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1권 7화 – 비류연의 옛날이야기

비뢰도 11권 7화 – 비류연의 옛날이야기

비류연의 옛날이야기

•청혼(婚)

비류연을 포함한 천무학관 대표단 일행은

구궁산(九宮山)의 유일하게 나 있는 산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누구든 구궁산을 넘으려면 이 길을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다른 길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산길을 걷고 있으니 그들은 당연히 산을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내려올 수도 있지만 점차 위쪽의 구름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으로 보아 등정(登頂)하고 있 음이 확실했다.

산의 특성상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길은 험해지고 녹음은 더욱더 푸르게 우거지고 있었다. 거의 십 장에 가까운 나무들이 길의 사방을 에워쌌다.

보통 이런 외길 험한 곳에는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해 통칭 ‘영업’을 하는 자들이 항상 있게 마련이다. 이런 천혜의 지리적 요건을 그냥 방치해 놔둔다는 것은 그들 로서는 범죄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비류연은 손톱에 이물질이라도 들어갔는지 손톱 사이를 일일이 다듬고 있었다. 무척이나 한가롭고 태평스러워 보이는 모습이었 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나직한 목소리로 궁상을 불렀다.

“궁상! “

“예! 대사형!

화들짝 놀라 대답하면서도 뚜렷한 이유는 없지만 남궁상은 이럴 때가 제일 불안했다.

“내가 혹시 또 뭔가 실수한 거 아닌가?’라고 속으로 스스로 자진 반문해 보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자신은 일단 결백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왠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의 심장을 옥죄어왔다. 이제 이것도 병이었다.

“심심하지?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

“이, 이야기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져도 이토록 의아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궁상은 비류연의 뜻밖의 말에 당황하고 말았다. 비류연이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 덕였다.

“그래, 아주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굉장한 교훈이 되기도 하지. 아마 들어두면 두고두고 도움이 될 거야.”

애초에 남궁상의 거부권 따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비류연은 자신의 손톱 다듬기에 전념하며 이야기 하나를 시작했다.

“아주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 굉장히 말을 안 듣는 열여섯 명의 개구쟁이 학생들이 어떤 선생님을 찾아왔다. 그런데 개구쟁이들이라서 그런지, 아니 면 철이 없어서 그런지 그들 열여섯 명은 선생님의 말을 잘 듣는 학생들이 아니었지. 게다가 가진 거라고는 쥐뿔도 없으면서 실력이라도 있었으면 선생님이 그렇 게까지 학생들을 한심스럽게 보지는 않았을 거야 자신들이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양 뻐기기까지 했대. 참 한심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 고 선생님은 그런 학생들이 귀여웠대. 그래서 내 한몸 희생해서라도 학생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굳게 결심했지.”

“네에…….”

조용히 듣고 있던 남궁상은 고개를 갸웃거려야만 했다. 왠지 어디선가 많이 듣던 이야기 같았다. 그리고 계속 듣고 있으려니 왠지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았던 것이 다. 그런 남궁상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비류연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마치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할아버지처럼.

“그러나 이 열여섯 명의 학생들은 애석하게도 아주 반항스러웠대. 선생님의 가르침을 묵묵히 받아들일 만큼 인간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던 거지. 스승의 하해와 같 은 마음도 몰라주고, 이 어리석은 학생들은 마침내 반기를 들고야 말았지. 게다가 아주 조직적인 반항까지 시도했다고 하더군. 쯧쯧, 배움이 힘든 게 당연한 거 아니 냐?”

“무, 물론입니다.”

괴이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남궁상이 대답했다. 그는 비류연이 뿜어내는 무형의 압박과 그로 인한 거북감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는 인내심이 참으로 부족했지. 고난과 시련을 넘어 강해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거야. 한마디로 기본이 안 돼 있었던 거지. 그래도 훌륭한 이 선생님은 학생들을 포기하지 않았지. 그의 눈에는 학생들이 쥐꼬리만큼이지만 아주 쬐끔 아직은 가망성이 있다는 걸 알았거든. 참 훌륭하신 분이야, 그치? 선생 님은 학생들이 가장 짧은 시간 안에 강해지기를 바랬어. 자신의 학생이 약하다는 사실을 그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거든. 그래서 최단의 방법으로 강해지는 길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주었지. 그리고 성심성의껏 지도했어. 그러나 학생들은 여전히 바보 같았어. 이런 선생님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알짜배기는 안 가르쳐주고 허드렛일만 시킨다고 선생님에게 쌍수를 들고 반항했다. 참 몹쓸 놈들이야. 어라?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러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소태 씹은 표정으로 식은땀을 흘리던 남궁상은 당황해서 결국 말을 더듬고야 말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 것 같아?”

톡톡!

비류연은 여전히 한가롭게 손톱을 다듬기에 열중하며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학생들의 운명 말이야!

“자,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자신이 혹시 그 이야기의 결말을 아주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나 그는 곧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중단하고 말았다. 이 이상 더 깊 이 파고들었다가는 엄청나게 비참한 마음이 들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선생님은 ‘매가 만병통치약이다’라는 케케묵은 옛 격언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었대. 선생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그래서 선생님은 그것으로 위 엄을 보일 수밖에 없었어. 본질적인 인간 개조 없이는 미래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 그 선생님은 제자의 앞날을 망치는 스승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야.” 비류연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남궁상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다른 방법도 있지 않았을까요? 위엄을 보이는 방법 중에는 꼭 매만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충분히 다른 방법이 있었을 텐데요?” 비류연은 잠시 못마땅하다는듯 남궁상을 바라보다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기엔 너무나 시간이 촉박했지. 게다가 학생들이 감히 천인공노하게도 역적모의의 반란 기운까지 조성하니 선생님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따로 없었던 거야. 그들은 자신들이 배우고 있으면서도 배운다는 걸 못 느꼈다. 자신들이 엄청나게 강해지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 채지 못했지. 그러니 그런 실수를 한 것이고……. 알 겠어?”

“네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남궁상의 얼굴은 피가 땅으로 모조리 빨려 들어가기라도 한 듯 창백하게 탈색되어 있었다.

‘이, 이야기는…….?’

