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7권 12화 – 마왕 강림?
마왕 강림?
전속력으로 타이탄을 질주하게 한 라이는 샌드 웜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급격히 속도를 늦췄다.
자기 혼자 달리는 것에 비해서 타이탄에 탑승한 채 움직이는 쪽이 훨씬 힘들었다. 그건 타이탄이 기동하기 위해 라이의 마나를 쪽쪽 뽑아내어 연료로 쓰기 때문이 었다.
타이탄에 탑승해 있는 쪽이 든든한 건 사실이지만, 라이는 급속도로 빠져나가는 마나의 상실감을 버티지 못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이런 상실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 육체적인 노동을 한 것도 아닌데,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이 느껴지다 보니 당황한 것이다. 일단 위기는 넘겼다고 판단한 라이는 타이탄을 멈춘 뒤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타이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자신의 몸 상태를 이상하게 만든 녀석이긴 했지만, 그 냥 이대로 놔두고 가버리기에는 찝찝했던 것이다.
정찰대 조장인 라이놀이 말했지 않았던가. 기사에게 타이탄을 지급받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대단한 영광된 일인지. 그리고 작은 왕국에는 기사라 해도 타이탄을 지급받기 힘들 만큼 값비싼 것인지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다 보니 라이놀이 가르쳐줬던 방법이 문득 떠올랐다. 타이탄은 공간의 저편에 보관시키는 게 가능했었다. 그리고 그건 케이론도 가능하다고 말했었 고.
“케이론, 공간의 저편에서 날 기다리고 있어 줄 수 있어?”
『알겠다.』
공간의 저편이 뭔지 라이는 이때 처음 봤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허공이 쩍 갈라지며 시커먼 공간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케이론은 천천히 움직여 그 공간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지시에 따라 공간을 열고 모습을 감추는 타이탄을 향해 라이는 다급하게 큰 소리로 외쳤다.
“케이론, 내가 부르면 꼭 와줘야 돼. 알았지?”
『알겠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놀랍게도 그 엄청난 덩치의 타이탄이 눈앞에서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앞에 서 있던 케이론이 남겨놓은 깊은 발자국만 아 니라면 이 모든 게 꿈이라고 느껴질 정도다. 그렇다고 자신의 의문을 풀기 위해 잠시 나왔다 다시 들어가라고 한다면 케이론이 화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재소환 을 하는 건 망설여진다.
“그건 그렇고, 조원들을 찾아서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주위는 아직 짙은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늘에 뜬 달 하나와 수많은 별들이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별자리를 보고 방향을 찾는 요령을 라이는 알 지 못했다. 더군다나 라이가 아는 몇몇 별자리는 저 북쪽 하늘의 별자리들뿐이다.
식수도 식량도 전혀 없는 만큼, 최대한 빠르게 다른 조원들을 찾으려면 해가 뜨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는 걸 라이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움직이기 힘들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해가 뜨면 대략적인 방향을 알 수 있었다. 주변 지리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대사막에서 동쪽으로 가면 알카사스 왕국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해가 뜨기 전까지 잠시 휴식을 취할 생각에 모래에 몸을 눕힌 라이였지만, 곧이어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샌드웜과의 격전과 탈출 과정에서 극심한 정신적 피로를 겪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잠에 빠진 라이는 꿈에도 몰랐다. 만약 올란도가 샌드 웜을 유인해 저 멀리로 달려가지 않았다면, 그는 또다시 쫓아온 샌드웜의 입속으로 직행해 갈가리 찢겨 죽었을 것임을.
하지만 이런 쪽으로는 경험이 전혀 없던 라이는 이 정도 거리를 벌려서는 샌드 웜의 탐지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
홉킨스가 거느린 용병단의 시야에 지평선 저 멀리 링카 성의 첨탑들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323 정찰조는 이미 링카 성에 도착해 있었다.
