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2권 4화 – 비사진의 한가운데서

비뢰도 12권 4화 – 비사진의 한가운데서

비사진의 한가운데서

뱀들이 무서운 땅꾼들

“일단 우리들의 발을 묶어 놓을 속셈이군! “

이런 혼란의 한가운데서도 빙검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채

한 치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적들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자신들의 행보를 늦추고 싶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겸사겸사해서 자신들의 전력도 떨어뜨리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의도대로 자신들의 발걸음은 이 산에서 완벽하게 저지당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미 우리가 이 길로 올 줄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고? “

염도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렇다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정도로 성대한 환영이 불가능했겠지.”

“도대체 누가?”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것은 이 싸움이 끝났을 때 중요해지는 일일세. 이번 일은 주의를 소홀히 한 우리의 실수일세. 남을 탓할 일은 아니야. 이 정도 습 격당하기 좋은 지형임에도 불구하고 사전 정찰을 소홀히 했으니 당해도 싸지, 안 그런가?”

자신의 사전 정찰 지시를 방해했던 염도를 향한 빙검의 싸늘한 일침이었다. 빙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염도의 가슴을 후벼 파는 비수가 들려 있는 것 같았다. 이 붉은 머리칼 사내는 몸을 부르르 떨기만 할 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에이, 저런 험한 곳에 누가 매복해 있겠나? 괜히 쓸데없는 신경 쓰는 것 아닌가? 괜찮아, 괜찮아. 무슨 일이 생기면 다 내가 책임지지. 책임진다니까! 그러니 그냥 가자구!’

내가 왜 그랬을까? 염도는 마음속으로 사정없이 머리를 두드리며 자신을 책망했다. 분하지만 빙검의 말에 그 어떤 대꾸할 말이 없었다. 분노와 수치가 한데 어우 러져 그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자네의 말, 꼭 책임지길 바라네!”

그냥 잊어줘도 좋을 말이건만, 빙검의 얼굴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잊지 않겠다는 의지가 넘쳐흘렀다.

“……”

이번에도 역시 염도는 어떠한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단지 정신적인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엿 됐다!’

빙검에게 약점을 잡히고 말다니!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실수였다.

노학은 개방의 거지가 으레 그러하듯 뱀을 무척 좋아했다. 그 뱀이 독사든 독사가 아니든, 물뱀이든 꽃뱀이든, 심지어 도마뱀이든 상관 없이 차별 없는 사랑을 보 낼 만한 아량(식성을 빙자한)을 지니고 있었다.

뱀 구이하면 견공 목욕한 냄비 탕(통칭 멍멍탕)과 함께 개방의 2대 선호식품 중 하나였기에 그가 싫어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오늘 이 시간을 기해 자신의 2대 기호식품이 1대 기호식품으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강력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코끝을 찌르는 강렬한 비린내, 그리고 사방에서 조여드는 독기 어린 하얀 이빨. 이놈들 나름대로 자신들의 치아표백 상태를 자랑하고 있는 듯한데 솔직히 말해서 전혀 귀엽지 않았다. 이건 아무래도 아니었다.

그런 느낌은 비단 노학뿐만이 아니었다. 요즘 들어 본명보다는 당삼으로 더 잘 불리는 사천당문의 직계손 당철영으로 말하자면, 그에게 독사는 독갈(毒竭:독전 갈), 독오공(毒蜈蚣:지네), 독지주(毒蜘蛛:거미) 등의 독충들과 함께 무척이나 친숙한 애완동물(?)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과 자신의 가문에 일용할 맹독(毒)을 제공해 주는 아주 소중한 기증자였던 것이다. 그것이 자율적이었는지, 강제적이었는지는 여기서 다루 지 않도록 하자.

그도 소싯적부터 여동생 주제에 당돌하게 감히 누나라고 주장하는 한 여인과 함께 (당문혜가 들었다면 펄쩍 뛸 만한 의견이었다), 그리고 당가의 자제들과 함께 이 름도 다 주어 삼킬 수 없는 다양한 종류의 뱀들을 길가의 돌멩이 밟듯 만져 온 전적이 있었다. 물론 그 뱀들은 몽땅 독사였다. 당문에서 독 없는 뱀은 이른바 쓸모없 는 ‘왜 태어났니?’생물이었다.

