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3권 미궁생로(迷宮生路)편 : 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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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3권 미궁생로(迷宮生路)편 : 9화


제131장. 사년귀로(四年歸路)

오늘따라 망경루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망경루의 점원인 전칠(田七)은 자신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아니, 오늘이 무슨 명절도 아니고 대체 무슨 일이람? 아침부터 한나절까지 도무지 쉴 틈이 없으니…’

아닌게 아니라 오전에는 표물(?物)을 잔뜩 실은 표행(?行)이 세 개나 지나가더니 오후 들어서는 상인들이 많이 들락거렸다. 특히 그중에는 무공을 익힌 무림인들도 적지 않아서 전칠을 비롯한 점원들은 바짝 긴장해 있는 상태였다. 무림인들 중에는 성질이 괴팍한 인물들이 드물지 않았기 때문에 자칫하다가는 의외의 봉변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전칠이 아저씨처럼 여기며 따르는 하노삼(賀老三)이 음식을 잘못 배달했다고 손님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당하고 있었다.

“이게 뭔가? 나는 분명히 녹두활어(綠豆活魚)와 찐만두, 그리고 따끈한 닭국물을 시켰는데 어째서 소면과 궁폭육정(宮暴肉丁)을 내온단 말인가?”

하노삼은 그저 머리를 숙인 채 죄송하다는 말만을 되뇌이고 있었다. 너무 여러 곳에서 주문을 받아 잠시 착각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흔치 않은 경우이기는 했으나 이런 일이 아주 없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손님은 이번 일이 무슨 평생의 씻을 수 없는 모욕이라도 되는 양 계속 호통을 치고 있었다.

“나는 원래 돼지고기를 싫어해서 생선 요리를 시켰는데 보란 듯이 돼지고기 요리를 내오다니 이건 나를 골탕먹이려고 하는 짓이 아닌가?”

“아이고, 손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손님을 어떻게 알고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나이 많고 기력도 떨어져서 망경루에서 쫓겨나면 달리 갈 곳도 없는 하노삼은 자기의 아들뻘밖에 되지 않는 손님에게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를 했다. 그 손님은 아무리 보아도 서른을 겨우 넘긴 젊은이였다. 제법 질 좋은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람을 나온 돈 많은 부잣집 공자(公子)이거나 문사(文士) 같았다. 허리춤에는 제법 호화로운 장검을 매고 있었는데,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 검이 병기라기보다는 장식품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젊은 공자는 불쌍한 하노삼을 다시 닦달하려 했으나 그때 마침 주루 안으로 한 떼의 인영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하노삼은 재빨리 그에게 인사를 하고는 그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음식은 다시 시켜 드리겠습니다. 저는 새로운 손님을 받아야하니 이만…”

젊은 공자는 성난 눈길로 하노삼을 노려보며 무어라고 소리치려 했으나 그때는 하노삼이 새로운 손님들에게 달려간 후였다.

“이… 이런…”

젊은 공자는 씩씩거렸으나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았는지 다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들어온 사람들은 일곱 명이나 되었다. 그중 여섯 명은 남자였고, 한 명은 젊은 미부(美婦)였다. 그들 중 가장 연장자인 청의중년인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때마침 달려온 하노삼을 향해 웃어 보였다.

“허헛, 오늘 무척 바빴겠군. 우리 일행이 제법 되는데 빈자리가 있겠나?”

하노삼은 젊은 공자에게 혼이 난 터라 청의중년인의 점잖은 모습에 무척이나 호감을 느꼈다.

“그럼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마침 특실 하나가 비어 있습니다.”

하노삼을 돕기 위해 옆으로 왔던 전칠이 특실은 아무나 받을 수 없는 곳이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하노삼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왕후장상(王侯將相)이 따로 있나? 품위 있고 남을 배려해줄 줄 알면 그게 왕후장상이지.’

