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8권 2화 – 일기당천

비뢰도 8권 2화 – 일기당천

일기당천

-철각비마대(脚飛馬隊)와의 전투(戰鬪)

고장난명(孤掌難鳴)!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옛 속담이 있다.

아쉽게도 세상에 존재하는 짝짜꿍의 법칙,

일명 교환 법칙에 따라 대화는 혼자 이루어질 수 없다.

혼자서 대화가 가능하다는 놈은 아마 매우 절대 틀림없이 정신이 나간 미치광이이거나 정신분열자(精神分裂者)이거나 다중인격자(多衆人格者)임이 분명하니 사 귐에 있어 거리를 두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한참 전부터 겁도 없이 철각비마대의 그 검은 질풍(疾風)의 포악자들을 가로막은 한 소년의 묘한 대치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름 하나 달랑 말해놓고 입을 다물고 있는 소년을 향해 위무상은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기로 결심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이 끝도 없는 침묵이 계속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위무상은 비류연과의 대화에 첫걸음을 내디뎠다.

“도대체 네놈의 목적이 뭐냐?”

철각비마대 부대주 위무상이 물었다. 죽일 때 죽이더라도 궁금증은 풀고 죽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뒤통수 한 쪽이 근지러울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냥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훼방꾼이라는 사람이죠.”

목적에 관한 질문에 대해 비류연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대답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비류연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스스럼없이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그러나 말하는 사람은 대수롭지 않을지 몰라도 듣는 사람은 무척이나 대수로운 일이었다.

“훼방꾼?”

“아니, 모르세요? 전문적으로 남이 행하는 일을 훼방 놓아 그들의 행동 목적에 결정적인 타격을 남기는 역할을 수행하는 이른바 전문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죠.”

“죽고 싶은 게냐?”

위무상이 짙은 살기를 내뿜었다.

철각비마대 부대주를 역임한 이래로 이놈처럼 간댕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온 놈은 처음 목격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면 소년의 죽음은 이미 잠정적으로 내정되어 있는 것이기에 사실 그의 협박은 무의미한 것이다. 어차피 소년이 곧 죽을 운명이라는 것에는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소년박명(美少年薄命)이라고 하지만 죽음은 삼백 년 정도 이후까지는 예정에 없습니다. 진정한 아름다움, 절세의 미모란 죽음마저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닐까요?”

닭살스런 그의 목소리를 듣는 위무상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이런 괴상망칙한 놈은 처음이었다.

“죽고 싶다는 말을 너무 돌려서 하는구나! 소원이라면 죽여주마! 감히 우리 철각비마대의 진로를 막아서다니 그 용기와 기상은 가상하다만, 그 무모함만은 도저히 인간적으로 칭찬해 줄 수 없구나.”

“계산된 실행력이 무모함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군요.”

비류연은 전혀 자신의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그의 몸 어디에서도 죽음의 냄새는 풍겨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럼 네놈이 우리들의 길을 가로 막고도 무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단 말이냐?”

“돌아가면 되잖아요?”

간단하게 튀어나온 한마디! 진로 하나 막은 게 무슨 큰 대수냐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이 시답잖다는 듯한 반응을 듣는 측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열불 을 받고 머리통에서 김이 날 만큼 뒤집어 지는 것이다.

“크크크! 이런 싸가지 없는 애송이 놈이…….”

“그만!”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광분한 위무상을 잡아챈 이는 여태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철각비마대 대주 질풍묵흔(疾風墨痕) 구천학이었다.

아무리 위무상이라도 감히 구천학의 권위를 거스르는 불충을 저지를 마음은 없었다. 그의 구천학에 대한 믿음은 거의 광신에 가까웠다. 구천학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했다.

위무상이 다시 비류연을 바라보고 말했다.

“꼬마야?”

“꼬마가 여기 어디 있죠?”

비류연이 딴청을 피웠다. 위무상의 한쪽 눈썹이 순간 실룩거렸다. 그러나 더 이상 티격태격 말싸움하며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그것은 대주 구천학이 무척이나 싫어하는 행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보게, 청년!”

마지못해 그는 타협을 선택했다. 타협을 한 이후에는 바로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왜 그러시죠?”

그제야 비류연이 대답했다. 위무상의 가슴 속에서 살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주는 것 없이 얄미운 놈이었다.

“별호는 있느냐? 영광스럽게도 철각비마대의 행로를 단독으로 막아선 무모한 바보 일호(號)로 선정된 특별 기념으로 별호라도 기억해주고, 앞으로 너의 바보스 러움과 어리석음과 무모함을 후세에 길이길이 기려주마.”

“별호요? 그런 것 없는데요!”

“뭐? 없어?”

“예, 없어요! 없다고 해도 생활에 불편한 것도 없는데 그런 게 꼭 있어야 하나요?”

그러나 일반 보편적인 사고를 지닌 위무상으로서는 충분히 어처구니없는 가당치도 않은 반문이 아닐 수 없었다. 별로 놀랄 일도 아닌데 그가 너무 놀라는 척하는 것 같다고 비류연은 생각했다.

순간 짧은 침묵이 그들 사이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정말로 없어? 정말로? 진짜로? 농담 아니고 진짜, 진짜로?”

위무상이 비웃음과 황당함을 얼굴 가득히 머금고 되물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 질문 한마디 없이 말발굽 아래 넣고 짓이겨 버렸을 터였다.

“네! 진짜, 진짜 농담 아니고, 진짜 가지고 있지 않은데요?”

사실 없지는 않았다. 천무학관 내를 돌아다니고 있는 운수대통(運輸大通) 격타금(擊打琴)이라는 주옥(珠玉)같은 별호가 있기는 있었지만 아직 비류연의 귀에는 흘러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주작단과 염도가 주위에서 알아서 자청해서 정보를 차단해준 덕분이었다. 그리고 비류연의 주위에서 비류연의 별호를 가지고 안주삼아 농지거리 할 수 있는 간 큰 사람도 없었다.

돌아오는 피의 보복이 얼마나 끔찍한 참상을 초래할 수 있는지 익히 잘 알고 있는 덕분이었다.

“없다 이거지?”

위무상의 입술이 점점 더 비틀려지며 입가에 맺힌 비웃음 또한 짙어졌다.

