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6권 13화 – 또다시 마왕이 강림한 건가?
또다시 마왕이 강림한 건가?
월터 일행은 지금껏 다이아나를 따라 함께 이동하고 있던 상인들과 헤어졌다. 그들과 함께 이동하는 게 별 득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루라도 빨리 도시국가에 도착해서 분위기를 살펴보고 싶은데, 상인들과 함께 이동해서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게 된다.
월터 일행은 준비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도시국가 연합을 향해 출발했다.
마음이 급하긴 했지만, 사막을 통과할 때와 달리 이번에는 경로상에 있는 모든 오아시스 성읍들에 들리기로 했다.
전에는 물과 식량을 보충할 때 외에는 오아시스 성읍에 들리지도 않았으며, 설혹 들렸다 하더라도 보충이 끝나는 즉시 출발했었다. 그 때문에 사막 부족들의 분위기가 어떤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자신들이 뭘 놓치고 있는지 깨달은 이상,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수는 없다.
그랬기에 아직 식량과 물이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사막 위에 조성되어 있는 성읍이 보이자마자 월터 일행은 그쪽으로 달려갔다. 사막 중심부에 비해 물과 풀이 풍부한 지역인 만큼, 무역로에 위치해 있는 성읍에 비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규모가 꽤 커 보였다. 성벽 밖에 외지인을 위한 숙소가 지어져 있는 것도 보였다.
다른 나라와 달리 여행객들을 위한 숙소가 성밖에 지어져 있는 이유는, 가급적 외지인을 성안으로 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단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도적떼일 수도 있지 않는가.
그렇기에 이렇듯 숙소를 밖에 지어두고, 성벽 안으로 들어오고 싶은 사람이나 가축은 그 숫자만큼의 통행세를 받았다. 그리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성 안으로 들어온 외지인은 어두워지기 전에 다시 성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여행객들 입장에서도 성 밖이긴 해도 시원한 잠자리를 제공 받을 수 있었기에 그다지 불만은 없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사막을 횡단하는 여행객들은 뜨거운 햇볕을 피해 밤에 이동하고 낮에 쉰다.
구덩이를 파던지, 천막을 치던지 해서 노숙을 하는 것에 비한다면 이건 호화로운 잠자리라고 봐야 했다.
그리고 필요하면 성안에 들어가서 물품을 구입할 수도 있는 데다, 만약 위급한 일이 생기면 성안으로 들어가 주민들과 함께 싸우거나, 설혹 그들이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성을 의지해서 싸우면 된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이익인 것이다.
이전에 사막을 통과했을 때는 상인들만 보급을 위해 성 안으로 들어갔을 뿐, 월터 일행은 성 밖 숙소에서 휴식을 취했었다. 그 때문에 성내의 분위기가 어떤지 살펴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부러 성 안으로 들어갔다.
파벨이 원주민들의 말을 할 줄 알았기에, 그녀에게 안내를 맡겼다.
성문은 커다란 마차가 들어갈 때만 큰 대문을 열고, 평상시에는 옆에 있는 작은 쪽문만을 열어둔다.
쪽문을 통과하면서 보니, 성벽 두께가 4미터는 족히 되었다.
이 정도라면 비록 진흙 벽돌로 만들긴 했지만, 어지간한 몬스터의 공격쯤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밖에서 봤을 때는 몰랐는데, 안으로 들어와 보니 지금껏 그들이 봐왔던 성읍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든 건물이 성벽에 바짝 붙어 지어져 있다.
이건 성벽을 강화하는 효과도 있을뿐더러, 이로 인해 중앙에 생긴 넓은 광장에 가축들을 보관할 수 있었기에 이런 형태로 성을
건설한 것 같았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색다른 주거 형식에 모두가 호기심 어린 눈길로 주위를 둘러본다.
그들 일행은 현지 상인을 찾아 식량과 물품들을 구입한 뒤 은근슬쩍 주변 분위기는 어떤지 물어봤다.
