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7권 2화 – 미네르바의 오랜 칩거

미네르바의 오랜 칩거

샌드 웜과의 격전이 끝난 후, 두 사람은 타이탄을 공간 속으로 되돌리는 대신 그대로 탑승한 채 이동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운 좋게 피해 없이 넘어갈 수 있었지만, 다음 공격도 이렇게 운이 좋을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으니까.

왜냐하면 타이탄을 꺼내 탑승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타이탄에게 가장 위험할 때가 기사가 탑승하지 않았을 때였다. 마나 공급원이 없기에 느릿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공격은 물론이고 방어조차 불가능하다.

공간을 열고 나오는 타이탄을 노리고 적이 공격을 퍼붓는다면,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런 위험을 뻔히 알고 있는 이상, 타이탄에 탑승한 채로 이동하는 게 낫다. 대마법주문으로 보호되는 타이탄은 움직이는 요새처럼 안전했으니까.

이번에도 진형은 똑같았다. 1킬로미터쯤 앞에서 월터가 적기사를 타고 걸어가고, 그 뒤에서 다이아나와 두 마법사가 따라간다.

앞에서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거대한 붉은 타이탄을 보며 라디아가 중얼거렸다.

“과연 코린트의 근위기사네. 정말 대단하지 않아?”

곧이어 다이아나의 떨떠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이탄이 좋아서 그런 거야. 들리는 소문으로는 2.0은 확실히 상회하는 엑스시온이 장착되어 있다고 하더라.”

그러자 도로니아가 다이아나의 말을 정정해준다.

『저 타이탄의 엑스시온은 2.3이다.』

“도로니아가 그러는데, 2.3이래.”

2.3이라는 말에 라디아는 혀를 내둘렸다. 청기사를 제외하고 그녀가 알고 있는 한 최고 출력의 엑스시온이었으니까.

“2.3이라고? 과연 코린트 제국. 세계 최강이란 찬사를 받는 이유가 다 있었네.”

“그런 코린트를 상대로 우리나라는 승리를 얻어낸 거라고. 정말 자랑스런 조국이지.”

사실, 1차 제국전쟁에서라면 몰라도 2차 제국전쟁에서 크라레스 제국은 패했다. 하지만 연이어 전개된 마도대전으로 인해 2차 제국전쟁에 대한 각국의 해석이 조 금씩 달라졌다.

각자 자기 나라에 유리하도록 살짝살짝 역사를 왜곡해 놓은 것이다.

특히 크라레스의 경우 모든 안 좋았던 부분은 다 마왕 탓으로 돌리고, 자신들은 피해자인 것처럼 포장하며 행동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2차 제국전쟁을 일 으켰고, 또 치욕스러운 패배까지 당했기에 각국에 배상해야 할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전쟁 배상금에 제국이 붕괴되었을 가능성까지 있었다.

아마 다크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크라레스의 역사는 그때 끝났으리라.

다이아나의 말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많은 차이가 있었기에 파벨은 한 마디 참견하고 싶었지만, 상대방의 신분을 생각해 그냥 꿀꺽 삼켰다. 신분 차를 떠나서 소심한 파벨이 상대의 잘못을 지적한다는 것도 힘들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옆에서 파벨의 찡그려진 얼굴을 본 라디아가 급히 화제를 바꿨다. 전쟁 당사자였던 코린트인을 옆에 두고 떠들 얘기는 아니었으니까.

“이토록 거대한 샌드웜까지 언데드로 만든 걸 보면 어쩌면 아티펙트가 사용된 게 아니라, 마왕이 강림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왕?”

“응. 언데드 쪽으로 특화된 마왕이 강림한 것일 수도 있지. 언데드가 나타난 위치도 딱 그렇잖아. 동쪽 대륙은 마도대전 이후, 흑마법사들을 완전히 박멸시켜 버렸 어. 간신히 목숨을 건진 흑마법사들은 서쪽 대륙으로 도망치거나 사막에 숨어들었을 거고, 그 와중에 마왕이 강림한 거라고 한다면 앞뒤가 대충 맞아떨어지잖아?” 라디아는 파벨에게로 슬쩍 시선을 돌려 물었다.

