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4권 종남재림(終南再臨)편 : 11화 (14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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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4권 종남재림(終南再臨)편 : 12화


제144장. 재림강호(再臨江湖)

“이존휘가 취마사 혈겁의 배후라는 확실한 증거를 찾았소.”

이동정의 말에 정소소와 금교교 등은 모두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게 무언가요?”

이동정은 밖으로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불렀다.

“들어오게.”

곧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을 본 누산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당신은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들어온 사람은 히죽 웃더니 돌연 그녀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좋은 방을 안내해 드릴까요?”

그 말에 누산산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당신은… 평안객잔의 그 점소이?”

들어온 사람은 다시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소인 전칠(田七)이옵니다.”

놀랍게도 이동정이 부른 사람은 평안객잔에서 그녀들에게 방을 안내했던 점소이였던 것이다. 하나 어떤 사람들은 평안객잔이 아닌 망경루의 점원이라고 할지도 몰랐다. 이동정이 중인들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그는 내 지시로 서안 일대에 있는 몇 군데의 객잔에서 일하고 있었소.”

금교교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전칠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이분도 성숙해의 일원이겠군요.”

전칠이 그녀를 향해 포권을 했다. 조금 전의 장난스런 모습과는 달리 정중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말씀을 낮추십시오, 금 소저. 소인은 전경일(田慶日)이라고 하옵니다.”

옆에서 누산산이 키득거렸다.

“경사스러운 날에 태어난 모양이군요.”

“사매, 말조심해라.”

금교교가 그녀를 책망했으나, 전경일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빙그레 웃었다.

“누 소저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 생일날이 할머님의 회갑연이 벌어진 날 입니다.”

“재미있네요.”

금교교는 누산산이 다른 말 실수를 할 것이 두려운지 이동정을 향해 재빠르게 물었다.

“전 소협이 이존휘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왔나요?”

“그렇소. 자네가 직접 말씀드리게.”

이동정의 말에 전경일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이 대협의 지시를 받고 취미사 혈겁이 벌어진 다음날부터 서안의 유명한 객점인 평안객잔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 말에 중인들은 이동정의 재빠른 일처리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벌써 그 일이 중대한 것임을 알고 조치를 취한 것이로 군요.”

이동정은 씁쓸하게 웃었다.

“소가 뒷걸음치다 쥐를 잡은 격이었소. 마침 초가보와 화산파가 서안을 무대로 세력전을 벌인다는 말에 서안 일대의 정보망을 보강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는데, 취미사 혈겁이 벌어지는 바람에 겸사겸사 손을 쓴 것이오. 그 일이 이토록 엄청난 여파를 남기게 될 줄을 내가 어찌 알아 겠소.”

누산산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종알거렸다.

“어쩐지 저자가 우리를 안내하는 솜씨가 조금 서투르다 했어요.”

“제발 그 입 좀 다물고 있어라.”

금교교의 제지에 누산산은 샐쭉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전경일은 그녀를 힐끔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며칠 전부터 저는 망경루를 감시하라는 이 대협의 분부를 받고 그쪽으로 일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여러분이 알고 계시는 대로 흑갈 방의 무리들이 망경루를 급습했습니다.”

정소소를 위시한 천봉궁의 인물들은 모두 그의 말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심지어는 주위가 산만하고 재잘거리기 좋아하는 누산산조차도 조용히 귀를 있을 정도였다. 이제부터 하는 그의 말에 지금까지 골머리를 썩게 했던 미궁(迷宮) 속의 사건이 실마리를 찾게 된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날의 급습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우연히 지니가던 종남파의 고수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망경루는 주춧돌 하나 남기지 않고 없어져 버렸을 겁니다.”

금교교가 의아한 듯 물었다.

“종남파의 고수라면?”

“이름은 잘 모르겠습니다. 상당히 젊고 보기 드문 미남자인데, 제 평생 처음 보는 권법의 고수였습니다.”

미남자라는 말에 금교교를 비롯한 천봉궁 인물들의 뇌리에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나 이내 누산산이 고개를 저으며 큰소리로 떠들었다.

“그 녀석일 리가 없어요. 언니는 그 녀석이 나한테 두들겨 맞은 적이 있다는 걸 잊었어요?”

하나 금교교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사별삼일(士別三日)이면 괄목상대(刮目相對)라고 했다. 하물며 삼 년이나 세월이 흘렀는데 그가 어떻게 변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핏! 그 녀석이 무슨 절세의 기재라도 되나요? 그런 말은 아무에게나 해당 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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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만나 보았던 그의 기도는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아무튼 다음 이야기를 듣자꾸나.”

