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4권 종남재림(終南再臨)편 : 7화
제140장. 동중설전(洞中舌戰)
새벽의 공기는 언제나 신선했다. 악종기는 한차례 깊은 심호흡을 하고는 정성스레 머리를 쓰다듬었다. 계획은 완벽하게 짜여졌다. 종남파에서 어떠한 수작을 부린다해도 그들의 멸망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밤사이에 몇 번이고 검토를 하고 세세한 부분을 수정한 다음 완벽하다는 확신이 들고 나서야 고수들을 출정(出征)시켰다. 기본 골격은 어제 정한 구중삼로의 진식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중간에 몇 가지의 변수(變數)가 있을 것에 대비하여 좀 더 철저하고 확실한 수정 계획을 짠 것이다.
‘오늘 이후…’
악종기는 멀어져 가는 초가보 고수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두 눈을 무섭게 번뜩였다.
‘종남파라는 이름은 더 이상 강호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 다음에는 화산파와의 운명을 건 한판 승부가 남아 있다. 그 승부에서 승리해야만 비로소 초가보는 강북을 석권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떳떳하게 밀주(密主)를 뵐 면목이 서게 되는 것이다.
밀주를 생각하면 악종기의 마음은 끝없는 충성심과 복종심으로 한없이 부풀어올랐고, 온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흘러나왔다. 밀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던가? 이제 그 노력의 과실 하나가 오늘 맺어지는 것이다.
악종기는 허공을 올려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소량산은 종남산의 서쪽 산자락에 위치한 험한 봉우리였다. 이곳에는 두 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중 큰 것이 대량산(大梁山)이고, 작은 것이 소량산(小梁山)이다. 작다고 해도 대량산과 거의 비슷한 크기였고, 산세는 오히려 대량산보다 더욱 험준하고 가팔라서 평상시에는 인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소량산의 봉우리에서 내려다보면 멀리 아득하게 하나의 웅장한 사찰이 보이는데, 그곳이 율종(律宗)의 조종인 정업사였다.
뎅… 뎅…
새벽의 조과(朝課)를 알리는 정업사의 종소리가 나직하게 울려퍼질 때, 차가운 이슬을 밟으며 소량산의 가파른 봉우리를 지나고 있는 한 떼의 인영들이 있었다. 그들의 수는 모두 열세 명이었는데, 하나같이 눈빛이 날카롭고 몸놀림이 뛰어나서 무림인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앞서서 달리고 있는 세 명의 인물들은 외모부터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들이 막 소량산의 정상 부근에 있는 암석 지대를 통과할 때였다. 갑자기 선두에서 달리던 세 사람의 신형이 늦추어지더니 종내에는 걷는 것과 다름없는 속도가 되고 말았다. 하나 그들의 뒤를 따르던 열 명의 중년인들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의아해하지 않고 그들과 보조를 맞추었다. 선두의 세 사람은 신중한 태도로 주위를 경계하며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들 중 가장 체구가 왜소하고 나이가 많은 흑의노인이 갑자기 몸을 멈춰 세우더니 암석군(巖石群)의 한쪽을 응시했다. 암석군 속에서 몇 개의 인영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흑의노인은 그들을 빠르게 훑어보고는 그들의 중앙에 서 있는 짙은 갈삼의 중년인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어떻게 되었나?”
갈삼중년인은 고개를 저었다.
“근처에는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소.”
“그럴 리가 있나? 이곳에서 우리를 습격하기로 되어 있을 텐데?”
갈삼중년인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반경 일 리(一里) 이내를 샅샅이 뒤졌소.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소.”
흑의노인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으나 눈가에는 약간의 당혹스런 빛이 떠올라 있었다.
“이상하군. 정보가 잘못되었나?”
“애초에 지일환인지 뭔지 하는 도둑놈의 말을 믿고 계획을 수정하는 게 아니었소. 괜히 아까운 시간만 낭비한 게 아니오?”
흑의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악 총관이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보완 계획을 세워놓은 것이 있네. 자네들은 처음의 계획대로 곧장 종남파의 산문 쪽으로 가게.”
“초 노인(焦老人)은 어떻게 할 거요?”
“우리가 입수한 정보로는 그들이 이곳과 태평곡 매복 장소로 정했다고 하네. 이곳이 아니라면 태평곡에 그들이 있을 확률이 높네.”
“그쪽은 갈 대협(葛大俠)과 현음 노인이 가는 방향이 아니오?”
“그렇다네. 우리는 그곳으로 가서 그들과 합류할 걸세.”
갈삼중년인은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더니 이내 눈을 번뜩였다.
