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연대 빙검(劍)
-뇌전과 얼음
콰콰콰콰쾅!
천지를 진동시키는 폭음과 함께 대지를 가득 뒤덮는 흰빛의 물결!
작열하는 태양의 빛과도 같은 눈부신 백색 섬광 속에서도 비류연은 눈을 감지 않았다
지금 두 사람의 간격은 이번 격돌로 인해 영(零)이 되어 있었다. 즉 서로가 서로의 간격 안에 포개어져 있다는 것이다.
초고수와의 결전에서 상대와의 간격 안에 있을 때 눈을 깜빡인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나 진배없었다. 목숨이 여벌로 마련되어 있지 않는 한 절대 취해서 는 안 될 금기 중의 금기였다.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폭풍이 몰아치든 마찬가지였다.
먼저 감는 쪽이 먼저 죽는 것이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생사는 순간에 결정된다. 때문에 고수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적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기 위한 안력(眼力) 단련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심혈을 기울인다. 아무리 위력적인 무공의 보유자라 해도 그것을 써보지도 못하고 죽는다면 그 절세위력의 무공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문자 그대로 순간의 허점이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다. 만일 이 눈부신 백광에 일순간이라도 눈을 깜빡였다면 비류연은 이미 빙검의 칼날 아래 쓰러졌을 것이 다.
하지만 비류연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시야와 시선을 잃지 않는 안법 단련을 어릴 적부터 받아 왔었다. 때문에 그는 이 작열하는 빛무리 속에서도 눈을 감지 않고 일목요연하게 빙검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지켜볼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안법 수련을 받은 것은 빙검 또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자신의 초식을 펼치며 자 신이 눈을 감는다는 따위의 행동은 얼치기 바보나 하는 짓인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시야 확보가 최우선이었다. 그것이 바로 무공의 기본이었다.
빙검의 검이 새하얀 빛무리 속을 뚫고 눈부신 속도로 비류연의 얼굴을 찔러 왔다. 그 속도는 너무나 신쾌무비해 가히 쾌검의 정화(精華)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 류연도 ‘한 속도’ 하는 인간이었다. 아직까지 그는 빠름에 있어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져본 적이 없었다.
패배를 모르는 속도로 그가 잽싸게 몸을 비틀었다. 그는 빙검의 이번 공격이 단 일초 일격으로 끝날 것이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당연히 이초 삼초가 연속해서 그의 몸에 몰아칠 것이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파밧! 슉! 팟! 슉! 슉! 슉!
예상대로였다. 월광을 얼려 놓은 듯한 차가운 검기가 비류연의 인후와 명치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나머지 네 군데 대혈로도 극음의 검광이 뻗어 왔 다. 어느 곳 하나 감히 소홀할 수 없는 치명적인 급소들이었다.
“야이, 빌어먹을 놈아!”
염도가 터져 나오는 빛 때문에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욕설을 퍼부었다. 천무학관 총노사 신분인 빙검이 일개 관도에 불과한 비류연에게 이런 치명적인 살초를 전개 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다. 그의 신분으로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자꾸만 공격이 실패하자 사정 봐주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다.
항상 냉정하고 차가워 보이는 그였지만 그도 인간인 이상 화내는 방법은 숙지하고 있었다. 그는 촌스럽고 저급하게 말로 화내지 않고 곧장 행동으로 자신의 의사 를 표현했다. 눈부시게 빛나는 순백의 빛무리 속에서 일곱 개의 별이 오롯이 빛났다.
빙령수류검(水流劍)
검한기(劍氣)오의(奧義) 극광백렬환무(極光白烈幻舞)
북극칠성인(北極七星刃)
북해 하늘에 비단처럼 드리워진 신비스런 극(極光)의 빛무리 속에서 북두칠성을 닮은 일곱 개의 검기가 뿜어져 나와 적을 유린하는 것 같은 절세의 초식이었다. 일곱 줄기 차가운 검기가 비류연의 전신 사혈을 향해 작열했다. 빙검은 더 이상 공격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번 초식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지나 치게 강한 초식이었다.
비류연은 “이런 제기랄!’이라고 욕지거리를 뱉을 시간조차 없었다. 화낼 시간조차 아껴가며 빙검의 가공할 절초를 피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했기 때문이다.
봉황무(鳳凰舞) 오의(奧義)
환절불영(幻絶不影)의 장(章)
월영비익(翼)
잔무
일곱 줄기 빙청색 검기가 비류연의 전신을 뚫고 대지에 북두칠성을 새겨 놓았다. 염도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그의 눈에는 분명 비류연이 일곱 개의 창에 전신을 꿰뚫린 꼬치 신세가 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슈슈슈슈슈슈슉!
“이런!”
빙검 또한 기겁했다. 이렇게까지 직격으로 당할 줄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피는 튀지 않았다.
새벽의 여명(黎明)에 흩어지는 안개처럼 비류연의 그림자가 빙검의 눈앞에서 사라졌던 것이다. “아니?”
스르륵.
신기루처럼 사라진 비류연의 몸이 홀연히 나타난 곳은 바로 빙검의 코앞이었다. 얼마나 가까웠는가 하면 빙검이 비류연의 얼굴에 있는 땀구멍까지 셀 수 있을 정 도였다. 마치 아지랑이 같은 신기묘묘한 신법이었다.
“이… 이럴 수가!”
빙검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의 망막에 순간 떠오른 것은 동요(動搖)가 분명했다. 비류연의 오른손은 굳게 말아 쥐어져 있었다. 눈을 부릅뜬 빙검이 그의 공격 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급격히 틀었다. 이미 공격 준비가 완료된 상태인 비류연을 상대로 다시 공격을 하기에는 너무나 간격이 짧고 시간도 없었다. 여태껏 보여 준 비류연의 속도로 볼 때 자신이 뒤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비류연은 빙검으로부터 엄청난 고평가를 받은 것이지만 본인은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으윽.
바람을 가르며 빛조차 양단할 듯한 가공할 속도로 비류연의 주먹이 뻗어졌다.
뻑!
순간 빙검은 가슴으로부터 극렬한 통증이 폭주하는 야생마처럼 질주해 오는 걸 느꼈다. 그는 터져 나오는 비명을 가까스로 되삼켰다. 그래도 체면이 있는 것이다. “하핫… 괴물은 괴물이로구만, 젠장!”
염도가 씁쓸한 어조로 내뱉었다. 비류연이 설마 저 정도 경지의 경신법(輕身法)까지 구사할 줄은 그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현재 그의 속도 가 빙검에는 미치지 못해 비류연의 속도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젠장! 아무래도 오늘밤은 술 없이는 넘기기 힘들겠구만.”
