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권 21화 – 혈교의 출현
혈교의 출현
공주 일행이 마차를 몰아 달린 지 두 시진도 안 되어 옆에서 달려가던 무사가 마차에 가까이 다가오더니 외쳤다.
“추격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자 백운옥이 냉랭히 답했다.
“몇이나 되느냐?”
“50여 기 정도 됩니다. 앞으로 반 시진 정도면 추월당할 것입니다. 지시를..
“멈춰라. 피를 보고 싶다면 그리 해 주면 되지. 감히 본가와 황실을 우습게보다니…….”
백운옥은 공주에게 공손히 말했다.
“공주 마마, 우선 저들을 응징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괜히 놔두면 무리들이 모여서 더욱 힘들게 되오니, 저들의 수가 적을 때 차례로 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 다.”
“좋을 대로 하거라.”
“예.”
백운옥이 마차에서 내리자 마부석에 앉아 있던 초류빈도 함께 내린 다음 호조를 양손에 착용하며 적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적들은 다가오기는 했지만 2백 장 (약 606미터) 밖에서 대열을 멈추고 흩어지면서 마차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약간 당황한 백운옥이 외쳤다.
“모두들 조심하라.”
그러더니 초류빈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이상하군요. 저들은 수가 저리 많은데 2리 거리를 유지한 채 포위하다니……. 지휘자가 누군지 궁금하군요.”
“왜 그러시오?”
“아무래도 활로 공격할 것 같아요. 소녀는 저들이 정면 공격을 해 올 것이라 예상했었는데…….”
그러자 초류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아무래도 제 탓인 모양이군요. 어제 저들과 충돌하여 30여 명을 베었으니까 저놈들도 조심할 수밖에 없겠죠.”
“무림인들은 활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데, 저들은 무림인이 아닌 것 같군요.”
“공주 마마를 노리는 것으로 보아 반란군도 일부 섞여 있다고 봐야 옳을 겁니다.”
이들이 쑤군거리는 동안에 상대는 다섯 명 정도가 한 조씩으로 하여 열 군데에 자리를 잡으면서 넓은 포위망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완성되자 그 우두머리 인 듯한 인물이 소리쳤다.
“항복하라.”
하지만 마차와 그 마차를 호위하고 있는 다섯 기의 무사들이 아무런 대꾸를 앉자 곧장 명령했다.
“쏴라.”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통상적인 활의 사거리는 1천 보(步), 즉 250장(丈) 정도로 잡는다. 그보다 더 날아가지만 250장이 넘어서면 상대 군사들이 입은 갑주를 관통하기는 힘들기 때문이 다. 하지만 이건 내공을 쌓지 않은 인물들이 쏘았을 때 하는 말이고, 무림인이 쏘면 완전히 얘기가 달라진다. 화살에 내공을 실어 날리면 훨씬 더 강력한 위력을 발 휘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일부 무림인들은 활 다루는 법을 배우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활보다는 암기를 배운다. 활처럼 덩치 큰 물건을 들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 도 힘들뿐더러 대부분이 단거리에 일대일 대결을 할 확률이 높기에 오히려 장거리 무기인 활이 거의 쓸모없기 때문이다.
백운옥 등은 활이 날아오며 내는 파공성(破空聲)을 듣고는 얼굴이 굳어졌다. 그 파공성은 상당한 내력이 실려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는 반 란군이 아니라 일정 시간 활쏘기 교육을 받은 무림인들이었고 그 화살은 엄청난 기세로 그들을 덮쳤다.
모두들 각기 지닌 병장기를 뽑아 들고는 화살을 쳐 내기 시작했고, 백운옥도 허리에서 연검을 뽑아 든 다음 휘둘렀다. 적들은 처음 일제 사격을 가한 후 의외로 상 대가 잘 막아 내자 그다음부터는 발사 시간을 길게 잡아 시간을 끌면서 천천히 사격했다. 이를 보고 백운옥이 초류빈에게 물었다.
“저들이 화살을 아끼는 것 같은데……. 준비한 화살이 많지 않기 때문일까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곧이어 도착할 본대를 기다리는 것이겠죠.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지금 포위망을 돌파하고 도망치는 게 좋겠습니다.”
“저쪽에 활을 날리지 않고 이쪽을 지그시 보고 있는 자가 우두머리 같은데, 같이 가시겠어요?”
“영광입니다.”
“너희들은 마마를 호위하라. 가요!”
