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뢰곡
•안개 속에 부는 피바람
낙뢰곡(落谷)
낙뢰지지(之地: 낙뢰의 땅)
수십 년의 세월을 비바람과 함께 싸워온 경계석에 새겨진 일곱 글자였다.
“휘이유!
장홍은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굉장한 절경이로군요.”
효룡이 눈앞에 펼쳐진 장대한 자연의 조화에 탄성을 터뜨렸다.
“여기가 바로 그 벼락이 대지를 쪼개놓은 것 같다 해서 낙뢰곡이라 불리는 곳이로구나. 과연 명불허전이로군.”
그곳은 호북성과 섬서성의 경계에 위치한 거대한 협곡이었다. 자연의 조화라고밖에는 경탄할 수 없는 깎아지른 절벽이 서로를 마주보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시야를 가릴 정도가 아닌 적당한 안개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바람을 타고 움직였다. 때문에 협곡의 절경이 더욱더 신비롭게 보였다. 협곡의 폭은 십 장이 채 되지 않을 듯하고 높이는 측정이 불가능했다. 위로는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하얀 기운들이 운무(雲霧)를 일으키고 있어 그 높이를 가늠하기 힘들 게 만들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공격당하면 뼈도 못 추리겠군.”
남궁상에게는 이런 자연의 비경을 즐길 만한 심적 여유가 부족했다.
“불길한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노학이 투덜거렸다. 그도 감상선호파인 모양이었다. 남궁상 같은 걱정 선호파와는 어울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말이 씨가 되는 꼴은 사양이었다.
“오늘 따라 안개가 짙군!”
“오늘처럼 이렇게 안개가 짙게 깔린 적은 없었는데…….
빙검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몇 번 이곳을 지난 적이 있으나 오늘만큼 짙게 안개가 깔린 적은 없었다. 감이 좋지 않았다. 빙검은 조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룰루 랄라 근심 걱정이라고는 전혀 없다는 표정으로 태평스럽게 길을 걸어가는 염도가 심히 눈에 거슬렸다.
“저놈은 생각도 안 하고 사나?’
애들이 다 룰루랄라 즐거워해도 인솔자는 걱정을 해야만 한다. 그런데도 애들하고 정신연령이 같은 수준이라니……. 자신이 세 배는 더 고생을 떠맡아야 하는 입 장이 되어버린 것 같아 한심스러웠다.
“바보자식!
속으로 욕이라도 한 바가지 해주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이럴 때 기습 공격이라도 한번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지! 차라리 뒈져버리는 게 만인에 대한 축복일지도….?
빙검이 막 그렇게 생각한 그 순간이었다.
“윽!”
신음을 터뜨린 사람은 바로 늑기한이었다.
“무슨 일인가?”
빙검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그의 신경은 무척이나 예민해져 있었기에 사소한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사색이 된 늑기한의 안색은 마치 독에 중독 된 사람처럼 새파랬다. 때문에 보통 때의 느끼한 인상이 많이 죽어 있었다.
“자네 안색이 좋지 않군. 무슨 일 있나?”
그러자 빙검의 귓가로 파고드는 은밀한 전음성이 있었다.
[이 일은 절대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됩니다.]
[알았네!]
빙검도 신중하게 전음으로 대답했다.
[아, 아무래도 아침에 먹은 생선이 탈이 난 것 같습니다.]
늑기한의 얼굴에는 난처함이 가득했다. 무척이나 엄청난 비밀이라도 털어놓는 사람 같았다. 하긴 그는 속은 시꺼멓든 말든 겉모습만큼은 남들 시선을 의식해서 깨 끗 깔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난 또 뭐라고…….]
긴장되어 있던 빙검의 얼굴이 다시금 무뚝뚝해졌다. 그게 무슨 대수로운 일이라고 전음까지 사용한단 말인가?
[빨리 다녀오게!]
늑기한이 태연을 가장하며 저 뒤편의 왔던 길로 멀어져갔다. 그는 아무래도 많은 여관도들 앞에서 체면을 잃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관도 앞에서는 항상 깔끔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인 것 같았다.
