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2권 21화 – 첫 번째 관문의 관리자 (12권 끝)

비뢰도 12권 21화 – 첫 번째 관문의 관리자

첫 번째 관문의 관리자

-비공답운 종쾌

새하얀 구름의 평원을 종이장처럼 뚫고 솟은 ᄀ대한 창 같은 봉우리들 중원오악의 하나답게 그 높이는 구름도 감히 닿지 못할 정도로 높았다.

그들은 그런 험한 봉우리 중 하나를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산등성이는 흰 구름 깔린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이 빠진 톱니처럼 들쑥날쑥 튀어나와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길은 험했다. 아니 길이라고 해도 될지 의문스러울 정 도였다. 아무래도 빼어난 절경, 기경이라는 것은 길이 험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인 듯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올라가든지 내려가든지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론은 이미 선택 전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가파른 비탈길을 신법을 이용하여 빠른 속 도로 올라갔다.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무성한 잡초와 빽빽한 잔가지들을 해치며 반 시진쯤 올라갔을까? 그들은 눈앞에 나타난 돌연한 난관에 봉착해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자연의 손길 이 만들어 낸 거대한 관문이었다.

“어이, 이봐! 얼음탱이! 혹시 길을 잘못안거 아냐?”

염도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닐세! 분명 이 길이야!”

빙검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흥, 그렇다면 자네가 길치인 모양이지.”

염도의 폭언에 빙검의 관자놀이가 순간 꿈틀했다.

“분명히 이 길이 확실하네. 내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

“그렇다면 저건 뭔가?”

염도가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20장은 족히 되어 보이는 절벽이 가로놓여 있었는데 그 반대편의 벼랑은 이쪽보다 7~8장은 더 높아 보였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건너편으로 건너갈 만한 다리는 눈 씻고 찾아봐도 행방이 묘연했다. 우회로 따위도 당연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흘흘흘, 그는 길을 잃지 않았다네. 방향치는 더욱더 아니지. 뿐만 아니라 아주 제대로 찾아오기까지 했네.”

순간 모든 대표단의 시선이 일제히 목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누더기나 다름없는 허름한 회색 옷을 걸친 노인 한 명이 검은색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노인 의 머리는 단정함과는 거리가 먼 지저분하게 풀어헤쳐져 있었으며, 수많은 고난과 인생의 역정을 겪은 듯한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노인장께서는 뉘신지요?”

빙검이 대표로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그냥 이곳을 지키는 별 볼일 없는 늙은이라네. 허허허허!

노인은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혹시 노학 자네 사문의 존장이 아니신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남궁상의 과격한 질문에 노학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닐걸? 저런 모습을 한 분이 화산 천무봉에 계시다는 이야기는 지금껏 들어보지 못했어. 게다가 관문지기라면 소문이 나지 않았을 리가 없지.”

“아무래도 이곳은 아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그리고 알려서는 안 될 그런 장소인 듯한 느낌이 드네. 우리가 알고 있는 강호와는 전혀 다른 강호가 이곳에는 존재 한다는 느낌이 들어. 과연 어떤 일이 우리의 눈앞에 펼쳐질까?”

남궁상은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혈관을 흐르는 피의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이제 앞으로 그가 보고 들으며 경험 할 것들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맥을 달리하는 새롭고 놀라운 경이와 경악으로 가득 찬 것일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그를 지배했다.

그러나 그것이 경이롭다 못해 경악스럽기까지 해 얼마만한 절망적인 공포를 그들의 가슴에 각인시켜 줄지는 아직 아무도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거대한 두꺼비가 웅크리고 있는 듯한 바위 위에 앉아 있는 노인의 체구는 무척이나 왜소해 보였다. 젓가락 하나 들 힘도 없어 보이는 그 노인은 키가 보통 사람의 절반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것 같았다. 그 노인의 옆에는 독특하게 생긴 두 개의 나무 막대가 양쪽에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 천무학관 화산규약지회 대표단을 이끌고 있는 관철수라는 사람입니다. 괜찮으시다면 노 선배님의 존함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다시 한 번 포권을 취하며 빙검이 정중하게 물었다. 이런 곳에 있는 인물이 결코 평범할 리 없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허허허, 뭐 거창하게 존함까지야…, 이 늙은이의 이름은 종쾌라고 한다네. 옛날 옛적에는 한때 비공답운(飛空踏雲)이라는 허명으로 불린 적도 있었지.”

