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6권 15화 – 진령의 실수
진령의 실수
‘그것 봐!
저러니 실패는 따놓은 당상이지! ……어…어라? 이런!’
그런데 실패는
저쪽에서만 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실수는 우리 측에도 있었다.
이건 계산 밖의 일이었다.
수면을 뚫고 솟아오른 습격자들은 모두 가을철의 낙엽처럼 후두둑 떨어졌지만, 한 명만은 경미한 상처를 입은 채 배 위로 덮쳐 오고 있었다. 아마 이 암습조의 조 장인 모양인지 움직임부터가 다른 자들과는 월등한 실력차가 있었다. 그의 착지 지점엔 진령이 검을 쥔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악!”
“위험해!”
남궁상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나 움직이기엔 이미 늦었다. 그들 사이의 두터운 신뢰가 이번엔 오히려 방해물로 작용했다. 진령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무난하 게 암습자를 처리할 줄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상이 빗나가다니…….
‘이런! 그렇게 단호하게 손을 쓰라고 일렀건만!’
비류연이 혀를 찼다. 진령이 살인에 대한 고민에 의한 주춤거림만 없었다면, 그 암습자가 이 배에 닿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실수는 자신이 만회하지 않으면..
“푸악!”
진령의 시야가 붉게 변했다.
자신의 검이 상대의 늑골을 베고 심장에 다다라 있었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혈편(血)! 혈(血幕)!
아무리 무인이라고는 하나 감수성 약한 여인인 진령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상대의 심장이 싸늘하게 죽어 가는 느낌이 검을 타고 선명하게 전해졌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순간 암습자의 눈에 한광이 번뜩임과 동시에 어느 새 뽑힌 시퍼렇게 날이 선 비수가 그녀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심장이 반으로 쪼깨진, 이미 주검이라고 단정 지었던 존재로부터의 불의의 습격이었다.
아무리 일신에 뛰어난 무공을 지닌 그녀였지만 이번만큼은 방비할 도리가 없었다.
‘늦었다!’
순간(瞬間)보다 짧은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예린은 자신의 옆에서 질풍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세찬 바람에 흑단 같은 머릿결이 흩날리는 가운 데,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한 명의 사내가 흑의 복면인의 비수를 막으며 머리통을 박살내고 있었다.
‘질풍(風)? 뇌광(光)? 아니면 찰나(刹那)를 가로지르는 섬광(閃光)??
비류연이 찰나지간에 보여 준 놀라운 일격(-擊), 그것은 마치 신기루처럼 경이롭고 환상적인 움직임이었다.
“통증끊기로군요!”
두개골이 박살난 채 갑판에 꼴사납게 널브러져 있는 흑의인의 시체를 보며 장홍이 중얼거렸다. 새하얀 뇌수가 섞인 피가 사방으로 튄 모습은 절로 눈살이 찌푸려 지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서…설마 통증끊기라면?”
장홍의 말에 놀란 효룡이, 경악한 얼굴로 되물었다. 이 물음에 긍정을 나타내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장홍의 얼굴은 심각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헉! 이…이 시체는……. 이게 웬 괴변이란 말입니까?”
그제야 수하의 기별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나온 지국주 수장해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면서 말했다. 장홍이 지금까지의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소상히 알려주었 다. 그의 설명이 계속될수록 수장해의 얼굴은 더욱 굳어져 갔다.
“그…그렇다면 이들은!”
수장해는 기겁하며 경악성을 토해냈다. 장홍이 확인시켜 주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마디로 잘라 말해서 이들이 단순한 수적이 아니라는 소리지요!”
장홍이 단언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청흔이 물었다. 무당산과 천무학관에서만 수련에 전념하였기에, 강호 경험이 일천한 그로서는 장홍의 말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통증끊기, 혹은 절통법(切痛法)이라고도 불리는 이 수법은 매우 전문적인 살인 수업을 받은 살수들만이 익히는 독특한 수법입니다. 즉, 최후의 일격을 날리기 위 한 비장의 수, 동귀어진(同歸於盡 : 서로 함께 죽음.)의 수법이지요.”
장홍의 말 그대로였다.
검에 찔렸을 때 반격하지 못하는 것은 충격 때문에 몸이 순간적인 충격 마비 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너무나 큰 충격을 몸에 받으면, 신경에 과부하가 걸려 다른 쪽 신경을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마비 증상 때문에 반격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개발된 수법이 바로 절통법이다! 극심한 통증과 충격으로 인한 순간적 마비 상태에 빠지지 않고 반격을 가능하게 해 주는 수법으로 살을 내주고 뼈를 깎는 비법, 그것이 바로 통증끊기이다. 동귀어진의 수법으로 자주 쓰인다.
이것은 신경을 일순간에 마비시켜 상대의 검이 나의 몸 속을 헤집으며 파고들어올 때, 바로 그 순간 최후의 반격을 가하기 위한 기술인 것이다. 운이 좋아 급소를 비껴가면 살 것이요, 급소에 틀어박히면 죽는다.
물론 곧 엄청난 통증이 몸을 엄습해 오지만, 상대가 이미 죽은 터라 마음놓고 아파할 수 있다. 아니면, 최소한 함께 죽을 수 있다. 그래서 동귀어진의 수법으로 분류 되기도 한다.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는 살수들이나 첩보 요원들이 자주 익히는 수법이었다. 일개 수적이 익힐 만한 수법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수적은 아니라는 얘기로군!”
모용휘의 옆에 있던 청흔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들에게도 어엿한 상도의(常道義)가 존재하는 이상 이런 무모한 일을 벌일 리가 없지요.”
장홍이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무슨 원한이 있어 우리들을 노린단 말인가?
“자라나는 새싹이, 꽤나 쓸 만한 재목으로 크기 전에 미리미리 장작으로 만들어 불쏘시개로 쓰고 싶어하는 이가 어디에나 있는 법이죠. 될성부른 떡잎이 못마땅한 이들은 어디에나 항상 있게 마련 아닙니까. 특히나 10년에 한 번 있는 화산 규약 지회 신무 대전이 다가오는 이 시기엔 특히나 말입니다.”
“자네의 말은 설마…….”
청흔이 경악한 얼굴로 장홍을 쳐다보았다.
“이만한 조직을 암중에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단체는 매우 한정되어 있지요. 의심을 피해 갈 순 없을 겁니다. 하지만 더 이상 말하지 마십시오. 아직 확정할 단계가 아니니 말입니다. 이런 애매한 긴장 상태에서 그런 문제 발언을 함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과연 이런 통찰력이 이제 갓 이 학년에 올라간 자의 것이란 말인가?’
장홍의 사려 깊은 말에 청흔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있는 듯 없는 듯하여 별 신경쓰지 않았던 장홍의 놀라운 안목과 통찰력을 대하자, 새삼스럽게 그가 새롭게 보이는 청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