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4권 종남재림(終南再臨)편 : 9화
제142장. 권신출현(拳神出現)
그들 중 가장 앞에 있는 두 사람은 짙은 흑삼의 중년인과 탐스런 은발에 하얀 수염을 기른 백의노인이었다. 흑삼중년인은 비쩍 마른 몸에 훌쭉한 키를 지녔다. 표정이 마치 석상을 보는 것처럼 딱딱했는데, 그 석상 같은 얼굴에 박인 두 눈에서 번뜩이는 안광은 실로 철석간담(鐵石肝膽)이라도 서늘케 할 정도로 냉혹무비한 것이었다. 흑삼중년인의 오른 팔뚝에는 검은 색으로 번들거리는 채찍이 칭칭 감겨져 있었다.
전흠은 한눈에 그 검은 채찍이 바로 조금 전에 자신을 스치고 바닥을 움푹 파놓은 주인공임을 알아보았다.
흑삼중년인 옆에 서 있는 백의노인은 머리에 검은 터럭 하나 없는 완벽한 백발에 턱밑으로 가슴까지 내려오는 탐스러운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인자하고 부드럽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특히 수정(水晶)처럼 차가운 백의노인의 두 눈은 일체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아서 마치 얼음으로 만든 인형을 보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한 걸음 뒤에는 얼굴에 검상(劍傷)이 나 있는 사십대 중년인이 우뚯 서 있었다. 그 중년인은 옆구리에 한 자루의 평범한 도를 차고 있었는데, 언뜻 보기에도 전신에서 맹렬한 도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절세의 도객(刀客)임을 짐작케 했다.
그의 일 장 뒤에는 전신을 검은 색 무복(武服)으로 통일한 여섯 명의 장한이 일렬로 서 있었다. 그들 또한 하나같이 태양혈(太陽穴)이 불룩 튀어나오고 눈빛이 형형한 것으로 보아 내외공(內外功)을 겸비한 고수들임을 알 수 있었다.
‘어디서 이런 고수들이 나타난 거지? 혹시 이들도…’
소지산은 그들을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실력을 미루어 알 수 있기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때 구소기 그들을 발견한 듯 반색을 했다.
“어서 오십시오, 두 분. 그렇지 않아도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구소기의 신분으로 이처럼 존대를 하는 상대는 결코 흔하지 않았다. 소지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문득 뇌리에 어떤 무서운 사실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흑삼중년인과 백의노인에게로 향했다.
“혹시 당신들은 초가보의 공봉인 신편과 현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흑삼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이제 알았군. 노부가 바로 신편 갈태독이다.”
그 말에 소지산은 물론이고 방취아와 전흠의 얼굴까지 무겁게 굳어지고 말았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신편 갈태독은 초가보에서 세 명밖에 없는 공봉 중 한 사람일 뿐 아니라 편법(鞭法)으로는 강호제일(江湖第一)이라고 공인된 불가일세(不可一世)의 고수였다. 그가 강호를 종횡하고 있을 때 소지산 등은 태어나지도 않은 상태였다. 언뜻 보기에 중년으로 보여도 그의 나이는 이미 칠십이 넘었으며, 공력의 조예는 가히 하늘에 닿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옆에 있는 백의노인 또한 그 명성이 갈태독에 못지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현음상인 냉구유라 했으며, 현음공(玄陰功)으로는 당대에 당할 자가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두 사람의 절대고수가 나타나자 장내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어져 버렸다. 조금 전만 해도 패색이 완연했던 초가보의 인물들은 다시 생기를 찾았고, 반면에 승세를 굳혀 가던 종남파의 고수들은 모두 표정이 무거워졌다.
원래 갈태독과 냉구유는 다른 길로 종남파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태평곡을 지나서 조양봉 쪽으로 가기로 했는데, 도중 아무리 기다려도 태평곡에서 합류하기로 한 초일산 일행이 오지 않자 길을 거슬러 달려온 것이다.
이것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악종기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악종기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想定)하고 사안(事案)별로 그에 대한 지시를 각 무리의 우두머리들에게 주지시켰던 것이다.
소지산의 시선은 갈태독과 현음상인의 뒤에 서 있는 중년의 도객에게로 향했다.
‘그렇다면 저자가 바로 도패 좌린이겠군.’
좌린의 뒤에 있는 여섯 명의 장한들은 초가보의 대외무력조직(對外武力組織)인 철영대의 최정예들이었다. 원래 철영대의 수는 삼십 명이 넘었는데, 갈태독은 다급하게 달려오느라 그들 중 가장 뛰어난 여섯 명만을 대동시킨 것이다.
구소기와 노해광의 싸움은 자연스럽게 멈춰져 있었다. 그런데 전풍개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더욱 세차게 초일산을 몰아붙였다.
갈태독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전풍개의 생각을 알아차린 것이다. 전풍개는 갈태독과 냉구유가 나타난 이상 그들이 가세하기 전에 강적을 하나라도 먼저 쓰러뜨리려고 하는 것이다. 갈태독은 제자리에 선 채 오른손을 슬쩍 떨쳤다. 그러자 그의 팔에 칭칭 감겨져 있던 검은 색 채찍이 마치 살아 있는 한 마리 뱀처럼 꿈틀거리며 풀어지더니 전풍개를 향해 날아가는 것이었다.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어찌 채찍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제멋대로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채찍이 허공을 날아가는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오 장 밖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전풍개와 초일산 쪽에서 난데없는 폭음이 울려 퍼졌다.
꽝!