당가가 보유한 여러 개의 독물 채집장 중 따로 전문적인 독사 양사장(養蛇場)이 있는데, 그곳은 당가혈손들의 필수 수련 과정이었다.

독의 맹주라 불리는 사천당문의 자식이 독사가 무서워 벌벌 떨고 있다는 이야기는 강호에서 아마도 지나가는 똥개 콧방귀 정도의 썰렁한 반응밖에 끌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삼은 오늘 최초로 비늘 달린 이 귀염둥이들이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수로…, 셈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아지면 그렇게 될 수도 있구나! 그는 오늘 새로운 교훈을 얻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아직도 누나 동생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당문혜를 바라보았다. 철의 간담을 지녔다는 이 말괄량이도 그의 의견에 동의하는 듯, 얼굴색을 창백하 게 변화시키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머리 속에 이런 끔찍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규모의 사진(蛇陣)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 옛날에 있었다는 것을 본가의 교육 중에 배웠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순간 벼락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런 바보 같은! 왜 그 사람을 떠올리지 못했지? 그 악명 높은 노괴물을!’

갑자기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지는 당삼이었다.

“이런 젠장 할! 이제야 생각났다. 과거에도 있었지. 이런 엿 같은 진법을 구사하는 빌어먹을 늙은이가!”

염도의 입에서 상소리가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이런 엿 같은 경우를 당하다 보면 누구라도 그와 같은 심정이 될 것이다.

“음!”

빙검도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뱀이 시건방지게 하늘에서 떨어질 때부터 짐작했어야 했던 것이다. 이 정도의 대규모 사진을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은 전 무림을 통틀어 단 한 사람밖에 없었 다.

비사마군(飛蛇魔君) 모사령!

두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그 노괴물은 이미 죽은 줄 알았는데 아직도 생존해 있었단 말인가?”

빙검이 반문했다. 벌써 행방불명된 지 백 년째 소식이 끊겨 있던 인물이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염도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벌써 백 년도 더 전의 사람이잖나. 하룻밤 사이에 정사연합군 삼백 명을 뱀 먹이로 만든 그 유명한 이야기도 천겁혈세 때였다네. 선혈해(鮮血海)의 대혈전 후 살 아남았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는데?”

역시 쉽게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본인이 아니라면 후계자라도 되는 모양이지. 하지만 그것치고는 솜씨가 너무 좋아. 하지만 정말 그 본인이라면..

정말 그렇다면 매우 귀찮은 상대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둘이 그 이름만 듣고 벌벌 떨 만큼 약골은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겠나?”

“어쩌긴 뭘 어째! 그 빌어먹을 작자의 미끌미끌한 대갈통을 뱀 굴에서 끄집어내야지. 이렇게 한도 끝도 없이 쏟아져 내려오는 이놈들을 일일이 상대해 봤자 아무 런 소득이 없잖아?

빙검이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어떻게?”

“나한테 맡기라고!”

염도가 가슴을 치며 자신 있게 대답하자 빙검은 괜히 좌불안석(坐不安席)처럼 불안해졌다.

“야! 이 겁쟁이 뱀 땅꾼 모씨 늙다리야! 생쥐처럼 숨어 있지 말고 냉큼 뛰쳐나와라! 오늘 이 몸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주마!’

염도가 협곡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내공이 실린 터라 그의 목소리는 협곡 구석구석까지 잘 미쳤다.

“비사마군 모사령이 아니었나?”

빙검이 친절하게 명호를 정정해 주었다. 백 년 전에 스스로를 비사신군이라고 칭한 모양이었지만, 백도인에게는 비사마군일 뿐이었다.

“비사마군은 무슨? 그냥 뱀 땅꾼이지! 늙다리가 양사장에서 뱀이나 키우지, 뭐 하러 강호에 나왔어? 얌전히 산에 틀어박혀 뱀이나 치고 있는 줄 알았더니만 뒷구 멍으로 호박씨만 까고 있었구만! 그런 노괴에게 마군이라는 거창한 칭호가 가당키나 하나? 마졸이라면 어울릴지도 모르겠군. 비사마졸(飛蛇魔卒)? 오호, 이거 의외 로 괜찮은데.”

스스로의 재치에 감탄하며 염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사마졸! 아무리 되뇌어 생각해 봐도 마음에 쏙 들었다.