금교교가 그녀와 말다툼을 하기 싫은 듯 화제를 돌리자 전경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그날 손님으로 온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취미사 혈겁의 흉수가 이번 기습을 계획했다면 일에 만전(萬全)을 기하기 위해서 측근 중 누군가를 파견하여 직접 감시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의 말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것이어서 모두들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날 온 손님들 중 눈에 띄는 몇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자세하게 기억했다가 기습이 끝난 후 한 사람씩 신분을 조사했습니다. 행적이 미심쩍은 사람은 모두 네 명인데, 그중 두 사람은 소금을 밀매(密賣)하는 장사꾼들이었고, 한 명은 관(官)에 쫓기고 있는 현상범이었습니다.”

누산산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나머지 한 사람은요?”

“그자는 그날 어설픈 젊은 공자 행세를 했으나 저는 단번에 그자가 정체를 숨긴 고수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음식을 나를 때 언뜻 그자의 손바닥을 보았는데, 손바닥 전체에 단단한 못이 박여 있었습니다.”

손바닥 전체에 못이 박인 경우는 오직 철사장(鐵沙掌) 같은 외문무공(外門武功)을 익힌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었다. 전경일은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중인들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외문무공을 익힌 사람들은 검 같은 병장기를 잘 사용하지 않는데, 그 공자는 화려한 패검(佩劍)을 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가 일부러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된 거지요. 흑갈방의 기습이 종남파 고수들에 의해서 무위(無爲)로 돌아갔을 때 그 공자는 남들 눈을 피해 종남파 고수들의 뒤를 밟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자를 따라갔나요?”

누산산은 막상 물어놓고는 중인들이 자기를 노려보자 황급히 자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중인들은 피식 웃고 말았다. 전경일 또한 입가에 엷은 미소를 떠올렸으나 이내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예. 그 덕분에 흑갈방의 기습을 물리친 자들이 종남파의 고수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젊은 공자는 그들의 신분을 확인하고는 다시 서안 쪽으로 가더군요. 그자가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는 바람에 꼬박 하루를 그의 뒤를 밟느라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그자는 제가 뒤쫓는 것은 몰랐지만 습관적으로 신중을 기하느라 그런 행동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 오늘 마침내 그자가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을 알아냈습니다.”

그의 다음 말이 무엇인지는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바로 이씨세가였습니다.”

그의 말을 끝으로 중인들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정소소가 모처럼 입을 열었다.

“단순히 그것만으로 그가 이존휘의 지시를 받았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전경일은 그런 질문이 나올 것을 알고 있었던 듯이 즉시 말을 받았다.

“그자가 이씨세가로 들어간 후 저는 사람을 풀어 어렵사리 그자의 신분을 알아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개(李蓋)라고 하며, 이씨세가의 먼 친척뻘 되는 인물이라고 하더군요. 며칠 전부터 이존휘의 부름을 받고 이씨세가를 출입하기 시작해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확실히 이존휘의 수하가 맞겠군요. 이존휘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자를 부른 것일 테고요.”

정소소의 말에 이동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짐작도 그렇소. 그자가 이존휘의 수하라면 이존휘가 왜 하필 흑갈방이 망경루를 습격하는 날에 자신의 수하를 그곳으로 보냈는지 의아하지 않소? 게다가 우리가 이존휘에게 망경루의 사건을 이야기한 그날 저녁에 이씨세가에서 전서구가 날았다는 첩보도 입수했소. 이 모든 일들이 이존휘가 취미사 혈겁의 배후 인물임을 나타내는 확실한 증거라고 할 수 있소.”

정소소는 잠시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그녀도 이존휘가 취미사 혈겁의 흉수임이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 그렇다고 사태의 해결이 무작정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존휘에게는 이씨세가라는 든든한 뒷배경이 있었다. 아무리 증거를 제시한다 할지라도 이존휘가 딱 잡아뗀다면 무조건 그를 핍박할 수만도 없었다.

정소소는 문득 고개를 돌려 한쪽에서 조용히 앉아 있는 차복승을 응시했다. 차복승은 그때까지도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노야 생각은 어떠세요?”

천봉궁에서 차복승의 직위는 총관이지만, 누구나가 그를 노야라고 불렀다. 그 단어 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친근감과 존경심이 담겨 있었다. 차복승은 주름투성이 얼굴에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이제 미궁에 빠졌던 사건의 꼬투리가 잡힌 셈이구나. 그렇다고 이것만으로 이존휘를 압박할 수는 없지.”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취미사 사건이 이토록 커진 것은 그 일에 여러 문파가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당장 생각해도 소림과 화산파 외에 개방과 검보, 심지어는 우리까지 연루되었지 않느냐?”

“…!”

“사건의 발단에 그들이 모두 관여되었으니 해결에도 그들이 모두 관여해야 옳겠지.”

정소소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도 영롱하게 반짝였다.

“노야 말씀은 우리만 이씨세가를 찾아가지 말고 다른 문파도 부르자는 거로군요.”

