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4권 종남재림(終南再臨)편 :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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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4권 종남재림(終南再臨)편 : 11화


제143장. 검기무정(劍氣無情)

곽태보의 나이는 마흔여덟. 곤륜산(崑崙山) 산자락에 있는 모사산(慕士山) 인근에서 태어났으며, 대대로 신강서 일대를 떠나 본 적이 없었다. 하나 그의 명성은 신강뿐 아니라 서장(西藏) 전체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만큼 그의 무공이 탁월했고 수단이 잔인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그는 몇 명의 일행과 함께 자신의 거처를 떠나 초가보로 들어오게 되었다.

신강 땅에만 머물러 있던 그가 어떻게 초가보의 초청을 받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왜 신강을 떠나 머나먼 서안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누구도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지만, 그는 초가보에 온 이래 최고의 귀빈 대우를 받았다.

이번에 악종기의 지시로 종남파를 공격하러 가는 그의 마음은 가벼운 소일거리를 해결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자부심 강한 그는 종남파의 고수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며, 동행한 일행들에 대한 믿음이 그러한 생각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들과 함께라면 종남파가 아니라 화산파를 공격하라고 해도 기꺼이 했을 것이다.

이것이 곽태보의 생각이었다.

때문에 곽태보는 시시한 종남파를 치러 가는 데 이런저런 계획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악종기의 모습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악종기가 느닷없이 나타나 충성을 맹세한 지일환이라는 전직(前職) 도둑놈의 말을 믿고 소량산에 함정을 파라고 했을 때 곽태보는 내심 못마땅해 했으나 두말하지 않고 그의 지시를 따랐다.

하나 그들은 소량산에서 종남파의 습격은커녕 개미 한 마리 발견할 수 없었다. 초일산 일행과 헤어져 종남파로 향하는 곽태보의 마음은 은근한 불만이 쌓여 조급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태평곡에 일단 사람을 보내어 종남파의 이차 매복이 있는지 확인하고 종남파로 가라는 악종기의 지시를 거부하고 곧장 종남파로 향했다.

자신의 이런 순간적인 판단이 대세(大勢)에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는지 까맣게 모른 채 곽태보는 일행들과 함께 종남파에서 반시진 가량 떨어진 어느 이름 모를 협곡에 도착했다. 그 협곡을 가로질러 가면 종남파의 산문에 도착하는 시간을 상당히 절약할 수 있었다. 물론 산문에 도착한 다음에는 다른 이로(二路)의 고수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곽태보는 종남파의 상황을 보아 자신들만으로 먼저 치고 들어갈 생각까지 했다.

자신들의 수는 모두 열두 명. 한 문파를 상대하기에는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니지만 개개인의 면면을 따져보면 그렇지만도 않았다. 다른 일곱 명은 자신의 아우뻘 되거나 다른 사람의 수하들이어서 한 수 뒤처진다고 해도 나머지 네 사람은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자신보다 대단한 명성을 누리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이런 자들과 함께 행동하는데 거리낄 것이 있을 리 없었다. 더구나 종남산 일대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곽태보 일행이 막 협곡을 절반쯤 지났을 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바위가 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한 사람이 그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무척 특이한 용모의 사나이여서 곽태보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그자에게 집중되었다.

앙상하게 마른 몸에 유난히 큰 키를 지닌 인물이었다. 고적한 눈빛에 허리춤에는 고색창연한 장검 한 자루를 매고 있었는데, 곽태보는 무엇보다도 그자의 눈이 마음에 걸렸다. 저런 눈의 소유자는 절대로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이런 꼭두새벽에 자신들의 앞에 나타났다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곽태보가 계속 자신을 주시하고 있자 괴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곽태보의 몸에 한 줄기 전율이 일어났다.

‘이자는 고수다!’

이런 느낌은 곽태보의 일생에 단 한 번 받아 보았을 뿐이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수련을 쌓은 절대자(絶對者)의 시선! 곽태보는 중원무림에 온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기 전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 때문에 왔소?”

괴인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나 때문에 온 것이지.”

눈빛과 어울리는 조용하면서도 나직한 음성이었다. 아마도 이자의 눈빛을 받고 음성을 들으면서 매혹당한 여인들도 있을 것이다. 곽태보는 잠시 그의 말을 음미하다가 이내 눈을 번쩍 빛냈다.

“그렇다면 당신은 혹시 종남파의 장문인인 신검무적…”

“내가 바로 진산월이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단순히 상대의 이름을 들었을 뿐인데 열두 명의 고수들은 하나같이 가슴이 울렁거렸다.

신검무적!

이 이름은 현재 강호에서 전설(傳說)을 쌓아가고 있는 이름이다. 짧은 기간 동안 이 이름만큼 빨리 강호에 퍼져 나가고 강호인(江湖人)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것도 없었다. 그것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명문정파의 몰락에 대한 동정(同情)이라고 해도 좋았고, 바닥에서 일어나 정상을 향해 돌진해 가는 자에 대한 소리 없는 성원이라고 해도 좋았다. 아무튼 현재 그는 서안뿐 아니라 강호 전역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 전설의 사나이를 곽태보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를 직접 보고서야 곽태보는 그에 대한 강호의 소문이 그를 온전하게 표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자는 단순히 검법이 뛰어나기만 한 검객(劍客)이 아니었다! 무너져 가는 문파를 일으켜 세울 욕심에 상대가 되지도 않는 거대세력을 향해 돌을 던지는 무모한 자가 아니었다!

