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검 관철수 대 비류연
나날이 도전과 시비가 반복과 반복을 거듭하는 날들이었다.
이제는 지겹다 못해 한숨부터 먼저 나왔다.
“받아라! 웬수!”
“또야?”
심드렁한 비류연의 반응! 이 짓도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만성이 되는 느낌이었다.
빠바박!
한 차례 요란스런 격타 소리와 푸르딩딩하게 부은 채 시체처럼 널브러진 습격자! 상황은 언제나 그걸로 종결된다.
최근 들어 비류연을 노리는 무리들이 너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암습자들의 영업시간이 겹치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게다가 서로 오해도 많았고, 그러다 보 니 사고도 생길 뻔했다.
하루는 같은 시각에 비류연을 습격하겠다는 꿈을 품고 비류연의 기숙사 창문 앞에 마주 선 두 사람의 관도가 창문을 향해 돌입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서로 도둑인 줄 알고 검을 부딪쳐 크게 싸우다 추락한 일도 있었다. 다행히 중상은 면했지만, 허허 웃으며 넘어갈 가벼운 상처도 아니었다.
날이면 날마다 찢고 태우고 묻어도 비류연의 사물함에는 매번 결투장이 다발째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결투장에도 비류연은 코웃음으로 대할 뿐 조금도 신 경 쓰려 하지 않았다.
“우리를 모욕하는 것이냐? 당장 검을 들어라! 결투다!”
라고 소리 높여 외쳐도 그것은 대답 없는, 소리 없는 아우성일 뿐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 그것만큼 비참한 것도 없었다.
비류연은 단 한마디만 할 뿐이었다.
“난 돈이 안 되는 일엔 관여 안 해요. 무익한 노동, 대가 없는 노동은 강호의 악입니다.”
한 치도 굽히지 않는 비류연의 주장이었다.
“저하고 만일 싸우고 싶다면 거액의 대전료를 걸어요. 그러기 전에는 어림도 없습니다.”
금전적 손해를 보면서까지, 교칙을 어기고 점수를 깎이면서까지―이미 더 깎일 평판도 없지만―결투에 응하고 싶은 생각은 비류연도 없었다.
“아참! 그리고 나하고 싸우려면 적어도 염도 노사 정도는 이길 실력을 가지고 덤벼요! 그 전에는 돈만 날릴 테니까요! 물론 나야 좋지만!”
“뭐어어어?”
듣는 이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우주 광오의 극치를 달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비류연에게 기습적으로 덤볐다 쥐어터진 관도들은 반박할 말도 찾지 못한 채 퉁 퉁 부은 얼굴을 붙잡고 쓸쓸히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싸우려면 돈 내라!’라는 비류연의 말이 학관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염도를 이길 만한 실력이 아니면 감히 덤비지도 말라고 호언장담했다는 소 문에 돈 내라는 말과 함께 순식간에 학관 전체로 퍼져 나갔다.
이 소문은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우주 광오한 소리였기 때문에 신빙성을 얻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여전히 비류연의 존재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다들 그 진의 에 대해 고개를 내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소문이 잠잠해진 것은 아니었다. 소문은 그 내용이 황당한 만큼 점점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며 눈덩이처럼 불어나 마침내 염도와 세 불양립의 철천지 원수지간인 빙검의 귀에까지 들어가기에 이르렀다.
다른 사람은 이 소문에 코웃음을 치고 비류연을 미친놈 취급하며 안 보이는 데서 몰래 손가락질을 했지만, 빙검은 이 소문을 단지 헛소문으로 치부하며 한쪽에 제 쳐둘 수가 없었다.
확실히 염도 그 인간 자체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의 명예가 실추되면 그 여파가 자신에게까지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그 둘은 자타가 공인하는 경 쟁 상대였던 것이다. 때문에 만일 상대의 명예에 흠집을 가하는 헛소문이 돌면 기분은 찝찝하지만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괜히 도매금으로 함께 넘어가고 싶지는 않 았기 때문이다.
“사부님!”
빙검은 그 누구보다도 존경하던 하늘같은 사부의 얼굴을 떠올렸다. 무신(武神)이라고까지 불리며 추앙받던 사부였다. 감히 자신은 그 발끝조차 따라가지 못할 정 도로 위대한 분이었다. 자신이 사부의 제자로 발탁된 것 자체가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자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다. 자질이 미치지 못하여 그 진전을 반밖에 잇지 못 했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런데 요즘 학관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비류연이 염도를 이겼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이었다.