링카 성 인근에 대규모 언데드 집단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큰 문제였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323정찰조에 치명적 타격을 가한 언데드 샌드 웜의 존재였다. 샌드 웜과의 조우 후,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조장 및 부조장, 그리고 라이 위너스라는 신참 조원을 잃었다.
만약 즉시 탈출하지 않았다면 정찰조 전체가 궤멸당했을 거라는 게 조원들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긴급 상황이다.”
콘도르 기사단의 작전을 총 책임지는 작전관은 링카 성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기사단장이 타이탄에 탑승해 최전선에서 적과 싸워야 하는 이상, 기사단 전체 전력이 매끄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조율해 나가는 건 오로지 작전관의 몫이다.
생환한 323 정찰조 기사들의 보고를 접한 작전관은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지금 기사단의 전체 전력은 그루시아 후작의 지휘하에 6만 대군이 행방불명된 지역 주위를 샅샅이 훑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언데드 대군이 링카 영지 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새로운 언데드 대군이 포착된 지역을 지금부터 『B지구』라고 칭하도록 한다.”
작전관의 지시에 따라 커다란 지도에 B지구라는 표시가 그려진다.
“후작 각하로부터의 연락은 없었나?”
이미 정보를 접수한 즉시 후작에게 연락을 했었다. 그렇기에 그 결과를 묻는 것이다.
“분견대의 도움을 받아 최대한 빨리 『B지구』로 가시겠다는 답신이셨습니다.”
“와이번이라…….?”
작전관은 지도상에 표시된 『A지구』와 『B지구』를 번갈아 살펴보며 그 거리를 가늠해 본다.
지금 그루시아 후작이 전체 기사단 전력을 이끌고 샅샅이 훑고 있는 게 『A지구』였다. 그루시아 후작은 『A지구』를 수색하러 갈 때, 이곳 팔콘 기사단 링카 분견대 에서 용기사 전력 전부를 데리고 갔다. 공간이동 마법의 사용이 불가능한 지역인 만큼, 원활한 수송과 정찰을 위해서였다.
이곳 링카 분견대가 보유하고 있는 와이번의 숫자는 20마리. 다른 지역의 분견대와 비교한다면 엄청난 수였지만, 이곳 지역의 특수성과 정찰을 해야 하는 면적을 생각한다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적은 숫자였다.
그 때문에 그루시아 후작은 각 와이번에 할당되어 있던 저급한 마법사들을 모두 내리도록 하고, 그 자리에 콘도르 기사단의 마법사들을 탑승시켜 강력한 탐색마법 으로 그 일대를 훑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 다른 지역에서 갑자기 새로운 적의 무리가 나타났다. 그것도 링카 성과 지척인 위치에
그루시아 후작이 기사단 이동에 와이번을 쓴다고 해도 그리 많은 숫자의 기사단원을 이동시킬 수는 없다.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숫자가 20명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 다. 현재 시간을 생각한다면 잘하면 두 번 정도 수송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 정도라면 기사단 전력의 1/3에 조금 못 미치는 숫자였다. 그럭저럭 오늘 바로 탐색작 업이 시작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불의의 사태에 이곳 링카 성에 대한 방어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링카 성에는 와이번을 뺏겨버려 기동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 린 분견대의 오너 전력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1개 분대, 타이탄 5기.
“젠장! 기사단의 생명은 기동력인데, 이렇게 원시적인 이동수단밖에 쓸 수가 없다니…….”
투덜거리는 작전관을 달래듯이 수석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지 않나, 작전관.”
“수석마법사님, 마법탑 쪽에서 새로 입수된 정보는 없었습니까?”
콘도르 기사단 수석마법사는 이곳 마법탑을 비롯, 링카의 마법사 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성에 남아있었다. 그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날 밤 대규모 마법 반응이 포착된 거 외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고 하더군. 워낙 먼 곳에서 발동된 마법이었던 만큼, 그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던 것도 마법탑 이 아니었으면 힘들었을 걸세.”
