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6권 30화 – 과거에 있었던 일들

비뢰도 6권 30화 – 과거에 있었던 일들

과거에 있었던 일들

순간 현검자의 시간은

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

아미산 중턱 산자락에 서 있었다.

그날의 일은 오직 자신의 비밀로 남겨두었다.

현검자가 천겁혈세의 대회전에 참전하였을 때는 18세의 어린 나이였다. 그는 당시 믿지 못할 광경을 목격하고 아직도 그 경지를 갈구하며 검을 닦고 있다. 그 일은 어린 그에게 하늘이 뚝딱 무너지고 땅이 발칵 뒤집히는 것과 맞먹는 거대한 충격이었다.

한 명의 노인과 그 노인을 마주보고 검을 뽑고 있는, 존경해 마지 않는 사형. 이미 몇 차례 충돌이 있은 듯 그의 대사형 공손일취의 호흡은 눈에 띄게 불규칙해져 있 었다.

“애송아! 이제 그만 항복하는 게 어떠냐? 어린 꼬맹이가 경우를 너무 모르는구나! 죽고 싶은 게냐?”

노인의 말투에는 조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더 이상 장난치기가 귀찮다는 그런 말투였다.

현검자는 그때 자신의 사형이 공포심에 질려 덜덜 떠는 것을 처음 보았다. 언제나 당당하고 고고하던 사형의 그런 나약한 모습은 그때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생 경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공손일취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정체 모를 노인에게 순순히 자신의 패배를 자인(自認)하기엔 구대 문파의 공동 전인 전략으로 길러진 그의 자존심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공손일취는 최후의 기력을 모아 마지막 일격을 내뻗었다.

“으아아압! 태극무궁(太極無窮)!”

장강의 물결처럼 유유히 흐르는 검(劍)의 현기(氣)! 유연함으로 능히 강함을 제압할 듯한 오묘함!

무당의 전설적인 검법 태극혜검(太極慧劍)이 현검자의 눈 앞에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구현된 것이다. 저것만은 노인이 아무리 강해도 막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 다. 허나 현검자는 곧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크아아악……!”

순간 하늘과 땅과 이 세상 모든 것이 황금빛 섬광(閃光)으로 뒤덮이며, 공손일취의 전신을 난자(亂刺)했다.

그것은 마치 황금빛 그물이 하늘을 뒤엎는 듯한 황홀한 광경이었다.

검이라면 당시 신검협(神劍俠)이라 불리던 모용정천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당할 수 없다던 구대 문파의 공동 전인이자 희망인 공손일취가 나이도 지긋한 백발 성성한 노인의 한 수에 맥없이 나가떨어지고 만 것이다.

어린 현검자에겐 심령이 뒤흔들리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온몸에 피 머금은 거미줄 같은 상처를 입은 채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공손일취를 둘러메고 산을 내려온 이가 바로 현검자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때 본 일을 자신의 가슴 속 깊은 곳에만 봉인(封印)해 놓은 채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아마 사형인 공손일취도 자신이 그 일을 목격한 사실 을 알지 못할 것이다.

공손일취 자신도 현검자가 모든 사건이 종결된 후 우연히 기습 대비 수색 정찰을 나왔다가 그를 발견한 것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백 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말 이다.

그날 이후 현검자는 도저히 그날 그때 나무 뒤에 숨어 훔쳐본 노인의 일초(-招)를 잊을 수가 없었다. 이미 심령 속에 화인(印)처럼 선명하게 찍혀버린 그 영상 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꿈에서조차 노인의 일초는 점점 더 선명하게 그의 전신을 덮쳐왔다.

단 한 번의 손짓으로 구파의 희망을 절망에 빠뜨린 일초!

그때부터 현검자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였다. 어떻게 하면 그 정체모를 노인의 일초를 한 자루의 검으로, 무당의 자존심인 검으로 구현해 내고 싶었다. 그리고 최종 장에 가서는 그것을 보란 듯이 파해(破解)해 보고 싶었다.

하나의 검초를 파해하기 위해선, 우선 그 목표된 검초를 구현해 내야만이 가장 완벽하게 그 환상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이다. 아끼는 제자 청흔에게 전해 준 삼정태 극검혜(三情太極劍慧)도 그런 와중에 창안한 무공이었다.

하늘을 찢어발기는 듯한 황금빛 그물, 그 환상을 검으로 구현하고 다시 파해하기 위해 현검자는 아직 손에서 검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러기를, 50년! 마침내 그는 한 가지 중대한 차이를 문득 깨달을 수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다가온 깨달음이었다.

자유로움!

그 노인의 일수는 무한히 자유로웠다. 하늘과 땅, 천지간의 조화,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무한한 자유로움이 그 노인의 일초에는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무당에는 육식(肉食)과 음주가무(飮酒歌舞)를 즐기는 괴장로 한 명이 돌연 나타나게 되었다. 그 괴도인은 전대 무당파 장문인이라는 무시무시한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모든 무당 장로들과 문도들이 정신 병자 취급하고, 똘아이 처리하고, 무시하고, 뒷구멍으로 사도(邪道)로 취급해도, 그는 이 길을 꿋꿋이 걸어갔다.

차마 문파의 수치를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어떻게 그런 초식을 펼쳐낼 수 있었나? 내 검초에 무엇이 부족했지?”

현검자의 물음엔 열기가 가득 배어 있었다. 마치 20대의 열정에 불타는 혈기 왕성한 청년 같은 모습이었다.