있는 대로 인상을 쓰며 염도가 중얼거렸다. 입맛이 썼다. 하나 그의 시선은 여전히 격전장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빙검의 얼굴은 창백할 정도로 심하게 굳어 있 었다. 믿어지지 않는 현실이 그의 안색을 단번에 어둡게 만들었던 것이다. 염도는 그의 표정을 보면서 마음의 위안을 삼아야 했다.
“헉헉헉!”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릴 것 같지 않던 부동심의 소유자인 빙검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큭!”
굳게 얼어붙어 있던 그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가슴을 와락 움켜쥐었다. 하마터면 무릎을 꿇고 주저앉을 뻔했을 정도로 극심한 통증이 었다. 빙검은 싸늘한 안광에 한기를 담아 비류연에게 쏘아 보냈다. 비류연은 얼음장처럼 빛나는 빙검의 안광에 사정없이 꿰뚫리고 있었다. 빙검은 비류연을 옹이 구 멍 투성이의 정원수용 고목이나 장식용 분재(盆栽)로 만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물론 창작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겠지만, 개인의 권리 또한 침해받을 수는 없는 노 릇이다. 가만, 이건 좀 별개의 문제인가?
비류연의 순간 도약력과 귀신같은 신법은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상식적인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자가 겨우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지??
빙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천무학관 대다수의 사람들이 비류연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고 모두 다 하늘의 농간과 천혜의 운 탓으로 원인을 돌렸다는 것 이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본 비류연의 실력은 진짜배기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신의 칼날 아래서 아직도 굴복하지 않고 저 정도로 생생한, 아니 쌩쌩한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번엔 역습(逆襲)까지…..
비류연의 이번 역공 일초는 빙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잘못 전해졌던 거야. 아니라면 저 녀석이 세상에서 가장 교활한 녀석이든가. 2년이 다 돼 가도록 여태껏 자신의 본 실력을 겨우 그 정도밖에 노출시키지 않았다는 게 놀라울 뿐이로군. 도대체 그럴 만한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뭔가 감추어야 할 목적이라도 있단 말인가??
비류연 본인은 결코 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빙검의 독단적인 생각은 이미 그렇게 단정 짓고 있었다.
‘얼마나 음흉한 속셈을 품고 있기에 자신의 본 모습을 그토록 필사적으로 숨긴 것일까? 흑천맹의 첩자인가? 아니면, 설마! 천겁령의 간세란 말인가?”
빙검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비류연은 한 번도 필사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숨긴 적이 없었다. 그는 그저 평소 좌우명대로 약간 음흉하고 무척 이성적이며 조금 똑똑 하게 행동했을 뿐이었다. 단지 그는 나서지 않아야 할 때 일부러 귀찮음을 무릅쓰고 나서지 않았으며, 분노했을 때 별로 참지 않았을 뿐이다.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당당하게 행동한 것,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전말을 알지 못하는 빙검으로서는 오해하는 게 당연했고, 현재 그의 본심을 읽는 재주가 없는 비류연으로서는 그의 오해를 풀어줄 방법이 없었다. 물 론 알았다 해도 풀어줬을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빙검은 오해와 편견과 자기 직관에 의존한 무모하고도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도대체 저놈의 진실한 정체가 뭐지? 도둑, 자객, 인자(認者), 간세, 비영(秘影)?”
오만 가지 의심이 그의 뇌리 속을 미친 듯이 날뛰고 광폭하게 헤집자 아무리 날카로운 이성의 소유자라 자칭하는 그로서도 쉽사리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생각 하면 생각할수록 자꾸만 미궁에 빠져드는 듯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빙검은 이미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이놈은 필시 천무학관에 해가 될 놈이 분명하다. 그러니 오늘 반드시 내 손으로 처단하고야 말리라.’
빙검의 몸에서 본격적인 처절한 살기가 얼음송곳처럼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어어, 저 망할 녀석이 갑자기 왜 저러지?”
빙검을 지켜보던 염도는 그의 갑작스런 기세 변화에 어이가 없었다. 그는 어리둥절했다. 왜 갑자기 저 자식이 저렇듯 사람 잡아먹을 정도로 처절한 살기를 내뿜는 단 말인가?
“오늘 끝장이라도 내보겠다는 거야 뭐야? 야! 이 망할 놈의 빌어먹을 얼음탱이야! 갑자기 그런 지독한 살기를 뿜어내는 이유가 뭐야? 이유가?”
빙검은 염도의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질문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상큼하게 씹어줬을 뿐이다.
“으으으으으, 이 노무 자식이……”
염도의 얼굴에 열이 뻗쳐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뚜껑이 열리기 일보 직전까지 와 있었다.
그러나 빙검은 그에게 대답하며 신경을 분산시킬 여유가 없었다. 모든 전력을 다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패배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빙검이었다.
시작한 싸움을 멈출 수는 없었다. 둘의 싸움은 점점 격렬함을 더해가고 있었다. 이제는 싸움의 신이 피를 보기 전에는 그들을 놓아 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스으윽.
필살의 의지를 다진 빙검은 고요하게 검을 들어올려 자신의 중심선에 가져다 놓았다. 그러자 빙검의 몸은 사라지고 검만이 홀로 남아 세상에 존재하는 듯했다. 마 치 검과 그가 하나가 된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신검합일(身劍合一)! 아무나 할 수 있는 재주는 분명 아니지.”
염도가 중얼거렸다.
신검합일! 검과 몸이 하나가 되어 검을 자신의 수족처럼 마음껏 부릴 수 있는 경지. 검으로부터 자유로워져 가는 상승의 단계 중 하나였다. 누구나 검의 길을 걷는 자라면 어느 정도 단계를 통과하면 도달하는 경지였고, 이곳 천무학관에도 이 경지에 오른 자는 수도 없이 많지만,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신검합일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았다. 빙검이 지금 보여주는 경지는 신검합일을 넘어서 심검합일(心劍合一)의 경지에까지 이른 것 같았다.
빙검의 검신이 허리 뒤로 돌아갔다. 자세가 컸다. 그것은 곧 강한 초식을 쓴다는 것과 동일한 뜻이었다. 자세를 갖추지 않고는 제대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일 까?
‘설마, 설마, 설마!!!!’
염도의 입에서 느닷없는 욕지거리가 폭포수처럼 튀어나왔다. 염도는 빙검이 지금 취하는 자세가 뭘 준비하는 자세인지 너무도 명확히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쳐 나오는 뜨거운 욕지거리를 거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야, 임마! 그건 반칙이라구!”
