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3권 8화 –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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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3권 8화 –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

“이 검들의 주인은 단 한 사람에게 저항하기 위해 이곳에 모였다네. 오직 한 사람에게 저항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제야 마침내 우리는 그를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결론에 도달했지. 어둠 그 자체이며 공 포와 절망 자체인 그를 말이야. 이미 한참이나 때늦은 결론이었지.”

또다시 이야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다. ‘그’에 대한 이야기다. 이제는 싫다. 두렵다. 더 이상은 이제 그만! 제발 멈춰 달라고 외치고 싶었다.

검치 섭운명이 비공답운 종쾌와 도제 용경의처럼 옛날 이야기를 시작하려 했을 때 천무학관 대표단들은 솔직히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듣고 싶지 않았다. 들으면 들을수록 희망보다는 절망만이 쌓여가는 그 이야기의 계속을 이제는 사양하고 싶었다.

더 이상 그 이야기를 듣다가는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마저 강하게 들었다.

그제야 그들은 종쾌가 그들에게 한 경고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방심하면 잔상에 삼켜져버릴지도 모른다!’

그 경고를 소홀히 한 덕분인지 모르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마음은 서서히 공포에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항상 주위로부터 칭찬과 선망, 질시의 시선을 받아오던 자신들이 이토록 하찮게 여겨지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에게 억지로라도 그 벽을 넘을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러지 못하면 좌절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젊고 사고가 유연하다 해도 한계가 있었다.

내심 멈춰주길 기도하고 있었지만 검치에겐 그럴 용의가 없었고 그들에겐 막을 권리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를 무력하게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 다.

“그가 여기 이 자리에 나타났을 때 우리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자네들은 알아야만 하네. 우리는 신기루나 허깨비를 보듯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지.”

‘그’는 인간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알다시피 우리는 멸겁삼관의 세 번째 관문을 맡고 있었지. 세 번째이자 마지막이기도 했지. 그럼에도 그가 이 자리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네!”

몇몇은 그게 무슨 상관이지?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의 입에서는 경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

윤준호도 예외는 아니었다.

검치는 그런 윤준호를 힐끗 보고는 말을 이었다.

“첫 번째 관문과 두 번째 관문은 이곳과 그리 가깝지는 않지만 소리가 도달할 수 없을 만큼 멀지도 않았지!’

그제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해의 빛이 나타났다.

“사실 우리는 크나큰 싸움이 벌어지리라 예상하고 있었어. 그런 만큼 크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어야 했네. 그것이 병장기 소리든, 단말마 비명이든, 무엇이든 말 일세. 그러나 산 전체가 침묵과 고요의 장막으로 덮여 있는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네. 우리의 귀가 듣는 행위를 거부한 건 아니었어.”

잠깐의 침묵.

“그의 등장은 마치 땅에서 불쑥 솟아난 듯했지! 그는 이미 등장한 것만으로도 우리들을 동요시켰고, 그럼으로써 보다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셈이 되었다네.”

검치 섭운명은 당시를 회상하는 듯 어두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본 뒤 말을 이었다.

“우리는 그 검진을 백팔멸겁검진(百八滅劫劍陣)이라 불렀지. 소림의 백팔나한진의 변식을 주축으로 하여 화산파의 매화검진과 무당파의 북두천강진, 혈검문의 혈쇄검진 등을 분석 연구해 만든 필살의 검진이었네. 당시 강호의 어떤 검진도 이 진법의 오묘함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을 걸세.”

강호의 명망 높은 검객들과 박학다식한 두뇌들 수십 명이 수백 일 동안 침식을 잊은 채 머리를 맞대어 만들어 낸 검진이었다. 자부심이 없을 리가 없었다.

“거기에는 당시 꽤나 유명한 인물들이 몽땅 모여 있었지. 검호(劍豪)의 칭호를 받을 만한 사람은 모두 모여 있었다고 보면 무방할 걸세. 그편이 이해가 빠르기도 하고. 그들이 사라지면 강호에 흩어져 있던 검호의 씨가 마를 그런 상황이었지!”

때문에 그에 대한 대비책도 따로 마련해야만 했었다.

“자네가 허리에 차고 있는 녹옥여래신검(綠玉如來神劍)의 주인도 있었지. 공허 대사라고 알고 있나?”

검치가 용천명의 허리에 걸려 있는 두 자루의 검 중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 그분이라면 사부님의 사부님이신… 저의 사조님이십니다. 천겁혈세 때 입적하셨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다른 상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소림 역사 상 가장 뛰어난 무승 중 한 분이셨다는 것만…….”