“급한 일정이 아니시라면 몬스터의 준동이 좀 잦아진 후에 떠나시길 권합니다. 요즘 들어 워낙 몬스터들의 습격이 심해져서……”
상인의 말로는 며칠 전에도 양떼를 끌고 나갔던 사람 하나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양떼를 몰고 나간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그 사람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그가 끌고 나갔던 숫자의 1/3 정도의 양떼만을 찾았을 뿐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양떼, 그리고 남아있는 흔적으로 미뤄보아 바위도마뱀의 습격을 받은 것 같다고 했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마치 바위처럼 보인다고 해서 바위도마뱀이라 불리는 이 무시무시한 몬스터는 엄청난 덩치를 지닌 괴수였다. 마을 하나 정도는 간단히 먹어 치울 정도다.
그런 괴수가 성읍 주위에 나타났는데도 아직 사람 하나 실종된 피해만으로 끝났다는 건 정말 천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는 사막 변두린데도 바위도마뱀 같은 몬스터가 출몰하는 모양이죠?”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죠. 그런데 요 근래는 간혹 나타나고 있기에 모두들 경계에 만전을 기하고 있는 중 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사막지역의 몬스터는 수십, 수백씩 떼를 지어 습격해 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식량 부족으로 인해 무리를 늘리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납품해야 할 기일이 촉박해서 말이죠.”
“아무리 그래도 목숨만 하겠습니까?”
월터는 상인에게 고마움을 표시한 뒤, 또 다른 현지인 몇 명과 대화를 나눠보았다.
그런데 그들이 하는 말은 거의 비슷했다. 모두 급한 일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 상황이 안정된 후에 사막을 건너라는 거였다. 그 외에는 월터 일행의 흥미를 끌 만한 정보는 없었다.
페가수스 용병단과 함께 행군하던 아르티어스는 문득 이상한 기운을 느낀 뒤 고개를 갸웃하며 사막 저쪽 지평선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느껴져서는 안 될 기운을 느낀 것이다. 부정(不淨)한 기운. 예전에 대마왕 크로네티오가 지배하던 크라레스에서 느껴지던 기운하고는 또 다르다.
크로네티오의 기운이 보다 사악하고 패도적이었다면, 사막 저편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뭔가 암울하면서도 끈적한 불쾌감을 더하고 있었다.
‘또다시 마왕이 강림(降臨)한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르티어스는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왕급이 지상에 강림한다는 게 그리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대마왕급이었던 크로네티오가 강림하는 데 성공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다른 마왕이 강림할 수가 있겠는가. 확률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 티투스 대사막은 드래곤 중에서도 최강이라는 실버 일족의 입김이 강한 지역이다.
설혹 마왕이 몰래 강림하는 데 성공했다손 치더라도, 실버 일족이 그놈을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뭐지? 늪지대도 아니고, 사막지대에서 이런 부정한 기운이 생긴다는 얘기는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는데……… 아르티어스는 슬쩍 고개를 돌려 신관의 눈치를 살폈다. 이런 부정한 기운을 파악하는 건 신관의 전문 분야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병단에 소속된 신관들의 등급이 낮아서 그런지, 자신이 느낀 부정한 기운을 감지한 신관은 없는 듯 보였다.
아르티어스는 곧바로 브로마네스를 호출했다.
“통신 괜찮냐?”
「아, 괜찮아. 이 시간에 통신이라니…, 무슨 일인데 그래?」
“너, 남쪽에서 이상한 기운 느끼지 못했냐? 아주 끈적하면서도 불쾌하기 짝이 없는
걱정스런 아르티어스에 비해 브로마네스는 별것 아니라는 듯 쾌활하게 대답했다.
「난 또 뭐라고. 아마 사막폭풍에 동물들이 떼 몰살이라도 당한 거겠지. 원래 그런 죽음의 기운은 이런 사막하고 잘 어울리는 거잖아.」
“그렇긴 한데…………. 하지만 늪지대도 아니고, 이렇게 건조한 사막에서 장기(氣)라니, 말이 안 되잖아?”
「쯧쯧, 자네가 걱정할 거 없다네, 친구. 저 남쪽 바다는 실버 놈들의 영역이야. 뭔가 이상한 게 생겼다면 그놈들이 가만히 놔뒀겠나? 딴 건 몰라도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당하는 건 절대로 못 참는, 속 좁은 놈들인데 말이지.」
“그건 그렇지만…….”