갑자기 아미산에서의 그 지옥 같던 생활이 남궁상의 뇌리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뜨거웠던 여름, 지옥 같은 열기, 자욱한 먼지, 흥건한 땀, 그리고……. 그의 상념을 깨뜨리며 비류연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선생님은 뭔가 방법을 생각해야 했지. 이대로 불만의 화재가 계속 번지면 나중에 진압하기가 곤란할 거란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거든. 선생님의 여리디여린 마음은 더 이상 제자들이 나쁜 길로 빠져드는 참혹한 꼴을 볼 수가 없었지……..

이야기를 들으며 천변만화하는 남궁상의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비류연의 말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여리디 여린 마음’이란 대목이 나왔을 때 그가 취한 형 이상학적인 안면 근육 운동은 정말 가관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본보기가 필요했지. 본보기 말이야! 때마침 그 본보기는 평소에 지은 죄가 아주 많았지. 그 아이는 평소에도 입 놀리기를 멈추면 무슨 큰 죄를 짓는 거라고 생각하는 아이였대. 물론 그 아이의 입에서는 쉴새없이 선생님에 대한 불평불만이 터져 나왔다고 하더군. 주위의 동조에 고무된 그 아이는 기어코 하늘 같은 스승 앞에서 불평불만을 털어놓았대. 딱 걸린 거지! 그 아이는 대중 선도의 제물이 되고 말았지. 선생님은 모두의 불평불만과 반항심이 새하얀 재가 되어 사라 질 때까지 그 아이를 팼대. 선생님으로서는 물론 가슴이 아팠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거야. 그의 병아리들은 진정한 공포란 걸 그때까지 모르고 살았었거든. 선 생님은 제자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필요성이 있었던 거야. 그 학생은 자신의 희생으로 나머지 열다섯 명의 친구들이 계몽 선도 되었으니 아마 후회는 없었을 거 야. 그 일이 있은 후 그 열여섯 명의 아이들은 참으로 착한 학생들이 되었다고 하더군. 그래서 자애로운 선생님도 가르치기가 무척이나 편했다. 학생은 열심히 배우 고 선생님은 열심히 가르치는 아름다운 면학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지. 어때, 내 이야기가 재미있었나?”

“무, 물론입니다.”

그러나 대답과는 다르게 남궁상의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절어 있었다. 그의 얼굴은 백지로 도배라도 한 것처럼 창백했다. 아마 남궁상은 오늘 들은 이야 기를 평생 잊지 못할 것만 같았다. 이런 공포스런 괴담을 어떻게 기억 속에서 없앨 수 있겠는가!

“아참, 이 이야기에는 짧은 속편이 하나 더 있어! 일종의 외전격인 이야기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비류연은 손뼉을 쳤다.

“그, 그게 뭐죠?”

왜 이리도 마음이 불안한 것일까? 남궁상은 심장이 으깨질 듯한 느낌이었다.

“그 선생님에게는 열여섯 학생들보다 먼저 거둬들인 제자가 한 명 있었대. 즉 그 열여섯 명의 학생들에게는 대사형이 되는 그런 존재였지.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 고 하더군.”

남궁상의 얼굴이 다시 한 번 핼쑥하게 변했지만 비류연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느 날 하루, 문득 대사형은 자신의 사제들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대. 그래서 길을 떠나기로 결심했지.”

‘결심하지 않아도 됐었는데…….?

남궁상은 자신의 바람을 생각만 했지 결코 입 밖으로 발설하는 우둔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동안 비류연에게 착실하게 훈련을 받아온 결과의 산물이었다. “선생님은 사제들을 찾아 떠나는 대사형을 만나 간곡히 당부했대. 만약 너의 사제들이 말을 안 듣고 반항적이라면 옛날에 사부가 행한 대로 그대로 행하라고 말이 야.”

순간적으로 남궁상은 온몸에 오한이 든 듯 서늘한 공포가 전신을 휘감아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그렇군요.”

“어라? 너 감기라도 걸렸냐? 왜 그렇게 몸을 떨어?’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계속하십시오!”

대답하는 남궁상의 이빨이 따닥따닥 떨리며 계속 부딪쳤다.

“그래? 그리고 선생님의 예언은 안타깝게도 들어맞고 말았지. 대사형과 사제들이 상봉(相逢)하는 감격스런 장면에서 사제들은 처음 만난 대사형을 공경할 줄 몰 랐던 거야. 기껏 몇 년 먼저 태어난 것 가지고 유세를 떤 거지. 이 세계에서는 사형이 하늘이라는 사실을 인지 못 했던 거야. 그때 대사형은 강호에 만연한 존경심의 부재에 대해 깊은 회의(懷疑)를 느끼고 무척이나 가슴이 아팠을 거야.”

남궁상은 안타까운 마음에 부르짖듯 입을 열었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분명 그 사제들은 대사형을 엄청나게 공경했을 겁니다. 설마 이 세상에 하늘 같은 대사형을 무시하는 그런 개망나니 사제들이 있겠습 니까? 대사형이 잠시 착각한 것일 겁니다. 아마 약간의 착오가 있었던 것이겠죠.”

“그럴까?”

난 아무것도 모르니 네가 대신 대답해 보라는 어조였다.

“물론입죠.”

“정말로?

“그럼요.”

확고부동한 의지를 담은 고개 끄덕임이 행해졌다. 마치 여기서 밀리면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은 절박함이 그 목소리에는 잔뜩 묻어 있었다.

“흐흠…….”

확고한 남궁상의 대답에도 아직 비류연의 얼굴에는 미심쩍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마 그 사제들은 분명 대사형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품었을 겁니다.

남궁상은 다시 한 번 강력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밀고 나갔다.

“그런가? 뭐 그렇다면 일단 그렇다고 해두지.”

아직 미심쩍은 부분이 남아 있긴 하지만 덮어주겠다는 뜻이었다. 남궁상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사제들은 너무 감격스러웠던 나머지 당황했던 것이겠죠. 영구히 그렇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그럼 일단 내 착각, 아니 그 대사형의 착각이라고 해두지.”