“허, 사막에서 언데드의 창궐이라니.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 것인지, 정말.”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작전관이 수석마법사에게 다시 물었다.
“보고된 언데드의 규모로 봐서는 마왕의 강림이 맞겠지요? 수석마법사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A지구 일대를 용기사들이 샅샅이 훑었지만, 시체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지 않던가. 마법탑에 포착된 강력한 마법 반응은 아마도 시체들 을 언데드화 한 것이라 추론하는 게 타당하겠지. 그 위치에서 수백 킬로 떨어진 이곳 성에서도 포착될 정도로 엄청난 흑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존재라면 마왕 외에 더 있겠나?”
“흐음..”
자신의 추측이 맞을 거라는 수석마법사의 대답에 머리를 움켜잡던 작전관은 다시 입을 열어 질문을 던졌다.
“혹시 마왕이 본국을 침공해 들어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뜻밖에도 수석마법사는 즉답으로 딱 잘라 말했다.
“그건 힘들걸.”
단호한 대답에도 작전관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다시 물었다.
“생환한 정찰조의 보고로는 언데드화 된 초대형 샌드 웜까지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듀에이트 셋을 그냥 삼켜버렸을 정도의 엄청난 마물인 데다, 그게 한 마리만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반론을 제기했지만 수석마법사의 결론은 변하지 않았다.
“설사 그런 마물이 열댓 마리 더 있다고 해도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네. 자네는 샌드웜에 대해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샌드 웜은 기본적으로 사막에 최적화된 몬스 터야. 부드러운 모래사막이라면 몰라도, 링카 성의 기반암(基盤巖)을 뚫고 올라오지는 못하지. 이빨이 길고 성긴 탓에 바위는 고사하고 흙조차 뚫고 들어가지 못하
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그리고 그건 언데드화 된 샌드 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일세.”
샌드 웜이 사막을 벗어나 본국을 공격해 들어올 수 없다는 수석마법사의 말에 작전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나마 다행이로군요.”
생각을 정리한 작전관은 통신 마법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금까지 수집된 정보를 왕실에 보고하도록 하게.”
그러면서 작전관은 방금 전 수석마법사에게서 들었던 얘기도 덧붙여 말해줬다.
“예, 작전관님.”
지시를 끝낸 작전관은 수석마법사의 눈치를 힐끗 보며 물었다.
“원로원에도 보고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네. 그건 여기 분견대 쪽에서 알아서 보고하겠지. 약간의 정보만 주어져도 이곳 상황을 손바닥 보듯 꿰뚫어 보고 판단을 내릴 테니까 말이야. 뭐라고 해도 원로원은 본국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들의 집합체니까.”
그로부터 3시간 후, 작전관은 상부에서 내려온 뜻밖의 지시에 의아함을 감추기 힘들었다.
“다시 한번 더 말해보게.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작전관의 물음에 통신 마법사는 다시 한번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를 보고했다.
“언데드의 침공에 대비하되, 선제공격은 불허한다는 지시였습니다.”
“흐음…,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군.”
고개를 갸웃거리는 작전관에게 통신 마법사가 옆으로 바짝 접근하더니 은밀히 속삭였다.
“제게 지시를 전달한 마법사의 말로는 원로원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원로원이?”
원로원이 그런 요청을 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던 작전관은 수석마법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 말도 안 되는 지시를 수석마법사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위쪽의 지휘석에 앉아있는 건 수석마법사와 작전관 둘뿐이었다. 나머지 지휘부는 아래쪽에 앉아있었다.
방금 전에 통신 마법사가 은밀히 건넨 말을 옆에 앉아 있던 수석마법사는 들었을 것이기에 의견을 묻는 것이다.
머리가 좋지 않으면 마법사가 될 수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수석마법사는 이미 감을 잡은 모양이었다.
수석마법사는 사이런스 마법을 사용해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막은 다음 대답했다.
““뻔한 거 아닌가.”
