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권 19화 – 새로운 일행

새로운 일행

다음 날 새벽이 되자 일행은 어제저녁에 만들어 둔 식은 만두로 아침 식사를 급히 해결한 후 출발했다. 아직 상대를 완전히 따돌린 것이 아니기에 놈들도 흩어져서 공주 일행을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을 테니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말을 구할 수도 없었기에 여태껏 해 오듯 흑의 위사가 공주를 안고 경공술을 펼쳐 일 행은 최대한 빨리 강수(崗守)에 도착할 생각이었다. 쫓기는 중이었기에 감히 관도(道)로 나갈 생각은 못 하고 산길로 산길로 달리고 있는데, 앞쪽에서 마차와 함 께 말을 탄 다섯 명의 인물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최대한 빨리 말을 몰아대는 것으로 보아 아주 급한 용무가 있는 듯 보였다.

묵향은 임방이 말릴 사이도 없이 안고 있던 공주를 내려놓은 다음 길을 가로막아 섰다. 공주 일행에게 가까워진 마차와 그 호위들은 웬 사람이 길을 막고 서 있자 급히 말을 멈췄다.

“웬 놈들이냐?”

묵향은 진영 공주를 힐끗 보며 말했다.

“이분은 진영 공주 전하시다. 너희들은 우리들을 강수까지 안내해 줘야겠다.”

“…..”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곧이어 오른쪽에 있던 험상궂게 생긴 사내가 정중히 말했다.

“그대들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증거를 제시해 주기 바라오.”

그러자 모두의 눈길이 진영 공주에게로 쏠렸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이 곧이어 벌게지더니 앙칼지게 외쳤다.

“증거는 무슨 증거란 말이냐? 네 녀석들은 본녀가 공주란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냐?”

노기에 찬 그녀의 말을 듣고 묵향도 잠시 자신들 패거리의 꼬락서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송의 신민들은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호패(戶牌)를 가지 고 다닌다. 그것이 있어야 관에서 통제하는 모든 곳을 통과할 수 있다. 하지만 무림인의 경우 관병들 따위는 생각도 안 하므로 자신들만의 표식인 각 문파나 직위를 나타내는 독특한 문양의 명패를 호패와 함께, 또는 명패만 가지고 다니기 마련이었다. 만약 검문을 하면 그곳을 돌아서 통과하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공주를 나타내는 어떤 패(牌)가 있다는 말은 누구도 들은 바가 없었다. 또 관병들조차도 황족을 나타내는 호패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왜 그런고 허니 황족인지 아닌지는 호위하는 인물들이 누군지 보면 모두들 아는 노릇이었으니까 구태여 신분 확인 작업 따위의 절차도 필요 없었다. 그리고 공주의 표정을 보 니 자신을 증명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모양이었다. 상대의 이목을 속인답시고 남장을 한 공주나 공주를 호위한다는 인물, 즉 묵향과 임방의 모양새를 보고 황족이나 황군을 떠올리라고 한다면 너무 무리한 요구였다.

공주가 벌게진 얼굴로 대들자 아예 상대는 멸시조로 나왔다.

“호오, 이건 심하군. 요즘 공주 마마들은 황군의 호위도 없이 바깥출입을 하시는 모양이지?”

“그러게 말이야. 시녀도 옷도 노잣돈이 떨어져서 팔아 먹으셨군.”

“요와의 전쟁에서 그 많던 황군은 다 죽은 모양이야. 저런 놈들이 황군이라면…….”

이러쿵저러쿵 한소리씩 해 대자 공주의 얼굴은 벌게지다 못해 퍼레지더니 악을 썼다.

“저런 발칙한 놈들을.. 본녀를 업신여기다니. 여봐라, 저놈들을 쳐라.”

그러자 여태껏 공주의 말이라고는 귓등으로 듣던 묵향이 얼씨구나 하고 싸늘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검을 천천히 뽑았다. 묵향이 척 보아도 상대는 정기(精氣)를 내 뿜는 것이 정파를 자처하는 무리들처럼 보였다. 그런 데다가 ‘저런 놈’ 운운하고 있으니, 공주한테 화풀이하기는 글렀으니 새로 생긴 화풀이 대상인 저놈들을 몽땅 다 죽여 버린 다음, 그 책임은 공주한테 홀딱 뒤집어씌울 생각이었다. 사태가 돌아가는 모양을 보던 임방은 급히 앞으로 나서며 묵향을 제지한 다음 상대에게 말했 다.

“귀하들의 주인에게 한 말씀 여쭐 수 있게 해 주실 수 없겠소? 그편이 쓸데없이 검을 교환하는 것보다 좋을 거외다.”

“하하하, 별 미친 녀석들을 다 보겠군. 길 앞을 막아서서 공주 운운 해 대더니 이번에는…….”

챙! 챙! 챙!