“악 총관이 제법 머리를 썼군. 종남파 무리들이 이곳에 숨어 있다면 우리와 초 노인 일행이 합세해서 제거하고, 만약 태평곡에 있다면 초 노인과 현음 노인 일행으로 상대하게 하려는 거로군.”
“그렇네.”
“만약 그들이 그곳에 있지 않고 본산에 처박혀 있다면?”
“그래서 자네들은 곧장 종남파로 가야 하는 거요.”
“흐흐… 어떻게 되었건 그들은 빠져 나갈 구멍이 없군.”
“바로 보았네. 시작부터 계획이 조금 어긋나긴 했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네. 어차피 지일환이 가져온 정보는 크게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것이었으니 말일세.”
갈삼중년인은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그럼 종남파에서 봅시다.”
“우리는 태평곡을 들렀다가 가야 하니 조금 늦을지도 모르네. 그러니 너무 서두르지 말게.”
“염려 마시오. 당신들이 뒤를 막아 준 다음에야 우리도 종남파 안으로 진입할 거요.”
갈삼중년인은 한차례 손을 내젓고는 이내 자신의 일행들과 함께 몸을 날렸다. 그들의 신법은 표홀하기 그지없어 십여 명이 움직이는데도 옷자락 스치는 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았다. 흑의 노인은 놀라운 속도로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굉장히 정교한 신법(身法)이군. 확실히 중원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군.”
그때 규염을 기른 건장한 체구의 홍포노인이 그에게 다가왔다.
“저자가 바로 곽태보(郭泰保)요?”
“그렇다네.”
홍포노인은 붉은 빛이 감도는 눈으로 갈삼중년인 일행이 사라져간 곳을 보고 있다가 냉랭한 코웃음을 날렸다.
“흥.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는 별로 대단할 것도 없더군.”
흑의노인의 시선이 홍포노인을 슬쩍 스치고 지나갔다.
“겪어 보기 전에는 모르는 법이지.”
“내 말이 그말이오. 솔직히 만나 보지 전에는 남들이 하도 신강(新彊) 제일의 고수니 죽음의 별이니 떠들어 대길래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가 했었소. 그런데 어제 막상 보게 되니 체구도 보잘 것 없는 평범한 인상의 중년인인 게 아니오? 역시 변방 놈들의 허풍을 믿는 게 아니란 걸 새삼 깨달았소.”
흑의노인이 별 반응이 없자 홍포노인은 약간 멋쩍은지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람을 꼭 외모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지만, 소문만큼의 실력자는 아닐 거란 말이오.”
의외로 흑의노인이 그 말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확실히 곽태보가 그들 중 제일가는 실력자는 아닐세.”
홍포노인은 뜻밖인 듯 고리눈을 치켜떴다.
“그럼 조금 전의 일행들 중 곽태보 보다 더 강한 고수가 있단 말이오?”
“적어도 네 명은 그보다 하수(下手)가 아닐세. 그리고 그중 두 명은 곽태보보다 한 수 위라고 봐야지.”
“네 명이라면 어제 곽태보와 함께 참석했던 자들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들 중 곽태보가 우두머리 아니었소?”
“그가 가장 나이가 많아서 연장자(年長者) 대접을 해주는 것뿐일세.”
홍포노인은 흥미가 이는지 급히 물었다.
“그럼 곽태보 보다 강하다는 두 명은 그들 중 누구요?”
“곽태보 왼쪽에 있던 자를 기억하는가?”
홍포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눈을 번쩍였다.
“그 비쩍 마르고 음침하게 생신 회포인 말이오?”
“그자가 바로 염벽수(廉碧樹) 일세.”
홍포노인의 얼굴에 움찔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변황일독(邊荒一毒) 염벽수가 그자란 말이오?”
“그렇다네. 손속이 잔인하기 이를 데 없고 한번 눈 밖에 벗어난 자는 지옥 끝이라도 쫓아가 요절을 내버린다는 독종(毒種) 중의 독종이지.”
“음… 다른 한 사람은 누구요?”
“가장 뒤쪽에 서 있던 젊은 친구일세.”
“황색 단삼(短衫)을 입고 칼 한 자루를 가슴에 품고 있는 청년 말이오?”
“그렇다네.”
홍포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자라면 나도 기억하고 있소. 얼굴이 상당히 준수하고 신태(神泰)가 비범해 보여서 한눈에 들어오기는 했소. 하지만 그자의 나이는 이제 겨우 서른 전후밖에는 안 보이는데, 곽태보 보다 강한 실력을 지녔단 말이오?”
“곽태보뿐 아니라 조금 전의 일행들 중 가장 강한 고수일세.”
홍포노인은 깜짝 놀라 물었다.
“그가 누구요?”
흑의노인은 짤막하게 입을 열었다.
“탁극(卓剋).”
그 말에 홍포노인의 입에서 탄성과도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혈린도(血麟刀) 탁극!”
