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4권 10화 – 백호단, 눈 밖에 나다
백호단, 눈 밖에 나다
세상일은 우연과 우연이 겹침으로써 종종 필연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아니 이것이 세상사의 대부분을 이루는 가장 근원적인 법칙인지도 모른다.
오늘 주작단 전원은 도합 여섯 가지 이유 때문에 애꿎은 하늘을 원망해야 했다. 만일 운명의 신이 있다면 소맷자락 끄트머리라도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은 심정이 었다.
우선 첫 번째로 왜 그들의 수업 시간과 비류연의 수업 시간이 같은 시각에 끝나는가 하는 것이다. 둘째로는 같은 시각에 끝나는 것까지는 좋은데 왜 그들과 비류연 이 가는 길이 중도에 겹쳐져야 하는가. 좀 다른 길로 돌아가게 하면 어디가 덧나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 다음 세 번째로는 왜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도 비류연이 엇갈 려가던 그들을 알아보는가. 못 본 척할 수도 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그들과 그들의 대사형 비류연이 함께 있는 그 자리에 왜 하필이면 그 자식이 나타났는가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그 자식은 눈치도 없는 데다가 성질이 더럽기까지 했다.
“호오, 이게 누구신가? 요즘 잘 나가는 주작단 여러분이 아니신가?”
비틀려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들도 익히 잘 알고 있는 백호단(白虎團) 소속의 철검비(鐵劍飛) 단대풍이었다. 그는 평소부터 그들과 매우 안 좋은 사이였다. 주 작단에 둘러싸여 있는 비류연을 한 번 힐끗 바라본 단대풍이 물었다.
“그런데 같이 있는 애송이는 누군인가?”
애송이? 순간 비류연의 한쪽 검미(劍眉)가 가볍게 꿈틀거렸다. 주작단은 본능적으로 비류연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때문에 주작단은 지 금 그의 질문에 대답할 기분이 아니었다. 오직 그의 입을 틀어막아 주고 싶을 뿐이었다.
“알 필요 없네. 알려줄 의무도 없고. 이만 가 주지 않겠나?”
멋모르고 화약고를 건드리려 하는 단대풍을 한시라도 빨리 떨어뜨려 놓고 싶은 주작단원들이었다.
그들의 냉담한 반응에 단대풍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주작단원들이 작당하여 자신을 냉대하자 심히 불쾌했던 것이다. 주작단에 의해 이인자의 자리를 덜컥 빼 앗긴 백호단이 주작단을 바라보는 시선은 냉기가 풀풀 날릴 정도로 싸늘했고, 볼 때마다 그 날 식단의 종류에 관계없이 입맛이 썼다.
그래서 백호단 소속의 점창파 출신 단대풍이 우연히 마주친 주작단원 사이에 끼어 실실대고 있는 비류연이 못마땅하게 보이는 게 당연했다. 괜히 부아가 치밀어 올라 한 마디 쏘아 붙여 주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던 것도 다 하늘의 뜻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단대풍은 끝내 무모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비류연을 단지 주 작단에 꼬리치는 하찮은 애송이쯤으로 판단한 것은 그의 그 동안 저지른 수많은 일생 일대(?)의 실수 중 당당히 일위를 차지할 만한 일이었다. 옆에 있던 친구 영취 검강현추의 충고는 그의 귀에 쳐진 보호막을 뚫지 못해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흥, 요즘은 굽실대는 허리와 박박 비벼지는 손바닥, 그리고 쉴새없이 돌아가는 혓바닥만으로 실력이 상승되는 모양이지? 가소롭기 짝이 없군. 겨우 올해 갓 입관 한 애송이가 수련에 정진하지 못하고 아부에만 정신 빠트려 놓고 있다니 통탄스럽군.”
순도 십이할의 적의를 내비치는 단대풍의 말 중 ‘일 학년 애송이’라는 단어와 ‘아부’라는 단어가 묘하게 비류연의 귀를 거슬리게 만들었다. 비류연은 심사가 뒤틀렸다.
물론 단대풍을 잘 알고 있는 주작단원들은 그의 비난의 화살이 자신들의 대사형 비류연을 향하고 있음을 알고 기겁했다. 자신들의 합숙 훈련 시절 사부같이 만만 치 않은 성격을 지닌 비류연을 겁대가리도 없이 건드려 놓은 것이다. 단대풍의 무모함에 주작단원들은 속으로 쉴 새 없는 욕을 퍼부어 대었다.
벌집을 건드리고, 화약고에 불을 붙여 제 무덤 파는 건 좋은데 왜 자신들에게 불똥을 튀게 만든단 말인가. 조용히 혼자 뒤집어써도 되는 일 아닌가.
비류연은 자신에게 비난의 말을 가득 쏟아 부은 적대적 감정의 상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특히나 그의 눈에 띈 것은 청년의 오른쪽 소매에 수놓아진 백호수(白虎 繡)였다. 비류연은 그것과 비슷한 종류의 수가 놓아진 소매를 자주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제자들의 소매에서였다. 저건 분명히 제자들의 소매에 수놓아 진 주작수(朱雀繡)와 같은 종류의 것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단대풍을 향한 비류연의 관찰자적 시선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것 같았다. 자신을 노려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주작단과 얽힌 것 중에 그의 기분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지금 감히 선배의 하늘같은 얼굴을 노려보는 건가? 건방진 놈!”
주작단원들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자신들의 사부를 둘로 나눈 것 같은 대사형 비류연의 성격으로 볼 때, 이러다간 정말 일이 조용 히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왜 저 자식은 사람을 몰라보고 일을 저질러 여러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지 미칠 지경이었다. 주작단원들이 이 엄청난 사태에 직면해 이러 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사태 수습을 위해 얼른 노학이 나섰다.
“자네 말이 너무 지나치군. 그게 여자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사내가 할 말인가? 그런 말할 자격이 자네에게 있기나 한 건지 무척이나 의심스럽군.”
비웃음이 가득한 말투는 당장 단대풍의 분노를 격발시켰다. 노학의 말은 오히려 불난 집에 기름을 쏟아 부은 격이었다.
“닥쳐! 빙백봉 나예린 소저를 여타의 다른 여자들과 똑같이 비교하지 마라. 그 자체가 그분에 대한 모독이다.”
한 학년이나 어린 후배임에도 불구하고 단대풍은 나예린을 그분이라고 불렀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어도(의심스럽지만) 그분에 대한 모욕만큼은 참을 수 없는 단대풍이었다. 그는 빙봉영화수호대의 일인이자, 그것도 여덟 명의 친위 간부 중 한 명이었다.
“쳇, 빙봉영화수호대의 대원이라고 지금 위세를 부리나? 우습기 짝이 없군.”