그 말에 작전관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제가 이해를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뻔한 거……, 라니요?”
“원로원은 언데드를 이용해 사막 민족을 소탕해 버릴 생각인 거야. 솔직히 말해서 최근 사막 민족의 세력이 급격히 커진 게 사실이니까 말이지.” “예? 그건 무슨……?”
여기까지 말하던 작전관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다.
그렇다. 언데드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타이탄까지 보유한 막강한 전력을 지닌 왕국의 정규 기사단들을 상대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물론 아직까지 샌드웜의 전력이 얼마나 되느냐가 베일에 감춰져 있긴 했지만, 수석마법사의 말 대로라면 그 숫자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알카사스 왕국으로의 침 공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언데드들을 그냥 놔두면, 치명타를 입게 되는 건 결국 사막 민족뿐이라는 얘기가 된다. 언데드들을 소탕하는 건 사막 민족의 뿌리가 뽑힌 다음에 천천히 생각해도 된다. 혹여, 드래곤이 이번 일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곧바로 기사단을 투입해 전면전을 치르는 건 잠재적 위험이 너무 높다고 판단한 것 일까?
“허…, 그런 수가 있었군요. 하지만 이게 외부에 밝혀지면 본국은 막대한 오명을 뒤집어쓰게 될 겁니다.”
사막 민족의 대부분은 얄팍한 토성에 의지해 생활하고 있다. 그런 곳에 언데드 대군이 들이닥친다면 그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극소수의 제대로 된 성곽도시를 제 외하고는 모두 언데드의 먹이가 되리라.
최소 수백만의 사막 민족이 죽을 게 뻔함에도 수석마법사는 냉정하게 딱 잘라 말했다.
“그건 자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걸세. 이 모든 건 극비리에 진행될 테니까. 사실, 사막에 언데드가 대량 발생했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아직까지 본국밖에 없지 않 은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후작 각하께 기별을 넣도록 하게. 빨리 성으로 돌아오시라고.”
“알겠습니다, 수석마법사님.”
***
그날 저녁때쯤 되었을 때, 죽은 줄만 알았던 라이가 생환하는 데 성공했다. 기진맥진해서 쓰러져 있는 것을 양을 치던 목동이 우연히 발견했다고 한다. 목동은 모르고 있었지만 라이는 엄청나게 질긴 생명력의 소유자다. 물만 먹여줘도 알아서 살아난다.
하지만 그 보고를 접한 기사단 쪽에서는 목동이 응급처치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 않을까 생각하고 넘어갔다. 사막에서는 그런 일이 왕왕 벌어지는 게 사실이 었으니까.
어쨌거나 목동 덕분에 살아난 라이가 국경 경비대의 도움을 받아 링카 성으로 돌아온 것이다.
국경 경비대 쪽의 보고로는 링카 영지 북단에서 그의 구조요청을 접수했다고 했다.
무역 통제 등 여러 이유 때문에 링카 영지는 폭은 좁지만 아래위로 길게 늘어져 사막 쪽과 접하는 알카사스 국토의 거의 대부분의 땅을 그 영지로 하고 있었다. 만약 이곳 서부 국경지대를 여러 영지로 쪼개놓으면, 각 영주들이 밀무역에 나설 게 뻔하기에 취해진 조치였다.
그 때문에 링카 영지는 알카사스 왕국의 모든 영지들 중 가장 컸고,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무역로를 독점함으로써 발생하는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강력한 세력을 키울 위험성이 있긴 했지만, 그래봐야 국왕이나 원로원이 보유하고 있는 기사단 전력이 출동하면 하루아침에 박살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효율을 중시하여 링카 영지를 기형적인 크기로 만드는 데 있어서 원로원이 반대표를 던지지 않았던 것이다.
알카사스 국왕은 이곳 변경백을 자신의 사람으로 임명하는 대신, 링카 성에 주둔하게 될 기사단 분견대를 원로원 쪽에서 선택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데 최적의 구조가 현재의 링카 영지였던 것이다.
