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못한 재회(再會)
마침 비류연은 애소저회에서 볼일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동호회 거리를 걷는 중이었다.
그가 막 소로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두 사람의 여자가 있었다.
뛰어난 비류연의 안력은 그 두 사람이 여자란 사실과 그 여자들이 상당한 미인이라는 유익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러나 비류연은 다른 의미에서 그녀를 보고 놀라고 말았다.
설마 비류연도 이런 식으로 그녀와 재회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녀와의 관계는 그저 재미있는 추억거리에 불과했었다. 다시 만날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이런 시시한 곳에서 우연치 않게 만난 것이다. 그러니 준비된 반응이랄 게 있을 리 없었다.
“어?”
비류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누이 말하지만 그의 동그랗게 뜬눈은 앞머리에 가려 상대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어?”
상대의 반응도 예측불허의 사태를 접한 사람의 반응이었다.
늘씬하게 빠진 몸매. 백옥 같은 피부. 흑요석 같은 눈동자. 온몸에 넘치는 기품. 고고한 향기.
그리고… 바람에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
눈이 돌아갈 만한 미녀였다. 그녀는 지금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움켜진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비류연은 무의식중에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이야! 뚱땡이.”
미녀의 얼굴이 단번에 불쾌감으로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녀의 백옥 같던 얼굴은 순간 울그락불그락 하게 변했다.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고 했던가……. 주변의 공기가 서리라도 내린 듯 갑자기 싸늘하게 변했다. 여인은 솟구치는 살기를 억제할 수 없었다.
여인을 호위하고 있던 팽유경은 순간 자신이 헛소리를 들은 게 아닌가 하는 자기 회의에 빠져들었다. 감히 자신이 호위하는 분의 면전에서 이런 극도의 무례를 범 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이 돌연히 눈앞에 나타난 태생 불명의 무뢰한이 자신이 수행하는 분을 아는 체 한다는 것이었다. 여인의 신분을 알면서도 그런 무례를 저지른다?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터라 순간 팽유경은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망 각해 버린 것이다.
팽유경이 힐끔 시선을 돌려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의 몸은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여인이 이렇게까지 동요하는 것을 여태껏 본 일이 없었다. 그 녀는 그제서야 자신이 할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챙!
그녀의 도집으로부터 도가 뽑혀 나왔다. 그녀는 도의 명문 하북팽가의 일족이었다.
“이런 무례한 놈!”
팽유경이 버럭 호통을 쳤다. 반드시 이놈에게 중징계를 내려야만 했다.
“그쪽은 처음 보는 분이네요.”
비류연이 살기등등한 팽유경을 향해 말했다. 팽유경이 버럭 화를 냈다.
“닥쳐라! 너 같은 놈이 회주랑 알기라도 한다는 말이냐?”
항상 그녀의 호위를 전담하다시피 한 팽유경의 기억 속에 비류연이란 무뢰한은 들어있지 않았다.
비류연의 시선이 여인에게로 향했다. 순간 여인의 몸이 잘게 움찔했다.
“다시 만났네요.”
비류연이 웃으며 말했다.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심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입술을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깨물었다. 여인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 작했다. 그녀의 눈에서 한광이 뿜어져 나왔다.
팽유경은 칼을 뽑은 채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인의 자존심으로 볼 때 이런 일은 사지의 근맥 중 하나를 끊을 무례였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여인은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살기가 들끓어 오르고 있었다.
‘설마 저 남자를 이곳에서 만나다니…….?
오백일간의 폐관수련을 마치고 날아갈 듯한 마음으로 천무학관에 돌아온 자신의 기분을 단번에 지옥 끝 나락으로 떨어뜨린 사내였다.
자칫 잘못하면 철통같이 숨겨 왔던 치부(恥部)가 드러날 수도 있었다. 지금 그녀가 지닌 일생일대의 비밀이 만천하에 드러나 버릴 위험에 처해있었다. 그것은 누 구도 알아서는 안 될 그녀만의 비밀이었다. 그것이 알려질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마음 같아서는 살인멸구라도 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저 남자의 입을 막아야 했다. 수단과 방법 따윈 필요 없었다.