그런 표현은 이자를 전혀 묘사하지 못한 것이다.

이자는 더할 나위 없이 침착하고, 냉정하며, 절대적으로 강한 자였다!

이런 자가 남의 동정을 받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동정은 이런 자와 싸워야만 하는 초가보에서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이자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곽태보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한 줄기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그런 마음을 감추기 위해 짐짓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헛! 다행이군. 굳이 종남파까지 가지 않아도 되니 말이오.”

“본파까지는 가까운 거리요. 하지만 당신들이 돌아가려면 먼 길이지.”

“흐흐… 장문인이 직접 나온 것을 보니 종남파의 고수들을 모두 끌고 온 모양이군.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모두 나오라고 하시오.”

진산월은 곽태보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 혼자 왔소.”

곽태보는 그의 말을 믿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어차피 잠시 후면 알게 될 텐데…”

“그렇소.”

진산월의 담담한 말에 그제서야 곽태보의 눈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정말 당신 혼자 왔소?”

“어차피 얼마 후면 알게 될 일이오.”

똑같은 말이라도 그 의미는 조금 전과 전혀 달랐다. 곽태보는 진산월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이내 희미하게 웃었다.

“정말 광오하다고 해야 할지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당신 혼자 우리들을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소?”

“그것도 잠시 후면 알게 될 거요.”

“흐흐… 우리가 누구인지 아시오?”

진산월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모르오.”

곽태보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나는 곽태보라 하오. 혹시 내 이름을 들은 적이 있소?”

진산월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 신강 일대의 패자(覇者)가 그런 이름을 가졌다고 알고 있소.”

곽태보는 다시 웃었다.

“내가 바로 신강의 곽태보요.”

그는 이번에는 자신의 우측에 있는 커다란 체구의 사나이를 가리켰다.

“저 사람은 철패우(鐵佩宇)라고 하오. 그 이름도 들어 보았소?”

진산월은 이번에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청해(靑海) 부근에 도끼를 잘 쓰는 고수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소.”

“저 사람이 바로 그 지옥부(地獄斧) 철패우요. 내 왼쪽에 있는 사람의 이름은 염벽수이고, 그 옆에 있는 사람은 혁련기(赫連騎)라 하오.”

“그들 이름도 들은 것 같군. 아마 그들의 별호가 변화일독과 자전신창(紫電神槍)이 아니오?”

“그렇소. 그리고 저 뒤의 젊은 친구는 탁극이라 하오.”

진산월의 시선이 곽태보 일행 중 제일 끝 쪽에 조용히 서 있는 황삼청년에게로 향했다. 그는 서른 전후여서 청년을 막 지나는 나이였으나, 아직도 싱싱한 젊음을 지니고 있었다.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빙긋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진산월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더니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자달목 최고의 고수가 바로 당신이로군.”

황삼청년은 계속 웃고만 있었고, 그 말에 대답한 사람은 곽태보였다.

“잘 아는구려. 다른 일곱 사람은 모두 내 아우들이거나 다른 사람의 수하들이오. 그들 중 두 사람 이상이 합치면 우리들 중 누구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소.”

진산월은 중인들을 한차례 쓸어보더니 다시 담담한 시선으로 곽태보를 응시했다.

“당신들의 소개는 잘 받았소. 이제 상견례(相見禮)가 끝났으면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진산월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곽태보는 원래 그의 무모함에 대해 한마디 하려고 했는데 그가 돌연 몸을 일으키자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때 제일 뒤에 서 있던 탁극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진 장문인은 우리 사이에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다고 말한 거요. 내 의견도 똑같소. 어차피 싸우러 왔는데 시시콜콜한 말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지 않겠소?”

곽태보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진산월은 바위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더니 그를 향해 정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막상 일어난 그의 모습을 보자 곽태보는 재차 가슴이 떨려 왔다. 예상보다 훨씬 큰 키에 앙상하게 마른 몸이었지만, 그의 몸이 움직일 때마다 거센 기운이 함께 휘몰아쳤다. 마치 거대한 산악(山嶽)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곽태보와 탁극 등 다섯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 사람이 재빨리 진산월의 주위를 에워쌌다. 그들의 신법은 그야말로 섬전이 무색할 정도로 빨라서 무언가 눈앞에 그림자가 어른거린다고 느낀 순간 그들은 진산월의 주위를 완벽하게 포위하고 있었다.

잠시 장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들 일곱 명은 각기 신강과 청해, 그리고 자달목 일대에서 절대적인 추앙을 받고 있는 고수들이었다. 그들 중 두 명은 혈해쌍살(血海雙殺)이라는 자들로, 곽태보의 의제들이었다.

다른 두 명은 염라쌍도(閻羅雙刀) 남씨 형제(南氏兄弟)로, 그들은 지옥부 철패우가 수장(首長)으로 있는 염라전(閻羅殿)의 최고 고수들이었다.