「아, 바위도마뱀이다. 흐흐, 호비트 몸이다 보니 제법 사냥할 맛이 나겠는데? 엄청 크네! 친구, 나중에 얘기하세. 내가 지금 바빠서……………」
‘에구, 멍청한 놈. 이제 갓 유희에 나선 어린놈도 아니면서, 바위도마뱀 따위에 저렇게 정신을 못 차리다니……………
속으로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아르티어스는 브로마네스의 의견이 맞다고 생각했다. 사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서도 찜찜한 마음은 가시지를 않았다.
“타이탄을 수령해 왔습니다. 조장님.”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훈련용 저급 타이탄을 부조장인 에릭 라이너가 수령해 온 모양이다.
“타이탄의 등급은?”
“카투사요. 그것밖에 없답니다.”
“젠장, 좀 더 괜찮은 타이탄으로 배정해 달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거늘…”
라이놀 페리가 짜증을 내는 건, 보급창에 있는 타이탄들 중에서 카투사급이 가장 덩치가 작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검에 뜻을 둔 사내치고 타이탄에 로망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걸 잘 알고 있기에 라이놀은 라이에게 타이탄에 탑승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은혜를 베풀려고 했던 것이다.
이왕 은혜를 베풀 거면 보다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최대한 큰 걸 달라고 보급창 관리에게 부탁해 놨었다.
그런데 그사이 어떤 놈인지 먼저 가져가 버린 모양이다.
“어쩔 수 없지. 꺼내놔 봐.”
조장 라이놀과 부조장 에릭이 대화하는 것을 옆에서 듣고 있던 라이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선배 조원인 알렌에게 물었다.
알렌이 323정찰조에서 가장 지위가 낮은 조원이었기에 모르는 게 있으면 그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알렌 선배, 타이탄도 빌려올 수 있습니까?”
“당연하지. 기사단의 모든 기사들에게 타이탄을 다 지급할 수는 없으니, 이런 식으로 돌려가며 훈련을 시키는 거야. 사실 타이탄 훈련은 말로 가르쳐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알렌은 신성 아르곤 제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런 방식으로 타이탄 훈련을 시킨다고 했다.
아르곤의 경우는 타이탄이 워낙 귀하기에 창고에 보관해 둘 만한 여분이 없었다. 그래서 아예 교도기사단(敎導騎士團)이라는 걸 조직한 뒤 그곳에 저급 타이탄을 집중 배치해 아직 타이탄을 배정받지 못한 고참 성기사들을 교육시킨다고 한다.
“나와라!”
에릭의 명령에 따라 갑자기 공간이 갈라지며 거대한 금속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등장부터가 라이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저런 거대한 강철구조물이 허공에서 갑자기 튀어나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난생처음 보는 타이탄은 엄청난 위압감을 라이에게 안겨줬다.
어지간한 집 높이의 타이탄은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야 두부(頭部)가 보일 정도로 컸으며, 두꺼운 갑주로 중무장한 두툼한 덩치로 인해 훨씬 더욱 크게 느껴졌다.
몸통이 엄청 굵고 두꺼운 데 비해 다리는 짧고 팔이 좀 길다. 완벽한 고릴라형 체형이다.
오른손에는 검을, 왼손에는 커다란 원형 방패를 쥐고 있었는데 방금 만들어진 것처럼 깨끗했고 작은 흠집조차 없이 반들거린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타이탄에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라이를 보며 라이놀은 씨익 미소 지었다.
라이의 표정을 보니 굳이 더 큰 타이탄을 빌려올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 같았으니까.
“어때? 타이탄을 처음 보는 감상은?”
“정말 굉장합니다. 이렇게 멋있는 건 처음 봤어요.”
“그렇게 홀린 듯 바라보는데 미안한 말이지만, 이건 정말 오래된 퇴물 타이탄이야. 보급창에 보관되어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등급이 낮은 녀석이지.”
퇴물 타이탄이라는 말에 라이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퇴물이라고요?”
“그래. 이 카투사급 타이탄은 사백 년쯤 전에 생산된 거야.”