그날 느닷없이 나타났다, 느닷없이 사라져 얼마나 당황했었던가… 그리고 얼마나 마음 졸였던가. 어쩌면 오늘 만난 게 행운일지도 몰랐다. 어떻게든 저자의 입을 봉해야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용서할 수 없어!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절대로 봐서는 안 될 자신의 비밀을 본 자였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리라. 증오에 가까운 분노와 살의가 그녀의 심신을 지배했다. 일단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그녀의 발아래 굴복시켜야만 했다. 그것이 그녀가 해야 할 첫 번째 과제였다.
팽유경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마음을 눈치 채 주었으면 하고 여인은 생각했다.
“네놈 감히 이분이 누군 줄 알고 그런 무례를 저지른 것이냐?”
팽유경이 말했다. 그녀를 앞에 두고 이렇게 뻣뻣하고 무례한 천관도는 처음이었다. 과연 저런 모습을 한 자가 천무학관 관도가 맞는지부터가 의심스러웠다. “누군데요? 높은 사람인가요?”
비류연의 반문에 팽유경은 어이가 없었다. 어처구니없기는 여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설마 저 남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는 것은 아무에게도 이 야기가 새어나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여인은 조금 안도했다.
“귓구멍 씻고 잘 들어라. 이분은 바로 천무학관 군웅회 회주를 역임하고 계시는 철옥잠 마하령 님이시다.”
처음 그녀를 본 사람은 어떻게 그녀가 여인의 몸으로 고수와 기재가 득실댄다는 천무학관의 이대 세력 중 하나인 군웅회의 회주를 역임할 수 있었는지 의아해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신분을 알게 되면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고 만다. 그녀가 충분히 군웅회주를 맡을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녀는 바로 천무삼성(天武三聖) 중 일인인 도성(刀聖하후식의 외손녀이자 천무학관주 철권 마진가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이었다. 무림에서 가장 혈통 좋은 사 람 중 한명이라 자부할 만했다.
“오호!”
비류연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쳤다.
“아아! 누군가 참 궁금했었는데 그 유명한 분이셨군요. 그때 재미있는 것 보여줘서 참 고마웠어요.”
비류연이 싱긋 웃으며 반가워했다. 물론 마하령은 전혀 그 웃음을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해결책을 모색해 이 난국을 타개해야만 했다. “그런데 설마 그 도, 날 베는데 쓰려고 뽑은 거 아니죠?”
비류연의 손가락이 팽유경의 손에 쥐어진 도를 가리켰다. 비류연이 보기에 저 도 끝에 서려있는 기운은 살기가 분명했다. 팽유경은 아직 회주인 마하령의 언질이 없어 제재를 보류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함부로 도를 뽑다니 이상한 분이시네요.”
다짜고짜 도를 뽑다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비류연은 생각했다. 그리고는 경고했다.
“다치고 싶지 않으면 그만두는 게 좋아요.”
“뭣이라?”
팽유경이 발끈했다. 비류연은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떻게 하면 사람은 열 받게 만들 수 있는지 전문적으로 연구라도 한 사람 같았다.
팽유경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난 나에게 위해가 되는 그 어떤 행위도 용납할 마음이 없어요. 설령 그것이 여자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크게 잘못되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도를 도집 에 넣는 게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되네요.”
비류연으로서는 나름대로 충고한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상대를 깡그리 무시하는 그런 우주거만한 충고가 남에게 들어 먹힐 리가 없었다.
팽유경은 어이가 없었다. ‘뭐 저딴 놈이 다 있지?’라는 게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녀가 아직도 도를 손에만 쥔 채 휘두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보통 때의 그녀는 그리 인내심이 강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오늘 당장 없던 인내심이 마른 땅에서 샘솟아 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무엇인가가 그녀의 공격하고자 하는 행동을 훼방 놓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그녀 자신도 몰랐다. 자기 방어 본능이라고나 할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그냥 몸이 거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자꾸 말이 많아지는 지도 몰랐다.
“넌 몇 학년이냐?”
팽유경이 물었다.
“2학년 일걸요?”
비류연이 순순히 대답했다. 굳이 숨길 이유 따위가 없었기 때문이다.
“뭐?”
팽유경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알고 봤더니 새파랗게 어린 후배가 아닌가. 그녀는 이래봬도 지금 4학년 이었다. 이곳 천무학관에서의 2년 차는 엄청난 차이였다. “넌 본녀가 4학년인 건 알고 있냐?”