나머지 세 명은 모두 탁극의 수하들이었다. 탁극은 대막 최고의 조직인 혈랑대(血狼隊)를 이끌고 있었는데, 혈랑대의 서열 이삼사 위 고수들이 모두 탁극을 따라 중원으로 온 것이다. 그들의 이름은 생사탄궁(生死彈弓) 상관홍(上官鴻), 답설무흔(踏雪無痕) 표하림(表河林), 혈류비도(血流飛刀) 마상(馬常)이라 했다.

그들 일곱 사람이 비록 곽태보나 철패우, 탁극의 수하들이라고 해도 본신의 실력은 그들과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그들 중 두 명이면 자신들에 뒤지지 않는다는 곽태보의 말은 결코 허언(虛言)이 아니었던 것이다.

칠 인(七人)의 고수가 에워싸자 그 위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들의 한가운데 서 있는 진산월은 막대한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 진산월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검을 뽑아 들었다.

용영검이 소리도 없이 뽑혀 나오자 그들 일곱 사람도 일제히 출수(出手)를 했다.

그리고 그 후로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종남혈사(終南血事)도 그 대미(大尾)를 향해 줄달음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손을 쓴 사람은 혈류비도 마상이었다. 그는 대막의 후예답게 일단 손을 쓰기로 결심하자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수중의 비도(飛刀) 두 개를 진산월에게로 발출했다. 그의 비도를 날리는 솜씨는 그야말로 대단해서 두 줄기 혈선(血線)이 그의 손에서 진산월의 미간으로 그어진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진산월은 피하지 않고 수중의 장검을 흔들었다.

따땅!

두 개의 비도는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한 듯 일곱 사람은 거의 동시에 진산월을 향해 손을 쓰기 시작했다. 주위 사방이 온통 검영과 도기에 가려 가운데에 있는 진산월의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차차차차창!

요란한 쇳소리가 연거푸 터져 나오며 세찬 검기가 질풍처럼 퍼져 나갔다.

곽태보는 장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격전을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주시하고 있다가 슬쩍 탁극을 돌아보았다.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탁극 또한 시선은 장내의 결전에 고정시킨 채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얼 말이오?”

“저자의 무공을 저들 일곱 사람이 감당할 수 있겠느냔 말일세.”

곽태보는 탁극이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느데, 의외로 탁극은 선뜻 입을 여는 것이었다.

“저들로서는 당해내지 못할 거요.”

곽태보는 물론이고 다른 세 사람의 시선도 탁극을 향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탁극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술술 대답했다.

“진산월이 신검무적이라는 별호를 얻게 된 것은 대응표국에서의 일이 가장 컸소. 당시 그는 대응표국에서 단신으로 열일곱 명의 고수들을 격파하여 천하를 경동(驚動)시켰는데, 그들 중 저들 일곱 사람에 특별히 떨어지는 자들은 없었소.”

곽태보는 묵묵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소문은 나도 들었네. 하지만 대응표국의 표두들과 저들을 비슷한 수준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말이 아닌가?”

“물론 개개인의 수준을 따지면 대응표국의 국주인 단리정천 정도나 저들에 비할 수 있을 거여. 하지만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보시오. 화산파의 일대제자 다섯 명이 펼치는 오안검진으로도 그의 손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소. 화산파의 일대제자들이 펼치는 오안검진이 저들 일곱 명의 합공(合攻)보다 약하다고 생각하시오?”

곽태보는 그의 말이 일리가 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들의 무공은 물론 화산파의 일대제자들보다 강할 것이다. 하나 저들은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인물들이라 오늘까지 단 한 번도 서로 간에 손발을 맞춰 본 적이 없었다. 자연히 합공을 한다고 해도 특이한 절진(絶陣)이나 합격술(合擊術)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들의 개인 실력으로 싸우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일곱 명이 합공하는 효과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화산파의 오안검진은 합격진(合擊陣)으로는 강호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것이었다. 화산파의 일대제자들이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온 오안검진이라면 함께 싸워 본 적이 전혀 없는 일곱 명의 절정고수들의 공세보다 더욱 위력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오안검진으로도 진산월의 손에서 십여 초를 버티지 못했으니 이들의 격전은 그 결과가 어떠할지 뻔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곽태보는 나직하게 침음했다.

“음, 그렇다면 우리도 준비해야겠군.”

탁극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말이오?”

“어떻게라니?”

“일 대 일로 싸울 거요? 아니면 저들처럼 합공을 할 생각이오?”

곽태보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그야 물론 합공을 해야지. 자네는 자네 혼자 저자를 상대할 자신이 있는가?”

“나도 그럴 자신은 없소. 문제는 합공을 한다고 해도 우리의 상황이 저들 일곱 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데 있소.”

그제서야 곽태보는 탁극이 이런 말을 꺼낸 이유를 알아차렸다.
다른 세 사람의 얼굴에도 흥미 있는 기색이 떠올랐다.
탁극은 중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비로소 심중(心中)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우리들 중 누구도 단신으로는 저자의 검을 꺾을 자신이 없소. 그렇다고 합공을 하자니 아직 단 한 번도 손을 맞춰 본 적이 없는 우리들이 제대로 그 효과를 누릴지 의문이오. 그래서…”

곽태보가 급히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그래서 우리는 싸우는 방식을 약간 바꿔야 하오.”