샌드 웜에게 잡아먹혀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 라이가 살아온 것에 대해 수석마법사는 강한 의문을 표시했다.
그가 알고 있는 샌드 웜의 해부학적 지식에 따르면, 놈에게 먹힌 생명체가 절대로 살아서 나올 수가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포식된 생명체는 무수한 이빨에 의해 가루가 되어 위장 속으로 들어간다.
비록 언데드가 되었다고 해도 샌드 웜의 포식 습성이 바뀌었을 수는 없었다. 살아있을 때나 언데드가 되었을 때나 놈의 뱃속에 들어가려면 결국 무수한 이빨들이 돋아있는 입을 거쳐야만 할 테니까.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그는 지금 어디에 있나?”
“국경 경비대를 출발해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하더군요. 아마 늦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요?”
국경경비대 쪽에서 링카 성까지의 안내 및 호위를 해주겠다고 제안을 했음에도 라이는 거절했다고 한다. 자력으로 달려가는 편이 훨씬 더 빠르다며 그저 방향만 가르쳐 달라고 했다고 했다.
작전관의 대답에 아직 시간적 여유가 꽤 있음을 알게 된 수석마법사는 직접 본부로 돌아가 라이에 관련된 서류를 확인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지시를 내려 맡기는 것보다는 자신이 직접 확인하는 편이 실수가 없을 것이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물론 공간이동 마법진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라이의 인적사항이 적혀있는 서류를 살펴보자 뜻밖에도 그의 과거는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백작가의 장남으로 태어나긴 했지만, 그가 태어났을 무렵에는 이미 가문은 절단이 나 있었다. 그의 아버지였던 제랄드 폰 로티넨 백작의 뒤를 봐주고 있던 드미트 리폰 란프리아 후작이 실각한 탓이다.
라이는 그의 아버지가 일가를 이끌고 타국으로 피신하던 도중에 태어났다고 적혀있었다.
“흠, 꽤나 잘 짜여진 얘기로군. 그리고 이 모든 기록들을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든 게, 그 자신이 무명의 검객으로부터 상승검법을 배웠다는 것이고.” 라이에게 검술을 가르친 스승의 이름이나 그 신분을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검술을 본 사람들은 크라레스의 검술임에 틀림없다고 모두들 증언했다. 현재는 라이놀 조장을 중심으로 그가 익힌 검술을 검법서로 만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로 인해 라이에 관한 모든 자료는 특급기밀로 분류되어 있었기에, 수석마법사 자신이 직접 본부로 달려오지 않았다면 알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라이놀의 보고서에 따르면 라이가 검술 전수에 매우 협조적이라고 되어 있었다. 고급검술의 유출이라니, 그런 특수성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잘못 짚었나?”
아무리 살펴봐도 수상쩍은 부분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샌드 웜의 입속에서 멀쩡히 살아 나왔다는 건 말이 되지를 않는다. 처음부터 그가 언데드 세력과 뭔가 연 관이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걸 의심하기에는 라이의 기록은 너무 깨끗했다.
그의 아버지는 크라레스의 귀족이고, 스승도 크라레스 사람이고, 검법도 크라레스의 것이라고 했다. 가문이 쫄딱 망한 후, 우연히 스승을 만나 둘이서만 산에 들어 가 수련을 하다 갑자기 스승이 죽어버렸기에 하산하게 되었는데, 이 와중에 산적집단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를 우연히 찾아낸 정보부 쪽의 얘기로는 시민권이 없다 보니 시민권을 구하기 위해 산적집단에 포섭되어 잡일을 처리해주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정보부 쪽 에 포섭되어 콘도르 기사단에 입단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잘 짜인 한 편의 소설과도 같은 얘기였다.
작위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정말 타국의 첩자라면 제법 그럴듯하게 날조를 하지, 이렇게까지 티가 나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