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0권 7화 – 환마동(洞)개문(開門)

비뢰도 10권 7화 – 환마동(洞)개문(開門)

환마동(洞)개문(開門)

고뇌에 찬 밤의 어둠을 밀어내고 여명(黎明)과 함께 시련의 아침이 밝아 왔다. 기상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눈을 뜬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긴장과 흥분으로 인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윤준호는 창가에 서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오늘의 아침이 밝았구나! 저 해에 두고 맹세하자. 이제 두 번 다시 도망치지 않기로……..

이전까지의 윤준호와는 다른 결연한 의지가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는 새롭게 태어나고 싶었다. 그 모든 이유가 신비에 싸인 환마동 시험이 시작되는 날 아침이기 때문이었다. 기분 탓인지 공기마저 팽팽하게 긴장된 듯한 느낌이었다.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고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다들 긴장과 흥분, 그리고 초조함으로 인해 잠을 설쳤겠지?”

어젯밤 수십 번의 수면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번 실패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보게! 아침이 밝았네! 이제 그만 일어나게, 류연! 류연!”

모용휘는 두어 차례 비류연을 흔들어 보다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쿨쿨쿨….쩐(錢)…쩌언…내 돈……..

음냐음냐 음냐.”

비류연은 반대로 기상 종소리가 울려도 여전히 침상에서 잠에 취해 뒹굴며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모용휘는 비류연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잘생긴 얼굴을 찡그렸다.

“이 녀석은 긴장도 흥분도 모른단 말인가?”

늦잠 자는 그의 얼굴에는 여유와 평온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새벽빛이 차가운 공기 사이로 내리비추고 있었다. 비류연은 친구들과 제자들과 함께 예정된 집합 장소로 향했다. 보이지 않는 긴장이 그들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여유만만하게 딩가딩가하고 있는 이는 비류연뿐이었다.

“잘 잤나? 룡? 홍? 준호?”

기숙사 문을 나서자 효룡이 보였다. 그 옆에는 장홍과 윤준호도 함께 있었다. 그들의 긴장감이 피부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특히나 윤준호의 긴장과 결의는 대단했 다. 그동안 단련시킨 보람이 이제 어느 정도 성과가 보이는 것 같아 비류연은 매우 흡족했다.

“그럼 가볼까?”

“좋아!”

다들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류연 일행은 집합 장소를 향해 걸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 남궁상과 진령을 위시한 주작단원들이 그들 일행에 합류했다. 주작단원들이 비류연에게 살짝 인사했 다. 그러자 장홍, 효룡, 준호가 서둘러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이들은 특별 합숙 훈련을 통해 염도 밑에서 함께 고생했던 처지라 서로 간에 친분이 남달랐다. 서로 인 사를 주고받은 그들은 다같이 집합 장소로 향했다. 어차피 그곳으로 가는 길은 하나였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같은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다. 그중에는 진성곤, 임성진과 천무쌍귀영 당철기와 천소해도 있었다. 비류연은 그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도 이번 시험에 참가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오늘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언제나 놀기 좋아하고 사고치기를 즐기는 천무학관의 문제아들이 아니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로군. 이 사람들이 다 화산규약지회 예선전을 치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란 말인가?”

효룡이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다들 한가닥 하는 기도의 소유자들이었다.

“사문과 가문과 자신의 명예와 영달이 달린 일일세. 다들 기를 쓰고 덤벼드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그 대가가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문 것 같군. 이들 중 거의 대다수는 화산규약지회가 뭔지 쥐뿔도 모를 테니 말일세.”

장홍의 말은 상당히 냉소적이었다. 평소 그답지 않은 말투였다.

그때 비류연의 시야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어, 예린 소저!”

비류연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그녀를 불렀다. 건방지게 이름을 부르는 비류연이었다. 뜻하지 않은 만남에 곁에 있던 독고령의 얼굴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이진 설은 효룡과의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관계라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못한 채 당황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그녀들 일행도 비류연 일행과 함께 합류하고 말았다. 외 면할 기회를 놓쳐 버렸던 것이다.

길을 걸어가는 도중 많은 사람들이 먼저 그들 일행을 보고 인사했다. 대부분의 인사는 주작단과 나예린을 향한 것이었다. 주작단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져 요 즘은 신입생들로부터 거의 우상 취급을 받고 있을 정도였다. 몇몇 사람들의 소원은 주작단에 들어가 단원이 되는 것일 정도로 그 인기가 높았다.