하노삼은 그들 일행을 우측으로 안내했다. 망경루는 중앙에 제법 커다란 공간이 있고 우측에 네 개의 크고 작은 방이 나란히 있었다. 하노삼이 그들을 안내한 곳은 네 개의 방 중 가장 작은 곳이었으나 그래도 그들 일행을 전부 수용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청의중년인은 특실이 마음에 드는지 하노삼을 향해 온화한 웃음을 지었다.

“정말 아늑한 곳이군. 좋은 자리를 안내해 주어 고맙네. 역시 처음에 보았을 때부터 솜씨 좋은 점원이라고 생각했지.”

하노삼은 쭈글쭈글한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활짝 웃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곳에서 잘하는 음식은 무엇인가?”

“예, 저희 가게는 생선보다는 고기 요리를 잘합니다. 궁폭육정이나 청초육사(靑草肉絲), 남전계퇴(藍田鷄腿) 같은 것이 먹을 만합니다.”

“그럼 그 세 가지와 자네가 생각해서 괜찮은 요리 서너 가지를 더 가져오게. 술은 필요 없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하노삼이 나가자 청의중년인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일행 중 두 눈이 유난히 커다랗고 앞 이마가 약간 튀어나온 갈삼청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오늘 안으로 도착하기는 힘들 것 같군. 이곳은 경치도 괜찮고 주루도 깨끗한데 오늘은 여기서 묵고 가는 것이 어떤가?”

갈삼청년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자신의 옆에 있는 젊은 미부를 쳐다보았다.

“당신 생각은 어떻소?”

미부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한시라도 빨리 가고 싶어했잖아요.”

“하루 정도는 참을 수 있소.”

“그럼 그렇게 해요.”

갈삼청년은 다시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백의청년을 향해 물었다.

“지명, 자네는?”

백의청년은 부드럽게 웃었다.

“나야 급할 게 없지. 그렇지 않아도 내가 먼저 쉬어 가자고 하려고 했네.”

백의청년의 양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그의 시종들이 분명해 보였다.
그들 중 두 사람은 평범한 중늙은이였고, 다른 한 명은 어깨에 도(刀)를 메고 눈빛이 날카로운 황의인이었다.
황의인의 나이는 삼십대 중반쯤 되어 보였는데, 네모진 얼굴에 굳게 다문 입술이 과묵한 인상을 풍겼다.
청의중년인은 특실에 유일하게 나 있는 창문으로 가더니 밖을 내다보았다.

“여기서도 서안이 보이는군. 정말 상인들의 안목이란 대단하단 말이야. 이런 장소를 찾아내서 주루를 세울 생각을 하다니…”

백의청년이 나직한 웃음소리를 냈다.

“하하… 상 대협께서도 장사꾼이 다 되셨습니다. 주루에 오자마자 입지(立地) 조건부터 살펴보시다니 말입니다.”

“그거야 모두 몇 년 동안 자네를 신물 나게 쫓아다니느라 생긴 버릇 아닌가? 그런데 자네는 서안에 가 본 적이 있나?”

“서안은 처음입니다.”

청의중년인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뜻밖이군. 도선출재 때문에 안 돌아다닌 곳이 없다면서 서안에는 오지 않았다니…”

백의청년은 씁쓸하게 웃었다.

“솔직히 서안에는 이름난 명문세가나 신흥방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어떤 문파라도 화산파를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화산파는 이미 오래 전에 큰형님과 연관이 있는 곳이라 제가 뚫고 들어갈 자리가 없었습니다.”

“초가보가 있지 않은가?”

“초가보는 신흥방파 중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세워진 지 몇 년 되지 않아 셋째 형님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초가보가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최근 몇 년간의 일인데 그 전에 이미 거래를 시작했다니 자네 셋째 형님의 안목이 놀랍군. 그럼 이씨세가는 어떤가? 그곳도 이미 누가 먼저 자리를 잡았나?”

의외로 백의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이씨세가는 아직 본가와 아무런 인연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럼 자네는 왜 이씨세가를 노리지 않나?”