“파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타당한 추리라고 생각해. 나도 아티펙트 따위로는 저런 거대한 존재까지 언데드로 만든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

자신의 의견에 동조해 주는 파벨의 말에 라디아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 걱정은 샌드 웜이 과연 저것 하나뿐일 거냐 하는 거야.”

“하나가 아니라면?”

“좀 전의 샌드웜의 크기를 생각해 봐. 나는 샌드 웜이 그렇게까지 크게 자란다는 얘긴 들은 적이 없어.”

라디아의 말에 파벨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맞아. 엄청나게 컸지. 이 커다란 타이탄을 한입에 꿀꺽 삼켜버렸을 정도로…….”

“흠, 만약에 말이야. 그게 늙어서 죽은 샌드 웜이라면?”

비도 거의 오지 않는 사막의 특성상 금속성인 웜의 뼈가 산화되어 사라지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러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더군다나 그들은 땅 위가 아니라 모래 속 깊은 곳에서 죽었을 테니, 산화되는 건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샌드 웜이 그리 흔한 몬스터는 아니지만 늙어 죽은 개체의 뼈가 사막의 모래 속에 생각보다 훨씬 많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다다른 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파벨은 온몸이 두려움에 떨려오는 걸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라디아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표정 보니 너도 같은 생각을 한 거 같은데, 왜 묻고 그래?”

“설마……?”

“이게 만약 마왕이 강림한 거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내 생각에는 우리끼리 계속 사막 안으로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야. 코린트의 오너가 사막 에서 행방불명됐다는 게 월터가 우리를 겁주기 위한 과장된 말이 아니라는 거지. 이번에는 운이 좋아서 샌드웜이 모래 속으로 파고들기 전에 죽일 수 있었지만, 만 약 타이탄을 삼킨 채 모래 속 깊이 들어가 버리면 샌드 웜을 죽이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살아서 나올 수가 없어. 공기도 없는 모래 속 깊은 곳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없거든.”

도로니아의 운전석에 앉은 채 둘의 대화를 말없이 듣고 있던 다이아나가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나 겁주려고 하는 말은 아니지?”

라디아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당연히 아니지. 잘 생각해 봐. 샌드 웜 뱃속에 들어가서 직접 싸운 경험을 토대로 말이야.”

잠시 생각해보던 다이아나가 침중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월터와 상의해 봐야 할 거 같네.”

앞서가던 월터를 불러들여 상의한 끝에 그들은 작금의 상황을 각자 상부에 보고한 후, 명령을 기다리기로 했다.

상부에서 자신들의 보고를 토대로 추후 명령이 내려오기까지 며칠 걸릴 테니, 그동안 지금처럼 언데드 무리를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마왕이든 뭐든 결론은 그 후에 내려도 늦지 않으리라.

라디아와의 통신을 통해 보고를 듣던 치레아 기사단의 마법사는 경악해서 소리쳤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마침 필리페 각하께서 당직이시니 바로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곧이어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마법사가 수정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치레아 기사단의 수석마법사 필리페였다.

「초대형의 언데드 샌드 웜과 조우했다고?」

“예. 레이디께서 코린트 제국의 페레즈 백작과 함께 파괴했습니다.”

「즉시 전하께 보고 올리겠다. 그동안 귀관은 레이디를 잘 구슬려 그 자리에서 대기하고 있도록. 알겠나?」

“하지만 레이디께서 제 말을 들으실지.

「그건 귀관이 알아서 적절히 행동하라. 다시 한번 반복한다. 그 자리에서 대기하도록. 새로운 지시는 다음 정기 연락 시간에 내리겠다. 그럼 이만 끊겠다.」 라디아는 수정구를 잘 닦아 보관함에 넣으며 다이아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다이아나는 월터에게로 힐끗 시선을 돌렸다.