백운옥과 초류빈은 한 방향을 향해 최대한 빠른 속도로 돌진해 들어갔다. 상대와의 거리는 2백 장. 좀 멀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적들도 이쪽의 의도 를 눈치 채고는 그 두 명에게 사격을 집중했다. 이때 그 우두머리가 말안장에 매여 있던 활을 꺼낸 다음 화살을 먹이고 백운옥을 향해 겨누더니 백운옥이 50장 거리 까지 접근하자 자신이 가진 공력을 최대한 실어서 화살을 날렸다.
피유유융.
화살은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일으키며 백운옥을 향해 날아들었다. 순간적으로 백운옥이 연검을 이용해서 살촉을 쳐냈지만 그때서야 그 화살에 얼마나 엄청난 내 력이 실려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힘을 모두 기울여서 막는다면 별것이 아닐 수도 있었지만 날아드는 여러 개의 화살에 신경이 분산된 틈을 이용해서 날아온 이 화살은 다른 것보다 몇 배의 내력이 실려 있었고, 그것을 모르고 보통 화살처럼 막은 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실수다.”
카앙!
가까스로 화살을 쳐 내기는 했지만 화살이 지닌 내력에 밀려 백운옥의 신형이 무너지면서 뒤로 조금 밀리며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고 그때 또 다른 화살 한 대가 백 운옥의 왼쪽 어깨를 꿰뚫었다.
“끼약…….”
백운옥이 상처를 입은 것을 본 초류빈은 일이 이미 글렀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뒤로 돌아서며 비틀거리는 백운옥을 왼손으로 껴안고는 날아오는 화살 다섯 대 를 쳐 내고 마차를 향해 몸을 날렸다. 뒤에서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쳐 내면서 돌아가자니 처음 돌진해 들어갈 때보다 시간이 몇 배는 더 걸렸지만 어쩔 수가 없었 다.
‘제기랄, 4봉(四鳳)에 들어가기에 한가락 하는 줄 알았더니…….’
무시무시한 내력을 담은 장소성(長訴聲)이 들려온 것은 이때였다.
“우우우우우…….?”
소리의 시작과 끝이 들려온 거리가 대단한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 정체불명의 고수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초류빈은 백운옥의 어깨에 꽂혀 있던 화살을 빼낸 후 금창약을 발라 주고 있는데 그녀가 침중한 표정으로 물어 왔다.
“적일까요?”
“그런 것 같습니다. 저들의 표정을 보면 조금 안도하는 것 같지 않소?”
백운옥은 세심하게 금창약을 발라 주고 있는 초류빈을 보며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군요. 오늘 여기서 뼈를 묻게 될지도…….”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시오. 우리들에게도 마지막 희망은 있으니까…….?”
“……..?”
이때 마차 안에 있는 공주와 시녀는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호위 무사들이 막지 못한 화살이나 그들의 검에 튕겨 나온 화살이 간혹 마차에 맞기도 했기 때문이다. 호위 무사나 마부는 탈출을 대비해 말을 우선적으로 보호했기에 마차까지 신경 쓸 형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도 마차 안의 인물들이 아무런 상처를 입 지 않은 것은 무림의 명가인 백씨세가에서 사용하는 것이라 마차가 원체 튼튼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공이 실린 화살이기에 완벽하게 막아내지는 못했으므로 쿵쿵하는 격타음과 함께 마차 안쪽으로 조금씩 살촉이 튀어 나올 때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묵향이 느긋한 표정으로 주인이 없는 앞자리에 다리를 올려놓으며 편안하게 앉으려고 할 때 공주의 시큰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는 본녀를 지킬 생각이 하나도 없지?”
묵향의 다리가 순간적으로 허공에 멈췄다가 다시 내려갔다. 사실 묵향은 이번 여행에 생긴 동반자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고 될 수 있다면 몽땅 다 죽어 버렸으 면 더 좋을 거라는 생각 중이었다. 그래야 다시 공주를 들볶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그 사실을 공주가 눈치 채 버린 것이다. 묵향은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 다.
“헤헤, 무슨 억지 말씀을…….”
“어제 임방과 다투는 말을 다 들었노라. 펑 하는 소리가 크게 들리기에 적이 쳐들어왔나 싶어 귀를 기울이니…….”
“하하하, 다 농담입죠. 소인이 어찌 감히 황실을 능멸할 수가…….”