“와아~, 사백 년 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완전 새것처럼 보이는데………”
“그건 당연하지. 타이탄은 자가수복이 가능해. 타이탄의 생명의 핵심은 좌석 밑에 위치해 있는 마법엔진 엑스시온이야. 엑스시온은 깨어나는 그 순간 본체의 형태를 기억한다고 해. 그렇기에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또 전장에서 타이탄의 일부분이 파손되더라도 엑스시온만 멀쩡하다면 처음 만들었던 그 모습으로 돌아갈 수가 있는 거지.”
“세상에…….”
“타이탄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형태로 만들어지고 발전해 왔지. 카투사급은 초기 형태의 타이탄 중 하나야. 출력이 0.3 정도
밖에 안 되지만, 덩치가 아주 작고 가볍게 만들어져 있기에 꽤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지. 그 때문에 폐기되지 않고 살아남아 훈련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거지만 말이야.”
라이는 어이가 없었다. 거의 4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데…………
“이게…, 덩치가 작은 거라고요?”
“출력 1.0, 어깨까지의 높이 5미터, 무장을 뺀 본체 무게 80톤을 기본형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게 이미 200년도 더 됐어. 각 국가가 자랑하는 고성능 타이탄은 그보다 훨씬 더 커. 근위 타이탄인 카오스급은 어깨높이 5.5미터, 출력 1.7, 전투중량이 100톤이나 되는 괴물이라고 들었지. 그런 카오스에 비하면 카투사는 난쟁이나 다름없지.”
라이놀의 설명에 라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다른 건 대충 알아듣겠는데, 출력이라는 건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아, 예전에는 엑스시온이 증폭해낼 수 있는 순수한 출력으로 그 성능을 표시했던 적도 있었다고 해. 하지만 마법사도 아닌 사람들이 평균 출력 몇천만 기간트라, 순간 출력 몇백억 기간트라니 해봐야 알아들을 수 있을 리 없잖아. 그래서 엑스시온의 표준 출력이란 걸 정의한 거지. 방금 전에 말했던 어깨높이 5미터, 무게 80톤의 타이탄을 탑승자가 움직일 수 있는 동급의 속도까지 가속할 수 있는 출력을 내는 걸 1.0으로 하자고 말이야. 그 이후로 모두들 그러려니 하면서 이 단위를 쓰고 있는 중이야. 마법에 대해서 전혀 몰라도 대충 알아들을 수 있거든. 1.0 출력이면서 무게가 100톤이라면 느리겠구나. 그 반대로 70톤이면 빠르겠네 하는 식으로. 알겠냐?” “예. 그건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저 덩치가 탑승자하고 비슷한 속도로 움직인다고요?”
라이는 경악했다.
마나를 운용할 수 있게 된 후, 그가 움직일 수 있는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졌다. 그런 엄청난 속도를 저 강철덩어리가 낼 수 있다니. 정말 상상이 가지를 않았다.
“그 정도 속도도 내지 못해서야 어떻게 타이탄이 전장의 최종병기 소리를 들을 수 있겠나? 타이탄의 표면을 잘 봐봐. 희미하긴 하지만 뭔가 울퉁불퉁한 그림을 그려놓은 것 같은 게 보이지?”
“예.”
“그게 대마법주문(對魔法呪文)이거든. 엑스시온과 연동되어 타이탄을 마법으로부터 지켜주기에 마법으로는 타이탄을 파괴할 수가 없게 되는 거지. 타이탄은 오로지 타이탄으로밖에 상대할 수 없어. 그 때문에 성능이 떨어지는 저런 타이탄들은 보다 높은 성능의 타이탄이 개발될 때마다 몽땅 다 녹여서 재생산될 수밖에 없는 거고 말이야. 타이탄 한 기에 들어가는 귀금속 양이 워낙에 엄청나다 보니, 재활용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거든.”
라이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타이탄 안에 얼마나 많은 귀금속이 들어가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겉에 보이는 저 쇳덩이만 녹여도 수없이 많은 무기와 갑옷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건 안다.
“그럴 수밖에 없겠네요.”