월터는 이미 파벨을 통해 상부에 보고를 올렸고, 그쪽의 지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월터는 다이아나처럼 직통 채널로 연결하는 게 아니라, 알카사스 쪽 정보원을 통해서 보고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저 멀리 코린트 쪽의 초장거리 통신망 채널을 열 기에는 파벨의 능력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월터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이아나에게 대답했다.

“결정은 네가 해. 다음 행동에 대한 지시가 내려오려면 한 며칠 걸릴 거야.”

다이아나는 주변을 살펴보며 풍속을 가늠해본다. 바람이 약간 불고 있긴 했지만, 이 정도로는 모래에 찍혀있는 발자국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일단……, 기다리자.”

“다음 정기 연락 시간쯤에는 결론이 나올까?”

“흔적이 언제 없어질지 알 수가 없는데 태평하게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지. 오늘 해 질 녘에 접속해서 물어볼 거야. 그때까지 결론이 나와 있지 않다면 움직 이자. 만약, 바람이 조금이라도 강해지면 그 전에 출발할 수도 있어. 그리고 월터는 지금처럼 우리보다 앞서 나가서 언데드 무리부터 찾도록 해.”

“알았어.”

다이아나가 바람에 민감한 건, 언데드들이 남긴 발자국이 바람에 쓸려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크루마 제국의 제도 (구)엘프리안이 골드 드래곤 아르티어스의 브래스에 박살 나버린 후, 미네르바 켄타로아 공작은 전력을 다해 (신)엘프리안을 건설했다.

하지만 (신)엘프리안 마저도 레드 드래곤 브로마네스에게 가루가 되어버리자 사람들은 엘프리안의 터가 재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게 되어, 새로운 자리에 제도를 건설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선택된 곳이 플로레스였는데, 코린트 군이 플로레스로 진격해 들어오려면 먼저 브로마네스의 영토를 지나야 한다는 것도 그곳이 제도로 선택된 이유 들 중 하나였다.

플로레스 또한 건설하는데 3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신)엘프리안 때의 경험에 미루어 지하궁전의 건설에 더욱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엘프리안이 막강한 웜급 드래곤의 브래스를 두 번이나 덮어썼음에도 불구하고, 지하궁전 쪽의 피해가 그리 크지 않다는 점에 그들은 주목했다. 그래서 플로레스의 지하궁전은 더욱 깊게, 더욱 튼튼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유사시에 황족과 제국 수뇌부가 최대한 빨리 지하궁전으로 대피할 수 있도록 이동마법진을 갖추는 데 공을 들였다.

플로레스가 준공된 후, 황제는 제국 전체에 신제도 완공을 축하하는 대규모 축제를 선포하고 새로운 궁전에서 7일 밤낮에 걸쳐 연회를 열어 축하했다. 대륙의 수많은 국가에서 축하 사절을 파견해 온 것은 물론이고, 국내의 조금이라도 이름이 있는 귀족이라면 연회에 참석해 인맥을 넓히기 위해 뛰어다녔다. 미네르바는 (신)엘프리안이 파괴되던 날, 자신으로 인해 두 번씩이나 제도가 파괴되었음을 사죄하며 두 번째 은거에 들어갔다.