“그대는 대단한 고수지? 본녀도 황궁 안에 갇혀 지냈지만 마교에 대해서는 황군들 간에 떠도는 소문을 들었노라. 그대가 마교의 고수라면…….”
마교의 고수라는 말이 나오자 저쪽에서 어쩔 수 없이 듣고 있던 시녀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여우같은 년, 주워들은 것도 많구만…….’
“하하하, 마교의 잡졸일 뿐입니다. 너무 치켜세우지 마시지요.”
묵향이 부인은 하고 있지만 김빠진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대가 본녀를 도와준다면 여태껏 있었던 일을 모두 불문에 부칠 것이다. 그러니 제발 도와 다오.”
‘제기랄…….?
“그래, 이미 눈치 챘다면 할 수 없지.”
갑자기 말투가 바뀌자 공주의 안색이 굳어졌다.
“사실 노부(老)는 황실 따위 별로 안중에 두지도 않는다구. 과거부터 무림과 황실은 서로 불가침의 관계였으니까……. 이번 일도 푼돈이나 좀 벌려고 시작한 일 이었으니 뭐, 도와는 주겠어. 하지만 이 일을 도와주는 데 있어서 우선 몇 가지 조건이 있어.”
“무슨 조건을 말하는 것이냐?”
“우선 여태껏 있었던 일 가지고 황제에게 과장까지 보태서 일러 바쳐 노부를 피곤하게 하지 말 것. 그리고 수고료를 좀 줘야 할 것이고. 이래봬도 노부는 꽤 몸값 이 비싸거든…….”
“얼마를 원하느냐?”
“저임방이란 녀석이 원한 것과 같은 액수. 황금 1백 냥이면 충분해.”
“허락하겠노라.”
“좋았어. 거래는 성립되었군. 하지만 나중에 약속을 어길 때는 아무리 깊은 황궁 구석에 숨어 있다 해도 노부의 타오르는 분노를 피할 수 없을 거야…….? 공주는 이 시건방진 무림인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이 위기를 넘겨 놔야 나중에 황군을 동원해서 능지처참이라도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말로야 무슨 말인들 못 하고 약속이야 무슨 약속인들 못 하랴,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판에…….
‘못된 녀석, 지금은 참지만 어디 두고 보자…….’
조금 시간이 지나자 열 명의 무림인이 새로이 등장했다. 그들은 하고 있는 꼬라지와는 달리 아주 우아한 자태로 착지함으로써 자신들의 무공 수위를 뽐내는 듯했 다. 그들은 모두 피처럼 검붉은 적의를 입고 있었다. 산뜻한 붉은색이 아닌 피칠을 한 듯한 검붉은 색인 데다가 이들의 몸에서는 기이하게도 약간의 요기(氣)와 사기(邪氣)가 은근하게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는 사람들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이들은 아무래도 정통적인 무공을 수련한 인물들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 중 한 명이 급히 달려온 것과는 달리 느긋한 목소리로 우두머리에게 말했다.
“저 녀석들이 그렇게 고수란 말이오? 우리들이 나서야 할 만큼?”
그러자 놀랍게도 그 우두머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저 호조를 차고 있는 녀석 혼자서 열두 대(隊)를 몰살시켰습니다. 대인들께서 오시기 전에도 포위망을 돌파하려고 했는데 힘겹게 막아 냈습죠. 저 녀석 말고는 그렇게 뛰어난 고수는 없는 듯합니다.”
우두머리는 적과 만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화살만을 이용한 간접 공격만을 하고 직접적인 충돌을 벌이지 않은 이유를 상대의 실력을 과대 포장하여 보 고함으로써 벗어나려고 들었다. 그러자 그 적의인은 멀찍이 보이는 초류빈을 지긋이 바라본 다음 말했다.
“그렇게 실력이 좋은 것 같지는 않은데……. 한번 수하들에게 몸이나 풀어 보라고 하지…….”
혈의인(人)들의 우두머리와 기마 무사들의 우두머리가 이제 독 안에 들어가 버린 생쥐를 잡는 느긋한 기분으로 쑤군거리고 있을 때 마차 문이 열리더니 묵향 이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왔다. 묵향은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적의인들을 노려보고 있는 초류빈을 향해 말을 걸었다.
“이봐,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흐음, 잘 모르겠소. 저들은 어디서 솟았는지 모르겠지만 대단한 고수들같이 보이오.”