“그렇다. 지금까지 우리가 입수한 정보와 상황 증거를 이번 일에 관여된 모든 문파에게 공개하는 것이다. 아마 다른 문파는 몰라도 소림과 화산에서는 절대로 그냥 넘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차복승의 말에 중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천봉궁 하나라면 자칫 그들이 강제적으로 이씨세가를 핍박했다는 오해를 살 염려가 있었다. 하나 소림과 화산이 함께 거든다면 무림의 어느 누구도 그들을 탓하지 못할 것이다. 차복승은 조용한 한숨을 불어 내쉬었다.

“그 일이 해결된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한 가지뿐이로군.”

정소소는 급히 물었다.

“그게 무언가요?”

차복승의 주름진 얼굴에는 왠지 한 줄기 어두운 빛이 떠올라 있었다.

“이존휘가 왜 이번 일에 본궁을 끼어 들였느냐 하는 것이다.”

차복승의 음성은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만큼이나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번 일에서 진짜로 중요한 것은 흉수를 색출하는 것이 아니라 흉수의 진정한 목적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일은 이제 겨우 절반도 해결되지 않은 셈이다.”


악종기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래소 보고를 하는 척시림은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미 종남파로 갔던 삼로(三路)의 고수들은 완전히 소식이 끊겼습니다. 수하들을 풀어 그들의 행적을 알려 해도 어디부터 찾아야 할지 막막해서 모두 손을 놓고 있습니다.”

척시림은 보고를 계속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하나 보고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태평곡에 있던 철영대와는 간신히 연락이 닿았지만, 두 분의 공봉과 좌린, 그리고 철혈육영(鐵血六英)이 모두 빠져 나가서 남은 인원들도 우왕좌왕 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두 분 공봉들께도 일이 생기신 것이…”

그 일이 어떤 일인지 척시림은 감히 추측할 수 없었다. 악종기는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항상 온화한 웃음이 감돌았던 그의 얼굴이 철갑을 씌운 듯 무표정하게 굳어 있는 모습이 척시림을 더욱 불안케 했다.

악종기는 어떤 일이 있어도 미소를 잃지 않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불길한 징조였다. 미소가 없는 소면호리는 더 이상 소면호리가 아니지 않겠는가?

보고를 마친 척시림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악종기가 그에게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이것도 좀처럼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악종기는 어떠한 경우든 말로 지시를 내렸지 지금처럼 행동만 보인 적은 없었다. 척시림이 물러간 후에도 악종기는 변함없는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나 그의 마음속에는 거대한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그토록 치밀하게 구상했던 종남파 섬멸 계획이 무위로 돌아간 것은 고사하고, 물경 오십 명에 육박하는 고수들이 모두 소식이 끊겨 버린 것이다. 그들 중에는 강호무림의 최정상을 달리는 고수들도 여럿 있었고, 서장에서 특별히 초빙해 온 절세의 고수들도 많았다. 그들 중 절반만 합친다 해도 어지간한 문파는 주춧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없애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종남파야…

종남파의 세력과 그들의 인원 분포는 이미 훤하게 꿰뚫고 있은지 오래였다. 갑자기 재등장한 장문인과 이십 년 만에 돌아온 노고수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인물이 없는 상태였고, 인원도 열 명 남짓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검토를 하고 보완을 해서 절대로 실패하지 않날 계획을 수립하여 엄청난 인원을 파견했는데, 아무도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대체 일이 어디서 잘못된 것인지 악종기는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문득 그의 고개가 돌려졌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그의 앞에는 백발이 성성한 늙은이 한 사람이 그림처럼 서 있었다. 잔주름이 무척 많아서 마치 오래된 고목(古木)을 연상케 하는 노인이었다. 노인의 주름살투성이 얼구레 박여 있는 두 개의 눈은 진물이 흐르고 있었고, 얼굴 여기저기에는 검버섯이 가득했다.

노인을 보자 악종기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존자(尊者)를 뵈옵니다.”

노인은 진물이 가득한 눈으로 물끄러미 악종기를 보더니 쭈글쭈글한 입술을 열었다.

“종남파에 갔다 왔다.”

그의 음성은 마치 깊은 우물 속에서 올라오는 듯 기이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그곳에서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악종기는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노인은 그를 응시한 채 천천히 말을 이었다.

“노납(老衲)이 네 부탁을 들어주었던 것은 헛걸음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을 완벽히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너는 노납에게 헛고생을 시켰더구나.”

악종기는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노인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허공을 응시했다.

“네 일은 실패로 끝났다. 너는 본래의 신분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악종기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노인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노납은 셋째에게나 가 볼 생각이니 연락할 일이 있으면 그쪽으로 하도록 해라.”

이어 그의 몸은 마치 허깨비처럼 홀연히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야말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가공할 신법(身法)이었다. 노인의 모습이 사라졌는데도 악종기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인 모습이었다. 마치 그런 자세로 굳어진 석상(石像)처럼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우엑!”