“어이~, 비사마졸! 어디 숨었냐? 얼굴이나 좀 보자! 어이~, 뱀 땅꾼 비사마조오올! ”

신명이 나는지 염도는 고함을 멈출 줄 몰랐다. 물론 이 소리는 협곡 위에서 뱀들을 부리고 있던 비사마군 모사령의 귀에도 똑똑히 한자도 빠짐없이 전달되었다. 

“이…, 이런 찢어죽일 놈!’

모사령이 이를 뿌드득 갈았다. 감히 자신을 졸(卒)로 보다니!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은 백 년 만에 처음이었다.

“백 년 동안의 은거가 너무 길었나? 별 해괴한 놈이 다 지랄일세. 어허, 강호의 위계질서가 아예 땅에 떨어졌구먼.’

지난 백 년 동안 감히 자신 앞에서 저토록 오만방자하고 무례한 놈은 없었다.

“이제 그만하게! 장난은 한 번이면 족하네. 적을 자극해서 어쩌겠다는 건가?”

염도의 고함이 끝날 줄을 모르자 빙검이 막고 나섰다.

“흥! 두렵나? 자네는 두려울지 몰라도 나는 하나도 두렵지 않네. 만일 나의 도발에 응해 그가 내 앞에 나타난다면 그는 오늘이 자신의 제삿날이 되었음을 깨달아야 만 할 거야. 그딴 녀석은 단순한 뱀 땅꾼인 비사마졸일 뿐이야. 과분하게 마군은 무슨 마군? 뱀이나 몰고 다니면서 말이야. 어이, 뱀 땅꾼 어디 있나? 나오기가 무섭 냐? 본인의 도가 무섭지 않다면 빨리 나와라, 비·사·마·졸! “

내공이 실려 뱉어지는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본인이 들으라고 하는 말 같았다. 빙검은 더 이상의 언쟁으로 쓸데없이 힘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마음대로 해라!

나이 사십이 넘어서도 여전히 하는 짓은 코흘리개 어린애나 진배없는 염도였다.

“그 동안 먹은 나이는 다 어디다가 갖다 버렸는지…….?

하지만 이런 빙검의 내심과는 달리 염도의 도발은 지나칠 만큼 효과적이었다. 백 년 수양도 저런 막무가내 도발 앞에서는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었다.

“크으으윽! 저…, 저 놈이! 오냐, 네놈이 오늘 반드시 죽기를 갈망하는구나. 죽고 싶다는데 죽여 줘야지.”

열통이 터져 뚜껑 열린 모사령이 전력을 다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협곡 위에 남아 있던 예비 뱀 군단이 몽땅 다 협곡 아래로 날아 내려갔다.

“단 한 놈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크하하하하!”

원래 그의 주변에 남아 있던 뱀들은 전력의 보존 차원이기보다는 사실 몰살시켜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분노한 모사령의 회색 뇌 속 에는 이미 상부의 명령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끼아아악! 꺄악! 꺄악! 저리 가! 저리 가! 저리 안 가?’

지치지도 않는지 마하령의 날카로운 비명이 계속해서 연신 터져 나왔다. 거의 살인적인 청각 박살신공의 수준이었다.

“이런, 이런!”

용천명은 자신의 섬세한 귀를 저주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떻게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 있단 말인가? 세상을 감싸고 있는 비밀의 신비는 과연 놀라웠 다. 세상의 신비에 매료(?)되어 있는 용천명에게 급작스런 정세의 변화가 감지되었다.

왜 갑자기 줄어가던 뱀들의 수가 급격히 증가했을까? 용천명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미 헤아리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베었는데도 아직 끝이 안 보이다 니……. 마치 무한으로 밀려오는 해변의 파도와 맞상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슨 생각을…, 끼악! 하고 있는 거죠? …, 끼아아악! ”

멍하니 기계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용천명을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마하령이 물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순간에 뱀들의 공세가 멈춘 것도 아니었다. 이것들은 마하령의 질문과 답변 시간을 따로 할애해 줄 만큼 친절하지 않았다.

잠시 용천명은 마하령과 허공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마치 과거에 그곳을 지나갔던 목소리의 흔적이라도 찾아보겠다는 생각 같았다. 몇 번을 번갈아 보던 용천 명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같은 비명인데도 어찌 이리 틀릴 수가……. 신은 공평치 못했어. 너무 서글픈 일이군!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는 그 모습을 마하령은 결코 놓치지 않았다. 뭔가 굉장히 그녀의 마음에 가시처럼 걸리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 방금, 끼악! 뭐라고…, 끼악! 그랬어요? 끼아악!”