“바로 그자일세.”
탁극이라는 말에 누구보다 자존심 강하고 상대를 우습게 아는 홍포노인도 적지 않게 경악한 모습이었다. 탁극은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자달목(紫達木) 분지에 사는 인물이었지만, 그 명성만큼은 홍포노인도 익히 듣고 있었다. 홍포노인은 놀라움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그자의 혈린도가 소문처럼 그렇게 무섭소?”
“일전에 우연히 후원에서 그가 도법을 시전하고 있는 광경을 본 적이 있었네.”
“어땠소?”
흑의노인의 주름진 이마 밑에 자리한 두 눈에서 날카로운 신광이 뿜어 나왔다.
“결코 맨몸뚱이로 그자의 칼 앞에 서고 싶지 않았네.”
그 말에 홍포노인은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마환 초일산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탁극이 휘두르는 칼이 얼마나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 능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잠시 그들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얼마 후에 홍포노인은 어색한 헛기침을 토해냈다.
“험! 아무튼 그런 자가 같은 편이라니 든든한 생각이 드는구려.”
조금 전보다는 기세가 많이 꺾인 모습이었지만, 초일산은 그를 자극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홍포노인, 진염의 발호에 ‘벽력(霹靂)’ 이라는 두 글자가 붙은 것은 단순히 그의 무공이 패도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성격 자체가 벼락처럼 성급하고 난폭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그의 성정(性情)을 잘 알고 있는 초일산은 그가 쑥스러움을 느끼기 전에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소고도를 조금 올리도록 하세. 태평곡에 들렀다가 늦지 않게 종남파로 가야 하니 말일세.”
초일산의 말에 진염은 물론이고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신법을 배가시켰다.
반시진 가량 달려가자 소량산을 지나 울창한 수림과 기암괴석이 밀집한 계곡이 나타났다. 이 계곡에서 조금만 더 가면 태평곡에 도착하게 된다.
멀리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여명(黎明)을 받아 점차로 모습을 드러내는 계곡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더구나 멀지 않은 곳에 높이가 수십 장은 족히 될 듯한 폭포까지 자리하고 있어 세외선경(世外仙境)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폭포 아래에는 제법 큰 연못이 있었고, 연못 주위에는 크고 작은 동굴들이 여기저기에 뚫려 있었다.
이곳의 경치는 비록 좀처럼 보기 드물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마음이 급한 중인들의 발길을 붙잡지는 못했다. 아직도 태평곡을 가려면 일각(一刻) 이상을 달려가야 하기 때문에 중인들은 거대한 폭포를 일별할 뿐 신형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데 그들이 폭포를 지나 계곡을 절반쯤 가로질러 갈 때였다.
“누나… 누나…”
어디선가 어린아이의 다급한 외침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중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몸을 멈추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곳은 종남산에서도 상당히 외진 곳에 있는 깊은 계곡이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니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막 여명이 시작되려는 이른 새벽이 아닌가? 이렇게 이른 시간에 어떻게 어린아이가 이런 깊은 산중에 올라올 수 있단 말인가? 중인들의 의혹을 느끼고 서로 시선을 마주치고 있을 때, 다시 아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누나 제발 정신 차리세요! 누나!”
보아하니 어린아이는 누나와 함께 산에 올라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누나가 사고를 당해 정신을 잃자 이곳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누나를 깨우고 있는 것 같았다. 중인들은 무심결에 아이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가 이내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려오건만 아이의 모습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저쪽 동굴이다!”
그들 중 회색 장삼을 걸친 장한이 한쪽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니 폭포에서 가까운 동굴 한군데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마도 한밤의 추위를 견디기 위해 모닥불을 피웠던 모양이다. 중인들은 잠시 머뭇거리기는 했으나 이내 다시 걸음을 재촉하려 했다. 이런 곳에 어린아이가 있다는 것이 호기심을 자극하기는 했으나, 그런 호기심을 충족시킬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었다. 한데 그들이 막 다시 신형을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아악!”
갑자기 여자의 높은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모닥불이 피어올랐던 동굴에서 나는 것이었다.
제일 먼저 소리쳤던 회삼 장한이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그 동굴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는 하북십호 중의 일곱째인 나한호(羅漢虎) 최당(崔唐)이라는 인물이었다.
초일산은 최당이 자신의 허락도 받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자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으나 뒤늦게 그를 제지하기도 뭐해서 그가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동굴 속으로 들어간 최당이 좀처럼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하북십호의 첫째인 절정호(切情虎) 위민(韋旻)은 아까부터 초일산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절로 초조한 심정이 되었다.