문득 그의 몸이 크게 떨리더니 한바탕 검은 선혈을 토해냈다. 마음속의 노화가 너무도 치밀어 올라 내상(內傷)을 입고 만 것이다. 악종기는 한차례 더 피를 토한 다음에야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

“십삼 년, 십삼 년의 공(功)이 한순간에 무너졌구나…”

그의 나직한 독백 속에는 형용 못할 허탈함과 침통함이 가득 배어 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쿵!

지축을 뒤흔드는 듯한 굉량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어디선가 고함 소리와 비명 소리가 계속 들리고 있었다. 악종기가 채 정신을 수습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총관님, 큰일 났습니다.”

들어온 사람은 척시림이었다. 거칠고 사나운 성격 때문에 분랑이라는 외호로 더 유명한 척시림은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정신 없어 보였다. 그는 악종기가 입가에 피를 묻힌 채 무릎을 꿇고 있는 광경을 보고 움찔 놀랐다. 악종기는 피 묻은 입가를 닦으며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인가?”

그의 모습은 예전의 침착함을 되찾고 있었다. 그의 차분한 음성을 듣자 척시림은 들끓었던 마음이 급격히 가라앉음을 느꼈다.

“종남파의 고수들이 쳐들어왔습니다. 벌써 관월각(觀月閣)을 지나 태허전(太虛殿) 부근까지 들어섰습니다.”

그 말을 듣고도 악종기는 표정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몇 명이나 왔나?”

“인원은 열 명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하나같이 뛰어난 고수들이라 지금 본보에는 그들을 당해낼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악종기는 피식 웃었다.

“고수가 많기로 소문난 본보에 고수가 없다니… 재미있군. 그들 중 신검무적도 있나?”

“예. 입구를 지키던 뇌정신군(雷霆神君) 양조광(梁朝光)이 그의 일검에 제일 먼저 목이 달아났습니다.”

악종기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다시 물었다.

“보주는?”

“보주님은 우문 대장과 함께 수성전에 계십니다. 그곳에서 최후의 결판을 내겠다고 합니다.”

악종기의 얼굴에 냉랭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직도 상황을 모르는군. 하긴… 믿고 싶지 않은 거겠지.”

악종기는 마음을 결정한 듯 빠른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 측 인원은 모두 철수시켜라. 이곳은 초가의 땅이니 초가에게 지키라고 하자.”

“철수라면 어디로…”

“일단 셋째 공자의 거처로 간다. 그곳에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본 다음 조용해지면 본사(本寺)로 돌아갈 것이다.”

척시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결국 귀환령(歸還令)이 내렸군요. 그토록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이셨는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어서 인원을 철수시켜라. 나도 곧 따라가겠다.”

“알겠습니다.”

척시림은 머리를 조아린 후 황급히 방을 벗어났다. 악종기는 잠시 허공을 응시하고 있더니 자신도 천천히 방을 빠져 나갔다.


한 사람이 울고 있었다. 평생 남 앞에서 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랑했던 아내가 죽었을 때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던 냉혹한 사람이 지금은 두 뺨이 흠뻑 젖는 것도 모른 채 흐느끼고 있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의 울음은 그 어떤 울음보다 비통하고 처량한 것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그는 평생을 바쳐 왔다. 그 때문에 아내를 잃고, 자식을 잃고, 자신의 과거마저 잃어버렸다. 그런데 이제는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이 한순가넹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니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이름은 초관.

어떤 사람은 그를 일세의 효웅(梟雄)이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희대의 영걸(英傑)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그를 영혼을 잃은 꼭두각시라고도 했다.

그 어떤 말도 옳지 않았지만, 완전히 틀린 말도 없었다. 그는 누군가에에는 효웅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영걸이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그를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울고 있다. 효웅이 되고 싶었지만 꼭두각시가 되고 만 한 남자가 울고 있었다.

울고 있는 초관을 묵묵히 바라보는 한 떼의 인영들이 있었다. 그들의 수는 모두 서른 명. 그들은 초관의 오래된 수하들이었으며, 가장 충직한 수하들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초가보의 몰락을 예견하고 모습을 감추고 있는 이때, 그들은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두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수신대라 불리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제일 선두에는 날렵한 체구에 눈빛이 매서운 중년인이 우뚝 서 있었다. 그의 등뒤에 붉은 색 수실이 매달린 핏빛 창(槍) 하나가 삐죽 삐져 나와 있는 모습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그는 수신대의 대장인 혈화창 우문화룡으로, 초관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우문화룡은 흐느끼고 있는 초관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있었다. 하나 그의 마음속에도 초관과 똑 같은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한참 후에야 초관은 겨우 눈물을 멈추고 고개를 쳐들었다. 우문화룡은 그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랐다. 잠깐 사이에 초관은 부쩍 늙어 버린 것 같았다. 얼굴의 윤곽은 그대로이건만 눈물 젖은 뺨에는 전에 볼 수 없었던 노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초관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깨끗하게 닦았다. 그런 다음 우문화룡을 손짓해 불렀다.