“그랬어요?”
전혀 몰랐다는 말투! 그러나 전혀 신경 안 쓴다는 말투이기도 했다.
“그랬다.”
‘괜히 긴장했네’
그녀는 생각했다. 이 순간 팽유경은 비류연을 깔보고 말았다. 그래서 팽유경은 그녀의 본능이 지시한 바를 따르지 않는 대실수를 저질렀다. 순간 그녀의 행동을 묶 고 있던 보이지 않던 족쇄가 풀리면서 도광이 시퍼런 이빨을 드러냈다.
그녀는 이렇게 비류연의 경고를 무시하고 말았다.
여인의 지위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던 팽유경은 자연스레 콧대가 높아져 참을성이 없었다. 여인의 지위라면 언제나 모든 일이 단번에 해결되기 때문 에 기다려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내심 따위가 싹을 틔울 토양이 조성됐을 리가 만무했다. 그녀는 자신의 본능이 인도하는 바를 따르지 않고 학년이 낮 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류연을 무시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비류연은 약속을 지켰다. 분명히 후회하게 만들어 준다고 손가락 걸고 약속까지 했었던 것이다. 특히나 이런 약속은 꼭 착실히 지키는 비류연이었다. 텁 !
꼴사납게도 팽유경이 전력을 다해 펼친 하북팽가(河北彭家) 비전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는 비류연의 두 손가락에 의해 더 이상의 움직임을 봉쇄당하고 말았다. 그녀가 아무리 용을 써도 두 개의 손가락에 물린 그녀의 칼을 빼내올 수가 없었다.
땡강!
그걸로 끝이었다. 무인의 자존심인 무기가 비류연의 두 손가락에 의해 반 토막이 되어 한쪽 벽에 날아가 박혔다.
“공수입백인(空手入白刃) 쇄병(碎兵)!”
마하령이 경악성을 토했다.
공수입백인 쇄병! 맨손으로 상대의 무기를 잡아 그것을 부러뜨리는 지고한 경지! 겨우 2학년짜리가 펼칠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비류연의 주먹이 팽유경의 배 를 강타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팽유경의 몸이 털썩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정신의 끈을 놓아버렸다.
“너… 넌 누구냐?”
경악한 마하령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나왔다. 설마 군웅회의 십팔고수 중 한 명인 단옥도(斷玉刀) 팽유경이 이리도 간단히 쓰러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 다.
이렇게까지 그녀를 놀라게 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마하령은 머리꼭대기 정수리에서부터 얼음물을 뒤집어 쓴 듯한 느낌이었다. 이글거리는 화산처럼 날뛰던 흥분 도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도 명색이 한 회를 이끄는 회주였다. 상대의 강함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감을 잡을 능력은 있었다.
스윽! 턱!!
너무나 간단히 마하령의 왼쪽 손목이 비류연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너무나 수월한 한 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피해내지 못했다. 그동안 수련했던 모든 것이 허사로 느껴질 만큼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방심이 화를 부르고 만 것이다.
“놔라!”
“싫은데요!”
비류연은 그녀의 부탁을 단박에 거절했다.
“놔!”
그녀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러나 마치 몸이 올가미에라도 걸린 듯 그녀는 비류연의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무형의 경력이 손목을 통해 그녀의 전신을 제압하 고 있었다. 그녀는 빠져나가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런 험한 대접은 태어나서 생전 처음이었다. 항상 주위에서 떠받음을 받고 살아온 그녀로서는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뭘 그렇게 두려워 하는 거죠?”
“놔!”
그녀가 다시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녀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거죠?”
비류연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
그녀는 홱 하고 고개를 돌려 비류연의 얼굴을 외면해 버렸다. 묵비권의 행사였다.
“아! 혹시 그것 때문에 그래요? 그날 밤 그 일 때문에?”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그녀의 얼굴이 비류연을 향해 돌아왔다.
비류연이 쾌재를 불렀다.
“아하! 역시 그것 때문이었군요. 그게 그렇게 불안했어요?”
이번에도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그건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신기한 모습이긴 했죠.”
비류연이 싱긋 웃었다. 그 웃음은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 같다고 마하령은 생각했다. 그녀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이… 이놈이!”
