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6권 6화 – 청룡단과 주작단 어디가 이겼을까요?
청룡단과 주작단 어디가 이겼을까요?
-무지무지 화를 내는 비류연!
승리자에겐 당연히 영광이 돌아가야 정상이 아닌가?
허나 땅바닥에 대가리를
박고 있는 주작단원들의 모습 어디에서도
영광이란 단어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당삼을 비롯하여 크게 부상당한 몇 명을 제외한 나머지 주작단의 사지가 멀쩡한 남자들은 땅에 머리를 처박고, 여자 단원들은 의자를 사이좋게 하나씩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리고 있었다. 마치 서림(書林)에서 공부 시간에 졸다 꾸중 듣는 어린아이들 같은 모습이었다.
비류연의 노기 등등한 시선이 차례대로 그들의 몸에 꽂힐 때마다 불쌍한 주작단원들은 찔끔할 수밖에 없었다.
“야! 겨우 그 정도 놈들에게 네 놈이나 당해? 너희들 죽고 싶냐?”
조금 전의 치열했던 격전으로 온몸에 성한 데가 별로 없는 주작단이었다.
하지만 이겼다. 비록 처음엔 고전했지만 나중에 가서는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런데도 뭐가 불만인지 지금 비류연은 주작단원들의 눈 앞에서 방방 날뛰고 있는 것 이다.
염도는 그저 굳은 표정으로 비류연의 뒤에 과시용 병풍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하나 그의 볼이 연신 실룩대고 있는 것을 보니 웃음을 참기 힘든 모양이었다. 깨어진 냉면(冷面 : 차가운 얼굴)을 한 빙검 관철수의 입에서 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염도는 오늘만큼 기쁘고 통쾌한 날이 없었다. 길 가는 아무나 붙잡고 얼싸안 고 춤이라도 추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비류연의 마음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물론 비류연은 이겼기 때문에 크게 마음 상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돈도 무사했을 뿐만 아니라 수십 배가 되어 돌아왔다. 물론 이건 매우 기쁘고 흡족한 일이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이기긴 이겼으되 간신히 이겼다는 게 문제였다. 비류연은 좀더 확연한 실력차를 보이며 이기기를 바랬다.
남들이 들으면 너무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비류연의 생각은 달랐다. 한 순간이나마 고전했던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주작단원들은 이제나 저제나 기상시켜 주기만을 바라고 있었지만, 비류연의 입에서는 ‘기상’ 소리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비록 남자들은 땅에 대가리를 박고, 여자들은 의자 하나씩 손에 쥐고 머리 위로 든 채,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다 해도, 이제 천무학관 사신단 중 최고 실력자는 이 들 주작단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초겨울에 실시된 청룡단과 주작단의 단체 비무는 의외의 결과를 낳으며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주작단의 완벽한 승리로 돌아갔다.
사실 이번 결과는 이미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무는 그저 형식적인 확인 절차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두 곳은 싸움에 임하는 자세부터가 달랐다. 주작단은 등 뒤에 배수의 진을 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궁지에 몰린 쥐, 추적병을 앞에 두고 등 뒤에 만장단애 를 둔 검객! 바로 주작단의 적나라한 심리 상태였다.
만약 졌다가는 그들 16명을 찜쪄 먹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사람이 무려 둘이나 있었다.
둘이 별거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 둘이 담당 스승 염도와 대사형 비류연이라면 이야기는 틀려진다.
그들이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 청룡단은 그러찮아도 자만하고 있던 터에 빙검 관철수의 지도를 받았다고 기고만장해져 있었다. 완벽이 초완벽해 졌는데 적수가 어디 있겠느냐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니 승패는 이미 시작부터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주작단은 몸을 돌보지 않고 달려들었고, 청 룡단은 제 몸 지키기에 급급했다. 생사 대전은 아니었지만, 주작단에겐 생사가 달린 일이었다. 따라서 상처는 주작단이 더 많지만, 승리는 주작단에게로 돌아갔다. 어쩌면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해가 가고 새로운 해가 밝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일도 많고 사건도 많고 구설수도 많은, 다채롭고 화려한 일 년을 보내며 주위의 여러 사람들에게 성대하게 폐를 끼친 비류연도 무사히 진급하여 이학년이 되었다.
물론 주위 사람에겐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놀랍게도 비류연은 낙제하지 않았다. 그의 선배로서의 자격이나 역량은 둘째로 치고, 비류 연도 이제 어엿한 선배가 된 것이다.
물론 올해도 어김없이 파릇파릇하고 싱싱한 후배들이 들어왔다. 하나 비류연은 그런 일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마침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만한 이야기를 들었던 터였기 때문이다.
“어디?”
묘한 표정으로 비류연이 반문했다. 평온을 가장하고는 있지만 지금 그의 마음은 절대 평온하지 않았다.
날이 시퍼런 도끼 같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남궁상은 찔끔할 수밖에 없었다. 산 채로 회를 뜨겠다는 그런 의지가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럴 땐 몸조심 해야 했다.
“어디라고?”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비류연이 되물었다.
“아…아미산(峨嵋山)이요!”
“너 죽을래? 죽고 싶냐? 사망 신고서에 대신 서명해 줄까?”
“켁켁! 대…대사형!… 살…살려주세요! 켁켁!”
비류연의 신형이 전광처럼 움직이더니 순식간에 남궁상의 멱살을 움켜잡고는 옷깃조르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숨통을 조여 오는 옷깃에 남궁상은 숨도 제대로 내쉴 수 없었다.