“이리 오게.”

우문화룡은 성큼성큼 그를 향해 다가섰다.

“보주님.”

초관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제 목숨을 바쳐 실행하겠습니다.”

초관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우문화룡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초관의 두 눈은 텅 비어 있었다. 그것은 모든 의욕이 사라진 사람의 눈이었다. 초관은 그런 눈으로 물끄러미 우문화룡을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화아(華兒)를 찾아서 돌보아 주게.”

“보주님…”

“염치없는 부탁인 줄 알지만 자네말고는 그 일을 맡길 사람이 없네.”

우문화룡은 묵구멍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는 간신히 그것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도련님을 찾겠습니다.”

“아마도 그 아이는 서안 일대를 벗어나지 않았을 걸세. 아내의 무덤에 가끔 꽃이 놓여 있는 걸로 보아서 그 아이는 멀지 않은 곳에 있어. 그 아이에게…”

초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미안하다고 전해 주게. 정말 미안하다고…”

“보주님…”

문득 초관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더니 그를 쳐다보았다.

“자네가 나를 따른 지 얼마나 됐지?”

“올해로 이십 년이 되었습니다.”

“오래됐군. 이제는 자네도 어느덧 사십대가 되었군.”

“…!”

“가끔 자네를 만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네. 아마도 지금보다 훨씬 쓸쓸했겠지.”

우문화룡은 억지로 웃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저를 대신하고 있을 겁니다.”

초관은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누구도 자네를 대신할 수 없어. 그래서 늘 고마워하고 있다네.”

우문화룡의 눈자위가 붉어졌다.

“너무 의기소침해하지 마십시오. 비록 이번에는 일이 잘못되었으나 조만간에 다시 재기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야. 내게 주어진 기회는 지나갔네. 자네도 잘 알 거야. 내게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어. 그들은 두 번씩이나 기다려 주지 않아.”

“하지만 보주께서 지금까지 어떤 희생을 치르며 여기까지 왔는지 그들도 뻔히 알 텐데…”

“그들은 인정(人情)에 휩쓸리는 사람들이 아니야. 하지만 그들을 원망하지 않는다네. 그들을 따르느라 아내와 자식도 잃고 성(姓)과 이름마저 잃어야 했지만, 그래도 나는 계속 꿈을 꿀 수 있어서 한편으로는 행복했다네. 자네도 알지 않나? 내가 얼마나 그 꿈을 이루고 싶어했는지를…”

우문화룡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었다가는 무언가 처량한 소리가 나올 것만 같았던 것이다. 초관은 잠시 아련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하늘이 너무 푸르군. 마치 그날 같아.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 그리고 내가 꿈을 꾸기 시작했던 바로 그날…”

우문화룡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릴 듯 파란 하늘이 그의 눈을 찔렀다. 여러 가지 일들이 새록새록 뇌리에 떠올랐다. 우문화룡은 차마 더 이상 하늘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다 흠칫 놀라 짧은 외침을 토해냈다.

“보주님!”

초관은 어느새 입가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주위에 있던 수신대원들이 모두 달려왔다. 우문화룡은 초관의 몸을 안아들었다. 초관은 스스로 심맥(心脈)을 끊었는지 입가로 계속 검붉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보주님…”

초관은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는 우문화룡을 올려보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나를… 예전처럼 불러주지 않겠나? 한 번이라도 좋으니…”

우문화룡은 눈자위를 실룩거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방룡(方龍) 형님…”

“그래… 그 말이 듣고 싶었어. 정말 그리운 이름이야…”

초관은 입가에 미소를 남기고 죽었다. 차갑게 식어 가는 그의 시신을 끌어안은 우문화룡의 눈가에 처음으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늘은 오늘따라 유난히 푸르렀다.


악종기는 빠르게 신형을 움직이고 있었다. 종남파 고수들의 행동은 그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들이 삼로에 파견된 고수들을 모두 쓰러뜨린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 여세를 몰아 단 열 명의 인원만으로 직접 초가보로 쳐들어오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하나 그들의 승부는 멋있게 맞아떨어졌다.

‘정말 멋있다는 표현이 어울리는군.’

악종기의 얼굴에 한 줄기 고소가 떠올랐다. 초가보는 그동안 종남파와의 싸움에서 고수들을 조금씩 허비한데다 남아 있는 대부분의 정예들을 이번에 모두 잃어버려서 막상 본진을 지킬 만한 인원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 중 일류고수는 손에 꼽을 만했고, 절정고수는 오직 천왕도 해청과 우문화룡, 두 사람뿐이었다. 그야말로 절묘하게 허(虛)를 찔린 것이다.