노인은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 말이 던져준 충격의 파장은 엄청난 것이었다.

“비, 비공답운 종쾌! 천하제일경공!”

빙검을 비롯한 대표단의 일행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비공답운이란 명호가 강호에 이름을 떨친 것은 백 년 전이었지만 아직 그 명성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진 것은 아니었다. 경공에 관해 배울 때면 누구나 한 번쯤 그 이름을 듣게 되기 때문이다.

비공답운 종쾌!

하늘을 날아 구름을 밟는다는 칭호를 가진 이 사람은 경공에 관해서만큼은 전설을 이룬 사람이었다.

‘바람보다 빠른 게 뭔지 알고 싶다면 종쾌를 만나보라!”

그 당시 그에 대한 평가로 이런 말까지 떠돌 정도였으니 그가 이룬 경공의 경지가 얼마나 높았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빠름에 대한 집착 때문에 쾌속광이 라 불리기도 한 인물이었다.

천겁혈세 이후 행방불명이 돼 그 행적이 묘연했는데 그 전설적인 인물을 이런 외딴 산골짜기에서 만나다니 너무 놀라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위명의 노인이 바위에서 옆에 놓아둔 두 개의 막대기를 들고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느낀 경악에 비한다면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그에게는 그와 함께 전설을 만든 그의 자랑거리이자 상징이나 다름없었던 두 다리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다리는 빠름, 쾌속의 상징과 같은 것이었다. 백 년 전 그의 발과 그의 두 다리에는 빠름과 신속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백년이 지난 지금 그 상징물은 더 이 상 그의 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노인의 키는 다른 보통 사람의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그의 양다리는 모두 잘려나가고 지금 두 다리가 달려있어야 할 그곳은 텅텅 빈 채 헐렁한 바지만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대신 그의 양 손에는 기다란 나무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아마도 저 두 개의 얇고 긴 나무 지팡이가 그의 두 다리를 대신해 주고 있으리라.

“그…, 그건 도대체?”

남궁상의 시선이 비어있는 두 개의 바지 자락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 이것 말인가? 별거 아니라네. 한 순간의 자만에 대한 평생의 쓰디쓴 교훈이라고나 할까…….?

비공답운 종쾌의 얼굴에 쓰디쓴 고소가 머금어졌다. 그러나 그런 게 별거 아닌 게 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너무 그렇게 대놓고 불쌍하다는 표정은 짓지 말게나. 두 다리가 없어도 아직 이런 재주 정도는 부릴 수 있으니깐 말일세!”

스르륵! 순간 남궁상의 시야에서 종쾌의 모습이 사라졌다.

턱!

이윽고 남궁상의 등 뒤로부터 그의 어깨에 나무 막대 하나가 올려졌다. 놀랍게도 그것은 종쾌의 오른쪽 목발이었다. 어느새 남궁상의 배후를 점한 종쾌가 왼쪽 목 발로 전신을 지탱한 채 오른쪽 목발을 그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방심했군, 젊은이! 이미 자네는 나의 검에 죽었다네. 불구자라고 해서 함부로 얕봐서는 안 되지. 이 늙은이가 비록 늙고 두 다리도 잃었지만 이 정도 재주는 부릴 수 있다네.”

남궁상의 등이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목발이 얹혀졌던 그 순간 마치 한 자루의 예리한 검이 그의 목을 베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그 순 간 자신의 죽음을 체험할 수 있었다.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 갔다.

종쾌의 이런 움직임에 경악한 것은 비단 남궁상 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대표단 일행들도 모두 놀란 눈으로 불구자 노인과 그 노인에게 뒤를 내어준 남궁상을 번갈 아 보았다. 이들 중 상당수가 노인의 움직임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깨에서 목발을 떼어내자 비로소 남궁상은 얼어붙어 있던 몸을 움직일 수가 있었다. 목발이 어깨 위에 올려져 있을 때는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옴짝달싹 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노부가 지나간 케케묵은 이야기를 하나 해주겠네. 이 시험을 치르기 전의 여흥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주게나. 어느 옛날이야기나 그렇듯이 이 이야기 또한 귀중한 교훈이 될 테니 말일세. 그리고 이 관문의 유래에 대해서도 말이야.”

“유래라니요?”

“자네들도 들었다시피 3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네. 각자의 관문에는 그 나름대로의 유래가 있지. 물론 자네들 입장에서는 별로 듣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일세.”

