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권 9화 – 운이 나쁜 하얀 호랑이
운이 나쁜 하얀 호랑이
그 사건은 나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일은 새로운 운명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순전히 흥미 위주로 움직인다고 욕할지도 모르지만
재미있을 것 같아 나는 그렇게 했다.
비류연 20세 어느 날..
“으르렁…….”
그 놈은 거대한 대호(大虎)였다. 몸집이 비류연의 네 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백수의 왕 호랑이였다. 그것도 눈은 태양처럼 빛나고 털은 푸른 기운이 도는 은백색이 었다. 몸집이나 눈빛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 산의 두목급 호랑이가 분명했다. 저런 덩치와 위압감을 가진 놈에게 덤벼들 무모한 짐승은 아마도 이 산에서는 없을 것 이다. 아마 점심 식사 거리를 찾으러 어슬렁거리던 중이었나 보다. 그리고 지금 그 백수의 왕 앞에는 사악한 악의 화신을 사부로 모시고 있는 비뢰문(飛雷門)의 계 승자(繼承者) 비류연(飛流沇)이 천연덕스럽게 서 있었다.
은백색 대호는 금방이라도 비류연을 덮칠 듯한 사나운 기세로 두 눈을 태양같이 빛내며 그를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은 아마도 먹이를 탐색중인 것 같았다. 먹이를 확실히 요리하기 위한 사전 작업인 것이다. 그러나 그 집채만한 호랑이 앞에 서 있는 비류연의 눈빛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아니, 오히려 그의 입가에는 가 느다란 회심의 미소(微笑)까지 아련히 어려 있었다. 그는 왜 미소 짓고 있는 것일까? 물론 백호의 위 속에서 백호와 함께 할 식후 산책을 생각하며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이유는 곧 밝혀졌다.
“야호, 이게 웬 횡재지? 어제 저녁 돼지꿈 꾼 기억은 없는데? 이거 수박이 덩굴째 굴러 들어왔잖아. 그것도 새하얀 수박이 말이야. 아니, 은백색 수박이라 해야 되 나? 오늘 큰 거 한 건 올렸는데, 운이 좋아.”
백수의 왕이라고 불리는 이 호랑이의 멋진 검은색 줄무늬도 비류연의 눈에는 흰색 수박에 그어진 줄무늬로밖에는 안 보이는 모양이다. 백수의 제왕 호랑이도 비류 연의 눈에는 귀여운 고양이 새끼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호랑이에게 감사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작년에 한탕 한 지 무려 일 년 만에 다시 찾아온 다시없는 기회였다. 쉽게 큰돈을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작년이었던가. 사냥을 한다고 온 산을 이 잡듯 뒤지다가 그 놈을 만났었다. 마치 고목을 닮은 듯한 거대한 곰! 어렵지 않게 때려잡은 뒤(잡긴 잡았지만 절대로 손으 로 때려잡은 것은 아님) 그 놈의 쓸개, 소위 사람들이 웅담(熊膽)이라고 부르며 안달하는 것을 뚝 떼어다가 꽤 고가(高價)에 팔아 넘겼었다.
웅담(熊膽)은 무슨 영물의 내단이나 되는 것처럼, 만병 통치약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긴 만병 통치약까지는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매우 뛰어난 약효를 지닌 귀한 약재였기 때문에 흥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 놈의 가죽을 홀라당 벗겨다가 어느 무림 방파의 꽤 높은 신분의 사람에게 팔아 치우는 상술까지 발휘 했었다. 그것도 꽤 높은 값을 받았으니 이래저래 만족스런 거래가 아닐 수 없었다.
곰 가죽은 시중에서 그렇게 인기 있는 품목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높은 값을 기대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거웅방(巨熊幇)이라는 무림 방파의 부방주가 때마침 방주의 생일 선물로 곰의 가죽을 찾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방주에게 선물할 만한 상등품의 곰 가죽을 구할 수 없어서 난감해 하고 있었는데 그 때마침 비류연이 곰 가죽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비류연이 가진 곰 가죽처럼 상처 하나 없는 상등품의 곰 가죽(熊皮)은 본 적이 없다며 매 우 기뻐했다. 그러면서 가죽 값으로 선뜻 많은 은자를 지불하고는 그 곰 가죽을 가져갔다. 뜻하지 않은 횡재였다.
그리고 그 곰의 곰 발바닥은 위, 아래의 오른쪽, 왼쪽 발바닥을 싹둑 잘라서 마을에 있는 가장 큰 유명 요리점에다가 팔았다. 질이 매우 좋은 상등품의 고기여서 비 싼 값에 팔렸다. 이런 식으로 팔 수 있을 만한 것은 다 팔아 넘겼고, 그 외의 나머지는 집에 가져가서 곰탕을 해 먹었다. 맛이 퍽 괜찮았다.
