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권 6화 –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비뢰도 2권 6화 –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한 가문과 그 가문이 가진 가업의 모든 기반이

괴멸이냐, 기사회생이냐? 혹은 전(全)이냐 무(無)냐? 라는

택일의 답을 요하는 잔혹한 운명의 소용돌이 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한 가문의 주인인 장우양 국주. 그가 생각하기에 자신에게 괴멸이냐 기사회생이냐? 라는 생사(生死)의 물음 중에 택일을 요구하고 있는 사람 – 비록 그가 직접적으 로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온몸에서부터 무럭무럭 피어올라 풍겨져 나오는 압도적이고 파괴적 분위기로 충분히 간접적인 선택을 요구하고 있는 – 은 그 사람이 강 호에서 차지하고 있는 존재의 비중만큼이나 확실하게 자신의 가업을 송두리째 파멸시킬 만한 저력을 가지고 있음을 장우양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과거, 자신의 가는 길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3개의 도적 산채를 하룻밤 사이에 괴멸시킨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했다. 원래 그 당시 염도의 길을 가로막았던 도적 산 채는 하나였다고 한다. 그런데 염도가 그 길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산채 하나를 완전히 쑥밭으로 만든 다음, 화가 아직 안 풀렸다며 인접한 산에 있던 두 산채마저 한꺼번에 쓸어버렸던 것이다. 나머지 두 산채는 단지 옆에 있었다는, 그러니까 일차 피해자의 이웃 사촌이었다는 단순하고 어이없는 이유 하나만으로 염도의 무자 비한 칼날 아래 몰락의 길을 걸어야만 했던 것이다.

지금 중양표국의 운명도 이와 다를 게 없었다. 그러므로 장우양은 당장 뭔가를 해야 했다. 이것은 한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중양표국이라는 단체, 300여 인생들의 사활(死活)이 걸린 중요한 선택인 것이다. 하지만 장우양은 그 선택의 막중한 무게에 짓눌려 제대로 움직일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아들 장우강과 부총표두 등여호가 그런 장우양의 생각을 먼저 읽기라도 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염도의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물론 두 사람은 언감생심(焉敢生心), 염도를 때려눕히는 방향으로 이 사태의 해결 방안과 타결책을 강구해 보자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장우강은 이 무시무시 한 사내를 대상으로, 청성산 높고 깊은 곳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갈고 닦은 청성검의 예봉(銳鋒)과 현묘함을 시험해 보고픈 마음은 꿈에도 없었다. 이런 생각은 섬연창 등여호도 오십보 백보였다.

억지로 용기를 쥐어짜 염도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의 오직 하나뿐인 목표는 어떻게 하면 저 불꽃같이 격렬한 사내의 화를 가라앉히고, 이 절대절명의 위기 를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절실하고도 소박한 바람뿐이었다.

‘무슨 짓이든 다 할 테니 살려만 주십쇼! 그러면 그 은혜가 백골난망이로소이다! 제발 살려주세요!’

지금 그들의 심정을 가장 잘 나타낸 말일 것이다. 일단 그러기 위해서는 상호간의 대화가 필수적이었다. 장우강과 등여호는 걸어가는 도중에도 쉴 사이 없이 눈빛 과 눈짓을 통해 누가 먼저 이 위험천만한 사내에게 말을 걸 것인가, 에 대한 말없는 공방을 계속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눈짓의 교환은 그 격렬함과 신속함에 있어서, 절정 고수들의 손 나눔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이 둘 사이의 맹렬한 상호 안구 이동 및 안광 교류 운동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쥐, 즉 최초의 희생양을 정 하는 싸움이었기에 더욱더 처절하고 치열했다.

장우강으로서는 물론 등여호가 먼저 말을 건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의사를 명확하게 등여호에게 전달하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등여호에게 보여주기는 죽기보다는 아니지만 어쨌든 싫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먼저 나서서 하자니 그것도 영 내키지가 않았다. 목숨이란 하늘이 내려 주신 소중하고 귀중한 선물이기에 소중히 다루고 아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심정은 등여호로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도 일단 용기를 짜내 염도를 향해 걸어가고 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내 자신이 왜 그랬을까? 라는 후회가 들 었다. 등여호 역시 생명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소국주인 장우강에게 먼저 말을 건네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 그를 더욱 힘 들게 만들었다. 그는 중양표국의 뒤를 이을 후계자였다. 아무리 그릇이 작고 검봉(劍)의 예기가 무디다 해도, 아무리 검의 날카로움이 떨어진다 해도 그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밑의 사람으로서 “난 싫으니 네가 저 위험물에게 가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지금 두 사람은 아주 전형적이고도 정석 (定石)적이며, 또한 지극히 표본적인 미치고 환장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도 역시 표국을 이을 후계자답게 장우강이 검대(劍帶)를 메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하기에는 엄청난 심적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명문 정파인 대 청성 파의 적전 제자라는 자부심이 그의 결심을 많이 도왔다. 장우강은 정중히, 그리고 가까스로 포권의 예를 취하며 긴장되어 조금 떨리는 두 입술을 떼었다.

