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6권 19화 – 비는 아직 그치지 않았다
비는 아직 그치지 않았다
-표선에서의 사투
“당신 말대로 비가 내렸군요. 붉은 피의 비가!’
무표정한 얼굴에 감정 없는 목소리로 나예린이 말했다.
햇살은 인간 세상의 일에는
관심없다는 듯 여전히 따스하기만 했다.
“아직 그친 건 아니죠.”
대수롭지 않은 투로 비류연이 대꾸했다.
“그런 건가요?”
“그런 거죠.”
“그렇군요.”
나예린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장강 수면 밑에서의 수중전이라는 독특하고 생경한 경험을 하고 올라온 주작단원과 아직까지도 얼빠진 얼굴로 멍하니 서 있는 윤준호는 햇볕에 젖은 몸을 말리고 있었다. 윤준호를 제외한 주작단의 얼굴에 방금 격전을 치른 듯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진령의 신상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남궁상이 자신이 할 일을 제대로 해 낸 모양이었다. 몸이 물에 흠뻑 젖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안색 또한 정상적인 것을 보니 이제는 마음을 다잡은 모양이었다. 나예린을 비롯한 천검조의 사람들은 이들의 태연한 모습에 감탄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어…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요? 아무리 표선에 실린 보물이 중하다고는 하나 이렇게 아무런 경고도 흥정도 없이 공 격해 오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여기서 가장 긴장한 채,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이번 표행의 대표 남창지국주 장강교룡 수장해였다. 그는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을 열심히 부정하며 맹렬히 침을 튀겨내고 있었다.
자연 사람들의 눈살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자자… 지국주님! 진정하세요. 지금 그렇게 흥분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사태를 파악하도록 노력해야지요.”
흥분해 있던 수장해를 진정시킨 사람은 장홍이었다. 그는 매우 노련한 실력으로 혼란 상태에 빠져 있던 수장해를 진정시켰다.
그는 말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휴우! 미안합니다. 제가 너무 흥분했던 것 같군요. 하지만 표국 생활 10년 만에 처음 겪는 일이니…….”
척!
비류연이 손을 들어 수장해의 말을 끊었다.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예린을 바라보자 그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비류연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과연 그녀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비류연은 겨우 진정 상태에 들어가려던 수장해를 다시금 순식간에 혼란지중으로 몰아넣었다.
“이런, 이런! 사람들의 대화를 도중에 끊다니 예의가 결핍되어 있는 놈들이군요.
이제야 좀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려던 사람들을 방해하다니 예의가 없네요. 제3파가 올 것 같아요!”
언제부터 비류연이 예의 범절이라는 거창하고 딱딱하며 실생활에 별로 유용하지도 못한 것을 챙겼는지는 모르지만, 상황은 비류연의 말대로였다.
“지국주님! 쾌선 한 척이 빠른 속도로 표선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표사 하나가 호들갑을 떨며 외쳤다. 무척 시끄러운 목소리라 조금은 목소리를 낮추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비류연은 생각했다. 허나 어디 상황이 그런가. 쾌선은 두세 배나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그들의 목적은 입 아프게 물어 볼 필요가 없어 보였다.
저들은 관례에 따른 대화를 거부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무런 표시도 없는 것으로 보아 수채에 속한 이들은 아니었다. 게다가 언제부터 수적들이 초상권에 대해 신경을..
다가오는 쾌선을 타고 있는 이들은 모두 흑의 복면을 하고 손에는 용염구(龍髥鉤)를 들고 있었다. 암습이 무위로 돌아갔으니 이번에는 총력으로 붙어 보자는 의미 임이 분명했다.
“개새끼들!”
수장해의 입에서 쌍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렇게 관례를 무시하는 수적 놈들은 생전 처음이었다.
얼마나 피가 튀었는지 표선은 원래가 붉은 색으로 도장되어 있었던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물론 이런 식의 군데군데 허옇게 칠이 덜 된 도장이라면, 도장쟁이의 실력을 의심해 봄직하다.
표선은 피의 강을 떠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지독한 습격은 수장해의 20년 표국 인생 동안 처음 당해 보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지금도 갑판 위에선 표사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수적 아닌 습격자들의 시체를 처리하느라 분주했다.
개중에는 깨끗하게 두 동강이 나 뱃속에, 위장 속에 담겨 있는 음식물들을 게워내게 하는 힘을 지닌 것도 있었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꺼멓게 타버려 피 한 방울 안 흘린 시체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죽긴 죽었는데 그 어느 곳에도 상처를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시체도 있었다.