이렇게 번 돈이 상당한 액수여서 비류연은 마을에서 가장 크고 이자율이 높다는 전장(錢莊)에 그 돈의 3분지 2를 맡겼다. 물론 그 곰으로 얼마를 벌었고 얼마를 맡 겼는지는 비류연만의 비밀이었다. 물론 사부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아니 사부에게만은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될 일이었다. 상상하기조차도 끔찍하지만 만일 그렇게 되면 번 돈의 거의 대부분을 몽땅 빼앗기고 찌꺼기만 남을 게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비류연이 곰을 집으로 가져갔을 때의 곰의 시신 – 좀 부드럽게 표현하자면 육질은 수십 등분으로 토막 나 있었기 때문에 사부는 그때 먹은 고기가 곰탕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양념을 이용해서 교묘하게 멧돼지 고기 맛 비슷하게 만든 다음 사부에게는 멧돼지 고기와 다른 2종류의 고기를 함께 섞어 요리를 했다고 뻥을 쳤다. 물론 사부는 간단히 속아 넘어갔다. 즐겁게도 거액의 돈이 굳은 것이다.
그로부터 일 년 후, 다시 한 건 크게 터트릴 기회를 하늘이 내려 주셨다. 이 불쌍한 운명의 주인공을 하늘은 결코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그 돈 덩어리가 비류 연의 눈 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제발 날 좀 잡아가슈!’라고 외치는 현상금 걸린 범죄자처럼 보이고 있다는 것을 백호 자신은 짐작조차 못 할 것이다. 항상 사람들로부터 공포의 존재로 군림해 온 자신이 고작 한 꾸러미의 돈 뭉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찌 짐작이나 하겠는가!
비류연이 어떤 사악하고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계획을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고 있는 백수의 제왕 호랑이는 이번 점심 식사를 어떻게 요리할지 일상적인 고민을 하며 탐색을 계속하고 있었다. 찢어발겨 죽일까, 아니면 물어뜯어 죽일까를 열심히 고민하고 있던 백호는 눈 앞에 보이는 연약한 인간을 순식간에 덮쳐서 일격에 물 어뜯어 죽이기로 결정하고는 그 거대한 몸을 번개처럼 움직였다. 예상 목표 지점은 인간의 목덜미였다.
그의 공격은 이제껏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던 필살의 일격이었기 때문에 백호는 자신의 실수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백호는 아가리를 쩍 벌린 채 날 카로운 송곳니를 뽐내며 ‘커헝’산이 울릴 정도로 크게 울부짖었다. 하지만 이런 위기의 순간에도 비류연은 즐거운 마음으로 이 돈 덩어리를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사냥 방법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다.
결정이 내려졌는지 비류연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5장의 거리를 압축하여 덤벼드는 백호를 향했다. 그의 왼손이 자연스럽게 늘어뜨려졌다. 비뢰도 한 자루가 그의 왼팔을 타고 내려와 왼손에 머물렀다. 비류연이 가볍게 비뢰도의 손잡이를 잡자 뇌인(刃)이 안으로부터 숨겨진 그 모습을 드러냈다. 우아한 반원의 곡선을 그리 며 나타난 뇌인은 푸르스름한 예기를 한껏 발하고 있었다.
순간 비류연의 왼손으로부터 환상 같은 섬광이 번갯불처럼 번쩍이며 백호의 아가리 속으로 날아갔다. 환상 같은 뇌광이 호랑이의 아가리 속으로 빨려들듯 날아들 어 갔다. 옆에서 보았다면 백호가 번개를 삼켜 버리는 듯한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 순간, 하늘을 뛰어넘어 비류연을 덮치려던 백호가 크게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균형을 잃고 힘없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백수의 왕은 자신의 뱃속에서 거칠게 폭발하면서 맹렬하게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힘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백수의 왕, 맹수 중의 맹수이며 숲 속의 지배자인 은백호(銀白虎)의 어이없는 최후였다. 오랫동안 이 산중에 왕 중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던 그는, 이번에 자신이 점 심 식사 거리로 생각하고 있던 인간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자비하며, 터무니없이 강한 인간인지를 모르고 덤벼든 결과였다.