전풍개는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렸다. 채찍이 직접 오지 않고 그 기운만이 뻗쳐 왔는데도 전풍개가 완전히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 전풍개의 집요함은 세인들의 상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전풍개는 갈태독의 공격에 충격을 받았으면서도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빠르게 초일산을 향해 달려들며 수중의 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그의 검에서 지금까지보다 몇 배나 빠르고 날카로운 검광이 노도처럼 뿜어 나왔다.
초일산은 안심을 하고 있다가 안색이 대변해 사력을 다해 몸을 피하려 했다. 하나 검광이 더욱 빨랐다.
“크악!”
초일산은 수십 개의 검광에 몸이 꿰뚫린 채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졌다. 그는 몸 전체가 피투성이가 된 채 몇 차례 꿈틀거리다가 힘없이 몸을 늘어뜨리고 말았다. 실로 초일산답지 않은 허무한 죽음이었다.
갈태독은 전풍개가 자신의 공격에 비틀거리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더욱 힘을 쏟아 마침내 초일산을 쓰러뜨리자 한편으로는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크게 분노했다.
“이런 씹어 죽일 늙은이가…!”
그의 신형이 허깨비처럼 허공을 날아 전풍개에게로 향했다. 전흠이 이 광경을 보고 그의 앞을 막아서려 했으나 어느새 갈태독의 신형은 그의 머리를 넘어 전풍개에게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쏴아앙!
그가 손을 떨치는 광경을 보지도 못했는데 가공할 음향과 함께 시커먼 그림자가 전풍개의 상반신을 덮쳤다. 마치 검은 해일(海溢)이 몰아치는 듯한 광경이었다. 전풍개는 다급하게 옆으로 일 장이나 이동했다.
콰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흙먼지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전풍개가 서 있던 부근은 마치 거대한 뱀이 지나간 듯한 구덩이가 움푹 파여 있었다. 하나 상황은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갈태독은 전풍개를 죽여 초일산의 복수를 하리라고 결심했는지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다시 채찍을 휘둘렀다. 그가 사용하는 채찍은 대선룡(大旋龍)이라는 것으로, 교룡(蛟龍)의 힘줄을 철심수(鐵心樹)의 수액(樹液)에 백 일 동안 담가서 만든 것이었다. 질기기는 말할 것도 없고, 일단 사람의 몸에 격중되면 살과 뼈를 그대로 갈라버리기 때문에 천하의 어떤 병기보다도 더욱 무서운 것이었다.
갈태독의 대선룡을 사용하는 수법은 천지칠절편(天地七絶鞭)이라는 절학이었다. 대막(大漠) 일대에서는 이미 오랫동안 그를 천신(天神)처럼 떠받들고 있는 형편이었다. 갈태독이 천지칠절편을 펼치면 아무도 그의 손에서 오 초 이상을 받아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대막 사람들의 한결 같은 믿음이었다.
전풍개는 미처 신형을 안정시킬 사이도 없이 갈태독의 대선룡을 피하느라 정신없이 몸을 움직였다. 대적(對敵) 경험이 누구보다도 풍부한 그도 갈태독의 대선룡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그저 피할 수밖에 없었다. 대선룡이 움직이는 궤적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것이다.
전흠은 할아버지가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보고는 그를 도와주려 했으나 그때 그의 앞으로 여섯 명의 흑의무복 장한들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기도만 보아도 그들 개개인이 하북십호보다 오히려 강한 고수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흠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북십호를 물리치고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던 순간이 먼 과거의 일처럼 여겨졌다. 그들만도 벅찬 상대여서 간신히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은 물론이고 문파 제자 대부분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다. 그런데 이자들은 무슨 수로 상대한단 말인가? 전풍개를 도와주기는 고사하고 당장 현음상인 냉구유를 대적할 만한 사람도 없는 형편이었다.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니 냉구유와 좌린이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를 보아도 뚫고 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전흠의 얼굴에 처음으로 암담한 절망감이 떠올랐다.
한데 바로 그때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오던 냉구유가 갑자기 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던 방취아의 입에서 울음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낙 사형!”
멀리서 몇 개의 인영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의 제일 앞에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인영은 다름아닌 낙일방이었다. 그의 뒤에는 정해와 동중산 등의 모습도 보였다.
낙일방의 신법은 그야말로 놀라워서 단숨에 장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달려오면서 이미 장내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는지 도착하자마자 불문곡직하고 갈태독과 전풍개가 싸우는 곳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꽈르릉!
검은 장갑을 낀 그의 두 주먹이 움직이며 벽력과도 같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마치 두 개의 뇌전(雷電)이 주위의 공기를 갈가리 찢어놓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뇌전이 사라지며 그토록 살벌하게 공간을 장악했던 갈태독의 편영(鞭影)도 씻은 듯이 없어져 버렸다.
갈태독은 처음의 위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반면에 전풍개는 머리를 산발하고 웃자락이 너덜너덜해진 채로 연신 비틀거리고 있었다.
“할아버님!”
전흠이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부축하려 했으나, 전풍개는 세차게 그를 뿌리쳤다.
“그런 건 나중에 네 계집에게나 해라.”
전흠은 머쓱한 표정으로 손을 거두고 물러났다. 전풍개는 사나운 눈으로 갈태독을 노려보더니 문득 낙일방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놈은…”
낙일방은 장내에 도착했을 때부터 갈태독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갈태독 또한 그와 눈을 마주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은 멀리 떨어진 사람들도 알 수 있을 만큼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가는 누구도 온전치 못하리라는 것이 분명했다.