휙! 그녀의 손바닥이 비류연의 뺨을 향해 날아갔다.
‘짝!’ 소리는 나지 않았다. 비류연이 슬쩍 그녀의 손바닥을 피해냈기 때문이다. 그녀는 너무나 분했다. 이대로는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버릴 것 같았다. 그녀 는 어떻게든 이 울분을 토해내고 싶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나왔다.
“이… 이… 이…….?
너무나 분한 나머지 그녀는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이 출신도 없는 비천한 놈이!”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범한 절대의 금기(禁忌)! 그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될 실수였다.
비류연의 눈에서 순간적으로 피어오른 한광(光)이 그녀의 전신을 꿰뚫었다. 순간 대기가 싸늘하게 냉각되었다. 마하령은 숨이 턱 막혔다. 그녀의 심장을 옥죄는 그것은 바로 공포였다.
더 이상 비류연은 참아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짝!”
요란한 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아무래도 그녀는 넋이 빠진 것 같았다. 너무나 엄청난 일을 너무나 순식간에 당하는 바람에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그녀는 벌겋게 부어오른 뺨을 부여 잡으며 멍하니 서있었다. 그녀의 이성이 돌아온 것은 잠시 후였다.
“이 천한 놈이! 네… 네 놈이 감히!”
그녀는 만악의 근원이 되는 혀를 또다시 너무 소홀히 다루었다. 그것은 너무나 부주의한 행동이었다. 그녀의 드센 자존심이 그녀의 혀끝을 조정했다. 그것은 화를 자초해서 부르는 짓이었다.
“짝!”
이번엔 맞은 편 오른쪽 뺨이었다. 이제 그녀의 양 볼에는 모두 벌건 손자국이 나있었다. 비류연의 눈은 싸늘하게 굳어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싱긋생긋 웃는 모습 은 온데간데 없었다. 현재의 그는 무심 그 자체였다. 순간 그녀는 오싹한 심장떨림을 느꼈다.
머리카락에 눈이 가려져 있지만 그녀는 비류연이 어떠한 눈빛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닥을 알 수 없는 무저갱(無底坑)처럼 깊고 어둡고 차가운 눈 빛! 여지껏 그 누구도 그녀를 그런 시선으로 본 사람은 없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뭐?”
“뭐?”
“뭐?”
같은 말이 3군데 장소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비류연이 벌여놓은 사건이 구정회, 군웅팔가회, 애소저회 이 세 곳에 거의 동시에 전달되었던 것이다. 보고를 들은 사람들이 이 초유의 사태에 경악하는 게 당연했다. 그중 가장 빨리 현장에 달려와 주변을 장악하고 사람을 막은 쪽은 마하령이 회주로 있는 군웅회가 아니라 구정회 쪽이었다. 이 일의 대처가 구정회보다 늦은 것 하나만으로도 군웅회는 수치를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수장의 신변에 일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경쟁자보다 늦게 도착한 것이다. 이런 원망은 모두 비류연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인의 장막을 둘러 주변을 통제해 사람들의 출입을 막은 백무영은 서둘러 문제의 장소로 달려갔다. 비류연과 마하령 사이에는 여전히 묘한 대치가 계속되고 있었 다.
비류연이 군웅회주 철옥잠 마하령에게 공포란 걸 최초로 심어주고 있을 바로 그때였다.
후다닥
“잠깐!”
현장에 강제 난입하듯 들이닥친 이는 바로 백무영이었다. 백무영은 비류연의 손에 뺨을 얻어맞고는 뺨을 부여잡고 있는 여자를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백무영의 말이 심하게 떨려나오기 시작했다. 사람의 몸까지 같이 떨릴 정도로 진동수가 무척 높은 것으로 보아, 보통 경악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자… 자네?”
“응?”
“왜 불러?”를 온몸으로 연설하는 듯한 모습으로 비류연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비류연은 예전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지금은 백무영에게 반가움을 표시할 정 도로 여유가 넘쳐보였다.
그 모습을 본 백무영은 지금 비류연이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전 재산을 걸어도 좋았다.
“그분이 감히 누군 줄 알고 함부로 손을 대고 있는 건가? 게… 게다가 손찌검이라니? 자네 미쳤나?”