“그런 이유 때문에 이런 저급 타이탄은 세상에 거의 남아있지 않지. 문제는 우리들 같이 개인용 타이탄을 지급받지 못한 기사들에게 있어. 타이탄과의 계약은 그리 쉽게 계약과 해지를 번복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렇다 보니 다른 사람의 타이탄을 빌려서 쓸 수도 없고, 저런 저급 타이탄은 아무나 주종계약을 맺어주긴 하는데 급이 떨어진다고 몽땅 다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그나마 우리나라나 되니까 저런 타이탄을 다수 창고 안에 보관해 두고 훈련용으로 쓰는 거야.”
“그렇군요.”
“저 녀석을 포함해서 총 17기가 창고에 보관되어 있긴 하지만, 훈련을 하려면 여간 경쟁이 치열한 게 아니야. 제도 주변에 있는 모든
기사단이 공용으로 쓰는 거니까 말이지. 내가 너 때문에 저 녀석 빌려온다고 꽤나 고생했으니 감사하게 생각하라구.”
라이놀은 라이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설명은 여기까지 하고, 직접 탑승을 해보자. 그게 이해가 빠를 테니까.”
고개를 돌린 라이놀은 에릭에게 지시했다.
“주종관계를 해제해.”
그러자 에릭은 타이탄을 향해 말했다.
“쟈디렌, 주종관계를 해제하고 싶다.”
라이는 기대감을 안고 귀를 바짝 곤두세웠지만 들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기야 저런 강철덩어리가 말을 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한순간 기대한 자신이 멍청하게만 느껴졌다. 바로 그때, 라이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이, 이번에는 자네가 쟈디렌에게 말해봐. 주종계약을 맺고 싶다고 말이야.”
“제가 말입니까?”
“당연하지. 이제 슬슬 자네한테도 타이탄에 대한 교육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해서 빌려 온 거야. 자, 어서 해봐.”
라이놀의 말에 라이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다니.
그런 마음이 있었기에 라이는 상관의 지시에 따라 강철 인형에 대고 말을 걸 수 있었다. 물론 속으로는 쇳덩어리에 대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긴 했지만.
“쟈디렌, 너하고 주종계약을 맺고 싶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이번에는 강철인형으로부터 대답이 들려왔다.
「이제부터 그대와 나는 태고적부터 내려오는 고렘의 맹약에 따라 주종이 되었다. 내 이름은 쟈디렌이다. 그대의 이름은?」
사람의 목소리와는 다른 독특한 음색이었는데, 꽤나 큰 소리였다.
방금 전에 에릭과 나누는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큰.
그렇다면 타이탄의 목소리는 계약을 맺는 당사자인 자신의 귀에만 들리는 것일 거라고 라이는 생각했다.
감정이 배제된 거친 쇳소리와 같은 목소리였지만, 저 강철인형이 말을 했다는 것 그거 하나만으로도 그저 감격해하는 라이였다. “내 이름은 라이, 라이 위너스야. 잘 부탁해.”
계약을 위한 이름을 말하면서 라이는 이곳 기사단에서 새로운 신분증을 만들 때 자신의 진명으로 한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라이 로티넨이나, 아니면 촌장 아들 이름으로 했다면 어쩔 뻔했겠는가.
하지만 곧이어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방금 전에 타이탄이 말했던 말의 어순이 좀 이상했다는 게 떠올랐던 것이다.
타이탄은 먼저 주종관계가 성립되었다는 걸 선포했다. 그런 다음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고, 주인이 될 사람의 이름을 물었다.
어쩌면 이름 따위는 주종계약에 있어서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종관계를 맺자 라이놀이 옆에서 말했다.
“타이탄과 계약을 맺은 후에는 공간의 저편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가 필요할 때만 불러내서 사용할 수 있지. 그건 정말 편리해. 그게 아니라면 이 엄청난 덩치를 운반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 테니 말이야. 저렇게 작아 보여도 중량은 엄청 무겁거든? 마차 같은 걸로는 어림도 없지.”
“정말 신기하네요. 그런데, 이런 대단한 타이탄과의 계약치고는 너무 어설픈 거 아닙니까? 겨우 말 몇 마디로 계약이 이뤄진다니 허탈하기도 하고…….”