염도 곽영희!
죽을 때까지 절대 그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이름이었다. 한때는 동문이자 친구였으나 지금은 서로 이를 가는 숙명적인 경쟁 관계였다. 아직 그와는 제대로 결 판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결착(着완전한 결말)을 낼 만큼 둘의 실력차가 벌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건(乾)과 곤(坤)! 염(炎)과 빙(氷)! 극과 극의 공부였다.
서로 비등비등한 실력을 지닌 두 사람이 온전하게 승부를 내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아직 정면으로 맞붙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결착을 내야만 하는 상대였다. 그 런데 그런 염도가 이름도 출신도 없는 애송이에게 졌다는 헛소문이 돌고 있으니 빙검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비류연이라…….?
분명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 이름이 있는 곳은 항상 모든 소동의 중심이었다. 소동이 없었던 곳에 그의 이름이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굳이 있었다면 삼성 무제의 우승자에 불명예스런 경로로 오른 것 정도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역시 확인은 해봐야겠지…….?”
한때의 연적이자 영원한 경쟁자인 염도를 눌렀다는 소문은 빙검으로서도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그 소문을 잠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훗! 만일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런 자야말로 태극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인재인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훗!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20년 동안 그 어떤 실마리도 찾지 못한 상태였다. 이제 와서 태극의 인재가 덜컥 나타난다는 게 우스운 일이었다. 하지만…….
“시험해 볼 필요가 있으려나.
드디어 빙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전료만 내면 싸울 수 있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평상시처럼 은설란의 호위를 맡아 그녀의 뒤에서 수행하며 나예린과의 대화를 시도하던 비류연은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았다. “아! 물론이…….”
비류연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분명 예전에 만난데다 자신의 기억 속에 꽤나 선명하게 박혀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독특한 청은색의 눈썹과 수염, 그리고 푸른빛 감도는 머리카락은 차가운 얼음조각을 연상케 했다.
‘얼음땡이!’
확실히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비류연은 일말의 당황도 내비치지 않은 채 말했다.
“예전에 어딘가에서 뵌 적이 있는 분 같군요! 만일 저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말입니다.”
비류연은 싱긋이 미소지었다. 그제야 경악에서 겨우 벗어나 정신을 수습한 나예린과 모용휘가 외쳤다.
“총 노사님!”
북풍한설을 자연스레 연상시키는 기도! 싸늘할 정도로 차가운 표정! 비류연을 불러 세워 대전료를 운운한 이는 다름 아닌 천무학관 총 노사 빙검 관철수였다. “허락해줄 텐가?”
“원하시는 대로! 하지만 대노사님 같은 분과 싸우려면 위험부담이 너무 커서 돈으로 환산이 안 되는군요.”
“거절인가?”
“아닙니다. 조건만 맞는다면 상관없죠.”
“조건?”
“네! 조건!”
비류연이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만일 명령하면 자네는 두말없이 나랑 검을 겨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목소리였다.
“아마… 그렇겠죠?”
“미안하지만 자네에게는 거부권이 없네. 그런데도 나에게 조건을 운운하는 것인가?”
“예! 물론이죠!”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비류연이 대답했다.
“류연!”
“비 공자!”
“비 소협!”
은설란과 모용휘와 나예린이 동시에 비류연을 불렀다. 어떻게든 그의 무모해 보이는 행동을 저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류연은 귀를 잠시 신체에서 이탈시 키는 재주를 익혔는지 들은 척 만 척이었다.
“…….”
비류연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빙검이 침묵했다.
그의 침묵은 세상을 얼어붙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침묵이었다. 주위 사람들을 으슬으슬 떨게 만들 정도의 기세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얼어붙었던 그의 입이 갈라졌다.
“들어 볼까?”
북해빙설처럼 차가운 말이었지만 확실히 승낙의 뜻이었다.
“돈으로는 아무래도 안 되겠고…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비류연이 한 가지 제안을 내놓았다.
“말해보게!”
“제가 만일에 이기면 나중에 두 가지 부탁을 들어주는 걸로요.”
“과연 자네가 날 이길 수 있다는 건가?”
싸우는 그 자체가 아닌 이기는 데 조건을 걸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빙검이었다.