“그분의 가장 큰 장기는 사실 검이었다네. 그분도 그 자리에 함께 계셨어. 노부와 검진의 우측을 지켜주고 계셨지. 강호의 중생들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결코 마다 하지 않던 훌륭한 분이셨는데……. 그러나 여래의 검광도 그의 손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지.”

용천명의 몸이 전율로 부르르 떨렸다.

그런 비사가 있었을 줄이야!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사문의 어른 중 누구도 그분의 일을 입 밖에 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 일이 결코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니 라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임에도…….

‘설마 달마여래검의 무패 전설을 바꾸고 싶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겠지?’

사문의 어른들은 소림 최후의 희망이 꺼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충격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용천명은 신경도 쓰지 않고 검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분뿐만 아니었지. 당시 화산제일검이라 불리던, 현재 매화검선이라 불리는 유환권의 큰사형인 화산유일검(華山唯一劍) 곽열도 있었다네. 나와는 절친한 사이 였는데…, 아까운 인재였지. 그날 술을 마시며 검의(劍意)를 나누던 많은 친구들을 난 너무 많이 잃어버렸어…….”

화산파 제자인 주작단의 조천우와 화설옥, 그리고 윤준호가 짧은 경악성을 토했다. 태사부인 유환권의 대사형이라면 배분도 따지기 힘들 만큼 까마득히 높은 분이 었던 것이다.

검치는 여기서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곳엔 개방의 걸인검(乞人劍) 추성도 함께 있었지.”

“예? 아니 개방에서 웬 검객이…….”

노학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알기로는 개방에는 검법이 없다. 거지들의 떼거지 집단 개방의 최고 무공은 타구봉법(打拘棒法) 36수라고 오래 전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아직 모르고 있었나? 그 유명한 검광 걸인검의 이야기를 정녕 모른단 말인가?”

“죄, 죄송합니다.”

노학은 차마 모르는 걸 안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휴우, 죽은 자는 그만큼 빨리 잊혀지는 법이지.”

노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걸인검 추성은 무척이나 특이한 거지였지. 그는 거지였지만 검에 관심이 많았어. 그래서 타구봉법을 검술로 바꾸어 볼 수 없을까 하는 화두를 두고 평생을 연구 했다네. 그리고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후, 그 노력이 마침내 하나의 결실을 맺었지. 개방에 쌓인 잡다한 검술들과 강호의 유명한 검법 대부분을 몽땅 연구한 다음 만들었다고 했는데…, 이상하군. 분명 개방에는 추성이 남긴 삼십육초 검식이 있을 텐데? 그 이름은 ‘절견삼십육검식’이라고 하지!”

다른 이들은 물론이고 개방의 촉망받는 거지인 노학조차도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아니, 엇비슷한 게 하나 있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부풀리기 좋아하는 어른 거지들의 실없는 소리인 줄 알고 있었는데…….

“설마 소문으로만 떠돌던 걸왕지검(乞王之劍)이…….”

“그건 좀 부풀려진 감이 있군.”

‘그런 좋은 게 있었으면서도 왕거지께서 숨기고 있었다니. 나중에 꼭 알려 달라고 해야겠다.’

노학은 결심했다. 그리고 이 결심은 후일 걸왕이라 불리게 될 한 거지의 인생에 있어 전환점이 된다.

섭운명이 이번에는 남궁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 당랑거철(蝶嫏拒轍)이라는 말을 알고 있나?”

낭궁상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곧 비류연을 한번 훔쳐보았다. 그는 비단 그 뜻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몇몇 친구들과 함께 직접 실천해 보기도 했었 던 것이다.

“달려오는 수레를 저지하려는 사마귀라는 뜻이지요. 도저히 자신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려는 무모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지요.”

그리고 그 대가는 무척이나 씁쓸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바로 그러했다네.”

‘그’는 협박 따위의 하찮은 것을 입에 담는 유치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그가 그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자체가 그대로 공포가 되어 그들에게 다가왔다. 어느 누구도 그 공포에 직면해 대항하지 못했다. 그들은 요람을 떠나지 못하는 어린애만큼이나 무력했다.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는 검치의 목소리가 으스스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재미있을지도 모르겠군!”

108명의 검호(劍豪)로 이루어진 절세의 검진을 앞에 두고 ‘그’가 말했다.

사람 수는 두 번째 관문의 군랑살호진 구성 인원보다 반 이상 적었지만 기백이나 기세는 그 이상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그런 사실은 유흥을 위한 흥밋거리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 압도적인 기백! 소문 이상이로구나!’

검치 섭운명은 한눈에 그 사실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고는 곧 소문을 축소시켜 퍼트렸던 사람들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믿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이 세상이 거짓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수십 명의 책사들이 밤낮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머리 싸매고 만든 두 개의 관문을 저리도 멀쩡히 통과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 그를 이곳에서 보내면 강호의 명운은 필멸(必滅)이다!’

