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읊다!
요즘 들어 보이는 비류연의 놀라운 변화는
그도 고민이라는 섬세한 사고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원래 비류연은 고민이란 걸 알지 못했다. 일부러 심각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그는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도 요즘은 고민이 하나 생겼다. 그 것은 의혹이기도 했다.
‘또!’
비류연은 이런 상황이 지금까지 도대체 몇 번째인지 셀 수조차 없다는 사실에 곤혹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고민해 봤지만 뾰족한 해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기야 해답이 있는 고민이 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있겠는가! 고민은 해답을 찾아가는 문제풀이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신적 부산물이라 할 수 있었다. 해답이 생기면 자연히 그 고민도 따라서 해소될 것이다.
일행이 천무학관을 떠난 이후 화산까지 가는 행로에서 나예린은 자꾸만 자신과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그것이 한두 번이면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 겠으나 이미 수십 번은 족히 되는 것 같았다. 고의적인 행동임이 분명했다.
비류연을 고민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왜?’라는 의문이었다. 왠지 자꾸만 나예린은 자신과의 거리감을 형성시키려는 것 같았다. 왜 자신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걸 까? 그녀의 행동은 처음 만났던 그때의 차가운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환마동 안에서의 부드러웠던 그 모습과도 또 틀렸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그로서도 꼭 짚어 말할 수가 없었다.
비류연은 해답을 얻기 위해 우회 작전을 펼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면 돌파를 하자니 주위의 방해와 장애물이 너무 많았다. 환마동(幻魔洞)을 탈출한 이 후 자신을 바라보는 독고령의 눈에 더욱더 경계의 빛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자신을 역귀疫鬼: 병을 옮기는 귀신) 취급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정도 장애에 굴복할 비류연은 아니었다. 어쩌면 약간의 장애가 있는 편이 좀더 연애가 극적일 거라고 편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물론 이 정 도로 다양한 장애가 많은 연애도 세상에서 드물 테지만 말이다.
‘빙백봉 나예린님은 우리 모든 남자들의 우상! 그분이 어느 한 남자의 여인이 된다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 천리거역(天理拒逆)! ’이라고 외치는 남자들이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세상 남자의 반 정도가 적으로 포진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일단 흑도의 남자들과 몇몇 드물게 존재하는 동성 취향의 남 자를 빼고 나온 계산이었다.
꽤나 위험천만하고 다사다난한 연애 환경이라 할 수 있었다.
비류연은 손익을 계산하는 재주는 뛰어났지만, 아름답고 유려한 문장으로 장문의 시를 써서 그 문장과 운율로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은 알지 못했다. 그것은 만능을 자부하는 그로써도 건드릴 수 없으며, 건드리고 싶지도, 또 관여하고 싶지도 않은 영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갑자기 자신에게 냉막해진 마치 찬 바람이 혹한의 겨울 삭풍처럼 부는 나예린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만 명의 적과 싸우는 게 낫지……. 젠장, 정말 못할 짓이로군!”
비류연은 입을 삐죽 내밀며 진심으로 하늘을 원망하며 투덜거렸다. 나예린은 3장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었지만 마음의 거리는 천장도 넘게 떨어진 듯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아마 시기로 따지면 자신이 그녀의 아버지에게 불려가 일대일 회담(?)을 가진 이후가 분명했다.
과연 그녀는 이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까? 비류연은 무척이나 그 사실이 궁금했지만 굳이 알아보지는 않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현명할 것이 분명했고, 정신 건강에 도 득이 될 일임은 두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역시 모르겠다.”
비류연은 가뿐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풀리지 않는, 게다가 준비된 해법도, 해답도, 정론도, 만병통치약도, 공식도 없는 일에 목숨 걸고 답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시간 낭비, 즉 돈 낭비라는 이야기였다.
“궁상아!”
비류연이 조용히 남궁상을 불렀다. 일행은 지금 천무학관이 자리한 남창(南昌)이 위치한 강서성(江西省)과 무당산(武當山)이 자리한 호북성(湖北省)의 경계에 위 치한 구궁산(九宮山)을 넘고 있는 중이었다.
“예, 대사형! ‘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느냐?”
비류연의 갑작스런 질문에 남궁상은 당황하고 말았다. 그쪽은 그로서도 미개척 영역이었던 것이다.
“글쎄요? 역시 아름다운 언어의 선율로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게 최고가 아닐까요?”
“말발 말이냐?”