염도가 화들짝 놀라 그 자리에서 방방 날뛰었다. 염도는 왕년에 저 초식을 받고 학을 뗀 적이 있기 때문에 아직도 치를 떨고 있는 무시무시한 초식이었다. 저것은 제압기가 아닌 살인기였다. 제압만을 목적으로 한 비무에서는 써서는 안 되는 초식이었다.
‘저 얼음탱이가 미쳤나??
감정은 모두 꽁꽁 냉동 포장된 상태라 남아 있는 건 이성뿐이라는 빙검에게 정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아니면 벌써부터 비류연의 본 실력을 눈치 챘단 말인가??’
그것은 최고의 방어 초식인 염화지벽(焰火之壁)을 펼치고서야 빠져나올 수 있었던 무지막지한 살초였다.
“야 이 자식아! 네놈 그걸 쓸 작정이냐?”
염도가 두 눈을 부릅뜬 채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염도는 그 치사하고 밉살스런 초식이 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빙검이 생사대적(生死對敵)을 만났을 때나 쓰는 초식이었다. 근 10년 가까이 펼쳐 지지 않은 환상의 초식, 그리고 20년 전 염도에게 치명상을 가해, 그의 패배에 결정적인 역할을 미친 매우 악질적이고, 악연이 깊은 초식이기도 했다. 이렇게 관도와 마주쳐서 쓸 수 있는 초식이 아니었다. 그만큼 그 초식은 은밀하고 무섭고 악랄하고 강했다.
아무리 상대가 관도의 탈을 쓴 괴물이라 해도 어지간한 수를 써서는 죽을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애물단지라 해서 그 일이 용납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만큼 저 새파랗게 젊은 사부가 그를 궁지에 몰아넣은 것인가? 그가 비기의 봉인을 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빙검의 눈이 북풍한설을 담아 놓은 것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다.
우우우웅!
빙검의 애검 빙루가 푸른빛의 한기를 띠며 빛나기 시작했다.
“이런 빌어먹을! 망할! 썩을!”
염도가 급격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눈이 한없이 부릅떠졌다.
“위험해!”
염도가 소리쳤다. 그러나 비류연은 그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빙령수류검(氷靈水流劍)
극상오의(極上奧義) 비검(秘劍)
무영무흔비월인(無影無痕飛月刃)
쌍월(月)
빙검이 검을 바람처럼 휘두르자 두 가닥 푸른 섬광이 그의 몸 앞에서 대기를 갈랐다.
“어라?”
비류연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거창했던 한 수의 동작에 비해 주변에 파생된 일은 별것 없었다. 검풍이 대지를 가르지도 않았고, 검기가 하늘을 두 조각 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런 일도 일 어나지 않았다. 단지 푸른 섬광이 순간적으로 번뜩였다가 사라졌을 뿐이었다.
“지금 뭐 하신 거예요?”
“…..”
빙검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형형한 안광을 내뿜으며 검극으로 비류연을 가리키고 있었다.
“…..???”
비류연은 점점 더 알쏭달쏭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때였다. 흠칫 하는 느낌과 함께 비류연이 반보 뒤로 물러났다.
서걱!
차갑고 시리도록 섬뜩한 감각이 그의 팔을 훑고 지나갔다. 옷자락이 베어지고 그 안으로 살이 드러났다. 다행히 상처는 없었다.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아무런 소리도 없었는데…….”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무래도 본능은 특히 비류연의 본능은 – 위기의 순간에 빛을 발하는 모양이었다. 생존본능이란 가장 극악한 상황에서 순간의 번뜩이는 휘광(輝光)처럼 나타나 는 작용 원리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보이지 않는 무형무음(無形無音)의 칼날이 그의 옷자락을 베도록 놔둔 것은 본능과 감각의 무능을 탓할 만한 일이었지만, 그의 목이 달아나지 않도록 보존시켜 주 고, 그의 피 흘림을 방지해 준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이런 일이……. 그걸 피했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군!”
빙검의 얼굴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어려 있었다. 아직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초식이었다. 비류연 같은 젊은 애송이를 상대로 설마 이 비기가 실패
로 돌아갈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어떻게 한 거죠? 무척이나 신기한 수법이군요.”
비류연으로서도 처음 경험해 보는 듣도 보도 못한 초식이었다. 당하는 순간을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 피한 것은 그저 감이었다. 위험에 대한 본능적인 직감, 하마 터면 진짜로 베일 뻔했다. 기억하는 것은 옷자락이 베이는 순간의 싸늘하고 차가운 느낌뿐이었다.
“알 필요 없네.”
빙검이 차갑게 대꾸했다.
“이 비열한 자식! 그 치사한 수법을 쓰다니! 정말 죽일 셈이냐?”
분노에 얼굴이 벌게진 염도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가 분노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는 과거 빈번하게 이 공격에 노출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뿐만이 아니라 여러 번 당한 적도 있었다.
염도는 이것이야말로 빙검의 비열하고 저열하며 음흉한 성질을 그대로 드러내는 초식이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금성철벽보다 더 단단하고 금강석보다 더 굳 건하게.
그리고 5년 전에야 저 비열, 비겁, 비도덕적인 삼비무쌍(三卑無雙)한-염도의 표현을 빌리자면 – 초식을 막아낼 수 있는 초식을 개발할 수 있었다.
알면서도 보이지 않기에 막을 수 없는 무형무흔의 사형집행인.
비류연이 옷자락만을 재물로 내준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치사일수(恥事)를 펼치다니 무슨 망할 심보냐?”
치사일수란 염도가 이 무영무흔비월인(無影無痕飛月刃)을 부를 때 쓰는 그만의 명칭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치사한 초식이라는 의미로 예전에 이 초식에 당했 던 자신의 쓰라린 한이 서린 작명이었다.
“치사일수라뇨? 그게 뭐죠?”
전신의 신경을 곤두세워 적의 존재를 감지하면서도 비류연이 물었다. 아직 여유가 있다고 자랑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여전히 불쾌함을 감추지 않는 얼굴로 염도가 말했다.
“저 녀석의 검, 빙백(氷魄)에는 빙루(氷淚)라 불리는 이슬이 항상 검신에 맺히지. 그게 검의 눈물 같다 해서 빙루라 부르는데 그 빙루를 한곳에 모아 보이지 않는 무형의 칼을 만드는 것이지. 투명한 얼음의 ‘회선표’를!”
