽑아 들었는지 인영의 손에는 섬뜩한 검광을 발하는 장검이 쥐어져 있었다.
“배반은 무슨. 쓰레기를 처리하는 것뿐인데.”
인영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담담한 음성과는 달리 그의 손에 들린 장검은 무시무시한 검광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피… 피해라!”
외팔이를 비롯한 장한들은 다급한 외침을 토해내며 사방으로 몸을 날렸으나, 인영의 장검은 한치의 사정도 없이 그들 중 한 사람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크아악!”
그 장한은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허물어지듯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백동일! 네놈이…”
외팔이는 이를 부드득 갈며 하나 남은 오른손으로 장검을 뽑아 들었다. 다른 세 명의 장한도 제각기 병기를 들고 고함을 내지르며 인영에게 달려들었다. 인영, 백동일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세 명은 쳐다보지도 않고 외팔이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양전, 네 검법이 서안제일이라고 해서 언제고 한번은 붙어 보고 싶었다. 각오는 돼 있겠지?”
“죽일 놈!”
세 명의 장한들은 자신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듯한 백동일의 모습에 두 눈 가득 살광(殺光)을 번뜩이며 무서운 기세로 덮쳐 왔다. 백동일은 그들의 검이 자신의 지척에 올 때까지도 여전히 양전을 쳐다보며 웃고 있다가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며 장검을 질풍처럼 휘둘렀다.
쏴아악!
마치 바닷물이 갈라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시퍼런 검광이 장내를 휩쓸어 버렸다. 그 무시무시한 광경에 세 명의 장한들은 안색이 변한 채 달려들 때보다 더욱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아아악!”
하나 그들 중 두 명은 어느새 가슴뼈가 쩌억 갈라진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다른 한 명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무어라고 소리지르려 했으나 그때 어느새 그의 앞으로 다가온 백동일이 살벌하게 웃으며 그대로 그의 목을 잘라 버렸다.
“흐흐… 쓰레기들은 비키라니까.”
순식간에 세 명의 장한이 피바다를 이루며 고혼(孤魂)이 되고 말았다. 원래 이들은 진령사걸이란 자들로, 진령(秦嶺) 이남에서는 나름대로 상당한 명성을 쌓은 고수들이었다. 하나 백동일의 무서운 기세와 가공할 검술에 제대로 대항도 해보지 못하고 쓰러지고 만 것이다.
양전은 백동일의 검법을 보자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가 알고 있는 백동일의 실력이라면 비록 진령사걸이 그의 상대는 되지 못할지라도 이토록 형편없이 당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실력을 숨기고 있었구나.”
“흐흐… 숨기는 게 아니라 실력을 드러낼 기회가 별로 없었던 거지. 닭 잡는 데 일부로 소 잡는 칼을 쓸 필요는 없지 않은가?”
“본보가 너에게 섭섭하게 해준 게 없는 것 같은데 본보를 배신한 이유가 뭐냐?”
백동일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아까부터 자꾸 배신이니 배반이니 하는데, 난 그저 쓰레기를 처리하러 왔을 뿐이라니까. 왜 내 말을 안 믿는 거지?”
그 말에 양전의 얼굴이 핼쑥하게 변했다. 그는 강호 경험이 풍부하고 머리가 비상한 인물인 만큼 백동일의 말 속에 숨어 있는 뜻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수석총관이 나를 제거하기 위해 그를 보냈단 말인가?’
양전의 가슴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 갔다. 초가보의 수석총관인 소면호리 악종기는 결코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양전은 누구보다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양전이 생각해 보아도 많은 수하들을 잃고 종남파의 본산마저 빼앗긴 채 외팔이가 되어 돌아온 자신은 별 효용가치가 없었다. 그렇다면 악종기로서는 자신의 처리에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폐기처분하려 했을 것이다. 백동일의 말대로 자신은 처리될 쓰레기에 불과한 것이다.
막상 그렇게 생각하자 양전의 얼굴에는 암울한 빛이 떠올랐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십여 년간 열과 성을 다해 왔던 조직에서 존재가치를 상실한 채 버려져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너무도 한심스러웠을 뿐이다.
