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재회
– 칠매검(七梅劍)의 위용
“후우…….”
혼자 따로 떨어져 숲 안으로 들어온 윤준호는 가슴속에 담고 있는 모든 무거운 것을 뱉어내기라도 하듯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고치지 못한 그의 버릇이었다. 주위에서 비류연과 효룡과 장홍이 합심하여 그렇게 고치기를 종용했지만 세 살 버릇이 괜히 여든까지 가는 게 아닌 모양이 었다.
“난 아직도 멀었구나, 멀었어!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천무학관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게, 금이 가지 않게, 먹칠하지 않게 잘할 수 있을까?”
비류연이 봤다면 또 혼자 짱 박혀서 궁상떨고 있다고 구박했을 것이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의논하는 게 훨씬 더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겠지만 겁쟁이라 놀림받으며 왕따당하다 보니 남과 의논하는 것 자체가 어색했다.
요즘 그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대홍산에서 녹림총채인 마랑채와 조우하여 3천 녹림도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그는 또다시 두려움에 굴복하고 말았다. 심장을 옥 죄는 긴장과 폐부를 쥐어뜯는 공포 때문에 그는 주위 상황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비류연과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구릿빛 장한이 뭐라뭐라 나눈 이야기조차 하 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긴장과 공포와 두려움에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린 탓이었다. 그만큼 감각도 둔해지고 시야도 좁아져버렸다. 만일 전면전이 일어났다면 자신 은 시체가 되어 아마 대홍산에 뒹굴고 있을 것이다. 윤준호는 또다시 두려움에 지레 겁을 먹었던 자신이 너무 싫었다.
“하압!”
답답한 마음에 검을 마구 휘둘러보았다. 검풍이 바람처럼 일어나 숲을 휩쓸었다. 정작 실전에는 약하지만 연습할 때 그의 검기는 나물랄 데가 없었다. 검기가 나무 들을 종횡으로 베어 나갔다.
쿵!
그러자 갑자기 나무 위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그것은 검붉은 덩어리였다.
“뭐, 뭐야?”
윤준호는 화들짝 놀라 입을 뻐끔거렸다.
“크으으윽!”
검고 붉은 덩어리로부터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것은 온몸을 피로 붉게 물들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직 몸을 일으킬 기력은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몸 을 일으키는 그 한 동작도 윤준호의 눈에는 무척이나 힘겹게 보였다.
“아, 아니 당신은!
윤준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온몸이 붉게 물들어 있는 이 의외로 평범한 얼굴의 중년인을 그는 얼마 전에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바로 흑랑채 부채주인 군자 소요검 이송학이었다.
“아니! 다…, 당신은!”
이송학의 눈도 따라 커졌다.
“누군가?”
이송학은 처음 보는데 왜 아는 척하느냐는 뜻이 담긴 목소리로 반문했다. 윤준호가 워낙 존재감이 없다 보니 그의 기억 속에 인식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 전신에 퍼지는 통증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윤준호의 얼굴이나 떠올리는데 심력을 소모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윤준호는 바짝 들었던 어깨의 힘이 주루륵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천무학관 대표단의 윤준호입니다. 그 상처는 어떻게 된 겁니까?”
“아!”
그러나 이송학은 다시 만나 반갑다는 인사를 할 여유가 없었다.
“어서 피하게!”
다급한 목소리로 이송학이 외쳤다.
“왜요? 무슨 일 있습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이송학은 계속해서 달라붙는 지독한 추격을 간신히 뿌리치고 여기까지 겨우 도망쳐 왔던 것이다. 총채로 가는 길목은 모두 막혀 있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우회로를 선택했던 것인데 그만 종적이 발각되고 말았다. 그는 윤준호를 힘주어 바라보았다. 윤준호가 그 강한 눈빛에 움찔했다. “무서운 자가 따라오고 있네. 자네는 얼른 피하게나. 내가 그자를 유인할 테니.”
그러나 윤준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몸으로는 싸울 수 없을 텐데요?”
한눈에 척 보기에도 너무 출혈이 심했다. 아직도 저렇게 기력을 유지하고 있는 게 기적이었다. 아마 의지의 힘일 것이다. 몸은 이미 껍질뿐만 아니라 내부까지 엉 망진창이 분명했다.