열여덟 개의 자물쇠가 굳건히 걸린 한철상자! 그것이 만일 저자의 손에 들어간다면……. 전율스런 공포에 섭운명의 정신이 비명을 질렀다. 그 일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다.

섭운명은 소리쳤다.

“108개의 검이여! 108인의 용사여! 우리는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서 저자와 함께 산화한다. 그대들이 지닌 용기와 긍지, 피와 생명으로 강 호의 운명은 지켜질 것이오!”

와아아아아아!

피 끓는 의기가 담긴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아무도 이곳에서 살아나가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죽음을 각오한 자보다 무서운 것은 없었다.

그러나 세상은 잔혹했다. 세상에는 불가항력이라는 것이 버젓이 존재했던 것이다.

발검(拔劍)!

개진(開陣)!

발동(發動)!

108개의 새하얀 검신이 햇살을 반사하며 무수한 빛을 뿌려댔다. 검치의 신호에 의해 마침내 백팔멸겁검진이 발동되었던 것이다.

오행(五行) 팔괘(八卦)의 변화에 의거한 검진이 사나운 한 마리 맹수를 포박하기 위해 강철 이빨을 번뜩이며 영활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야수의 광폭함과 영리함 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고절했다.

“와라!”

야수가 자신의 방해물을 향해 발톱을 치켜들었다.

“그는 우리들이 완전한 포위망을 형성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았지. 그가 손을 뻗자 그의 손끝에서 어둠이 폭사되어 나왔다네. 그리고 질풍이 몰아쳤 지.”

검게 물든 태양빛 같은 광기어린 폭풍우. 하늘이 어둠으로 물들고 대지가 비명을 질렀다. 자갈과 흙먼지가 난폭하게 공간 속을 튀어다녔다. 눈조차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그것은 죽음과 절망을 몰고 오는 사신의 질풍이었다.

“보이지 않는 야수의 발톱이 공간을 찢어발기는 것 같았네. 마치 미쳐버린 풍신(神)이 질풍의 칼을 들고 난동을 부리는 것처럼 격렬했지! 피가 튀고 살이 저며지 며 수많은 생명이 스러졌지…….”

바람은 칼날의 날개를 달고 사방을 휩쓸었다.

피와 비명, 그리고 죽음!

“삼라만상이 피에 젖어 울부짖고 있는 것만 같았네…….”

베어지고 베어지고 또 베어졌다.

암흑의 용권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어김없는 죽음이 찾아왔다. 어둠 속에 번쩍이는 무형의 칼날은 그 무엇도 용서치 않았다. 검은 질풍은 어떤 명검보다도 날카로운 예기를 품고 있었다. 그것은 용서와 자비를 알지 못하고 죽음과 비정만을 알았다.

수많은 보검이 맥없이 반 토막으로 부러졌고, 주인의 생명과 함께 바닥에 떨어져 묘비가 되었다. 그 위로 다시 피의 비가 쏟아졌다. 대지가 꿀꺽꿀꺽 게걸스럽게 그들의 의기어린 피를 들이켰다.

“여기 꽂혀 있는 검들 모두가 다 그때 그들이 지니고 있던 애검들이었네. 이제 모두가 다 주인을 잃고 자신의 생명마저도 잃은 검들이지. 그리고 그 검을 묘비로 삼 은 묘지가 생겨났네.”

한 번 부러진 검은 다시 이어 쓰지 못한다. 이미 그 생명을 다했기 때문에 이어봤자 실전에서는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악몽의 한가운데서 노부 혼자만이 비겁하게 살아남았네. 아니, 그가 살려줬다고 해야 더 옳겠지! 자신의 업적을 알리기 위한 전령으로서 말일세.” 아직도 그때의 치욕과 굴욕감을 잊을 수가 없다.

“자! 보게!”

검치가 자신의 허름한 장포를 훌렁 벗어젖혔다.

“……”

비류연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예린도 장홍도 이진설도 독고령도 마찬가지였다. 좌중들의 눈이 파르르 경련했다.

염도와 빙검을 비롯한 대표단 전원의 눈 또한 크게 부릅떠졌다.

가뭄의 계속되는 황량한 대지에 선 고목처럼 그의 몸은 깡말라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바로 조금 전에 그와 똑같은 흔적을 본 적이 있었다. 검치의 얼굴 전체를 덮은 검흔도 흉측했지만 그의 몸에 난 상처에 비하면 양반이라 할 만했다. 그의 상반신을 갈가리 찢어놓은 빽빽한 거미줄 같은 상처. 그것은 그들이 겁흔벽에서 본 것과 똑같은 형태의 상처였다.