“아직 할아버지의 검은 자유롭지 못해요. 너무 관념에 얽매여 있어요.

현검자는 비류연의 말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자유? 난 항상 자유로워지고 싶었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육신이 자유로워져야 했네. 심신(心身)은 일체(體)라 하여, 일단은 몸이 자유로워야 마음이 자유로워 진다고 나는 생각했던 것이지. 그동안 난 무당의 체면이나, 법규나, 초식의 틀에서조차 너무 얽매인 게 많았으니깐…. 도저히 그런 자유로움을 마음으로부터 추 구할 수 없었던 걸세! 그래서 제자 녀석이 고생 좀 많이 했지. 이 사부 덕분에.. 그런데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다니……. 아직도 부족하다니?”

망연자실해 있는 현검자를 향해 비류연이 결정타를 날렸다. 흔들리는 그의 마음에 쐐기를 박은 것이었다.

“으음, 제가 보기엔 할아버진 지금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묶여 자유로워지지 못한 것 같은데요! ”

비류연의 한 마디에 순간 벼락 같은 충격이 현검자의 전신을 때렸다. 그것은 몸 안에 가득차 있던 어떤 의식의 덩어리가 폭발하며, 수십 배로 늘어나는 듯한 벅찬 희열이었다.

한 순간의 깨달음!

그때 현검자는 자신의 검이 바뀌었음을 의식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신비스런 느낌이었다.

“하, 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

현검자의 입에서 대홍소가 터져 나왔다. 이렇게라도 그는 자신의 터질 듯한 기쁨을 표현해 내고 싶었다. 다른 방식의 기쁨 표현법이 있다면, 예를 들어 알몸으로 나체 춤을 춘다든가, 아니면 술을 뽀개지게 먹는다든가 하는 등의 그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서 빨리 이 기쁨을 표현해 내지 않으면 너무나 벅찬 희열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 참! 연세도 지긋하신 할아버지가 박력 있게 웃으시네. 기력도 좋으셔라!

지켜보는 이마저 흐뭇하게 만드는 뻥 뚫린 듯한 시원스런 느낌의 대소(大笑)였다.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봐도 근엄하고 진중해 보이는 구정회의 무절(絶) 삼절검 비천룡 청흔의 사부라고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어딜 봐서 저 게 무당 제일검이란 말인가! 게다가 점입가경(漸入佳境)으로 전대 장문인까지!

신용이 가지 않았다.

젠장!

암혼비영대 암영3조 조장 흑살도 흑상은 지금 울고 싶었다.

비류연의 손짓 한 번에 흑살도 흑상은 제대로 도망도 못치고 사로잡힌 참새 꼴이 되었다. 이런 치욕은 생전 처음이었다. 하지만 목숨이나마 부지했으니 다른 부하 들보다는 나은 상황인지도 모른다. 물론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전신 혈도를 제압당한 채 흙바닥에 뒹굴고 있는 흑상의 가슴에 비류연이 발을 올려놓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난 당신이 어떠한 고통이나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견뎌내리라 믿고 있습니다. 배가 열십자로 갈라져도, 창자를 끄집어내 토막을 쳐도, 눈알이 뽑히고 혀가 잘리 고 두개골에 구멍이 나도 당신은 결코 입을 열지 않으리라 난 믿습니다.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았으면 좋겠군요. 어차피 어떠한 비밀도 입 밖에 내뱉지 않을 테니, 당신의 신체에 제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전혀 상관없겠죠? 그렇죠?” 흑상은 온몸의 신경이 쭈뼛쭈뼛 서고 심장이 공포로 인해 오그라 들었다. 지독히 불길한 예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아무래도 보통 인간은 저런 눈빛을 뿜어낼 수 없 었다.

“이…이보게! 청년! 자, 잠깐만 기다리게!”

흑상이 몸을 아둥바둥거리며 다급히 외쳤다.

“뭐라구요? 안들려요!”

아무도 없는 방향을 향해 비류연은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자신의 발 밑에서 아둥바둥거리는 물체에 대해서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다시 자신이 밟고 있는 흑상을 바라보는 비류연의 눈빛이 기이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난 아무 것도 못봤네!”

현검자가 얼른 발을 뺐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관여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퍼버버버벅!”

애걸복걸하는 흑상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비류연은 일단 마구 밟아대기 시작했다. “꾸웨에에엑!”

한 인간의 비참한 말로를 증명하는 괴성이 산 전체에 메아리쳤다.

주제 파악 실패에 대한 뼈아픈 대가였다.

“그럼 할아버지, 다음에 또 뵐게요. ”

“허허! 그러자꾸나. 다음 만남을 기대하마!”

“그럼 잘 먹고 갑니다!”

현검자와 서둘러 인사를 마친 비류연은 극성으로 봉황무 비익관천의 수법을 펼쳐 산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탄신(彈身)!

마치 한 줄기 섬광처럼 빠른 속도였다.

아무래도 본문으로 돌아가야 할 듯했다. 심상치 않은 기류가 무당산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가볍게 끝날 일이 아니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현검자는 자소봉 중턱 무당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가볍게 내는 발자국 하나에 그의 신형이 오장(五丈)씩 스윽 미끄러져 갔다. 구름을 타고 논다는 무당파 신법 제운종(蹄雲踪)이 극성으로 발휘된 모습이었다.

“도대체 저 아이의 정체가 뭐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