라이의 말에 라이놀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핫, 원래 타이탄과의 주종계약이라는 게 이렇게 쉬운 건 아니야. 고성능 타이탄일수록 자아가 강해서 말을 안 듣거든. 그래서 스스로 주인을 고르지 못하도록 미스릴을 입혀 시야를 막아버리지. 하지만 이런 저급 타이탄은 자아가 약해서 미스릴을 입히지 않아도 어지간하면 사람의 명령을 다 받아 줘. 더군다나 이 녀석은 사백 년 전에 만든 뒤로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계약을 맺고 또 해제해 왔지. 그래서 계약의 최소 요건만 갖추고 있다면 하루에 몇십 번이라도 계약과 해제를 반복해 주는 거야. 으레 그렇거니 하면서 말이야.”
“최소 요건이 뭡니까?”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자, 이해가 되냐?”
“아…….”
“자네가 나중에 제대로 된 타이탄을 지급받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타이탄도 이럴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 계약은 장난이 아니니까 말이야.”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이제 탑승해 봐야지. 쟈디렌보고 머리를 열라고 해.”
“쟈디렌, 머리를 열어봐.”
라이놀의 말 대로 명령을 내리자마자 철커덩하며 타이탄의 머리 부분이 뒤로 젖혀졌다.
사람의 머리를 저렇게 뒤로 확 꺾으면 살아있을 수가 없겠지만, 타이탄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하기야 대화를 할 수 있고 움직인다고 해서 생명체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뭐 하고 있어? 라이, 어서 올라가서 앉아봐.”
라이는 펄쩍 뛰어올라 쟈디렌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과연, 꺾여진 머리 안쪽에는 의자가 놓여있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아마 여기에 앉는 모양이다.
위에 올라가서 보니 탑승자가 얼마나 강력하게 보호되는지 알 수 있었다.
좌석은 목 아래에 위치해 있고, 커다랗게 솟아올라 있는 좌우 어깨, 그리고 앞뒤로 장갑판이 좌석을 감싸고 있었다. 정말 안전해 보인다.
하지만 너무 좁았다. 더구나 뒤로 젖혀져 있던 머리까지 제 위치로 돌아온다면 그야말로 빛 한 점 새어 들어오지 않는 완벽한 어둠이 될 텐데, 저 안에 앉아서 버틸 수가 있을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라이는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어둠에 대한 공포보다 타이탄을 조종한다는 유혹이 그만큼 강했던 탓이다.
라이가 좌석에 앉자 머리 부분이 스르륵 움직이더니 철컹하며 원상태로 돌아왔다.
머리가 원상태로 되는 순간 코앞도 분간하기 힘든 암흑이 될 거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눈앞이 밝아지며 주위가 훤히 보인다.
곧이어 라이는 시야의 각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은 자신의 시야가 아니라 타이탄의 시야였던 것이다.
동료들이 저 아래쪽에 서 있는 건 신기한 느낌이었다.
그가 고개를 돌림에 따라 시야가 옆쪽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 타이탄의 머리 역시 라이의 행동과 똑같이 옆쪽으로 천천히 회전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때 밖에서 라이놀의 음성이 들려왔다.
“라이! 머리 바로 하고 아래쪽을 내려다봐. 우리들이 보여?”
“예.”
“주종관계가 맺어진 후부터 타이탄이 보는 걸 자네가 볼 수 있고, 타이탄이 느끼는 걸 자네가 느낄 수 있어. 그리고 타이탄을
조종해서 어지간한 움직임은 다 실현해낼 수 있지. 일단 오늘은 시승이니까 간단한 움직임부터 시작해보자. 자, 먼저 손부터 움직여 봐. 천천히!”
좌석 앞쪽에 손잡이 같은 게 있어 잡아 보긴 했지만, 그건 그냥 몸 중심을 잡기 위한 손잡이일 뿐이었다.
아무리 이리저리 힘을 줘봐야 꼼짝도 하지 않는다.
“어떻게 움직이죠?”
“지금 타이탄과 자네는 정신으로 연결되어 있는 거야. 타이탄의 손을 움직인다고 생각해봐. 천천히.
시키는 대로 해보자 타이탄의 손이 움직이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곧이어 시야에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타이탄의 손이 보였다.