“난 사천 제일의 무적 최강 절세 표국 대 중양표국의 소국주 청성일검 장우강이라고 한다. 우리의 이름은 들어보았나? 아무리 이름 없는 무사라도 한 번쯤은 들어 보았겠지. 요즘 강호에 소문이 자자한 우리 대중양표국의 명성을 말이야, 하하하!”

염도의 속이 다시 한 번 뒤집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일그러져 있던 염도의 얼굴이 다시 한 번 확확 팍팍 구겨졌다. 그의 귓가에 울리는 우렁차고도 오만하며,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땅이 얼마나 넓은 지, 내는 모른다, 니는 아나?” 식의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무인은 이 강호에는 없었다. 특히 성질이 불같은 염도에 있어서는 두 말할 필요 따위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난 지금 한시바삐 일분 일초라도 빨리 뒈지고 싶은 심정이니 빨리 날 뒈지게 만들어 달라는 의도가 듬뿍 들어 있는 말을 내뱉다니, 아무래도 장우강은 너 무 긴장한 나머지 머리가 홱 돌아 버려 겁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가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그런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곧 죽을 줄도 모르고 말 이다.

“우리 대~에(大)중양표국에서 오늘 이곳에 머무르고자 하는데 자리가 부족하군. 그런데, 우린 모두 자리에 앉아서 편안히 식사를 해야 되겠단 말씀이야. 그러니

어쩌겠나? 하긴 어쩌긴 뭘 어째! 자리를 마련해야지. 어떻게 마련을 하냐고? 당연히 당신이 자리를 양보하고 조용히 이 객점에서 나가 주는 게 어때? 좋은 생각이라 생각되지 않나? 근데 왜 딴 사람들 다아~놔두고 당신한테 이러느냐고? 아, 그야 당연히 당신이 제일 만만하기 때문이지. 뭐, 당신을 깔보는 거냐고? 깔본 사람이 나 쁜가? 그렇게 보이도록 행동한 사람이 나쁜 거지. 그렇잖아? 그럼 이제 충분히 이해했지. 그럼 이제 그만 자리를 비켜 주는 게 어때?”

말은 정말이지 음절 하나 하나가 청산유수(靑山流水), 안하무인(眼下無人)인데. 그런데 언행 불일치(言行不一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식은 땀에 푹 절은 등이 아주 잘 눈에 보일 정도로 허리를 푹 숙이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머리를 조아리며, 식은땀에 번질거리는 두 손을 열심히 비비는 태도를 보 이고 있는 두 사람의 입에서 절대 나올 수 없는 말이, 자꾸만 염도의 귀로 파고 들어와 속을 뒤집어 놓고 있는 것이었다.

이 엉뚱하고도 황당한 언행 불일치의 상황 속에서 염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기에 망정이지, 언행일치의 상황이었다면 둘은 이미 단칼에 저 세 상 객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게 과연 어찌된 일일까? 물론 겁을 잔뜩 집어먹고 설설 기고 있는 장우강과 등여호가 아직 제정신이라면 위와 같은 생명경시 사상 이 담뿍 든 말을 내뱉을 리는 없었다.

안 그래도 파여져 있는 묘자리를, 얕다고 더 깊게 팔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장우강과 등여호는 절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염도의 귀에는 분명히 그 렇게 들렸다. 그렇다고 염도의 귀가 잘못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찌된 노릇인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진짜 장우강이 몸둘 바를 몰라 하 며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는 얼굴로 한 말들은,

“오, 오늘 이… 이렇게 이름높은 강호의 거인 염도 곽 대협을 뵙게 되니 삼생의 영광이 아닌가 합니다. 불, 불초 소생은 사… 사천의 이름 없는 조그만 표국인 중, 중양표국의 소국주, 청성의 이름 없는 검, 무림 말학 장우강이라고 합니다. 오… 오늘 이렇게 부, 불초 소생이 흠… 흠모해 마지않던, 무림에 태양같이 찬란한 이름 을 떨치고 계시는 홍염의 불꽃, 염도(焰刀) 대 선배님을 뵙게 되다니 저희 가문의 무한한 영광이 아닌가 합니다. 제가 이렇게 여… 염도 대 선배님께 인사드리는 것 은 무림의 말학으로서 당연한 의무이기도 하고, 또… 또 하나 방금 선배님과 저희 중양표국 사이에 크나큰 오, 오해가 발생한 것 같아 저희들이 이렇게 대 선배님께 고개를 숙이고 사… 사죄를 드리고, 오해를 풀어 주셨으면 해서였습니다. 저희 중양표국은 추호도 흠모해 마지않는 염도 곽 대협께 불민하고 불경스러운 행위를 할 마음을 품은 적이 꿈에도 없습니다. 이, 이 모든 일은 모두 사… 사고, 예, 바로 사고였습니다. 그러니, 하해와 같은 넓은 마음으로 불민한 저희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불쌍할 정도로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었다. 자존심이라고는 발톱의 때만큼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모두 내팽개치고 빌고 또 빌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염도의 귀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극과 극의 다른 내용이 전달된 것일까? 진실은 이러하다.