아마 자기 같은 미남이 뒷간을 간다는 사실을 여성들에게 알리는 것은 천벌받을 죄악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착각도 유분수지만 빙검은 남의 착각에 까지 일부러 빠져줄 의무는 없었다.
운무를 뚫고 자리한 협곡의 정상부, 뉘엿뉘엿 서녘으로 지는 해가 황혼(黃昏)을 드리우며 새하얗던 운무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붉게 지는 노을이 산에 긴 그림 자를 드리울 때, 그 사이로 양쪽 협곡 위로는 일렬로 늘어선 희끗희끗한 검은 인영의 무리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들은 지금 기척을 죽이며 살기를 갈무리한 채 협곡 아래를 주시하고 있었다.
“제 1대부터 제 12대까지 모두 배치 완료했습니다.”
혈검의 보고에 적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의 시선은 창공에서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으로 천무학관 대표단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을 반드시 지날 거라 하더니 정보대로군.’
“제10대 조장 혈쇄(血鎖)는?”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제9대 조장 혈궁(血弓)은?”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네는 어떤가?”
“저의 검은 언제든 피를 마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혈검은 자신있게 대답했다.
십이혈마대는 대의 번호에 따라 맡은바 임무가 나뉜다. 그들이 소속된 대에도 그 나름대로 부여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대의 숫자가 적을수록 직접 공격을 감행하는 자들이다. 중앙 핵심 공격수들인 것이다.
제1대는 혈검대라 불리우며 그곳의 조장은 혈검이란 이름을 갖는다. 그의 원래 이름이 전에 무엇이었든 전혀 관계없다. 그들은 주로 살기 짙은 검법을 특기로 사 용한다. 제2대 혈도대 조장은 혈도로 그와 그가 이끄는 제2대는 잔혹한 도법을 장기로 삼는다. 제3대 혈창대 조장은 혈창으로 창을 특기로 사용한다.
이처럼 숫자가 작아질수록 각자 특징이 다른 무기로 직접 공격을 담당하고 숫자가 커질수록 후방 지원이나, 원거리 사격, 추적, 포위, 그리고 각종 기진술을 담당 한다. 때문에 숫자가 많은 대일수록 가지고 다니는 물건들이 무겁고 다양하다.
그리고 두 자리 수의 대는 서로가 서로를 보좌, 연계하는 입장이라 제10대 한 명, 제11대 한 명, 제12대 한 명, 이런 식으로 삼인 일조를 짜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 다.
특히 제10대는 십이혈마대 중 가장 무거운 짐을 등에 지니고 다닌다. 그 짐은 속이 꽉 찬 두꺼운 바퀴처럼 생겼는데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아는 사람은 십이혈 마대뿐이다. 왜냐하면 그 안의 내용물을 본 자는 여태껏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은 입을 놀리지 못하기 때문에 십이혈마대를 제외하고는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제9대의 대명(名)은 혈궁대, 이름 그대로 강호에서 가장 무서운 궁술을 보유하고 있는 조였다. 제9대 조장 혈궁은 지금 날카로운 시선으로 자신이 수렵할 목표 물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먹이는 붉은 머리에 붉은 수염이라는 매우 특이한 신체 특징을 가지고 있어 무리 중에서 구분하기도 편했다. 상대하기 가장 귀찮고 껄끄 러운 인물을 우선적으로 저격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는 자신의 전통에서 붉은 빛이 도는 화살 한 대를 꺼내 붉은 시위 위에 걸었다.
화살의 이름은 혈마전, 저주받은 마물이란 별칭을 지니고 있는 화살이다. 이 혈마궁과 혈마전을 동시에 쓸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서 자신뿐이었다. 아쉬운 점은 저 정도 최절정 고수는 두 명을 동시에 쏘아 맞힐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성공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를 잡고, 그리고 남은 하나를 잡기로 했다.
하나를 쏘고 다른 하나를 장전하는 데는 한 번의 눈 깜박임이면 충분했다. 그는 천천히 혈마궁의 시위를 당겼다. 그의 화살은 지난 30년 동안 단 한 번도 빗나간 적 이 없었다.