경악한 백무영이 쉴새없이 쏟아내는 말을 들은 비류연의 인상이 단숨에 찡그려졌다. 쓰잘데기 없이 콧대 높고 버르장머리가 눈곱만치도 없는 여자애 하나 가볍게 징계 줬기로서니, 그 때문에 말을 들을 이유는 없었다. 일단 비류연의 생각은 그러했다.
“아주 정상이죠. 남의 집 가정교육을 대신 시켜줬다 해서 나쁜 말 들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백선배의 의견은 틀린 모양이지요?”
비류연의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그려졌다.
그의 미소에는 오늘따라 왠지 모를 싸늘함이 묻어있었다. 평소의 능글맞은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순간 백무영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자신도 내심으 로야 저기 저 고고하기 한량없는 무서운 아가씨의 부족한 가정교육 보충수업에 대해 적극적으로 찬동하는 바이지만 맡은 바 소임과 주변의 시선이라는 것이 존재 하는 이유로 그냥 잠자코 허수아비 흉내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백무영은 이대로 곱게 물러날 수가 없었다. 아마 군웅회는 회주 자신이 백무영에게 저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인 것만으로도 체면이 바닥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백 무영은 그걸로 충분했다. 이제는 사건을 한시라도 빨리 마무리 지어야 했다.
“저기…….”
백무영이 비류연에게 뭔가 말을 걸려고 하는 바로 그때였다.
우르르르!
“회주님! 괜찮으십니까?”
끝내 백무영은 입을 떼지 못했다. 그가 막 입을 떼려는 찰나 갑자기 인의 장벽을 제치고 여덟 명의 무사들이 황급히 들이닥친 것이다.
이 느닷없는 사태에 백무영은 황급히 검을 뽑아 느닷없는 침입자를 향해 겨누었다. 그러나 무사들의 정체를 확인한 백무영은 검을 즉시 검집에 갈무리했다. 익히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기에 굳이 검을 사납게 섞어가며, 신분을 확인하고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광풍맹호도(狂風猛虎刀) 팽혁성! 하북 팽가 출신으로 군웅회 십팔대 고수 중 한 명이었다. 별호에 광풍(狂風)이 들어갈 만큼 성질 급한 친구가 온 곳이다. 과연 조 용히 끝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네 놈 죽고 싶으냐?”
긴급 편성된 회주 구출 작전대의 대장인 광풍맹호도 팽혁성은 도를 뽑아 도극을 비류연의 머리에 겨누며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그는 자신보다 월등 히 강한 실력의 소유자인 회주가 어떤 경로로 비류연의 손에 붙잡히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그 정도도 생각할 주변머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백무영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저런 시시한 협박에 넘어갈 비류연이 아님을 이제 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쎄요……..”
역시 예상대로 비류연은 태연작약하기만 했다. 철각기마대의 진로를 단 일인으로 막은 괴물 같은 놈이었다. 팽연호가 과연 그의 눈썹 한올이라도 까딱이게 만들어 줄 수 있을지 지룡(智龍) 백무영은 그게 무척이나 궁금했다.
“감히 그분이 누군 줄 알고, 이 무엄한 놈!”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었지만 회주인 마하령이 비류연의 손에 붙들려 있는지라 팽우혁은 감히 경거망동할 수가 없었다.
“이 여자가 누구이던지 간에, 신분이 어떻든, 지위가 어떻든, 혈통이 어떻든, 그건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난 나에게 모욕을 준 사람을 설령 상대가 여 자라 해서 멀쩡히 내버려둘 생각은 없습니다.”
비류연이 담담한 어조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며칠 성문 밖에다가 걸어놓고 싶군요. 그럼 그 썩어빠진 정신의 일부가 어느 정도 빠져나갈 텐데 말이죠. 아쉽네요. 분명히 말하지만, 이런 상태로 그냥 다시 풀어주면 그녀의 존재는 ‘분명히 확신하건데, 주위의 민폐가 될 거예요.”
“닥쳐라! 어서 그 더러운 손을 놓지 못하겠느냐!”
팽혁성이 버럭 호통을 쳤다. 백무영에게는 그의 모습이 제 무덤에 삽질하는 꼴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비류연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순간 모골이 송연해 지는 살기에 팽혁성은 잔뜩 근육을 긴장시켜야만 했다.