왼쪽 검지가 한 번 까딱거리자 비류연의 손을 떠났던 비뢰도가 다시 거짓말처럼 비류연의 손으로 돌아왔다. 비뢰도에는 은백호의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고 깨끗 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이로써 그는 상처 하나 없는 호랑이 가죽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언제나 가지고 다니던 비류연의 비도가 은백호(銀白虎)의 몸뚱이와 가죽 사이를 자유로이 헤엄치듯 누비고 다녔다. 순식간에 은백호의 가죽은 훌러덩 벗겨져 그 주인의 몸을 영영 떠났다. 매우 숙달되고 숙련된 비류연의 솜씨로 미루어 보아 그가 이런 일을 꽤 오랫동안 해 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가죽이 벗겨진 볼썽 사나운 호랑이의 반질반질한 몸뚱이뿐이었다.
전해져 내려오는 속담대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 것이었다. 게다가 그 가죽은 매우 고가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기에 더욱 값진 것이었다. 이 가죽은 이제 비 싼 값에 팔릴 것이다. 이 정도로 거대한 호랑이 가죽은 드물 테니 틀림없이 비싼 값에 팔릴 것이다. 게다가 푸른 기운을 띠는 은백색 호피는 쉽게 구할 수 없는 귀한 물건인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비류연의 기분은 매우 좋아졌다. 그는 증거를 인멸하기로 작정하고 호랑이의 배를 반으로 갈랐다. 호랑이 뱃속에서 다량의 피가 흘러나왔다. 뱃 속에 비뢰도가 들어가 속을 휘저어 놓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용의주도한 비류연은 피 한 방울 낭비하지 않고 가죽 포대에 모아 담았다. 이 정도로 큰 영 물 백호의 호혈(虎血)이라면 비싼 값에 팔릴 게 분명했으니 비류연이 그런 아까운 걸 맨땅에다 그냥 버릴 리가 없었다.
배를 가른 후 이리저리 속 내장을 뒤적거리며 살펴보니 다행히 호랑이의 간은 무사했다. 비류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호랑이의 간도 꽤 고가에 거래될 중요 한 물품이었기 때문이다. 속담에도 있지 않은가, 호랑이 간을 삶아 먹으면 담이 커진다는 이야기. 뭐 부작용으로 간이 부어오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 진 위 여부를 떠나서 그것이 고가품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숲 속의 제왕 호랑이의 내장을 깨끗이 제거하고 나무 꼬챙이로 호랑이의 몸통을 항문에서 입까지 꿰뚫은 다음 그것을 장작불 위에 걸었다. 다시 그 위에 소금과 갖 은 양념과 조미료를 친 다음 천천히 꼬챙이를 돌리면서 고기가 다 익기를 기다렸다. 고기가 열을 받아 노릇노릇 익기 시작하자 그 향기가 기막혔다. 뜻하지 않았던 아침운동으로 몹시 시장했던 비류연은 구수한 향을 내며 노릿하게 잘 구어진 호랑이 통구이를 말끔히 먹어 치웠다. 백수의 제왕은 그 고기 맛도 일품(一品)이었던 것이었다.
식후(後) 현장에는 한때 숲 속의 왕이었던 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백골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그 뼈들에는 살코기 한 점 붙어 있지 않았다. 이때만 해도 비류연은 남겨진 백골들로 장례는 치르지 못할망정 그냥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걸음을 옮기던 비류연은 잠시 주춤하더니 식사 현장으로 돌아와 한때 백호였 던 호랑이의 뼈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백호의 뼈를 차곡차곡 챙긴 비류연은 경건한 마음으로 자신을 위해 희생해 준 은백호의 아름다운 희생 정신에 묵념을 보낸 다 음 기쁜 마음으로 호랑이의 가죽을 둘러메고 마을로 내려갔다.
그의 채집용 망태기 속에는 요리 전에 뽑아 두었던 호랑이 발톱 20개와 요리 후 수습한 뼈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큰 덩치만큼이나 남겨진 뼈도 많았다. 발톱으로 는 호랑이 발톱 목걸이를 만들어 만화점(萬貨店)에 팔 생각이었다. 꽤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만큼 크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만들어진 호조(虎爪) 목걸 이는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물건이 희소하면 희소할수록 그 가치는 더욱 커지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의 백골들도 약제상에 고가에 거래될 것이다. 호골(虎骨)은 예로부터 주요 약제로 사용되면서 그 효능을 널리 인정받았다. 정말이 지 호랑이는 가죽부터 뼈까지 무엇 하나 버릴 게 없었다. 역시 영물은 영물인 모양이었다.
이렇게 해서 모인 돈은 그의 원대하고 위대한 계획을 실행시키는 데 쓰여지게 될 것이다. 백호를 포식한 탓인지 마을로 내려가는 비류연의 발걸음은 비호(飛虎)처 럼 날래고 가볍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