‘우는 소리 따위는 늘어놓지 않는다.’
양전은 각오를 다지며 손에 들고 있는 장검을 힘껏 움켜잡았다. 막상 마음을 정하자 들끓었던 격정이 가라앉으며 평상시의 냉정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양전의 기세가 바뀐 것을 알아차렸는지 백동일은 히죽 웃었다.
“이제 제법 손을 쓸 분위기가 되는군. 일전에 종남파의 장문인과 싸운 적이 있지?”
“그렇다.”
“그럼 한번 비교해 보라구. 그 종남파의 애송이 장문인과 내 검법이 어떻게 다른지 말이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동일의 몸은 어느새 양전의 코앞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양전은 이미 백동일이 일단 손을 쓰면 인정사정을 보지 않는 성격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수중의 장검을 맹렬하게 앞으로 휘둘렀다. 검패라는 별호답게 그의 검은 상당히 패도(覇道)적이면서도 빠르고 날카로웠다. 그것은 그가 사부인 대풍검 간조명의 선풍검법(旋風劍法)을 더욱 발전시켜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절기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그가 지금 펼치는 쇄천검법(碎天劍法)이었다.
깡!
양전의 검과 백동일의 검이 정면으로 마주치며 귀청이 떨어질 듯한 격렬한 마찰음을 일으켰다.
‘으음.’
양전은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하나 백동일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어느새 그의 옆으로 움직이며 무시무시한 일검(一劍)을 찔러 오는 것이었다. 마치 주위 허공이 그 검이 움직이는 대로 진공(眞空) 상태에 빠져드는 듯 했다. 양전은 이런 상황에서 약세를 보이면 도저히 수습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쇄천검법의 절초들을 펼치며 맞서갔다.
파파파팍!
금세 사방이 온통 섬뜩한 검풍(劍風)에 휩싸여 버렸다. 양전은 오 초를 버텼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였다. 정확히 오 초 후에 그의 검은 두 동강이 났다. 그리고 육 초만에 하나 남은 오른팔마저 잘려졌으며, 다음 일초는 그의 가슴을 정확히 가르고 지나갔다.
“…”
양전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가느다란 혈선(血線) 한 줄기가 수평으로 가슴에 그어져 있어 언뜻 보기에는 누군가가 작은 세필(細筆)로 장난을 친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나 그 혈선은 점차로 굵어지더니 이내 시뻘건 핏줄기가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 양전은 몸을 휘청거리다가 벌겋게 핏발리 선 눈으로 백동일을 노려보았다. 백동일은 그의 일 장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웬일인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는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인지 그는 울적해 보이기도 했다. 양전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정말 무섭군… 이것도 종남의 검법인가?”
백동일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양전은 갑자기 피식 웃었다.
“이상한 노릇이군. 이런 무공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종남파가 그런 꼴을 당했던 거지?”
“…”
“종남파의 장문인과 비교해 달라고 했나? 한 가지만 말해 주지… 자네 실력이 무섭긴 하지만, 종남파 장문인과 싸울 생각은 말게. 그러면 자네는 죽어…”
백동일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양전은 다시 몸을 휘청거렸다. 그의 상반신은 이미 가슴에서 흘러 나온 핏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런 상태로 양전은 백동일을 보며 웃어 보였다.