“본가의 도선출재에는 몇 가지 절대로 어길 수 없는 규칙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어떤 식으로든 관(官)과 연줄이 있는 곳에는 출재(出財)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청의중년인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씨세가의 가주인 이세적은 장안지부의 사위이니 관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지. 그런데 석가장에서 그렇게 관을 멀리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관이란 언제 권력의 풍향이 바뀔지 모르기 때문에 관을 업고 사업을 하는 것은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본가뿐 아니라 구양세가와 혁리가도 모두 비슷한 방침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서안 일대에서 화산파와 초가보, 이씨세가를 빼면 정말 쓸 만한 문파를 찾기란 힘들걸세.”

“그래서 제가 서안 쪽으로는 오지 않았던 겁니다.”

청의중년인은 의미 깊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에 오지 않았나?”

백의청년도 따라서 웃었다.

“그 문파들 말고도 괜찮은 곳을 찾았기 때문이 아닙니까?”

두 눈이 커다란 갈삼청년은 그들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하나 그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젊은 미부가 그의 마음을 짐작한 듯 다정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들은 잘 있을 거예요.”

갈삼청년은 미소를 지었으나 누가 보아도 그가 억지로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나를 욕할 거요. 삼년이 넘게 소식도 보내지 않았고, 본파가 그런 꼴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으면서도 육 개월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었잖아요. 당신 혼자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갈삼청년의 얼굴에 자조 어린 웃음이 떠올랐다.

“그렇소. 그래서 지금까지 숨어 있다가 장문사형이 돌아왔다는 소문을 듣고 나서야 겨우 돌아올 용기를 내었지. 응 사형이 늘 나에게 겁이 많고 잔머리만 굴린다고 욕을 했는데, 그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었던 거요.”

젊은 미부는 걱정스런 눈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더욱 꼬옥 움켜잡았다.

“그들도 당신의 본심을 알게 되면 당신을 욕하지 않을 거예요. 그동안 당신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너무 오랜 시일이 지나 버렸소. 그들을 본 지 사년이 되어간단 말이오. 그들이 과연 아직도 동문(同門)으로 생각하고 있을지…”

그의 얼굴이 너무나 침울해서 젊은 미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그의 손만을 계속 쓰다듬고 있었다.
청의중년인은 백삼청년과 담소를 나누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대로 시일이 너무 흘러 버렸다. 내가 예전에 알고 있던 그들이라면 그를 용서해 줄 것이다. 하나 그런 고초를 겪은 그들이 얼마나 변해 있을지 모르겠구나.’

그때 마침 하노삼과 전칠이 음식들을 내오기 시작했다.

“저희 집 요리는 서안에까지 알려져 있습니다.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하노삼의 말대로 음식들은 모두 맛이 있었다. 갈삼청년은 그중에서도 닭다리를 튀긴 남전계퇴를 집중적으로 먹었다. 젊은 미부가 그것을 보고 웃었다.

“평소에는 안 먹던 닭요리를 오늘따라 왜 그렇게 많이 드세요?”

“이거 맛있군. 정말 맛있어.”

갈삼청년이 하도 열심히 먹자 백의청년이 호기심이 동해 닭다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는 몇 번 씹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맛이 괜찮기는 하지만 다른 요리들과 별반 차이점이 없는데…’

정신없이 닭다리를 먹던 갈삼청년이 돌연 땅이 꺼져라 무거운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흐음…”

중인들은 그에게 무슨 사연이 있음을 짐작하고 묵묵히 그를 쳐다보았다. 갈삼청년은 중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된 것을 알았는지 쓴웃음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내가 모두의 식사를 방해한 모양이군. 사실 이 남전계퇴는 장문사형이 즐겨하던 요리였소. 종남파를 떠나기 전날에도 이 요리를 먹었지. 그대의 그 맛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거요.”

갈삼청년의 얼굴에 잠시 아련한 빛이 떠올랐다. 어찌 남전계퇴 뿐이겠는가? 그날의 모든 요리와 그날 나누었던 모든 말들을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갈삼청년이 잠시 과거의 회상(回想)에 잠겨 있을 때였다.