그와 동시에 묵향의 검이 그 녀석에게 날아갔다. 상대는 더 이상 말을 할 정신도 없이 몸을 피했지만 묵향의 검은 다행히도 그에게까지 날아가지 않았다. 거의 무 방비 상태였던 그는 하마터면 목숨이 날아갈 뻔했지만, 간밤에 묵향에게 혼쭐이 났었던 임방이 암암리에 묵향을 주시했고 그에 대한 대비를 했던 것이다. 역시나 묵 향의 검이 재빠른 속도로 검집에서 쏘아져 나가는 것을 보고 임방도 오른편 호조를 검이 날아가는 방향으로 던졌고, 어기동검술에 의해 조종되는 묵향의 검을 임방 역시 같은 수법으로 세 번에 걸쳐 막아 낸 것이다.

세 번에 걸쳐 호조에게 진로를 차단당한 검은 천천히 미끄러지듯 후퇴하여 묵향의 검집 안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묵향의 입에서는 싸늘한 목소리가 흘 러나왔다.

“네 녀석이 감히 본좌가 하는 일을 막는 거냐?”

“쓸데없이 무력을 쓸 필요는 없지 않소?”

그러면서 임방은 품속에서 옥패를 하나 꺼내어 앞의 인물들이 볼 수 있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

“본인은 초씨세가의 탈명도(脫命刀) 초류빈(楚柳濱)이란 사람이오. 그대들의 주인을 뵙게 해 주시오.”

그러자 상대들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서로 쑤군거리기 시작했다. 탈명도 초류빈이라면 과거 7룡4봉에 들어갔던 인물이며 초씨세가가 자랑하던 신예고수로서 그의 외호처럼 한 자루 도를 악마처럼 잘 다루어 맞붙었던 인물들은 삶을 포기해야 했던 뛰어난 고수다. 수년간 행방이 묘연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저 명패가 초씨세 가에서 사용하는 것이 분명했고, 또 그가 진짜 초류빈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앞의 말도 진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초씨세가는 5대세가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오래된 도의 명가였고, 요즘에 와서는 오히려 가주의 오랜 부재로 인해 세력이 많이 줄어든 5대세가의 말석인 남궁세 가(南宮世家)를 능가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잠시 쑤군거리더니 그중의 한 명이 마차로 달려가 낮은 목소리로 마차 안의 인물과 소곤거렸다. 그자는 곧 돌아와서 정중히 말했다.

“아씨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이리로 오시지요.”

세 사람은 각기 다른 표정으로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아직도 노기를 거두지 않은 공주, 김샜다는 표정의 묵향, 그리고 한숨 놓은 표정의 초류빈이었다.

이때 마차 문이 열리면서 얼굴을 면사(面)로 가린 여인과 시비(侍婢)인 듯 보이는 여인이 황급히 내리면서 일행을 향해 간단히 예를 취했다. 얼굴은 면사로 가렸 지만 날아갈 듯한 작은 학들이 수놓아져 있는 엷은 색 녹의(衣)에 감싸여 있는 날씬한 몸매는 주인의 몸에 밴 예절 교육에 따라 우아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 는 크고 맑은 눈으로 아직도 들고 있는 초류빈의 명패를 바라보며 초류빈을 향해 물어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굵은 편이었지만 탁하지는 않았다.

“만나서 반갑군요. 방금 초 공자께서 하신 말이 정말인가요?”

“그렇소. 이분께서는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고 계시는 진영 공주 전하시오.”

그러자 그녀는 공주를 향해 우아하게 절을 올리며 사죄했다.

“천녀(賤女)가 공주 마마를 배알하옵니다. 수하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어인 일로…….”

그녀의 공손한 태도에 공주는 약간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본녀의 잘못도 있으니 용서하겠노라. 본녀의 일행을 강수에 있는 어림군 사령부까지 안내해 주기 바란다. 관광 중에 적도들의 기습을 받아 황군들은 모두.. 여태까지의 기막힌 고생이 생각나는 듯 공주의 목소리는 후반에 들어 떨리기 시작했고, 이를 눈치 챈 상대방은 재빨리 공주에게 말했다.

“갈길이 머옵니다. 어서 오르소서.”

공주가 먼저 마차에 오르자, 그다음은 면사를 쓴 여인이 올랐고, 시녀가 탄 다음 묵향은 시녀의 옆에 앉았다. 초류빈이 들어오려 하자 마차 안의 공간은 넓었지만 묵향이 손을 내저었다.

“자네는 위야.”

씁쓸한 표정으로 마차 위의 마부 옆 자리에 초류빈이 자리를 잡고 앉는데 그의 귀에 전음이 들려왔다.

<내 정체를 공주에게 알리기 싫어서 이번은 넘어가 주겠지만, 한 번만 더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면 죽을 줄 알아…….>

“그대는 누구인고?”

면사를 쓴 여인이 공손하게 공주에게 말했다.

“소녀는 백운옥(白雲玉)이라 하옵니다.”

“급한 일이 있는 것 같던데…….’

“아니옵니다. 마마를 모셔 드린 다음에 처리해도 충분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