“예! 없어요!”

이제는 대답하는 것조차 귀찮았다. 별것도 아닌 사실을 가지고 그토록 집요하게 물어볼 필요가 굳이 있는 것인가? 그가 보기에 무림인들은 가끔 땡전 한 푼도 안 되는 쓸데없는 겉치레에 지나치게 신경을 쏟아 붓는 경향이 있었다. 자신이 보기에 그것은 낭비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이들에게 그 겉치레가 가 치가 없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허허, 참! 살다보니 별 희한한 꼴을 다 당하는구만. 이런 신기한 체험을 할 수 있다니…….역시 세상은 일단 살아보고 판단할 일이란 말인가?”

무엇이 그를 그리 자극하는지 위무상은 연신 허탈한 감탄사를 터트렸다.

“우리 철각비마대의 철마로를 방해한 꼬마가 별호 하나 가지지 못한 애송이라니 기가 막혀 말이 안나오는군.”

무림에서 어떤 허접한 것일지라도 별호(別號), 혹은 무림명(武林名)을 받았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 주위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아직 별호를 얻지 못한 사람은 어정쩡하고 어중간한 삼류로 평가될 수밖에 없었다. 일류라면 적어도 ‘절대무적신검(絶代無敵神劍)’은 못되어도 하삭삼웅(河朔三熊:하삭에 사는 세 마리 곰)’ 같은 시시한 별호라도 하나쯤 가지고 있기 마련인 것이다. 심지어 산적두목도 별호 한두 개는 가지고 있는 이 세상에서 별호를 얻지 못했다는 것은 입신양 명, 즉 이름을 세우는 데 실패했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런 상식이 비류연에게까지 통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의 법칙엔 언제나 얄밉지만, 그리고 고깝지만 별 수 없게도 예외라는 자식이 존재하기 때문이 다.

“요즘 세상은 허울 좋은 이름만으로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모양이죠? 몰랐군요. 작명실력이 무공실력을 반증하다니!”

피식하고 웃으며 비류연이 말했다. 깔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시건방진 애송이 놈! 죽고 싶으냐?”

성질 급한 부대주가 다시 한 번 발끈했다. 아까부터 죽이라는 명령을 암중으로 받았으면서도 비류연의 말재간에 휘말려 시간을 끌고 있는 이는 바로 위무상 자신 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지금 현재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건방진 놈을 어떻게 요리할까 궁리 중이던 부대주 위무상의 행동을 저지하는 나직한 저음의 위엄 있는 목소리가 있었다.

“무상!”

철각비마대 대주 질풍묵흔 구천학이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

“예, 대주!”

순식간에 자세를 고친 부대주가 자세를 바로하며 대답했다.

철각비마대 대주 구천학은 언제나 그에게 외경의 대상이었다.

“갈 길이 멀다. 너무 시간을 지체했다.”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 담고 있는 명령은 명확했다. 그 명령을 거부할 만큼 위무상의 간댕이는 붓지 않았다.

“복명(復命)!”

군례를 취한 위무상이 다시 고개를 돌려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꼬마야! 가서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오라고 말해주고 싶다만 우리는 아직껏 우리 철각비마대의 진로를 막는 자를 살려둔 예가 없었다. 너도 예외는 아니다.”

“본인의 친절한 경고에도 돌아가지 않는다 하셨으니 이것으로 협상은 결렬이군요.”

비류연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도 내의 애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네놈이라면 돌아가겠느냐?”

비류연은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저도 이제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겠습니다.”

비뢰도(飛雷刀) 궁극비의(窮極秘意)

영사심결(靈絲心結)

절대정신방어(絶代情神防禦) 허무도(虛無道)

발동(發動)

비류연의 감추어진 눈이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비류연의 눈에는 이제 한 톨의 감정도, 그 미세한 잔재도 남아있지 않았다. 파괴와 살육 을 위한 병기 그 자체가 된 것이다.

원래 일점극대정신집중 효과를 위해 정신 단련법으로 만들어진 영사심결에는 또 다른 한 가지 묘용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신적 충격과 혼란, 그리고 외부적 정 신간섭으로부터 심령(心靈)을 보호하는 방패의 역할, 바로 그것이었다.

이것이 한번 발동되면 자비심, 또는 측은지심 계통의 감정은 완전 마비되어 버린다. 피를 봐도 두려움은 없다. 그리고 죄의식도 생기지 않는다. 마음이 철벽으로 감싸지는 것이다.

척!

위무상이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따각따각.

손이 하늘로 올려진 걸 신호로 부대주 위무상을 호위하던 두 명의 무사 비쾌쌍창(飛快雙槍)이 그들의 철갑마를 끌고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이제 위무상의 손이 내려짐과 동시에 그들은 말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그들의 손엔 이미 칠흑처럼 검은 묵빛 창이 꼬나 쥐어져 있었다. 수백 명의 피를 먹어 온 탐혈(耽血)스런 병기였 다.

그때였다.

톡!톡!

뭔가 묵직한 것이 대지에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뒤이어 나온 길게 늘어지는 목소리.

“아이구… 시원해라!”

위무상의 눈에 잔뜩 기지개를 켜며 여유롭게 사지를 뻗는 비류연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이십년 묶은 체증이 내려간 사람의 환호성 같기도 하고, 유심히 잘 들어보면 육 개월 간의 처절한 변비와의 전쟁에서 승리의 숙변을 장식한 영광스런 승리자 같기도 했다. 위무상은 그 모습에 들어올렸던 손을 내리는 것을 잠시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통통!

비류연은 가볍게 제자리 뜀뛰기를 해보았다.

으드득! 으드득! 뚝뚝!

온몸의 관절이 요란법석하게 기분 좋은 가락을 연주했다. 몸이 지나치게 가벼워 당장이라도 땅의 속박을 끊고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오래간만이군!”

다리에 물귀신처럼 달라붙어있던 묵룡환(墨龍環) 두 개를 동시에 푼 것은 정말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억제되어있던 온몸의 기운이 활성화되어 미친 듯이 체내를 날뛰었다. 솟구치는 충동을 제어하기가 힘들었다. 다리가 제자리에 가만히 있으려 하지 않았다. 사슬을 끊은 매가 된 기분이었다.