물론 그녀가 은거했다고 해서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다. 군부의 절대적인 지지와 충성을 얻고 있는 교활하기 짝이 없는 그녀가 이번에는 또 무 슨 술수를 부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구)엘프리안이 골드 드래곤에게 파괴되었을 때도 자신의 잘못이라며 사죄하고 은거에 들어갔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이번에도 그런 일이 반복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잠시 은거했을 때 멋도 모르고 국정을 장악하려고 했던 고위귀족들은, 그녀가 다시금 권 력을 잡던 그날 싸그리 숙청당해 버렸던 전례가 있다 보니 이번에는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건 크루마 주변국들도 마찬가지였다. 크루마가 위기에 몰리게 되면 그녀가 결국 밖으로 뛰쳐나올 것임을 모두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 크루마에 남아있는 마스터는 그녀 혼자뿐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벌어지면 싫어도 은거를 깨고 밖으로 나와 전군을 이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변국들은 그녀가 밖으로 나올 핑곗거리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예 시비를 걸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다고 해도, 지금처럼 은거한 형태로는 제대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네르바의 은거는 세인들의 예상을 깨고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었다.

다른 나라의 마스터들이 100세가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은 외모를 자랑하며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걸 보면, 그녀가 벌써 노쇠했을 리는 없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도 가만히 칩거하고 있는 것일까?

모두들 궁금하게 여기며 몸을 사리는 가운데 하루하루 세월만 흘러가고 있었다.

세인들은 플로레스가 완공되었을 때, 미네르바가 슬그머니 권력의 전면으로 뛰쳐나올 줄 알았다. 복귀 명분으로 삼기에 최고의 이벤트였으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7일 밤낮 동안 성대한 연회가 개최되었지만, 그녀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 미네르바의 오랜 칩거에 크게 실망한 사람들 중 하나가 근위대장인 샤트란 페르였다.

제국전쟁을 치르며 마스터급의 부족을 실감한 미네르바는 후진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었다.

미네르바에게서 무공의 진수를 아낌없이 전수받았던 그녀였기에 미네르바에 대한 충성심과 애정은 남다른 것이었다.

“사령관님, 근위대장님께서 오셨습니다.”

“드시라고 해라.”

부관의 안내를 받으며 사령관실로 들어간 샤트란은 크루마 전군 총사령관 마리아 지오그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셨습니까, 사령관님.”

“어서 와. 자, 이쪽으로.

오랜 세월 친분을 쌓아온 사이다. 더군다나 그린 드래곤 사냥이라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임무에 투입된 동지이기도 했다.

잠시 그동안의 밀린 안부를 묻느라 시간을 보낸 샤트란은 마리아의 눈치를 살피며 용건을 꺼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뵌 건 사령관님께 부탁드릴 게 있어서예요.”

“뭐지? 너무 어려운 일이 아니면 좋겠는데…….”

“미네르바 전하를 뵙게 해주세요.”

순간 마리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곧이어 그녀는 평정심을 되찾았다.

“은퇴하신 후 제법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분을 견제하는 놈들이 너무나도 많아. 귀관은 근위대장일세. 어설프게 움직이다 자칫 놈들이 의

혹의 눈으로 보게 되면 상당히 피곤해져.”

지금까지는 자신의 이런 행동으로 인해 미네르바 전하가 혹시 곤란을 겪게 될까 두려워 그냥 침묵했지만 이번에는 절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샤트란은 입술을 거칠게 깨물며 단호하게 말했다.

“정적의 이목. 예, 그 말씀 때문에 지금까지 참고 있었죠. 하지만 이제 더는 참을 수가 없어요. 미네르바 전하를 뵙고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아무리 정적의 눈치를 봐야 한다고는 하지만, 사제지간에 만나서 얘기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30년 가까운 세월을 기다렸어요. 제발, 이번에는 거절하지는 말아 주세요.”

애절한 목소리로 부탁하는 샤트란의 말에 한참을 고민하던 마리아 지오그네는 이윽고 결단을 내린 모양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좋아, 따라와. 대신, 마음 단단히 먹고.”

“정말 감사합니다.”

빛이 번쩍하며 두 사람이 마법진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리아 지오그네와 샤트란 페르였다.

공간이동으로 인한 빛이 서서히 사라지자 곧이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짙은 암흑이 주위를 집어삼켰다.

““라이트!”

순간 빛의 구가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며 주위를 환히 밝혔다.