빙검의 칼날은 날을 제외하고는 빙루가 편편하게 얼어붙어 만들 어진 한 겹의 얇은 얼음으로 감싸져 있었다.
그리고 얼음으로 날을 감싸거나 날을 드러내는 것도 내공에 의해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었다. 날이 얼음 위로 드러나고 감춰지고에 따라 상대의 상처 깊이도 달 라진다. 죽이고 사는 것이 빙검의 손에 달려 있게 되는 것이다.
무형무흔비월인은 이 편형 얼음을 적에게 형체도 소리도 없이 날려 보내는 초식이었다.
염도가 이를 바드득 가는 것도 당연했다. 저것과 얽힌 추억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추억이기 때문이었다.
“조심해! 저것의 악질적인 면은 한번 지나갔다고 해서 그것이 끝이 아니란 점이야! 상대를 굴복시킬 때까지 계속해서 목표의 주위를 돌며 끊임없이 사람을 괴롭히 지. 그야말로 망할 놈의 치사 염병할 초식이야!”
아무래도 원한이 뼈에 ‘사무칠 정도로 깊은 모양이었다.
“보이지 않는 무형 무음의 얼음 칼날이라……. 흐흠! 그렇다면 볼 수 있어요.”
비류연이 활짝 웃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의 대답은 너무나 시원했기 때문에 정말 그렇게 될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염도와 빙검 모두 그 철철 흘러넘치는 자신감에 놀란 모양이었다.
빙검은 그 말이 귀에 거슬려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초식이 파해된다는 것은 자신의 명예와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다.
“그게 가능하다고 보는가?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무모함은 배짱이 아니라 허풍에 불과할 뿐이지.”
빙검의 말은 신랄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비류연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의 고양된 자신감은 여전히 잔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없다면 모르되 그 존재가 확실하다면 오감뿐만 아니라 육감까지 최대한으로 높여 그 존재 자체를 잡아낼 수 있죠.”
그렇게 쉬운 것도 모르냐는 투였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그것이 바로 비뢰문의 가르침이었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게 바로 홀황경(憁侊境)의 경지였다.
싸움에 있어서만큼 비류연은 허언을 한 적이 없었다. 진실을 교묘하게 숨긴 적은 있어도 말이다.
“해볼 테면 해보거라, 말리지는 않으마.”
“그러지요.”
비류연이 순순히 대답했다.
‘진짜로 할 작정인 모양이네? 그러나 어떻게??
염도는 여전히 의혹 어린 시선으로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봐도 봐도 정이 안 가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비류연의 편에 서 있었다. 빙검을 골탕 먹 일 수만 있다면, 그의 자존심에 먹칠을 할 수만 있다면 다른 건 어떻게 되도 상관이 없었다.
“헉!!!”
비류연이 취한 행동은 두 사람을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비류연이 과감하게 눈을 감았던 것이다. 두 사람이 보기에 미친 짓거리였지만 비류연은 그렇게 했 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미, 미쳤나?”
염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리도 아니었다. 빙검 역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눈을 감는다 해서 소리를 감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빙검이 싸늘하게 말했다.
여느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청각에 의지하려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비류연이 지금 하고자 하는 일은 차원을 달리하는 일이었다. 그는 육신의 눈을 감았지 만 그의 마음의 눈은 여전히 떠져 있었다.
이윽고… 전신의 감각을 극대화하자 그의 의지에 반응하기라도 하듯 희미하게 투명한 칼날의 궤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시체 냄새를 맡고 모여든 두 마리 의 까마귀처럼 그의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투명한 칼날은 죽음을 찾아 나선 까마귀에게 어울리지 않는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비류연의 주위를 맴돌았다.
비월인은 모두 두 개였다. 하나는 큰 궤적을, 다른 하나는 작고 빠른 궤적을 그리며 시간차 공격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다.
스르륵.
비류연의 말뚝처럼 멈춰져 있던 몸이 살짝 앞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작은 궤적을 그리던 비월인이 그의 등을 살짝 훑고 지나갔다. 그러나 간발의 차로 아무런 성과 도 건질 수 없었다. 이미 조금 전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감으로써 비류연은 그 궤적에서 몸을 빼내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빙검은 눈을 부릅떴다.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할 일이었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비류연은 전혀 아무런 불편함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은빛 선을 그리며 자신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두 개의 비월인의 존재를 선명 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두 마리 제비처럼 그의 몸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우아한 나선의 궤적을 그리며…..
다시 한 번 얼음의 비월인이 자신을 향해 여느 때와 같은 나선을 그리며 날아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직각(直角)으로는 못 움직이겠지!’
비류연은 비월인의 궤도와 직각이 되는 방향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것이 그가 생각한 가장 안전한 위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치명적 방심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단정지어 버린 것은 비류연의 최대 실수였다. 단순하게 한 면만 보고 섣불리 단정하는 것은 강호인으로서 지양해야 할 악덕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너무 쉽 게 방심해 버렸다. 그 방심은 당장에 그를 위험에 빠뜨렸다.
그 틈을 빙검은 보기 좋게 비집고 들어왔다.
“어림없는 짓!”
팟!
곡선을 그리며 날아오던 비월인이 물 찬 제비처럼 직각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속도 또한 눈부시게 증가되어 있었다.
두 개의 얼음 칼날이 비류연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순간적으로 각을 꺾으며 그의 정면과 배후면으로 찔러 들어온 것이다.
염도가 이것을 볼 수 있었다면 분명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이기어검(以氣御劍)!’
분명 이 한 수는 이기어검의 변형 수법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의 손을 벗어나 일정한 궤도를 그리며 허공중을 맴도는 비월인을 이토록 급격하게 조정할 방 법이 없었다.
“하압!”
비류연은 사람의 몸으로 과연 가능이나 할까 하는 움직임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찰나지간에 그가 보여준 모습은 너무나 빨라 육안으로도 거의 파악이 불 가능했다.
그의 몸은 위기의 순간에 공중에서 순간적으로 정지한 듯 보였다. 여전히 비류연의 몸에 두 개의 무형무흔비월인은 사신의 손길만큼 무서운 존재였다. 게다가 그 속도 또한 사람의 목숨을 취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두 개의 보이지 않는 궤적과 한 사람의 몸이 한곳에서 교차했다.
파바바밧!
그의 몸이 허공중에 팽이처럼 맹렬히 회전한 다음 사뿐히 지상에 착지했다. 비류연은 착지한 다음 잠시 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피는 떨어지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피가 대지를 흥건히 적셔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염도마저도 그 사실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예상이 깨져 버린 것이다.