“어떻게 말인가?”

“싸움은 한 사람이 하고 나머지 네 사람은 기습을 노리는 거요.”

곽태보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빛이 떠올랐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한 사람이 싸운다면 누구도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을 거라고 자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내 말을 들어 보시오. 우리 중 한 사람이 그와 싸우다 수세(守勢)에 몰리게 되면 즉시 다른 사람이 대신 싸우면 되는 거요. 그동안 나머지 네 사람은 그를 에워싼 채 그의 빈틈을 노리고 있다가 빈틈이 보이면 공격하는 것이오.”

곽태보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이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종의 차륜전(車輪戰)이로군.”

“그렇소. 하지만 단순한 차륜전으로는 부족하오. 그래서 나머지 네 사람은 우리 편이 위급할 때 대신 싸움에 나서면서 한편으로는 그가 마음놓고 공격하지 못하도록 그를 계속 피곤하게 해야 하오.”

이어 탁극은 세 사람의 표정을 살피더니 말을 덧붙였다.

“조금 치사한 방법일지 몰라도 효과는 확실할 거요. 아무리 그의 무공이 대단하다 해도 우리가 이런 식으로 싸운다면 그는 견디지 못할 거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의 방법의 장단점을 따지고 있는데, 철패우가 제일 먼저 그의 생각에 동조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같군. 좋은 생각을 했네.”

철패우가 탁극의 어깨를 두르려 주었다.
곽태보를 제외하면 철패우의 나이가 가장 많았다.
그만큼 남들과 싸운 경험도 풍부하기 때문인지 철패우는 즉시 탁극이 말한 방법의 효용가치를 알아차렸다.

탁극의 방법은 사실 합격진(合擊陣)의 가장 중추적인 부분만을 따로 떼어 놓은 것이다.
합격진이란 공격할 때는 상대의 약점을 나누어서 공격해 상대를 혼란스럽게 하고, 수비할 때는 상대의 공격으로부터 같은 편을 보호하는 것이 주 골자였다.
탁극은 합격진의 가장 기본적인 골격을 충실히 지키면 자신들이 합격진을 익힌 것과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제서야 나머지 세 사람도 모두 그의 계획에 찬성을 했다.
원래 그들은 진산월을 상대하는 데 이렇게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없었다.

당초 초가보에서 계획을 세웠을 때 진산월은 악종기가 따로 사람을 보내 처리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종남파에 있어야 할 진산월이 이곳까지 와서 그들을 기다리는 바람에 진산월을 상대해야 할 인물이 그의 행적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 때문에 그들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강적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진산월을 상대하는 방법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차차창!

갑자기 예리한 파공음이 거푸 들리며 자욱한 검기가 무섭도록 크게 팽창했다.
그들이 흠칫 놀라 보니 예상했던 결과가 벌어지고 있었다.

최초의 피해자는 생사탄궁 상관홍이었다.
상관홍은 팔뚝만한 길이의 작은 탄궁을 병기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가 화살의 시위를 바꾸는 그 짧은 순간에 진산월의 검이 그의 가슴을 갈라 버린 것이다.

“크악!”

상관홍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 죽일 놈!”

상관홍과 절친한 사이였던 혈류비도 마상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하나 그 바람에 철벽같던 그의 수비가 깨어져 상반신의 허점이 송두리째 드러나고 말았다.
진산월의 용영검은 그의 허점을 놓치지 않고 베어 버렸다.

“크헉!”

마상은 목덜미를 정통으로 관통당하고 입을 딱 벌렸다.
시뻘건 선혈이 봇물처럼 흘러나오는 가운데, 마상은 최후의 힘을 다해 자신이 목을 관통한 진산월의 검을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죽을 때 죽더라도 진산월에게 조금의 피해라도 주려는 것이다.
과연 그 사이를 노려 혈해쌍살이 진산월의 양쪽에서 접근해 들어왔다.

허나 진산월의 검은 그들의 의도를 불허했다.
진산월이 한차례 손을 흔들자 그토록 사력을 다해 검을 잡고 있던 마상의 양손과 목덜미가 차례로 잘려 나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진산월의 검은 무방비 상태로 접근하던 혈해쌍살의 몸을 거의 동시에 가르고 지나갔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연거푸 터져 나오고 자욱한 피비린내가 사방을 뒤덮었다.
순식간에 절반 이상이 죽어 나가자 남은 인물들은 사색이 된 채로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나 그 순간, 진산월의 검에서 뿜어 나오는 검영이 무섭도록 빠르게 확산되더니 순식간에 나머지 세 사람의 신형을 뒤덮어 버렸다.
유운검법 중의 독보적인 절초인 운무중첩이 펼쳐진 것이다.

“크아악!”

합창하는 듯한 세 가닥의 비명을 마지막으로 장내를 뒤덮었던 혈우성풍(血雨腥風)이 멈춰졌다.
그때 바닥에는 이미 읽보 구의 시신이 사방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한동안 죽음 같은 침묵이 주위에 감돌았다.
곽태보 등은 이미 예상은 했었지만 너무도 처참하고 일방적인 도살에 할말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다 그들은 진산월이 자신들의 앞으로 다가오자 서로 시선을 마주치고는 진산월의 주위를 빠르게 에워쌌다.