“무슨 기준으로 남의 손의 청결 척도를 함부로 단정 짓는 광오한 말을 하는 거죠?”
팽우혁을 향해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비류연의 손은 마하령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청개구리 사촌 같은, 꼬일 대로 꼬인 성격의 소유자이기 때문 에 하지 말라 하면 더욱더 하는, 꼬일 대로 꼬이고 재삼 다시 꼬인 성격이었다. 비틀릴 대로 비틀려있어 더 이상 비틀릴 여유도 없는 처지였기에 곧이곧대로 순순히 팽우혁의 고압적인 명령조의 말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그랬는데… 그런데 갑자기 비류연이 잡고 있던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자!”
그녀의 왼손을 잡고 있던 비류연의 우수(右)가 떨어지자 거미줄처럼 자신을 얽매고 있던 무형의 압력이 썰물 빠져나가 듯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몸이 막 자유를 찾자 그녀는 교구를 움직여, 자신을 최초로 가장 열 받게 만들고 온갖 모욕을 준 남자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시 도는 미수에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어느새 비류연의 좌수가 소리 소문도 없이 그녀의 우수를 옭아매고 있었던 것이었다.
“저… 저놈이! 저런… 찢어죽일 놈!”
지켜보던 팽혁성의 눈이 회까닥 뒤집어 졌다. 평소 흠모하던 회주가 다른 놈팽이의 손아귀에서 농락당하고 있다고 멋대로 해석해버린 그의 이성은 지금 회까닥 뒤 집어질 대로 뒤집어져 있었다.
이미 이성 따윈 예전에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군웅회주 마하령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녀는 절대 눈물을 보이거나 할 연약한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만은 그녀도 분을 참을 수가 없 었다.
도대체 반천일 동안 폐관에 들어가 특별 수련을 받았으면서도 그동안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그 남자를 이기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었는데? 겨우 이 정도 성과뿐이 란 말인가? 왜 근본도 모르는 놈에게 수모를 당해야 하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 자신의 치부만 낱낱이 들킨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처음으로 그녀는 무력감을 느꼈다.
“크아아아악!”
부웅!
보다 못한 팽혁성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거도(巨刀)를 휘둘렀다. 팽가 독문의 쾌도법(快刀法) 오호단문도였다. 거대한 도가 풍차처럼 허공을 가로질렀다. 쒜에에엥!
정확히 목을 향해 날아오는 살인미수의 도를 비류연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한 동작으로 피해냈다.
전력을 다해 휘두른 팽혁성의 도는 비록 파괴력은 있을지언정 속도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 도쯤 피해내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이런! 이런! 저들은 댁의 안전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를 하지 않는 모양이네요. 이렇게 지척 간에 달라 붙어있는 남녀 사이를 도로 쳐서 강제로 떨어뜨리려 하다니 참으로 몹쓸 사람들이네요.”
비류연이 느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마하령의 심기를 긁었다. 왜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회원들 앞에서 보여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마하령은 입술을 꼬옥 깨 물었다. 이런 수치심을 느껴보기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놓·아·주·세·요!”
비류연이 그녀를 바라보며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한자 한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그래도 비류연의 얼굴은 진지하기만 했다.
“뭐?”
여전히 그녀의 말은 짧았다. 최근 명령 외에 다른 말은 해본 적이 없으니 갑자기 길어지기도 힘들 것이다.
“놓·아·주·세·요!”
다시 한 번 비류연이 또박또박 말했다. 그녀는 ‘확’ 고개를 한쪽으로 돌려 비류연의 얼굴을 외면했다.
“…..”
순간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고고한 자존심으로 무장한 마하령은 자신이 겨우 이런 어린 사내의 강압에 굴복했다는 모습을 만인이 보는 앞에서 보여줄 수는 없었 다. 그것은 그녀의 드높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인정받을 수 없는, 용서할 수 없는 범죄행위였던 것이다.
어떻게 일 회의 회주로서, 나이도 어린 후배에게 놓아주세요, 라는 애원조로 말할 수 있겠는가? 천무학관 양대 회(會)의 회주로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놓·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비류연도 상당히 끈질겼다. 이번엔 뒤에 한 단어가 더 붙었다.
꿀꺽!
모두들 숨을 죽인 채 마하령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비뢰도』 9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