비류연은 간신히 날뛰는 몸 안의 기운을 다스릴 수 있었다. 그리고 팔을 축 늘어뜨렸다.

팔을 길게 늘어뜨리고 온몸의 긴장을 푼 비류연의 모습은 자연 바로 그 자체였다.

“언제든 들어오세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비류연이 말했다.

“건방진 놈!”

위무상도 더 이상 기다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의 손이 힘차게 아래로 내려갔다.

죽음의 선고(告)였다.

정면에서 볼 때 비류연의 오른쪽 편에 있는 쾌창(槍) 조걸은 왼손에 말의 고삐를 잡고 오른손에 창을 들었다. 반대로 비류연의 왼편에 서있던 비창(飛槍) 주광은 오른손으로 고삐를 잡고 왼손에 창을 들었다. 그래야만 좌우에서 동시에 공격해 들어가기가 편하기 때문이다.

위무상의 손이 내려감과 동시에 비쾌쌍창은 자신의 애마에 박차를 가했다. 그들의 말이 화살처럼 빠른 속도로 튕겨나갔다.

이들은 비류연의 양측으로 동시에 돌격해 들어간 후, 우선 조걸이 비류연의 허리를 베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주광이 그의 목을 벨 작정이었다.

항상 위무상을 호위하며 행동을 같이 해온 그들 비쾌쌍창이기에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의사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한두 번 맞춰보는 손발이 아니었던 것이 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는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던 것이다.

자신의 애마에 박차를 가해 속도를 배가시키던 그들은 왜 자신들의 눈앞에 지면(地面)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요란한 소리가 메마르고 황량한 대지에 울려 퍼졌다.

쿠당탕탕탕!

뚜둑!

“흡!”

순간 위무상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동시에 그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아무런 문제없이 힘차게 앞으로 달려가던 두 필의 말이 갑자기 약속이라도 한 듯 앞무릎을 반으로 접었다. 당연히 달려가던 속력을 견디지 못한 말의 몸체는 앞으 로 크게 쏠렸고, 그렇게 해도 사라지지 않은 힘 덕분에 공중을 빙글 한바퀴 돌았다.

두 필의 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대지를 뒹굴었다. 인간이 아닌 말들이 말대가리를 축으로 앞으로 공중 일 회전을 하는 광경은 장 관이 아닐 수 없었다. 결코 날이면 날마다 볼 수 있는 묘기가 아니었다.

“이… 이럴 수가?”

너무 경악한 나머지 위무상은 말까지 더듬거렸다. 체통이 말이 아니었다.

“이런, 이런!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나보군요! 조심했어야죠.”

마치 진짜 걱정이라도 했던 사람처럼 비류연이 과장된 몸짓을 섞어가며 말했다. 듣는 쪽으로서는 상대의 걱정과 심려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품는 게 아니라 가증 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닥쳐라! 돌부리는 무슨 얼어죽을 놈의 돌부리냐!”

철갑마(鐵鉀馬)가 돌부리 따위에 걸려 저렇듯 요란스럽게 넘어질 리가 없지 않은가! 뭔가 알 수 없는 수작에 당한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상대방이 부린 수작을 알 아챌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게다가 바닥에 널브러진 비쾌쌍창은 더 이상 움직일 생각을 안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은 기이한 방향으로 틀어져 있었다. 이미 그들은 숨쉬기를 중단한 것이다. 그렇게 멋진 묘기를 보여준 이 말들의 주인 비쾌쌍창은 대지에 잘못 구르는 바람에 목뼈가 부러져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고수치고는 무척 어이없고 허무하기 짝이 없는 최후가 아닐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입고 있는 갑옷이 너무 무거워 행동에 지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놈! 무슨 헛수작을 부린 것이냐?”

위무상은 버럭 대갈성을 질렀다. 마치 대낮에 팔자에도 없는 꿈이라도 꾸고 있는 심정이었다.

“글쎄요? 헛수작이라니요? 전, 전혀 모르는 일인데 어쩌죠?”

위무상은 자신이 농락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싱긋생긋거리는 비류연의 면상을 뭉개버리고 싶은 달콤한 충동이 그의 영혼을 지배했다.

비류연이 한 일은 별거 아니었다. 그저 사람들 몰래 뇌령사(雷靈絲)를 풀어 앞으로 나온 두 필의 말 앞쪽 다리에 헐겁게 감아둔 것뿐이었다. 가만히 있었으면 아무 일도 없었겠지만 말이 달리기 시작하면서 감겨져 있던 뇌령사가 조여들어 철갑마의 앞발을 봉쇄해버리자 달려오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지면과 충돌한 것이다.

잠자코 지켜보던 구천학의 안색이 더욱 굳어졌다. 그로서도 방금 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구천학은 서서히 자신의 몸이 본능적으로 긴장하 고 있는 것을 알고 놀라고 말았다.

“크으윽! 사대질풍(四大疾風)!”

위무상이 악다문 입을 열어 큰소리로 철각비마대의 사대고수를 불렀다. 그의 낯빛은 화로(爐) 속의 쇠처럼 붉게 달구어져 있었다. 이렇게 되면 이겨도 개망신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여기서 더 이상의 수치를 당할 수는 없었다.

사대질풍이라면 이 건방진 꼬마를 단숨에 산산조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부른 이상 곧이어 허공 중에 꼬마의 혈편이 낙화처럼 화려하게 수놓아 지리 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철각비마대의 사대고수, 열풍(熱風), 선풍(旋風), 광풍(狂風), 추풍(秋風)의 네 가지 바람으로 이루어진 사대질풍이 짙은 투기를 내뿜으며 정면으로 나섰다. 본심은 위무상 자신이 나가 손수 응징을 가하고 싶었지만 위계질서와 체면이라는 게 있어 그럴 수가 없었다. 이런 일에 부대주씩이나 되는 자신이 나설 필요는 없 었다. 이들로서도 넘치도록 충분하리라!

‘함정인가…….’

비쾌쌍창이 허무하게 당한 것은 아무래도 보이지 않는 함정 때문이라고 위무상은 결론 내렸다. 그것이 가장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사고방식이기도 했다.