“……?”

암울한 눈동자로 말끝을 흐리는 종쾌의 모습은 이상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약 백 년 전에 한 남자가 있었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홀연히 나타났다네. 아무도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했지. 물론 처음에는 누구도 그 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았네. 그런 일은 언제나 있었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곧 자신들의 안일했던 생각을 뜯어고칠 수밖에 없었지. 그자의 손에 다섯 개 의 방파와 일곱 개의 회(會), 두 개의 명문대파가 멸문 또는 봉문을 당했거든. 무관심은 순식간에 경악과 혼란, 그리고 공포로 뒤바뀌었다네. 그의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한 힘에 많은 사람과 문파들이 굴복했지. 왜 그가 그런 일을 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네. 다만 당시의 강호에 그를 막을 힘이 없었던 것만은 명백했지. 그 자가 뿜어내는 공포는 점점 더 무림을 구석구석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다네. 사람들은 모두들 그를 두려워했지. 급기야는 그의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돋고, 오금이 저릴 정도가 되고 말았다네. 때문에 모두들 그 이름을 내뱉는 것조차 금기시하게 되었네.”

사람들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종쾌의 이야기를 계속 경청하고 있다 보니 그것은 무척이나 귀에 익은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 공포는 너무나 크고 끔찍해서 한동안 아무도 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네. 그의 이름에 도전한 자는 너나 할 것 없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지. 이제 그는 공포 그 자체가 되었다네. 아무도 말하고 싶지 않은, 떠올리기조차 두려운 이름의 소유자. 그자는 그의 공포에 굴복하고 복종을 맹세한 자들을 모아 하나의 거대한 세력 을 만들고 그 옥좌에 앉았지. 그렇게 해서 그는 천겁령의 주인이 되었다네. 사람들은 두려움과 공포와 절망을 담아 그를 천겁혈신 이라 불렀다네.”

모두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그들은 지금 강호에서 가장 금기시되고 있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다. 심장이 터질 듯이 두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화로 속에서 붉게 달군 석탄이라도 입안에 들어와 있는지 목이 타고, 피가 장마철 강물처럼 빠른 속도로 전신을 관통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평온을 가장하여 노인이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으로 말하고는 있지만 노인의 말 속에는 삼만육천오백 번 이상 뒤바뀐 달 과 해의 광휘로도, 백년의 바람으로도 결코 지울 수 없는 공포의 잔 떨림이 남아 있다는 것을.

“홀로 있을 때조차 무적에 가까웠던 자라 거대한 마(魔)의 세력까지 규합한 그를 막을 수 있는 힘은 이미 정기가 쇠할 데로 쇠한 강호에는 남아있질 않았다네. 그 는 정사를 가리지 않고 모두 그의 힘 아래 굴복하길 원했지. 그때 최초로 정사공동연합무림회의가 개최되었지. 계속되는 패배와 죽음 속에서 사람들은 생각했다네. “이대로는 안 된다!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만 한다! ‘

그러나 그 누구도 시원스런 해법을 내지는 못했지. 그때 한 노인이 나서서 말했네.

“나에게 좋은 생각이 있소!’

그 당시 지푸라기라도 움켜잡고 싶었던 사람들의 귀가 일제히 그 노인을 향했지. 노인은 다시 말했다네.

“전력이 분산된 이대로는 불리하오! 흩어져 있는 우리의 힘을 한 곳으로 모아 그 마인(魔人)을 상대해야만 하오. 그러기 전에는 절대 승산이 없소!’

‘어떻게 말이오??

어떤 사람이 물었지.

‘함정을 파는 겁니다. 우리가 원하는 장소에 그를 유인하는 거요!

노인이 대답했다네.

‘함정? 그런 게 그자에게 통하겠소?”

또 다른 사람이 물었다네. 그 당시 ‘그’가 지닌 막강한 힘과 엄청난 공포는 악마조차 꼬랑지를 말 정도였으니 그런 의혹이 제기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지. 그러자 그 노인이 다시 말했다네.

“그자가 절대 외면할 수 없는 매력적인 미끼를 사용하는 거요!’

노인이 제시한 유인책 미끼가 무엇인지 사람들이 알았을 때 엄청난 반발과 함께 그를 힐책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폭풍처럼 터져 나왔다네. 너무 위험한 발상이 었거든.