전풍개는 눈가를 실룩이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으나, 끝내 한마디도 하지 않고 휑하니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서 있는 전흠이 들어왔다.
“걱정하지 마라. 조금 지쳤을 뿐 다친 곳은 없다. 하긴… 조금만 지났으면 저 채찍에 몸뚱어리가 찢겨 나갔을지도 모르지.”
그의 마지막 말은 혼자서 입 안으롬나 중얼거린 것이었다. 전흠은 그가 무사한 것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동중산이 재빨리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조사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전풍개는 그를 힐끗 보더니 퉁명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맡은 일은 잘 해결했느냐?”
“예. 동굴 안에 있던 자들은 단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전풍개의 시선이 한쪽에 여전히 갈태독과 대치하고 서 있는 낙일방을 훑고 지나갔다.
“저 녀석이 애썼겠군.”
동중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낙 사숙께서 진염을 해치우셔서 다른 자들을 쉽게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동굴이 무너질 때 그 안에 있던 진염과 하북십호 중 세 사람은 동굴의 다른 통로에 미리 잠복해 있던 낙일방과 정해, 동중산, 그리고 방화와 서문연상이 각기 맡아서 해치웠다. 본신의 실력으로라면 아무리 하북십호라도 동중산이나 정해에게 쉽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나, 그들은 동굴 입구가 무너질 때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한데다 매복의 이점(利點)을 십분 살린 암습 덕에 제대로 실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을 유인했던 아이의 목소리는 물론 유소응의 것이었고, 그 뒤에 터진 여인의 비명 소리는 서문연상이 내지른 것이었다. 동중산은 이곳에 오면서 유소응을 동굴에 남겨 두었다. 지금 유소응은 그곳에서 동중산 등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전풍개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고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고비 하나를 넘었더니 더 큰 고비가 나타났군. 우리 측은 멀쩡한 놈이 하나도 없는데 싸워야 할 적은 아직도 많으니 이제 어찌했으면 좋겠느냐?”
동중산은 이미 장내에 있는 초가보 고수들의 신상을 파악했는지 추호도 머뭇거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조사께서는 전 사숙과 함께 냉구유를 상대해 주십시오.”
전풍개는 한쪽에 얼음상처럼 서 있는 냉구유를 힐끔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체면을 차릴 때가 아니니 그렇게 하지. 냉가(冷家)놈 옆에 있는 중년인도 보통 솜씨가 아닌데 그는 누가 맡을 거냐?”
“저자는 좌린이라고 하며, 소 사숙의 좋은 상대가 될 겁니다.”
“나머지 여섯 놈은?”
“그들은 두 분 사숙과 방 사저, 그리고 저희 사형제 세 사람이 맡도록 하겠습니다.”
전풍개는 별로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한쪽 다리가 부러져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응계성과 피곤에 지친 표정의 방취아, 백면서생 같은 정해, 앳된 모습의 방화와 서문연상을 차례로 쓸어보았다.
“인원수는 얼추 비슷하다만, 너희들 중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절반도 안 되어 보이는데 너희들만으로 저들 여섯 놈을 상대할 수 있단 말이냐? 여섯은커녕 서너 명도 벅찰 것 같은데…”
동중산의 외눈에는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저희들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도록 하겠습니다. 조사께서 냉구유를 쓰러뜨린 다음 저희들을 도와주시면 됩니다.”
전풍개는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과 전흠이 합공한다고 해도 냉구유를 이긴다는 보장은 없었다. 더구나 자신은 지쳐 있고 전흠은 왼쪽 어깨에 부상을 입은 상태가 아닌가? 그를 쓰러뜨리기는커녕 그의 손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인 상태였다. 게다가 흑의장한들은 철영대의 최고 정예들로, 개개인의 무공이 방취아나 동중산보다 월등히 뛰어난 고수들이었다. 비록 정해가 멀쩡하다고 해도 부상당한 응계성과 이미 기력이 모두 다해 버린 방취아, 무공이 떨어지는 동중산, 아직 나이 어린 방화와 서문연상만으로 그들 여섯 명을 막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 동중산이 말한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지금의 종남파 전력(戰力)으로 여기까지 온 것도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적어도 초가보에서 파견한 삼로(三路) 중 일로(一路)의 인물들은 섬멸한 셈이니 말이다.
전풍개는 한동안 물끄러미 동중산을 쳐다보았다. 한때는 그가 말만 앞세우고 장문인의 신임(信任)을 빌어 쓸데없는 위세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나 이제는 전풍개도 그가 얼마나 충직하며, 종남파를 위해서 헌신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전풍개는 비장한 표정이 깃들어 있는 동중산의 외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너는 본파의 훌륭한 제자다.”
동중산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제자는 당연히 할 도리를 하는 것뿐입니다.”
전풍개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시선을 돌리자 방화와 서문연상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방화는 특이하게 이마를 거의 가린 두건(頭巾)을 쓰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두건 아래로 보이는 콧날이 유달리 우뚝 서 있었다. 서문연상 또한 평상시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아닌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따라 그들은 유난히 준수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저렇게 젊은 아이들인데… 과연 저 아이들이 살아서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
전풍개는 착잡한 생각에서 벗어나려는 듯 가볍게 도리질을 했다. 그때는 이미 냉구유와 좌린 등이 그들에게 바짝 다가서고 있었다. 전풍개는 신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소지산과 방취앙, 응계성, 정해, 동중산, 방화, 서문연상, 그리고 자신의 손자인 전흠을 한 사람씩 차례로 쳐다보았다. 그런 다음 결의에 찬 음성으로 소리쳤다.