그들의 인기는 청룡단을 이긴 이후로는 거의 최고조를 달리고 있었다. 물론 그런 환상을 품는 이 중 주작단과 비류연과의 복잡무쌍한 관계를 아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금일(日) 집합장소는 시험 장소인 환마동 앞에 위치한 작은 연무장이었다. 작다고는 하지만 시험 지망자가 모두 모이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비류연이 일행과 함께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전날에 잠을 설치고 일찍 일어난 많은 사람들과 분주히 시험을 준비하는 노사들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긴장 탓 인지 50여 명이 모인 장소가 잡담 소리는커녕 고요함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아직 모여야 할 사람은 훨씬 더 많이 남아 있었다. 이번 환마동 시험은 흑백검조에 소속된 현 천무학관도 108명과 각 명문정파와 무림맹 각 지부에 흩어져 있던 용명쟁쟁한 선배 졸업생 213명을 합쳐 총 321명이 참가했다. 일류 이상의 수준에 이른 고수들이 이만큼이나 한꺼번에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 라 할 수 있었다. 대표로 뽑히기 위해서는 엄청난 경쟁자들을 물리쳐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기량을 쏟아 붓지 않으면 안 되었다.

“노사들 사이에서마저 긴장감이 흐르고 있군.”

남궁상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당연하지. 그 위험성 때문에 18년 동안 봉인되어 있던 관문일세. 3일 전에는 그 빌어먹을 각서와 찝찝한 유언장까지 쓰지 않았나. 이렇게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유언장을 쓰는 경험을 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다들 사고가 터지는 게 겁나겠지, 왜 안 겁나겠나? 아마 저쪽도 필사적일 거야. 그것보다 자네는 두렵지 않 Lt?”

친구이자 경쟁자인 현운이 물었다. 점점 더 도사의 품격과는 거리가 멀어져 가고 있는 현운이었다.

“생각보다는 괜찮네. 약간 긴장이 될 뿐 두려움 따위는 안 생기군.”

그동안 염도에게 혹사당해 오던 게 확실히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저 안에 무엇이 있기에 다들 이리 긴장한단 말인가…….” 내키지는 않지만 직접 몸으로 부딪쳐 알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남궁상이 노사들과 참가자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와 긴장을 감지하고 있을 때 비류연은 다른 관점에서 참가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많군.”

“많지. 이번 참가자는 한 3백여 명쯤 되는 걸로 알고 있네. 철중쟁쟁(鐵中錚錚)의 고수가 3백이라… 쉽지는 않겠군.”

장홍 또한 긴장감을 감출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 많은 인원이 저 안에 한꺼번에 들어간단 말이지?”

“그렇지!”

당연한 걸 뭐 하러 물어보냐는 투였다.

“그렇다면 저 안이 얼마나 넓다는 걸까?”

“꽤 넓겠지.”

별로 도움이 되는 답변은 아니었다.

“그건 나도 알아. 그럼 그 넓은 동굴을 인공적으로 파는 데 얼마나 많은 금전(金錢)이 소모되었을까 잠시 생각해본 것뿐이야.”

“그런 말을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하지는 말게. 누가 보면 착각하잖나.”

장홍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였다.

“천무학관 관주님께서 들어오십니다!”

크게 외치는 소리와 동시에 자리에 착석해 있던 노사들이 모두 일어나 모여 있던 관도들과 함께 들어오는 마진가에게 예를 표했다.

뚜벅뚜벅.

천무학관주 철권 마진가가 걸어 나와 연무장 위에 마련되어 있는 단상에 섰다. 백도의 명예를 짊어질 화산규약지회의 대표를 뽑는 중요한 시험인 만큼 그가 직접 연설을 할 예정인 모양이었다. 그만큼 이 시험의 중요성은 컸다. 마진가가 손짓하자 관도들은 포권을 풀고 노사들은 자리에 다시 착석했다.