콰앙!

갑자기 벼락 치는 듯한 음성과 함께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터져나왔다.

“아앗!”

“사람이 죽었다!”

주루에 있던 손님들이 우왕좌왕 하더니 연거푸 비명과 고함 소리가 들리며 삽시간에 주위가 난장판이 되었다. 청의중년인은 밖을 내다보다 안색이 변해 소리쳤다.

“수십 명의 흑의인들이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고 있네. 어서 저들을 제지하세.”

갈삼청년이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가가(程哥哥)!”

미부가 우려 섞인 눈으로 갈삼청년을 바라보자 갈삼청년은 듬직하게 웃었다.

“걱정 마시오. 저런 삼류 무뢰배들에게 당할 만큼 약한 내가 아니오.”

청의중년인이 미부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그 말이 맞다. 너는 석 공자와 함께 이곳에 있거라.”

이어 그는 백의청년의 옆에 있는 황삼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이들을 부탁하겠네.”

황의인은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 주시오.”

그동안에도 밖에서는 처절한 비명과 악쓰는 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어서 나가세.”

청의중년인과 갈삼청년이 방을 뛰쳐나왔다. 주루 안은 이미 피바다로 변한 지 오래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경장(輕裝)을 한 흑의인 이십여 명이 병장기를 휘둘러 점원들과 손님들을 무차별로 학살하고 있었다. 손님들 중에는 무림인들도 섞여 있어서 몇몇 사람들이 그들에 대항하고 있었으나, 인원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계속 주위에 희생자들이 늘고 있었다. 청의중년인은 흑의인들의 가슴에 붉은색 전갈 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저들은 흑갈방(黑蝎幇)의 인물들인 모양인데, 그들이 왜 여기까지 와서 혈겁(血劫)을 저지르는 것일까?”

흑갈방은 섬서성의 중남부 쪽에서 횡행(橫行)하는 흑도 방파였다. 그들은 가슴에 새긴 전갈 무늬를 표식으로 삼고 있었고, 주로 약탈과 공갈 협박으로 폭리를 취하는 무리들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무림의 방파라기보다는 도적들의 집단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하나 그들의 수법이 너무 악랄하고 도적의 무리들치고는 무공의 고수들이 적지 않아서 섬서성에서는 상당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청의중년인은 그들이 동관(潼關) 일대에서 주로 활동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곳에서 그들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서안은 이씨세가 외에도 초가보와 화산파 등 거대문파들이 있어서 어지간한 흑도의 무리들도 이 일대에서는 함부로 일을 저지르지 못했다. 그런데도 흑갈방은 서안의 지척인 이곳에서 태연히 살겁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멈춰라!”

청의중년인은 벼락 같은 호통을 내지르며 가까이 있는 흑의인을 향해 쌍장(雙掌)을 내갈겼다.

꽈릉!

흑의인인 막 점원 한 명을 살해하려다가 등뒤에서 뇌성과 함께 사나운 경풍이 몰아쳐 오자 움찔하여 피하려 했다. 하나 장력이 날아드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크악!”

흑의인은 정통으로 장력에 등짝을 가격 당하고는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삼 장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입으로 폭포수처럼 피를 토하는 것으로 보아 당장 죽지는 않더라도 치명상을 입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게 뻔했다.

갈삼청년 또한 검을 뽑아 들고 흑의인들을 향해 덤벼들었다. 그의 검술은 상당히 날카로워서 순식간에 세 명의 흑인들을 쓰러뜨렸다. 청의중년인은 그가 쉽게 당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한결 여유있는 표정으로 장중(場中)으로 뛰어들었다. 두 사람의 고수가 가세하자 흑의인들도 처음과 같은 일방적인 도살은 벌이지 못했다. 흑의인들엑 대항하던 사람들도 점차로 두 사람을 중심으로 뭉쳐서 장내에는 한동안 치열한 격전이 전개되었다. 청의중년인이 막 세 번째 흑의인을 격살했을 때였다.