“그 세 분들은?”
적혈이 물었다.
“차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좋아!”
준비는 완벽했다. 적혈은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혈검의 손에서 붉은 깃발이 올라갔다.
피윳!
대기를 찢는 날카로운 파공성이 협곡 안을 메아리쳤다.
‘맞았다!’
제 9대주 혈궁은 속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뭔가 관통하는 느낌, 틀림없었다. 그런데…..
‘뭐지?’
그것은 본능의 산물이었다. 염도는 왜 자신이 한 발짝 옆으로 물러섰는지 깨닫기까지 잠깐의 사유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쉐에에엑!
송곳같이 예리한 살기의 바람이 그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푹!
염도의 볼에서 그의 머리 색과 동색의 액체가 흘러내렸다. 염도는 왼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에 난 상처에 갖다대었다. 염도의 시선이 화살이 박힌 곳을 향했다. 그 곳에는 화살이 없었다.
단지 점 하나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노사님! 괜찮으십니까?”
이변을 느낀 관도 몇 명이 달려왔다. 화살은 보이지 않았다. 강하게 날아온 화살은 화살촉부터 깃털 달린 꼬리까지 몽땅 땅속에 파묻혀버렸던 것이다. 얼마나 강하 면 이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인지…, 사람들의 얼굴 위로 긴장이 흘렀다.
염도가 땅으로 손을 아래로 뻗치자 땅이 갈라지며 불쑥 화살이 뽑혀져 나왔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두둥실 떠오른 화살이 염도의 손아귀에 잡혔다. 훌륭한 접인지 기(接引之氣)였다.
화살은 피처럼 붉은색이었고 화살촉은 낚싯바늘처럼 끝이 살짝 휘어져 있었다. 한 번 살에 박히면 살을 절개하지 않고서는 빼낼 수 없도록 야비하게 만들어진 물 건이었다. 하긴 이 정도 위력이면 아예 사람을 관통하고 지나갈 것 같지만, 염도는 곧 알 수 있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소문으로는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혈마전(血魔箭)……..”
염도가 침음성을 터뜨렸다.
“백 년 전 강호를 피의 혈풍 속으로 몰아넣었던 저주스런 마물이 왜 지금 나타났단 말인가?”
불안감과 함께 위험을 알리는 경고가 전율처럼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때 임성진이 다가와 물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물건입니까?”
공부와는 담쌓고 사는 자신도 아는 사실을 감히 모르다니! 염도가 버럭 화를 냈다.
“이런 무식한 놈들! 네놈들 무림 역사 시간에 도대체 무슨 공부를 한 게야?”
그의 입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혈마궁 혈마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백 년 전 천겁혈세 당시 강호를 피로 휩쓸었던 십대 기문병기 중 하나다. 그 무시무시한 빠름 때문에 절대로 잡을 수 없고, 유 일한 회피 방법은 피하는 게 고작이다. 절대 먹이를 놓치지 않는 사냥꾼이라 불리며, 이 화살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구사일생이라 불리우 는…….”
순간 염도는 입을 다물었다. 다른 관도들도 마찬가지였다. 염도와 비류연의 시선이 마주친 것이다.
“이런 젠장!”
지금 한가롭게 한담이나 나눌 때가 아니었다.
“위험해! 전원 방어 태세!”
슈슈슈슉!
그 순간 하늘로부터 화살비가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일제히 사격!”
한 번 쏘면 반드시 한 명이 죽는다는 일시일사(矢一死)를 자랑하는 자신이 쏜 화살이 빗나갔다는 사실 때문에 너무 당황한 혈궁은 일제 사격 지시를 내리는 절 호의 기회를 그만 놓치고 말았다. 혈궁의 자신감은 염도의 심장이 피분수를 뿜어내는 것을 신호로 잡아놓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빗나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터였다.
천무학관 대표단들은 자신들이 그냥 얼굴이 잘생기거나 인맥이 좋아서 백도의 대표로 뽑힌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다들 분연히 무기를 뽑아들 어 자신들을 향해 퍼부어지는 화살들을 쳐냈다. 내공이 실린 탓인지 화살들이 무거웠다.