“상관없네! 자네는 한 가지 소식만 녹림총채에 알려주게. 흑랑채가 정체 불명의 집단에게 습격당해 몰살당했다고 말일세.”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흥미진진한 바보 부자의 비무까지 보지 않았는가.
“알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누명도 뒤집어썼는걸요.”
이송학은 놀란 얼굴이 되었지만, 이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자신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살기를 감지했던 것이다.
“어쨌든! 빨리 이곳을 벗어나게! 그들은 지옥의 사신 같은 자들일세! 시간이 없어!”
이송학의 얼굴 곳곳에는 피가 흘러내린 자국들이 남아 있어 더욱 끔찍하게 보였다. 피로와 고통에 찌든 그의 얼굴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출혈도 심했다.
“부상자를 놔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윤준호가 반발했다.
“만용을 부리지 말게. 자네가 감당할 사람들이 아니라네.”
이송학이 언성을 높였다. 그의 눈에는 이 청년이 너무 무모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별로 실력도 없어 보이는 데다가 심약하기까지 해보이는데 무슨 쓸데없는 만용인가? 개죽음당하고 싶나? 빨리 피하게!’
“그럴 수 없습니다!”
윤준호가 고함쳤다.
“이런 고집불통! 빨리 가!”
짙은 살기를 뿌리며 뒤따라온 놈들이 근처에 느껴졌다. 이송학은 급히 자신의 검을 뽑아 손에 쥐었다.
‘이걸 몇 번이나 더 휘두를 수 있을까?’
이송학은 서서히 모든 것을 체념하고 싶어졌다. 쫓기는 동안 너무 지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어서 가래두!”
그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가득 묻어 나왔다. 이제 살기는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미 늦었는지도 몰랐다.
“싫습니다. 전 겁쟁이가 아닙니다.”
윤준호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순간 윤준호의 전신을 타고 벽력같은 전율이 흘렀다. 그는 속으로 외쳤다.
‘그래, 난 겁쟁이가 아니야! 난 화산파의 제자로 천무학관 대표단 중 한 사람이야! 난 강하다. 난 약하지 않아. 난 겁쟁이가 아냐!’
윤준호가 검을 뽑아들었다. 그의 눈에 흔들림과 동요와 두려움은 사라지고 불꽃 같은 의지가 타올랐다.
“흐흐, 여기 있었군!”
나직하게 깔리는 살기어린 목소리! 그리고 그와 함께 두 사람의 앞에 5명의 복면인이 나타났다. 바로 여기까지 이송학을 추격해 온 십이혈마대 제 8대의 조원들이 었다.
“이제 끝이구나! ’
이송학은 속으로 탄식했다. 더 이상 버틸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험난한 피의 여정으로 힘은 우물 밑바닥까지 이미 소진된 지 오래였다.
“응?”
목표 이외의 인물이 한 명 더 있는 것을 본 8조 대원들의 눈살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그들은 서로의 눈을 보며 의견을 교환했다. 의견 조율은 눈 깜빡할 사이에 이 루어졌다. 이런 경우 당연히 살인멸구였다. 그들의 얼굴을 본 자는 누구라도 결코 살려둘 수 없었다.
“운이 나빴다고 생각해라! 스르릉!”
5명의 혈마대원은 일제히 허리 뒤에서 도를 뽑아들었다. 죽음처럼 검은 도신을 지닌 불길한 도였다. 그들이 도를 역수로 쥐며 먹이를 사냥할 자세를 취했다. 검을 쥔 윤준호의 손에 땀이 배어 나왔다.
“헉!”
윤준호는 기겁했다. 이들이 베어 들어오는 도법은 일반 상리를 벗어난 도법이었던 것이다. 그는 여태껏 역수도를 상대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도법이 더 욱더 생소했다. 흑의 복면인들의 도법은 매우 악랄하고 또한 음험했다. 때문에 그 궤적을 파악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서걱!
번개 같은 혈마대원의 일격에 그의 가슴이 길게 베어져 나갔다. 그러나 재빨리 몸을 뒤로 피한 터라 피부만 베이고 말았다. 그러나 차가운 한기가 살갗에 닿자 무 의식적인 공포가 치밀어 올랐다. 아직 수행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흑의인은 흑의인대로 자신의 일격이 빗나간 데 대해 놀라워하고 있었다. 분명히 제대로 베었다고 생각했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그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그는 곧 윤준호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좀더 확실한 방법으로 숨통을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옆의 동료를 향해 눈짓을 했다. 그러자 두 명의 동료가 알았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의 신호가 다시 한 번 떨어지자 세 명이 동시에 윤준호를 향해 도약했다. 그 들의 손에서 검은 도신이 죽음의 향기를 내뿜었다.