마진가가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며 연설을 시작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사람을 휘어잡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었다.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이기기 위한 시험에 도전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다. 본인은 여기 서 있는 여러분이 자랑스럽다. 여러분은 도대체 이 환마동이라 불리는 장소 안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러나 본인은 그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줄 수 없다. 저 안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얻을지는 전적으로 여러분에게 달려있 다. 그러나 이것 한 가지만은 말해 줄 수 있다. 여러분은 아마도 이 안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과 대면하게 될 것이다. 이곳을 지옥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듣는 이에게 무시무시한 두려움을 안겨 주는 말이었다. 마진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모두들 침묵으로 일관한 채 그의 연설을 귀담아 듣고 있었다. 사람 들의 얼굴은 심각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는 입구는 열어 줄 수 있지만 출구를 대신 찾아줄 수는 없다. 출구에서 빛을 찾는 것은 전적으로 너희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 나는 이제 한 가지만을 묻겠다. 너희들 중 두려움에 떠는 자가 있다면 지금 나서라!”

그의 눈은 형형하게 불타오르고 있었고, 그의 목소리는 한껏 고양되어 있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사람들도 그 분위기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아무도 나서 는 이가 없었다.

마진가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지금 여기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나약한 자가 있는가? 있다면 지금 나서라. 이제 너희들이 걸어가야 할 곳은 지옥의 입구이고, 너희들이 열고 들어가야 할 문 은 바로 지옥문이다. 지금 나선다면 시련을 면제해 주겠다. 아무도 없는가?”

쩌렁쩌렁한 그의 목소리가 장내의 공기를 부르르 떨게 만들었다.

“안 돼!”

나직하지만 강인한 목소리!

윤준호는 자신의 팔목을 매처럼 움켜잡고 있는 손의 임자인 비류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발은 지금 무의식중에 바닥에서 살짝 떨어져 있었다. 그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무의식의 중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만일 비류연이 막지 않았다면 윤준호는 앞으로 나섰을지도 몰랐다. 그럼 그는 평생 웃음거리가 되어 사람들의 놀 림을 받으며 살아가야 했을지도 모른다.

비류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움직이지 마! 여기서 한 발자국도! 지금 여기서 한 발짝만 떼도 너는 영원히 겁쟁이 얼간이의 굴레를 쓰고 살아야만 해! 그러고 싶지 않다면, 멍청하고 건방진 사 형제들에게 큰소리치고 싶다면 절대로 움직이지 마! 대지에 뿌리내린 천 년의 거목처럼! 알았어?”

윤준호는 그 서슬 퍼런 비류연의 말과 눈빛에 주눅이 든 채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바닥에서 살짝 들린 자신의 오른발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자! 용기 없는 자는 아무도 없는가?”

마진가가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물었다. 그의 포효가 새벽녘의 차가운 공기를 쩌렁쩌렁 진동시켰다.

“없습니다.”

연무장이 떠나갈 정도로 우레 같은 소리가 지축을 울리며 모두들 합창하듯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진가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그려졌다.

“본인은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본인은 너희들이 어떠한 시련도 꿋꿋이 헤쳐 나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관도들이여! 명심하라! 두려움에 휘말리는 순간 모든 것이 끝장이다. 그것은 너희들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 수도 있고, 때로는 죽음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 각별히 주의하라. 적은 너희 안에 있다. 백도의 기둥들이여! 정파의 수호자여! 이제 발을 앞으로 내딛어 자신에게 다가오는 시련을 이겨내라!”

마진가가 오른손을 앞으로 힘차게 내뻗었다.

“자 그럼 가거라!”

그것을 신호로 환마동 시험, 아니 시련이 시작되었다.

“와아아아아.”

관도들로부터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여기 모인 이들 중 그 누구도 앞으로 일어날 불길한 사고를 예감하고 있는 이는 없었다.

끼이익.

그것이 열리는 소리는 매우 기이하고 흉측하여 듣고 있는 이들의 마음에 불길함을 심어 주었다. 그 소리는 그동안 굳게 닫혀 있던 문이 18년 만에 처음으로 지르는 비명성 같았다. 게다가 문 뒤로 나타난 동굴은 마치 지옥의 아귀(餓鬼)가 입을 벌리고 있는 듯했다.

시험 진행을 맡고 있는 노사 중 한 명이 크게 외쳤다.

“자! 나누어 준 순번대로 차례로 들어가시오!”

아까 나눠줬던 순번표는 들어가는 순서를 정하기 위한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비류연은 자신이 나누어 받은 순번표를 확인했다.