“여긴. 어디죠?”

“지하궁전이야. 엘프리안 지하에 있는…….”

“엘프리안의 지하궁전이라고요? 그런데 왜 이곳에…….”

“아무것도 묻지 말고, 일단 조용히 따라와.”

플로레스의 지하궁전은 언제든지 황제와 그 측근들을 맞이할 수 있도록 상당수의 하인과 하녀들이 배치되어 만반의 준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완전히 죽어버린 공간이었다. 사람은 물론이고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왜 이런 곳으로 자신을 데려온 것인지 의문이 생겼지만, 샤트란은 잠자코 마리아의 뒤를 따라갔다. 설혹 마리아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것이라 해도, 마스터인 그 녀는 충분히 위험에서 빠져나올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입을 꾹 다문 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어가는 마리아.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샤트란의 표정이 뭘 생각했는지 점차 싸늘하게 굳기 시작했다.

“설마……, 전하께서 이곳에 유폐(幽閉)되어 계신 겁니까?”

“괜한 생각하지 마. 여기에 전하께서 계신 건 아니니까.”

마리아의 대답에 샤트란은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여기에는 왜……?”

“자네에게 만나게 해주고 싶은 게 있어서.”

만나게 해주고 싶은 게….. .? 사람이 아니라 ‘게’라고 했다. 그렇다면 물건이라는 소린데, 물건은 만나게 해주고 싶다는 식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고 해야 맞다. 무엇보다 미네르바 전하를 만나게 해준다고 해놓고 뜬금없이 물건을 만나게 해준다라……?

샤트란의 미간이 점점 더 깊은 의문으로 찡그려지고 있을 때, 마리아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다 왔네. 여기야.”

마리아가 안내해 들어간 작은 공동 중앙에는 거대한 강철 구조물이 서 있었다. 타이탄. 샤트란은 눈앞의 이 타이탄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샤트란뿐만이 아 니라, 크루마 제국의 거의 모든 기사들이 이 타이탄을 알고 있으리라. 그만큼 크루마 제국의 자긍심과 같은 유명한 타이탄이었으니까.

“어, 어째서 이게 여기에.

칠흑과도 같은 어둠에 잠긴 지하공동의 중앙에 홀로 외로이 서 있는 타이탄은 헬 프로네였다. 최강의 기사만을 주인으로 선택한다는 고귀한 타이탄.

샤트란은 이 녀석의 주인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헬 프로네의 흉갑 중앙에는 쌍두의 그린 드래곤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크루마의 국가문장이다. 그리고 그 어떤 숫자도 그려져 있지 않은 순백의 유니콘 문장. 이 게 그려진 타이탄은 황제 전용기와 총사령관용, 단 2기뿐이다. 그리고 견갑에는 미네르바를 상징하는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샤트란은 자신도 모르게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며 마리아에게 싸늘하게 외쳤다.

“전하께선 어떻게 되신 거죠?”

마리아는 우울한 표정으로 헬 프로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돌아가셨어. 엘프리안이 파괴될 때..”

이미 오래전에 미네르바가 죽어버린 후라는 말에 샤트란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그, 그럴 수가……?”

샤트란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지하공동 바닥에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돌아가셨습니까. ..? 스승님께 받은 은혜를 아직 단 하나도 보답하지 못했는데.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듯 망연한 표정으로 주저앉아있는 샤트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마리아는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급하게 엘프리안에 도착했을 때, 운 좋게도 헬 프로네가 아직 떠나지 않고 있었어. 갑자기 주인과의 소통이 끊어져 버린 탓에 이 녀석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 었던 거겠지.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었기에 일단 포획해서 아무도 모르게 이곳에 숨겨둔 거야. 당시 그 주위를 샅샅이 수색했지만, 제대로 된 시체는커녕 뼛조각 하 나조차 찾을 수가 없었어. 브로마네스의 강맹한 브래스는 모든 걸 잿더미로 만들어버렸거든. 전하의 시신은 찾지 못했지만, 헬 프로네와의 맹약이 깨진 것으로 봐서 돌아가신 건 틀림없어.”