참으로 다양한 시체에 다양한 사인(死因)이었다.
빠른 속도로 다가온 쾌선에서 용염구(龍髥鉤 : 갈고리 모양의 줄달린 던지는 무기)로 표선을 묶고, 달려든 이들의 무공도 남창지국의 표사들이 대항하기에는 벅찬 것이었지만, 이에 대항하는 천무학관 일행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할 만큼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습격한 쪽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에서야 대표두는 왜 강호에 천무학관의 이름이 진동하고 있는지 절감할 수 있었다. 어느 한 명 검기(劍氣)를 자유자재로 다루지 못하는 이가 없는 젊은이들의 실력은 그 자신이 꿈에서나 바라는 그런 실력이었다. 그동안 헛되이 먹은 나이가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그 중 가장 박력 있고 화려하게 싸움판을 휘저었던 것은 염도(刀)의 애도 홍염(紅焰)이었다.
처음에 염도는 싸움판에 끼여들지 않고 비류연이란 이름을 지닌 청년 곁에서 관조자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그러다가 지켜보기가 지겨웠는지 속닥속닥 옆에 있던, 머리카락으로 눈을 가린 청년과 말을 나누고는 도를 뽑아 들었다.
감히 고수들의 격전장에 끼여들지 못하고 지켜만 보던 대표두와 표사들의 얼굴이 느닷없는 열기에 화끈 달아올랐다.
처음엔 수적들이 화공을 펼친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것은 염도의 도에서 뿜어져 나온 그 유명한 검염기(劍焰氣)였다.
진홍십칠염(眞紅十七炎) 검염기(劍焰氣)
제 십이초
용염뢰(龍).
그것은 어마어마한 위력이었다. 과연 천하 오대 도객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초절정 고수의 신위였다.
흐르는 장강마저도 끓어오를 듯한 열기였다. 이런 열기와 무지막지한 위력의 검기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행위 자체가 상식을 무시하는 얼간이 천치 같은 행동인 것 이다. 아마 무모함을 가장 현명하게 몸으로 표현하는 방법일 것이다.
검기가 충천하고 도광이 난무했다. 대충 표선 위의 일을 끝낸 염도는 이에 그치지 않고 적들의 쾌선으로 날아갔다. 삼장(三丈)도 채 안되는 거리에 붙어 있는 관계 로 멀지도 않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염도의 도가 불꽃을 내뿜었다.
모든 상황이 종료된 지금 암습자들의 쾌선은 장강 위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하나 둘 분해되어 강 밑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모두 염도의 작품이었다.
“윽!”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지금 수장해의 머리를 엄습하고 있는 두통을 억제하지는 못했다.
작년, 중양표국주 십팔검 장우양이 떠나며 그에게 얼마나 신신당부했던가!
자신의 서찰을 지니고 오는 청년과 일이 얽히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결코 방심하지 말고 주의하라는 경고였다. 제발 아무쪼록 조심 조심 또 조심, 꺼 진 불도 다시 보고,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는 신중함으로 아무 일 없도록 하라던 당부가 떠올라 그는 마음이 착잡했다.
아무리 지금 그가 운반하고 있는 표물이 고가의 것이라 해도 이 정도의 인원을 동원해 안면몰수하고 전면적인 공세를 가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도대체 일이 어디서부터 잘못 됐단 말인가?”
수장해는 골이 지끈지끈 아파왔다. 이번 두통엔 약도 없을 것 같았다. 하루 빨리 이 표행길이 끝나도록, 의심스럽지만 천지신명에게 비는 수밖에 없었다.
정화수가 없는 관계로 아쉬운 대로 강물을 떠다 놓고 그 앞에서 열심히 절하는 지국주 수장해의 모습은 절실할 정도의 진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무한(武漢)에 가면 당장에 부적부터 하나 만들어야지! 천지신명과 천상 선녀님들이시여, 이 놈을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이때 수장해의 결심 때문에, 그는 무숙에 오자마자 한 곳으로 냉큼 달려갔다.
그곳은 무창에서 그림 잘 그리기로 소문난 화가 한 명이 살고 있었다.
그가 선택한 부적은 한 장의 선녀도였다.
나예린, 이진설, 진령, 남궁산산이 그려진 통칭 사선녀도(四仙女圖). 이 선녀도가 표국업계에서 영험하기로 소문이 나 대유행이 되어 얼마 안 가 표국업계 종사자 치고 이 사선녀도를 몸에 안 지니고 다닌 이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