‘바보 같은 녀석. 중요한 일을 코앞에 둔 녀석이 인정(人情)에 끌려 쓸데 없는 짓을 하다니… 대체 뭐 하느라고 질질 시간을 끌고 있는 거야?’
위민은 슬쩍 하북십호의 막내인 냉혈호(冷血虎) 적일명(翟日明)에게 눈짓을 했다. 적일명은 하북십호 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렸으나 눈치가 빠르고 냉정해서 위민의 은근한 신임을 받고 있었다. 적일명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최당이 들어간 동굴로 몸을 날렸다. 위민은 적일명이 곧 최당을 데리고 나오리라고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적일명조차 당최 동굴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제서야 위민은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표정이 굳어졌다. 초일산 또한 눈빛이 차가워진 채 동굴 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위민은 이번에는 하북십호 중 두 명을 동굴로 보냈다.
두 사람은 이미 사태의 추이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전과는 달리 신중한 모습으로 동굴로 접근했다. 동굴로 가까이 갈수록 짙은 연기가 뿜어 나오고 있었다. 이것을 본 두 사람은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동굴 밖으로 이 정도 연기가 흘러나올 정도라면 동굴 안은 사람이 견디기 힘들게 분명했다. 최당과 적일명이야 강호의 고수이니 숨을 참을 수 있다 하더라도 처음에 울었던 아이와 여인은 진작에 뛰쳐나왔어야 옳았다.
“최 형(崔兄)! 적 노제(翟老弟)!”
두 사람 중 키가 크고 몸이 마른 장한이 동굴 안을 향해 소리쳤다. 하나 공허한 메아리만 울려 나올 뿐 사람의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교차하더니 연기가 뿜어 나오는 동굴을 향해 일제히 장력(掌力)을 내갈겼다.
꽈릉!
꾸역꾸역 흘러나오던 연기들이 세찬 장력에 산산이 흩어질 때 두 사람의 신형은 어느새 동굴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동굴은 그다지 넓지 않아서 두 사람이 동시에 들어가자 어깨가 서로 맞닿을 정도로 불편했다. 자연히 두 사람은 하나가 앞서고 하나가 뒤따르는 대형을 취해야만 했다. 동굴을 조심스럽게 사오 장쯤 전진하던 두 사람은 이내 걸음을 멈추었다. 동굴의 앞이 막혀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은 귀신에 홀린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다른 샛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먼저 들어온 최당과 적일명은 어디로 사라진 것이란 말인가?
동굴이 끝나는 부분에는 나무와 짚더미들이 잔뜩 쌓인 채 타오르고 있었다. 나무들이 모두 젖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일부러 연기를 많이 내기 위해서 그런 나무들만 태운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장력을 날리고 발로 비벼서 불을 끈 다음 다시 동굴 안을 샅샅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강호의 경험이 풍부하고 실력이 뛰어난 고수들인지라 겉으로 보이는 현상에 현혹되지 않고 쉽게 침착함을 되찾았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다!”
두 사람 중 한 명이 이내 다른 통로를 발견해 냈다. 동굴의 끝에서 이 장쯤 떨어진 곳에 이상할 정도로 툭 튀어나온 바위가 있었다. 하나 자세히 보면 그것은 진짜 바위가 아니라 가죽에 색칠을 해서 바위 형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바위가 가짜임을 알아차린 장한이 바위를 향해 강력한 장력(掌力)을 내갈겼다.
꽈릉!
나무로 틀을 짜서 겉에 색칠을 한 가죽을 덧대어 놓은 가짜 바위는 단숨에 박살이 나버렸다. 하나 바위에 장력을 갈겼던 장한 또한 비명을 지르며 손을 감싸 쥐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크악!”
그의 손은 날카로운 칼날에 다져진 듯 처참하게 갈라져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이 깜짝 놀라 살펴보더니 이내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런 간악한 놈들!”
그 바위 형상의 가죽 속에는 예리한 창날이 수십 개나 빽빽이 꽂혀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홧김에 맨손으로 바위를 후려쳤으니 손이 성할 리 없었다.
그들은 그제서야 이 동굴 자체가 치밀한 함정임을 알아차렸으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바위 자체도 일부러 가짜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유독 그 바위만 다른 부분과 그토록 두드러지게 틀릴 리가 없었다.
부서져 나간 바위 뒤에는 과연 사람 하나가 통과할 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하나 그들은 누구도 선뜻 그 구멍 속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구멍 속에 어떠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판국에 무작정 뛰어들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한없이 지체할 수도 없어서 그들은 결국 동굴 밖으로 다시 나오고 말았다.
동굴 밖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중인들은 달랑 그들 두 사람만 나오는 데다 그중 한 사람은 손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자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먼저 들어간 놈들은 어떻게 하고 너희들만 나왔느냐? 그리고 그 손은 어떻게 된 거냐?”