“그러니깐 만일이라는 거죠. 하늘의 변덕이 하도 죽 끓듯 해서 세상일이란 모르는 거잖아요.”
비류연은 주위를 아연실색하게 만들 만큼 자신만만해 보였다. 지켜보는 사람들 모두 비류연의 무모한 행동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지 않는다. 대신 내가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라면 들어주지!”
그것은 승낙의 말이었다. 빙검이 비류연의 조건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비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협상은 타결되었다.
“그럼 언제 하실 겁니까?”
비류연이 물었다.
“지금 바로일세!”
빙검의 대답에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비무(比武)―남들이 보기에는 차마 비무라 부를 수 없는―에 합의를 본 비류연과 빙검은 주위 사람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빙검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그날 보고 처음인가요? 한 1년 반이 넘은 것 같습니다.”
먼저 말을 건 이는 비류연이었다. 그냥 잠자코 있다가는 빙검의 입에서 먼저 말이 나오길 기대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군! 호아장에서 보고 처음인 것 같군!”
처음부터 염도와 함께 호아장에 나타났을 때부터 빙검은 비류연의 존재가 신경 쓰였다. 게다가 그 후로 염도와 둘이 찰떡같이 붙어 다닌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얼 마나 황당했던가?
“불륜이라도 저지르고 낳은 사생아라도 되는 건가? 그 천하의 독불장군이 어린애 한 명과 아교를 칠한 듯 붙어 다니다니…….’
그런 의혹까지 들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만큼 염도는 남과 함께 다니는 것을 진저리나게 싫어했다. 그래서 더욱더 비류연이란 존재가 궁금했다.
“이제 확인해 보면 되겠지!’
빙검의 눈이 차갑게 식어 가며 푸른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가 한빙지기(寒氷之氣)를 일으킬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비류연은 그날 이후 처음이었지만 빙검은 여러 차례 비류연의 모습을 목격한 바 있었다. 그러나 대화를 나눌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한기를 내뿜는 푸른 신검!
찰칵!
빙검이 자신의 애검 빙루를 살짝 검집에서 빼냈다.
스오오오오오!
그 간단한 한 동작만으로도 극음의 검기가 폭풍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은청색 무복이 바람도 일지 않는 하늘 아래에서 펄럭이기 시작했다.
“빙령수혼(氷靈守魂)!”
빙검이 검을 휘두르자 수십 줄기의 검한기가 검극에서부터 사방으로 뻗어 나왔다.
분명 관설지가 삼성무제 검후전에서 썼던 기술이지만 그녀와는 기술의 격이 하늘과 땅만큼 현격히 차이가 났다. 검 끝에서 뻗어 나가는 한빙지기가 격이 다른 위 력으로 비류연을 위협했다.
비류연도 그에 상응하는 무공을 준비해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무인에 대한 예의라 할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싸운다!’
그 정신에 따라 강한 힘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무식한 행동을 되도록 피한다는 게 비뢰문의 가르침이었다. 비류연은 굳이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사춘기 시절도 아 닌데 쓸데없는 반항심으로 가르침을 어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강한 공격일수록 실패로 돌아갔을 때 나타나는 빈틈이 큰 법!’
기술이 크면 그에 상응하는 위협을 무릅써야 했다. 그 빈틈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비뢰문 독문운신법 봉황무(鳳凰舞)의 진정한 역할이었다.
비뢰문(飛雷門) 독문운신보법식 비기(秘)
봉황무鳳凰舞)
무형무흔(無形無痕)의 장(章)
무은(無隱)
갑자기 비류연의 신형이 땅으로 꺼지듯 사라졌다. 어떤 강대한 기술이든 맞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응? 이… 이런!”
이 갑작스런 돌발 상황에 빙검은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나 당장에 비류연의 종적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콰과과쾅!
조금 전 비류연이 머물렀던 그 자리에 시리도록 차가운 극음의 검기가 작열했다. 쓸데없이 진기를 소모해 버리고 만 것이다.
“시원하네요!”
빙검의 검과 한번 부딪쳐 본 비류연의 품평이었다. 빙검은 기가 막혔다.
‘저 연배 중에서 내 앞에서 이렇게 당당한 사람이 있었던가?”
빙검은 솔직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항상 자신의 기도에 압도당해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비류연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자약하기만 했다.
“무엇을 믿고 그리도 까부는 것이냐?”