“그럼 오늘 황천 갈 확률이 높다는 말이 되겠군. 내 말대로 하면 자네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생길 거야. 지금 그 계책을 알려 줄 테니 한번 실행해 볼 의 향이 있나?”
그러자 초류빈은 귀가 솔깃해져서 물었다.
“무슨……?”
“하하하, 아주 간단한 거지. 본좌의 수하가 되겠다고 맹세한다면 자네를 도와주겠어.”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백운옥이 발끈해서 역정을 냈다.
“꼭 이런 때 농담을 하고 싶어요?”
“이런… 본좌는 지금 농담을 하는 게 아니야. 너 같은 꼬맹이는 가만히 있거라. 이건 본좌와 이 녀석 간의 문제야. 너희들이야 죽건 살건 나하고 아무런 관련이 없 으니까….”
“흐음…….”
초류빈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좋소. 그대의 수하가 되어 드리지. 대신 조건이 있소.”
“뭔데?”
“만약 여기 있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라도 죽는다면 이 계약은 무효요.”
“그건 안 돼.”
“왜? 자신이 없소?”
“하하하, 꼬맹이가 본좌한테 감히 격장지계를 쓰려 들다니. 쯧쯧, 속아 넘어갈 사람한테 그따위 방법을 써야지. 물론 저 녀석들을 다 죽일 수야 있겠지. 하지
만 저 쓰레기들이 내가 저 빨간 놈들을 모두 죽일 때까지 버텨 줄지는 아무도 장담을 못하지. 너는 잘 모르겠지만 저놈들 보통 녀석들은 아닌 것 같으니까. 어쩌면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몰라.”
묵향이 쓰레기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의 수하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백운옥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대들었다.
“감히 백씨세가의 정예 무사들을 보고 쓰레기라니, 네놈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챙!
연검까지 뽑아 들면서 달려드는 백운옥을 초류빈이 급히 막고 있는데 묵향이 코웃음을 쳤다.
“흥, 다른 건 몰라도 어깨에 구멍 난 계집 열 명이 덤벼도 상대해 줄 수 있다는 건 사실이지. 자 어떻게 할 테냐? 저따위 것들을 위해서 여기서 목숨을 버릴 거냐?”
“좋소. 모두 다 죽여 주시오. 그동안 저들은 내가 최선을 다해서 막아 볼 테니…….”
“흐흐흐, 그럼 거래는 성립되었군.”
묵향이 어슬렁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가자 초류빈이 백운옥에게 말했다.
“혹시 검을 가지고 있습니까?”
“없는데요…….”
“그럼 도라도 하나 빌려 주시오.”
백운옥이 수하에게 다가가 뭐라고 쑤군거리자 그 수하가 말안장에 비끄러매어 두었던 참마도(刀 관운장이 쓴 언월도와 비슷하게 생긴 마상용 장도)를 꺼내 어 백운옥에게 넘겨줬다. 백운옥은 그것을 받아서 초류빈에게 보이며 물었다.
“이거라도 상관없나요?”
“고맙소.”
초류빈은 백운옥에게서 참마도를 받아 든 다음 그 긴 손잡이를 잘라 내어 보통의 도처럼 만들었다. 이제 필요 없어진 호조를 옆에 던져 버린 다음 묵직한 도의 손 잡이를 양손으로 꼭 쥐었다. 역시 이렇게 위험할 때는 여태껏 자신이 배운 도법(刀法)을 써야만 했던 것이다. 그의 사문은 중병(重兵)의 으뜸인 도로 일어선 무가이 기에.
혈의인들의 우두머리는 저쪽에서 흑의를 입은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오자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쳐라!”
그러자 아홉 명의 혈의인들은 각기 목표를 한 명씩 정한 다음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적들이 쏘아져 들어오는 것을 보며 묵향도 순식간에 검을 뽑아 들면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 2리라는 거리가 무색할 정도로 빠른 시간 내에 그들 간의 거리는 좁혀 들었고, 묵향은 자신을 노리고 들어오는 녀석이 윗부분에 해골 같은 모양의 쇳 덩이를 붙여 놓은 5척 길이의 철봉(鐵棒)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검으로 그놈의 몸을 철봉과 함께 두 토막으로 만들어 버렸다. 동료의 몸이 두 동강이 나는 것을 보고 혈의인들은 경악성을 질렀다.
“어검술이다. 대라혈망진(大羅血網陣)을 펼쳐랏!”