성질이 급한 하북십호 중의 둘째인 광호(狂虎) 장태방(張泰方)이 눈을 부릅뜨며 노성을 질렀다. 장태방은 별호 그대로 일단 화가 나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미친 사람처럼 날뛰기 때문에 모두들 그를 두려워했다.
두 사람이 사정을 설명하자 중인들의 표정이 모두 무거워졌다. 위민이 초일산을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저 동굴에 함정을 파놓고 우리를 유인한 것 같습니다.”
“자네들답지 않게 너무 어설픈 수작에 넘어갔군.”
초일산은 그를 크게 꾸짖거나 비웃지 않았으나 위민은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죄송합니다. 일곱째가 얼마 전에 아끼던 여동생을 잃었기 때문에 여인의 비명 소리가 나자 무의식중에 경솔한 행동을 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시간이 급한데 이대로 떠나는 게 좋겠습니까? 아니면…”
초일산은 나직하게 혀를 찼다.
“쯧. 자네는 이런 함정을 누가 팠다고 생각하나?”
위민은 귀가 번쩍 뜨이면서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렇다면… 종남파에서?”
“그들 외에 없지 않은가? 소량산에서 기습을 할 줄 알았더니 장소를 변경한 모양이군. 아무래도 지일환이 우리에게 온 것 자체가 그들의 치밀한 계획이었던 것 같네.”
위민은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면 그냥 갈 수 없군요. 필시 그놈들은 이 근처에 있을 겁니다.”
“문제는 함정이 저 동굴 하나에만 있겠냐는 걸세. 그들이 이곳을 매복 장소로 잡은 이상 틀림없이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했을 걸세.”
“그래 보았자 하루살이 같은 놈들뿐입니다. 몰랐을 때는 당했지만 이미 그들의 흉계를 안 이상 그놈들을 소탕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너무 그들을 우습게 보지 말게. 청효 나월과 패왕창 전괴 등이 허명(虛名)뿐인 고수라서 그들에게 당한 게 아닐세.”
“그놈들 중 주의할 놈은 장문인뿐입니다. 그나저나 아무리 함정을 팠다고 해도 최당과 적일명이 너무 쉽게 당한 게 믿어지지 않는군요. 특히 적일명은 눈치가 빨라서 이런 간단한 함정에 빠질 리가 없는데…”
“그만큼 그들 중 실력 좋은 자가 있다는 소리겠지.”
“신검무적도 왔을까요?”
“그건 모르지. 하지만 그들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 편의 희생자가 세 명이나 발생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초일산은 여전히 종남파의 고수들을 경시하는 듯한 위민의 행동이 조금 못마땅했으나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자신의 옆에 있는 진염과 구소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 분의 생각은 어떠시오?”
진염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호탕하게 소리쳤다.
“그런 쥐새끼들을 잡는 데 거리낄 게 뭐 있소? 그들이 숨어 봤자 동굴 속일 텐데, 동굴 숫자가 많아야 열 개 남짓이오. 절반은 여기 남아 있고, 나머지 반은 동굴을 차례로 수색한다면 반시진이면 그들을 색출할 수 있을 거요.”
하나 구소기는 그보다는 한결 신중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쉽게만 생각할 게 아니오. 동굴이 얼마나 길고 그 형태가 어떤지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인원을 투입했다가는 또 다른 낭패를 볼 가능성이 있소.”
진염이 눈을 부릅뜨고 그를 쏘아보았다.
“그럼 어쩌자는 말이오? 무작정 이곳에 죽치고 있는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지 않소? 약간의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동굴을 하나하나 뒤져 소탕전을 벌인다면 어렵지 않게 그놈들을 몰살시킬 수 있소.”
두 사람이 언쟁(言爭)을 벌일 기미가 보이자 초일산이 수습에 나섰다.
“노부에게 한 가지 생각이 있는데 들어 보겠나?”
두 사람은 서로 말을 멈추고 초일산을 주시했다. 사실 그들이 한 지역의 패웅(覇雄)으로 군림하고 있다고 해도 본신의 실력이나 강호에서의 명성은 초일산에게 뒤진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만심이 하늘을 찌르는 진염조차도 초일산의 말은 함부로 무시하지 못했다.
초일산은 두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고정되자 자신의 계획을 밝히기 시작했다.
“이대로 동굴로 들어가는 것은 너무 위험부담이 크다고 생각하네. 이곳에 종남파의 고수들이 얼마나 숨어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예상보다 많은 피해가 발생한담녀 우리의 임무에 차질을 초래하게 될 걸세. 그래서…”
초일산의 시선이 처음에 연기가 흘러나왔던 동굴로 향했다.