그런데 그들의 대형이 다소 특이했다.
곽태보와 염벽수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진산월의 정면에 서 있었고,
철패우와 혁련기가 또한 나란히 진산월의 우측 뒤를 막아섰다.
그리고 탁극 혼자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진산월의 좌측 후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은 다섯 명이지만 세 무리로 나뉘어 삼각형의 형태로 진산월을 포위한 것이다.
이것은 짧은 순간에 그들이 생각해 낸 가장 효과적인 합격술이었다.
한 사람이 진산월을 상대하고 나머지 네 사람이 주위를 에워싸는 방식은 자칫하다가는 진산월의 검에 차례로 쓰러지게 될 위험성이 있었다.
그러한 위험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 이인일조(二人一組)로 공격을 하려는 것이다.

다만 그들의 인원이 다섯 명이어서 한 사람은 혼자 나설 수밖에 없었다.
탁극은 자신이 기꺼이 그 임무를 떠안았다.
대신 그에게는 진산월의 몸에서 가장 사각(死角)에 가까운 지형인 좌측 후미가 맡겨졌다.

원래 오른손잡이에게는 좌측 후미가, 왼손잡이에게는 우측 후미가 가장 취약한 공간이었다.
당연히 합격을 할 때 그쪽 방향에 있는 것이 제일 안전했다.

탁극은 인원수의 불리함을 공간의 이점을 선택하는 것으로 상쇄시킨 것이다.

선공(先攻)은 이번에도 진산월의 몫이었다.
원래 다수가 소수를 합격할 때는 다수가 먼저 공격하는 것이 상례(常例)였다.
자칫 소수가 먼저 공격하다가 약점이 드러나면 치명적인 반격을 초래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산월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이 먼저 검을 휘둘렀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무공에 절대적인 자신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상대방이 취하고 있는 특이한 합격진이 은근히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자신의 왼쪽 후미에 도사리고 있는 탁극의 움직임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상대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선제공격을 취한 것이다.

진산월의 검에서 구름 같은 검기가 일어나 앞에 서 있는 곽태보와 염벽수를 향해 몰아쳐 갔다.
간단한 동작에 이와 같은 놀라운 검기가 일어나는 광경은 처음 보는 사람을 당혹케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다행히 곽태보와 염벽수는 조금 전에 진산월이 싸우는 장면을 보았기에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곽태보의 손에는 그가 방금 풀어낸 허리띠가 쥐어져 있었다.
그의 허리띠는 천마삭(天魔索)이라는 것으로,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상당히 정교하고 무서운 무기였다.
곽태보는 이 천마삭으로 펼치는 천마무(天魔舞) 무공으로 신강 일대의 제왕으로 군림해 왔다.

염벽수의 손에는 언제 뽑아 들었는지 두 개의 월아륜(月牙輪)이 들려 있었다.
염벽수의 성명절기(聲名絶技)는 두 개의 월아륜으로 펼치는 쌍륜살법(雙輪殺法)이었는데, 일단 펼치면 반드시 상대의 피를 본다고 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변황일독이라는 그의 외호도 염벽수 본인의 악독한 심성과 쌍륜살법의 냉혹함이 합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곽태보와 염벽수는 거의 동시에 천마삭과 월아륜을 휘둘러 대항해 왔다.
그들은 진산월의 가공할 검기에도 몸을 사리지 않았고,
처음부터 자신들의 절예를 펼쳐 당당하게 맞서 갔다.
그것은 오랜 동안 풍부한 대전 경험을 쌓은 자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까까깡!

진산월이 펼친 유운검기와 염벽수의 월아륜이 순식간에 다섯 번이나 격돌하며 사방으로 불똥이 튀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곽태보의 천마삭이 미끄러지듯 허공을 가르며 진산월의 미간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들의 이 연수합격(連手合擊)은 그야말로 사전에 철저히 조율된 듯 한치의 빈틈도 없었다.

진산월은 피하지 않고 천마삭의 끝을 검으로 정확하게 찍어 갔다.
허공에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천마삭의 끝을 검으로 찍는다는 것은 언뜻 보기에는 불가능한 것 같았으나,
실제로 진산월은 어렵지 않게 해냈다.

딱!

곽태보는 천마삭을 쥔 손이 부러질 듯 아파서 자신도 모르게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천마삭의 끝을 찍은 진산월의 검이 천마삭을 타고 미끄러지듯
곽태보의 손 쪽으로 이동했다. 곽태보는 질겁을 하고 천마삭을 세차게 흔들었다.
하나 좀처럼 천마삭을 타고 내려오는 진산월의 검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것은 진산월의 검에서 기이한 흡인지기(吸引之氣)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아무리 천마삭을 흔들어도 검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염벽수의 월아륜이 무시무시한 파공음을 일으키며 진산월의 양쪽
옆구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진산월은 슬쩍 몸을 검에 바짝 갖다 대며 수중의 장검을 옆으로 이동시켰다.
그러자 천마삭이 함께 따라왔다.

“엇?”

뜻밖의 사태에 곽태보가 놀란 외침을 토해냈으나, 그때는 이미 진산월의 검과 천마삭은 거의 동시에 염벽수의 오른쪽에서 날아드는 월아륜에 부딪쳐 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진산월은 신형을 반쯤 돌렸다.