“이… 이건 한때나마 자네를 친구로 삼고 싶었던 사람으로서 마지막 충고일세… 절대로 그자와 일 대 일로 싸울 생각은 하지 말게. 가급적이면 피하고, 정 피하지 못하겠으면 자네만한 고수 두 명을 더 대동하게… 그래야 비슷하게라도 싸워 볼 수 있어…”
말을 마치자마자 양전의 몸은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양전은 입가에 미소를 남기고 죽었다. 그 미소를 보는 백동일의 표정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무겁고 침울한 것이었다. 그것이 한때 한솥밥을 먹었던 양전을 자신의 손으로 처단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실력이 아직 종남파의 장문인에 미치지 못한다는 양전의 말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백동일은 한동안 싸늘하게 식어 가는 양전의 시신을 묵묵히 내려보고 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는 한쪽에 쓰러져 있는 정산의 몸을 들쳐 업고는 곧 몸을 날려 어딘가로 떠나 버렸다. 그가 사라진 장내에는 다섯 구의 처참한 시신만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몇 개의 인영이 놀라운 신법으로 초옥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들은 바닥에 내려서마자 주위에 쓰러져 있는 시신들을 발견하고는 이내 시신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곧 그들 중 한 사람이 일행 중 체구가 유난히 우람하고 눈빛이 혜성처럼 반짝이는 삼십대 초반의 청년에게 다가가 머리를 조아렸다.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초옥 안에도 비어 있는 것을 보니 정산이란 자는 도망쳤든지 아니면 저들을 살해한 자가 끌고 간 것 같습니다.”
체구가 우람한 청년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눈을 빛내며 양전의 시신 앞으로 다가갔다. 이어 양전의 몸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은 특히 양전의 가슴을 횡(橫)으로 가르고 지나간 검흔(劍痕)에 고정되었다.
“대단한 검기(劍氣)로군.”
체구가 우람한 청년은 그 검흔을 내려다보며 무언가 상념에 잠긴 모습이었다. 그 사이에 주위를 샅샅이 수색하던 나머지 인영들이 하나둘씩 그의 앞에 모여들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양전을 보고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엇? 이자는?”
체구가 우람한 청년이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는 자냐?”
“예, 대장(隊長). 이자는 초가보의 사패 중 한 사람인 검패 양전입니다. 며칠 전 삼보집회 때문에 초가보에 갔을 때 보았습니다. 한쪽 팔이 잘려 있어서 기억이 분명히 납니다. 그때는 왼쪽 팔이 없었는데 지금은 양팔이 모두 잘렸군요.”
“그렇다면 이들은 초가보의 인물들이란 말이군.”
체구가 우람한 청년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가씨가 마지막으로 모습을 나타냈던 주루의 주인이 정산이란 자임을 알아내서 간신히 숨어 있는 곳을 추적해 왔는데, 이미 초가보의 고수들이 와 있다니… 정말 일이 재미있게 됐군.”
“양전은 초가보에서도 내로라하는 고수인데 누가 감히 그를 살해했을까요?”
“몇 가지 추론(推論)해 볼 수 있지. 우선 이들을 해친 흉수는 초가보와 양숙관계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토록 강렬한 살수를 쓰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군요.”
“또한 놀라운 검법의 소유자임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검흔이 생기지 않는다.”
체구가 우람한 청년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무섭게 번뜩였다.
“그리고 나는 두 조건에 부합되는 인물이 최근에 나타났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
다른 사람들도 모두 떠오르는 생각이 있는지 표정이 변했다.
“그렇다면…”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일단은 이들의 시신을 가지고 돌아가자. 사공 대협(司空大俠)이라면 이들의 상흔에서 좀더 확실한 사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검보 보주인 서문장천의 친위대(親衛隊)를 이끌고 있으며 본인 자신이 강호의 유명한 검객인 노호검(怒虎劍) 포천성(包天星)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진산월은 가만히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에는 검은 구름 하나가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진산월은 딱 반각(半刻)만 더 있다가 움직이기로 했다. 밤이 깊어 가는데도 날은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처마 밑에 등(燈)이 내걸리고 주위가 점차로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멀리서 누군가의 술에 취한 고함 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했으나 얼마의 시간이 흐르지 그러한 소리도 하나둘씩 사라지고 고요한 침묵만이 사위(四圍)를 짓누르고 있었다. 진산월은 지금까지 서안의 동쪽에 있는 작은 야산(野山)의 이름모를 봉우리에 앉아 있었다. 그 야산은 대응표국의 뒤쪽 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리 높지 않았으나 위치가 좋아서 정상 부근의 툭 튀어나온 봉우리에 있으면 서안의 동쪽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특히 대응표국의 후원을 구석구석까지 볼 수 있었다.