차가운 목소리로 빙검이 물었다.
“나의 주먹과 나의 다리와 나의 무공을 믿고요!”
“광오하구나!”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 녀석이었다. 불쾌한 게 당연했다.
“과찬의 말씀!”
비류연이 호기롭게 소리쳤다.
“과연 나의 다음 공격을 받고도 여유를 부릴 수 있을지 궁금하구나?”
빙검이 검을 고쳐 잡았다. 여태껏 펼친 검초는 모두 수비식을 공격식으로 변환시킨 것들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공격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지금부터 자신이 펼치려는 것은 수비검학의 극치인 빙령수류검 중에서도 오로지 공격만을 위해 만들어진 극강의 초식들이었다. 지금 빙검은 진심으로 그 초식들을 사용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백빙신침(白氷神針)!”
싸늘한 냉기가 수만 개의 바늘로 화하여 날카롭게 변해 쏘아져 나갔다.
봉황무鳳凰舞) 오의
회천봉익비상(回天鳳翼飛上)
순간 비류연의 몸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맹렬히 돌아가며 그 주위로 용권풍을 형성시켰다. 빙검이 쏘아 보낸 냉기의 바늘은 이 용권풍에 휘말려 주변 으로 하염없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럴 수가!’
빙검은 믿을 수가 없었다.
“백빙신정(白氷神丁)!”
그의 검에 어려 있는 푸르스름한 냉기가 좀 전의 바늘보다는 두껍고 큰 수천 개의 빙정(釘:못)이 되어 비류연을 향해 쏟아져 나갔다.
분명 생명을 빼앗을 생각이 없는 데에 쓴 초식치고는 너무나 살기가 지나친 것이었다. 첫번째로 펼쳤던 회심의 초식인 백빙신침이 빗나간 데 대해 너무 흥분했던 모양이었다.
“이런! 이런!”
비류연은 좀더 빨리 움직여야 될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야만 했다. 신속하게 움직여야겠다고 결심한 그 순간, 비류연의 몸이 흐릿해졌다.
콰과과과과!
다시 한 번 빙검의 절초가 대지를 유린했다. 그 충격으로 대지가 들썩이고 자욱한 먼지가 일어나 시야를 가렸다.
“이런! 내가 너무 심했나?”
요란하게 검기를 쏟아 붓고 난 후에야 빙검은 자신이 손속에 사정을 두는 것을 깜빡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검에 들어가는 힘 조절에 실패하다니… 근래 들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비류연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던 빙검은 이내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자욱한 먼지가 걷히고 비류연이 멀쩡하게 서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 빙 검은 애매한 감정이었다.
“이제야 좀 춥군요!”
뼛속은 물론 영혼까지 얼린다는 검한기를 받아본 비류연의 가벼운 품평이었다. 물론 이를 제대로 된 평가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완벽한 초식 전개였거늘…….’
놀랍게도 비류연은 빙검이 펼친 빙정(氷丁얼음)의 포위 섬멸 공격을 용케도 피해냈던 것이다. 이것으로 빙검은 비류연이 애송이라는 사전 지식에 전면적인 칼 질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검초 중에서도 비기라 칭할 수 있는 백빙신정의 1초는 개나 소나 피할 수 있는 그런 시시한 초식이 아니었다.
“놀라운 놈이로구나! 나의 검을 받고도 여기까지 버티다니…….”
최근 몇 년간은 5초 이상 펼쳐본 기억이 가물가물한 빙검이었다. 그런데 제대로 이름도 세우지 못한 애송이가 자신의 검을 5초 이상 받아낸 것이다.
“이 정도는 기본으로 해야죠!”
천하오검수의 일좌인 빙검의 극음지기가 가득 실린 검초를 받고도 냉동되지 않은 비류연은 아직 여유가 있어 보였다. 빙검은 새삼스런 눈으로 비류연을 쳐다보았 다.
과연 자신 앞에서 이 정도로 당당한 이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 것이며, 그 사람들 중에 또한 자신의 검을 이 정도까지 받아낼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염도를 이겼다고 거짓부렁을 치고 다닌 것은 못마땅했지만 그래도 범상한 놈은 아니었다. 소문과 다르게 큰 소리 치고 다닐 만한 자격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이 정도 성취를 보이다니? 그게 과연 가능하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특이한 체질인가. 서… 설마…….’