그제야 남궁상은 오늘 밤 두 다리 쭈욱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그래서 그 대사형도 스승이 가르쳐준 대로 했대. 그런데 신기하게도 스승의 가르침은 정말 잘 들어맞았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는 다시 예전에 스승이 그 랬던 것처럼 편안해질 수 있었대. 그 후 대사형은 사제들이 참 말을 잘 들어서 행복했다고 하더군.”

남궁상은 사형 집행장에서 사면이라도 받은 죄수의 심정과도 같은 안도감을 느끼며 열심히 삶을 위한 입 놀리기를 계속했다.

“그것 참 다행이군요. 사제들이 존경하는 대사형의 심기를 더 이상 어지럽히지 않아도 되었으니까요.”

“물론이지. 그건 대사형이 아니라 사제들한테 더없는 행운이었지.”

톡톡!

비류연은 여전히 남궁상을 쳐다보지도 않고 손톱만 열심히 다듬고 있었다. 지금 그에게 있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의 손톱을 다듬는 일인 모양이었다.

남궁상은 잠시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 이유가 뭔지 알아?”

무심한 어조로 비류연이 물었다.

“자, 잘 모르겠습니다. 하교해 주십시오.”

잘은 모르겠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등에 소름이 돋고 있었다.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었다.

“후후…, 그건 말이야. 거기서 사제들이 더 이상 기어올랐으면 어떤 참혹한 일이 벌어졌을지 대사형 자신도 보장할 수 없었거든. 그래서 그들이 행운이라는 거 야.”

툭!

남궁상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그의 볼을 타고 턱을 지나 땅에 떨어졌다.

툭툭툭!

이윽고 그의 이마에 맺혀 있던 이슬 같은 땀방울이 비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그의 등도 온통 땀에 절어 있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전하고자 하는 교훈을 알겠느냐?”

“물론입니다. 그러니깐 하늘 같은 사부님과 대사형을 극진히 잘 모시라는….”

딱!

그 순간 남궁상의 머리통 위에 알밤이 작렬했다. 비류연은 딱하다는 시선으로 남궁상을 쳐다보았다.

“넌 언제부터 그렇게 둔해졌냐?”

“네?”

남궁상은 억울할 뿐이었다.

“물론 네 말도 맞지만 또 다른 교훈이 있지. 그걸 놓치면 안 돼. 특히나 이런 시기에는 더욱더!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하나뿐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지 마, 단순하 게! 넌 이런 상황을 보고도 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을 모르겠냐?”

비류연이 열심히 다듬어놓은 손가락을 들어 주위를 가리켰다. 그들 일행 주위에는 아까부터 우락부락하게 생긴 장한들이 두 겹으로 인(人)의 장벽을 쌓은 채 그들 을 포위하고 있었다. 남궁상은 고개를 돌려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그의 대사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겠냐?

남궁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움직임도 미리 알아채지 못하다니…. 너무 방심했다.”

미리 매복해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전문적인 은신법을 배우지 않은 이상 기척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자신으로부터 십 장 안에 그들이 들어오기 전까 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의 미숙함에 남궁상은 부끄러웠다.

두 겹으로 둘러쳐진 인의 장막 중 대표단 앞쪽이 좌우로 갈라지며 한 명의 중년인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대다수의 험악한 인상의 장한들과는 반대로 지극히 평범한 얼굴의 중년 사내였다. 그러나 험악한 장한들 사이에 있으니 오히려 그의 평범함이 비범하게 보였다. 게다가 지위도 결코 낮지 않은 듯하지 않은가.

“뭐하는 놈이시오? “

대표단 인솔자 중 한 명인 고약한 노사가 나서서 거칠게 물었다. 그러자 중년인은 정중히 포권지례를 취하며 인사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의 소속이 뒤바뀐 듯한 모 습이었다.

“허허허, 안녕하십니까. 저는 녹림칠십이채 소속의 자그마한 산채 하나에서 부채주 직을 미력하나마 수행하고 있는 이송이라고 합니다. 오늘 이렇게 녹음이 우거 진 화창한 날에 여러분들을 만나뵙게 되어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아! 그렇소이까?”

고약한은 엉겁결에 마주 인사하고야 말았다. 산적 치고는 너무나 정중한 어조였다. 과연 산적이 맞는지 직업이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 그러세요. 그렇다면 굳이 수고하실 것 없이 저희들이 뭘 드리고 가면 되죠?’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녹림칠십이채’라는 이름에 대표단 일행 중 임성진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지만 그것을 눈치 채거나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용건이 뭐요?”

고약한이 짧고 거칠게 물었다.

“아! 간단합니다. 저희 산채를 맡고 계시는 분께서 갑자기 나이에 걸맞지 않은 주책없는 짓을 하려고 하셔서요. 죄송하지만 가급적 그 일에 협조해 주셨으면 하는 게 제 바램입니다. 저도 별로 이런 일을 하고 싶지 않은데 지위가 깡패라서요. 참, 나잇값도 못 하고 민망스럽게시리…, 쯧쯧!

이송은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때였다.

“야, 임마! 먹물! 누가 주책이라는 거야? 네가 나 늙어가는 데 보태준 거라도 있냐? ”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사람들을 헤치고 나온 이를 보며 대표단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한 듯했다. ‘먹물’은 아무래도 자신을 이송이라 소개한 사람의 별명인 모 양이었다. 물론 모든 사람의 생각이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염도는 그의 별명이 ‘주둥아리’, 또는 ‘조둥아리’가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그의 예측은 빗나가고 말았다. “그래! 저 정도는 돼야지!’

철침처럼 뻣뻣하게 난 검은 수염, 오른쪽 눈가를 가로지르는 굵은 상처, 부리부리한 두 눈, 송충이같이 빽빽한 눈썹, 그리고 널찍한 등짝에 매단 흉악하게 생긴 검 정색 도끼.

어느 모로 보나 매우 정상적으로 생긴 산 도적이었다. 전혀 산적답지 않은 말끔한 부채주와는 지극히 대조되는 인상의 인물이었다. 때문에 그자는 지극히 산적스 러웠다.

“당신은 또 누구요?”

늑기한의 질문은 사실 필요 없는 질문이었다. 저렇게 험악하게 생긴 얼굴에 부채주보다 위인 인물은 딱 한 명밖에 없는 것이다. 물어볼 필요도 없이 그가 바로 이 산적 패의 두목이었다.