물론 본사의 고수들이 나선담녀 아직도 승산은 있다. 하나 그들은 결코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만에 하나 그들의 신분이 노출된다면 종남파를 무너뜨려 보았자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다.

남다른 야망(野望)을 가진 자를 포섭해서 그를 전면에 내세워 중원에 확실한 교두보를 마련하려는 계획은 이미 오래 전에 세워진 것이었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악종기는 그 계획을 완수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왔다. 하나 마지막 순간에 결국 그는 처참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그 모든 일의 발단이 전혀 신경도 쓰지 않던 몰락한 문파라는 사실을 떠올리자 악종기는 두고두고 입맛이 쓸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신검무적에게 패하고 만 것인가?’

악종기는 후원을 지나 초가보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에 위치한 건물 쪽으로 다가갔다. 그 건물의 지하에는 외부로 통하는 비밀통로가 있었다. 그 비밀통로의 존재는 초가보주인 초관조차도 모르는 것이었다. 비밀통로뿐 아니라 초가보의 곳곳에는 다른 건물로 이동할 수 있는 암로(暗路)들이 여러 개 있었다. 하나같이 초관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처음 초가보를 지을 때 모든 건물을 악종기가 직접 설계했으며, 그의 지시로 세워졌기 때문에 초관은 눈뜬 장님일 수밖에 없었다.

초관의 가능성을 발견한 사람은 밀주였다. 밀주는 초관에게 악종기를 소개했으며, 악종기는 밀주의 지시대로 초관을 절세고수로 둔갑시키기 위해 모진 노력을 기울였다. 완벽한 신분을 만들기 위해서 그의 성과 이름까지 바꾸도록 했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그의 가족을 은밀히 감시했다. 결국 그의 아내는 감시를 피해 도망치다 절벽에서 떨어져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들 또한 초관의 눈을 피해 가출하고 말았다.

하나 초관은 그 모든 일이 벌어져도 눈도 깜박 안 하고 앞으로 달려나가는 일에만 전력을 기울였다. 초관의 그러한 심성을 꿰뚫어 본 밀주의 혜안(慧眼)은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십여 년의 긴 외출은 끝이 났다. 저 문을 열고 건물로 들어서면 소면호리로 살아온 인생의 막이 내려지게 된다. 그리고 액목도찰(額目都察)이라는 본래의 이름과 신분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악종기는 비밀통로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통로 앞에는 일곱 구의 시신이 질펀한 피바다 속에 누워 있었다. 그들 중에는 척시림의 눈을 부릅뜬 시신도 있었다.

“늦었군. 한참 기다렸소.”

등뒤에서 들리는 말에 악종기는 몸을 돌렸다. 검은 옷을 입은 중노인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 노인의 얼굴을 확인한 악종기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만 형(萬兄), 이곳에는 무슨 일이오?”

나타난 사람은 흑령일검(黑靈一劍) 만사홍(萬査洪)이라는 인물이었다. 감숙 일대에서 상당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고수여서 얼마 전에 악종기는 그를 초빙하여 칠대빈객의 비어 있는 자리에 앉힌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이런 곳에 나타나다니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사홍은 악종기와 시선이 마주치자 묘한 웃음을 떠올렸다.

“몰라서 묻는다면 악 총관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미련한 사람이오.”

악종기의 눈빛이 살벌하게 번뜩였다. 그는 한동안 날카로운 눈으로 만사홍을 쏘아보더니 냉랭한 음성을 발했다.

“만사홍, 감히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여 죽음을 재촉하려는 거냐?”

“흐흐… 쓸데없는 일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거요?”

“말장난 할 시간이 없다. 저들은 네가 해치운 거냐?”

악종기가 턱으로 바닥에 누워 있는 시신들을 가리키자 만사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악 총관이 비밀리에 이끌고 있는 부하들이라서 잔뜩 기대를 했는데 실력들이 하나같이 형편없었소. 내 일검을 제대로 받아내는 자들이 없었으니까.”

악종기의 눈빛이 한층 더 강력해졌다. 그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모습이더니 이내 만사홍을 쏘아보았다.

“너는 진짜 만사홍이 아니구나. 그의 실력으로는 저들을 일검에 죽이지 못한다.”

만사홍은 히죽 웃었다.

“내가 만사홍이 아니면 누구겠소?”

“이제부터 그걸 알아볼 생각이다.”

악종기는 품속에서 하나의 자(尺)를 꺼내 들었다. 그가 꺼낸 자는 길이가 두 자쯤 되었는데, 전신에 은은한 혈광(血光)이 흐르고 있어 절대 평범한 물건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 자를 본 만사홍의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오! 악 총관이 서장(西藏) 천룡사(天龍寺)의 기보(奇寶)라는 응혈척(凝血尺)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소. 정말 악 총관은 재주가 많은 사람이오.”