다급히 이십사수 매화검법의 수비식을 이용해 좌측을 노리고 베어 들어온 흑의인의 도를 흘려보낸 윤준호는 재빨리 몸을 틀어 자신의 오른쪽을 아래에서 위로 긁 어 올라오는 우측 흑의인의 도를 쳐냈다.
챙!
‘헉!’
윤준호는 속으로 비명을 토했다. 우측 흑의인의 도에 그만 자신의 검이 봉쇄되고 만 것이다. 그의 정면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정면 흑의인의 역수도가 검은 빛을 발했다. 윤준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챙! 챙! 챙!
아무리 기다려도 사신의 손길은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음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느꼈던 윤준호는 눈을 빼꼼이 뜨고 자신이 지금 저승에 있는 건 지 현세에 있는 건지 살펴보았다. 흑의인들은 자신으로부터 5장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다들 손을 움켜쥐고 있었는데 그들이 왜, 그리고 언제 저기까지 물러났는 지윤준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재미있게 놀았냐?”
윤준호의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표홀한 신법으로 윤준호 앞에 등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비류연이었다. 낙엽이 그의 신형 주위로 소용돌이쳤다.
“쯧쯧쯧, 아직 멀었군. 자기보다 약한 상대에게 그렇게 쩔쩔매서야!
앞섶이 베인 채 혈흔을 내비치고 있는 윤준호를 바라보며 비류연이 혀를 차며 말했다.
“조무래기들이랑 지금 뭐하는 거야? “
“아, 아니 저….”
윤준호는 뭐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이분들이 다짜고짜……”
무의식중에 자신을 죽이려 한 살해 기도자를 분이라고 정중히 부르는 윤준호였다.
“뭐 설명을 듣지 않아도 나쁜 사람이라고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겠네. 얼굴에 써붙이고 다니고 있잖아. 이야기에 나오는 전형적인 악당의 모습이거든.”
시커먼 도에 시커먼 옷, 그리고 시커먼 복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십이혈마대 대원 다섯 사람은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류연도 함께 제거해야 한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살인멸구 야말로 그들의 최우선 행동지침인 것이다. 그들은 너무 임무와 의무에 충실하다 보니 상대의 실력을 전혀 판단하지 못하는 우를 저질러버리고 만 것이다.
“자! 그럼 열심히 해봐!”
윤준호의 앞을 막고 서 있던 비류연은 이송학을 들쳐업고는 한쪽 편에 있는 나무 그늘 아래로 가 앉았다. 그러나 마음 씀씀이가 깊은지라 격려는 잊지 않았다.
“어? 아, 안 도와주나요? ”
비류연의 돌발적인 행동에 윤준호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그는 비류연이 당연히 도와주리라 여겼던 것이다. 저들은 다섯, 이쪽은 전투 불능의 부상자를 합쳐 둘! 상황은 극명했다.
“이 정도 일은 스스로 해결해야지. 걱정마! 죽더라도 뼈는 잘 추려줄게. 남길 유언 있으면 지금 남겨도 돼. 수수료 없이 처리해 줄게.”
“오늘 날씨 참 좋지?’라고 느껴질 정도로 너무나 태평스러운 말이었다.
“치, 친구 맞나요?”
“그럼, 우린 친구지. 그러니깐 잘해 봐! 내 친구가 저런 조무래기들하고 싸워서 져서야 되겠어?”
피도 눈물도 없는 한마디였다. 비류연이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윤준호는 울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적에게 얕보임 당하면 기세에서 밀릴 수도 있다는 상식 정도는 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그래도…….?”
울상인 채 뭐라고 한마디 더 하려던 윤준호를 비류연이 제지했다.
“준호! 내가 왜 강자의 편을 들어야 하지? 난 자기보다 약한 상대랑 싸우는 사람은 도와주지 않아!
‘약하다고? 저들이 나보다 약하단 말이야? 말도 안 돼!’
윤준호는 비류연의 말을 선뜻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저 청년을 도와주지 않아도 되나?”