“너희들은 정말 잘해 냈다. 너희 같은 제자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본파의 재건은 이루어진 셈이다. 이제 저놈들에게 본파의 무서움을 가르쳐 주도록 하자!”
모두들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조님.”
전풍개와 전흠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냉구유를 향해 몸을 날렸고, 소지산은 좌란에게로 덮쳐 갔다. 냉구유와 좌린은 이미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는지 그들이 어떻게 대항하든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제일 처음 격돌한 것은 가장 빠른 속도로 접근했던 소지산과 좌린이었다. 소지산은 좌린에 대해 익히 들어왔기 때문에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낙하구구검을 시전했다.
좌린은 초가사패 중에서도 제일인자였으며, 누구나가 인정하는 절세의 도객(刀客)이었다. 특히 그의 전궁팔도(電穹八刀)는 빠르고 강맹한 가운데 벼락 치는 듯한 위력이 있어 어지간한 고수라면 감히 일도(一刀)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파앗!
소지산이 펴낸 검영이 좌린의 몸을 채 덮어 가기도 전에 좌린의 어깨가 흔들리며 한 가닥 뇌전(雷電) 같은 도기(刀氣)가 허공을 갈랐다. 소지산은 유연한 동작으로 그 도기를 피하며 계속적으로 검영을 펼쳐냈다.
그것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치열한 격전이 전개되었다.
전풍개와 전흠은 냉구유를 앞뒤로 에워싼 채 성라검법을 펼쳐 그의 가공할 현음강기에 맞서 갔다. 두 사람은 이미 오랫동안 함께 지내왔기 때문에 비록 손발을 맞춘 적은 없었으나 초식의 배합과 호흡이 거의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동중산도 이 점을 고려해서 그들을 함께 싸우도록 한 것이다.
그들의 공세가 생각보다 날카로워서인지 냉구유는 반격을 하지않고 허깨비처럼 허공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들의 공격을 피하기만 했다. 그 신법이 어찌나 표홀하던지 그야말로 백색의 유령(幽靈)을 보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하면 철영대의 고수들과 응계성 등의 싸움은 너무나 현격하게 차이가 났다. 정해는 한 명의 철영대원을 맞아 선전하고 있었고, 방취아는 뛰어난 신법을 이용해서 그런대로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응계성과 동중산 등 네 사람은 거의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것도 철영대의 고수들이 모두 나서지 않고 단지 네 사람만이 참가한 판국이었다.
다른 두 사람은 장내의 싸움을 일별하고는 이내 한쪽에 대치해 있는 낙일방과 갈태독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낙일방과 갈태독의 팽팽한 대치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누구도 상대에 대해서 묻지 않았고,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처음 본 순간부터 그들은 서로를 노려본 채 미동도 않고 있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천하에 시시한 자들이라고 비아냥거릴지 몰랐다. 하나 장내의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비록 눈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그들 사이에 얼마나 격렬한 기류가 오가고 있는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서로 대치해 있는 순간부터 이미 그들의 싸움은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날은 제법 추운데도 두 사람의 얼굴에는 언제부터인지 조금씩 땀이 흐르고 있었다. 아직 몸을 움직이지는 않았으나 이런 식의 대치는 어떠한 격렬한 싸움보다도 더욱 심력(心力)을 허비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기(氣)와 기(氣)의 격돌이기 때문에 자칫 빈틈을 보이거나 기세에 눌리면 회복되기 힘든 치명상을 입을 가능성이 있었다. 생전 가도 움직일 것 같지 않던 두 사람의 자세에 변화가 생긴 것은 약 일각(一刻)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낙일방이 비록 해조림의 공력을 전수받아 단기간에 내공이 급상승했다고 해도 본신의 정력(定力)은 아직 절정에 도달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는 갈태독 수준의 고수와 이런 식으로 대치해 본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에 그만큼 심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이제 겨우 약관에 이른 나이가 아니가?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의 특징은 체력이 강한 대신에 참을성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낙일방은 해조림에게 육 개월에 걸친 혹독한 훈련을 받았으나 평생을 강호의 거친 칼바람 속에서 무수한 격전을 치르며 살아온 갈태독에 비할 수는 없었다.
지금 낙일방은 눈알이 타들어가는 듯 하고 전신의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대로 섣불리 몸을 움직이다가는 큰일이 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기 때문에 계속 대치하고 있었으나, 그의 인내심은 점점 한계에 가까워 오고 있었다.
차라리 피가 튀고 살이 갈라지는 싸움을 하는 것이 낫지 이런 식의 겨룸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자세는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그의 이마에 흥건히 고인 땀방울 하나가 그의 눈꺼풀 위로 흘러내렸다. 눈을 깜박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의 몸은 이미 그의 의지(意志)를 배반하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눈꺼풀이 한차례 깜박거린 것이다.
한차례였다. 단 한차례. 그것도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짧은 순간.
하나 낙일방이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때는 이미 그의 코앞으로 거대한 검은 뇌전이 폭사해 오고 있었다. 대선룡이 날아드는 속도가 어찌나 빠르고 강력했던지 낙일방의 눈에는 영락없는 검은 번개로만 보였다. 눈앞으로 다가오는 대선룡의 채찍 끝이 독사의 이빨처럼 날카로웠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낙일방은 사력을 다해 목을 옆으로 비틀었다.
파앗!
목덜미에서 아래턱에 이르는 부위의 살덩이가 통째로 뜯겨 나가며 엄청난 통증이 그의 뇌리를 강타했다. 하나 낙일방은 그 통증을 참아내며 왼손을 들어 목을 스치고 지나가는 대선룡을 힘껏 움켜잡았다.