사십사(四十四)번이었다.

“불길하지 않나? 그리 좋은 번호라고 할 수가 없군.”

장홍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한마디 했다.

“무엇이 그리 불길하다는 것이야?”

비류연이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수상학(數相學 : 숫자에 포함된 의미를 일종의 관상처럼 푸는 학문)에 따르면 예로부터 사(四)란 죽음을 상징하는 불길한 숫자라네. 게다가 사십사번이면 그 불 길함은 더욱더 하지. 사십사번은 죽음이 두 번 들어가 있는 숫자라네. 자네가 이 시험을 치를 때 두 번 이상의 죽음의 위험에 직면할지 모른다는 뜻이지. 아니 면…….?

“아니면 뭔가?”

장홍이 말을 끄는 게 답답한지 비류연이 되물었다.

“단지 두 번만으로 끝날지 의심스럽기도 하네. 사십사란 아라비아 숫자로 적으면 이렇게 된다네.”

친절하게도 장홍은 바닥에다가 아라비아 숫자 ’44’를 보란 듯이 써보였다. 이 시대에는 비록 상용화되지는 않았지만 아라비아 숫자의 개념이 이미 들어와 있었다. 잠시 말을 멈춘 장홍은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해석하는 방향에 따라 이것은 죽음이 네 번 자네를 찾아온다는 뜻으로도 풀이할 수 있네. 앞의 4는 죽음의 위기를, 뒤의 4는 횟수를 뜻하는 것이지. 그러나 다음 해석에 비하면 새 발의 피야. 그보다 더 심각한 해석을 들자면 자네에게 심적 부담을 줄까 봐 말하지 않고 있었지만.

비류연이 보기에 장홍은 전혀 자신에게 미안해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즐기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44란 4가 열한 번 더해져 이루어진 숫자이기도 하지. 즉, 죽음이 열한 번 자네에게 사신의 그림자를 드리울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야.”

“숫자를 빌미로 아주 악담을 하는군. 아예 저주를 퍼붓지 그러나? 그러면 더욱 효과적일 텐데? 제웅(지푸라기 인형)을 만들어 거기다 못을 박으면 좀더 효과가 증 대될지도 모르겠군. 머리카락 한 올 빌려줄까?”

비류연이 빈정거리며 한마디 했다.

“그러는 장 형은 몇 번인데?”

“13번일세.”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장홍이 말했다.

“그 숫자는 불길하지 않은 모양이지?”

비비 꼬인 말투로 비류연이 물었다.

“물론이지! 수상학(數相學)에 따르면 13이란 가장 완벽한 수 중 하나지. 자네는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도형이 뭔 줄 아나?”

비류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홍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썰을 풀어놓았다.

“그건 바로 정육면체일세. 그렇다면 가장 완벽한 도형인 정육면체를 이루는 꼭짓점은 모두 몇 개인가?”

“열세 개!”

비류연이 대답했다. 장홍의 입에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바로 그렇다네. 그러니 이렇게 완벽한 수가 어찌 불행의 수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난 행운의 수를 잡은 거고, 자네는 불행의 수를 잡은 거라네.”

“그래서 참으로 좋기도 하겠수.”

“물론 좋지. 자신에게 찾아올 수 있었던 불행이 남에게 돌아가고, 남에게 갈 수 있었던 행운이 나에게 돌아왔는데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건 하늘의 선 행에 대한 모독이라네.”

장홍이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쳇, 운명은 자신이 만들고 개척하는 법! 그런 종이 쪼가리에 적힌 숫자에 나의 운명을 걸기에는 너무 값이 싸지. 어디 두고 보면 알겠지. 누가 저 안에서 무사히 돌 아올 수 있는지 말이야.”

“아! 그렇다고 내가 자네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니 난처하게 곡해하지는 말게나.”

장홍이 여태껏 자신이 신나게 내뱉은 말은 모두 잊어버린 듯 뻔뻔스럽게 말했다. 비류연은 한쪽 입꼬리를 말며 싱긋 웃었다.

“글쎄……. 그건 역시 좀 미심쩍구먼.”

“44번!”

자신의 번호를 부르는 소리에 비류연은 앞으로 나섰다. 드디어 자신이 들어갈 차례였다.