진산월은 하루 종일 산봉에 앉아 대응표국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대응표국은 과연 서안의 제일표국 답게 왕래하는 사람들의 수가 엄청났다. 그들 중 대부분이 무림인이었고, 간혹 상인들과 여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 중 몇몇 사람이 진산월의 관심을 끌었다. 한 사람은 오시 무렵에 대응표국을 찾아온 머리가 허옇게 세고 곰방대를 든 남포노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늦은 오후에 본 화려한 궁장 차림의 중년미부였다. 진산월이 그들을 눈여겨본 이유는 곰방대를 든 남포노인이 서안 일대에서 거부(巨富)로 소문난 손노태야(孫老太爺)였고, 궁장미부가 서안에서 제일 큰 기루인 화월루(華月樓)를 경영하는 화대부인(花大婦人)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두 사람은 비록 무림인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서안에서는 누구도 무시 못할 부와 세력을 쌓은 사람들이었다.
손노태야의 손가전장(孫家錢莊)은 유화상단과 함께 서안의 이대상인가문(二大商人家門)이라 할 수 있었다. 하나 많은 사람들은 가문 전체의 힘은 어떨지 몰라도 일개인으로는 누구도 손노태야의 부를 따를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실질적인 재산으로는 유화상단의 주인인 유방현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서안의 제왕(帝王)인 이씨세가의 이세적조차도 손노태야와 견줄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화대부인도 만만치 않은 여인이었다. 그녀가 처음 화월루를 세웠을 때 그녀는 평범한 기녀(妓女)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 불과 이십 년 만에 그녀는 화월루를 섬서성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화류계의 낙원으로 만들었다. 화월루에는 최고의 요리사가 있고, 최고의 도박장이 있으며, 최고의 기녀들이 있다. 누구나 돈만 가지면 화월루에서 인생 최고의 환락을 누릴 수 있다. 하나 단지 그뿐이라면 화대부인의 명성이 그처럼 서안 일대에 자자하게 퍼질 리가 없었다. 칠 년 전에 장성 일대의 소문난 흉인들인 관동칠흉(關東七兇)이 화월루에 온 적이 있었다. 그들은 화월루의 최고 기녀들을 독차지하려고 했으며, 그녀들이 거부하자 흉성이 발작하여 기물을 부수고 행패를 부렸다. 다음 날, 그들 일곱 사람은 무공이 전폐되고 팔다리의 힘줄이 끊긴 폐인의 모습으로 서안의 뒷골목에 버려졌다. 그런 일이 서너 번 반복되자 강호의 누구도 화월루에서 행패를 부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화월루의 주인인 화대부인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서안에서 유명한 두 사람이 각기 다른 시간에 대응표국을 찾아온 것은 어찌 보면 그리 특별한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단지 특이한 일은 그들이 대응표국에 들어오는 모습은 보았지만 나가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손노태야와 화대부인은 그들이 쌓은 부와 명성만큼이나 바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대응표국에 와서 하루 종일 머물러 있을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오후 해가 서쪽으로 거의 기울어 갈 무렵에 다시 또 진산월의 흥미를 끄는 인물이 대응표국을 찾아왔다. 그는 누런 금포(錦袍)를 입은 건장한 체구의 중년인이었다. 이따금 번뜩이는 그의 날카로운 안광과 단정한 자세만 보아도 그가 상당한 실력을 지닌 무인(武人)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기울어 가는 석양에 비치는 금포중년인의 각진 얼굴을 보았을 때 진산월의 두 눈은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고소명…”
고소명은 한때 서안의 제일고수를 바라보았던 인물이었다. 하나 그의 꿈은 너무도 허무하게 깨어지고 말았다. 그가 필생의 숙적(宿敵)으로 생각했던 이세적과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느닷없이 나타난 신진(新進) 고수에게 처참한 패배를 하고 만 것이었다. 그가 무림일절(武林一絶)로 은근히 자부했던 금륜구절은 상대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다. 그리고 상대의 일수에 그는 오른팔이 부러지고 말았다. 그것으로 수십 년 동안 서안에서 혁혁한 명성을 자랑하던 금륜장은 무너지고 금륜존자 고소명 또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 그를 쓰러뜨린 사람이 바로 현재의 초가보주인 무영신군 초관이었다.