갑(甲)과 을(乙), 그리고 병(丙)이 있다고 하자. 이때 갑(甲)과 을(乙)과 병(丙)을 무림의 고수라고 가정하자. 위의 가정 하에서 갑과 을이 서로 대화를 하고 있다고 해 보자. 이때, 갑이 을에게 칭찬을 한마디했다. 아주 훌륭하고 멋지고 좋은 말이었다. 즉, 상대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병(丙)이 교묘 한 전음(목소리가 갑의 목소리로 변조되어 있고, 또한 듣는 사람이 전음인지를 느낄 수 없는 교묘하고도 신통한 전음)을 이용하여 동시(同時)에 을(乙)에게 욕을 했 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을은 갑의 칭찬은 한마디도 듣지 못한 채 욕만 바가지로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당연히 을은 갑이 자기한테 욕을 바가지로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 고는 갑과 을은 대판 치고 박고 싸울 것이다.

전음(轉音)이란, 음파나 음성을 내공에 실어 특정 상대에게 날려보내는 기(技)로서 내공을 이용하여 허공을 격해 상대방의 귀속으로 직접 소리를 전하는 상승(上 昇)의 기술(技術)이다. 전음과 보통 말소리가 동시에 한 사람의 귀에 전달된다면 그 사람은 공기 중에 실려 오는 소리는 듣지 못한 채, 오직 내공에 실려 전해지는 전 음 밖에는 듣지 못한다. 전음은 내공을 이용해, 허공을 격하여 직접 상대의 고막을 울림으로써 소리를 전달하는 기술이기 때문에, 그 내공에 의해 귀 안에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기(氣)의 막이 형성되게 되어, 공기 중의 말소리는 이 보이지 않는 기막(氣幕)에 의해 차단되어 버리고 전음만이 전달되는 것이다. 말 그대로 기(氣)막 힌 일인 것이다.

방금 염도와 장우강 사이에 일어난 일도 위의 예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장우강이 갑(甲)이라면 염도는 을(乙)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갑과 을이 싸움 붙게 된 원흉인 병(丙)은 누구이겠는가? 물론 물을 것도 없이 병(丙)은 바로 비류연이다. 비류연은 교묘하게, 그리고 어찌 보면 야비하다고 까지 평할 수 있는 전음술을 이 용하여 염도와 장우강을 다시 한 번 농락한 것이다.

첫 번째는 물론 어디선가 날아와 맛있게 식사중인 염도의 식탁에 콱 박힌 중양표국의 표기였다. 그리고, 이 일은 다시 한 번 더 깊숙이, 아주 깊숙이 중양표국을 파 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일이기도 했다. 비류연의 가벼운 장난으로 장우강과 그가 속해 있는 중양표국은 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단지 장우강이 건방지다 는 단순한 이유 하나로 인해…….

비류의 농간(奸)을 모르는 염도, 그의 입에서 장우강, 아니 중양표국 전체를 향한 분노가 섞인 비릿하고 거친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얼굴은 이제 붉어질 대로 붉어져 마치 화로에 달구어진 시뻘건 철검같이 보였다.

“크크큭, 중양표국? 요즘 근래 들어 이름은 조금 들어봤다만, 감히 그따위 일개 표국 따위가 감히 나 염도의 비위를 건드려? 여기 객점의 자리가 부족하니 나보고 꺼져 달라고? 대 중양표국은 나 염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고? 간이 아예 배 밖으로 나왔구나. 목숨이 그리 가볍더냐? 크크큭, 그러고도 너희들이 무사하길 바란단 말인가? 그러고도, 네놈들이 목숨을 부지하길 바래! 할(喝)!”

객점 안이 쩌렁쩌렁 울리는 노호성과 함께 엄청난 위압감이 염도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너무나 사납고 위압적이어서, 염도 바로 앞에 서 있던 두 사람은 하마터면 정신을 잃고 무릎을 꿇을 뻔했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곽 대협! 저… 저희가…….”

염도의 무시무시한 반응에 장우강은 너무나 놀라 말을 떠듬거렸다. 그로서는 지금 염도가 내뱉는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장우강은 후들후들 떨리는 두 다리로 간신히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저, 저희가 어, 어떻게 강호 제일 도객이라는 염도 곽영희 대협의 기분을 거슬릴 말을 감, 감히 할 수 있겠습니까.”

옆에서 노심초사하는 심정을 극명히 드러내고 있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던 등여호의 얼굴이 순간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고… 공자, 안 돼!”

터져 나온 등여호의 목소리는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등여호의 비명 소리에 장우강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장우강의 마 지막 실언이 염도로부터 있었는지조차도 불확실한 심사숙고와 재고의 여지를 완전히 앗아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