물론 함정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럴만한 여가 시간도 없었거니와, 만일 시간이 있다 해도 함정을 파고, 기관진식을 장치하는 수고로움을 감내할 만큼 비류연 은 부지런하지 못했다. 그럴 힘이 있으면 맨손으로 처리하는 게 더욱 경제적이었다.

‘역시 함정일 거야. 그것 말고는 떠올릴 만한 게 없다.’

위무상이 헛다리를 짚은 것이지만 위무상도 사대질풍도 그것을 알아챈 이가 없었다.

“함정을 조심해라!”

“예!”

사대질풍이 일제히 대답했다.

철컥! 철컥! 철컥! 철컥!

비류연을 목표로 사대질풍이 일제히 거창(擧槍)했다. 그들의 살기가 일제히 비류연을 꿰뚫었다. 그들 마음속에 존재하는 창은 이미 비류연의 숨통을 시원스레 끊 어놓은 이후였다.

“최고의 절기(絶技)로 장사(葬事) 지내줘라!”

“복명(命)! 이리얏!”

위무상의 말을 신호로 네 명의 말이 동시에 대지를 박차고 앞으로 튕겨나갔다. 네 사람이 한 사람처럼 호흡이 딱딱 맞아 떨어졌다. 그들의 눈에서 예리한 기광이 번뜩였다.

아직 비류연까지는 십장이나 되는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창하고 있거나 옆에 꽂혀 있던, 또는 들고 있던 창을 힘차게 앞으로 뻗으며 찔렀다. 아직 남은 거리가 십장이 넘는데 닿는다고 생각한 것일까?

철각비마대(鐵脚飛馬隊)

연환합격기(連環合擊技)

사기연환(四騎連環) 철쇄선풍鐵鎖旋風)

철컥, 철컥, 철컥!

‘쒜앵’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그들이 앞으로 내뻗은 창의 마디마디가 분리되어 쭈욱 늘어나기 시작했다. 분리된 마디마디는 가늘고 긴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어 십 장거리를 단숨에 압축시켜나갔다. 이제 거리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네 명이 내지른 연환쇄절창(連環鎖節槍)이 허공 중에 소용돌이를 그리며 한데 어우러졌다. 주변의 먼지가 휘감겨 그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갔다.

더욱 조밀하고 거대해진 날카로운 창날의 소용돌이가 비류연을 덮쳐왔다. 사납고 흉측한 기세를 뽐내며!

모든 것을 분쇄(粉碎)해 버릴 듯한 무시무시한 철쇄(鐵鎖)의 소용돌이를 눈앞에 직면하고도 그의 발걸음은 뒤로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비류연은 자신 의 발걸음이 뒤로 물러난다는 데 대한 심각한 위화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 같았다.

비류연은 겁대가리를 상실했는지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그 자리에 못박힌 사람 같았다. 발바닥에 아교라도 발랐는지, 아니면 대지 밑에 뿌리라도 내렸 는지 미동(微動)조차 하지 않았다.

깊게, 깊게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있는 그의 눈빛만이 조용히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갑니다!”

드디어 비류연이 움직였다.

비류연이 오른손을 한번 수평으로 휘둘렀다.

비뢰도(飛雷刀) 오의(義) 검기(劍氣)

참단절영(斬斷切影)의 장(章)

절삭(切削)

천지이분(天地二分)

소리도 나지 않는 무음무영의 손놀림!

그러나 그 위력만은 하늘도 인정해줄 만큼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촤악!

빛나는 신기루 같은, 한순간 섬광의 번쩍거림과 함께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이 이분되는 선(線) 하나가 그어졌다.

비류연의 생명을 집어삼키기 위해 사납게 휘몰아치던 창날철쇄의 용소(龍嘯:소용돌이)가 거짓말처럼 반으로 갈라졌다. 마치 거짓말 같은, 꾸며놓은 것 같은 장면 이었다.

아직 다(多) 대(對) 일(一)의 싸움에서 절대 실패하지 않았던 필살기가 상대방의 단 한번의 손짓에 맥없이 파해(破解)된 것이다. 그 충격이란 이만 저만 큰 것이 아 니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도 당연했다.

황금으로 번뜩인 빛의 칼날은 창날의 소용돌이만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날카로운 빛의 칼날은 사대질풍이 타고 있던 네 필의 말까지 한꺼번에 몰아 단숨에 이등 분해 버렸다. 그 알 수 없는 불가해한 예기(氣)는 한 토막의 거짓말 같았다.

위무상은 온몸에 소름이 쫘악 끼쳤다. 아직도 성대하게 일어난 소름은 가라앉을 생각을 안하고 있었다.

이토록 날카롭고, 빠르고, 무시무시한 검기는 소문으로 들은 적이 없었다.

몸통의 반을 잃은 말의 중심이 급속히 앞으로 쏠리며 전방으로 공중제비를 돌았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기수가 무사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뿌옇게 일어난 흙먼지 속에서 붉은 안개 같은 피보라를 뿌리며 네 필의 말 상반신이 바닥을 뒹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게 달려들던 사대질풍은 공 중을 날아 지면으로 처박혔다. 무거운 그들의 철갑은 역시 그들에게는 치명적인 독이었다. 그 독이 그들의 움직임을 마비시키고 그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으드득! 뚜둑!”

목뼈가 반대로 돌아가는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그렇게 해서 이날 철각비마대의 인명록에서는 사대질풍의 이름이 지워지게 되었다. 그 대신 흑천맹 전사자 조의금 청구 영수증에 그들 네 명의 이름이 올라 재정 담당부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대로 잠자코 있어도 되는 겁니까? 이러다가 시체를 치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청흔이 염도에게 자신의 심각한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으음! 시체라… 좋을 지도 모르지.”

만일 그 누군가의 시체를 치우게 된다면 자신도 이 지긋지긋한 악몽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욕망이 염도의 가슴 한 구석에서 돌출되어 나와 그 의 인내심을 자극했다.

“그러나….”

청흔이 뒷말을 이었다.

“그럴 수는 없겠지요.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천무학관의 제자가 아닙니까. 이대로 사지(死地)로 걸어가는 걸 두고 볼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염도는 청흔의 의견에 대해 생각해 보는 척했다.