초관에게 패한 후 강호에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고소명이 저물어 가는 저녁에 남들의 눈을 피해 대응표국을 찾아온 것은 확실히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고소명 또한 손노태야와 화대부인처럼 대응표국으로 들어간 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둠이 찾아오고 대응표국의 정문에 유등(油燈)이 내걸릴 무렵, 다치 칠팔 명의 인물들이 대응표국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들어오자 정문에 내걸렸던 유등이 취워져서 대응표국은 짙은 어둠에 휩싸이게 되었다. 주위가 어두워져서 안력이 좋은 진산월도 대응표국으로 들어간 인물들이 누구인지 자세히 알아볼 수는 없었다. 하나 진산월은 그들 일행 중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익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그들 중 제일 마지막으로 대응표국으로 들어간 두 남녀는 다름아닌 일전에 유화상단에서 유소응을 데리고 올 때 손을 겨루었던 화산파의 고수들이었던 것이다. 비록 거리도 멀리 떨어져 있고 칙칙한 어둠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으나, 한번 본 사람은 절대로 잊지 않는 진산월의 눈썰미는 용케도 그들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천개방과 백수함이라고 했던가?”
당시 그들은 스스로의 입으로 자신들이 화산파의 일대제자들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화산파의 고수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진산월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혹시 그들 중 두기춘이 있는 것은 아닐까.”
왜 갑자기 이 순간에 만년삼정을 훔쳐서 도망갔던 두기춘의 모습이 뇌리에 떠올랐는지는 진산월도 몰랐다. 다만 화산파의 고수들이 대응표국으로 들어갔다는 걸 알게 되자 화산파로 도망갔다가 일류고수가 되어 종남파에 나타나 행패를 부렸다는 두기춘이 혹시 그들 중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진산월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두기춘이 저곳에 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진짜 중요한 것은 화산파의 고수들이 왜 늦은 밤에 대응표국을 찾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진산월은 잠시 그 점에 대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시간이 초경(初更)에 이른 것을 알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대응표국의 담장 아래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고, 무거운 적막만이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진산월은 대응표국의 담장을 넘어갔다. 이틀 동안 벌써 두 번째 남몰래 담장을 넘게 되니 일파의 장문인으로서 영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으나, 지금은 그러한 체면을 따질 여가가 없었다. 대응표국의 구석구석에는 몇 명의 고수들이 잠복해 있었으나, 의외로 경계는 그리 삼엄하지 않았다. 야밤에 대응표국을 몰래 잠입하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모양이었다. 진산월의 눈에 아침에 들렀던 대응표국의 객청(客廳)이 나타났다. 객청은 대응표국의 정문에서 십여 장 들어간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지금은 불이 꺼진 채 사람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진산월은 객청을 지나 대응표국의 후원 쪽으로 접근해 갔다. 그는 응계성이 부상을 치료하고 혼자 길을 떠났다는 대응표국의 국주인 단리정천의 말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단리정천의 말대로라면 응계성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송천기와 추성이 그런 일을 당할 리 없었다. 게다가 이 일에는 이씨세가와 어떤 식으로든 개입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단리정천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면 그래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짐작대로 화산파와 결맹하기로 했다면 응계성을 초가보로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응계성은 아직 이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산봉에서 하루 종일 대응표국의 후원을 지켜본 결과, 만일 응계성이 대응표국에 갇혀 있다면 세 군데가 가장 유력했다. 오늘 대응표국을 출입한 그 많은 사람들이 그 세 군데 건물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았던 것이다. 진산월은 우선 그 세 곳의 건물 중 가장 구석에 있는 건물부터 수색을 했다. 하나 그는 이내 그 건물에서 나왔다. 그곳은 허접한 물품들을 쌓아 둔 창고였던 것이다. 두 번째 건물 또한 별다른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는 평범한 창고였다. 세 번째 건물은 후원의 우측 외곽에 자리한 작고 허름한 단층짜리 집이었다. 특별히 지키는 사람도 없어서 진산월도 처음에는 다른 두 건물처럼 창고인 줄 알았다. 그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사오 평 정도 되는 작은 방이 나타났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하나 진산월의 두 눈은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 텅 빈 방안에 퀴퀴한 냄새와 함께 희미한 피비린내가 풍겨 오고 있었던 것이다. 진산월은 방안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곧 그는 한쪽 구석에서 피 묻은 붕대와 음식 찌꺼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붕대에서 미약하남 아직도 피 냄새가 나는 것으로 보아 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진산월이 붕대를 들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삐꺽!