“저자들은 우리를 유인하기 위해서 연기를 피웠는데 우리라고 피우지 못할 게 없지 않을까?”
그 말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던 진염과 구소기의 얼굴에 이내 한 줄기 빛이 떠올랐다.
“굴 속의 너구리를 잡듯이 말이오?”
“그렇지. 동굴이 많기는 하지만 숫자를 세어 보니 마침 열한 개일세. 우리도 열한 명이니 한 사람이 하나씩 동굴을 맡아 불을 피워 연기를 동굴 안으로 흘려보낸다면 어느 동굴에 숨어 있건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걸세. 그렇게 된다면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동굴 속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고, 그들의 행적 또한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오.”
“하지만 그들이 동굴 안에 없다면?”
구소기가 다소 불안한 추측을 했으나 이내 진염에게 면박을 당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저 동굴들이 엉뚱한 곳에 출구가 있을 만큼 깊을 리도 없고, 그놈들이 숨어 있지 않을 리도 없지 않소? 적어도 우리를 유인했던 그 어린 꼬마놈과 계집은 찾아낼 수 있을 거요.”
구소기 또한 그 방법 외에는 달리 좋은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곧 하북십호 중의 대여섯 명이 주위에 흩어져 나무를 구해 오기 시작했다. 비록 겨울의 끝자락이어서 눈 덮인 나뭇가지들밖에 구할 수 없었으나, 연기를 피우는 데는 오히려 적합해서 모두들 금세 한 짐씩 들고 왔다. 초일산은 그들이 끌어 모은 나뭇더미를 동굴 앞에 하나씩 쌓아 놓았다. 그리고는 화섭자를 꺼내 불을 붙였다.
처음에는 잘 붙지 않았으나, 공력으로 불길을 조정하자 금세 연기가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하북십호와 초일산 등은 각기 한 사람씩 동굴 앞에 가서 장력을 날려 연기를 동굴 안으로 흘려보냈다. 삽시간에 엄청난 양의 연기들이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시간이 흐르지 않았는데도 벌써 동굴 안이 연기로 가득 차서 오히려 밖으로 밀려 나오는 곳도 있었다.
처음에는 모두들 조만간에 동굴 속에 숨어 있는 종남파의 고수들이 뛰쳐 나오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동굴 속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쌓아놓았던 나무들이 거의 타버릴 때까지 동굴 밖으로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마침내 성질이 급한 광호 장태방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지? 왜 한 놈도 나타나지 않는 거야?”
구소기가 초일산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그놈들 중 잔꾀 많은 자가 있는 것 같소. 사태가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구려.”
초일산의 표정도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 동굴들 중 적어도 한곳에는 그들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노부가 그들을 너무 쉽게 본 것 같네.”
그때 위민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저 동굴이 조금 이상합니다.”
초일산의 시선이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겉보기에는 여느 동굴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하나 초일산은 이내 위민이 이상하다고 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다른 곳은 동굴 안에 가득 찼던 연기들이 다시 동굴 밖으로 밀려나오고 있는데, 그 동굴만은 계속적으로 연기들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자세히 주시해 보면 연기들이 빨려 가는 속도가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진염이 동굴 안을 기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이곳에 이렇게 깊은 동굴이 있었나?”
바로 그때였다.
“아아악!”
그 동굴 안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 소리를 듣자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일제히 대변했다.
“막내의 목소리다!”
장태방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가 금시라도 동굴 안으로 뛰어들 듯하자 위민이 황급히 그를 제지했다.
“섣불리 나서지 말고 행동을 통일해라.”
진염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듯 붉게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무를 더 끌어 모아서 연기를 들여보냅시다. 조금 있으면 불이 꺼지겠소.”
초일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순히 연기만 피워서는 안 될 것 같군. 아마도 이 동굴은 다른 곳으로 출구가 나 있는 모양일세.”
“그렇다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오?”
초일산은 동굴의 짙은 어둠을 매서운 눈으로 응시하고 있더니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무래도 안으로 들어가 봐야겠네.”
진염도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지 인상을 찡그리더니 바닥에 침을 뱉었다.
“퉷! 이놈들이 끝까지 약은 수를 쓰는군. 아예 이렇게 된 이상 이곳에 신경 쓰지 말고 종남파로 곧장 갑시다. 이놈들에게 붙들려 아까운 시간만 낭비하고 있지 않소?”
“뒤에 후환거리를 남겨 두고 어찌 앞으로 간단 말인가? 더구나 우리의 목표는 단순한 종남파의 멸문이 아니라 그들의 문하를 단 한 명도 살려 두지 않고 멸살하는 것일세. 이곳에 종남파의 고수들이 숨어 있다는 걸 안 이상 그들을 그냥 두고 갈 수는 없네.”