갑자기 사부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르는 빙검이었다.
“과연 네가 그것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 자인가?”
빙검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빙검을 중심으로 뻗어 나오는 기세와 한기가 한층 더 강해졌다. 좀 전의 기세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역시 봐주려고 했었군요?”
비류연이 그것을 보고 한마디 했다.
“어린애를 상대로 전력을 다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싸늘하기 그지없는 빙검의 대답이었다. 어린애라는 말에 비류연의 검미가 살짝 꿈틀거렸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겠다!”
“예! 얼마든지요!”
비류연이 선선히 대답했다.
“네 녀석은 어느 문하에서 사사했느냐?”
비류연이 구사하는 초식은 견문이 넓은 빙검으로서도 생전 처음 접해 보는 것이었다.
“옛날 옛날에 어느 외딴 산골 깊숙한 곳에 아주 심술궂고 얄미운 사부 한 명이 살았죠. 그 사부한테 배웠죠. 정말 힘든 나날이었어요. 맨날 사부를 부양해야 했고, 문파를 먹여 살려야 했고… 고난과 고행의 연속이었죠.”
갑자기 아득해지는 시선으로 비류연이 말했다. 그에게 있어 과거는 결코 좋은 추억이 아니었다.
“사부를 모시는 것은 제자의 당연한 도리다!”
빙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부랑 똑같은 말을 하시는군요. 우리 사부도 날 부려먹을 땐 항상 그 말을 했죠.”
다시 생각해 봐도 회상하기 싫을 정도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런 것은 어찌되어도 좋다. 그래서 사문의 이름은 무엇이냐?”
빙검이 재차 물었다. 과연 어떤 은거고인이 저따위 괴물 녀석을 만들어 냈는지 그로서도 궁금증을 참아 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글쎄요… 사부하고 제자 단둘밖에 없는 조촐한 문파라 알아도 별반 소용이 없을 겁니다.”
“더 이상은 말하기 싫다는 것이냐?”
“숨기고 싶은 사문을 캐는 것은 강호의 도의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확실히 그러했다. 그것은 원래 강호의 예의가 아니었다. 강호의 분쟁을 떠나 몸을 숨기고 조용히 은거하며 유일하게 하나의 맥을 남기는 이들이 강호에는 의외로 많았다. 때문에 고인들의 청경을 흐트러뜨릴 수 있다 해서 어지간해서는 추궁하거나 캐묻는 법이 없었다.
“예외란 언제나 존재하는 법! 신원이 확실하지 않은 사람을 천무학관에 들여놓을 수는 없다.”
조금은 억지가 가미된 말이었지만 사실이었다.
빙검의 뇌리에 갑자기 검존 공손일취의 말이 떠올랐다.
“그 비류연이라는 아이를 알고 계시나?”
검존의 질문에 빙검은 잠시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아, 예! 삼성무제에서 운 좋게 우승했다던 바로 그 아이 아닙니까?”
“그 아이에게서 주의를 늦추지 마시게나!”
그것은 분명히 주의이자 경고였다.
“그게 무슨?”
빙검은 의문스러웠다. 도대체 누가 감히 검존 공손일취에게 이토록 조심스러운 말을 할 수 있게 만든단 말인가? 확실한 건 그 비류연이란 녀석이 근본적 원인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허허… 그냥 신경을 항상 늦추지 말게. 그는 터무니없는 것을 등에 업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말일세. 그냥 예감이긴 하지만 총 노사도 주의를 해서 나쁠 건 없지 않겠나? 허허허, 그냥 근심 많은 노인의 기우라고 생각하시게나.”
분명히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 이때 검존은 비류연이 삼성무제 삼성대전 결승전에서 보여준 마지막 초식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그 의 뇌리에 각인되어 버린 이후였다. 그 각인이 자꾸만 그의 아픈 과거를 들쑤시고 있었다. 때문에 노파심에서 빙검에게 주의를 주었던 것이다.
“예에…….”
그때는 참으로 의아했었다. 거의 무명에 가깝다가 갑자기 삼성무제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청년에게 검존 정도의 거물이 관심을 쏟는다는 게 의아스러웠던 것이다.
“신원 보증만 확실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비류연이 빙검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에게 너의 신원을 보증할 만한 신원 보증인이라도 있단 말이냐?”