“그럼 아까 듣지 못한 용건이나 마저 들읍시다.”

늑기한을 포함한 이들 대표단 일행은 산적 두목, 그들 표현으로는 채주에 해당하는 자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이송에게 미처 용건을 마저 듣지 못했던 것이다. 갑자

기 산적 두목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허걱! 저거 지금 수줍어하는 건가? 그…, 그런 지독한 짓을…….’

신뢰할 수 없는 끔찍한 생각이 잠시 사람들의 뇌리를 스쳤다. 그는 얼굴을 붉힌 채 다시 팔꿈치로 재촉하듯 부채주 이송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만둬어어어!’

순간적으로 밀려드는 역겨움의 파도에 익사할 뻔한 사람들 모두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속으로 꽥꽥 비명을 질러댔다. 주위 산적들의 얼굴을 쭈욱 둘러보니 핼쑥 한 것이 그들도 결코 속이 편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우두머리의 저런 가당치 않은 만행을 목도하고 나니 얼마나 부끄러울까?’

대표단 일행들은 갑자기 산적들에 대한 연민이 가득 밀려왔다. 이미 그자의 괴기스런 행동은 범죄를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때문에 더욱더 그들의 용건을 듣 기가 두려웠다.

“뭐, 뭐라고?”

염도가 입을 쩌억 벌렸다. 눈알이 금방이라도 떼구르르 굴러 떨어질 듯 부릅떠진 그의 두 눈은 불신의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옆에 서 있는 노학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야! 노학아! 지금 내 귀가 잘못됐냐?”

노학의 표정도 만만치 않았다. 그의 표정은 지금 청각에 이상이 있는 사람이 그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선풍검룡(旋風劍龍) 위지천은 두 눈에 서 불을 뿜으며 길길이 날뛰었고, 여자 관도들은 모두들 벌레라도 본 듯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여인들의 행복한 꿈 중 하나가 불한당에게 침범당 한 데 대해 분노했다.

“지, 지…, 지금 저기 저 아이를 댁의 채주 아내로 달라는 그 말이오?”

반문하는 고약한의 손가락 끝은 눈에 보일 정도로 확연히 떨리고 있었다. 평소 냉혹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떨림이 황당함 때문 인지 아니면 분노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부끄럽지만 귀하의 말에 단 한 점의 틀림도 없소이다.”

대답하는 부채주 이송의 얼굴은 부끄러움과 민망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도 이 요구가 얼마나 민망하고 주책없는 것인지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최소한 그는 아 직 양심이 남아 있는 듯했다. 산적 치고는 된 사람이었다. 이송은 살짝 눈을 들어 고약한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허허, 내 오십 평생을 살았지만 저토록 신비한 아름다움은 처음이로구나. 나의 이 고목처럼 말라버린 심장까지 뛰게 만들 정도이니……. 채주가 저런 주책 맞은 요구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로구나.”

하지만 채주의 요구는 저 아름다움에 대한 모독처럼 느껴졌다. 늑기한이 가리킨 곳에는 초설처럼 새하얀 백의를 걸친, 이 세상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미모의 소유자, 빙백봉(鳳) 나예린이 서 있었다. 그녀는 이 황당한 사태 앞에서도 결코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나예린을 대신해 그녀의 사저인 독안봉 독고령이 전신에서 분노와 살기를 동시에 분출해 내고 있었다. 지금 당장 검을 뽑아 저 정신병자를 두 동강 내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다는 기세였다.

“당신 미쳤소?”

고약한이 지금 이 상황을 단 한마디로 단순 명쾌하게 요약했다. 이송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휴우, 저도 차라리 그러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러나 현실이 이런 걸 어쩌겠습니까? 저도 채주에게 광증(狂)이 생겼다고 의심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윗사람 의 명령을 아랫사람의 도리로 거역할 수는 없군요.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뭐야? 미치긴 누가 미쳐? 난 정상이야, 정상! 말짱하다고!”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채주가 발끈해서 외쳤다.

“보시는 바와 같이 정상이랍니다.”

어깨를 으쓱하며 이송이 말했다. 그의 태도는 풀이하자면, 내가 보기엔 확실히 미친 것 같지만 본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니 어쩔 수 없이 그 상황을 그대로 말해 주 었다, 라는 정도였다.

“불가(不可)!”

낮지만 전체를 사로잡을 만한 힘이 담긴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비류연이었다.

“네놈은 누구냐?”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채주 임개가 물었다. 자신의 백년지대사에 느닷없이 끼어든 불청객이 그는 무척이나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정신병자에게 가르쳐줄 이름 따윈 가지고 있지 않군요.”

냉소적인 어조로 비류연이 대답했다. 남의 물건을 함부로 달라는 데 그가 어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뭐라고? 이런 건방진 놈! 어르신들 이야기하는데 꼬마 놈은 저쪽 구석에 가서 찌그러져 있거라!”

비류연이 웃으며 화낼 때가 가장 무섭다는 것을 모르는 임개는 서슴없이 폭언을 퍼부었다. 비류연의 입가에 그린 듯한 미소가 걸렸다. 그 순간 주작단과 염도와 빙

검이 움찔하는 반응을 보였다. 웬 극악무도한 미친놈이 기름 창고 옆에서 겁도 없이 불장난을 하니 그 사정거리 안에 포함되어 있던 그들 또한 불똥이 튈까 봐 걱정 이 되었던 것이다.

“후후, 광증만 있는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눈까지 멀었군요. 겉보기엔 아직 정정한 것 같은데 정말 안됐네요.”

“이런 싸가지 없는 놈! 어린놈이 듣고 있자 하니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아직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 같은 애송이가 어디서 함부로 지껄이느냐. 아직 꼬마라 상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본좌가 친히 네 녀석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마.”

주작단과 염도는 한 시라도 빨리 입 거친 저 산 도적의 주둥아리를 틀어막고 싶었다. 이러다가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오는 게 그들은 두려웠다.

“이번 여행은 생각 외로 흥미가 진진한 것 같군. 좋은 일이야! 쿡쿡쿡!”