비류연은 가슴 앞으로 양손을 교차시킨 채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의 팔뚝은 기울어진 열십자를 연상시키듯 좌우로 교차해 있고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만이 곧게 뻗어 있었다. 그것은 좌우 양손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의 양손 검지와 중지를 타고 싸늘한 한기가 흘러들어 왔다.
“이… 이럴 수가! 이건 꿈이야. 이건 악몽이라고!”
빙검은 자신의 생애에 놀람과 경악으로 이 정도로 많은 단어를 쓴 적이 결코 없었다. 명백히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때요?”
비류연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빙검을 쳐다보았다. 그의 손에 맥없이 잡혀 있는 것은 분명히 자신이 날려 보낸 두 개의 얼음 칼날이었다.
“어, 어떻게. ..? 무슨 수로?”
의문스럽기는 염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그렇게나 애먹인 악몽의 그림자가 비류연의 좌우 손가락에 의해 완전히 짓밟혀 버렸다. 부릅떠진 염도의 눈에서 왕 방울만큼 튀어나온 눈이 마치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두 눈깔이 없는 무시무시한 얼굴의 염도를 보지 않 아도 되는 행운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주작단원들은 신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파삭!
비류연의 양손에서 얼음 결정이 산산이 부서지며 투명한 결정의 조각들이 햇빛 속에 반사되며 반짝였다.
고수 앞에서는 상대가 그의 간격 안에 자신을 가둬두고 있을 때는 눈조차도 깜빡일 수 없다. 자신의 눈꺼풀이 자신의 눈을 덮는 그 순간이 바로 자신의 목숨이 이 세상에서 그 명을 다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빙검은 그답지 않은 방심을 했다고 할 수 있었다. 자신의 비기가 깨지는 것을 본 그는 순간적인 공황慌상 태에 빠졌던 것이다.
빙검의 순간적 공황 상태는 그의 몸에 작은 허점을 만들어냈다. 비류연은 그 찰나를 놓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비류연의 손에서 무수한 하얀 섬광의 궤적이 그려 졌다. 비류연은 무척이나 공평한 사람이었다. 그 증거로 그는 지금 염도를 쓰러뜨렸을 때와 같은 초식을 전개하고 있었다. 여름날의 악몽을 부른다는 환상의 초식!
삼복구타권법(三伏毆打拳法)
중복(中伏)
무한연환구타(無限連環毆打)
파바바박!
빙검의 눈앞에서 은모래가 찬연하게 빤짝이며 그의 정신을 농락했다. 그의 방어 본능은 이 악몽 같은 초식에 마비되고 말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것은 완벽한 패 배였다.
“…아프군! 내가… 졌다.”
이 말 한마디가 빙검이 짜낼 수 있는 마지막 힘이었다.
“크윽!”
그리고는 털썩 제자리에서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정신적으로 너무나 엄청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때 그는 자신이 한 약속, 즉 세 가지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약조를 잊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쉽게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가 다시 이 사실을 머릿속에 떠올렸을 때는 이미 배가 나루터를 떠난 이후였다.
이대로 두 번 다시 눈뜨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이라고 그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빙검이 다시 눈을 뜬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난 뒤였다. 그 기다림의 시간은 염도에게는 마치 천 년처럼 긴 시간이었다. 그리고 염도의 바람대로 마침내 빙검의 눈이 미세한 꿈틀거림과 함께 떠졌다. 그는 자신의 현재 상태가 잘 이해가 되질 않는지 여러 번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깨어났어요?”
재수 지지리도 없게 빙검이 깨어나서 처음 본 것은 바로 비류연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더욱더 재수 없는 얼굴인 염도의 낯짝도 함께 있어 그의 기분을 더욱더 찝찝하게 만들었다.
빙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제야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이해한 것이다.
“확실히 정신이 든 것 같군요. 이제 본론에 들어가 볼까요?”
비류연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맹세컨대 빙검은 여태껏 살아오면서 그만큼 불길한 미소는 처음 보았다.
“자, 그럼 이제 약속을 이행해야죠. 설마 무림의 명망 높으신 빙검 노사께서 어린 저에게 말을 번복하시는 추태를 보이시지는 않겠죠?”
비류연이 생글거리며 말했다.
“물론이다.”
여태껏 신의를 목숨처럼 지켜온 빙검이었다.
남아일언(男兒一言) 중천금(金)! 일구이언(一二言) 이부지자(二父子)! 사내가 한 입으로 두말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게 그의 평소 지론이었 다. 그러나…….
비류연이 손가락 하나를 쭉 앞으로 내밀어 빙검의 눈앞에 갖다 댔다. 그는 엄청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을 빙그레 웃는 얼굴로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어떤 망설임도 없이 뱉어냈다.
“그럼 첫 번째 조건을 말하겠어요. 첫 번째 조건은 바로 빙검 노사께서 저의 제자가 되는 것이죠. 쉽죠?”
비류연이 첫 번째로 내건 조건을 들은 빙검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신념을 박살내 버리고 싶은 격심한 충동과 격렬한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터무니없는 소리! 말도 안 된다!”
그가 소리쳤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물론 염도도 이런 똑같은 과정을 겪었기에 비류연은 당황하지 않았다. 비류연은 태연하게 반문했다. 진짜로 이유를 모른다는 듯.
“왜죠?”
“당연히 그건 불가능하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누가 그걸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법으로 규정하기라도 했나요?”
“그… 그건…….?”
물론 그런 법 조문이 있을 리 없었다. 빙검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이 세상에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보다 나이가 적은 이를 사숙이나 사백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항렬이 존재하는 이 강호에선 너무나 비일비재한 일이라 이 제는 놀라울 것도 없는 일이죠. 그것은 일상 그 자체니까요.”
맞는 말이었다. 문파에서 항렬이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 있다면 설혹 나이가 어릴지라도 사숙이라 부르며 깍듯이 모셔야 했다. 즉 한 문파에 열 살 먹은 제자 갑(甲) 과 서른 살 먹은 제자 을(乙)이 있다고 하자. 두 사람은 같은 시기에 입문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사부는 각기 달랐다.