비류연의 실력에 대해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염도로서도 이번 승부를 쉽게 장담할 수가 없었다. 여느 때 같으면 십이 할 이상 비류연의 승리를 장담하고 보증서라도 쓰라면 썼겠지만, 이번에는 너무 까다로운 상대였다. 그도 철각비마대의 위용(偉容)을 묘사한 질풍비마(疾風飛馬) 무적철갑(無敵鐵鉀)이라는 유명한 여덟자를 익히 들어온 터였다. 아무리 막나가는 비류연이라 할지라도 그 유명인(有名人)들에게 쉽사리 이기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염도의 눈이 깊숙이 가라앉았다. 과연 비류연의 운명이 오늘로서 종언을 고할 수 있을 것인가? 비류연이란 인간의 그릇도 만만치 않았다. 1년 반 이상을 곁에서 지 내 온 자신으로서도 그 끝을 아직 다 보지 못한 처지였다.

그렇다! 아무리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봐도 그 비류연이란 인간이 승산 없는 싸움에 난데없이, 그것도 그에게 가장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무모한 희생정신을 발휘했 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데…….”

너무 사람을 높이 보는 것도 잘못이다. 아무리 비류연의 인간성에 대해 억지로 좋은 등급을 매겨보아도 그럴 가능성은 너무나 희박했다. 괜히 괴물딱지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염도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그냥 모른 척하고 도망가는 법도 무척이나 긍정적으로 검토해볼 만한 일이지! 안 그러냐?”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자로 한 발짝 나아가기 위한 이 발언은 다른 사람의 발언이었다면, 싸그리 무시하고 지나가거나 처절히 규탄한 뒤 지나가거나 했겠지만, 그 발언자가 염도라면 문제가 틀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겁이라는 어휘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염도였기 때문이다. 염도에겐 비겁을 저지를 만한 주 변머리가 없다는 게 세간의 공통된 평이었다.

나지막한 염도의 목소리가 왠지 불길한 울림을 담고 그들의 고막을 울렸다.

과연 염도 노사는 여기서 무슨 대답을 얻길 바라는 것일까?

청흔은 염도의 내심을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목숨이 두서너 개쯤 넉넉하게 여분이 있다면 마음 놓고 대답하겠지만, 아쉽게도 하나뿐인 관계로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하나뿐인 목숨을 가벼이 여기고 함부로 내던지는 행위는 용기 있는 자의 행동이 아니라 어리석기 짝이 없는 우행일 뿐이다.

“그게… 저…….”

주작단과 문무쌍절은 입이 비단실로 삼백육십 바늘 정도 봉합된 사람마냥 대답하지를 못했다.

사실 자신이 앞으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기는 염도도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괜히 애들에게 화풀이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대로 죽으면, 그대로 아무런 수고 없이 치욕적인 제자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달콤한 유혹을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그런 비겁을 저지를 주변머리의 여유가 없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무림의 해악을 이독제독(以毒制毒 독으로서 독을 제압한다)의 원리로 제거하는 것은 무림을 위하는 일이라고 단정지어버리면 간단한 일인 것을. 오늘따라 유달리 정의심에 불타는 자신이 미웠다. 좀더 능글능글하고, 융통성과 약삭빠름, 그리고 간사(奸邪)라던가 비겁(卑法)이라던가 하는 특기가 있었다면 일을 좀더 수 월하고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따라 이성과 감정이 따로 노는 자신이 정말 싫어지는 하루였다.

“으음… 어떡한다? 어떡한다? 어떡한다?

평소에도 부족한 잔머리가 오늘도 예외 없이 영 돌아가지 않았다. 그때 염도의 상념은 한 여인의 말에 의해 깨지고 말았다.

“그래도 가서 구해야겠지요.”

염도가 고개를 들어 아름다운 목소리의 출처를 찾았다.

주작단과 문무쌍절이 이렇다 저렇다 말도 많고 의견도 분분할 때, 그리고 염도도 혼자서 자기 생각에 한없이 빠져있을 때, 조용히 자리를 털고 일어난 사람이 있었 다. 입술을 꼭 닫은 채 전장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이는 가냘픈 몸매를 소유한, 이 세상의 것이라고 단정하기 힘든 미모의 여인이었다.

“언니!”

나예린의 느닷없는 행동에 놀란 이진설이 황급히 그녀를 불렀다. 나예린이 시선을 돌려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넌 따라올 필요 없다.”

무심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언니!”

놀란 얼굴로 이진설이 외쳤다. 그녀의 말속에 나예린의 행동을 막고자 하는 의지가 확실하게 들어있었다. 그러나 이진설의 말에 행동이 좌우될 나예린이 아니었 다. 그녀는 다시 앞을 바라보고 묵묵히 걸어갔다.

“나 소저, 어딜 가시는 길입니까?”

백무영이 얼른 물었다. 그가 그녀의 행동을 저지했다.

“그걸 꼭 말로 해야만 하나요?”

무심한 얼굴로 나예린이 반문했다. 당연한 것을 묻지 말라는 어투였다. 백무영은 순간 뜨끔해지는 마음을 추스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꼭 혼자서 위험에 몸을 노출시킬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주변에 걱정하는 사람도 생각해주셔야죠. 만일 소저 몸에 털올만한 상처라도 난다면. 그 다음 나올 말은, 너무나 끔찍스런 그 내용 때문에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인 백무영으로서도 차마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만일 나예린의 몸에 티끌만한 상처라 도 나는 날이면 격렬한 분노에 심장이 파열된 나예린의 광신적인 추종자들이 눈에 불똥을 튀기며 사파로 쳐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강호는 바로 정사대전의 혈풍에 휩쓸리고 마는 것이다. 상상만으로 끔찍한 일이었다.

백무영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굳이 입을 열어 대답하려하지 않았다. 그저 앞을 보고 묵묵히 걸어갈 뿐.

“어어어… 소저! 멈추십시오.”

다시 한 번 나예린을 저지해보려던 백무영의 행동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녀는 손에 잡히지 않는 바람처럼 그의 손을 빠져나갔다.

“나는 왜 지금 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인가, 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인도하는 방향대로 발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그런 남자 따윈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런 신경 쓸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일이거늘……. 나예린은 자신의 행동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이런! 이렇게 되면 뻘쭘하게 혼자 앉아있을 수 없잖아!”