말발로 누군가에게 밀린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비류연이었다. ‘논리에 뒤지는 자는 완전한 승리를 잡을 수 없다! 고로 말발이 세야 한다!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사부의 가르침이었다. 그 어떤 일이라도 말발에서 밀린다면 승리하기가 힘들다고 사부는 생각했다. 말싸움에서 밀리면 그 싸움의 유리한 고 지를 상대에게 넘겨주는 꼴이 된다. 그렇게 되면 시종일관 불리한 싸움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논리로 상대를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승리라 장담하기 가 힘들다. 그러나 언쟁에서 이기는 사람이 승리자라고 해도 목소리 큰 사람이 언쟁에서 이기는 건 아니다.
물론 세상에는 논리가 안 통하고 주먹이 통하는 놈들이 부지기수다. 그리고 말로 안 될 때, 자신이 말로 불리하다 느낄 때, 인간은 때때로 폭력을 도구로 사용한다.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주먹으로 화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 남궁상이 말하는 분야는 당연히 그런 쪽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비류연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저…, 그게 아니라 시(詩) 같은 거 말입니다.”
“시?”
말꼬리가 길게 하늘 높이 올라갔다. 비류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순간 남궁상의 가슴이 철렁했다.
“너 아무래도 연애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모양이구나!”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바로 얼굴과 돈입니다’ 라고 말했어도 이처럼 기묘한 표정을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류연은 갑자기 남궁상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순진한 놈!
사실 왜 순진하다고 불러야 하는지는 비류연도 몰랐다. 어릴 적에 철화장 고 노대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그도 따라한 것뿐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시에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구나. 그럼 네가 한번 시를 지어봐라!”
비류연이 남궁상에게 명령했다. 불복종은 용납되지 않는 군율에 버금가는 강력한 명령이었다.
“제…, 제가요?”
이건 예상치 못한 사건 전개였다. 남궁상은 순간 당황했다. 물론 배우긴 배웠다. 무림 팔대 세가의 하나인 남궁세가 정도 되면 무공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시(詩), 서(書), 예(藝), 화(畵) 등의 교양에도 신경을 쓰기 때문에 기초는 어릴 적에 땠다. 그러나 시란 것은 언어를 분해, 나열, 조합하여 운과 율을 맞추어야 했기 때문에 조금 배웠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남궁상은 양심에 비추어볼 때 이 시 부문에 있어 좋은 학생이었다고는 결코 말하기 어려웠다.
“그래! 넌 번듯한 정인도 있잖아! 뭘 그렇게 화들짝 놀래?”
“저…, 정인은요…. 아직 정식으로 혼약한 관계도…….”
남궁상이 얼굴을 붉히며 모기만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얼씨구. 너 그러다가 누군가에게 뺏겨도 난 책임 안 진다.”
“그…, 그런 매정한 말씀을…….”
금방 남궁상의 울상이 되었다. 무공은 점점 강해져 감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심함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아름다운 시를 써야 한다며? “
“네…”
남궁상의 대답은 모기 소리만큼 작아져 있었다.
“그러니깐 네가 한번 지어보라구.”
“그…, 그러니깐……. 제가 말이죠?”
남궁상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남궁상의 사부이자 대사형이라는 복잡한 신분의 소유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는 건 아니잖아?”
아무래도 더 이상 도망갈 데는 없는 모양이었다. 잠시 숨을 가다듬은 남궁상이 이내 시를 한 수 읊었다. 그로서는 대단한 용기를 짜낸 일이었다. 그러나 용기만으 로 모든 결과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당신은 나의 태양!
아아, 당신이 없는 세상은
아침이 돌아오지 않는
영원한 밤이어라!”
시상을 떠올리고 감정을 잡기 위해 눈을 감은 채 온갖 자세를 잡으며 남궁상은 시를 읊었다. 그러나 눈을 감고 있었기에 그는 비류연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지 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한참의 시간을 소비하며 시 낭송을 마친 남궁상이 눈을 빼꼼 뜨고 비류연의 눈치를 살폈다. 비류연은 그저 씨익 하고 웃어줬다. 씨익! 그 미소 안에 담긴 불길함을 느꼈지만 남궁상은 덩달아 같이 웃었다.
“너가 한번 해보라고.”
“네? 제…, 제가요? 제가 어떻게 감히 나예린 소저에게……. 저 령매에게 맞아 죽습니다. 그것만은 제발! 대사형! 선처를!”
남궁상은 금세 울상이 되어 울부짖었다. 그는 정말 다급해하고 있었다. 아니, 다급하다기보다는 무엇인가를 엄청나게 두려워하고 있었다.