비류연의 쿡쿡거리는 조소를 본 주작단원들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컥! 화났어! 화났어!’

“어떻게 해? 어떻게 해?

‘난 몰라! 난 몰라!’,

그들은 비류연의 조소 한 번에 집단 혼란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한 시라도 빨리 이 상황을 타개하여 저 입가에 서린 위험천만하고 공포스럽기까지 한 조소를 멈추 게 하는 것이 그들의 지상 목표가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공포를 거둘 길이 없었다.

“뭐하냐? 넌 입만 살았냐? 빨리 덤벼봐!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임개가 외쳤다.

“당신 같은 하찮은 조무래기에게 내 손을 더럽히고 싶지는 않군요. 여기 이 사람과 이 사람의 친구들이 당신들을 상대할 겁니다.”

비류연이 지명한 사람은 바로 남궁상이었다.

[대…, 대사형!]

혹시나 대사형이란 소리를 다른 사람이 들을까 봐 전음으로 남궁상이 당황해 불렀다.

[왜?]

왜 부르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비류연이 반문했다. 남궁상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궁상아!]

은근한 목소리로 비류연이 남궁상을 불렀다.

[예, 대사형!]

[내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더 이상 구차해져야 되겠니? 이런 사소한 일에까지 내가 나서야 한다는 것이냐?]

비류연의 은근한 어조에 남궁상은 흠칫했다. 대사형이 뭔가에 불만이 있을 때 저런 어투가 된다는 것을 그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여기서 더 이상 행동이 늦 다가는 나중에 경을 치는 수가 있었다.

[아닙니다. 저희들 선에서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식전 운동으로는 안성맞춤일 것 같구나.]

[그…, 그렇군요.]

땀이 삐질 흘러나왔다.

[궁상아! 내가 아까 한 말 기억하지? 교훈은 현실에 반영하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안됐지만 이 세상에는 본보기란 게 가끔 필요할 때가 있단다.]

남궁상은 본보기라는 말에 기겁을 하며 황급히 대답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심려 놓으십시오, 대사형!]

[너의 눈치가 이제는 좀 많이 빨라졌구나. 이제는 어디 가서 눈치 없다고 얻어터지는 일은 없을 것 같아 안심이다.]

[다 대사형 덕분이죠.]

남궁상이 불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그에게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단 한 명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할 사람으로 비류연 이 외에 다른 어느 누구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럼 어여 가봐!

남궁상에게는 거부권이 없었다.

비류연과의 은밀한 대화를 마친 후 남궁상은 우선 염도에게 걸어갔다. 이들과 싸우려면 먼저 인솔자인 염도의 허락을 득해야 하는 것이다. 천무학관 대표단씩이나 되어서 천무학관 최고 미녀를 산적들에게 통행세로 바치고 지나간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염도는 별로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고개 를 끄덕였다.

“알아서 손 좀 봐줘라! 그리고… 나 배고프다.”

염도의 주문에 아무래도 조금 처리 시간을 앞당겨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염도의 허락을 득한 다음 또다시 빙검에게 걸어갔다. 예의상 염도 한 명에게만 허락을 득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거절차 한번 되게 복잡하군.’

비류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남궁상이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는 동안 우리의 산적들은 두 손 놓고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만나놓 고도 이렇게 태평한 놈들은 처음이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임개의 목덜미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무척이나 기분이 더러웠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야 먹물! 저게 뭔 지랄이냐?”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로 임개가 물었다. 먹물은 그의 보좌이자 산채 부채주인 군자도(君子盜 : 정말 턱도 없는 별호다. 도둑놈이 무슨 군자를 찾는단 말인가) 이송 의 별명이었다.

“글쎄요? 뭔가 형식상의 절차를 밟는 수순인 것 같은데요?’

녹림도답지 않게 먹물깨나 먹은 부채주 이송이었다. 괜히 유식한 척하는 그가 임개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쉽게 말할 수 있는 걸 괜히 어렵게 말할 필요까지 는 없는 것 아닌가! 가끔 자신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쓸 때나 그리고 그때마다 아니 그런 것도 모르십니까?’라고 그를 핀잔줄 때면 그는 매번 이송의 모가지를 비 틀어 두 번 다시 입도 뻥긋 못 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이곤 했다.

“나같이 자비로운 두목을 만나다니 넌 운 좋은 줄 알아라!”

그러나 그가 없으면 행정을 맡을 사람이 없어 산채의 업무가 전면적으로 마비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가 거느린 흑랑채는 여타 다른 산채와는 규모가 틀린 곳이라 꼭 행정 업무를 보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부두목 군자도 이송이 여태껏 입을 놀릴 수 있었던 것은 임개의 넘치는 자비심보다는 이런 행정상의 난 점이 더 큰 공을 차지하고 있지 않나 여겨진다.

흑랑채의 오백 녹림도들은 남궁상이 염도를 지나 빙검을 거쳐 고약한을 들려 늑기한에 이를 때까지 하릴없이 지루한 기다림과 싸워야 했다.

“하암…, 끝났냐? ”

일행에서 떨어져 나와 녹림도와 대표단 중간에 선 남궁상에게 임개가 하품을 하며 물었다. 남궁상 뒤로는 열다섯 명의 주작단원들이 횡대로 늘어서 있었다. “끝났소.”

남궁상이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까지 비류연 앞에서 당황하던 모습은 씻은 듯 사라지고 지금은 한 자루의 예리한 검 같은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어쭈!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거 뭔가 잘못 건드린 거 아냐? ’

횡으로 늘어선 열다섯 명 안에 포함된 여섯 명의 여인들이 모두가 다 한결같이 미인들이라는 점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지만 자신들을 코앞에 두고도 전혀 동요하 지 않는 그들의 모습은 그의 마음에 커다란 불안감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일단 영업을 시작한 이상 중간에 물러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아차! 영업이 아니라 청혼(請婚)이었군! 버릇이란 게 무섭다더니……. 그건 그렇고, 이놈들은 왜 이리 태연자약한 거야?’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긴장하거나 당황하는 년놈이 하나도 없었다. 이 일로 인해 오늘 그의 자존심은 크나큰 상처를 입고야 말았다. 벌써 대표단 중 몇 명은 자리를 깔고 삼삼오오 둘러앉아 한담을 나누며 관전 준비에 들어가 있었다. 남궁상이 공언한 대로 이번 일에 나선 사람은 주작단원뿐이었다.