진염도 그런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공연히 약이 오르고 화가 나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놈들, 내 눈에 띄기만 해봐라. 아주 요절을 내줄 테다!”
그의 그런 외침을 듣기라도 한 양 동굴 안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난 이 안에 있으니 요절을 내든 주리를 틀든 해볼 테면 해봐라.”
그 말에 진염은 깜짝 놀랐으나 이내 불 같은 노호성을 터뜨렸다.
“어느 놈이냐? 네놈도 강호의 고수라면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 말고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라!”
그의 음성은 동굴 전체를 쩌렁하게 울렸다. 하나 동굴 안의 사람은 조금도 겁을 먹지 않은 듯 오히려 낄낄거리며 웃는 것이었다.
“흐흐… 전생(前生)에 귀머거리라도 되었느냐? 뭔 목청이 그리도 크단 말이냐?”
“뭐라고? 이놈이…”
진염이 발연대로 하여 길길이 날뛰려 할 때 초일산이 그를 제지했다.
“흥분하지 말고 잠시만 물러가게.”
진염은 씩씩거리며 화를 감추지 못했으나 못 이기는 척 초일산의 말대로 뒤로 물러났다. 이런 식으로 말다툼을 해보았자 자신의 체면만 구기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초일산은 아직도 연기가 빨려 들어가고 있는 동굴 속의 괴괴한 어둠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종남파의 고수인가?”
동굴 속의 괴인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고수라는 말은 당치 않지만 이 몸이 종남파의 문하라는 것은 사실이오.”
괴인이 선뜻 자신의 신분을 시인하자 초일산은 재차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겠나?”
“이름은 알아서 무얼 하시려고 그러오?”
“종남파의 제자들은 인원수는 많지 않지만 하나같이 좀처럼 보기 힘든 뛰어난 인재들이라고 알고 있네. 그러니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통성명(通姓名)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나?”
“하하… 나 같은 무명소졸(無名小卒)을 천하에 명성이 높은 초 대협 같은 분이 아실 리가 없소.”
초일산은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하자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이처럼 태연하게 말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더욱 궁금해지는군. 내 이름은 이미 알고 있는 듯 하니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는 게 순서 아니겠나? 아니면 종남의 제자들은 신분이 밝혀지는 걸 두려워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하하… 과연 듣던 대로 초 대협의 입은 무섭소이다. 자칫하면 내가 이름조차 밝히지 못하는 졸장부가 되겠구려. 나는 동중산이라 하오.”
초일산의 주름진 두 눈에서 번갯불 같은 섬광이 폭사해 나왔다.
“오, 자네가 바로 비천호리로군. 반갑네.”
아마 다른 자였다면 초일산은 동중산을 아는 척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두 사람의 강호에서의 명성과 지위는 천양지차(天壤之差)였다. 동중산도 그 점을 익히 알고 있는지 음성 속에는 은근한 비아냥이 담겨 있었다.
“초 대협이 나 같은 별볼일없는 사람의 별호까지 알고 있다니 정말 뜻밖이오.”
“자네의 재주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들어오고 있었다네.”
“초 대협의 입은 칼처럼 예리하면서도 꿀처럼 달콤하구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진 대협이나 구 대협의 생각은 전혀 다른 것 같소만.”
아닌게 아니라 진염은 동중산과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고 있는 초일산이 갑갑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상대의 정체를 알았다면 당장 쫓아 들어가 죽여 버리면 그만인데, 무슨 사설이 이토록 길단 말인가?
초일산은 그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계속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동굴의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네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노부인데 왜 쓸데없이 다른 사람을 신경 쓰고 있나?”
“하하… 이거 한 방 먹었군. 초 대협의 말이 맞소. 내가 실수를 했소.”
동중산이 선뜻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자 초일산은 그가 듣던 것보다 더욱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성격의 사람은 좀처럼 약점을 보이거나 경솔한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오랜 동안의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조금 전에 동굴로 들어간 노부의 일행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나?”
“둘 중 한 사람은 심하게 반항을 하다 제법 크게 다쳤소.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초일산은 급히 물었다.
“또 한 사람은 어떻게 되었나?”
“그자는 사로잡히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대항하다 아쉽게도 목숨을 잃고 말았소.”
초조한 표정으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위민이 버럭 노호성을 터뜨렸다.
“동중산, 이놈! 감히 내 형제를 죽이다니… 네놈을 갈가리 찢어 버리고야 말겠다!”
“거참, 똑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는군. 나를 찢어 죽여도 좋고 요절을 내도 좋으니 할 수 있으면 어디 들어와서 해보시오.”
“이놈, 내가 못할 줄 아느냐?”