순간 자신이 이 거대한 타이탄을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에 라이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우, 움직입니다. 움직여!”
“잘했다. 그렇게 하는 거야. 이번에는 걸어봐. 천천히, 한발 한발 움직이는 거야. 천천히…….”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라이가 그날 타이탄을 타고 조작한 가장 고난이도의 움직임은 달리기였다. 마음 같아서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몇 발자국 채 뛰지도 못하고 다리가 꼬이며 자빠져 버렸다.
천천히 움직일 때는 몰랐는데, 일단 달리기 시작하자 타이탄의 균형이 왼쪽으로 확 기우는 걸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거 뭔가 이상해요? 달리니까 타이탄이 왼쪽으로 기우는 것이……………”
너무 오래돼서 고장이 났거나 혹, 불량품이 아니냐는 의문에 라이놀은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해 주었다.
“핫핫, 잘 생각해봐. 타이탄의 무장은 좌우가 달라. 왼쪽은 무거운 방패, 오른쪽은 가벼운 검이지. 특히 이 녀석은 장갑 두께가 얇은 걸 보충하기 위해 더욱 크고 무거운 방패를 들고 있거든. 그래서 균형 잡기가 좀 어려울 거야.”
탑승할 때 봤던 전·후면 장갑판의 두께를 생각하면 기절할 정도로 두꺼웠는데, 그게 얇은 거였다니. 도저히 믿기 힘든 얘기였다.
“그럼 어떻게 조종하면 되는 겁니까?”
라이놀은 피식 웃은 뒤 쟈디렌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사람이 타이탄의 거체를 전적으로 컨트롤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야. 이때 필요한 게 바로 쟈디렌의 존재지. 쟈디렌은 자아가 약해. 그런 만큼 주인의 뜻대로 그대로 따르려고 하는 습성이 있어. 자네가 겨우 그 정도밖에 속도를 내지 않았는데도 자빠진 건 그 때문이야. 쟈디렌에게 보다 폭넓은 자유를 줘봐. 몸을 스스로 움직이도록 하고, 그 움직임의 방향만을 네가 제어하는 거야. 자기 몸은 누구보다 쟈디렌 자신이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오호, 그렇게 조종하는 거였군요.”
“아니, 그건 쟈디렌 같은 저급 타이탄이 가진 특수성이야. 타이탄의 성능이 올라갈수록 그 자아도 강해진다고 했지? 상위급 타이탄들 중에는 주인의 명령을 듣지 않는 것들도 있다고 하더군. 주인이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제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거야.”
“그런 경우는 어떻게 하죠?”
아직 자신만의 타이탄을 지급받지도 못한 라이놀이 그걸 알 리가 없다. 하지만 그는 슬쩍 말을 돌려 대답했다. 라이가 자신을 얕보게 만들 수는 없었으니까.
“뭐, 그걸 지금 알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타이탄의 조종은 타이탄과 주인과의 교감이라는 거야. 모든 걸 주인이 다 컨트롤 하려고 해도 안 되고, 타이탄에 끌려가도 안 된다는 거지. 앞으로 쟈디렌 말고도 다른 여러 타이탄들을 탑승해 보겠지만, 그것만 잊지 않는다면 타이탄 조종의 요령을 빠른 시간 내에 터득할 수 있을 거야.”
“조언 감사드립니다.”
“뭘. 혹시라도 전쟁이 벌어지게 되면 우린 서로의 등을 맡겨야 될 사인데, 아는 건 모두 다 가르쳐 줘야지. 결국 나중에 나 좋자고 하는 거야. 동료들의 실력이 좋아질수록 내가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지는 거니까. 혹, 나중에 자네 후임이 들어오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때는 자네도 잘 가르쳐 주도록 해. 그게 자네가 선배들에게 아낌없이 가르침 받은 것에 대한 보답이야. 알겠냐?”
“명심하겠습니다, 조장님.”
이렇게 모든 걸 아낌없이 가르쳐주는 동료들의 존재에 라이는 새삼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이의 검술을 훔쳐 배우려는 라이놀의 음흉한 속셈도 모르고·
하지만 그 덕분에 라이는 기사로서 필요한 덕목들을 수월하게 배워나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