“보통 놈들이 아니군! “
감탄하는 와중에도 염도는 도를 휘둘러 수십 개의 화살들을 동시에 박살내고 있었다. 염도를 노리고 날아드는 화살들이 작은 나무조각이 되어 주위로 산산이 흩어 졌다.
“크윽!”
“으아악!”
화살이 쉴새없이 쏟아지다 보니 끝내 피해를 입는 자가 나오고 말았다. 무더기로 쏟아져 내리는 화살비 중 하나가 미처 피하지 못한 관도 한 명의 허벅지를 꿰뚫은 것이다. 염도가 기억하기로는 종남파 출신의 졸업생인 듯했다. 이름은 잘 기억 안 나지만…….
화가 난 염도가 소리쳤다.
“야 이, 빙충아! 이런 기습 따위에 당해 허벅지를 다쳐? 너 내 손에 죽어볼래? 네가 그러고도 천무학관 대표단의 한 명이냐? 넌 평생 후보야!’
감히 자신이 인솔하는 대표단을 공격하다니! 염도의 분노가 지옥의 업화처럼 거세게 타올랐다. 그 불길을 식혀주겠다는 듯이 그의 머리 위로 다시금 화살비가 거 세게 쏟아져 내렸다.
진홍십칠염(眞) 검염기劍焰氣)
오의(奧義) 폭염산(暴炎傘)
염도의 애도 홍염이 다시 한 번 빛을 뿜으며 거대한 붉은 우산을 허공중에 드리웠다.
“노사님, 역시 그를 그곳에 맡기고 오길 잘한 것 같습니다.”
남궁상이 사방팔방으로 정신없이 쏘아져오는 화살들을 열심히 쳐내며 말했다. 그때 이송학을 그곳에 맡긴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렇구나. 만일 여기 있었다면 지켜내기 힘들었을 거야! 멀쩡하다면 모를까, 아직도 인사불성의 상태니…….”
빙검은 남궁상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빙검이 고수라고 느껴지는 점은 남들은 조금 힘겹게 화살들을 쳐내는 데 비해 그는 파리 쫓듯이 여유롭 게 화살들을 쳐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저희가 가는 길목에 그곳이 있었던 게 다행이지요. 그곳이라면 그를 안전하게 보호해 줄 겁니다.”
“중양표국 사람들이 잘해 주기를 바래야지.”
“잘했을 겁니다.”
남궁상은 자신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보지도 않고 쳐내며 대답했다. 중양표국 일행이 이곳에 없다는 사실도 참으로 다행이었다. 아마 그들이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 표물은 영영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당황하지 마라!”
“침착해!
여기저기서 분전하고 있는 일행에게 주의를 주며 빙검은 몇 개의 날아오는 화살을 손을 빠르게 움직여 잡아버렸다. 그에게 그것은 별로 고난이도의 묘기가 아니었 다. 그래서 그는 더욱 묘기의 난이도를 높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빙검의 손이 번개처럼 뻗어 나가자, 열 개쯤 쥐어져 있던 화살이 돌아온 주인을 향해 열 방향으로 날아갔다.
“크아아악!”
협곡 위에서 아홉 개의 피보라가 일었다.
“하나는 놓쳤나? ”
저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알 수 있단 말인가? 평범한 인간은 상상조차 불가능한 초감각의 세계이다.
“운이 좋은 놈이군.”
빙검이 혼자 중얼거리며 다시 한 번 날아오는 화살들을 잡아챘다. 빙검의 묘기에 가까운 기술을 본 대표단들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빙검의 묘기를 흉내 내기 시 작했다.
슈슈슈슉!
순간 백여 개가 넘는 화살들이 본 주인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빙검만큼의 정확성은 다들 보유하고 있지 못한지라 생각보다 적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적 의 예봉을 꺾었다는 점에서 칭찬할 만했다. 그 증거로 폭우처럼 쏟아지던 화살비는 어느덧 가랑비로 변해 있었다.
“되돌려져 날아오는 화살을 주의해라! 연사를 멈추지 마! 대형을 유지해!”