남궁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선 우리 일행의 앞길을 가로막은 댁들의 무지와 무모함과 용기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오. 이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오.”

“뭬이야? 이런 쳐죽일 놈들! ”

남궁상의 정중한 인사에 임개는 금방 발끈하고 말았다. 그는 원래 인내심하고는 전생에서부터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두목님, 초반부터 적의 격장지계(擊將之計)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자중하십시오.”

부두목 이송이 작은 목소리로 충고했다.

“뭐, 뭐? 벽장이…, 뭐 어쨌다고? “

“에휴, 그냥 상대의 시비에 말려 화부터 내지 마시라구요.”

하는 수 없이 이송은 쉬운 말로 풀어주었다. 그러나 임개는 은혜를 곧 원수로 갚고야 만다.

“너 금방 비웃었지?”

“네? 무슨 말씀이시죠? “

이송은 어깨를 으슥하며 시치미를 뚝 땠다.

“야! 이 망할 놈아! 쉬운 말 놔두고 왜 어려운 말 써? “

그의 머릿속엔 고마움을 감지하는 기관이 결여되어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두목 임개의 교양을 높이려는 이송의 노력은 매번 수포로 돌아가고 마는 모양이었다. “일단 통성명(通姓名)부터 하는 게 순리인 것 같소만?”

남궁상은 두목과 부두목의 분열이나 자중지란이 꽤나 흥미 있기는 했지만 배고프다고 재촉하는 사람이 있어 빨리 일을 진행해 가기로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류 연의 심기가 몹시 불편하다는 것이다. 빨리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어쩌면 그 불똥이 자신들에게 튈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도 이제 이런 일에 초보자가 아니었다.

“저런, 아직까지 정식으로 소개한다는 것을 잊었구려. 본인은 이 산의 주인인 흑랑채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부채주 이송이라 하오. 그리고 이분은 우리 흑 랑채의 채주를 맡고 계신 분이오.”

소개를 받은 임개가 거만한 걸음으로 앞으로 나섰다.

“내가 바로 이 산의 주인이다. 얌전히 산을 내려가고 싶으면 저 여자를 내 아내로 내놔라!”

천박할 정도로 단순 명쾌한 선언이었다. 이송은 자신의 교양이 모욕당하는 것만 같아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대표단 중 몇몇 사람들은 흑랑채라는 말에 눈썹을 꿈 틀거렸다. 무척이나 귀에 익은 이름이었던 것이다. 임성진은 너무 놀라 하마터면 가지고 있던 곤을 떨어뜨릴 뻔했다. 비류연도 이 노사의 강호세력분포도’ 강의 시 간에 들은 기억이 있었다.

“녹림오패(綠林五覇)!”

염도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말을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어쩐지 기세가 남다르다 했더니…, 적어도 어중이떠중이 산적 패거리는 아니라는 소리로군.”

빙검도 녹림오패의 명성은 꽤 오래전부터 들어온 터였다. 저렇게 두목과 부두목이 사이좋게 만담이나 하고 있어 우습게 보았는데 별거 아니게 보이는 외모만큼 평 범한 산적들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녹림오패라 하면 녹림칠십이채 중 가장 강성한 다섯 개의 산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여타의 규율도 잡히지 않은 어설픈 들개 같은 산적 패들과는 격이 달랐다. 그 들은 녹림칠십이채의 명성을 유지하는 가장 실질적인 힘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바로 흑랑채주 흑랑부(黑狼斧) 임개이겠군요.”

남궁상이 상대의 평가가 약간은 바뀐 눈으로 덥석부리 장한을 쳐다보았다.

“크하하하! 이 어르신의 성함을 알고 있다니 기특하구나!”

임개가 광소를 터뜨렸다. 자신의 명성이 사해를 떨쳐 울린다고 생각한 것일까?

“하긴 우리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무림인이라는 것은 알았을 테니 저 정도쯤은 되어야겠지.”

빙검은 그제야 저들의 알 수 없는 자신감에 대해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어이가 없었다.

“이 어르신의 이름을 듣고도 아직 대항할 용기가 남아 있느냐?”

가슴을 활짝 펴며 임개는 뻐기듯이 말했다. 남궁상은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돈은 가지고 가도 좋다. 오늘은 내가 장가를 가는 경사스런 날이니 그 정도 아량은 베풀어주마!

“누가 신부요?”

“물론 저 여자다!”

그가 가리킨 사람은 바로 나예린이었다. 다시 한 번 다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아까 이송의 말이 농담이 아니었던 것이다.

“농담 아니었소? ”

남궁상이 다시 한 번 되물었다.

“누가 농담이라는 거냐? “

“그렇다면 미친 게 분명한 것 같소이다.”

아무래도 오늘 임개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장가드는 일인 모양이었다. 그의 전 신경은 등장 이래로 나예린에게로 쭉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남궁상이 미쳤다고 말했지만 그는 별 신경도 쓰지 않고 나예린을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만 보았다.

‘과, 과연……..’

임개는 넋이 달아날 것만 같았다. 정탐하던 부하 녀석 말 그대로였다. 천계의 선녀가 이 땅에 내려왔다, 그랬을 때 흰소리 한다고 대갈통을 한 대 쥐어박았었는데, 아무래도 그 녀석의 기특함에 포상이라도 내려야 할 것 같았다. 저런 눈깔 팽팽 돌아가는 미녀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지고야 말았다. 그 우아한 자태에 혼백이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지금도 그는 구름 위를 두둥실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그 멍 함을 넘어 맹한 모습에 이송은 충정을 발휘하기로 했다. 그가 손을 들어 손바닥을 활짝 편 후 두목의 눈앞에서 아래위로 흔들었다. 그러나 나예린을 향해 고정된 임 개의 눈은 제자리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볼 때마다 사람을 정신없이 사로잡아버리는 나예린의 마력에 임개도 불가항력이었다.