그 중에서 그나마 나예린에 대해서 이 정도의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은 상거지 노학 정도였다. 왜냐하면 주작단 남자들 중에서도 나예린의 열렬한 추종자가 있 었기 때문이다.
“뭣이라?”
당장이라도 결투를 신청할 기세. 검을 뽑아 피를 부르지 않은 것만 해도 장한 일이었다.
“잠깐만요!”
옆에서 둘이 노닥거리는 걸 지켜보던 비류연이 그들의 대화를 끊고 끼여들었다.
“뭐냐?”
불쾌한 심사를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드러내 놓은 채 단대풍이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엔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넘어가려던 비류연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나예린이 란 이름 석자가 그의 귀를 자극한 탓이었다. 게다가 상대의 실력 등급은 육검룡 때 마침 알맞고 적당한 상대가 아닐 수 없었다.
“이름이 뭐죠?”
“네놈 따위에게 알려줄 과분한 이름 따윈 가지고 있지 않다.”
단대풍은 경멸 어린 시선으로 비류연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매를 번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저 재수 없는 자식은 단대풍이라는 시답지 않은 이름을 가진 놈입니다.”
단대풍은 노학이 비류연에게 존댓말을 쓴다는 사실이 의아스러웠지만 곧 잊어버렸다. 비류연은 찬찬히 자신에게 보내져 온 수백 통의 결투장들에 적힌 도전자 목 록표를 자세히 뒤져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점창파 철검비룡 단대풍, 빙봉영화수호대 대원. 당연히 결투 신청자 명단에 단대풍의 이름은 올라와 있었다. 빙봉영화수호대 소속 대원 치고 그에 게 결투 신청서를 안 보낸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벌써 열두 통째 결투 신청서를 보내 온 열성적인 이도 그 중에는 있었다. 그 열성과 부지런함은 칭찬받아야 마땅 하지만 비류연의 게으름은 그것을 단숨에 짓밟아 쓰레기통에 처넣어 버리고 말았다. 단지 귀찮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의 결투 비무 신청을 묵살해 버렸던 것이 다.
그런데 학칙으로 비무가 금지되어 있으므로 비공식 결투 신청을 비류연이 무시했다 해서 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단 한 가지 합법적인 비무 결투 장소인 승급 시험장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조건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비류연 쪽에서 먼저 신청을 해야 가능해진다는 절망적인 사실이었다.
단대풍은 입을 한 번 잘못 놀린 죄로 비류연의 승급 시험을 위한 제물로 결정되었다.
“당신의 독특한 견해는 잘 들었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조만간 해 드리지요. 다음을 기대하시죠.”
비류연이 특유의 속을 알 수 없는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처음에는 청룡단, 이번엔 백호단 녀석이었다. 비류연은 다음에 현무단이 시비를 걸고 자신 앞에서 알짱거려도 결코 놀라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놀라기는커녕 좀더 본떼를 보여줘야겠다고 내심 벼르고 있는 중이었다.
다음날, 제2기숙사인 도혼관(刀魂館)에 사는 천관도 전원은 아침부터 건물을 쩌렁쩌렁 울리는 한 사람의 웃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으하하하하하!”
한 장의 서찰을 받고 광소를 터트린 이는 비류연도 어제 만난 적이 있는 백호단의 단대풍이었다. 그 서찰은 단대풍의 심사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주작단과의 어제 있었던 불쾌한 일을 단번에 날려보내 주었다. 그가 들고 있는 서찰은 누가 봐도 확실한 비무 신청서였다. 단, 그것은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시행되는 승급 심사를 위 한 비무 신청서였고, 신청자는 놀랍게도 찢어 죽인 뒤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을 비류연이었다.
“드디어 나에게 복수의 영예가 돌아왔구나. 이놈만 꺾으면 수호대에서의 나의 지휘도 확고부동하게 되고 그 누구도 나를 허투로 보지 못하리라. 그리고 그분의 시 선도 조금은 바뀌겠지. 으하하하하하하!”
떡 줄 사람 생각도 않고 김치국부터 마시는 단대풍이었다. 그의 앞에 기다리고 있는 비참한 미래를 모른 채 그의 광소는 옆 방에서 소음으로 불평 불만을 터트릴 때까지 그칠 줄을 몰랐다.
“다음을 기대하시죠.’
비류연의 말이 단 하루만에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단대풍은 아침 일찍 갑작스럽게 날아온 승급 시험 비무 신청을 얼씨구나 좋다고 승낙했다. 그리고 내심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이제 자신의 손으로 그분의 명예를 회복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을 부러움 섞인 선망 어린 눈길로 바라볼 것인가. 그녀의 명예 회복은 누구나 바라고 소망하던 바였다. 하지만 사건 발발 이후 수개월이 지난 이 시점에서도 아직 사태는 이렇다 할 결말을 준비해 놓지 못하고 있었다.
비류연이 삼성제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오검룡 이상의 자격이 필요했다. 그리고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승급 시험을 치루어야 했다. 그러려면 시험 상대가 필요했다. 원래 승급 심사란 게 자신보다 높은 검룡위의 소유자를 상대로 한 비무를 통해 실시되는 것인 만큼 상대의 존재 유무는 필수 불가결한 상황이었 다.
승급 시험의 규칙은 간단했다. 위계가 한 등급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그 등급에 속한 두 명의 상대와 싸워 이기거나 혹은 삼백초 이상 동안 평수를 이루어야 한다. 즉, 삼검룡이 되기 위해서는 삼검룡에 속한 두 명의 상대와 싸워 이기거나 삼백초 평수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런 위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비류연이 오검룡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는 무려 열 명이 넘는 많은 수의 비무 상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행히 비류연은 일일이 한 등급 한 등급 차근차근 싸워 나가는 귀찮음을 덜 수 있었다. 검룡위 승급 심사는 실력만 된다면 등급 건너뛰기도 가능하다는 규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실력만 된다면 단 두 명의 상대를 구하는 것만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비류연은 굳이 도전 상대를 구하기 위해 부산을 떨 필요도 없었다.