콰악!
묵령갑을 끼고 있는데도 그의 손바닥은 금세 살이 갈라져 핏물이 흘러나왔다. 묵령갑 밖으로 드러난 손가락 끝부분들은 아예 짓뭉개져 있었다. 그래도 낙일방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의 손아귀에 들린 대선룡이 마치 살아 있는 한 마리 뱀처럼 엄청나게 요동을 쳤다. 낙일방의 몸 전체가 그 요동에 함께 뒤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의 목구멍을 넘어 시커먼 핏물이 입술 밖으로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하나 마침내 낙일방은 대선룡을 왼손에 움켜쥘 수 있었다. 그 순간 낙일방은 왼손을 세차게 앞으로 잡아당기며 대선룡의 위로 몸을 날렸다. 그는 왼손으로는 여전히 대선룡의 끝을 잡은 채 대선룡을 발로 밟으며 갈태독을 향해 돌진해 갔다. 대선룡의 반대편 끝을 잡고 있는 갈태독의 얼굴이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찰나간의 일이었다. 갈태독의 얼굴은 처음과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하나 낙일방은 그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갈태독은 순간적으로 망설이고 있었다. 이대로 대선룡을 놓고 물러나야 하는지, 아니면 계속 대선룡을 잡고 있어야 하는지 갈등이 되었던 것이다. 설마 상대가 이토록 무식한 수법을 써 오리라고 미처 예상치 못했던 그의 실수였다. 그가 망설인 것은 정말 표현하기도 힘든 짧은 순간이었으나 그때 낙일방은 이미 그의 코앞으로 육박해 오며 오른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쾌액!
낙뢰신권의 가공할 권풍이 무서운 속도로 갈태독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갈태독이 그 주먹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 자신이 수십 년간 겪어 온 치열한 격전에서 쌓아온 경험 때문이었다. 대선룡을 잡고 있어야 할지 놓아야 할지 망설이면서 거의 본능적으로 얼굴을 옆으로 비켰던 것이다. 덕분에 얼굴 피부가 벗겨지기는 했으나 그는 낙일방의 살인적인 주먹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분명 낙일방의 주먹을 피했건만 그 순간 전혀 다른 무언가가 그의 얼굴을 정통으로 강타했다. 그것이 묵령갑에서 뿜어 나오는 묵룡기라는 것을 갈태독은 전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갈태독의 입이 딱 벌어졌다. 비명 소리는 내지르지 않았다. 다만 갈태독은 얼굴 반쪽이 완전히 짓뭉개진 상태에서도 필사적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쿵!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대선룡을 타고 움직였던 낙일방이 둔한 동작으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때까지도 갈태독은 처음의 자세 그대로 우뚝 서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그의 얼굴은 절반이 예리한 칼날에 잘려 나간 것처럼 없어져 있을 뿐이었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갈태독의 반밖에 남지 않은 입술이 몇 차례 꿈틀거렸다. 하나 결국 그는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낙일방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누워 있었다. 이미 그의 몸은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고, 잘려 나간 목덜미와 아래턱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통증이 밀려오고 있었다. 하나 낙일방은 푸른 하늘을 올려보며 웃었다.
‘나는 승리했다.’
그 치가 떨리도록 살벌하고 무서운 격전에서 그는 살아남았다. 비록 승부의 순간은 촌각(寸刻)에 불과했지만, 그러기까지의 과정은 너무도 가혹한 것이었다. 이토록 가슴 떨리고 두려운 싸움은 난생처음이었다.
‘이런 것이 고수의 싸움이구나.’
낙일방은 가슴 한구석이 뿌듯해졌다. 자신의 무공에 대한 자신감이 샘물처럼 솟아올랐다. 그때였다.
콰앙!
“아악!”
굉량한 폭음과 함께 커다란 비명 소리가 터졌다.
“할아버지!”
동시에 귀에 익은 누군가의 처절한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낙일방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사력을 다해 고개를 들었다. 멀지 않은 곳에 전풍개가 폭포수처럼 피를 뿌리며 허공을 훨훨 날아가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전풍개와 전흠이 합공을 했는데도 냉구유의 현음신장을 막지 못했던 것이다.
전풍개는 거의 사 장이나 날아가서 바닥에 쓰러진 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전흠은 피눈물을 뿌리며 미친 듯이 냉구유에게 달려들었으나, 그가 쓰러지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낙일방은 이를 악물고 버둥거리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잘려 나간 목덜미에서 피가 뿜어 나왔고, 아래턱이 부서질 듯 아팠으나 이대로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사조님…’
낙일방은 자신에게 잊을 수 없는 사람인 해조림의 얼굴을 떠올렸다. 전풍개는 해조림의 하나뿐인 사제가 아닌가?
‘제게 힘을 주십시오.’