나이가 열 살인 갑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그 출중한 재능과 잠재력을 인정받아 장문인(掌門人)의 제자로 들어갔고, 서른 살의 제자 을은 재능이 부족하여 장문 인의 제자인 병(丙)의 제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나이가 많고 입문 시기가 같다 해도 을은 갑을 사숙이라 불러야 했다. 예외란 있을 수 없고 거부 도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강호의 법규였다. 이것은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나이 적은 이를 사숙이라 부를 수는 있어도 사부라고 부를 수는 없다니, 세상에 그런 억지가 어디 있나요? 생각을 해보세요. 나이 적은 이가 사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은 그저 강호에 만연한 잘못된 인식과 강호에 팽배한 편견일 뿐이에요. 사례가 드물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 사실을 가끔 잊고 살죠. 지긋지긋하고 고지식한 유교의 장유유서의 가르침이 그 사실에 안개를 더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죠. 그런데도 나이 적은 이가 나이 많은 이의 사부가 될 수 없을까요?”
비류연의 청산유수 같은 언변에 빙검은 말문이 꽉 막혀 감히 반박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비류연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물론 생각하고 자시고 할 문제도 아니죠. 당연히 그런 일은 가능하니까요. 이제 우리는 이 사회에 팽배한 편견과 악습을 타파하고 좀 더 자유롭고 유연하며 합리 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공자 왈(曰) 삼인행(三人行)이면 필유아사(必有我師)라! 위대하시고 현명하시고 유명하신 공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 셋이 걸어가면 그 중에 반드시 자신의 스승이 있다고 했지요. 또한 이건 그분만큼은 유명하지 않지만 다른 분이 말씀하신 건데 배움의 길은 끝이 없다고 하셨답니다. 그리고 육십이 넘어서도 열 살배기 소년에게도 반드시 배울 점이 있다고 하셨지요. 그런데도 제가 노사의 스승이 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인가요?”
이제 비류연의 어조는 추궁조로 바뀌어 있었다. 여전히 빙검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것은 궤변이오. 여태껏 그런 선례가 없지 않았소?”
궤변이라고 외치고 있지만 자신도 모르게 말이 높아진 것을 빙검 자신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점점 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류연의 기세에 휘말려 들 어가고 있었다.
“선례가 없다고요? 누가 빙검 노사에게 그런 거짓을 고했죠? 그런 간악무도한 인간이 다 있다니… 강호의 앞날이 걱정스럽군요.”
그 정도로 호들갑 떨 일은 아니었다. 비류연이 빙검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선례는 있죠.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한 호흡이 지나기 전에 당장 눈앞에 증거를 들이밀 수도 있어요. 만일 못 보여드린다면 저의 이 조건 은 없던 일로 하셔도 좋습니다. 어떻습니까?”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정말인가?”
놀란 얼굴로 빙검이 되물었다.
“물론이죠.”
망설이지 않고 비류연이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빙검에게는 가뭄에 단비 같은 대답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둘만의 대결을 위해 인적 없는 곳으로 끌고 왔기에 당연히 다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있다면 20년 전부터 알고 온 재수 없는 염도의 낯짝만 보일 뿐이었다. 빙검의 시선이 잠시 염도의 얼굴 위에 머물렀지만 곧 흔들리는 고개와 함께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염도 저 자가 어떤 작자인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순순히 수락했겠는가. 차라리 자결을 택하면 택했지 그런 비굴하고 수치스러운 삶 을 수락할 만큼 배알이 없는 놈은 아니지. 아무리 놈이 마음에 안 든다 해도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염도에 대한 선입관에 대해 빙검은 너무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이 패착이었다. 그것은 비류연이 교묘하게 파 놓은 마지막 함정이었던 것이다.
“좋네! 내 수락하지. 자네가 당장에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증거를 보여준다면 내 자네를 앞으로 영원토록 사부로 모시겠네.”
빙검이 마침내 승낙의 뜻을 표했다.
비류연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물론 밀어붙이면 처음의 조건만으로도 충분히 빙검을 제자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류연은 사냥감을 좀더 완벽한 올가미로 포획한 다음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으로 빠뜨리는 게 취미였다. 이 일에 그는 완전한 쐐기를 박고 싶었던 것이다.
“남아일언(男兒一言)!”
비류연이 선창했다.
“중천금(重)!”
빙검이 답했다.
“일구이언(一二言)!”
“이부지자(二父之子)!”
비류연은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승자의 웃음소리였다. 패배자는 결코 그런 웃음을 흉내 낼 수 없을 것이다.
“하하하하하! 좋습니다. 그럼 약조대로 이 자리에서 그 증거를 보여드리지요. 돌이킬 수도 없고 조작할 수도 없는 살아 있는 생생한 증거를요. 염도!”
비류연이 큰 소리로 염도를 불렀다. 그러나 염도의 위치는 바로 그의 등 뒤에 있었기에 그렇게까지 큰 소리로 부를 필요는 없었다. 이것은 일종의 연출이라 할 수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사부님!”
염도가 살짝 포권을 취하며 대답했다. 빙검을 약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에 그의 태도에는 상당한 공경심이 묻어 있었다. 빙검도 감히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정도로.
“헉!”
차가운 냉기를 담고 있던 그의 눈동자가 경악과 불신으로 휘둥그레졌다. 얼음 조각 같던 녀석이 하늘이 무너진 듯 당황하자 염도는 매우 고소했다. 비류연은 즐겁 게 웃었다.
“하하하하! 좋겠네요, 염도. 이제 사제가 들어왔으니 더욱더 노력해 주길 바래요.”
“물론입니다, 사부님! 아주 확실히 교육시켜 놓겠습니다.”
염도가 힘차게 대답했다. 그는 지금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삼키고 있었다. 내심 환희에 전율하며 쾌재를 부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빙검은 이 순간, 기절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그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어때요?”
비류연이 다시 빙검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에게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일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것뿐이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빙검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불신에 가득 차 있었다. 그가 강렬한 시선으로 염도의 전신을 아래위로 훑었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빙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왜 그래? 기분 나쁘게!”
염도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빙검이 물었다.
“자네 진짜로 염도 맞나?”
“뭬이야?”
염도가 발끈했다. 그러나 빙검은 태연했다.
“혹시 그 얼굴 피부 붙인 거 아닌가?”
“뭐라고? 말이면 단 줄 아나?”
“어떻게 자네가 그런 모습으로 전락했는지 믿기지 않아서 말일세. 혹시라도 인피면구를 뒤집어쓴 가짜인가 했지?” 캬오오오!
“이런 싸가지가! 그 잘난 대갈통, 이 몸이 부숴 줄까?”
염도가 길길이 날뛰며 막말을 퍼부었다. 그 과격한 모습을 보고서야 빙검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저 개차반 같은 화급한 성격, 분명 염도가 틀림없군.”
갑자기 눈앞이 암담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전신에서 맥이 빠지는 듯했다.