그 날 운향정에서 있었던 사건 이후, 비류연의 사물함에는 매일같이 결투장과 비무첩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맘에 안 드는(?) 놈들을 색출해서 승급 심사에 임하면 그만인 것이다. 상대는 골라야 할 정도로 많았으므로 비무 상대 선택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너무 많아서 누굴 골라야 좋을지 선뜻 정할 수가 없어 골머리를 앓던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비류연의 눈밖에 난 이가 바로 철검비룡단대풍이었던 것이다. 자신을 애송이라고 깔본 단대풍을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비류연은 당장 기숙사로 돌 아오자마자 단대풍에게 승급 비무 신청서를 보냈다. 고작 일검룡 기본 등급에 속한 일 학년이 느닷없이 다섯 계단을 건너뛰어 육검룡에 도전한다는 것은 누가 보아 도 무모한 일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비류연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육검룡 단대풍과의 승급 비무를 선택했다. 두 번째 상대자는 오늘 그와 같이 있었던 무산파의 영취검 강현추였다. 그의 경우는 단대풍 곁에 있다가 괜한 불똥이 튄 경우였다. 원래 귀찮은 걸 극도로 싫어하는 비류연다운 행동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칠검룡 위지천을 단 일수에 패퇴시켜 버린 어처구니없는 녀석이 바로 비류연이었다. 이 정도는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비류연이 삼성제를 대비한 승급 심사에 임한다는 소문이 돌자 평소 그의 사물함에 쌓이던 비무첩의 수가 두 배로 불어났다. 승급 심사의 장은 합법적인 결투의 장 소로 애용되고 있었던 만큼 비류연을 눈엣가시 내지는 철천지 원수, 또는 무림 공적(公敵)으로 여기고 있던 빙백봉 나예린의 추종자들에게는 두 번 다시 없을 절호 의 기회였던 것이다. 너무 많은 비무첩이 쌓이다 보니 당사자인 비류연도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신청자가 너무 많아 누굴 선택해야 할지 결정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해 보던 그는 일단 결론을 보류시켜 두다가 드디어 결론을 내렸다. 그의 결정은 의외로 간단했다. 처음엔 도전한 놈 중 제일 센 놈과 싸우려고 했었다. 그 게 제일 번거롭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천성이 게으른 탓인지 귀찮은 걸 아주 싫어하고 병적으로 기피하는 비류연이었다.
수북한 비무첩을 찬찬히 살펴보니 칠검룡 이상은 사태의 추이를 주목하고 있어서인지 보이지 않았고 최대가 육검룡이었다. 하지만 육검룡이라 해도 결코 호락호 락한 실력이 아니었다. 칠검룡인 위지천이 완벽하지 못하다고는 하지만 검강(劍剛)을 구사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실력이었다. 즉, 육검룡에 속한 이들 도 위지천보다는 못하지만 그에 준하는 실력을 지녔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비류연의 고려 사항에 들어 있지 않았다.
심혈을 기울여 비무첩을 보낸 이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눈감고 제비뽑기로 두 명의 비무 상대를 뽑은 비류연은, 귀찮다는 이유로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비무 일자 를 임의로 정하고, 승급 시험을 맡고 있는 검룡대(劍龍臺) 승룡원(乘龍院) 심사 위원단에 서류를 접수하러 가려 했다. 그런데 기껏 애써서 뽑아 놨더니만 그제야 비 무할 만한 상대가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독공 수업 후의 그 일이 없었다면 눈감고 뽑힌 두 명이 비류연의 비무 상대가 되었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상대는 물론 백호단 소속의 단대풍과 그 일당들이었다. 이제 그들은 비류연의 승급을 위해 제단의 제물로 바쳐지게 된 것이다. 누군가 말했듯 현실은 잔혹하고 비 정하다. 비무 일자는 앞으로 삼 일 뒤 정오 경이었다.
“자네 정말 괜찮겠나?”
걱정스런 목소리로 효룡이 물었다. 그도 비류연의 무모함에 질려 버린 것이다.
“뭐가? 뭐 걱정이라도 있어?”
남의 일처럼 비류연이 말했다.
“지금 내가 걱정 안 하게 생겼는가? 육검룡의 고수들을 둘씩이나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상대하겠다고 호언장담하다니, 자네 제정신인가?”
“물론!”
“정말 믿을 수 없군. 자네 육검룡이면 어느 정도 실력의 소유자인지 알고나 있나?”
“글쎄?”
무림의 상대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비류연이었다.
“한 문파의 핵심 간부급일세. 그 수준은 절정 고수 수준이지. 자네, 정녕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가?”
질려 버린 듯한 얼굴로 효룡이 말했다.
“나도 마찬가질세. 나도 자네의 이번 결정은 좀 무모해 보이는군. 그들의 실력은 정녕 무섭지.”
장홍이 옆에서 효룡을 거들었다. 그의 안목으로 이미 비류연이 범상치 않은 실력의 소유자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번 건은 너무 무모해 보였다.
“글쎄, 그 한 문파의 핵심 간부급이라는 게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칠검룡 정도 되면 검강을 뿌릴 수 있더군.”
효룡과 장홍, 그리고 윤준호의 안색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비류연의 사고 체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병에 걸리면 간이 저렇게나 커지는지 궁금 할 지경이었다.
“자네 검강이 무슨 애들 장난인 줄 아나. 그걸 알면서도 태연하게 승급 시험에 임했단 말인가? 이게 무슨 의미인 줄 아나?”
“걱정도 팔자로군. 걱정 말게나. 금방 끝날 테니. 별것도 아닌 일 가지고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자네들도 그 녀석들 정도는 간단히 처리할 능력이 되면서 나 한테만 왜 이래?”
무심하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내뱉은 비류연의 말에 장홍과 효룡은 내심 뜨끔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식은땀이 그들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서…… 설마 우리의 실력이 그 정도야 되겠나? 하하! 너무 우릴 과대 평가하는군. 남들이 들으면 화내겠어…….”
“쓸데없는 걱정에 심력 낭비하지 말고 그보다 다른 일이나 걱정하게.”
“뭘?”
“예를 들어 승급 축하연회 같은 것 말이야. 난 그쪽이 더 흥미가 있는 걸. 이래봬도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다구. 설마 힘들게 시험을 치르고 온 친구를 썰렁하게 맞 을 생각은 아니겠지?”
은근한 어조로 능청스럽게 잘도 말하는 비류연이었다. 더 이상 상대해 봤자 본전도 못 건질 것 같았다.
“자넨 정말 어쩔 수 없는 사람이군. 내가 졌네. 잘해 보게나.”
“물론 그럴 테니 걱정하지 말게.”
비류연은 친구들을 안심시켰지만 그들은 안심되지가 않았다. 아직까지 비류연의 진면목을 접해 보지 못한 그들이기에 그들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었다.