“쯧쯧, 너의 앞날이 훤하다. 훤해!”
아마 사상 초유의 공처가라 불리울 남궁상의 먼 미래상이 그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또 다른 남궁상의 미래는 상상조차 되지 않 았다.
딱!
“악!’
남궁상이 찔끔하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쯧쯧, 이런 못난 놈! 누가 예린에게 시를 읊으래? 너가 지은 시니 네 정인한테 읊어야지! 왜 남의 걸 넘봐?
비류연은 혀를 차며 주먹을 들어 으르렁 거렸다.
“려…, 령매에게요?”
비류연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남궁상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 있었다.
“왜, 자신 없어? “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얼른 가서 해! 실시!”
비류연의 힘찬 구령에 남궁상은 하는 수 없이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비류연은 관객처럼 묵묵히 남궁상의 허둥지둥을 관찰했다. 남궁상은 발이 천근이 라도 되는 양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저러다 어느 천년에 사랑하는 님에게 도착할 수 있을지 기약조차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저 멀리 서 있는 진령에게로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다가가는 모습이 좀 애처로워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자비를 베풀 마음은 없었다. 애초에 진척이 느린 연애 미숙아 궁상, 자신의 탓이었다.
마침내 남궁상과 진령이 조우했다. 그가 뭐라고 말을 건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진령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승낙의 표시인 모양이다.
드디어 결전의 순간!
남궁상은 드디어 자신이 지은 시라고 하기에는 차마 부끄러운 낱말의 조합을 혀를 이용해 힘껏 내던졌다. 그의 심리적 당황스러움이 멀리서도 역력히 느껴졌다.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눈을 감고 시를 감상하던 진령의 얼굴이 갑자기 차갑게 굳어졌다. 이미 은은했던 미소는 그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눈썹 사이가 한번 접혔다.
퍽!
순간 진령의 팔꿈치가 남궁상의 복부를 눈부신 속도로 가격했다. 그 속도는 불견불흔(不見不痕)할 정도로 빨라 주위 사람들은 남궁상이 왜 갑자기 배를 움켜잡고 허리를 반으로 접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저런!”
비류연이 탄성을 토했다.
“저런 때는 머리통을 쥐어박았어야지.”
비류연은 나름대로 두근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격을 기다렸지만 아쉽게도 이격은 없었다. 아직 정나미는 탈착되지 않고 아직까지 붙어있는 모양이었다. 이때 그 의 머릿속에 떠오른 말은 단 하나뿐이었다.
‘인과응보(因果應報)!’
이제 더 이상 비류연의 관심은 남궁상과 진령에게 쏠려 있지 않았다. 그는 다시 자신만의 정신 세계로 침잠해 들어갔다.
“쯧쯧쯧, 궁상아, 궁상아! 그런 가식적인 거짓된 언어보다는 차라리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가 더 효과적이겠다.”
묘한 데서 핵심을 찌르는 비류연이었다. 사실 남궁상의 새우접기는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 비류연은 이래봬도 금을 배운 몸이었다. 음율과 시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어 제대로 격식에 맞게 짓지는 못해도 듣고 느낄 수는 있었다.
그런 어설픈 말 몇 마디로 여성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여성을 바보 취급 하는 행위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 일에 도전하는 남자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간혹 다수의 성공 사례가 보고되고 있는 것 같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의 시선이 다시 나예린에게로 향했다. 순간 우연의 일치인지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또다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예린의 고개가 다른 쪽으로 급하 게 휙 돌아갔다.
“이게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외면이라는 것인가? 흐흠…….?
왜 자신과 마주칠 때마다 그녀는 저토록 당황해하는 걸까? 비류연은 조금 골치가 아파왔다. 그와 그녀 사이는 그날 이후 일정 거리 이상 좁혀지지 않았다. 자꾸만 그녀가 자신을 피하는 게 눈에 확연했다.
왜? 지금 비류연이 궁금한 건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이유란 물건이 오리무중인 채 행방이 묘연했다. 그가 아는 거라고는 그녀의 행동이 갑작스럽고 돌연하고 느닷없다는 것뿐이었다.
‘하긴, 뭐 언제는 좋았었나…….’
이 정도로 낙담하면 그 사람은 비류연이 아니었다.
“령매……!!”
저 멀리서 복부를 가격당한 궁상이 배를 움켜잡은 채 삐져서 앞으로 빠르게 걸어가는 진령의 뒤를 열심히 쫓고 있었다. 그러나 남궁상의 절규에 가까운 부름에도 진령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빨라지기만 할 뿐, 그녀는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