머리카락을 북북 긁으며 노학이 일어났다. 남궁상도 현운도 마찬가지였다. 장홍과 효룡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험악한 전장에 여인이 앞장서서 걸어가게 만 들면 그건 남자 망신이었다. 그런 놈은 사내대장부라 불릴 자격이 없었다.

주작단 모두가 일어났다.

“여자는 위험하니깐 여기서 기다리는 게 어때?”

당삼이 말했다. 그러자 당장에 당문혜가 반박하고 나섰다.

빡!

일단 그녀의 반박은 주먹 한 대를 동반했다.

“당삼! 네가 언제부터 남녀성차별주의가 됐지? 언제부터 여자들을 깔보게 됐어?”

당문혜가 맹독을 품은 독사 같은 살벌한 시선으로 당삼의 전신을 후벼 팠다.

당삼은 주위 상황을 제대로 탐색하지 않고 놀린 자신의 입을 원망하며 와들와들 떨었다. 아직 그는 한번도 이 누이에게 기세싸움에서 이긴 적이 없는 불쌍한 신세 였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불쑥 무덤을 판 입을 책망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왜 말 못해? 빨리 말해! 언제부터 여자를 얕보게 됐는지 빨리 말해 보라구.”

당삼은 한번의 말실수 때문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아니… 저… 그게… 아니라…….?”

당삼은 이제 울상이 되어있었다. 천지사방 어디로도 도망갈 길이 없었다.

남자들은 다들 그의 처지를 동정했지만 감히 도움의 손길을 뻗치지는 못했다. 조용히 속으로 애도의 염불만을 외워주는 게 주위의 남자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이 었다.

“왜 아직도 말 못해?”

당문혜의 손톱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뽐내며 햇빛에 반짝였다. 당삼은 내년에 제사상을 받아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다신 안그럴게, 누나!”

할 수 없이 당삼은 두 손 모아 지문이 닳도록 싹싹 빌며 자신의 잘못과 패배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들 감히 당문혜와 눈을 맞추려하는 이가 없었다. 여자들 만이 그녀의 주위에서 그녀의 승리와 여성인권 신장에 축하를 보내고 있었다.

“이길 수 있는 자신은 있느냐?”

어느새 자리를 털고 일어난 염도가, 일어서 있는 모두를 향해 말했다. 모두 다 일어나 버리자 청흔과 백무영도 더 이상 자리 보존하고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없더라도 해야할 때가 있는 법이죠. 여성이 앞서는데 사내가 꼴사납게 뒤나 쫄래쫄래 따라갈 수야 없는 노릇 아닙니까? 아니면 더욱더 치욕적인 행동의 일환으로 꼬리를 말고 도망치던지요. 평생의 치욕을 남겨 오명 속에 살아가느니 차라리 장렬하게 싸우다 산화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굳은 신념에 빛나는 눈으로 남궁상이 말했다. 그러자 모두들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의 마음이 어느새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여전히 나예린은 저 앞을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번쩍!

“히이이이잉! 크아아악! 우당탕탕! 뚜둑!”

“저… 저건 뭐냐?”

염도가 물었다.

“그… 글쎄요?”

자신도 모르는 걸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야! 이거 설마 꿈이 아니겠지?”

갑자기 솟구치는 의문!

“그… 글쎄요.”

남궁상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비류연이 있는 현장에 도착한 그들이 목격한 것은 사대질풍을 일격에 두 동강 내는 비류연의 믿겨지지 않는 신위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자리에 우뚝 못박히고 말 았다. 그것은 나예린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흑천맹은 방금 달려든 네 필의 말들에 대해 더 이상 그 유지비를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 말들의 값비싼 먹이라던가 그보다 더 비싼 철갑주를 유지 보

수시키는 데 들어가는 모든 공금에 대한 신경을 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회계장부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근거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네 필 의 말에 타고 있던 철각비마대원들의 급료와 생명위험수당에 대해서도 신경 쓸 필요가 전무해졌다. 물론 이들 네 명에 대한 조의금을 충분히 지급해야한다는 문제 가 아직까지 남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것 이외의 지출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방금 전 비류연의 일격으로, 네 필의 철갑마를 타고 돌진하던 사대질풍이라 불리는 무사들이 전부 수평으로 두 동강 나버렸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이들 사대질풍은 눈을 부릅떠야만 했다. 단 일수에 자신들 네 명을 벤 사람이 있다는 현실에 대한 반항의 표시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얼굴에 나타난 마지막 표정이기도 했다.

천지를 이분하는 듯한 눈부신 섬광에 깨끗이 잘려나가는, 한때는 온전했었을 사람들의 시신! 신(神)의 칼날 같은 섬광이 천지를 이분하자 네 필의 말이 허공에 공 중제비를 도는 묘기까지 보여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곳에 온 목적을 잊은 채 멍하니 전장을 바라보았다.

그 황량한 벌판의 한가운데에 막대한 병력과 무력을 자랑하는 오십 명의 철각비마대와 대치하는 중에도 비류연의 위풍은 당당하기만 했다.

“도와주는 건 잠시 보류하자!”

마침내 염도는 용단을 내렸다.

아무래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그… 그러죠.”

얼이 빠진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환상인가? 아니면 현실을 집어삼키는 지독한 악몽인가?”

폐부 깊숙한 곳으로부터 새어나오는 떨리는 목소리. 위무상은 지금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볼을 대신 꼬집어 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해볼 것도 없이 분명한 현실입니다. 더할 나위 없이 진실 되고 올바른 현실! 현실도피는 나쁜 버릇이에요.”

비류연이 타이르듯 말했다.

“난 못 믿는다.”

위무상이 억지를 부렸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다 큰 어른이 뻔히 눈에 보이는 현실을 두고도 억지 강짜를 부리겠는가! 우린 현재 위무상이 처해있는 심리상태를 이 해해 주어야만 한다.

“그럼 할 수 없죠!”

“아악!”

갑자기 위무상은 오른쪽 볼에 극심한 통증을 느껴야했다. 비명은 그 부산물이었다.

“뭐… 뭐냐?”