혈궁은 입 안이 바짝 타들어갔다. 예상외로 반격이 심했다. 설마 쏘아 보낸 화살을 손으로 잡아 되던지다니…, 생각지도 못했던 반격을 당하고 나니 어이가 없었 다. 활을 든 궁수 부대가 화살만 든 인간들에게 당하다니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대로 놔둔다면 피해가 점차 커질 수 있었다.
“이놈들! 죽어라!”
혈궁이 붉은 화살 아홉 대를 오른손으로 동시에 쥐고 그 중 하나를 시위에 걸었다. 그의 최고 절기를 선보이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혈겁마궁(血劫魔비기(秘
구궁연환사(九宮連環射)
혈야구성(血夜九星)
“가라!
하나의 혈마전이 시위를 떠났다.
거창한 외침과 날아가는 화살은 의외로 느렸다. 하지만 너무나 느린 게 문제가 되었다. 보통 저 정도로 느린 속도면 화살은 포물선을 그려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화살은 똑바로 직진해서 날아오고 있었다.
느린 대신 화살은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안개가 혈마전의 회전에 빨려들듯 휘말려 들어갔다. 화살이 직진하는 곳에는 빙검이 있었고, 그 앞에는 차가운 서리발 같은 검광을 내뿜으며 검을 휘두르고 있는 나예린이 위치해 있었다. 화살이 빙검에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나예린을 관통하고 지나가야만 했다.
위협적인 살기를 느낀 빙검의 시선이 그 원흉을 향했다. 나예린의 시선도 소용돌이치는 안개 속에 파묻힌 전율스런 화살을 바라보았다. 그때 나예린의 시야를 가 로막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것은 한 남자의 등이었다.
“류연!
그 순간 나예린은 스쳐 지나가는 비류연의 미소를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그의 시선은 일말의 두려움도 없이 정면으로 혈마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개가 기이한 나선의 조합을 그리며 소용돌이쳤다.
“피해!”
염도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느리게 다가오던 안개 소용돌이의 사방 여기저기에서 느닷없이 화살이 튀어나왔다. 안개 소용돌이 중심은 일종의 연막이었던 것 이다. 시간차를 두고 연속적으로 아홉 대의 화살이 연거푸 날아왔다. 살기가 가득한 절체절명의 공격이었다.
슈슈슈슉!
파박파바박!
8대가 연환된 화살이 비류연의 몸에 작렬했다. 비류연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안개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던 가장 느린 화살이 비류연의 몸에 작렬 했다.
콰쾅!
화산이 폭발하는 듯한 무시무시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주위의 공기가 질풍을 일으키며 거칠게 요동쳤다. 엄청난 돌풍이 사방을 휩쓸었다. 순간 주위가 조용해졌 다. 이 순간만큼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던 화살비라는 독특한 기후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구름 한가운데로 쏠렸 다.
“헉!”
염도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는 잠시 뒤 들려온 목소리에 자신의 두 눈을 세차게 비벼야 했다. 그의 눈에 어떤 믿기지 않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 다.
“히야! 이거 좀 비싼 물건인 것 같은데?’
태평스럽기 짝이 없는 목소리! 도저히 생사가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타는 전장의 한가운데라고 여겨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이 생사간두의 순간에도 어김없이 여 전히 생기발랄한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방금 전 화살꼬치 신세가 되지 않았나 의심되던 비류연이었다.
나예린의 잔뜩 굳어져 있던 얼굴이 봄날의 얼음이 녹아내리듯 사르르 녹아버렸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나예린 은 갑자기 멈칫했다. 자신이 방금 전 얼마나 긴장했는지, 그리고 지금 그녀가 얼마나 안심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이것은 곧 그녀의 행동이 비류연의 행동 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였다.
나예린이 맑고 심연한 시선으로 자신을 이토록 놀라게 한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왠지 손해보는 느낌이었다.
‘저건 또 뭐야??
“하나, 둘, 셋, 넷…, 아홉!”