“흐흐… 이런 곳에서 실력 있는 고수를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음산한 괴소와 함께 하나의 인영이 청의중년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와 함께 청의중년인은 한 줄기 노도와도 같은 압력이 머리 위에서 짓눌러 오는 것을 느끼고 옆으로 이 장 움직였다.

꽝!

조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가 폐허로 변하며 부서진 나무 조각들이 사방으로 튕겨졌다. 실로 무시무시한 장공이 아닐 수 없었다. 청의중년인 앞에는 어느새 나타났는지 전신에 치렁한 흑포(黑袍)를 걸친 노인이 우뚝 서 있었다. 흑포노인의 앞가슴에는 핏빛 전갈 세 마리가 수놓아져 있었다.

“당주(堂主)님!”

주위의 흑의인들이 그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흑포노인은 차가운 폭갈을 터뜨렸다.

“바보 같은 놈들, 이런 쉬운 일 하나 해결하지 못하고 지지부진 하다니… 일각 이내로 이곳을 완전하게 정리해라. 그렇지 않으면 본방의 혈법(血法)으로 다스리겠다.”

혈법이라는 말에 흑의인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흑갈방의 혈법은 잔인무도하기 이를 데 없는 형벌로, 그 혈법에 당하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는 것이 훨씬 낫다고 할 정도였다.

“복명(服命)!”

흑의인들이 일제히 외치더니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맹렬하고 살벌한 기세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삽시간에 다시 피바람이 불며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아악!”

흑의인들은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고 상대를 죽이기 위해 눈에 불울 켜고 달려들었다. 그 기세에 질려 몇 사람의 무림인들이 허무하게 쓰러지고 말았다. 청의중년인은 흑포노인이 오늘 일의 주재자(主宰者)임을 개닫고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흑포노인은 매부리코에 쭉 찢어진 눈을 하고 있어서 보기만 해도 얼마나 악독한 심성의 소유자인지를 알 수 있었다. 흑포노인은 청의중년인이 자신을 쳐다보자 그를 향해 음산한 웃음을 날렸다.

“흐흐… 너는 누구냐?”

청의중년인은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농서의 상원건이라 하오. 귀하는 대체 무슨 이유로 이토록 무차별의 살겁을 저지르는 것이오?”

“네가 비룡객이구나. 본방의 일을 굳이 네게 알려 줄 필요가 있을까?”

청의중년인, 상원건은 신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흑갈방의 악명은 이미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무도(無道)한 무리들일 줄은 미처 몰랐소. 오늘 크게 살계(殺戒)를 어겨서라도 귀하에게 강호에 아직 법도가 살아 있음을 알게 해 주겠소.”

“흐흐… 원래 강호의 법도란 철저한 약육강식(弱肉强食)이다. 본방의 행사(行事)에 잘못 끼어든 너의 재수 없음을 탓하거라.”

흑포노인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상원건을 향해 덤벼들었다. 상원건은 흑포노인의 주름진 손바닥이 자신의 얼굴로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그 자리에 석상처럼 우뚝 서 있다가 벼락 같은 일장을 내갈쳤다.

“이얍!”

그의 장력은 흑포노인의 손바닥과 정면으로 격돌했다. 다음 순간,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상원건의 신형이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상원건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앞을 바라보니 나직하게 침음했다.

“음…”

흑포노인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미동도 않고 있는 것이다.

“흐흐… 비룡객이란 허울 좋은 이름일 뿐이군. 노부의 흑사장(黑邪掌) 맛이 어떠냐?”

흑사장이란 말에 상원건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흑포노인을 쏘아보았다.

“당신이 바로 산서성(山西省) 대동(大同)의 살인마 흑귀(黑鬼) 궁치력(宮致力) 이로군. 자신의 눈 밖에 벗어났다고 한 마을을 몰살시키고 그것도 모라자 어린아이들까지 잔혹하게 죽여서 정파인들에게 쫓겨 다닌다고 들었는데, 겨우 흑갈방에 들어간 거요?”