“만일 당신의 계책이 실패했을 경우의 파장을 생각해 본 적이 있소? 잘못되면 우리는 완전히 파멸이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만단 말이오!

사람들이 어이없다는 듯이 외쳤다네. 무리도 아니었지. 그런 것을 미끼로 쓸자고 제안 했으니…….”

“도대체 그 미끼란 게 뭐였습니까?”

궁금증을 참지 못한 염도가 물었다. 종쾌가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그 눈을 바라본 염도는 순간 흠칫했다. 종쾌는 고개를 가로저 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아직 자네들에게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자격이 없네. 그러니 가르쳐 주지 못하는 나를 원망하지 말게나.”

그렇게 말하니 더욱더 안달이 날 정도로 그 미끼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어떠한 회유와 아부에도 종쾌는 끝내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종쾌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사람들의 거센 반발을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잠자코 지켜보던 노인은 혼란이 다소 진정되자 다시 말했다네.

‘그렇다면 그 외에 그를 막을 수 있는 다른 뾰족한 방법이라도 있단 말이오? 그런 방법이 있다면 나는 서슴없이 그 의견에 따르겠소. 이 한 몸이 한줌 가루가 될지 라도 말이오. 그러니 다른 대책이 있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어서 말해보시오!’

아무도 그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지. 그 후 노인이 제시한 그 의견에 대한 심사숙고가 이어졌네. 회의는 일곱 낮, 여섯 밤 동안 계속되었지. 그리고 마침내 칠일 째 되던 날 결단이 내려졌다네. 기나긴 회의 끝에 노인의 의견이 마침내 통과된 것이지. 무림사를 통털어 그런 엄청난 희생의 위험을 무릅쓴 책략은 아마 없었을 걸세. 그것은 정과 사, 흑백도를 떠나 전 강호의 운명을 건 도박이었네. 그리고 그 책략을 실행하기 위한 장소가 결정되었지.”

“설마 그 장소란 곳이……?

빙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예감이 그의 심장을 관통했던 것이다. 종쾌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네 짐작이 맞네. 그 곳이 바로 이 화산 천무봉일세. 그리고 자네들이 지금 앉아있는 바로 이 장소이기도 하지.”

해일 같은 경악이 그들을 일순간에 휩쓸어 버렸다. 해일이 휩쓸고 지나간 잔해 뒤로는 묵직한 침묵이 이어졌다. 아무도 말을 내뱉는 이가 없었다.

종쾌의 이야기는 그들이 강호 무림사를 배우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이야기였던 것이다. 천무봉에 이런 내력이 있다는 것을 이들은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 들었던 것이다.

갑자기 바닥에 쇠침이라도 박혀 있는 것처럼 엉덩이가 따끔따끔했다. 사람들은 새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왠지 모든 사물들이 다르게 보였다.

“천우야, 너 이런 이야기 전에도 들어본 적 있냐?”

염도의 질문에 화산파의 유망한 제자이자 주작단 단원인 조천우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화산파에서 십년 이상 가르침을 받아왔지만, 지금 이날까지 그런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바로 화산 앞마당에서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화산파 제자가 한 번도 들어본 기억이 없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염도의 시선이 이번에는 윤준호를 향했지만 그 역시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잠시 숨을 돌린 종쾌가 다시 말했다.

“모르는 것이 당연한 일일세. 그때 있었던 모든 일은 비밀에 붙여져 깊은 어둠 속에 묻혀버렸으니 말이야. 이제 그 일을 아는 사람은 현 강호에 극소수에 불구하고, 설사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것을 잊으려 발버둥치고 있는 실정이야. 자네들은 이곳이 단순히 화산규약지회가 열리는 장소쯤으로 생각하고 있었겠지!’ 노인의 질문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러했던 것이다.

“사실 이 이야기를 비밀에 붙인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라네. 하나는 절대로 밝혀져서는 안 되는 그 내용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공포 때문일세! “

“공포…,라니요?”