위민은 금시라도 동굴 속으로 뛰어들 듯 했으나 결국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초일산은 동중산이 자신들의 마음을 흐트러뜨리기 위해서 유인하고 있다는 것을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유혹에 흔들리는 일행들이 못마땅한지 싸늘한 눈으로 위민을 쏘아보았다. 위민이 움찔하여 잠잠해지자 초일산은 다시 동중산이 숨어 있는 동굴의 어둠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린아이와 여자를 이용해서 함정을 파다니 명문정파라는 종남파의 자존심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군.”
동중산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껄걸 웃었다.
“하하… 문하제자라고는 몇 명 남지도 않은 문파를 없애기 위해 꼭두새벽에 수십 명을 동원해 기습을 일삼는 무리들을 상대하다 보니 다소 예의에 어긋나는 점이 있었더라도 양해해 주기 바라오.”
아무리 초일산이 강호에서 평생을 굴러먹은 노련한 인물이라고 할지라도 말로는 동중산을 당해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를 끄집어낼 뾰쪽한 방법도 당장 생각나지 않아 초일산은 조금 갑갑한 심정이었다. 결국 이런 식의 대치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초일산은 결단을 내렸다. 그는 진염에게 전음(傳音)을 보냈다.
“다소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어쩔 수 없군. 내가 이놈의 신경을 계속 잡고 있을 테니 자네는 하북십호 중 몇 사람을 데리고 동굴 속으로 뛰어들게.”
‘진작 이럴 거면서 왜 그렇게 시간을 끌었단 말인가?’
진염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겉으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소. 지금부터 천천히 열을 세면 실행할 테니 그동안 저놈의 이목을 최대한 흐려놓아 주시오.”
진염은 슬쩍 위민에게 전음으로 지시를 내려 하북십호 중의 세 사람을 지원받았다. 위민은 동작이 빠른 인물들로 세 사람을 선발해 진염을 따라 행동하도록 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초일산과 함께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동굴 밖을 지키기로 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소리 없이 진행되는 동안 초일산은 동중산을 향해 다소 과격한 언사를 내뱉었다.
“종남파는 이미 강호에서 그 존재가치를 상실한 문파일세. 그에 비하면 본보(本堡)는 강호의 새로운 중심이 될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을 지니고 있지. 자네 생각은 어떤가?”
동중산은 그의 이 말을 미처 예상치 못한 듯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초일산은 자신들의 움직임이 혹시 그에게 노출된 것이 아닌가 조심스러웠으나,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동굴 밖에서 짙은 어둠에 휩싸인 동굴 속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굴 안에서도 연기 때문에 밖의 상황을 파악하기는 힘들다고 판단한 것이다.
과연 동중산은 초일산이 말한 의도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있었는지 동굴 안에서 약간은 당혹스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초 대협의 말은 나보고 본파를 배신하고 초가보의 수하가 되라는 것이오?”
“시기(時機)를 잘 아는 자가 준걸(俊傑)이라는 말이 있네. 자네 같이 재능 있고 뛰어난 인재가 이미 기력이 다한 종남파에 몸담고 있는 것은 너무 아쉬운 일일세. 어차피 종남파는 오늘 이후 강호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될 걸세. 남자로 태어나 제대로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는다면 너무도 원통한 일이 아니겠나?”
“…!”
“자네가 결심을 한다면 본보의 보주께는 노부가 책임지고 잘 말씀드려 주겠네. 어떤가? 생각이 있나?”
말을 하며 초일산은 진염에게 눈짓을 했다. 그 순간 진염은 세 명의 장한들과 함께 동굴 안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의 신형이 어찌나 빠르고 신속했던지 연기가 채 흩어지기도 전에 그들의 몸은 동굴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초일산과 구소기 등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들이 사라진 동굴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한데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쿠르르릉…
동굴 전체가 갑자기 지진이라도 만난 듯 세차게 뒤흔들리더니 동굴 입구가 그대로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앗?”
중인들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을 때 동굴 입구는 이미 무너진 바윗덩어리들로 완전히 메워져 버렸다. 그것은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초일산 등이 무언가 이상함을 알았을 때는 이미 동굴이 무너진 다음이었다.
“이럴 수가…”
초일산은 평생을 강호의 도산검림(刀山劍林) 속에서 살아오면서 온갖 풍상(風霜)을 다 겪었지만, 지금 이 순간처럼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은 본 적이 없었다.
분명 안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를 잡으려고 뛰어들자 동굴이 무너져 버리다니…
동굴이 무너진 것이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무언가 인공(人工)적인 것임은 알겠는데 무슨 수로 동굴 입구를 무너뜨릴 수 있었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동굴 안으로 뛰어들어간 진염과 세 명의 장한은 생사(生死)조차 알지 못했다. 하나 초일산은 왠지 그 안에서 동중산의 모습은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