“어디라고? 그거 거짓말이지? 농담이지? 이번에 아니라고 하면 용서해 줄 용의가 있어. 거짓말이지? 그렇지?”
남궁상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현실은 만년빙설보다 냉정해서 자신의 뜻대로 주문맞춤 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켁… 죄…죄송합니다. 사실입니다.”
“정녕 사실이냐?”
겨우 부여잡았던 멱살을 놓고 비류연이 다시 한 번 물었다. 이번에도 같은 대답이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도를 지닌 살기가 온몸에 가득했다. 남궁상은 죽을 상을 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서 이 역할을 맡기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단주라며, 이런 험난 무쌍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넘기다니……. 그동안 쌓아 놓 았던 우정은 온데간데 없고 대신 이가 바드득 갈릴 정도의 증오만이 그 자리를 메꾸었다. 떠나가는 자신을 안쓰러운 얼굴로 쳐다보던 진령의 얼굴이 뇌리에서 지워 지지 않았다.
‘진 소저, 내가 여기서 살아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내가 당신을 사랑했다는 사실 하나만은 기억해 주오!’
남궁상은 눈을 질끈 감고 대답했다.
“사실입니다. 이번 대사형의 합숙 훈련 장소는 아미산으로 결정되었습니다.”
“…..”
그리고 영원처럼 이어지는 긴 침묵. 언제 주먹이 날아와 자신을 저세상으로 보낼지 내심 두려운 남궁상이었다. 그런데 너무 조용했다. 너무 큰 충격을 맞은 것인 가?
“궁상아.”
“예…! 대사형!”
화들짝 놀란 남궁상이 얼른 대답했다. 그가 지금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여실히 태가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너라면 거기 가고 싶겠냐?”
조용조용한 어조로 비류연이 물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불같이 화내던 모습은 온데간데 찾아볼 데가 없었다. 남궁상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미치지 않은 이상 그런 끔찍한 곳은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아…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절대, 절대로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습니다.”
“호오… 그래? 가기 싫단 말이지……!”
“예!”
남궁상이 힘주어 대답했다. 그의 단호한 태도로 보건대 진심인지 아닌지는 확인해 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비류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물었다.
“그런 악독한 사부를 다시 만나기는 죽기보다 싫고 말이야, 그렇지?”
“예!”
“사부를 다시 만날 바에는 여기서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지?”
“예! 그렇습니다.”
“그런 악몽은 두 번 다시 떠올리기도 싫지?”
“예에! 사형도 그러셨군요. 그때 저희들이 얼마나 모진 고생을 다하고, 갖은 학대를 골고루 다 받았던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섬뜩하고 오금이 저릴 정도 로 끔찍한 악몽이었습니다.
남궁상의 가슴 속에 그동안 남 모르게 쌓여 있던 불평 불만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자신의 복받치는 감정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남궁상은 자신의 눈 앞에 서 있는 비류연의 미소가 점점 더 깊고, 그리고 차갑게 변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덤으로 친근해 보이는 핏대도 이마빡에 떠올랐지만, 그것 역
시 긴 앞머리에 가려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 자신이 누구 앞에서 스스로 자진하여 자기 무덤에 삽질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남궁상은 비류연이 가리키는 사부와 자신 이 알고 있는 사부가 전혀 다른 인물이란 사실을 몰랐던 게 최대의 실수였다.
“흐흐흐! 그래? 그렇단 말이지!”
감히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단 말이지! 비류연의 말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매우 괴씸했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너도 무척이나 가기 싫겠지만…… 솔직히 나도 가기 싫다.”
묘한 어감을 띤 목소리로 비류연이 말했다.
남궁상은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입을 함부로 놀린 것이다.
그런 사소한 것은 절대 잊지 않거나 가슴 속에 새겨두는 비류연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남궁상하고는 다르지만, 어찌 보면 비슷하기도 한 이유로 비류연은 아미산에 죽어도 가기 싫었다. 아니 그에게 있어 죽어도, 절대로 가서는 안 되는 곳이 바로 아 미산이었다.
얼떨결에 갔다가 만에 하나 잡히기라도 하는 날엔!
생각만 해도 끔찍한 비류연이었다.
‘아직 괴물 영감탱이 사부를 이기지 못하는 이상, 절대 아미산 반경 5백 리 안으로 접근할 수는 없어. 뇌신(神)의 힘, 마지막 비의(秘意)를 손에 넣기 전까지 는……..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장소를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런 일을 해 줄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래! 염도라면!’
비류연은 얼른 염도와 상의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아직도 사부에 대한 공경심과 경외심이 부족한 궁상 녀석의 처우에 대해서는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고 비류연은 다급히 신형을 옮겼다.
그날 밤 염도의 처소에서는 기괴한 신음 소리 및 괴성이 터져 나왔지만 헛소문으로 치부되고 말았다.
상대의 멱살을 움켜잡고 골수가 뒤흔들릴 정도로 흔드는 것을 상의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지만, 비류연과의 역동적인 상의를 마친 염도는 다음 날 날이 밝 음과 동시에 초췌한 얼굴에 떫은 감 씹는 얼굴로 천무학관주 마진가의 처소를 방문해야만 했다.
비류연은 절대 아미산은 고사하고 아미산이 자리하고 있는 사천성(四川省) 근처에도 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스스로 지옥문 안으로 걸어갈 만큼 어리석 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