약속대로 비류연이 그를 대신해 꼬집어 준 것은 아니었다. 불에 덴 듯한 화끈한 통증과 함께 어느새 그의 볼에는 한줄기 붉은 자상(刺傷)이 선명하게 그어져있었 던 것이다.

“어… 어느새?”

“악몽인지 환상인지 궁금하다면서요? 아아, 이 얼마나 착실하고 친절하고 상냥한 청년이란 말인가… 나란 인간은…….”

분명히 제 정신 박힌 남자라면 맨 정신으로 듣기엔 무척이나 괴로운 말이었다. 그래도 위무상의 현실 인식에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이… 이 일을 이제 어쩌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해결책이 보여야 어떻게든 대책을 세울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러나 이번 일은 어느 쪽으로 머리를 굴려도 대책이 서지 않았다. 열심히 연기 나도록 머리를 굴려본 위무상은 자신이 절대 군사(軍師) 체질이 아님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그는 행동전문이지 두뇌전문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 번 무력행동으로 이 사건을 타개하기로 결정했다.

“철비십이격(臂十二擊)!”

자신의 정신상태가 제정신인지 돈 정신인지도 분간도 못하는 혼란스런 상황에서 위무상은 철비십이격을 불렀다.

철비십이격!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두려움을 모르는 선천적인 전사들이었다. 이들 열두 명이 동시에 펼치는 포위섬멸술(包圍殲滅術)은 방금 전 유명을 달리한 사 대질풍의 연환합격술보다 한 차원 더 뛰어난 위력을 지니고 있다는 평판을 듣고 있었다. 원래 이들의 포위공격술은 다수의 적을 상대하며 펼쳐지는 것이었지만, 오 늘만은 단 한 명의 적을 제거하기 위해 펼쳐지게 되었다.

이미 두 번의 거짓말 같은 환상을 본 이후라 그들의 눈빛은 처절할 정도로 진지했다. 그들도 어엿한 학습능력이 있는 이상 깔보는 마음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철 비십이격은 자신들이 지닌 내공을 전력으로 끌어올려 창끝에 집중시켰다. 바람도 없는데 그들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기세에 의해 그들의 망토가 펄럭거렸다. “일자정렬(整列)!”

열두 필 되는 철갑마들이 일렬로 정렬했다.

“거창(擧槍)!”

척! 척! 척! 척!

전 대원이 일제히 창을 들어올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구에 매달고 있는 여러 개의 창 중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이들은 주로 장거리 투창에 의한 공격을 즐겨하기 때문에 그들의 마구에는 여러 개의 창이 걸려있었다. 이들은 그 중 하나를 뽑아든 것이다. 수백 번의 훈련을 거친 자들답게 이들의 동작은 톱니바퀴처럼 일치했다.

“투창세(投槍勢)!”

철컥 소리와 함께 그들의 창이 어깨 위로 들어올려졌다. 기가 창에 주입되어 검에 맺힌 검기처럼 창경(槍勁)이 실체화한 것이다. “기창(槍)인가?”

비류연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창술지도 노사인 창군(槍君) 언유규의 시범 때 얼핏 보기는 했지만 직접 상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원래 창이란 무술병기라기보다는 군사적 병기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백도에서는 상당히 외면 받는 병기였다.

“진격(進撃)!”

위무상의 신호에 전마가 일제히 대지를 박차고 앞으로 달려갔다.

“일점집중(一點集中)! 십자투창(字投槍)! 연사(連射)!”

이들은 자신들의 단련된 힘에 달려오는 말의 속도를 더해 전력으로 창을 던졌다. 물론 목표는 비류연. 철각비마대가 자랑하는, 아직 한번도 빗나간 일이 없는 실패 를 모르는 무적의 진형이었다.

쐐애애애액!

눈부신 속도와 엄청난 파괴력을 겸비한 하얀 섬광이 허광을 요란스레 꿰뚫는 파공성을 내며 비류연을 향해 하얀 궤적을 그렸다.

철비십이격의 창격과 투창은 한 뼘이 넘는 철판도 뚫고, 바위도 부술 만큼 무식한 위력을 지닌 일격이었다. 이들의 철비(鐵臂)라는 별호에서 비(臂) 자는 무쇠 같 은 팔뚝을 나타내는 글자였다. 그러나 비류연은 제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물론 자살을 계획한 건 아니었다.

비뢰도(飛雷刀) 독문(獨門) 비전신법(秘傳身法)

봉황무(鳳凰舞) 오의(義)

진야(振)

스르르륵!

흔들리는 환상의 밤처럼 비류연의 몸이 여러 겹의 잔영을 그리며 흔들렸다.

슈슈슈슈슉!

철비십이격은 물론이고 위무상과 염도를 위시한 천관도들 모두 소매로 자신의 두 눈을 비볐다.

비류연의 몸을 아무런 성과 없이 관통한 창들이 대지에 틀어박혀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흙먼지를 일으켰다. 이미 비류연의 등 뒤는 쑥밭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비 류연의 몸엔 터럭 하나의 상처도 없었다. 모든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것이다.

모든 투창공격을 뒤로 흘려보낸 줄 알았던 비류연이 제자리에 멈춰 섰을 때 그의 손에는 창 한 자루가 들려있었다.

정면으로 받아내기도 불가능에 가까운 공격이라고 불려지는 철비십이격의 투창을 맨손으로 받아내 버린 것이다. 되도록 지양해야 할 일을 서슴없이 저질러 버리 는 비류연이었다. 애초에 두려움이라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몽땅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란 듯이 창을 잡아낸 것은 아무래도 과시용인 것 같았다.

마치 ‘난 이런 것도 할 수 있어… 내가 힘이 없어서 피해버린 게 아냐!’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 이럴 수가!”

위무상이 다시 한 번 입을 쩍 벌렸다. 아무래도 오늘 그의 턱 관절에 이상이 생길 모양이었다.

철비십이격들도 혼란에 빠진 듯했다. 왜냐하면 잠시 그들의 움직임이 통제에서 벗어난 행동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수들답게 그들은 곧 다시 진형을 갖 추었다.

“정신 차려라!”

위무상이 소리치며 그들을 닦달했다. 더 이상의 실패란 존재해선 안 되었다.