“…내가 졌네. 자네의 조건을 수락하지.”
그러자 비류연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그의 눈앞에서 왼손은 허리를 짚은 채, 오른손 검지를 좌우로 흔들며 혀를 찼다.
“쯧쯧쯧, 그게 아니죠.”
그러자 빙검이 다시 포권지례를 취하며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제가 졌습니… 다. …사부님.”
“앞으로 잘 부탁해요, 제자.”
비류연은 다시 한 번 그 특유의 만족스러움을 표하는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존대와 사부란 말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비류연은 염도 때도 그랬다면서 지금은 적응 기간이니 곧 익숙해질 거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빙검은 그의 말에 전혀 기뻐할 수가 없었다.
“아! 그리고 남은 두 가지 조건 말인데요.”
순간 빙검의 얼굴에 공포가 드리워졌다.
“아직도 남은 게 있단 말인가?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두 개씩이나?”
그는 지금 첫 번째 조건을 감수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아직도 남은 게 있습니까?”
여기서 이보다 더한 충격을 받으면 그는 자살하는 게 낫다고 느낄지도 몰랐다. 비류연은 잠시 빙검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비류연이 살짝 웃었다.
“남은 두 개는 나중에 청산하도록 하죠. 지금 한꺼번에 다 말하면 재미없지 않겠어요?”
빙검은 잔뜩 긴장했던 어깨에 힘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감사합니다. 사부… 님.”
“뭘요! 당연한 일이죠. 전 제자를 무척이나 아끼는 훌륭한 사부거든요.”
역시 이건 지독한 악몽임이 틀림없다고 빙검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 다음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도 빙검은 이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날 수 없었다. 그제야 그는 이 악몽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의 막막함은 살아생전 처 음 느끼는 아득함이었다. 여전히 이 상황에서 현실감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분명 당한 것은 빙검인데 입원한 이는 왜 비류연인가? 그것도 보통 위중한 상태가 아니면 들어올 수도 없는 중환자실에……?
이것은 비류연의 제안이었다. 빙검을 제자로 만들고 난 후 비류연이 말했다.
“으음… 일단 어디 의원에라도 입원하는 게 좋겠군요.”
“아니, 누가 말입니까? 다 멀쩡해 보이는데?”
염도가 물었다. 빙검이 좀 두들겨 맞기는 했어도 입원할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나죠!”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어투였다.
“아니 왜요? 어디 보이지 않는 내상이라도 크게 입었나요?”
그렇다면 염도에게 있어 그것은 금상첨화였다.
“왜요? 혼자서 자축이라도 하시게요? 미안하지만 아쉽게도 멀쩡하고 쌩쌩해요. 한 5백 년 걱정 없이 살 정도로 팔팔하죠.”
같은 말이라도 얄밉게 해서 듣는 사람을 약 올리는 방법을 비류연은 매우 잘 숙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궁금한 건 질문한 염도뿐만 아니라 빙검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빙검 노사랑 같이 비무하러 가는 모습을 여러 사람이 목격했으니까요. 이제부터 남들 앞에서 해줄 변명거리를 찾아야죠. 내가 멀쩡하게 돌아다니면 아무도 안 믿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깐 사람들이 원하는 결과를 보여줄 필요가 있죠. 다들 납득할 수 있는 그런 결과를!”
역시 머리 하나는 약삭빠르게 잘 돌아가는 비류연이었다.
“그거 정말 저 얼음탱이를 위한 건가요?”
염도는 의심의 눈초리를 쏘아 보냈다. 함께 지내 온 시간 동안 생성된 감이란 게 작용했던 것이다.
“물론이죠. 절대 수업이 하기 싫어서 이러는 게 아녜요. 호위를 등한시하기 위한 것도 절대 아니구요. 물론 내가 없으면 모용휘가 고생 좀 하겠지만 좋은 일도 있겠 죠. 미녀를 호위하는데……. 젊었을 때 고생해야지 언제 하겠어요?”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지만, 내용이 좀 마음에 걸리는 것들 투성이였다. 솔직하게 ‘나 공부하기 엄청 싫으니 며칠 땡땡이치겠소’라고 말하면 될 것을……. 여전히 솔직하지 못한 비류연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꼬투리 잡기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염도는 잘 알고 있었다.
“맘대로 하시죠!”
두 사람이 비류연의 의견에 동의하자 비류연이 세부 사항을 지시했다. 일단 이 비무의 승자는 빙검으로 설정하기로 했다. 그래야지 입원할 명분이 서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람들을 쉽게 납득시키는 데다가 제자의 체면 또한 지켜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 비류연의 깊은 뜻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체면을 차려 주 는 편이 좀더 쉽게 빙검을 승복하게 만드는 효과도 누릴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다. 비록 이 부분은 두 사람에게 설명을 해주지 않고 뺐지만, 사실은 일석이조가 아니 라 일석삼조, 아니 사실은 일석사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책이었던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바로 남들이 지옥 훈련이다 뭐다 땀범벅이 되어 뼈 빠지게 수련할 때 푹신푹신한 침대에 누워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천수신의 허주운이 비류연의 꾀병을 눈치 챌 가능성이 있으므로 빙검의 독문신공에 의해 상처를 입어 빙검 독문의 수법으로 치료해야 된다는 설정도 부가해서 넣 었다. 그리고 특별히 빙검이 힘을 써서 독실을 얻을 수 있게 해달라고 지시했다.
빙검은 좋든 싫든 비류연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찌되었건 그는 이제 비류연을 사부로 모시기로 맹세한 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의 대외적인 체면 까지 지켜주겠다는데 아쉬울 게 없었다. 그렇게 해서 비류연은 이렇게 말짱한 몸으로 편안한 병상에 팔자 좋게 누워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비류연은 요 며칠 동안 계속해서 입원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재 상태로 보건대 아직 수십 일은 더 퇴원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아주 지능적인 수법으로 수업을 빼먹는 비류연이었다. 또한 비록 수업은 빼먹지만 보충 수업으로 이미 그의 밤나들이 계획은 쉴 틈 없이 빽빽하게 짜여져 있음이 분명했다.
푸드득!
빙검을 무한한 악몽 속에서 현실의 바닥으로 끌어내준 것은 푸드득 하는 힘찬 날갯짓 소리였다. 병상에 부상도 없이 누워 있던 비류연이 왼손을 옆으로 힘차게 뻗 자 소리 소문 없이 창문이 활짝 열리며 그곳을 통해 푸른 깃털을 가진 창공의 제왕 우뢰매가 날아 들어와 그의 어깨 위에 우아하게 날개를 접으며 내려앉았다. 그리 고는 그의 머리에 얼굴을 비비며 재롱을 떨었다. 비류연은 웃으며 그 재롱을 받아 주었다.