이제 여덟 명으로 줄어든 상대들이 묵향을 빙 둘러쌌다. 대단히 숙련된, 재빠른 동작이었다. 그 덕분에 묵향이 느긋하게 두 번째 녀석을 노리고 휘두른 검은 그 무 시무시한 기세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요절낼 수 없었다.
묵향을 빙 둘러싼 혈의인들은 철봉의 해골이 위로 가도록 들고 서서는 주문을 외워 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묵향의 검이 그중 한 놈의 몸통을 향해 날아갔지만 상대의 몸 앞에는 거대한 방패가 있는 것처럼 그의 몸을 건드리지 못하고 뒤로 튕겨났던 것이다.
“뭐지? 이 끈적한 기분은…?”
혈의인들은 진세를 펼치자 이상한 주문을 더욱 빠르게 외워 대기 시작했다. 이때 묵향의 두 번째 공격이 시작되었다. 푸른색으로 불타오르는 것 같은 형상을 띤 검 이 묵향의 손을 벗어나자마자 사방에 부딪쳐 갔지만 끝내는 상대의 진세를 뚫지는 못했다. 묵향은 다섯 군데를 찔러 댄 다음 진세의 반탄력 때문에 튕겨져 나오는 검을 회수하면서 후회스런 감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제기랄, 이럴 줄 알았으면 진법 공부를 좀 해 두는 건데..
유백 사부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상대의 진법 안에 갇힌 묵향은 이게 예사로운 진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아직 최선을 다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기어검(以氣御劍)을 튕겨내는 것은 두 번째로 치고 무시무시한 요기가 뿜어져 나오는 진법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여기서 벗어나자.’
묵향은 쾌속하게 위로 몸을 날렸다. 이번은 최선을 다한 것이었기에 적의인들은 묵향의 움직임을 눈길로도 따라오지 못했다. 하지만 묵향은 2장 반 정도 높이에서 무시무시한 힘에 튕겨져서 아래로 곤두박질쳤다가 다시 튕기듯이 일어섰다. 아래에서 엄청난 흡입력으로 당기는 데다가, 위에다 눈에 보이지 않는 뚜껑을 덮은 것 처럼 반탄력이 그를 튕겨냈던 것이다.
흑의인이 안에서 몇 번 요동을 치자 거의 진세가 깨어지기 일보 직전까지 가는 것을 보고, 뒤에 남아 있던 혈의인들의 우두머리는 다급히 무사들의 우두머리에게 지시했다.
“저자가 정말 대단한 고수인 모양이오. 본좌는 저 녀석을 막을 테니 그대는 나머지를 처치해 주기 바라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진세로 달려가서 진법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더니 외쳤다.
“환형마종대법(幻形魔悰大法)을 펼칠 테니 모두들 주의해라.”
그러자 혈의인들은 좀 더 굳어진 표정으로 전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혈의인들이 흑의인과 싸우고 있는 동안 빙 둘러싸고 있던 무사들은 각기 무기를 뽑아 들고는 마차를 호위하고 있는 인물들에게 돌진해 들어갔다.
혈의인들의 우두머리는 주위의 다른 혈의인들이 외치는 주문과는 다른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며 그의 두 손을 앞으로 천천히 뻗었다. 그의 손에서는 검붉은색 기류 가 쏟아져 나오며 흑의인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반구(半球)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흑의인을 기준으로 검붉은색 반구형이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로 형성되었다. 묵향은 혈의인이 한 명 더 가세한 다음 쏟아져 들어온 지독한 독기 때문에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아무리 현경의 고수라고 해도 이런 지독한 독기에서 오랜 시 간 버티기에는 무리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조금 더 지나자 자신의 생각이 조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지독한 독기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힘이 천천 히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이놈의 진세는 공력까지 빨아들이나? 더 이상 공력이 빠져나가기 전에 일격을……..
묵향은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머리 위로 검을 들어 올린 자세에서 자신의 공력을 끌어 모아 검강을 뿜어냈다. 수백 개의 검강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진세 에 충돌했다. 혈의인들은 그 충격에 버티지 못하고 2장 정도 뒤로 밀려나갔다. 그들은 자세를 바로하기 위해 천근추(千斤)의 신법을 사용했기에 발이 반 척은 땅 속에 박힌 상태에서 밀렸으므로 땅바닥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도 그들은 주문을 멈추지 않았다.