분명 아홉 대였다. 염도는 다시 한 번 검산해 보며 자신의 계산이 틀리지 않았나, 되짚어보았다. 분명 아홉 대였다. 자신이 머리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열 이하의 숫자를 세는 데는 문제없었다. 그 먼지구덩이 속에서 비류연은 화살 아홉 대 중 하나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화 살에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는 걸로 보아 땅에 깊숙이 박혔던 것을 뽑아낸 건 분명히 아니었다. 저런 살기 가득한 특색 있는 붉은 화살이 아닌 밤중의 홍두깨처럼 나타났을 리는 만무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단하나 뿐이었다.
“어, 어떻게 저럴 수가! 맨손으로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거늘!”
경악한 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빙검도 고약한도 잠시 자신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무슨 속임수를 쓴 거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결론짓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어떤 이유로도 설명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저 아홉 대의 화살이 각 기 다른 시간 간격을 두며 연속해서 날아오는 것은 분명 전설적인 궁술인 구궁연환사가 분명했다.
그러나 그런 전설적인 명성과 피비린내 나는 소문을 일축시키기라도 하듯 비류연은 보란 듯이 혈마전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괴물은 어쩔 수 없는 괴물인 건가?’
염도뿐만 아니라 다들 어이없는 시선으로 비류연을 쳐다보고 있었다.
“일단 받은 건 돌려줘야겠죠?”
차마 아까워 손에 쥔 혈마전은 어쩌지 못하고 비류연은 바닥에 꽂혀 있는 화살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의 시선이 아홉 개 화살의 주인이 있는 방향을 향했다. 그의 눈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팟!
순간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한 줄기 번개가 공기를 찢으며 비상했다.
“크악!”
안개 저편에서 울려 퍼진 단말마!
툭!
붉게 물든 혈마궁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날, 십이혈마대 제9대는 조장을 잃어버렸다.
“생각보다 기습의 효과가 적군요. 저렇게 쏘아대는데도 사망자가 한 명도 없다니 말입니다. 게다가 저항 또한 격렬합니다.”
혈검이 여기저기에서 반 토막 신세가 되는 화살들과 무서운 속도로 되돌려져 날아오는 화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래 봬도 백도의 대표들이다. 오히려 이 정도 공격에 당하면 내가 섭섭하지.”
적혈은 이미 예상했다는 투였다.
“화살은 발만 묶어주면 충분해. 제2진을 발동시켜라!”
“복명!”
혈검이 푸른 깃발을 올렸다.
“제2진 발동!”
혈쇄가 이끄는 제10대 대원들이 등에 메고 있던 둥근 바퀴같은 짐을 꺼내들었다. 바퀴를 감싸고 있던 천을 풀어내자 그 안에서 쇠사슬이 둘둘 말려 있는 바퀴가 나 왔다. 그들은 땅에 쇠막대를 박고 그 한가운데에 바퀴를 끼웠다. 막대는 중간에 접을 수 있도록 장치가 되어 있어 바퀴의 각도를 원하는 각도로 조절이 가능했다. 그들은 바퀴를 약간 비스듬하게 설치했다.
제10대 대원들은 각자 오른손에 바퀴에서 흘러나온 쇠사슬의 시작 부분을 잡았다. 쇠사슬은 아주 거무튀튀 하면서도 심연한 색을 지니고 있었다. 보통의 평범한 철로 만든 게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자신의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창을 꺼내 쇠사슬 끝에 장착했다. 단창의 창날은 여섯 개나 됐는데 특이한 모양으로 안으로 휘어져 있었다.
“철쇄봉혼진(鐵鎖封魂陣) 발동(發動)!”
촤라라라락!
신호와 함께 수십 개의 철봉에 연결된 수십 개의 바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콰콰쾅!
좌우 협곡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날아온 검은 철쇄가 요란한 굉음을 내며 지면에 박혔다. 철쇄 끝에 있는 창은 생기긴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게 생겼지만 그것으 로 사람을 상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방에서 날아온 철쇄가 좌우로 거미줄을 치자 대표단은 진퇴가 용의하지 못했다.
“이건 또 뭐야! 우릴 이곳에 가둬보기라도 하겠다는 이야기야!”
염도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까앙!