나예린은 순간 자신을 향하는 불쾌하고 음탕한 눈빛에 인상을 찡그리고야 말았다. 비록 한두 번 경험해 본 일이 아니었지만, 면역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비류연은 그녀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일단 침이나 닦으시오. 꼴사납소.”

남궁상이 주의를 주며 한마디했다.

하지만 나예린을 쳐다보며 정신없는 임개나 딱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두목을 바라보는 이송은 아예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이 확실히 씹혔다는 것을 느 낀 남궁상의 안색이 살짝 찡그려졌다.

““갈 길이 머니 빨리 끝냅시다. 당신에게 도전하오. 과연 우리 앞에서 그런 터무니없는 요구를 말할 자격이 있는지 실력으로 그것을 확인해 보겠소.”

‘챙’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남궁상의 검집에서 검이 출수되었다.

“허? 너 따위 애송이가 나 흑랑부 임개를 상대하겠다고? 크하하하!

“우하하하하!”

“낄낄낄낄!”

임개의 폭발하는 듯한 광소에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부하들이 함께 폭소를 터뜨렸다. 그들은 여색에 눈이 멀어 이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있음 이 분명했다.

스윽!

남궁상이 손을 들었다.

스스스슥!

눈부신 속도였다. 두 겹으로 대표단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산적들은 느닷없이 자신들 앞에 나타난 인영에 다들 경악했다.

‘뭐가 희끗했나?’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속임수도 없는 사실이었다. 남궁상이 신호를 보내자 눈으로 포착하기조차 힘든 속도로 주작단원들은 포위망을 마주보며 전방위에 산개 배치한 것이다.

“뭐, 뭐야?”

임개가 당황해하며 삿대질을 했다.

‘제길!’

이송은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본인은 남궁세가의 적손이자 천무학관 4학년인 남궁상이라 하오. 이정도면 댁과 싸울 자격이 충분하다 생각하오만?”

이송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망했다!’

아무래도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았다. 항상 행동보다는 이성이 앞선다고 큰소리 떵떵 치던 자신답지 않은 실수였다. 그러나 이미 영업을 개시한 마당이다. 이대로 는 체면 때문에라도 꼬리를 말 수는 없었다. 이제 상대가 자신들의 체면을 알아서 세워주길 기대할 뿐이지만.. 그들의 황당한 요구로 미루어 볼 때 그건 불가능 할 것 같았다.

“남궁 세가…….”

임개는 침음성을 흘렸다. 감히 가볍게 볼 수 없는 배경이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될 집단이었다. 원한 관계는 되도록 쌓지 않는 편 이 현명했다. 그러나 그 이름에 꼬리를 말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의 흑랑채는 그래도 녹림오패인 것이다.

그런데 그의 머릿속에서 자꾸만 남궁상이라는 이름이 맴돌았다. 저 얄팍하게 생긴 샌님 녀석이 남궁 세가의 적손이라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 이름은 결코 생소한 이름이 아니었다.

“어디서 들었지? 남궁상? 남궁상? 남궁…, 상! 궁상!

임개의 눈이 번쩍 떠졌다.

“서…, 설마 녹림천적(綠林天敵), 그 씹어 먹을 주작단?

“맞소! 씹어도 별 맛은 없겠지만.”

숨길 이유가 없기에 남궁상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나 자신들이 언제 녹림천적이 되었는지는 금시초문이었다. 모르는 새에 엉뚱한 곳에서 유명세를 탄 모양이었 다.

“이, 이럴 수가.”

갑자기 침묵과 정적이 산적들을 찾아왔다. 이들을 순식간에 뒤덮은 공기는 공포라는 이름의 공기였다.

“왜 저들이 선배들을 두려워하죠? 그리고 어떻게 남궁 선배의 이름만 가지고도 저들이 주작단이란 것을 알았을까요?”

임성진을 향한 효룡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글쎄…, 아마 과거의 화려한 전적 때문이겠지. 그리고 녹림이 아직 2년 전의 일을 잊지 않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2년 전 !

주작단이 아미산에서 특별 여름 합숙을 마치고 천무학관으로 돌아온 바로 그 시기였다.

차랑!

임성진과 효룡의 대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맑게 울리는 검명음과 함께 남궁상이 임개를 향해 도약했다. 백색 섬광이 하늘로부터 임개를 향해 일도양단의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채챙!

검과 도끼가 격렬히 부딪치는 소리가 산 전체를 울렸다. 대지를 이분(二分)할 듯 하늘로부터 떨어져 내린 남궁상의 위력적인 검기를 임개의 도끼가 막아내는 소리

였다.

남궁상의 하얀 검기는 금방이라도 임개를 두 동강 낼 듯했지만 그의 도끼가 행하는 방어를 뚫지 못하고 거무튀튀한 흑랑부의 벽에 막히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

부딪치는 순간 다섯 걸음을 물러난 남궁상은 자신에 대한 신뢰가 와르르 무너짐을 느꼈다. 자신의 일검이, 유구하고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남궁검가의 일초가 태생도 알 수 없는 산 도적의 도끼 자루 하나에 가볍게 막히다니……. 도무지 믿겨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녹림오패라지만 산적은 영원한 산적이 아니겠는가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산적을 만나 두 번째 검을 휘둘러본 기억이 없는 남궁상이 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오늘 그 기록을 갈아치울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망연자실한 눈으로 자신의 검과 그 검을 막아낸 덥석부리 사내 임개의 도끼를 바라보았다. 임개는 그가 지닌 장신의 거대한 체구에 어울리는 천생신력의 소 유자였다. 그러나 당황한 이는 남궁상뿐 만이 아니었다. 임개 또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저, 저놈! 샌님처럼 얌전하게 생겨가지고 이런 실력이라니…, 이것이 남궁세가의 힘이란 말인가?’

하마터면 정수리부터 가랑이까지 보기 좋게 두 동강 날 뻔했다. 두개골이 수박 갈라지듯 쪼개질 뻔했던 것이다. 급히 도끼를 들어 본능적으로 벼락처럼 떨어지는 검기를 막기는 했지만, 도끼보다 훨씬 가벼운 상대의 검을 부러뜨리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도끼날에 큰 상처가 나 있었다. 날에 톱니처럼 큼직한 이빨 자국이 나 있는 모양새가 꼴사나웠다.