일단 묵향의 공세를 막아 낸 혈의인의 우두머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까지 가세한 대라혈망진이 깨질 뻔한 것이다. 거기에 환형마종대법까지 펼쳤는데 상대는 그 지독한 사망시독(死亡屍毒)에도 불구하고 혈수(血水)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아니 아예 중독 증상 자체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그를 더욱 놀라게 했다.
묵향이 혈의인들과 싸우고 있을 때 마차 옆에서도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는 과거 초씨세가가 자랑했던 신예고수 초류빈이 었다.
그가 왜 도중에 행방불명이 되었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소문이 난무했었지만 초씨세가에서 일언반구도 없다 보니 자연 기세가 수그러들어 버렸었다. 하지만 과거 7룡4봉의 명단에 들어 있었던 그였지만, 기마 무사들의 우두머리 등 고수 10여 명이 한꺼번에 무림의 도의를 무시한 채 집단 공격을 해 대니 자신의 한 몸 사리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백운옥의 경우 뛰어난 무예를 가지고는 있었지만 실전 경험이 너무나 미숙했고, 거기에 어깨에 구멍까지 뚫려 있다 보니 자신이 지닌 바 실력의 5성도 발휘하지 못하고 다섯 명의 기마 무사들의 참마도를 피하기에 급급한 실정이었다. 백씨세가의 여고수가 이 모양이니 그 수하들이야 말할 바도 못 된다. 일대일이라면 상대도 안 되겠지만 일곱 명이 50명을 상대하자니 밀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에 적들은 장병인 참마도나 창을 이용하여 간접 공격을 퍼부을 뿐 직접적인 난타전을 벌이지 않고 있었다. 죽자고 싸워 봐야 사상자만 늘어날 것이니, 자신들 은 현상 유지만 한 채 이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막고만 있으면, 든든한 후원자인 저 혈의인들이 까만 옷 입은 녀석을 없애 버린 다음 깨끗한 뒤처리를 해 줄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초류빈도 마교의 고수, 그것도 자신의 원수 좌외총관 지옥혈귀를 보고 ‘그 녀석’이라고 부를 정도로 고위급의 고수가 이런 시골에 나타난 겉멋만 잔뜩 낸 저 빨간 놈들에게 질 리가 없다고 믿고는 시간을 끌고 있었으니 서로 간에 칼부림은 심하게 오고 갔지만 정작 다치는 사람은 거의 없는 평행선을 달리는 대결이 벌 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우연히 엄청난 실력을 가진 혈의인들을 만난 것은 묵향에게 재앙이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시각을 뒤집으면 구휘 이후로 아무도 올라 서지 못했다는 현경의 고수와 우연히 만난 혈의인들에게도 그것은 그들이 상상도 해 보지 못한 최악의 재난이었다.
마교와의 치열한 전쟁 이후에 개발된, 초고수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라혈망진을 조금의 여유만 준다면 깨 버릴 정도로 막강한 무공을 가진 데다가, 천령 강시(屍)조차 혈수로 만들어 버린다는 환형마종대법을 펼쳤는데도 끄떡없는 괴물.. 혈의인들의 우두머리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랐지만, 자신 이 감정을 드러내면 수하들이 더욱 동요할 것이 분명하기에 억지로 감정을 추스르며 마지막 발악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혈의인들의 우두머리는 저 괴물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라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죽느냐 사느냐는 두 번째 문제였다.
“굉뢰사멸파(宏賴邪滅破)를 쓸 테니 모두들 충격에 대비해랏.”
그러자 혈의인들은 그 자리에서 2장 정도씩 더 뒤로 물러서며 온 힘을 다 기울여 주문을 외워 대기 시작했다. 여기서 조금만 실수하면 목숨이 날아가는 것이다. 혈의인들의 우두머리는 수하들이 대비 태세에 들어서자 왼손의 손톱을 이용하여 오른손 손바닥에 깊은 상처를 만들었다. 곧이어 피가 솟구쳐 흐르기 시작했다. 혈 의인들의 우두머리는 상처 입은 오른손을 앞으로 들어 올려 흑의인을 가리키며 자신이 가진 모든 암흑의 기운을 끌어 모아 주문을 외웠다.
“저 머나먼 역천(逆天)의 대지에서 강림하신 암흑의 마신(魔神)이시여, 파괴와 혼돈을 주관하시는 대지의 마왕이시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신 그 강대한 힘을, 위대한 파멸의 힘을 생과 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어둠의 계약에 따라 이 몸에 부여하소서.”