믿었던 비장의 공격술인 십자연사투창이 실패로 돌아가자, 즉시 철비십이격의 조장이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돌격세(突擊勢)!”

철컥 소리와 함께 창이 그들의 허리 부근에 굳건하게 고정되었다. 허리춤에서 정면을 향해 창극을 들이민 이들의 창이 새하얀 우윳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열두 명의 철비십이격은 이번 공격이 실패하면 그것이 곧 자신들의 죽음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신의 기력을 모두 짜내 어 정면으로 부딪쳤다.

“기창충격(氣槍衝擊)!”

마침내 철각비마대 최강의 공격 진세가 만인 앞에 선을 보였다.

두두두두두두!

두 패로 나누어진 철비십이격이 말을 몰아 비류연의 양쪽을 압박해 들어갔다.

열 필의 말이 일제히 대지를 박차며 앞으로 달려 나왔다. 이건 전쟁이 아니기 때문에 단 일인을 포위 공격하는 데 열 명 이상은 방해일 뿐이었다. 동료의 움직임을 방해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이들은 자신들의 생사를 도외시하고 전력으로 비류연을 쓰러뜨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비류연은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비류연은 이들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의 눈은 황금빛으로 빛났고, 그의 심장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리고 올올이 풀려져있던 그의 정신은 하나로 꼬여 져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서리발 같은 예기를 뿜어냈다.

철비십이격은 철의 벽으로 장막을 치듯 비류연의 주위를 감싸며 원을 그리듯 포위했다. 그러나 진짜 공격은 원형으로 비류연을 포위한 열 명의 사람들로부터가 아 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열 명이었기 때문이다.

“히이이잉!”

천공의 햇살을 등지고 두 마리의 말이 원형의 벽을 뛰어넘어 좌우에서 동시에 비류연에게 창을 찔러 넣었다. 거의 일장(약 3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높이를 뛰어 넘는 엄청난 도약력과 기마술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진형을 구축하기 위해 이들의 무장은 다른 이에 비해 훨씬 가벼웠다.

상하좌우 어디로든 피할 길이 꽉 막힌 죽음의 포위망이었다. 그러나 끝내 사신은 비류연의 뒷덜미를 잡아채지 못했다.

비뢰도(飛刀) 검(劍)오의(義)

천붕지열(天地裂)의 장(章)

뇌격타(雷擊打) 천근뢰(千斤雷)

보이지 않은 거대한 주먹이 두 마리의 말을 뒤로 날려보낸 것처럼 보였다.

두 줄기 섬광이 두 마리 말을 꿰뚫었다.

“쾅!”

아니, 꿰뚫었다기보다는 때렸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거대한 힘이 일순간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날카로운 비도에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공중에 떠있던 말은 2장이나 뒤로 날아가 버렸다. 직접 보지 않았으면 믿겨지지 않았을 광경이었다. “우당탕탕탕!”

두 명이 저 뒤로 날아간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믿었던 1차 공격이 무산되자 철비십이격은 당장 2차 전면공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비류연은 그것을 용납 하지 않았다.

비뢰도(飛雷刀) 오의(義) 검기(劍氣)

사신무(四神舞)의 장(章)

봉황(鳳凰)

봉익비상(鳳翼飛上)

좌우 양측에서 비류연을 포위 압박해 들어가려던 열 명의 철비팔격은 봉황의 날갯짓처럼 양 옆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려한 검기에 휘말려 보기 좋게 난자되었다. 일단 발동된 검기는 얼음처럼 무정하여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봉황의 날개짓은 차가운 검날, 수십 개 검영(劍影)이 되어 철비 팔격을 도륙했다. 철의 마갑으로 무장한 철갑마들도 빛나는 봉황의 날갯짓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 다. 산산조각 깔끔한 단면을 그리며 잘려져 나갈 뿐이었다. 한 마리의 봉황이 검기(劍氣)의 빛으로 무장한 채 하늘로 날아올랐다.

피할 기회 같은 건 애초에 부여되지 않았다. 그저 날갯짓처럼 좌우로 수십 개의 잔영을 그리며 뻗어 나오는 눈부신 검기가 하늘로 솟구쳐 오를 때까지…, 피의 비 가 다시 한 번 대지를 적실 때까지 비류연은 맨 처음 서있던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홀로 서있었다.

미지에 대한 공포가 철각비마대의 심연(心緣)으로부터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믿을 수가 없군!”

여태껏 보고만 있었던 구천학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지금 자신의 수하들이 당하는 것에 대한 분노보다 상대의 무공에 대한 경탄이 먼저 터져 나왔다. 무림인들의

나쁜 버릇 중 하나였다. 지금 비류연이 보여준 놀라운 신위는 인간의 것이라고 생각하기엔 도저히 무리가 있었다. 이미 그것은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것이었다. 그 유명하고 이름 드높은 공포의 대상이자 무력의 상징이던 철각비마대가 매가리도 못 추고 한 소년의 어영부영한 가벼운 손짓에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었다는 걸 어느 누가 믿어줄 수 있겠는가. 애초부터 무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정신이 제대로 못 박힌 사람이거나 부실한 마음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류연이란 녀석은 이 세상에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불가해(不可解)한 일이 아직도 일어난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듯 묘기를 보였다.

“에잇!”

지켜보던 염도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걸어가며 애도 홍염을 ‘턱’ 어깨에 걸쳤다. 투지가 끓고 몸이 근질근질한지 자신을 주체하지 못 하는 모습이었다. 그도 어쩔 수 없는 태생부터 무인이었던 것이다.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제에에에엔장!”

입으로는 젠장, 제길, 쓰불을 연발하면서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울상을 지으면서 앞으로 걸었다. 자신도 모르게 철각비마대와 대치하고 있는 비류연 에게로 그의 발길이 향하고 있었다.

그곳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자신의 다리를 베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염도는 가까스로 억눌러야 했다.

“이건 분명히 말해두지만 가고 싶어서 가는 게 아냐! 절대로 마음 내켜서 행동하는 게 아니라고! 어쩔 수 없이, 정말 어쩔 수 없이 걸어가는 것뿐이야. 알겠냐?” 끄덕끄덕!

염도의 박력에 누가 감히 토를 달수 있겠는가.

“제엔장!”

그리고는 염도는 열심히 전장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