낙일방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전신이 학질 걸린 사람처럼 마구 떨려 왔고, 한 걸음만 걸어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통증이 밀려왔다. 그래도 낙일방은 멈추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전진했다. 그가 걸어온 자국은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로 불게 물들어 있었다. 마침내 낙일방은 전풍개가 쓰러진 곳까지 올 수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전풍개의 심장에 손을 뻗었다. 다행히 미약하나마 숨이 뛰고 있었다. 하나 이대로 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미약한 숨마저 끊어질 게 분명했다. 낙일방은 흐릿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지산은 좌린과 막상막하의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어 이대로 가다가는 패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그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는 노해광이 구소기와 질기도록 오랜 싸움을 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토록 밉고 보기 싫었던 노해광이었지만 지금은 왠지 듬직해 보였다. 그는 비록 지치기는 했으나 생각보다 잘 견디고 있었다. 오히려 나이 많은 구소기가 더욱 힘들어 하는 모습이었다. 정해는 철영대의 고수 하나와 거의 생사(生死)를 다투는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는데, 둘 중 누가 죽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격렬했다. 방취아가 머리를 산발하고 여기저기 옷자락이 찢어진 채 미친 여자처럼 마구 몸을 움직이는 모습도 시야에 들어왔다. 그 옆에는 응계성과 동중산도 보였다. 그들은 싸운다기보다는 버티고 있다고 표현해야 옳을 정도로 철영대원 한 사람을 상대로 근근이 대항하고 있었다. 응계성은 왼쪽 다리는 그냥 덜렁덜렁거린 채 오른다리로만 몸을 지탱해서 영락없는 외다리였고, 동중산은 커다란 상처는 없었으나 여기저기에 자잘한 상처가 잔뜩 있는 것만 보아도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판국이었다. 나이 어린 사질들인 방화와 서문연상도 생각보다 잘 싸우고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은 철영대원 한 사람을 상대로 합공을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손발이 잘 맞아서 철영대원이 몹시 허둥거리고 있었다. 다른 두 명의 철영대원은 두 눈에 살광을 가득 흘린 채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다. 낙일방의 시선은 제일 마지막으로 전흠에게로 향했다. 전흠은 이미 자신의 한계를 지나치고 있었다. 그의 내공은 바닥난 지 오래였고, 체력 또한 고갈되어 움직임이 거북이처럼 느려졌다. 그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할아버지인 전풍개를 쓰러뜨린 데 대한 맹렬한 복수심뿐이었다.
낙일방은 숨을 고르고 진기를 운용(運用)시켰다. 진기가 움직일 때마다 거대한 작살에 몸이 뚫리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으나 그는 운기를 멈추지 않았다.
천단신공은 육합귀진신공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신공 중 하나였다. 그 안에는 천하에서 가장 끈질긴 생명력을 가져다주는 구결도 있을 뿐 아니라 어떠한 상태에서도 마지막 한 번의 진력(眞力)을 더 사용케 해주는 구결도 있었다. 그 구결의 이름은 일선결(一線訣)이라 했다.
일선결을 끌어올리면 내공이 바닥난 상태에서도 무공을 펼칠 수 있다. 하나 그 기회는 단 한 번뿐이며, 대신 그 다음에는 후유증으로 상당한 기간 동안 내공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낙일방은 주저하지 않고 일선결의 구결을 암송했다. 그러자 머지않아 텅 빈 단전(丹田)에 막대한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곧 단전에 가득 차더니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는 이미 두 명의 철영대원이 그의 지척까지 접근해 있는 상태였다. 두 명의 철영대원들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낙일방을 살기 어린 눈으로 쏘아보며 수중의 장검을 높이 쳐들었다. 막 그들이 장검을 내리치려는 순간,
번쩍!
낙일방의 눈이 떠지며 눈부신 신광이 폭사해 나왔다. 그와 함께 두 가닥 뇌전이 철영대원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콰쾅!
“크아악!”
처절한 두 개의 비명이 합창처럼 동시에 터져 나왔다. 비명이 사라진 자리에는 단지 두 철영대원의 시체만이 나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가슴은 처참하게 박살이 난 채 검게 그을려 있었다.
전흠은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할아버지의 복수도 못해 보고 이렇게 끝나야 하다니…’
허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뜻하지 않게 할아버지의 지시를 따라 해남을 벗어날 때만 해도 그에게는 나름대로 청운(靑雲)의 뜻이 있었다. 늘 큰형의 질시 어린 괴롭힘을 감수해야만 했던 전흠은 종남파로 향하는 그 여정(旅程)이 자신의 인생에 새로운 돌파구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늘 큰형에게 괴롭힘을 받으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어차피 해남에 계속 머물러 있어 봤자 해남검파의 정식 제자도 아닌 그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해남검파의 중요한 자리에 오를 가능성도 없었고, 집에서는 주위의 괴롭힘에 늘 시달려야만 했다. 차라리 넓은 강호에 나가 무너져 가는 문파를 일으켜 세우고 마음껏 자신의 뜻을 펼쳐 보이는 것이 훨씬 나은 인생이었다. 종남파에 도착할 때까지는 적어도 전흠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나 종남파는 몰락해도 너무 몰락한 상태였다. 아무리 나무가 좋아도 어느 정도의 불씨가 있어야만 타오를 수 있는데, 종남파의 불씨는 미약한 바람만 불어도 꺼질 정도로 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때의 실망감이란 말로 형용키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꺼져 가는 불씨인 줄 알았던 종남파는 의외로 거대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가공할 솜씨를 지닌 장문인에, 자신에 견주어도 조금도 뒤처지지 않는 제자들까지… 게다가 그들은 문파를 제건시키려는 뜨거운 충정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보았다면 너무 거창한 꿈이었을까?
하지만 분명히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고, 도전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자신의 힘은 이토록 미약했던가? 할아버지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광경을 뻔히 두 눈을 뜨고 지켜보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약했던가?
물론 그것은 아니었다. 다만 상대가 너무 강한 것뿐이었다.
현음상인 냉구유의 현음강기는 너무도 무서웠다. 그의 손바닥이 움직일 때마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가공할 현음강기가 폭풍처럼 밀어닥쳤다. 아무리 매서운 검기를 날리고 절묘한 초식을 펼쳐도 그 절대적인 강기의 소용돌이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할아버지의 몸은 자신이 알고 있는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움직였고, 자신 또한 어깨의 부상을 도외시한 채 전력을 기울였다. 하나 냉구유 앞에서는 어린아이의 장난에 불과할 뿐이었다.