그러자 그의 오른손에서 흘러내리던 피와 함께 검은색의 어둠의 기운이 뭉쳐지며 검붉은 덩어리가 천천히 커지기 시작했다. 뭔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흑의인의 검에서는 안개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고, 그 안개 같은 것은 급기야 혈의인들이 만든 대라혈망진과 충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혈의인들의 우두머리가 봤을 때 그것은 호신을 위한 무공인 듯 보였지만 방어적인 개념보다는 공격적인 개념이 앞서 있는 무공인 듯했다. 그만큼 안개와 같은 것 은 강력한 힘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혈의인들의 우두머리는 더 이상 흑의인의 행동에 신경을 쓸 처지가 못 되었다. 이제부터가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정신이 분산되면 자신의 목숨은 저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이 굉뢰사멸파에게 먹혀 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안개 같은 기운이 더욱 짙어질수록 혈의인들은 가중되는 압력에 시달려야 했고, 그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들은 땅바닥에 깊은 흔적을 남기며 조금씩 조금씩 미 세하게 뒤로 밀리고 있었다. 자신의 몸도 뒤로 밀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혈의인들의 우두머리는 더 이상 굉뢰사멸파를 키우기 위해 시간을 끌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 질지 모른다는 압박감을 받기 시작했다. 그도, 그의 수하들도 거의 정체불명의 고수 한 명 때문에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받아랏!”
검붉은 기운이 안개와 같은 기운을 뚫고 들어가며 흑의인을 향해 쏘아져 들어갔을 때 그 흑의인도 그것을 눈치 채고는 검붉은 기운을 향해 엄청난 강기의 세례를 퍼부었다. 강기 다발과 검붉은 기운은 흑의인으로부터 불과 3장도 안 되는 거리에서 충돌했고, 무시무시한 대폭발이 일어났다. 혈의인들의 우두머리가 만들어 낸 굉뢰사멸파는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과 함께 부딪친 강기의 덩어리 또한 그 파괴력에서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런 두 극강의 기운이 함께 부딪쳤으니 그 충격파는 정말이지 혈의인의 우두머리나 묵향도 상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혈의인들의 우두머리는 대 폭발이 일어나는 순간 “피해랏!”하는 말을 수하들에게 내뱉으며 뒤로 날렵한 신법을 전개하려고 했다. 그 무시무시한 폭발을, 정예라 고는 하지만 당주급도 안 되는 여덟 명의 수하들과 외당 당주인 자신만으로 막아 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그 혈의인들의 우두머리는 뒤로 빠지고 싶었다. 그리고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 폭발의 충격파는 그가 “피해랏!”하는 말을 내뱉을 시간도 주지 않고 그들 을 덮쳐 버렸으니, 당연히 신법 자체도 펼칠 시간조차 없었다. 아홉 명의 혈의인들은 천지가 진동하는 대 폭발음과 동시에 피 떡이 되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이 지독한 충격파에 사방에서 피 튀기며 싸우던 기마 무사들의 싸움도 어느새 중단되어 버렸다.
그 엄청난 충격파의 회오리를 바라보며 백운옥이 핼쑥해진 안색으로 초류빈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글쎄…….”
이때 뿌연 먼지 구름 속에서 한 인영(人影)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세상에, 저 속에서도 생존자가 있다니…….”
모두 아연한 표정으로 그 생존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누구냐에 따라 결판이 날 테니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자욱한 먼지를 뚫고 다 헤어져서 너덜거리는 흑의를 걸친 인물이 먼지투성이가 되어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 사내는 갑자기 시커먼 피를 토하면서 투덜거렸다.
“우웩! 제기랄… 그놈의 독기 정말 대단하군…….”
그 모양을 보자 추격대의 우두머리는 싸울 기분이 싹 달아나 버렸다. 나중에 합류했던 열 명의 혈의인들은 무림에 그렇게 잘 알려진 집단에 소속된 무리들은 아니 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무공이 약하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자신도 그들의 정체를 처음 들었을 때 턱이 빠지는 줄 알았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그자들을 모두 한꺼번에 해치우고 투덜거리며 나오다니, 이건 정말 상상도 못 해 본 일이었다.
“제기랄, 후퇴하랏!”