구대 문파를 근본으로 하는 검혼회를 포함한 구정회(正會)는 거의 대부분이 검(劍), 도(刀), 창(創)의 정통적인 무기를 주로 사용한다. 게다가 그 중 팔 할 이상이 검이다. 거의 대부분이 검을 사용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술이 무림 일절이라는 점창파도 한편으론 검을 주로 사용한다. 비전 창술은 제자에게 함부로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머지는 모두 검을 사용하는 것이다. 반면 팔대 세가와 여러 기타 문파가 근본을 이루는 군웅팔가회 쪽은 쪽수만큼이나 다양한 무기들을 선택 사용 한다. 그만큼 계통이나 무공이 복잡 다양할 수밖에 없다. 모두 일장일단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좋다 나쁘다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칠절신검 모용휘를 노리는 건 구정회뿐만이 아니었다. 구정회만큼 그를 목말라 하고 있는 곳이 또 한 곳 있었으니, 그곳은 바로 구정회의 앙숙이자 최대 경쟁자인 군웅팔가회였다. 구정회가 모용휘를 막으려고 한 반면, 군웅팔가회는 그의 적극적인 영입을 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삼성제에 칠절신검 모용휘가 막대한 전력이 될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군웅팔가회 쪽에서는 애초에 생각하길, 모용휘도 출신이 팔대 세가 중에서도 세력이 큰 강성사가(强性四家)의 일원인 모용세가의 자제인 만큼 두말할 것도 없이, 눈치볼 것도 없이 당장에 군웅팔가회에 가입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왠지 모용휘는 군웅팔가회에 드는 것을 꺼려하고 있었다. 설득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세력 싸움에 괜히 말려들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명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의도 가 있는지 그 속내를 파악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하지만 이미 모용휘의 이름은 양대 세력 싸움에서 중립을 지키며 벗어나기에는 너무나 큰 이름이었다. 그는 이미 피할 수 없는 몸인 것이다.
도백회(刀魄會) 내에 자리하고 있는 군웅팔가회의 중앙 회의실, 지금 그 자리에는 군웅팔가회의 열두 수뇌들이 모여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있는 중이었다. 회의 주도하고 있는 이는 지낭(智囊)이라고도 불리는 천무구룡의 일인 천기룡(天奇龍) 단목우였다. 단아하고 고고한 품격을 지닌 그의 일신상 학문이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다 하여 무저지낭(바닥, 깊이, 끝이 없는 지혜)이라고도 불리는 인물이었다.
“모두들 요즘 학관 내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소문은 익히 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더군요.”
회의의 주체자인 단목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칠절신검 모용휘가 삼성제 검성전에서 우승을 공언한 것 말입니까?”
방금 단목우의 질문에 대답한 사천당가의 당철표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는 주작단 당철영과 사촌지간이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사천당가의 이가 주(二家主)로 당철영의 작은아버지 되는 사람이었다.
“예, 물론 그 일입니다.”
“과연 그게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당철표로서는 확신이 서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천고의 기재라 해도 그는 아직 일 학년에 불과했다.
“글쎄요. 제 짧은 생각을 밝히자면 칠절신검 모용휘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아직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목우는 의도적으로 말을 끌었다.
“무엇입니까?”
“검성 모용정천의 후계자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겠군요.”
형산일기백무영과 마찬가지로 모용휘의 잠재력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는 단목우였다. 단지 연륜이 없다고 상대의 실력을 비하하거나 과소 평가하는 것은 어리 석은 짓이다.
“그렇다면 군사께선 이번 검성전을 어찌 하실 생각입니까? 모용휘는 우리측과 대립하는 것입니까?”
“그래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도 부족한 판국에 내분을 일으킨다면 구정회 쪽에 좋은 비웃음거리를 제공해 주는 꼴이 되겠지요.”
올해엔 구정회로부터 삼성제의 우승을 빼앗아 오는데 전력을 기울여도 모자랄 판이었다. 게다가 이번에 구정회에서 가장 취약한 도성전(聖戰)을 집중 공략할 복안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힘을 분산시킬 여력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군사께선 이번 일을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다고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그는 지금 공중에 붕 뜬 상태나 마찬가지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그는 우리 측 인물입니다. 구정회와는 절대 양립할 수 없는 인물이란 걸 모두 잘 알지 않나요? 그런데 그의 우승 공언으로 구 정회 수뇌부도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습군요. 하하하.”
회의장의 분위기를 바꾸어 볼 의도에서 터트린 시원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시원스런 웃음도 그들의 걱정을 불식시켜 주지는 못했다. 그들에겐 아직 꽤나 중차대한 걱정거리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한 사람의 존재를 잊으면 안 됩니다. 구정회 측엔 그가 있습니다.”
당철표의 말에 모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역시 그자의 존재를 잊고 이번 삼성제 검성전을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렇군요. 이번 검성전엔 분명히 그가 출전할 겁니다. 군사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그라면 역시 삼절검 비천룡(飛天龍) 청흔을 말씀하시는 것이겠지요?”
“물론입니다! 그자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역시 그들의 마음 속에 불안의 장막을 친 것은 단 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저 역시도 뭐라고 장담할 수가 없군요. 그가 과연 비천룡 삼절검 청흔을 꺾을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저 역시도 아직 그의 진력을 알지 못하고 있는 처지이니 말 입니다.”
지낭이라 불리는 천기룡 단목우도 청흔에 관해서만은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모양이었다. 구정회의 쌍벽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지룡 백무영의 존재는 자신이 어떻게든 막아 보고 견제할 수 있지만, 무력(武力)의 중심인 비천룡 삼절검 청흔을 막고 견제할 만한 인재가 군웅팔가회에는 없었다. 다들 그보다 어느 정도 기량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올해 드디어 삼절검 청흔을 견제할 만한 인재가 천무학관에 들어왔다. 단목우가 모용휘에게 거는 기대는 그만큼 큰 것이었다. 때문에 그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솔직히 그 대단한 비천룡 청흔을 검으로 꺾는다는 건 아직 일 학년인 그에겐 무리라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 금 우리에겐 회주도 안 계시는데 어찌 하면 좋습니까?”
우두머리의 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은 언제나 조직을 불안에 빠트리는 일이었다.
“우두머리가 현재 부재중인 건 저쪽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회주가 폐관수련을 하는 동안은 제가 회주 대리를 맡고 있다는 것을 미리 언급해 두었으니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긴밀한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그의 말에 불만이 있을 수 없었다.
“물론 최선책은 모용휘를 우리 진영에 넣는 것입니다. 만일 거절한다 해도 어차피 그는 팔대 세가의 사람이니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용천명 선배님께 도움을 요청해 보지요.”
그제야 모두의 얼굴에 희색이 도는 것 같았다. 모용휘의 삼촌뻘 되는 성광환상검(星光幻像劍) 모용천명이 나선다면 아무리 돌부처 같은 모용휘라도 움직이지 않 고는 배기지 못할 것이리라.
“한 가지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요즘 구정회 측의 합격술 연구회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게다가 모용휘를 견제하기 위해 구정회 쪽에서 합격술 연구회를 보낼 예정이란 정보도 입수되었습니다.”
대외 정보 수집은 천기문 담호추의 임무였다. 그는 한 번도 이 일을 소홀히 한 적이 없어 모두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이상하군요? 정면에서 부딪치지 않고 우회적인 방법을 쓰는 것은 백무영의 취향에 맞지 않은 일일 텐데요? 주위의 비난을 받을 위험마저 있는 일은 그의 취향이 아닙니다.”