파앗!

왼쪽 방향에서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던 월아륜 하나는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 버렸다. 또한 오른쪽의 월아륜은 진산월의 장검에 막혀 버렸다.
그 순간 진산월의 검에 이끌려 오던 천마삭이 월아륜과 검이 부딪친 충격으로 염벽수 쪽으로 세차게 튕겨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염벽수는 설마 같은 편의 병기를 이용해 공격을 해올 줄을 몰랐는지 자신도 모르게 안색이 굳어졌다.
이런 방식의 무공은 아직 본 적도 없었다.
염벽수는 그 자리에 넙죽 주저앉았다.
천마삭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염벽수는 모골이 송연해져서 쉽게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변황일독이라고까지 불리던 그도 조금 전처럼 놀라고 당황한 적이 없었다.
하마터면 영문도 모르고 같은 편의 병기에 격중당할 뻔했으니 남들에게 말해도 쉽게 믿을지 의문이었다.

곽태보 또한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독문병기(獨門兵器)가 상대의 손에 제멋대로 이끌려 같은 편을 쓰러뜨릴 뻔했으니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곽태보와 염벽수가 주춤거릴 때 진산월의 무서운 공격이 이어졌다.
아마 그때 뒤쪽에 있던 철패우와 혁련기가 때마침 나서지 않았다면 그들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을지도 몰랐다.

철패우의 손에 들린 도끼는 무게가 육십 근이나 되는 거대한 것이었다.
웬만한 사람은 제대로 들기도 힘든 무거운 도끼가 철패우의 손에서는 마치 어린아이의 장난감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철패우는 이 한 자루 도끼로 군마(群魔)들이 난무(亂舞)하는 청해 일대를 완전히 제압했다.
그리고 그들을 수하로 끌어들여 청해 최고의 집단인 염라전을 만들었다.
그의 도끼를 사용하는 솜씨는 너무도 가공해서 청해의 무림인들에게는 그가 지옥(地獄)의 사신(死神)처럼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에게 지옥부라는 별호가 붙게 된 것이다.

혁련기의 무공은 한 자루의 창(槍)이었다.
창 끝에 자줏빛 수실이 매달려 있어서 자전신창이란 외호가 붙게 되었다.
한번 움직이면 창에 매달린 수실이 마치 자주색 번개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장병(長兵)인 창과 단병(短兵)인 도끼는 상호 보완하는 성질이 있어서 두 사람이 함께 손을 쓰자 당초의 예상보다 더욱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빠르고 날카로운 혁련기의 창과 무겁고 강맹한 철패우의 도끼가 절묘한 배합을 이룩 있는 것이다.

먼저 날아든 것은 혁련기의 자전창이었다.
한 줄기 섬광과 함께 그것은 어느새 진산월의 뒤통수에 거의 도달해 있었다. 그때 진산월은 막 곽태보와 염벽수의 전신을 자신의 검세(劍勢) 아래 놓아둔 상태였다.
여기서 이삼 초만 지났담녀 두 사람은 모두 검하고혼(劍下孤魂)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진산월은 처음에는 슬쩍 고개를 움직이는 것만으로 자전창을 피하려 했다하나 이내 그 창과 함께 무언가 강력한 기운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자전창의 바로 뒤를 따라 지옥부가 날아들고 있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진산월은 곽태보와 염벽수에게 향했던 검을 거두어 뒤쪽으로 검광을 날려야 했다.

채챙!

검광과 마주친 자전창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하나 뒤이어 닥친 철패우의 지옥부는 검광을 뚫고 진산월의 지척까지 다가갔다.
진산월의 어깨가 한차례 흔들리더니 거의 신형이 지옥부의 공세를 스치듯 지나 옆으로 일 장 이동했다.
절정의 이어룡 신법이 펼쳐진 것이다.

하나 상황은 오히려 더욱 악화되었다.
검광에 격퇴되었던 혁련기의 자전창이 어느새 그가 이동한 방향에서
찔러 오고 있었다.
그 변초(變招)의 신속함은 자색 번개라는 말이 그대로 실감나는 것이었다.
진산월의 몸이 자전창에 꼬치처럼 꿰이려는 찰나, 갑자기 그의 신형이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팟!

자전창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누운 그의 가슴팍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런 상태에서 진산월은 몸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거꾸로 한 바퀴를 돌았다.

꽝!

기척도 없이 다가온 도기(刀氣) 하나가 방금 전까지 그가 발을 딛고 서 있던 자리를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진산월이 몸을 회전하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그 정체 모를 도기에 가격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 도기는 한쪽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혈린도 탁극이 발출한 것이었다.
탁극의 도기는 너무도 빠르고 은밀해서 진산월조차 지척에 접근했을 때에야 간신히 그것을 알아차렸을 정도였다.