본능적인 위화감과 불쾌감(느끼긴 했는데 왜 불쾌한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을 느낀 마하령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녀가 휘두르는 도는 여전히 살벌 할 정도로 난폭했다.

“아…,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안 했어요! 잘못 들었겠죠.”

순간 가슴 한구석이 뜨끔해진 용천명이었지만, 이내 태연을 가장하고 태평스럽게 말했다. 정말 이럴 때마다 그는 소림 72종 절예 중 하나인 금강부동심법이 얼마 나 뛰어나고 유용한 무공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어떤 상황 하에서도 순식간에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으니 말이야!

검을 휘두르면서도 용천명은 마음속으로 부처님의 은혜와 사문의 가르침에 깊은 감사를 드렸다. 마음 속으로 합장하고 있는 용천명을 바라보며 마하령은 아직도 찌릿찌릿한 여인의 직감으로 벼려진 번뜩이는 서슬 시퍼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이 위기에 대처하는 용천명의 기지는 탄복할 만한 것이었다. 그는 구차한 변명 대신 가장 간단하고 단순한 동작만으로 이 위험천만한 위기 상황을 벗어났던 것이 다.

“마소저? 괜찮겠어요? 조심해요!”

그는 단지 왼손 검지로 마하령의 발 뒤쪽을 무심하게 가리키기만 했다. 그것만으로도 지나칠 만큼 충분했다. 왠지 심각해 보이는 손가락 끝을 따라 마하령의 시선 이 서서히 이동했다. 그리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지점에 시선이 다다랐을 때 그녀는 경악으로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그녀가 다른데 신경을 쏟는 사이 어느새 독사 한 마리가 그녀의 발뒤꿈치 지근거리까지 기어왔던 것이다. 이제 물기만 하면 된다는 듯 그 독사는 애교스럽게 붉은 혀를 낼름거리며 날카로운 독이빨을 기세 좋게 번뜩였다.

“끼아아아악!’

다시 한번 낙뢰곡이 떠나갈 듯한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자지러지는 비명이 사정없이 좁은 계곡에 무수한 반향을 일으키며 질주하듯 울려 퍼졌다.

“죽어! 죽어! 죽어!”

휙휙휙! 파바밧!

마하령의 도가 선풍(旋風)처럼 휘둘러지자 그녀를 중심으로 엷은 피보라가 일었다. 갈기갈기 찢겨진 독사들의 시체가 지상으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자신에게 혐오감을 안겨 준 생물에 대한 그녀의 보복은 엄청 잔혹했다.

“틀림없군! 역시 틀려!

용천명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뒈져라!”

거친 고함과 함께 피어오르는 뜨거운 열기!

화르르르륵!

열심히 달려드는 독사들을 베어내고 있는 용천명의 얼굴로 화끈한 열기가 밀려왔다. 염도가 저편에서 홍염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뱀들을 단체 통구이로 만드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의 억센 손이 한 번 휘둘릴 때마다 불꽃의 파도 같은 도기가 일렁이며 사위를 휩쓸어 갔다. 그 열기 안에 휩쓸리면 검게 탄 재밖에 남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말이야…….”

“뭔가?”

염도의 통구이 솜씨를 잠자코 구경하던 빙검이 무심히 대답했다.

““자네 사부님은 어디 계시는가? “

수십 마리의 뱀들을 단체 화장시키며 염도가 물었다. 그러자 빙검은 가볍게 눈살을 찡그리며 말했다.

“말에 어폐(語弊)가 있군!

“뭐가?”

“꼭 내 ‘사부’이기만 하고, 자네 사부님’은 아닌 듯이 말하니 말일세!”

상당히 불쾌하다는 듯한 빙검의 반박에 염도의 한쪽 볼이 거칠게 난 붉은 수염과 함께 실룩거렸다. 부아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너무 따지려 들지 말게, 사제! 그런 건 별로 좋은 습관이 아니라네! 특히 ‘손윗사람한테는 더욱더 말이야!