계략만으로는 명예를 획득할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어려움은 더욱 큰 것이었다. 더군다나 백무영의 결벽증으로 볼 때 이런 옆구리 찌르기 는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번 움직임은 하부 조직의 독자적인 움직임인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예봉을 꺾어 놓겠다는 의도겠지요. 경고의 의미와 함께요.”
천기룡 단목우의 지적은 정확한 것이었다. 과연 형산일기 백무영의 최대 경쟁자이자 군웅팔가회의 지낭다웠다.
“합격술 연구회라 하면 구정회 산하 세력 중에서도 일이 위를 다툰다는 연수합벽회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까?”
하북 팽가 출신의 팽조영이 놀라 부르짖었다. 그들이 나선다면 과연 일이 쉽지 않으리라. 두 명 이상이 힘을 합쳐 펼치는 그들의 검진은 무시무시한 위력을 자랑하 고 있었다. 그들의 검진은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 아니라 셋도 된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고 있는 증거이기도 했다.
“쳇, 혼자서는 겁나서 싸우지도 못해 떼지어 공격밖에 못하는 못난이 녀석들이 왜 나선다는 거야.”
성격이 불같기로 유명한 곤의 명가 광동 진가의 진무수가 욕지기를 내뱉었다. 혼자선 아무것도 못하는 겁쟁이 무능력자라는 욕은 합격술 연구회(연수합벽회)를 싸잡아 매도할 때 적대 세력에게 가장 즐겨 쓰이고, 또 애용되는 욕이었다. 그러다 보니 듣는 쪽으로서는 가장 듣기 기분 안 좋은, 시쳇말로 엿같은 말이 되어 버려 이 욕이 나오는 순간 합벽회 측은 사생결단 낼 듯이 달려든다. 만일 누군가가 연수합벽회와 싸움박질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싶다면 그들 면전에 대고 이 욕을 한 번 내뱉어 주면 된다. 그 다음은 알아서 진행된다.
물론 합격술이라는 것이 하나 더하기 하나로 둘이 아닌 둘 이상의 힘을 발휘하도록 연구하는 무학인 만큼 개개인이 약하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하지만 합격술이 라는 게 개인 혼자만으로는 성립되지 않다 보니 자연 이런 욕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결코 그들이 개인으로 떨구어 놓았을 때 비실거린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욕설과 매도 문구에 필요한 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나 논리, 또는 격조가 아니라 감정적이고 격정적이면서 신경질적이고 노골적인 감성이 필요한 것 이다.
“어쨌든 그들이 나서면 일이 쉽진 않겠군요.”
남궁세가의 둘째 남궁기가 걱정스런 어조로 말했다. 한 가지 근심을 덜었나 했더니 또 다른 근심이 그들을 덮친 격이었다.
근심 어린 얼굴을 한 그는 주작단에 있는 남궁상의 형이기도 했다. 그의 동생은 현재 군웅팔가회를 떠나 묵환회라는 곳에 몸을 담고 있었다. 구성원이 오직 열여섯 명뿐인 작은 모임이었지만 그는 그곳이 더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에 무릎 꿇을 칠절신검 모용휘가 아니라고 봅니다. 검성의 후계자란 이름을 거저 얻지는 않았겠지요. 그보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자꾸 우리 군웅팔가회와 모용휘와의 접촉을 구정회 쪽에서 방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게다가…….”
“흥, 그까짓 방해 공작이야 무슨 상관 있습니까. 그는 어차피 팔대 세가의 일원. 당연히 우리 군웅팔가회 산하의 도백회에 들어오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성질 급한 진무수가 군웅팔가회의 지낭 천기룡 단목우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내뱉었다. 직선적인 것도 좋지만 언제나 앞뒤 구분을 못하고 날뛰 는 데다가 끈기가 없는 게 진무수의 단점이었다. 얼마나 성질이 사나우면 광풍곤(狂風)이라는 별호를 얻었겠는가.
때문에 그의 절기인 진가 무극곤법(舞劇榥法)도 해일처럼 거칠고 사납기는 하지만 정밀함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원래 무극곤법은 사나움보다는 정묘함을 묘법으 로 삼는 곤법이었다.
“검성의 후계자가 도백회에 든다니, 그것 참 생각할수록 모순된 일이 아닐 수 없구만.”
항상 냉소적인 황보 세가의 황보천강다운 말이었다. 그는 태어나고부터 이 순간까지 세상을 바르게 보는 법을 배우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의 세상 보는 법은 항상 삐딱하기만 했다.
“지금 우리의 선결 과제는 어떻게 해서든 모용휘를 우리 군웅팔가회에 끌어들여야 한다는 겁니다. 게다가 지금 관내에는 모용휘에 관한 이상한 소문이 떠돌고 있 습니다.”
“모용휘가 애소저회에 가입했다는 소문 말입니까?”
한 회원이 물었다.
“예, 바로 그겁니다. 그 건에 대해서 본인은 가타부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애소저회라? 그의 성격으로 볼 때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정보 담당인 담호추의 의견이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단목우의 눈에서 결의와도 같은 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소문이 사실이라도 상관없습니다. 팔대 세가의 소중한 인재를 애소저회 같은 삼류 동호회에 넘겨줄 수는 없습니다. 만일 소문이 사실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데리고 올 것입니다. 이번에야말로 삼성제 우승의 영광을 구정회로부터 탈환해 올 때입니다. 십 년 동안 갈구해 온 비원입니다. 올해를 놓치면 우리는 또다시 삼 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 점을 항상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드디어 회의가 끝났다. 그러나 아무도 자리를 뜨는 이가 없었다. 그들은 지금 각자 모두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중이었다. 삼성제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지금 은 좀더 두고 볼 때이다.
어쩌다 보니 모용휘의 승급 심사일이랑 비류연의 승급 시험이 겹치게 되었다. 같은 날 승급 심사를 보게 된 것이다. 게다가 둘 다 중간 과정을 모두 건너뛴 오검룡 과육검룡에 대한 도전이었다.
같은 날 시험을 치르는 놈들이 둘 모두 중간 과정 다 건너 뛴 놈들이라니 주위가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이 그들의 무모함을 성토하는 비판 어린 목소리였 다.
모용휘의 상대도 비류연 앞으로 보내진 무수한 비무첩들 가운데서 뽑혔다. 어떻게 모용휘의 상대가 비류연에게 보내진 비무첩 가운데서 뽑힐 수 있었던가? 사건 의 내막은 다음과 같았다.
검존 공손일취 앞에서 검성전 우승을 공언한 모용휘는 이를 위한 첫 발자국인 승급 시험을 앞두고 있었지만 마땅히 승급 비무를 신청할 사람이 없었다. 평소 공부 와 수련밖에 할 줄 모르던 관계로 그의 인간 관계는 매우 빈약한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용휘가 시험시 비무 상대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해결의 실마리 를 던져 준 이가 바로 비류연이었다. 왠일로 비류연이 선심 쓰나 했지만 역시 속셈은 있었다.