지금 전흠은 자신의 최후가 가까워 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더 이상 냉구유의 현음강기를 피할 여력이 없었다. 스치기만 해도 뼛골이 으스러질 정도로 차갑고 냉랭한 현음강기가 지금 거센 파도를 이루며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건만, 자신은 한 발자국도 움직일 힘이 없었다. 할아버지에 이어 자신도 저 가공할 현음신장에 피를 뿌리며 쓰러지게 되리라…
전흠이 이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으려 할 때였다. 누군가가 냉구유와 자신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자신의 앞을 막아선 자의 뒷모습이 눈에 익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두 주먹이 움직이며 검은 뇌전이 폭죽처럼 피어올랐다.
‘이자는…’
전흠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냉구유의 현음신장이 검은 뇌전에 산산이 갈라지는 광경을 목격해야만 했다. 그것은 마치 하얀 빙벽(氷壁)을 무너뜨리는 흑룡(黑龍)의 몸짓 같았다.
콰콰쾅!
고막이 터져 나갈 듯한 엄청난 굉음과 함께 세찬 경기가 사방에 휘몰아쳤다.
“크윽!”
전흠은 그 경기의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주르르 밀려나더니 마침내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하나 이내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눈을 부릅뜨고 전면을 주시했다.
“아!”
그의 입에서 탄성 같은 외침이 흘러나왔다. 절제절명의 순간에 그의 앞을 막아섰던 낙일방은 삼 장 밖에 보기 흉한 자세로 쓰러져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로 변한 그의 얼굴은 시체의 그것처럼 창백했고, 오공(五孔)에서 계속 시커먼 핏물이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미 의식이 끊겼는지 그의 몸은 미동도 않고 있었다.
냉구유 또한 무사하지 못했다. 그는 처음의 위치에서 다섯 장쯤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연신 몸에 경련을 일으킨 채 금시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우웩!”
마침내 냉구유는 시커먼 선혈을 한 대야나 토해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연신 피를 게워내면서도 흐릿한 시선으로 낙일방을 주시했다.
“내 현음강기를 이토록 무참히 깨뜨리다니… 강호에 권신(拳神)이 나타났구나.”
냉구유의 힘없는 독백 소리가 전흠의 귓전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전흠은 손가락 하나 까닥거릴 힘이 없으면서도 그 말을 듣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뿌듯해졌다. 냉구유 같은 절세의 고수가 감탄하는 인물이 바로 자신과 같은 문파에 몸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 더할나위 없이 감격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그는 간신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무엇을 보았는지 안색이 크게 변했다.
동중산과 함께 그럭저럭 견디고 있던 응계성이 철영대의 장한에게 다시 일검을 맞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린 것이다.
“사형!”
이 광경을 보았는지 방취아가 비통한 외침을 내질렀다. 하나 그것은 이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그 외침에 크게 놀란 소지산이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가 좌린의 도에 옆구리를 가격당한 것이다.
“큭!”
비록 몸이 갈라지는 참변은 면했으나, 옆구리가 쩌억 베어져 시뻘건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지산은 통증으로 허리를 제대로 움직일 수 없어서 계속적으로 위급한 상황에 몰리고 말았다.
상태가 나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나마 응계성과 힘을 합쳐 버티고 있던 동중산은 응계성이 쓰러지자마자 단번에 피를 뿌리며 쓰러릴 것만 같아 차마 계속 쳐다볼 수가 없었다.
동중산이 허둥거리는 순간, 철영대 장한의 칼이 그의 목덜미를 예리하게 파고 들어왔다. 누가 보기에도 동중산의 목이 그 칼날에 떨어질 게 분명했다.
“동 사질!”
방취아가 다시 울음 섞인 비명을 토해냈으나 동중산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휘청거리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뒤로 물러나던 동중산이 갑자기 오른발을 축(軸)으로 한 채 재빠르게 한 바퀴를 돌았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다소 어정쩡한 동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신속하고 매끄러운 모습이었다. 그와 함께 눈부신 검광 하나가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크아악!”
동중산의 목을 칼로 내리치던 철영대 장한이 가슴이 반으로 갈라진 채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멀리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전흠은 어안이벙벙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동중산의 죽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 당혹스런 모습이었다.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동중산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이번에는 좌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소지산이 곧 쓰러질 정도로 위급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전흠은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는 와중에도 저건 동중산답지 않은 무모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동중산이 운 좋게 철영대원 하나를 쓰러뜨릴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실력으로 좌린에게 덤벼든다는 것은 화약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니나 다를까? 좌린은 동중산의 공격을 너무나 수월하게 피하면서 오히려 그마저 세차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두 사람의 합공을 받는 처지였지만, 소지산은 이미 부상을 당해 몸을 제대로 운신(運身)할 수 없었고, 동중산은 무공이 보잘 것 없어서 전혀 합공의 효과를 누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오히려 좌린의 공세가 더욱 노골적으로 몰아쳐서 두 사람은 금시라도 좌린의 칼날에 목이 달아날 것만 같았다.
전흠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간신히 한쪽 따리를 세우는 데 그쳤다. 이대로 두 사람의 죽음을 두고 볼 수만은 없어서 그는 수중의 장검으로 몸을 지탱하며 간신히 바닥에서 일어났다.