악종기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렸다.

“너는 누구냐? 어떻게 응혈척을 알고 있느냐?”

“나는 만사홍이라니까. 악 총관이 직접 나를 면접해서 칠대빈객에 앉히고도 잊어버렸소?”

악종기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네 진실한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응혈척을 알아본 이상 네가 갈 길은 정해져 있다.”

악종기의 손에 들린 응혈척에 점차 은은한 혈광(血光)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보는 이를 섬뜩하게 할 만큼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하나 만사홍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오히려 턱으로 그의 등뒤를 가리켰다.

“악 총관의 솜씨를 직접 보고 싶지만 아쉽게도 악 총관의 상대는 내가 아니라 저 사람이오.”

악종기는 흠칫 놀라 몸을 돌렸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의 뒤에는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앙상하게 마른 몸에 위태할 정도로 커다란 키, 그리고 유난히 고적한 눈빛이 시선을 끌었다. 그의 특이한 모습을 보자 악종기의 얼굴이 칠흑으로 변했다. 그 사내는 악종기와 시선이 마주치자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마침내 만났군.”

악종기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신검무적?”

“바로 나요.”

악종기의 몸이 한차례 떨렸다. 그는 눈을 질끈 감더니 이윽고 다시 눈을 떴다. 그때는 몸의 떨림도 멈춰 있었다. 악종기는 한숨을 불어 내쉬고는 진산월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진산월은 그가 자신의 전신을 훑고 있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잠시 후에 악종기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탄식을 내뱉었다.

“정말 잘 닦인 몸이오.”

“칭찬으로 듣겠소.”

“물론이오. 이 세상에서 누가 감히 신검무적에게 농(弄)을 걸 수 있겠소?”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악종기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동안 당신의 소문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소. 그래서 늘 당신이 어떤 모습을 일지 궁금해하고 있었소.”

“직접 보니 어떻소?”

“기대 이상이오. 그분 같은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 줄은 몰랐소.”

진산월의 눈에 처음으로 기광이 반짝였다.

“그분이 누구요?”

악종기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하고 싶지 않소.”

진산월은 의외로 더 이상 그를 추궁하지 않았다.

“당신 배후에 있는 누군가겠지.”

악종기의 몸이 한차례 움찔거렸다.

“만약 그런 자가 있다면 지금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소. 언젠가는 반드시 만나게 될 테니까.”

악종기는 침묵을 지켰다. 어떤 할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진산월은 양손을 늘어뜨린 채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당신과 본파와의 질긴 악연(惡緣)은 이쯤에서 끝내고 싶소. 준비하시오.”

정말 간단명료한 말이었다. 악종기는 문득 이것도 멋지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불필요한 말을 질질 끄는 것보다 얼마나 확실하고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가? 어차피 그들 사이에 다른 해결책은 없는 것이다. 악종기는 수중의 응혈척을 힘껏 움켜잡았다. 상대의 검법이 얼마나 가공스러운지는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지만, 응혈척의 이점을 잘 이용한다면 자신에게도 승산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며 차가운 공기가 휘몰아쳤다. 먼저 움직인 사람은 악종기였다. 악종기의 몸이 한차례 흔들리자 그의 수중에 있던 응혈척에서 시뻘건 무언가가 툭 튀어나와 진산월에게 쏘아져 갔다. 그것은 누구도 예상 못한 광경이었다.

그것은 무형의 강기(?氣)를 유형화(有形化) 할 수 있는 응혈척이 만들어 낸 신비한 현상이었다. 그 유형의 강기는 금강동인(金剛銅人)이라고 파괴해 버리는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순간 진산월은 출수를 했다.

팟!

눈부신 섬광이 찬연히 피어올랐다.

까깡!

놀랍게도 검광과 부딪친 유형의 강기가 마치 물방울처럼 흩어져 사방으로 비산(飛散)되었다. 그와 함께 진산월의 몸은 그 흩어진 물방울을 뚫고 앞으로 전진했다. 악종기의 두 눈에 무섭게 피어오르는 검의 구름이 가득 들어왔다. …

악종기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의외로 상처는 단 한곳뿐이었다. 정확히 심장 위. 그토록 가공할 위세로 몰려오던 구름이 막상 그의 몸에 닿으려는 순간, 단 한 줄기의 빛살로 변해 버린 것이다. 악종기로서는 막고 싶어도 막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악종기는 불쑥 물었다.

“그냥 베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텐데 왜 굳이 일검(一劍)으로 줄인 거요?”

진산월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악종기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툴툴거렸다.

“강호의 예의(禮意)라는 건가? 아무튼 덕분에 깨끗한 시체를 남길 수 있게 되었으니 고맙다고 해야겠지…”

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미끄러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신음도 없고 요란한 소리도 내지 않는 조용한 죽음이었다.