남궁상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것은 앞으로 말하지 않아도 직접 경험하게 될 걸세. 아마 자네들에게 지금까지 ‘그’는 전설이나 무용담, 혹은 이야기 속에나 나오는 인물에 불과 했었겠지. 세 치 혀가 전하는 말만으로 그 힘과 공포를 전해 들었을 뿐 직접 부딪힌 적은 단 한번도 없었을 걸세. 아마 진짜로 그런 마인이 존재했는지조차 의문을 품고 있는 자도 있을지도 모르지. 그의 이야기는 여느 이야기가 그러하듯 과장과 허풍이 들어가 부풀려졌을 것이라고 말이야. 만일 혹시라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오늘 진귀 한 경험을 하게 될 걸세. 여기서 자신이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 ‘그’를 직접 만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순간 종쾌의 눈에서 붉은 번개와도 같은 섬뜩한 기광이 번뜩였다.

“…!!!”

광기어린 경악의 벼락이 그들 사이를 무참하게 난타했다. 대표단 일행들은 백지처럼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뜨고 입을 쩍 벌린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순간 맑고 청명한 하늘에 커다란 장막 같은 그림자가 나타나 빛나던 해를 어둠 속으로 삼켜 버린 듯 했다. 공기는 싸늘하게 식어 한겨울의 삭풍(風)처럼 살을 에 는 듯 했고, 사람들은 밤을 무서워하는 어린애들처럼 모두들 두려움에 떨었다. 현재 실체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뿌리는 공포는 이만치 거대했다. 마 치 영혼이 부서질 듯한 충격이었다.

그때였다.

“야, 궁상! 너 지금 뭐하냐? 장난 치냐? ”

한심스럽다는 한 마디. 그리고 이어 강림하는 천벌!

딱!

“악!”

눈물을 찔끔하며 남궁상은 뒤통수를 감싸 쥐었다. 그 순간 남궁상은 자신을 휘감고 있던 어둠의 거미줄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궁상을 시발점 으로 다른 이들도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어둠에서 빠져나왔다.

다시 하늘이 눈부실 정도로 밝아졌고, 햇살은 따가웠으며 시원한 가을바람과 싱그러운 초록의 푸르른 내음도 여전했다.

‘방금 그게 뭐였지?’

대표단 일행들은 자신들이 방금 무엇을 경험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지 자신들이 정체불명의 환상에 빠져 마비 독에 당한 작은 짐승처럼 옴짝달싹 못한 채 벌벌 떨고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비류연이 종쾌를 바라보고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는 이야기에 재미있는 재주이시네요. 그런데 그 뒷이야기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종쾌는 약간 놀라운 눈으로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마치 불의의 습격으로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내 집단 암시에 걸리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깨다니…, 놀라운 놈이군! ‘

강호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에게는 빠른 발 이외에도 또 하나의 특기가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눈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을 순식간에 어떤 암 시에 빠트리는 것이었다. 일종의 최면술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그 암시를 보기 좋게 깨트린 녀석을 만난 것이다.

“허허허, 놀라운 젊은이로군. 단지 가벼운 시험일뿐이었다네. 별 나쁜 뜻은 없었으니 이해하게나. 쯧쯧쯧, 이 정도 암시 따위에 굴복해서야 어찌 진짜 그 앞에 서볼 수 있겠나! 그것은, 그것은…….”

갑자기 종쾌의 목소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도 함께 흔들렸다. 종쾌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온 몸으로 웅변이라도 하듯이…….

잠시 침묵하던 종쾌는 곧 다른 것으로 화제를 바꾸어 말하기 시작했다.

“걱정 말게나. 안색이 여전히 어두운 걸 보니 노부의 말에 지레 겁을 먹은 것 같은데, 어떻게 이곳에서 ‘그’와 직접 싸울 수 있겠는가? 자네들이 싸우게 될 것은 ‘그가 남긴 흔적의 일부일세. 이제 이 강호상에서 얼마 남지 않은 생생한 흔적이기도 하지.”

다른 곳은 모든 문파가 합심하여 전력을 다해 그 압도적인 공포의 잔흔(殘痕)을 지워버렸다는 사실을 굳이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안심하긴 아직 이르네. 부디 그 잔흔을 무시하지 말게나. 방심하다가는 남겨진 잔상에 먹혀버릴 수도 있으니 말일세!’ 마른 침이 일동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그 첫 번째 흔적이자 자네들의 첫 번째 시험이기도 한 곳은 바로 저곳일세.”

종쾌가 가리킨 곳은 바로 눈앞에 가로놓여진 까마득한 낭떠러지를 사이에 둔 서로 높이가 다른 벼랑이었다.

“우린 저곳을 ‘천겁간(天劫間)’ 또는 ‘혈신일보(血神一步)’라 부른다네.”

<『비뢰도』 1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