진산월의 몸이 채 바닥에 내려서기도 전에 다시 철패우의 도끼가 무서운 기세로 날아들었다. 이번의 배합은 실로 절묘해서 진산월조차도 이 순간만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을 정도였다. 진산월은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고 몸의 회전이 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용영검을 곧장 앞으로 내찔렀다.
땅!
검광과 도끼가 허공에서 정면으로 격돌했다. 철패우의 거구가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광경이 중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하나 진산월 또한 회전하던 몸이 중심을 잃고 옆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기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몇 사람의 눈이 무섭게 번뜩였다. 가장 먼저 진산월에게 닥쳐든 것은 혁련기의 자전창이었다. 자전창은 마치 거대한 화살처럼 바닥에 쓰러지는 진산월을 향해 날아갔다. 누가 보기에도 진산월은 그 창을 피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하나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막 바닥에 쓰러지고 있던 진산월의 신형이 갑자기 다시 벌떡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헉!”

누군가의 입에서 다급한 헛바람 들이키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인간이 어찌 이런 동작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던 몸이 아무런 지지대나 도움도 없이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선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나 그 바람에 혁련기가 날린 회심의 일격은 헛되이 땅을 찌르고 말았다. 그리고 그 대가는 너무도 컸다.
진산월은 헛되이 땅을 찌르고 다시 물러나는 혁련기의 창을 왼발로 밟으며 그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했다. 혁련기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했다. 자신이 앞으로 구름 같은 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본 것이다. 혁련기는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그러려면 진산월이 밟고 있는 자전신창을 놓아야만 했다. 이런 격전에서 병기를 놓고 물러난다는 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마침 탁극이 진산월의 뒤로 소리 없이 다가오며 강력한 일도(一刀)를 발출했다. 진산월의 공세가 앞에 있는 혁련기에 집중되어 뒤가 비어 있는 순간을 노린 것이다. 하나 그것이 진산월의 진정한 노림수였다. 진산월은 오른발을 축으로 하여 번개같이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새벽에 동중산에게 전수했던 색혼검결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파앗!
주위가 갑자기 환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찬연한 검광 속에서 경악으로 굳어 있는 탁극의 얼굴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크윽!”

짤막한 신음과 피비가 허공을 수놓았다. 탁극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나 대신에 그의 왼팔은 팔뚝 아래도 싹둑 잘려져 버렸다. 팔 한쪽을 희생해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목숨을 건진 것이다. 탁극은 안색이 핼쑥하게 변한 채 뒤로 물러났다.
진산월은 속으로 아쉬운 혀를 찼으나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색혼검결은 완벽했으나, 탁극이 마지막 순간에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달려들던 몸을 멈추는 바람에 그를 일격필살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탁극이 물러난 자리는 이미 곽태보와 염벽수가 대신하고 있었다. 곽태보의 천마삭이 비단처럼 허공을 수놓았고, 염벽수의 월아륜은 월광(月光)과도 같은 빛을 뿌리며 사방을 환하게 밝혔다. 철패우와 혁련기는 뒤로 물러난 채 숨을 고르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들의 차륜전은 확실히 효과적이어서 진산월은 조금도 쉴 틈이 없었으며, 꾸준히 내력을 소비해야만 했다. 반면에 이들은 교대로 공격을 하고 틈만 나면 암습을 하여 진산월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탁극은 왼팔이 잘린 후로 직접적인 공격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공격을 보조하는 데 그치고 있었다. 순식간에 그들은 다섯 번이나 연환(連環)했고, 백여 초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진산월은 이런 상태로는 그들과 하염없이 시간을 소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이 갑자기 한층 더 빠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보다 더욱 강력한 검광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드디어 진산월이 본격적으로 유운검법의 절초들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 그때 그를 상대하고 있는 자들은 철패우와 혁련기였는데, 그들은 진산월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일어나는 엄청난 검광에 안색이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하나 그렇다고 뒤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의 후퇴란 곧 그들에게는 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서로 시선을 교차시키더니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은 목숨을 걸어야 할 때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파파파팍!
그 순간에도 구름 같은 검영은 그들을 향해 꾸역꾸역 밀려왔다. 막상 그 거대한 검광에 맞설 생각을 하니 두 사람은 절로 오금이 저렸다. 인간의 손으로 이러한 검광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경이스럽게 생각되었다. 하나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들은 사력을 다해 병기를 휘두르며 그 검영 속으로 뛰어들었다.
파앗!
혁련기의 자전창이 자색 섬광과 함께 검영 속을 파고들었다. 그 뒤를 철패우의 지옥부가 맹렬한 기세로 뒤따랐다.
따따땅!

혁련기가 전력을 다해 내지른 자전창이 수백 번의 격렬하나 부딪침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부서져 버렸다. 그 파편이 구름 같은 검영 속으로 마구 흩어졌다. 지옥부를 휘두르며 혁련기의 뒤를 바짝 따르던 철패우는 자신의 앞에 있던 혁련기의 몸이 갑자기 마구 요동을 치더니 전신이 갈라져 피분수를 뿌리는 광경을 목격했다. 하나 두려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야압!”

그는 태산이 무너질 듯한 고함을 내지르며 지옥부를 혁련기의 너머에 있는 구름 같은 검영의 한가운데로 집어던졌다.

쾌애액!

구름의 한가운데 구멍이 뚫리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본 철패우의 얼굴에 언뜻 희색이 돌았다. 하나 이내 그 구멍은 재차 일어나는 구름에 메워져 버렸다. 그와 함께 철패우는 자신의 몸이 뜨거운 불구덩 속에 들어간 듯한 화끈한 작렬감을 느꼈다.