그렇게 물어온 사람은 비류연에게 업혀 나무 그늘까지 실려온 이송학이었다.
“그럼요. 아저씨는 누가 이길 것 같은데요?”
“당연히 저 흑의인들이 이기네. 저들은 무서운 자들이야. 나라도 빨리 저 청년을 도와주어야겠네. 그렇지 않으면 저 청년은 금방 죽을 거야. 자네는 어서 원군을 부 르러 가게!”
다급한 목소리로 이송학이 외쳤다. 그러나 비류연은 마이동풍이었다.
“그럼, 우리 내기할까요?”
“내기? 이런 위급한 시기에 무…, 무슨 내기?”
“그러니깐 더욱더 내기를 해야지요. 서로 의견이 갈렸으니 누구 의견이 맞는지 결말을 지어야 하지 않겠어요? 자신의 신뢰를 보여주는데 있어 내기만큼 좋은 것은 없죠. 은자 열 냥 어때요? 전 혼자서 충분히 이긴다는 데 걸죠!’
이상하게도 이송학은 이 어처구니없고 농담 같은 제의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왠지 그냥 믿고 있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조, 좋네!”
“좋아요! 그럼 내기 성립이군요.”
얼떨결에 비류연의 말에 휘말린 이송학은 내기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는 오늘처럼 내기에 져보기를 간절히 바란 적이 없었다. 은자 열 냥 따위는 생명의 값어치 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내 이름을 걸고 장담하지. 넌 확실히 저들을 몽땅 합해 놓은 것보다 강해!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 좀더 자신을 믿으라고. 날 믿어! 증거로 난 네가 이긴다는 데 돈을 걸었어. 그러니 꼭 이겨야 돼! 넌 할 수 있어!”
비류연이 자신 있게 외쳤다. 나름의 응원이란 것이었다.
자신을 믿으라고? 내가 저들보다 강하다고? 그리고 비류연이 나에게 돈을 걸었다! ‘
분노해야 마땅한 이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 오히려 그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가 보아온 비류연은 절대 손해보는 짓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껏 한 번도 돈을 건 내기에서 진 적이 없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때의 아침 여명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제부터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도망치지 말자!”
환마동 입관 시험이 있던 그날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맹세하지 않았던가! 난 아직 그 맹세를 지키고 있는 건가?
‘난 도망치지 않아! 난 겁쟁이가 아냐!’
윤준호의 검이 파르르 떨리며 무수한 매화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검극에서 검기로 피어오른 매화가 붉은 궤적을 그리며 십이혈마대 대원을 향해 쭉 뻗어 나갔다. 겨울도 아닌데 매화향이 숲 전체를 가득 물들였다.
검향지경(劍之境)에서 발현해지는 칠매검(七梅劍)이었다.
헉헉헉헉!
윤준호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검을 아래로 내렸다. 검을 쥔 팔이 벌벌 떨렸다.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이게 정말 내가 한 일인가?”
주위를 둘러본 윤준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다섯 명 모두가 검기에 당한 채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몸에 새겨진 검흔으로 미루어 보 아 칠매검의 흔적이 틀림없었다.
“서, 설마…, 죽은 건가요?”
비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이 살인 방조자가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비류연의 무언의 대답에 윤준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의 안색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여태껏 순진하게 세상을 살아온 그로서는 첫 살인은 푸르름 속에서 일순간 내리꽂히는 번개였다.
“어차피 예견된 수순이었어. 그들이 죽지 않았으면 저 차가운 땅에 피 묻은 얼굴을 처박고 있는 것은 너 자신이 되었을 거야. 저들도 너를 공격했을 때는 죽음이란 걸 염두에 두었겠지. 물론 널 무시해서 네가 그런 꼴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방심했던 거야.”
잠시 벌벌 떨고 있는 윤준호를 바라보던 비류연은 단호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목숨을 취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게 강호의 규칙이야!
비류연은 다른 건 몰라도 이 절대 명제의 규칙만은 알고 있었다. 구대문파를 몰라도, 팔대세가를 몰라도 상관없었다. 그런 잡다한 지식보다는 이런 사소한 진실 하 나가 더 중요했다. 윤준호는 정신없이 자신이 저지른 만행을 보다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잘 살펴보니 두 사람의 사인은 칠매검이 아니었다. 하나는 심장을 관통하 는 도흔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독살이었다.