비류연은 수십 장의 비무첩을 모용휘의 눈 앞에 펼쳐 보였다. 이것도 비류연이 받은 수많은 비무첩 중 일부일 뿐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비무첩을 보내거나 악의 가 득 찬 저주 편지를 보내는 건 점잖은 양반 축에 속하는 편이었다. 그 날 이후 길 가다가 다짜고짜 덤벼드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인간이 돌변해 무작정 검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걸 당하는 것은 미칠 노릇이었다. 그래도 비류연이나 되니깐 이 정도로 무사태평할 수 있는 것이다. 비류연이 말했다.
“자, 이 중에서 제일 맘에 안 드는 놈 둘만 골라. 그게 귀찮으면 그냥 제비뽑기처럼 뽑아도 돼.”
그렇지 않아도 승급 비무 상대 때문에 고민중이던 모용휘는 시키는 대로 했고, 그래서 둘이 상대로 결정된 것이다. 자신의 앞으로 보내져 온 결투 신청서를 아무렇 지도 않게 남에게 떠넘겨 버리는 엽기적인 행동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비류연이었다. 모용휘가 뽑은 비무첩의 주인 중 그의 비무 신청을 거절한 이는 없었다. 그들도 내심 소위 천재라 불리는 모용휘를 꺾고 이름을 떨치고 싶은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간 과정을 모두 건너뛰고 오검룡과 육검룡의 시험을 치르는 둘에 대한 주위의 평은 감탄보다는 그들의 오만을 비판하는 ‘건방진 애송이 두 놈’이라는 평이 더 우세했다.
시험 당일 날이 밝았다. 강의가 잡혀 있지 않는 날이다. 비류연과 모용휘, 두 사람 모두 오늘 있을 시험에 별다른 부담을 안고 있지는 않았다. 그만큼 자신들의 실력 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검룡소라 불리는 시험장으로 향하는 비류연과 모용휘 앞을 가로막는 두 사람이 있었다. 둘 모두 마른 체형에 황색 무복 을 걸치고 같은 모양의 검을 차고 있었는데, 풍기는 분위기가 마치 쌍둥이처럼 흡사했다.
“네가 바로 칠절신검 모용휘냐?”
볼일은 아무래도 모용휘한테 있는 모양이었다.
“왠일이야? 널 만나자는 손님이 다 있고?”
비류연이 한 마디했다. 하지만 그 간만의 손님들은 별로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본인이 바로 모용휘입니다. 저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습니까?”
무뚝뚝하긴 하지만 예의를 잃지 않는 선에서 모용휘가 되물었다. 그 둘 모두 모용휘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이 마치 한 몸처럼 같이 한 발을 내밀었다. 그들의 동작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고도의 수련을 통해 이루어진 이신일체(二身一體)의 숙련된 동작이었다.
“긴말 필요 없다. 귀찮기만 할 뿐이지. 네가 그렇게 강호의 명성대로 대단하다면 한 번 겨루어 보자!”
오른쪽에 서 있던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가 외쳤다.
“저자는 곤륜파의 직전 제자인 곤륜일검 노주생이로군. 곤륜쌍검 중 형에 해당하지.”
그의 정체를 먼저 알아본 건 장홍이었다.
“우릴 아는 사람이 있었군.”
놀랍다는 듯이 노주생이 말했다. 일 학년 애송이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으리라고는 짐작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변한 것은 없지.”
왼쪽에 있는 호리호리한 몸매의 검객이 바로 곤륜쌍검 중 동생인 채하군이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친형제 사이가 아니었지만 친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다. 그들이 익힌 특이한 연수합격술은 그들을 쌍둥이보다 더 가깝게 만들어 주었다.
“본인은 함부로 검을 겨루지 않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시험 약속이 있으니 그쪽의 청을 받아들일 수 없군요.”
모용휘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겁먹은 건가?”
동생 채하군이 입 안에 고인 침을 내뱉듯 말했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 정도의 도발에 넘어갈 모용휘가 아니었다. 그가 그 동안 쌓은 수양은 그 정도로 얕지 않았 다.
“사사로운 비무 결투는 분명 학칙으로도 금하고 있는 것. 본인은 학칙을 어겨 가면서까지 예정에도 없는 비무를 벌이지는 않습니다. 돌아가 주시길.”
분명 학칙으로 명문화되어 있지만 현실적으로 가장 잘 안 지켜지고 있는 학칙 중 하나이기도 했다.
“검성 모용정천 대협의 손자가 이런 겁쟁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비웃을 일이로군. 안 그렇습니까, 형님!”
채하군이 빈정거리며 노주생을 바라보았다. 허나 그는 이내 황급히 고개를 돌려야 했다. 갑자기 찌를 듯한 살기가 모용휘의 전신에서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긴장 이 그의 척추를 타고 순식간에 뇌리 속까지 흘러 들어갔다.
검성의 이름은 곤륜쌍검 정도가 감히 건드릴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냉정하고 침착한 모용휘를 가장 손쉽게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비책이기도 했다.
“무슨 담으로 감히 그런 망언을 입에 담으십니까? 해서 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자가 이곳 천무학관에 머무를 자격이 과연 있을까요?”
나직하지만 힘있는 목소리, 상대를 압도하는 목소리였다. 도저히 일 학년의 기개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박력이었다.
“닥쳐라. 그렇다면 증거를 보여 봐라.”
채하군의 말이 신호가 되기라도 하듯 곤륜쌍검 의형제가 모용휘를 향해 덮쳐 왔다. 공격은 역시 합격술이었다. 그들의 분위기와 행동으로 봤을 때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막상 결투가 시작되고 나니 모용휘도 감히 그들의 검기(劍技)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검극의 무수한 변화가 노도처럼 모용휘의 전신을 덮쳐 왔 다. 마치 그의 몸이 무수한 검날 속에 갇힌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양의합벽검진(兩意合壁劍陣)!”
장홍이 놀라 외쳤다. 그는 대번에 곤륜쌍검이 펼치는 합격술의 종류가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그것은 두 명이 펼칠 때 가장 최고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곤륜파의 지고 무상한 연수합격술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것은 합격술 연구회에서 연구를 통해 보강에 보강을 거듭한, 더욱 강력해진 양의합벽검진이었다. 지켜보 는 장홍의 손에 식은땀이 흥건히 배였다. 모용휘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이겨라, 휘. 그딴 건 무찔러 버려!”
주위를 가득 채우는 무거운 긴장감 속에서 비류연만이 애들처럼 속 편하게 목청 높여 모용휘를 응원하고 있을 뿐이었다.