기마대가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는 장면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초류빈은 저쪽에서 투덜거리며 걸어오는 흑의인을 보고 약간 비꼬며 말했다.
“뭔가 있을 거라고 하더니 정말 한가락 하던 놈들이었던 모양이죠?”
흑의인은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한가락 하기는 했지. 이봐, 옷 있으면 한 벌 가져다줘.”
“왜요?”
“이 옷은 독기에 절어서 자네들 근처에 가지도 못하겠어. 무슨 놈의 독기가 이렇게 강한지 옷이 완전히 삭아서 퍼석거릴 지경이니까…….” 그러면서 묵향이 한쪽 옷섶을 슬며시 잡았는데 흙덩어리로 만들어 놓은 것처럼 파삭거리며 바스러지자 초류빈이 백운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초류빈은 여분의 옷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무언의 질문을 보낸 것이다. 그러자 백운옥 또한 수하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 또한 남자 옷을 가지고 있을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수하 한 명이 마차 위의 짐 보따리를 뒤져 옷을 가지고 다 떨어진 흑의를 입고 있는 자에게 걸어갔다.
묵향은 그자가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외쳤다.
“잠깐, 옷만 이리 던져라. 죽고 싶지 않으면.
그는 옷을 뚤뚤 말아서 흑의인에게 던졌다. 그러자 흑의인은 모두가 보는 상태에서도 거리낌 없이 옷을 훌훌 벗기 시작했다. 아니 벗는다기보다는 뜯어 버렸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가 벗으려고 손에 힘을 조금만 줘도 옷은 바스러져 버렸으니까……. 나중에는 너덜거리는 속옷까지 과감하게 벗어 던지는 묵향 때문에 낯 뜨 거워 얼굴을 돌린 것은 오히려 백운옥 쪽이었다. 백운옥이 잠시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돌린 사이 수하가 던져줬던 백의(白衣)로 갈아입은 묵향이 천천히 걸어왔다. 그를 보고 초류빈이 물었다.
“피를 토하시던데, 내상약을 드시지요?”
“아니, 내상 때문에 피를 토한 게 아니야. 체내로 침투한 독기를 모아 토한 것뿐이다. 제기랄, 웬만한 독기는 그래도 버티는데. 이번 거는 좀 심하더군. 이제 출발하기로 하지.”
거대한 석실(石室). 석실의 내부는 호화롭기 그지없다. 수많은 벽화들이 생동감 넘치게 아로새겨져 있다. 너무나도 사실적이라 살아서 튀어나올 것 같은 조각 들. 피 튀기는 지옥의 수라도(修羅圖)가 너무나도 생동감 있게 펼쳐져 있어 피라도 뚝뚝 떨어져 내릴 것 같다.
거기에 그 방 주인의 격조 높은 취향에 어울리게 금, 은, 마노, 유리, 홍옥 등 갖가지 보석으로 형형색색 단장을 했기에 그 조각들은 더욱 현실감이 나는지도 모른 다.
바닥에서 5척이나 솟아 있는 단상 앞에는 다섯 개의 금으로 만든 향로가 놓여 있다. 그리고 그 향로 2장 뒤편에 높직하게 설치된 태사의 위에 거만하게 앉아 있는
인물은 아지랑이같이 피어오르는 향연(香煙)에 가려 단상 아래에서는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아마도 수하들에게 꽤나 신비한 척하는 게 취미인 듯한 인물인 모양인데, 그 인물이 지금 경악에 찬 노호성을 저 밑에 부복하고 있는, 재수 없는 수하에게 터트리고 있었다.
“뭣이라고?”
“진천왕을 돕기 위해 파견되었던 외당 당주 이하 혈사마인대(血邪磨人隊) 대원 아홉 명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하명(下命)을…….”
“도대체 흉수는 어떤 놈들이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한 명이라는 사실 외에는 정보가 거의…….”
“무어라?”
“그들과 동행했었던 무사의 증언에 따르면 흑의를 입은 한 명이 그들을 죽였다고 했습니다.”
“그 흑의를 입은 자가 기습이나 암습을 가했나?”
“정면 대결이라 들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어떤 놈이 정면 대결로 그들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이냐? 모종의 암기라도 사용했겠지.. 그렇지 않다면 놈이 화경의 고수라 해도 깊은 내상 을 입었을 가능성이 클 터. 부근의 약방이나 의원을 이 잡듯이 뒤져서라도 그놈을 찾아내라.”
“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