문이 열리더니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무심코 방안으로 들어오다가 진산월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하나 그가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어느새 진산월이 다가와 그의 마혈(麻穴)과 아혈(啞穴)을 제압해 버렸다. 그 사람은 눈앞에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싶은 순간 자신의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눈을 있는 대로 크게 뜨고 멍하니 진산월을 쳐다보고 있었다. 진산월은 그가 무공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오십대의 중늙은이임을 알고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 준다면 아무 일도 없을 거요. 소리를 지르거나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시오.”
중늙은이는 주름진 두 눈을 연신 깜박거리며 그러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진산월이 마혈과 아혈을 풀자 그제서야 중늙은이는 정신이 드는지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에서야 뒤늦게 두려운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하고 무심코 들어온 방에서 자신보다 머리통 두 개는 더 큰 듯한 괴인의 손에 잡히게 되니 두려움과 공포가 없을 수 없었다. 다행히 중늙은이는 소리를 지른다든지 사람을 불러 도움을 청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진산월의 말에 순순히 따르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이 방에는 무슨 일로 왔소?”
중늙은이의 음성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소… 소인은 이 방을 청소하라는 집사님의 말씀을 듣고 왔을 뿐입니다…”
“이 방의 주인은 누구요?”
“이 방은 따로 주인이 없습니다. 그저 하인들이 가끔 피곤할 때가 쉬기도 하고 외부에서 일꾼들이 왔을 때 잠시 머무르기도 하는 곳입니다.”
진산월은 중늙은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를 속일 생각은 하지 마시오.”
중늙은이는 정색을 하고 도리질을 했다.
“소… 소인이 감히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 방은 정말 주인이 없는 방입니다.”
진산월은 질문 방향을 조금 바꾸었다.
“최근에 머무른 자는 없었소?”
“얼마 전에 부상이 심한 젊은이 한 사람이 요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는 어떻게 생긴 사람이오?”
중늙은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인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따로 지키는 사람들이 있어서 말이지요. 딱 한 번인가 멀리서 힐끗 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그 젊은이가 다른 사람의 등에 업혀 있어서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어디로 갔소?”
“그건 소인도 잘 모릅니다. 어제까지는 있었던 것 같은데, 오늘 오후에 집사께서 오셔서 이 방이 비었으니 깨끗하게 청소해 놓으라고 하시더군요.”
진산월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상황으로 보아 이 방에 있던 사람은 응계성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는 아직 부상이 완쾌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제나 오늘 아침에 어딘가로 옮겨진 것이 분명했다. 바로 한발만 더 내디디면 그를 찾을 수 있었는데, 그와의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것 같아 진산월은 초조한 생각이 들었다. 대체 대응표국에서는 왜 응계성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일까? 그들이 응계성을 감금한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이 그를 불안케 했다.
하나 진산월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응계성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이곳에 갇혀 있다는 흔적은 찾아낸 셈이었다.
이제 문제는 단 하나. 그들이 이곳에서 응계성을 어디로 옮겼느냐 하는 것이었다. 진산월은 그 해답을 찾을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중늙은이의 수혈(睡穴)을 짚어 그를 제워 놓고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가 향하는 곳은 단리정천의 거처였다. 그곳은 오늘 하루 동안 가장 많은 사람들이 출입한 곳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