모용휘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검기를 최대한 주입시켜 베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손톱만큼의 흠집도 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재질로 만들었기에 이렇게 단단한 것일까? 검날이 상하지 않은 것만 해도 행운이었다.
“후후후, 그 철쇄는 만년한철을 제련해 만든 것이라 그 어떠한 날카로움으로도 벨 수 없지!”
적혈의 입가에 비릿한 비웃음이 맺혔다.
“적들은 우리의 발목을 여기에 묶어두고 싶은 모양이군.”
빙검이 사방에 쳐진 철쇄의 거미줄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자 염도가 같잖다는 듯 투덜대며 말했다.
“흥! 하지만 어차피 철쇄는 봉쇄하기 위한 물건! 이런 새끼줄 따위로는 우리의 발길을 묶을 수 없다. 게다가 아직 다른 유효한 공격 수단도 없잖아?”
이런 상태라면 저들도 화살 공격 이외에 다른 직접적 공격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비차륜진(飛車輪陣)을 전개하라!”
협곡 위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적혈이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혈검이 다시 황색 깃발을 올렸다.
촤라라라락!
쇠와 쇠가 맹렬히 회전하며 격렬히 부딪치는 소리가 협곡 전체에 메아리쳤다.
“저…. 저게 뭐지?”
노학과 당삼은 당황하여 눈을 크게 떴다. 사방에 쳐진 흑빛 쇠사슬을 타고 칼날 달린 철륜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하며 아래로 떨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날카로 운 철의 이빨을 지닌 이 맹수는 매서운 속도로 몸을 회전시키며 피의 제물을 물색하고 있었다. 게다가 철쇄와 철쇄 사이는 거리가 좁아서 방어하기도, 그렇다고 회 피하기도 용의하지 않았다.
수십 개의 쇠사슬을 타고 수십 개의 철륜이 폭포처럼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상상하기조차 두려울 것이다.
“모두 피해!”
염도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시무시한 바람을 일으키며 철륜이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하나를 피했다고 안심하던 염도는 그만 그의 뒤통수를 향해 접근 하는 차가운 돌풍에 기겁하며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허걱! “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반대쪽으로 쳐져 있던 쇠사슬을 타고 다른 철륜 하나가 시간차 공격을 해왔던 것이다. 이 철쇄의 간격은 두 개의 철륜이 서로에게 부딪치 는 일이 없도록 교묘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무서운 놈들이로군! ‘
위에는 화살비, 아래는 철륜! 신경이 분산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
“크아악!
“아악!”
이미 일행 중 몇몇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하는 철륜의 이빨에 상처를 입었다. 처음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하늘에서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화살비를 내려주고 있었다.
‘이대로는 위험해!’
빙검과 염도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품었다는 것은 기념할 만한 일이었다. 뭔가 해결책을 제시해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염도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쪽에 있던 쇠사슬이 한 번 크게 출렁거렸다. 그 위로 사뿐히 비류연이 올라섰던 것이다. 그러나 묵룡환의 무게 때문에 크게 출렁거 렸던 것이다. 파도치듯 심하게 출렁이고 흔들리는 쇠사슬 위에서도 비류연은 태연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쩔 속셈이지?’
사람들의 시선이 비류연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랑!
쇠사슬이 다시 한 번 출렁거리며 비류연이 도약했다.
비뢰문(飛雷門) 독문신법(獨門身法)
봉황무鳳凰舞) 오의(義)
봉무등천(鳳舞騰天)
파바바밧!
비류연은 쇠사슬을 타고 거꾸로 협곡 위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것은 협곡 위에서 쇠사슬 곁을 지키고 있던 혈마대원들도 마찬
가지였다.
“서둘러!!”
제12대 대원이 재빨리 철쇄에 비차륜을 장착했다.
쐐애앵!
바람을 가르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칼날을 회전시키며 비차륜이 비류연을 향해 쏜살같이 내려갔다.
“위험해요!”
나예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지금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비류연이 위험하다고 느껴지자 그녀의 얼굴에 씌워져 있던 얼음 가면이 산산이 부서지며 나예린이 절규하듯 외쳤다.
“류여어언!’
<『비뢰도』 1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