“내, 내가 어떻게 한 거죠?”
윤준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머리가 깨끗이 청소라도 된 것처럼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직도 몸의 떨림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나중에 얘기해 줄게!”
어리둥절해하는 윤준호를 보며 비류연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아직 멀었어! 넌 정말이지 너무 손이 많이 가서 번거로워!”
마침내 윤준호는 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한 사람 몫을 제대로 해내려면 아직 단련이 더 필요한 것 같았다.
“내기엔 내가 이긴 것 같죠?
활짝 웃으며 이송학을 돌아보던 비류연의 얼굴에서 웃음이 걷혔다. 이송학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서둘러 이송학에게 다가가 맥을 짚어보았다. 다행히 죽은 것 은 아니었다. 미약하나마 맥은 뛰고 있었다. 윤준호의 승리를 보자 마지막 남아 있던 최후의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이런, 이런! “
아무래도 내기 돈을 받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비류연이었다.
“흐흠…, 이놈들이 바로 이송학을 노렸던 놈들이란 말이지?”
불쾌한 시선으로 염도는 흑의인들의 시체를 쭈욱 훑어보았다.
“모두 죽었군.”
비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놈 잡아서 정체를 캐보려 했는데, 마지막 남은 한 놈이 보통 지독한 놈이 아니더군요. 아직 숨이 붙어 있던 쓰러진 동료를 자기 손으로 죽이고 자신은 입 안에 있던 독환을 깨물고 자살했어요.”
윤준호가 본 두 사람의 사인이 그렇게 생긴 것이었던 모양이다. 비류연에게 사건의 정황을 들은 염도와 빙검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스스로 자결할 정도라 면 보통 훈련을 거쳐서는 도달할 수 없는 정신 영역이었다.
“아마 최면암시(催眠暗示)를 포함한 지옥 훈련을 거쳐서 육성된 살인 병기들인 것 같군.”
흑의 복면인들의 여기저기를 살펴보며 염도가 중얼거리자 비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수도라 특이하군!”
도를 거꾸로 잡는 역수도는 중원에서는 잘 쓰지 않는 방법이었다. 때문에 이들의 정체가 더욱 궁금했다. 염도가 그들이 지닌 도 하나를 집어들어 이곳저곳을 살펴 보았다. 특별한 표식은 보이지 않았다.
“살기가 지독한 도로군. 얼마나 많은 피를 삼킨 물건이기에…….”
도의 표면은 어둠 속에서의 기습이 용의하도록 달빛이 반사되지 않도록 검게 암광 처리가 되어 있었다.
“세상에 존재해 봤자 해만 끼칠 도로군. 이 따위 도는 필요 없다. 정화되지 못한 도는 부러뜨릴 수밖에 없지.”
빙검이 차가운 시선으로 암도(暗刀)를 바라보았다.
“전문가들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런 복장에 이런 무기를 쓰는 놈들은 많지 않죠. 철저하게 실전을 위해, 실용성을 위주로 해서 만든 장비들입니다.” 장홍이 매의 눈같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들을 살펴보며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걱정하던 일이 드디어 발생한 것이다. 어둠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부터 시작인 건가?’
그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온몸 구석구석으로 긴장이 소리 없이 퍼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이제 저걸 어쩌지?
비류연이 가리킨 곳은 현재 이송학이 누워 있는 표물 마차였다. 구하긴 구했는데 구해 놓으니 그 처치가 곤란했다. 일단 사태를 수습한 그들 일행은 계속해서 길을 떠났다. 이송학은 구명환을 먹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추격을 뿌리치는 동안 출혈이 너무 심했던 것이다. 게다가 상처의 응급조치도 미흡 해 여러 군데에서 상처가 곪아 고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때문에 온몸에 상처로 인한 발열도 심했다.
그냥 이대로 화산까지 갈 수는 없었다. 도중에 상처가 도져 죽을 확률이 십이 할이었다.
“이 상태로 계속해서 데리고 다닐 수는 없고…, 역시 어딘가에 맡겨야 되겠지. 그 흑의 복면인들도 감히 손댈 수 없는 안전한 곳 말이야. 내 내기 돈을 안전하게 지 켜줄 그런 장소! ”
이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곳은 그곳뿐이었다.
“역시 거기밖에 없는 것 같군!”
비류연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