과연 합격술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합격술 연구회의 인재답게 그들의 연수합격술은 완벽했다. 그들 개개인은 모용휘의 상대가 되지 못할지 모르지만 둘 이 힘을 합치면 천재라 불리는 모용휘를 궁지에 몰아넣을 정도로 강한 힘을 발휘한다.
“큭!”
두 명이 쌍이 되어 펼치는 양의검진답게 노주생의 검이 모용휘의 검을 묶는 동안 그 빈틈을 노려 채하군의 검극이 모용휘의 어깻죽지를 훑었다. 선혈이 튀어 올랐 다.
“앗!”
“이런!”
효룡과 장홍의 입에서 동시에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설마 이렇게 쉽게 어깨를 내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제 그만 무릎 꿇고 솔직히 패배를 시인하는 게 어떤가? 더 이상 검을 움직일 필요도 없어 보이는데…….”
잠시 모두들 호흡을 가다듬는 틈을 타서 승기를 잡자 여유가 생겼는지 동생 채하군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모용휘의 눈에는 여전히 패배의 낌새를 찾을 수 없었다. 그의 눈동자는 심연의 호수처럼 맑고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모용휘가 검을 중단세로 잡고 몸의 정중앙에 곧추세웠다.
“지금부터 진심으로 상대해 드리죠. 조심하시길.”
나름대로 신경 써 준 경고였지만 승기를 잡고 있다고 여기는 곤륜쌍검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다시 세 명의 검이 한데 어울리기 시작했다. 검광(劍光)이 난무 하는 가운데 점점더 장내의 기세가 험악해져 갔다.
점점 긴장을 더해 가는 장내를 주시하느라 효룡은 미처 또 다른 존재가 등 뒤로 다가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정말 훌륭한 검술이로군요.”
효룡의 시선이 어느새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존재를 돌아보았다. 효룡의 눈에 순간 이채가 어렸다.
“여자??
그곳에는 한 명의 아리따운 소녀가 등에 쌍검을 메고 서 있었다. 그녀는 바로 이진설이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공격해 들어오는 곤륜쌍검의 연수합격술은 아주 정묘하고, 맞물리는 톱니바퀴처럼 완벽했다. 그에 맞서는 모용휘도 감히 경시할 수 없어 일 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가 수세에 몰릴 때마다 왼쪽 어깨에 입은 상처에서의 출혈도 많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모용휘가 누구인가. 천무삼성의 일인인 검성 모용정천의 손자이기보다 손위의 형제들을 제치고 후계자로 더 이름 높은 사람이었다. 학관 들어오기 전부터 강호를 진동시킨 칠절신검의 별호는 아무런 수고도 없이 거저 얹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검이 수세에서 점점 공세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정말 완벽한 검술이군요! 그렇지 않은가요?”
모용휘의 검기를 지켜보던 이진설의 평이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견해에 대한 효룡의 동의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소. 천무학관에 아무리 용봉기재(龍鳳奇才)가 많다고 하지만 아마 저만큼 정묘한 검기를 쓸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을 거요.” 그녀의 기대대로 효룡이 동의해 주었다.
“저도 저렇게 강하면서도 부드럽고, 빠르면서도 매끄러운 검기를 선보일 자신은 서지 않네요.”
그것은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모용휘의 검은 그 속도나 시기, 초식의 변화, 힘의 배분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가 없이 완벽했다.
“본인도 마찬가집니다. 하지만 그의 검기를 알아보는 소저의 안목도 범상치 않습니다. 상당한 수련을 쌓으셨군요.”
“호호, 감사해요. 같은 쌍검을 쓰는 사람에게 그런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매우 좋네요.”
“그렇다면 한 번 더 해 드릴 수도 있지요. 한 번 더 해 드릴까요?”
효룡이 웃음 지으며 말했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는 미소였다. 그의 말에 이진설은 그저 생긋이 웃어 보였다.
모용휘의 검이 한 번 공세로 전환되자 곤륜쌍검도 낭패한 몰골을 감출 수는 없었다. 한 번 밀린 전세를 다시 뒤집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을 본 효룡이 말 했다.
“이제 슬슬 끝낼 때가 된 것 같군요.”
효룡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더 이상 지체할 생각이 없는지, 모용휘의 눈에 기광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그의 검이 절초를 펼쳐 냈다.
은하유성검법(銀河流星劍法) 검기 오의 제삼식(第三式) 은하성(銀河星光)!
모용휘의 검이 눈부신 백광으로 물들었고, 그 속에서 은하수 같은 별들이 튀어 나왔다. 그리고 상황은 끝났다. 곤륜쌍검은 뒤로 다섯 발자국을 물러난 다음 망연자 실할 수밖에 없었다. 모용휘의 검이 드디어 그들의 합벽술을 깨트린 것이다. 검진이 완전히 붕괴된 이상 그들에게 더 이상 싸울 의욕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짝짝짝!”
적을 물리치고 호흡을 고르고 있는 모용휘의 귀에 난데없는 박수 소리가 들려 왔다. 가늘고 맑은 느낌의 소리로 볼 때 분명히 여자의 섬섬옥수로부터 나오는 소리 였다.
‘여자? 누구?”
아직 이곳 천무학관에 들어와서 여인을 사귄 적이 없는 모용휘였다. 하지만 천자조를 비롯한 모든 여협들의 화제를 한몸에 집중시키고 있는 모용휘는 날이면 날마 다 거르지 않고 날아오는 연서를 거절하기도 바빴다. 그저 같은 천자조의 여관도들조차도 몇 명의 얼굴만 알고 있을 뿐인 그가 아는 여자가 있을 리 없었다.
모용휘가 이진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같은 강의실에서 본 기억이 있는 것도 같았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검술이었어요. 감탄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훌륭했구요.”
만면에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이진설이 말했다. 밝고 건강한 미소였다. 그제야 모용휘는 눈 앞에 있는 아리따운 소저가 자신과 같은 음공 수업을 듣는 소저임을 알 아차렸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고맙소.”
모용휘의 생긴 것 답지 않게 무뚝뚝한 대답이었다.
“그 친구 참, 차갑기는…….”
냉담하기만 한 모용휘에게 핀잔을 준 효룡이 이진설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이 얼음탱이 친구에게 맡겨 둬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소저의 방명이 어찌 되시는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소생이 알아도 되겠습니까?”
“호호호, 실례라니요. 소녀는 이진설이라고 해요.”
“아아, 쌍검진천으로 이름높은 쌍검술의 명가 전주 이가의 장중보옥이셨군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호호호, 과찬이세요. 이렇게 통성명을 나누는 건 처음인 것 같군요.”
이진설은 무림의 여식답게 꽤나 개방적이고 활달했다. 그런 모습이 주변 사람들을 절로 즐겁게 해주는 것이다. “그렇군요. 소생은 태을검문의 효룡이라고 합니다. 별 볼일 없는 검객이지요.”