“아하하하! 그만, 그만! 간지러워! 간지럽다니깐…….?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요즘 제대로 안 놀아 줬더니 어리광만 늘어난 것 같았다.
삐익! 삐익!
잘못하면 부리로 눈알을 쪼을 만큼 과격한 우뢰매의 애정 공세가 비류연에게 가해졌다. 마치 맹금에게 습격당하는 사람처럼 보일 가능성마저 있었지만, 비류연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환자에게 찬 바람은 나쁜 것 아니었나요?”
싸늘한 어조로 빙검이 말했다. 그의 말은 혀가 꼬인 것처럼 퉁명스러웠다.
“아아! 저의 제자들에게 어찌 이토록 사부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이 부족한지. 오호! 통재라’ 하며 잠시 속으로 현 세태의 문제점에 대해 한탄한 비류연은 활 짝 웃는 얼굴로 그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제자가 모르는 게 있으면 가르쳐 주는 것 또한 사부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보통은 그렇죠. 하지만 가끔 예외도 있는 법 아니겠어요?”
물론 꾀병 환자는 확실히 예외에 속하지만 빙검은 분별력 있게도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죠? 이런 약 냄새 풀풀 나서, 가끔 코를 틀어막고 싶은 곳을 방문하다니?”
“그냥 걱정이 되었을 뿐..”
그것은 물론 진심이 아니었다. 그러나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기 위한 각오를 하는 데 그는 많은 용기와 인내가 필요했다. 오늘이 있기까지 그는 수백 번에 걸친 맹 렬한 살인 충동과 수십 번에 걸친 강렬한 자살 충동으로부터 자신을 다스려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훌륭한 제자로군요.”
웃는 낯으로 말한 비류연이 구사한 언어에 빙검은 순간 가슴이 저며 왔다.
제자(弟子)!
“크으으으윽!”
마치 마음을 쥐어짜내는 듯한 신음소리였다. 아직도 들을 때마다, 아니 떠올릴 때마다 그의 폐부를 아프게 하는 소리였다. 언제나 위화감이 들었다. 지금도 그를 급습한 이 위화감은 영원히 없어질 것 같지 않았다. 그 언어가 주는 싸늘한 느낌과 어쩔 수 없는 위화감을 그는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의 인생에 다시없는
굴욕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굴욕에 그 누군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직은!
이런 일에 있어서 비류연은 그다지 성급하지 않았다. 그는 완벽을 좋아했다. 특히 염도의 표현대로라면 이렇게 남을 등쳐먹는 일에는 특히나 더 집요했다.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부끄러우니깐!”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하며 자신을 쳐다보던 빙검에게 비류연이 한마디 했다. 그는 아직 철저한 이성주의자였다. 작금에 와서 그 신념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이제 몸은 괜찮나… 요?”
아무리 서로를 ‘지지리’ 싫어해도 동문은 동문인 모양이었다. 어쩜 그렇게 염도가 초반에 했던 행동들을 똑같이 답습하고 있는지…….
“괜찮냐고요? 물론 괜찮죠. 왜냐하면 애당초 다친 데 없이 멀쩡한데 어떻게 안 괜찮을 수 있겠어요?”
만물이 생동하는 봄같이 생기가 가득 차 있는 말이었다. 그의 병실 앞에 위협적으로 걸려 있는 ‘출입금지! 절대안정!’이란 경고가 무색해지고 부끄러워지는 순간 이었다.
“혈색이 너무 좋은 것 아닌가… 요?”
“쿡쿡쿡, 좀더 피폐해져야 하는 건가요? 그래도 명색이 중환잔데……. 쿡쿡.”
비류연은 이 상황이 무척이나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용케도 허 전주의 눈을 속일 수 있었군요. 그 어떤 꾀병도 그의 눈과 그의 손을 피해간 적이 없었거늘…….”
신의라 불리는 허 전주(殿主)의 이목을 이토록 감쪽같이 속일 수 있으리라고는 빙검 자신조차도 자신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비류연은 보란 듯이 해냈다. “자신의 육체에 대한 완벽한 제어력만 지니고 있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죠.”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특유의 말투로 비류연이 말했다.
“저번에도 말하지 않았나요? 한번 한 대답을 다시 반복하는 비효율적인 일은 사양하고 싶군요.”
“그것이 진짜 당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입니까? 진실로?”
그는 지금 비류연이 이렇게 하고 있는 진짜 이유를 알고 싶었다. 자신의 패배를 자랑스럽게 떠벌이지 않은 이유, 그러기 위해 중환자로 위장한 이유. 그는 그 내면 에 깔린 진정한 이유와 진실한 목적을 알기 위해 껄끄러움을 무릅쓰고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비류연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그는 세상을 너무 오래 살았 다. 그러나 비류연에게 좀더 수준 높은 이유를 요구한다는 자체가 웃기는 일이었다.
“글쎄요, 그 이상의 이유가 꼭 필요한가요? 난 제자가 필요했지 제자를 쓰러뜨린 명성이 필요했던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가장 힘들 때 수련도 피할 수 있고 열두 시진 편히 쉴 수 있고.. 생각해 보니 이유가 너무 많군요.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비류연은 그렇게 대답하며 싱긋 웃었다. 비아냥거림은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빙검의 눈에는 결코 믿음이 가는 웃음이 아니었다.
“꼭 알고 싶네. 그것을 납득하지 않고서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 제발 가르쳐주게!”
빙검이 그답지 않게 감정적으로 외쳤다.
“이런, 이런! 사부에게 너무 말을 낮추는군요. 잊지 마세요, 이제부터 당신은 나를 사부라고 불러야 한다는 사실을. 그것이 바로 그 비무의 결과물이자 노사와 나 의 약조라는 것을!”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의 말은 칼날처럼 단호했다.
“잊지 않지요.”
“좋아요!”
비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은 용건은 없었다. 돌아가는 게 나을 듯했다.
“그럼 돌아가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잘 가요. 그리고 다음에 올 때는 꼭 병문안 선물을 잊지 마세요. 사람 사이란 사소한 일에도 원한이 쌓일 수 있는 법, 항상 조심조심 또 조심해야 하죠.”
비류연은 손을 흔들며 빙검을 배웅했다. 아무래도 빙검이 병문안 선물을 들고 오지 않은 게 줄곧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