상원건은 비꼬는 어조로 말했으나 궁치력은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워낙 심성(心性)이 잔인하고 수법이 악랄해서 예전부터 자자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그러다 오 년 전에 산서성 대동을 지나다 사소한 시비가 붙자 그 마을 전체의 인원들을 모조리 죽여 산서성 일대를 경악과 분노로 들끓게 했다. 결국 급하게 조직된 추살대(追殺隊)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으나 용케도 추살대의 추적을 뿌리치고 몸을 감추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흑갈방에서 일개 당주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궁치력의 얼굴에 징그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흐흐… 노부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큰소리를 치는구나. 노부가 네놈에게 선뜻 정체를 밝힌 것은 이 자리에서 반드시 네놈을 죽여 흔적을 없애겠다는 뜻이다. 알고나 지껄여라!”

궁치력의 신형이 다시 허공을 날아 상원건에게 덮쳐 왔다. 상원건은 상대의 정체를 알자 마음 한구석이 어두워졌다.

‘궁치력의 흑사장은 나로서도 승산(勝算)을 장담키 어렵다. 그런데 주변의 상황조차 좋지 않으니 자칫하다간 의외의 낭패를 볼지도 모르겠구나.’

그의 주변에서 벌어진 싸움은 흑갈방 무리들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처음에는 엇비슷한 격전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궁치력의 협박이 위력이 발휘했는지 흑갈방 무리들이 미친 듯이 공격을 하는 바람에 상당수의 무림인들이 쓰러져 버렸다. 그나마 서너 명의 고수들이 서로 등을 맞댄 채 버티고 있으나, 그들도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그에 비해 갈삼청년의 활약은 눈부실 정도였다. 갈삼청년은 한 자루 장검으로 벌써 여덟 명이나 되는 흑갈방 무리들을 쓰러뜨렸다. 그러자 남아 있던 흑갈방 무리들 중 대부분이 그에게 덤벼들어 조금 전보다 한층 더 흉험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하나 한 손으로 열 손을 당할 수 없는지 갈삼청년의 동작이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상원건은 자신이 한시라도 빨리 궁치력을 쓰러뜨리고 그를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갈삼청년은 그의 하나뿐인 사위로, 그의 신상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딸을 볼 면목이 없어지는 것이다. 상원건은 피하지 않고 궁치력의 흑사장에 정면으로 맞서 갔다.

쾅! 꽈르르릉!

그들 주위는 삽시간에 세찬 경풍과 장영으로 휩싸여 버렸다. 순식간에 그들은 십여 번의 공격을 주고받았다. 하나 궁치력의 흑사장은 과연 무서웠다. 상원건은 전력을 다했으나 흑사장에 부딪힌 손에서 점차로 통증을 느끼고 조금씩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궁치력을 꺾고 갈삼청년을 도와주어야 하건만 오히려 상황은 그 반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초조해지지 말자고 계속 속으로 다짐했으나, 점차로 마음이 급해지며 손길이 바빠졌다. 하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원래 고수들간의 격전에서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상원건은 이를 알고 있으면서도 사위의 안위(安慰)가 걱정스러워 평정심을 잃고 있는 것이다. 궁치력도 이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갈삼청년을 힐끔거리며 상원건을 자극했다.

“흐흐… 저 젊은 놈이 네 아들이라도 되는 모양이구나. 걱정하지 마라. 명년 오늘, 너희 둘이 합동 제사를 받게끔 만들어 줄 테니.”

상원건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양손을 질풍처럼 휘둘러 궁치력의 허점을 노렸으나, 궁치력은 너무도 수월하게 그의 공세를 빠져나왔다. 원래 궁치력은 흑사장 외에도 흑운신법(黑雲身法)이라는 상승(上承)의 신법(身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뛰어난 고수들이 많았던 추살대의 추적 속에서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상원건은 자신의 장기인 천성산수(天星散手)가 궁치력의 흑운신법에 별로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수법(手法)에서 지법(指法)으로 공격수단을 바꾸었다. 그의 오른손 세 손가락이 거푸 튕겨지며 세 가닥의 건원지력(乾元指力)이 쏘아져 나왔다. 과연 이번에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빠르고 민첩한 흑운신법이라도 건원지의 지공을 완벽하게 피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궁치력은 옆구리 옷자락에 손가락이 들락거릴 만한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상원건의 공격을 피하기만 하던 궁치력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흑사장을 펼쳐 본격적으로 압박해 들어왔다.