효룡이 얼른 자기 소개를 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워요. 하지만 등 뒤의 그 멋진 쌍검을 보니 별 볼일 없는 분은 절대 아니신 것 같군요.”
천 송이 꽃이 만개하는 듯한 화사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퍼졌다. 그녀의 미소를 보자 효룡의 마음도 절로 유쾌해지는 것 같았다.
“그럼 시험 시간이 급해 가 봐야 할 것 같소. 이만 실례하겠소.”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냉정하게 몸을 돌리는 모용휘였다. 곤륜쌍검과의 예정 없는 싸움으로 시간을 너무 지체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정말로 지체 없이 신형을 돌렸다.
“참 무뚝뚝한 사람이네요.”
모용휘의 시종일관 계속되는 냉담함에도 미소를 잃지 않는 이진설이었다. 그런 그녀를 무시하는 모용휘의 태도가 효룡은 조금 못마땅했다.
“제가 나중에 혼을 내주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자 앞이라 그런지 짐짓 큰소리치는 효룡이었다.
“호호호, 참 재미있으신 분이시네요. 그런데 이제 가 봐야 하지 않나요?”
이진설은 짧은 교소를 터트리며 효룡의 등 뒤를 가리켰다. 그곳에 이미 저만치나 멀리 가 버린 모용휘와 비류연이 있었다. 그들은 지금 정말 시간이 급했던 것이 다. 노닥거리는 효룡까지 챙겨 줄 여유가 없었다.
“아리따운 이 소저로부터 그런 칭찬을 듣는 건 과분한 영광이라는 걸 꼭 가르쳐 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효룡도 신형을 날려 모용휘와 비류연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모용휘와 비류연은 헐레벌떡 뛴 후에야 간신히 시험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맞출 수 있었다. 만일 오늘 시험을 놓쳤다면 당분간은 승급을 포기해야 될지도 모를 일 이었다.
곤륜쌍검과의 싸움으로 출혈이 있었던 왼쪽 어깨는 몇 가지 혈도를 짚은 뒤 천으로 감는 간단한 응급 처치만 되어 있었다.
그의 첫 번째 상대는 형산파 출신의 검재 오문형이었다. 그가 모용휘의 상처를 보고 물었다.
“자네, 그 상태로 괜찮겠나?”
“문제 없습니다.”
모용휘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상처 입은 사람을 핍박해 이겼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라네.”
그래도 마음이 찜찜한 지 오문형이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는 당당한 무인이었고, 자부심도 높은 사람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제 말은 제가 책임집니다.”
여전히 모용휘의 의지는 강철 기둥처럼 확고했다. 말을 번복할 것 같지는 않았다.
모용휘의 말대로 오문형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부상으로 인해 모용휘가 불리할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두 사람의 승부는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출혈 때 문에 왼쪽 어깨 쪽의 혈도를 봉쇄해 놓은 탓에 왼팔의 감각이 정상이 아니었다. 때문에 모용휘는 전력을 다해 속전속결로 승부를 내려고 한 것이다.
검성의 후계자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모용휘는 비무 내내 전황을 주도해 나갔다. 붉게 물든 왼쪽 어깨는 그에게 아무런 장애도 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비무 내 내 시종일관 침착성을 잃지 않던 모용휘의 검이 세 번 밝게 빛나고, 세 번 별을 뿌리자 오문형은 자신의 패배를 시인했다. 부상으로 인한 고전은커녕 비무는 오히려 모용휘의 승리로 싱겁게 끝나 버리고 만 것이다. 역시 칠절신검(七絶神劍)이라는 감탄사가 터져 나올 만큼 대단한 신위(神位)였다.
두 번째 시합은 천웅보 출신의 장대평이었는데, 그와의 비무는 첫 번째보다 더욱 쉬운 편이었다. 그는 파풍도를 휘두르며 모용휘의 검 아래에서 삼십여 초를 버티 다 그의 칼날이 톱니처럼 빠진 후에야 비로소 패배를 인정했다. 그 동안 제대로 된 공격을 한 번 펼쳐 보지도 못한 그는 스스로의 패배를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의 비무는 모용휘의 승리로 돌아갔고, 이렇게 해서 그는 오검룡의 자격을 손에 넣게 되었다.
금방 승부가 난 모용휘와는 달리 비류연은 또 상황이 틀렸다. 오검룡과 육검룡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실력이 천지 차이였다. 역시 첫 판은 그 를 향해 이빨을 갈고 있는 단대풍이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단대풍은 전에 주작단과 함께 있던 애송이가 빙봉수호대의 제일 공적(公敵)인 비류연과 동일 인 물임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네…… 네놈은!”
검룡대에서 다시 비류연을 마주 한 단대풍은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그자는 다름 아닌 바로 며칠 전에 주작단과 어울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면박을 주었던 바로 그놈이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놀라고 그래요? 처음 만난 것도 아닌데 수줍음을 탈 건 없잖아요?”
싱긋 미소지어 보이며 비류연이 말했다.
“애송이, 네…… 네놈이 어떻게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것이냐?”
단대풍은 아직도 사태 파악을 못하고 비류연을 ‘애송이’로 불렀다.
“정신이 없으시군요. 어떻게 오늘 자신과 비무를 약속한 사람의 얼굴도 못 알아볼 수 있는 거죠?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이…… 이럴 수가……. 네놈이 바로 그놈이라니…….”
자신이 직면한 놀라운 사실에 단대풍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다고 해야 하나요, 아니면 이것도 운명이라고 해야 되나요?”
“큭큭큭! 네놈이 바로 그 찢어 죽일 놈과 동일 인물이라니 마침 잘되었다. 두 번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을 테니깐 말이다. 나의 번거로운 수고를 덜어 주어 고맙 다.”
두 사람이 동일 인물임을 안 그 순간부터 비류연에 대한 분노와 살의가 열 배는 더 짙어지는 것을 단대풍은 느꼈다.
“쿠쿠쿠! 어쨌든 오늘 이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겠군요.”
그의 깊어지는 분노와 짙어지는 살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비류연은 키득거리며 말했다.
“뭘 말이냐?”
“당신이 정말로 백호(하얀 호랑이)인지 아니면 단지 백호(하얀 여우)일 뿐인지 말이에요.”
비류연의 신랄한 조롱에 단대풍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자신은 가장 끔찍하게 살해할 서른여섯 가지 방법을 궁리중인 사람 앞에서 빙긋빙긋 잘도 웃는 비 류연의 뻔뻔스러움과 강철같은 안면은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내심 울컥하는 그에게 비류연의 미소가 왠지 불길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가 지닌 무인 특유의 육 감이 쓸데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이 건드리지 말아야 할 존재를 건드렸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솟구치는 살기 때문에 자 신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