진산월은 악종기의 시신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만사홍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제 그 보기 싫은 면구(面具)를 벗어 버리게.”

만사홍은 몸을 움찔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

“세상에 몇 안 되는 친구를 몰라볼 정도로 내 눈은 어둡지 않네.”

만사홍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재미없군. 장난 좀 치려고 했더니. 과거의 자네였다면 좀더 장단을 맞춰 주었을 거야.”

만사홍은 오른손으로 슬쩍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자 늙수그레한 중늙은이의 모습은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마검 조일평의 준수한 얼굴이 나타났다. 진산월은 조일평의 얼굴을 생전처음 보는 사람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조일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나?”

“자네를 어떻게 혼내 줄까 고민하고 있는 중일세.”

“그게 무슨 말인가?”

진산월은 신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뚫어지게 주시했다.

“본파의 일에 개입하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굳이 자네는 신분을 속이면서까지 초가보에 잠입했네. 그것도 모자라 알아낸 정보를 우리에게 전해 주기 위해 사제(師弟)까지 동원했지. 내가 그런 일을 좋아하리라고 생각하나?”

어젯밤에 진산월을 찾아온 인물은 조일평의 사제인 풍시헌이었다. 조일평은 피식 웃었다.

“누가 자네 때문에 그런 줄 알나? 나도 솔직히 초가보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고 싶었네. 그런데 그들이 내가 자네와 친분이 있는 줄 알기 때문에 잠시 신분을 바꾸었을 뿐일세. 그리고 내 사제가 자네를 찾아갔다고? 그 녀석이 어디에 가건 내가 알 게 뭔가? 아마 심심해서 산책이라도 갔던 거겠지.”

“그럼 악종기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그를 막아선 다음 나를 이곳으로 부른 건 뭐라고 핑계 댈 텐가?”

조일평은 딱 잡아뗐다.

“난 그런 적 없네.”

“정말 이럴 건가?”

“내가 어때서? 난 그저 누가 초가보를 공격해 왔다고 해서 싸움에 휘말리기 싫어 이곳에 잠시 피해 있었을 뿐이네.”

조일평은 악종기의 시신을 처음 본 사람처럼 경호성을 터뜨렸다.

“엇? 여기에 시체가 있군. 자네가 죽인 건가?”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 통로의 입구에 있는 시체 더미를 가리켰다.

“저기는 아예 무더기로군. 자네 정말 솜씨 한번 잔인하군.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니 말이야. 그러다 자칫하면 마검(魔劍) 소리를 듣는 수가 있으니 조심해야 할 걸세.”

조일평은 진산월이 무어라고 입을 열지 두려운 듯 그 말만 하고는 휑하니 몸을 돌려 멀어져 갔다. 진산월은 한동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자신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엷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꽃망울은 맑았다. 금시라도 봉오리를 터뜨릴 듯 영롱한 빛을 띠고 있었다. 낙일방은 한동안 그 꽃망울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 고개를 쳐들었다. 멀지 않은 꽃밭 속에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낙일방은 그를 향해 다가갔다.

“일어나셨습니까?”

그 사람은 그를 힐끗 돌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몸은 괜찮으냐?”

낙일방은 자신 있는 미소를 흘렸다.

“공력이 거의 구 할(九割) 이상 회복되었습니다. 이제는 다시 예전처럼 움직일 수 있습니다.”

“다행이구나.”

“소 사형과 방 사매도 모두 건강합니다. 다만 응 사형은…”

낙일방의 얼굴이 조금 시무룩해졌다.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계성은 잘 적응하고 있다. 한쪽 다리가 불구가 되었다고 해서 고수가 될 수 없는 것도 아니지. 마침 취아가 그를 위해 한쪽 다리로만 움직일 수 있는 신법(身法)을 만든다고 하니 기대해야겠다.”

낙일방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렇군요. 방 사매가 소 사형의 짝이 되더니 그런 일도 하는군요.”

진산월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낙일방은 멍하니 그 미소를 보고 있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장문사형도 좀더 자주 웃으세요. 웃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습니다.”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두 사람은 가만히 서 있었다. 문득 낙일방이 가까이에서 꽃망울을 터뜨리는 꽃 한 송이를 집어 들었다.

“봄이 오려나 봅니다. 하나둘씩 꽃이 피고 있어요.”

진산월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난 겨울의 추위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청량한 공기에 꽃향기가 섞여 있었다.

“그렇군. 벌써 봄이로군.”

진산월은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다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입춘(立春)이 지나면 중원으로 가자.”

낙일방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사매를 데리러 가야겠다.”

낙일방의 눈자위가 실룩거렸다. 그는 눈이 시뻘게진 채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사저도 무척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진산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짙은 꽃향기가 파란 하늘까지 올라가는 것 같았다. 그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은 누군가의 얼굴을 연상케 했다. 두 사람은 그 구름을 바라본 채 언제까지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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