“과연 녹림오패는 다르구려!”

남궁상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너무 간단히 본 게 실수일지도 몰랐다.

“네놈도!”

녹림오패의 채주들은 모두 녹림왕(綠林) 광풍마랑(狂風魔狼) 임덕성으로부터 직접 무공을 전수받은 자들이었다. 일반적인 보통 산적들과 같이 취급하는 것 자 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아무래도 간단 무쌍한 초식으로는 제압하기가 불가능할 듯했다. 도끼를 휘두르는 그의 일격 일격마다 ‘윙윙’바람이 갈라져 나갔다. 일초 일 초가 단순하지만 무지막지한 힘이 느껴졌다.

“저것이 바로 녹림왕의 광풍마랑도법’을 부법으로 응용해 만든 흑랑십이부(黑狼十二斧)인 모양이로군. 과연 먹이를 노리는 늑대처럼 사나움이 흉흉하게 느껴지 는군.”

장홍이 그 사나움에 감탄사를 터뜨렸다.

“함부로 맞대결했다가는 애꿎은 검만 폐품 만들기 십상이겠군.”

효룡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런 무식함에 정면 승부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었다. 이런 경우 직접 격돌을 피하고 우회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바람직 했다.

“흑랑쌍아격(黑狼雙牙擊)!”

남궁상이 자꾸만 미꾸라지처럼 피하기만 할 뿐 반격해 들어오지 않자 애가 탄 임개가 맹렬히 도끼를 종횡으로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남궁상의 좌우를 향해 두 가 닥의 섬광이 들이닥쳤다.

“백광회선(白光廻旋)!”

일단은 방어가 우선이었다. 남궁상은 검을 들어 도끼의 옆면을 받아쳐 그 도끼 안에 실린 막중한 힘을 흘려보냈다. 지탱하고 있는 발이 지면을 타고 들어가며 커다 란 궤적을 그렸다. 흘리기만도 쉽지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보고 있던 비류연의 눈이 반짝 빛났다.

“무기가 크고 무거울수록 공격에 실패했을 때 나타나는 허점이 크게 마련이지.’

그런 면에서 임개는 너무 무식하고 막무가내에다 주의가 부족했다.

“흑랑조(黑狼爪) 태산양분(泰山兩分)!”

위에서 아래로 장작을 패듯 떨어지는 도끼, 이 초식의 마지막 변화였다. 도끼는 원래 무게와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무기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밑으로 떨어지는 일자 찍기가 가장 무서운 초식이었다. 그러나 남궁상은 자신의 정수리를 향해 흉소를 지으며 날아오는 일격에도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끝까지 그 공격을 직시 하며 살짝 몸을 틀었다. 벌써 수일째 계속된 체력신법 복합 강화 훈련에 그의 신체 운용은 부드러워질 대로 부드러워져 있었다.

콰콰콰쾅!

대지를 두 조각 내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가 담긴 무식한 소리가 산을 진동시켰다. 하지만 아무리 위력적인 초식이라도 맞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법이었다. 남궁 상의 검을 두 동강 내고 내친김에 목과 몸통도 분리시켜 준다는 그의 원대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의 전법은 실패였다. 이미 상대에게 움직임을 읽혀 버린 이후였던 것이다. 임개는 힘으로 기술을 제압하려 했지만 남궁상의 속도와 기술은 이미 임개의 실력보다 훨씬 위였다.

지면으로 끌어 당겨지는 자신의 흑랑부를 지탱하기 위해 임개는 온 힘을 쏟아부어야 했다. 그러자 그의 머리와 몸통과 팔이 완전 무방비 상태로 방치되어 버렸다. 절호의 기회였다. 그리고 남궁상은 비류연에게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훈련을 받아본 기억이 없었다. 훤하게 드러난 빈틈을 향해 남궁상은 검을 찔러 넣었다. 복잡한 초식 따위는 이 순간 아무런 필요가 없었다.

그저 벨 뿐이었다.

“끝났군!”

임개의 검은 도끼가 하늘로부터 일직선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며 염도가 한마디하자 빙검은 그의 말에 동의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까지 허점이 드러나 면 만회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그들은 알기 때문이다.

누군가 절정 고수가 임개를 도와주지 않는 한!

“아직이야!”

비류연의 짧은 한마디였다.

스르륵!

그때 예리하게 찔러 들어가는 남궁상의 검을 임개의 목 언저리로부터 흘려내는 검 한 자루가 있었다.

검화류

어디선가 허락도 없이 불쑥 나타난 난입자. 남궁상의 검은 그 난입자의 검신을 타고 얼음에 미끄러지는 것처럼 옆으로 비껴 나가고 말았다. 덕분에 임개는 겨우 치 명상을 면하고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구해 준 사람의 얼굴을 본 순간 임개는 자신의 두 눈이 용도 폐기될 정도로 환상이 보인다고 생각했다. 머엉……!

경악愕! 불신(不信)! 허탈(脫)!

남궁상이 놀란 눈으로 다시 한 번 임개를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임개의 코앞에 느닷없이 불쑥 나타난 검의 주인을 바라본 것이다. 자신의 검을 가볍게 흘려보낸 범인, 놀랍게도 그 검의 주인은 바로 평범한 얼굴의 주인공 부채주 이송이었다.

남궁상 정도의 실력자가 내뿜는 검기를, 그것이 아무리 단순하다 해도 ᅳ 공격은 단순한 만큼 위력적이다-이토록 가볍게 거의 저항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매 끄럽게 흘려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절정에 다다른 고수가 아니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 그것을 일개 산적 부채주가 해낸 것이다.

턱이 빠져라 놀라기는 대표단 모두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뭐래도 이미 끝난 승부였다. 최후의 심판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지 않은가!

“것 봐라! 망설이니깐 헛품만 팔았잖아! 그렇게 주의를 줬는데도 못 알아듣다니, 검을 휘두를 때는 주저해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일렀거늘……. 아마 망설임만 없 었어도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벌써 끝났잖아. 쯧쯧쯧!”

염도의 책망에 남궁상의 얼굴이 벌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