‘두 번의 죽음이 닥칠 수 있다고? 그런 자격도 없는 엉터리 점쟁이 녀석의 말을 굳이 믿을 필요 없지. 사신(死神)이여! 나를 죽일 수 있다면 죽여보시라. 그러나 그 전에 내 손에 죽을 각오를 꼭 하시게나.”

비류연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어떤 저승사자가 감히 자신의 목숨을 취할 수 있는지 그 낯짝이라도 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겨우 그런 운세나 점괘 따위에 좌지우지될 만큼 난 약하지 않아. 진정한 강자는 자신의 운명마저 다스릴 줄 알아야 하는 법.’

비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등에 묵금을 멨다. 그러자 옆에 함께 있던 임성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자네 그런 무거운 짐짝을 들고 들어갈 생각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임성진이 물었다.

“그럼요. 이건 나의 예술혼이 담긴 물건이에요. 함부로 던져놓고 다닐 수야 없지요! 게다가 이게 얼마나 비싼 물건인데 함부로 놔두고 다녀요? 말도 안 되는 이야 기죠.”

뇌금(雷琴) 묵뢰(墨雷)는 사문의 비보(秘寶)였다. 어떤 문파든 그 문파의 비보는 무가지보(無價至寶), 즉 값을 측정 및 책정할 수 없는 초고가의 물건이란 뜻이었 다. 그것을 장기간의 외출이 될지 모르는 이 마당에 놓고 갈 수는 없었다. 고가의 물건을 함부로 다루거나, 아무 곳에나 방치해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전히 자네의 사고방식은 나로서는 이해가 불가능하군 그래. 오히려 걸리적거리기만 할 뿐 쓸모는 없어 보이는 물건을 저 안으로 들고 들어간다니…….”

임성진은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44번!”

다시 한 번 그의 번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먼저 가보죠.”

비류연은 묵금을 메고 유부(幽府)로 향하는 길처럼 보이는 환마동의 깊게 뚫린 동혈을 향해 당당하게 나아갔다.

곧 그의 몸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46번!”

위지천의 차례였다. 위지천은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검고 동그란 환약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는 단약을 보다 슬그머니 품속에 고이 모셔져 있는 은빛 원통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초조함에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계속해서 원통을 만지작거렸다.

그날의 일이 마치 오늘 일처럼 선하게 그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귓가가 앵앵거렸다.

“받게.”

그날 그 장소에서 그 사람은 자신에게 불쑥 뭔가를 내밀었다. 그가 내민 것은 한 알의 환약(藥)이었다.

“이것이 뭐죠?”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이 가시지 않은 위지천이 간신히 자신을 추스르며 말했다.

“호심환(心丸)일세. 글자 그대로 마음을 보호하는 환약으로 환마동 안에서 당분간 견딜 수 있게 특수 제조된 약이지. 직접 경험해 보면 알게 된다네. 그 안에 들 어가면 그 약이 반드시 필요하게 될걸세. 들어가자마자 꼭 먹도록 하게. 그리고 약의 효력은 불과 한 시진이니 그 안에 모든 일을 마무리 짓도록 하게. 잊지 말게! 약 의 효력은 한 시진뿐이야! 복용 후 한 시진이 지나면 약효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큰 낭패를 당할걸세. 그 전에 반드시 일을 끝내야만 하네.”

“이런 게 필요한 곳이란 말입니까? 그 환마동이란 곳이……?”

아무래도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장소인 것 같았다.

“그렇다네, 나도 직접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귀로만 들은 것이지만 틀림이 없다고 하더군. 그곳은 조심한다 해서 무사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될 수 있는 한 많은 정보를 수집해 가는 게 그에게는 유리했다. 그편이 활동의 제약이 훨씬 줄어들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위지천은 필사적이었다.

“마음!”

“네?”

“마음이라고 했네.”

“저어…….”

말을 할 때는 머리하고 허리를 자르지 말아야 신원을 구분할 수 있다. 머리도 다리도 잘려나간 상하 분간이 불가능한 변사체는 사양이었다. “나도 그것밖에는 듣지 못했네. 그렇게만 알고 있게.”

그는 강조하듯 한 번 더 말했다.

“그 약을 들어가자마자 꼭 복용하게! 반드시!”

이제 그 약을 먹어야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