‘가야 한다… 더 늦기 전에 내가 가야 한다…’
전흠은 다리를 덜덜 떨면서 간신히 한 걸음을 내디뎠다. 하나 그때 그의 두 눈에 절망감이 떠올랐다. 소지산의 장검을 멀리 쳐낸 좌린이 거의 무방비 상태로 서 있는 동중산의 목덜미를 칼로 찔러 가고 있었던 것이다. 좌린의 칼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무서운 기세로 동중산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아… 안 돼…!’
전흠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터져 나오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칼날이 목을 관통할 때까지 꼼짝도 안 할 것 같던 동중산이 오른발로 땅을 지탱한 채 재빠르게 선회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조금 전에 철영대원을 쓰러뜨릴 때와 똑 같은 모습이었다. 단지 그때보다 선회가 더욱 빠르고 검광이 더욱 날카롭게 번뜩였을 뿐이다.
좌린의 칼날은 동중산의 목 윗부분을 아슬아슬하게 비켜 갔다. 그 바람에 동중산은 목이 잘려지는 것은 면했으나 왼쪽 귀가 통째로 달아났다. 하나 동중산은 신음조차 내지르지 않고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좌린이 우뚝 서 있었다.
좌린의 얼굴에는 한 줄기 괴이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너무도 어처구니없고 믿을 수 없는 일을 본 사람의 모습이었다. 좌린은 그런 눈으로 한참이나 동중산을 응시하고 있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무공은 무엇이오?”
동중산은 힘겹게 대답했다.
“색혼검결이라는 것이오.”
“이것도 종남의 무공이오?”
“그렇소.”
좌린은 문득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종남파에서 장문인이 아니면 나를 이길 자가 없다고 생각했거늘… 나는 그야말로 세상이 넓다는 걸 알지 못한 한 마리 개구리가 아니었던가?”
그 미소가 얼굴에 채 번지기도 전에 그의 가슴이 쩌억 갈라지며 피분수가 솟구쳐 나왔다. 좌린은 신음조차 내지 않은 채 피를 뿌리며 그 자리에 우뚝 선 채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검상 때문에 늘 사나워 보이던 그의 얼굴이 왠지 한없이 평온하게 느껴졌다.
좌린마저 동중산의 손에 쓰러지자 장내의 중인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동중산의 무공은 사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약한 편에 속해 있었는데, 순식간에 고수 두 사람을 검하고혼(劍下孤魂)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더구나 도패 좌린은 강호에서도 손꼽히는 절정고수가 아닌가? 그들의 눈에 동중산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인으로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심지어는 소지산마저 눈을 크게 뜬 채 멀거니 동중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동중산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장문인이 전수해 주신 겁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보다 더 늦기 전에 일을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소지산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다음 방취아가 싸우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장내의 격전이 마무리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노해광과 싸우고 있던 구소기는 형세가 완전히 판가름 났다는 것을 알고 팔 하나를 남긴 채 사력을 다해 도망을 갔다. 하나 남아 있던 철영대원 세 사람에게는 그런 행운이 찾아오지 않았다.
방취아와 싸우던 철영대원은 소지산의 검에 목이 달아났고, 서문연상과 방화의 합공을 받던 자는 동중산이 다가오자 자레 겁을 먹고 허둥대다 뜻밖에도 서문연상의 검에 쓰러지고 말았다. 정해의 상대였던 철영대원의 최후는 더욱 처참해서, 소지산과 동중산이 동시에 덤벼들어 세 토막을 내고 말았다.
실로 너무도 처참하고 기나긴 싸움이 끝이 났다.
살아남은 종남파의 사람들은 서로를 바로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전풍개는 가슴뼈가 함몰되어 기식이 엄엄했고, 낙일방은 왼손이 심하게 다치고 심각한 내상을 입은 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전흠은 현음강기의 영향으로 공력을 제대로 운기하지 못했고, 응계성은 왼쪽 다리가 거의 떨어져 나간데다 다시 옆구리에 검을 관통당해 오랜 치료가 필요했다. 아마 살아난다 해도 평생을 절름발이로 보내야 할 것이다. 소지산과 방취아, 정해도 전신에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했고, 노해광은 탈진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지쳐 버렸다. 서문연상과 방화는 그나마 상처가 적었으나, 자신들이 큰 역할을 하지 못한 것에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들 중 가장 멀쩡한 사람은 가장 무공이 약한 동중산이었다. 동중산은 귀 한쪽을 잃어버렸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부상도 없고 크게 지치지도 않아서 결국 모든 사람들의 뒤처리를 도맡아야만 했다.
사태가 대충 수습되자 그제서야 중인들은 자신들이 살아났음을 새삼 깨달았다. 두 번 다시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처절한 싸움이었지만 어쨌든 그들은 살아남았다. 그것은 종남파가 강호에 존재하기 위한 첫 번째 시련을 견뎌냈다는 뜻이며, 아울러 초가보와의 싸움에서 처음으로 칼자루를 잡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참 후에야 방취아는 조그만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장문사형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진산월은 아마도 자신들보다 더욱 혹독한 싸움을 했을 것이다. 자신들은 열 명이 넘는 인원이었지만, 진산월은 오직 혼자였다. 그리고 그가 상대할 적은 절대로 자신들이 상대한 자들보다 약하지 않았다.
모두들 서로를 쳐다보았지만 쉽게 말문을 열지 못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동중산이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가 견뎌냈으니 장문인도 견뎌내셨을 겁니다. 장문인께서 기다리실 것이니 약속장소로 이동하지요.”
그들의 최종 목표는 오직 한곳, 초가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