마리아는 헬 프로네 밑에 그려져 있는 커다란 마법진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마법진이 없었다면 오래전에 공간을 열고 도망쳐 버렸겠지.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붙잡아 둘 수만은 없어. 헬 프로네는 새로운 주인을 원하니까.”

헬 프로네는 그 시야를 가리기 위한 미스릴 코팅을 하지 않은 탓에 주인을 정하는 기준이 아주 높았다.

더구나 역대 주인들의 실력이 대단했던 만큼, 웬만한 실력으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마리아는 샤트란에게 시선을 맞추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내 생각은 자네가 이 헬 프로네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줬으면 해. 당분간은 전하의 대역을 부탁할 수밖에 없겠지만, 언젠가 우리 제국이 반석 위로 올라서게 된다 면 그때는 전하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발표할 수 있게 되겠지. 그때까지 우리 최선을 다하도록 하자. 폐하를 위해서, 그리고 전하를 위해서.

“브로마네스, 이 썩을 도마뱀 새끼!?

샤트란은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그 망할 레드 드래곤이 자신의 우상과도 같은 미네르바 전하를 죽였을 거라고는 지금까지 상상조차 하지 않고 지내왔었다. 그저 그 전과 같이 제도가 파괴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조용히 은거해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며 묵묵히 일을 수행했기에, 크루마 제국은 그 어떤 혼란도 없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만약 주위 강대국들이 미네르바의 죽음을 포착했다면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는 없었으리라.

새삼 미네르바 전하가 크루마 제국에 얼마나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와 조국에게서 받은 은혜까지도.

“알겠습니다. 감히 전하의 대역을 맡기에는 미천한 능력의 저이지만 조국을 위해, 존경하는 전하를 위해 제 이 한목숨을 바쳐서라도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 Ct.”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언젠가 기회를 잡을 수만 있다면.

샤트란이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 브로마네스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는 말이겠지?”

물론 불가능할 거라는 건 잘 안다. 상대는 웜급의 막강한 드래곤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그냥 포기하고 살아갈 생각을 하니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호시탐탐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어야 혹시라도 실낱같은 빈틈이나마 찾아낼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런 끈기가 있었기에 샤트란이 마스터라는 지고한 경지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고.

“제 살아생전에 가능할지 알 수는 없지만, 놈의 둥지가 가까이 있는 만큼 가능성이라도 엿보고 싶어요. 물론, 섣불리 손을 쓸 생각은 없어요. 플로레스마저 잿더미 가 되는 걸 원하지는 않으니까요.”

“만약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나 역시 목숨을 걸고 적극 도와줄게.”

샤트란은 아니, 거의 모든 사람들은 브로마네스의 둥지 내 침실로 들어가는 비밀통로가 하나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미네르바의 명을 받아 레어 건설을 총괄했던 게 바로 마리아였으니까.

미네르바는 과거 그린 드래곤을 사냥했듯, 브로마네스도 사냥할 계략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 공물을 바친다는 미명 하에 그의 동정까지 살펴볼 수 있었으니 언젠 가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노파심에 조언 하나 할게. 상대는 최전성기의 웜급 드래곤이야.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비늘에 흠집조차 내기도 힘들 거야. 혹시 미네르바 전하였다면 몰라도, 현 재 자네 실력으로는 기회를 잡는다 해도 어림도 없다고 생각해야 될 거야.”

그 말에 샤트란은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대답했다.

“부하들을 혹독하게 단련시키고, 저 또한 수련에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그런 헛된 희망조차 꿈꾸지 못한다면 제가 너무 비참해지니 까요.”

“그래, 자네의 의지가 그렇게 굳건하다면 그런 날이 언젠가는 오겠지. 나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