“물론이죠. 이거, 이거, 사람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미확인 강호인이라고 해도 저도 신원 보증인 한 명 정도는 있다구요.”
비류연이 항의했다.
“그렇다면 당장 내 앞에 대면시켜 봐라!”
“무척이나 불쾌하실 텐데요?”
“너의 신원 보증인을 만나는데 본인이 불쾌감을 느껴야 할 정당성은 어디에도 없다!”
빙검이 딱 잘라 대답했다.
“보고서는 화부터 낼지 몰라요. 그래도 괜찮나요?”
“상관없다!”
“싸울지도 모르는데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걱정 마라!”
빙검이 다시 한 번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비류연이 뭔가 말을 이으려고 하던 그때였다.
“잠깐! 멈춰!”
장내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에 두 사람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빙검의 애검 빙백이 ‘지이잉’ 공명음(共鳴音)을 내며 울기 시작했 다.
“오! 마침 잘 왔어요.”
비류연은 환하게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바로 염도의 등장이었다. 용케도 이 장소를 알고 찾아온 것이다. 비류연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소개하죠! 제 신원 보증인인 염도 노사님입니다.”
비류연의 당당한 말에 빙검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자… 자네가 이 아이의 신원 보증인이라는 게 확실한가?”
빙검의 완벽한 냉정함에 금이 가고 있었다.
“무슨 잘못된 일이라도 있나? 사실일세!”
퉁명스런 어조로 염도가 대답했다. 의외의 일격을 당한 듯한 느낌에 염도는 뒷골이 땡겨 왔다.
“이제 만족하시나요?”
비류연의 싱글벙글한 낯짝을 보고도 더 이상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래, 만족한다! 그러나 아직 정리할 건 남아 있겠지?”
빙검은 아직도 검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했다. 하다가 멈춘 결판을 내자는 이야기였다.
“물론이죠! 아직 정리할 건 확실히 남아 있죠. 아까 한 약속 잊지 마세요!”
“할 수 있다면!”
빙검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약속을 지키게 만들려면 이기고 나서 하라는 이야기였다.
“이 빌어먹을 자식! 무슨 속셈이냐?”
염도는 빙검을 보자마자 화부터 버럭 냈다. 빙검의 대꾸는 차가웠다.
“상관하지 마라!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뭐라구?”
염도가 발끈했다. 역시 언제 봐도, 언제 떠올려도, 언제 만나도 불쾌하기 그지없는 녀석이었다.
“저기요……?”
비류연이 험악한 분위기 속에 있는 빙검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자자, 싸우지 마세요! 다 큰 어른들이 좋은 주먹 놔두고 왜 말로 싸웁니까? 같은 등급으로 해드리죠. 저번에 불꽃덩어리를 상대했을 때는 오른다리였으니 이번엔 오른팔 정도면 되겠죠?”
보는 사람을 왠지 모르게 불안하게 만드는 특유의 미소와 함께 비류연이 오른팔에 차고 있는 묵룡환을 벗어 버렸다.
쿵!
묵룡환이 대지를 때리는 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빙검의 푸른빛 도는 날카로운 백미가 꿈틀거렸다.
“이놈? 뭐하는 놈이지? 이 녀석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아무래도 직접 부딪치기 전에는 결판이 나지 않을 듯했다.
빙검의 애검 빙령으로부터 눈부신 백광과 얼음꽃의 결정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염도는 저 자세가 무엇의 기수식(起手式)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도 저 기수식과 정면으로 마주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으윽!
‘저… 저놈이 그것마저 쓸 작정인가? 무슨 억하심정으로??’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쓰지 않는 비장절초 중 하나였다. 또한 그에게 천하오검수로서의 이름을 올리게 만들어 준 초식이기도 했다.
“좋다! 네놈이 과연 태극을 하나로 합칠 인재인지 내 친히 이번 검초로 확인해 보겠다!”
빙검의 말에 염도의 눈이 부릅떠졌다. 찢어질 듯 부릅떠진 그 시선은 다시 비류연을 향했다. “태… 태극의 인재!”
염도의 눈이 튀어나올 듯 부릅떠졌다.
“난 그런 사람 아니라니깐 그러네요!”
파바밧!
비류연도 지지 않고 빙검의 오의에 정면으로 부딪쳐 나갔다.
콰쾅!
천지를 집어삼킬 듯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비뢰도』 10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