유별나게 뒤의 ‘사제’란 단어를 강조하며 염도가 말했다. 이번에는 빙검의 청백색 눈썹이 움찔거렸다. 얼음처럼 차갑고 냉랭한 시선이 염도를 직격했다.

“어디선가 언제나처럼 유유자적하고 있겠지. 나보다 ‘한참이나 ‘오랫동안 ‘수·발’을 들며 제·자·생·활을 한 자네가 훠얼씬 더 잘 알지 않나?”

한기가 풀풀 날리는 싸늘한 목소리로 빙검이 대꾸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격렬한 불꽃이 튀었다. 이제 비류연의 행방 따위는 어찌되어도 좋았다. 이미 그것은 그들 의 안중에는 없는 일이었다.

비류연은 나이 많은 두 제자의 생각처럼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도 지금은 다른 때에 비해 상당히 바쁜 상태였다. 일단은 자신을 찢어 죽이려고 작정한 듯 열렬 히 달려드는 한 남자의 맞상대를 해 주어야만 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죽어라!”

쉬익! 쉬익!

굵고 검은 쇠사슬이 바람을 세차게 가르며 허공에 난무했다. 십이혈마대 제 10조 조장 혈쇄는 두 눈에 핏발을 세운 채 광기 어린 기세로 사정없이 두 가닥의 철쇄 를 연달아 휘둘렀다. 그러나 비류연은 애초에 형체가 없는 안개로 만들어진 신기루처럼 스치는 것조차도 용납하지 않고 있었다.

여덟 개의 철쇄를 동시에 부린다는 자신의 단련된 무공이 오늘만큼 무력하게 느껴진 적도 없었다. 자신이 휘두른 쇠사슬이 빗나가면 빗나갈수록 그의 마음에 앙금 처럼 가라앉은 공포는 점점 더 가중되고 있었다. 이빨이 딱딱 사정없이 부딪치고 허벅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었다.

‘절대로 막아야 돼!’

이놈을 이대로 놔두면 철쇄봉혼진이 통째로 붕괴될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그는 각오를 다지며 살기를 극성으로 피워 올리고 어떤 날카로움으로도 끊을 수 없을 것 같은 굵고 단단한 검은 철쇄를 들어올렸다. 혈쇄라는 호칭에 걸맞게 그의 무기 또한 검은 먹빛을 띈 철쇄였다.

진의 붕괴, 그것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했다.

“합!”

그가 성난 목소리로 울부짖으며 양손을 풍차처럼 휘두르자 두 가닥의 쇠사슬이 마치 성난 용처럼 꿈틀거리며 비류연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의 독문무공인 혈겁쇄 법(血劫鎖法) 중 절초인 노룡분쇄(怒龍粉碎)였다.

윙윙 거칠게 바람을 가르며 달려드는 검은 철쇄는 비류연을 단박에 피 떡으로 만들어 버릴 기세였다. 그러나 비류연의 몸이 희끗 움직이자 두 가닥의 노룡은 그저 허무하게 그의 잔상만을 찢고 지나갔다.

“헉!”

혈쇄의 눈이 부릅떠졌다.

‘어…, 어디 있지? 어디냐!’

비류연은 공중에 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언제 슬쩍했는지 모를 비차륜 하나가 들려 있었다. 검은 바퀴와는 달리 하얀 이빨이 햇빛을 받아 날카롭게 빛났다. 빡!

이윽고 비류연의 오른발이 허공중에서 비차륜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쉬리리리릭!

비차륜은 쏘아진 화살 따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대기를 헤집으며 날아들었다.

푸확!

툭!

선혈로 붉게 물든 철쇄가 바닥에 떨어졌다.

파바바바밧!

열두 개의 광륜이 비류연의 몸에서 무서운 기세로 튀어나왔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비환(飛環)에 비뢰도의 오의를 응용해 던진 것이다. 그 효과와 위력은 대단 했다. 설혹 철담비환 진조운이 되살아와 그것들을 던진다 해도 이만한 위력을 내기는 힘들 정도였다.

그것들은 스스로의 지혜를 가진 영활한 뱀처럼 민활하게 그리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잡목림 사이를 마구 헤집으며 지나가는 섬광의 궤적을 따라 붉은 피와 함께 끊임없이 비명이 이어졌다.

이 일격은 십이혈마대의 포위 매복 공격의 붕괴를 가져오는 시발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