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7권 25화 – 대공자의 등장
대공자의 등장
–거인은 분노 또한 거대하다
“지금 뭐라고 했나?”
“지이이잉! 우웅! 우웅!”
흑천맹주(黑天盟갈중효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기파에 주위의 사물들이 웅웅 비명을 질렀다.
“처… 첫째 도련님께서 백도놈들의 칼날 아래 돌아가셨다는 비보(悲報)입니다.”
비보를 전하는 백발백염의 노인, 갈중효로부터 진로(眞老)라 불리는 이의 목소리에는 비통함이 가득 배어 있었다. 그에게는 자식이나 마찬가지던 소주였다. 그 영 특함에 얼마나 큰 기쁨을 얻었던가! 그런데 비각에서 날아온 느닷없는 보고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천마뢰에 갇혀 있던 아이가 무슨 수로?”
그의 눈이 이글거리는 용광로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탈출을 기도하셨다 합니다.”
“그게 어디 한두 번이더냐!”
회의! 불신!
일곱 번도 더 있었던 탈출 기도였다. 그러나 그 시도는 한 번도 성공으로 끝난 적이 없었다.
“이… 이번엔 성공했다고 합니다.”
분노, 그리고 의혹!
“갈(喝)! 말도 안 되는 소리!”
그의 입에서 쩌렁쩌렁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평생을 곁에서 보좌해 준 노인이었다. 그런 진로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아들의 생사를 가지고서. 하지만 이성이 아 무리 그렇다 해도 감정을 다스릴 수는 없었다. 그의 분노가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파삭 파삭! 퍽! 퍽!”
방 이곳저곳을 장식하고 있던 당대의 명품 도자기들이 하나씩 하나씩 깨져 나가고 있었다. 이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압력에 대항하기 위해 진로는 진기를 전력으 로 끌어올려야만 했다. 거인은 그 분노 또한 거대하기 짝이 없었다.
“아버님께서는?”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갈중효가 진로에게 물었다.
“아직 모르고 계십니다.”
“당분간 알리지 말게! 이번 일은 내가 처리하겠네!”
“어찌 하시겠습니까?”
진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피의 율법을 따르도록 하지.”
갈중효의 눈이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철각비마대(脚飛馬隊)를 보내게! 봉이의 죽음에 직접 관계된 모든 자들을 백도에 요구하도록 하게.”
철각비마대라는 말에 진로의 눈이 반짝였다.
“만일 거절한다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그때는 무력으로 해결한다. 무력 충돌도 거부하지 않는다.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
“존명(尊命)!”
그 날 즉시 한때의 묵빛 기마대가 흑천맹의 정문을 질풍처럼 달려나갔다. 문지기들은 공포와 경외의 감정을 담아 이들을 배웅했다. 그들은 흑천맹이 지닌 힘의 상 징 중 하나였다.
“실패로군요!”
조용한 목소리로 남자가 말했다.
그 목소리를 들은 보고자의 몸은 간질 걸린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면목 없습니다.”
식은땀이 그의 등줄기를 축축하게 적셨다. 수백 번 이상을 배알했지만, 여전히 대공자를 만날 때마다 위축되는 자신을 숨길 수 없었다. 이 두려움이 대공자 때문인 지, 그를 비호하고 있는 그림자 때문인지 마천각 군사 사영뇌(腦 치사한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반드시 성공해 보이겠다고 호언장담하지 않았던가요?”
찻잔을 드는 사내의 음성은 여전히 변화가 없어서 내심을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전 자기 말을 지키지 못하는 자가 무척 싫군요.”
“죄, 죄송합니다. 죽여 주십시오.”
사영뇌 치사한의 표정이 단번에 핼쓱해졌다.
“그럴까요?”
그제야 고개를 돌린 사내가 치사한을 바라보며 슬쩍 미소지었다. 수천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놀며 그들의 목숨을 손가락 하나로 처리할 수 있는 자의 미소였다. 그 는 원한다면 언제든지 목숨을 거두어 갈 수 있는 정점에 선 자였다.
‘히익!’
치사한의 뱃속으로 헛바람이 들이켜졌다. 그는 당장에 자신의 노선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약간 비굴해 보이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 치사한은 감수하기로 했다. “살려 주십시오, 대공자!”
솔직히 말해 아직은 죽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분은 태어날 때부터 패자(覇者)시다.’
치사한은 내심 두려움과 함께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자신같이 닳고 닳은 자를 한마디 말로 굴복시키는 위엄! 잔머리가 번개처럼 돌아가는 그도 대공자 앞에서는 감히 딴마음을 품을 수가 없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신에는 만인을 압도하는 위엄과 기상이 서려 있었다.
이분은 군림하기 위해 태어난 분이시다. 치사한은 그렇게 믿었다. 그 앞에 선다면 이런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든 대공자 앞에만 서면 한결같이 품는 마음이었다.
그의 눈은 천 리를 보고 그의 손은 만인의 생명을 좌우한다. 대공자가 비밀리에 거느리고 있는 세력은 치사한 자신조차도 전부 모르고 있는 처지였다. 목숨이 아까 운지라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위압감과 두려움 때문에 대공자를 만나는 자는 그를 섬기거나 적이 되어 그를 제거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자리 가 위태해지기 때문이다.
대공자는 그런 남자였다. 피도, 살인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것을 실행시킬 배경과 힘이 있었다.
“그는?”
대공자가 물었다. 여전히 그의 손에는 찻잔이 들려 있었다.
“죽었습니다.”
“그의 동생은?”
“아… 아직 살아 있습니다!”
대공자라 불린 청년의 얼굴이 멈칫 굳어졌다.
“아직도 화근이 존재한다는 이야기군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천지쌍살까지 부릴 권한을 주었는데도 실패했다면 그분께서 무척이나 슬퍼하시겠군요.” 치사한의 얼굴이 당장에 사색이 되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분의 슬픔만큼은 죽었으면 죽었지 보고 싶지 않았다.
“반드시 제거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치사한은 가능한 한도까지 최대한 고개를 숙였다. 대공자가 다시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아룡의 얼굴을 다시 본다면 마음이 약해질 것만 같군요. 언제 그녀석이 돌아올까요?”
치사한은 깊숙이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절대 대공자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믿어도 되겠죠?”
“물론입니다.”
“만일 실패한다면 이렇게 될지도 모르지요!”
그의 손에서 한순간 섬광이 번쩍였다.
치사한의 옆에 있던 청동 사자상이 조각조각 무 깍둑 썰리듯 부서져 내렸다. 치사한의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공포라는 이름의 감정이 심장으
로부터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었다.
대공자가 손짓을 해 물러가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분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지극공손의 예를 취해 보인 치사한이 뒷걸음치며 물러갔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듯 그의 몸놀림은 신속했다.
대공자라 불린 사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높고 푸르며 구름 한 점 없었다.
“아룡! 오지 마라! 만일 온다면… 넌 나의 손에 죽을 것이다.”
그는 다시 찻잔을 들어 마지막 한 모금 남아 있던 차를 삼켰다.
“차가 식었군!”
씁쓸한 뒷맛이 혀 끝에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