‘이… 이런 검법이…’

그는 입을 딱 벌렸다. 하나 비명보다는 핏물이 먼저 뿜어져 나왔다. 철패우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구름 같은 검광에 난자당하고 있는 자신의 두 팔이었다.

탁극은 자신의 오른손이 덜덜 떨리고 있음을 알았다. 혁련기와 철패우가 그토록 완벽한 합공을 가했는데도 상대의 구름 같은 검영을 뚫지 못하고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그것은 인간의 검학(劍學)이 아니었다. 대체 단순한 철검 하나로 어찌 저와 같은 조화를 일으킬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이 계획했던 차륜전의 치밀함도 그러한 절대적인 무력(武力) 앞에는 한낱 부질없는 짓임이 자명해졌다. 지금도 곽태보와 염벽수가 사력을 다해 저항하고 있으나 그들이 쓰러지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될 것이다. 왼팔이 잘렸을 때도 지금처럼 두렵지는 않았다. 비록 상대의 기습적인 반격으로 한쪽 팔이 잘리기는 했으나, 이 정도면 자신들에게도 일말의 승산(勝算)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정이 달라진 것이다. 정확하게는 그의 몸이 한층 더 빨라졌을 때부터였다. 처음에는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도 아직도 숨은 여력(餘力)이 있다는 걸 알고 감탄하는 정도였다. 하나 이내 사정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빨라진 것은 진산월의 몸뿐만이 아니었다. 검법을 전개하는 속도도 빨라지더니 종내에는 지금처럼 엄청난 검영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상대가 전력을 기울이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승부를 냈어야만 했다. 아니, 어떻게 승부하든 결과는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저런 검광을 펼치는 자와 싸우기로 했을 때부터 이미 자신들의 운명(運命)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악!”

곽태보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천마삭은 이미 동강나서 형체조차 제대로 찾기 어려웠다. 염벽수의 최후는 더욱 비참해 보였다. 그는 월아륜이 파괴된 파편(破片)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쓰러지고 말았다.

그들을 모두 쓰러뜨린 가공할 검영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을 본 탁극의 입에 문득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무인(武人)으로 태어나 이러한 검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 아니겠는가? 한 자루 칼을 들고 대막에 뛰어들었을 때부터 자신의 죽음은 예견(豫見)된 것이었다.

‘후회는 없다. 단지 밀주(密主)의 명을 완수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지.’

탁극은 하나 남은 오른팔로 자신의 애병(愛兵)을 힘껏 움켜잡았다.

‘밀주… 당신에게 가장 큰 적(敵)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탁극은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혈린도를 번쩍 쳐들었다.

‘밀주께 영광(榮光)을…’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을 향해 덮쳐 오는 구름 같은 검영 속으로 뛰어들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도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진산월은 검을 멈추었다. 장내에는 한 폭의 지옥도(地獄圖)가 펼쳐져 있었다. 온전한 시신은 몇 개 되지 않았고, 대부분은 형체조차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유운검법 십팔 초 중 열두 초식을 연환(連環)한 결과였다.

문득 은은한 통증을 느끼고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니 자신의 몸에도 몇 군데 상처가 있었다. 박살난 자전창의 파편 중 두 개가 옆구리에 박혀 있었고, 철패우가 마지막 순간에 지옥부의 잘려진 조각 하나가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서 살점이 떨어져 있었다. 탁극이 죽기 전에 펼친 도법 또한 무서웠다. 탁극은 비록 몸이 난자분시가 되었지만, 진산월의 왼쪽 팔에 일도(一刀)의 흔적을 남겼다.

유운검법이 놀라운 위력을 지녔지만 완벽하지는 않다는 증거였다.

‘유운검법을 처음부터 연환하면 조금 나아질까?’

진산월은 출도한 이후 아직 유운검법 십팔 초를 모두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전반부의 여섯 초식만으로도 적수를 만나지 못했고, 종남파의 본진을 되찾을 때도 중반부의 세 초식을 더해 불과 아홉 초식만을 사용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오늘 비로소 중반부와 후반부의 열두 초식을 사용해 본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상대를 모두 쓰러뜨릴 수 있었으나, 몇 군데의 상처는 꼭 입게 되었다. 그것이 유운검법에 있는 약점 때문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유운검법 자체가 수비보다는 공격에 주안점을 둔 무공이었다.
어쩌면 인간인 이상 완벽한 초식이란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오늘은 자신이 승리를 했지만, 오늘 상대한 자들보다 더욱 강한 자들을 만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진산월은 옆구리에 박혀 있는 파편들을 빼내고 피가 솟구쳐 나오는 왼쪽 어깨를 지혈시켰다.
탁극에게 당한 왼팔의 상처는 제법 깊어서 통증이 심하기는 했지만, 다행히 힘줄을 다치지는 않아서 움직이는 데는 별다른 지장이 없었다.
진산월은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고는 문득 허공을 응시했다.

“그들이 무사한지 모르겠군.”

사문의 제자들이 걱정되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오늘 벌어진 참혹한 일은 아직 진행중이었다.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아직도 한 가지 해야 할 것이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그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일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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