팡팡!

건원지력이 흑사장에 부딪히자 파공음을 내매 튕겨져 나갔다. 상원건의 얼굴에 아쉬움의 빛이 떠올랐다. 건원지력으로도 궁치력을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자신에게 남은 수법은 신뢰선으로 펼치는 선풍십팔선 밖에 없었다. 하나 하필이면 신뢰선을 특실에 있는 자신의 딸에게 맡겨 놓고 미처 가지고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평소의 그답지 않은 실수였으나, 설마 한적한 곳에 위치한 주루에서 이와 같이 흉험한 격전을 하게 될 줄이야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신뢰선에는 사람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효능이 있기 때문에 추운 겨울에 먼 길을 가야 하는 상황에서 딸아이를 위해 잠시 그녀가 보관하도록 했던 것이다.

건원지력마저 격퇴시킨 궁치력의 흑사장은 무서운 기세로 상원건을 향해 몰아쳐 왔다. 상원건이 이를 악물고 전력을 다해 흑사장에 맞서려 할 때였다.

콰아아….

갑자기 주루의 벽이 통째로 부서지면 밖에서 누군가가 뛰어들어 왔다. 그 인영의 두 주먹이 움직이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콰콰콰콰!

마치 거센 격랑이 휘몰아치는 듯한 음향과 함께 장내에 있던 흑갈방의 무리들이 태풍에 휘말린 가랑잎처럼 사방으로 나가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아악!”

“크아아…!”

순식간에 갈삼청년을 공격하고 있던 십여 명의 흑갈방도들이 하나도 남김 없이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 믿어지지 않는 광경에 상원건은 물론이고 맹렬한 기세로 그를 공격하고 있던 궁치력마저 어처구니가 없는지 손을 거두고 말았다.

“웬 놈이냐?”

궁치력이 폭갈을 터뜨리며 그 인영에게 날아갔다. 그 인영은 멈추지 않고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단숨에 오 장을 날아 궁치력의 정면으로 덤벼들었다. 인영의 두 주먹이 세찬 경풍 속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인영의 손에는 검은색 장갑이 끼어져 있었다. 장갑은 그리 크지 않아서 손가락 부분이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그 장갑을 낀 주먹이 궁치력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드는 광경은 너무도 기경(奇驚)스러워서 현실의 일 같지가 않았다. 궁치력은 상대의 주먹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 전신이 어둠의 나락(奈落)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거대한 해일이 자신을 향해 덮쳐 오는 것 같았다. 궁치력은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진 채 사력을 다해 흑사장을 내갈겼다.

콰아아….

인영의 주먹과 닿는 순간 그의 흑사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궁치력은 전신의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아아악!”

그의 몸은 피범벅이 된 채 반대쪽 벽면을 뚫고 십여 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쿵!

바닥에 닿았을 때 그의 숨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주위가 갑자기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모든 사람들은 경악의 빛이 담긴 얼굴로 순식간에 나타나 흑갈방도들을 쓸어버린 인영을 쳐다보고 있었다.

휘잉!

마침 한차례 바람이 불자 인영의 산발한 머리가 허공으로 흩날리며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상원건의 두 눈은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저… 저….’

하나 그가 채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한쪽에서 인영이 나타날 때부터 격동 어린 표정을 짓고 있던 갈삼청년이 비명과도 같은 외침을 토하며 인영에게 달려들었다.

“일방-!”

갈삼청년, 정해는 사년 만에 만나는 낙일방의 몸을 있는 힘껏 끌어안으며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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