그리고 그것은 백 년이 지나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패배자의 낙인이었다.

“이, 이럴 수가!”

빙검과 염도가 동시에 소리쳤다. 그들은 과거의 악몽 중 한 장에서 저 상처를 본 적이 있었다. 백골이 진토가 된다 해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그들의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괴롭고 슬픈 순간이었다.

둘은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고 이내 무언의 합의를 이루었다.

“이, 이 상처는…….”

목소리가 심한 격랑을 일으켰다. 목이 잠겨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틀림없었다.

그들의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때의 상처와 그것은 판에 박은 듯 똑같았다. 백 년과 이십 년.

“서, 설마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말인가?”

불안한 울림이 가슴 속에서 두방망이질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한 점도 있었다. ‘그’가 만일 살아 있었다면, 정신이 혼미한 상태도 아닌, 한동안 맑은 정신상태를 보여줬던 그들의 사부님이 그들에게 경고를 해주지 않았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무모한 복수극을 막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답은 금방 나오지 않았다. 의혹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일조일석에 곧바로 얻을 수 있는 해답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으음…….”

비류연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관찰만을 계속했다. 그의 눈은 심연처럼 가라앉아 있었는데 그 누구도 현재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 다. 저 나예린조차도.

흩어진 조각들이 그의 정신 속에서 수많은 조합을 통해 합쳐졌다 흩어졌다를 반복했다. 그러나 아직 아무런 모양도 완성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팔은 역시 그자가…….”

빙검이 검치의 헐렁한 소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나 답은 의외였다.

“아닐세! 이건 그자의 짓이 아닐세.”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

그 말고 감히 누가 검치 섭운명의 검 든 오른손을 가져갔단 말인가?

“날세!”

“예?”

어리둥절한 기색이 역력한 반문에 섭운명이 다시 한번 대답해주었다.

“날세! 범인은 검치 섭운명이지!”

“그런 천인공노…….?”

“…하지 않으신 분이…….”

비분강개(悲憤憭慨)하려던 사람들은 화급히 입을 봉해야 만했다.

“이 오른손을 자른 건 바로 나 자신일세. 이 얼굴의 상처 또한 대부분 나 자신이 저지른 소행이지. 스스로의 부족함과 모자람에 절망한 나머지 저지른 객기라고나 할까? 지워지지 않는, 그리고 지울 수도 없는 광기의 흔적이지.”

‘그에게 패하고 검치는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와 함께 달을 벗삼아 술을 마시며 검담(劍)을 나누던 친구들과 존경하는 선배들을 그 자리에서 모 두 잃었던 것이다. 더 이상 자신과 검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비통했다. 그리고 그들을 지켜줄 수 없었던, 아니 함께 죽을 수 없었던 자신 이 원망스러웠다.

그의 오른손은 수전증이라도 앓고 있는 것처럼 계속 떨렸다. 검은커녕 술병조차 제대로 쥘 수 없었다. 검치는 자신의 오른손이 두 번 다시 검을 잡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결코 자신이 그를 능가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는 이미 훌륭한 패배자였다.

분했다. 참을 수 없이 분했다.

끓어오르는 증오, 주체할 수 없는 충동.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고 싶었다.

그 순간 모든 증오가, 모든 원망이 그의 오른팔에 집중되었다.

쓸모없는 것!

그는 왼손으로 검을 잡아들고 단칼에 그의 오른손을 베어버렸다. 서걱 소리와 함께 맹수의 표호 같은 울부짖음이 그의 목을 통해 터져 나왔다. 그러고도 한동안 그 는 암흑 속을 헤맸다. 무신 혁월린이 없었다면 아마 그는 그 깊은 어둠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을 다스리지 못한 탓이지요. 패배가 당연했다는 것이랄까요! 자해라니……. 어리석음의 극치로군요!

또다시 비류연의 입에서 인정사정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주위의 공기가 삽시간에 싸늘하게 변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해쓱한 얼굴로 연못의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류, 류연!”

“자, 자네 어쩌자고…….? 도대체가…….”

호랑이 간이라도 삶아 먹었나? 사람들은 도대체 비류연이 뭘 믿고 저렇게 막 나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비류연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뻔뻔할 정도로 당 당했다.

그 일관성 하나만은 칭찬해줘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맹렬히 비난해줘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자살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비이성적이고 자기 통제 불능의 극치이며, 객기 충만이자 어리석음의 소치라고 생각하는 비류연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 다.

도제는 성격이 원래 그러니까 쉽게 넘어갔지만 이번만은 어림없다고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검치 섭운명이 일지번천이라는 그 별호대로 나뭇가지를 들고 비류 연을 가만 놔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말릴 생각도 없었다. 아니, 제발 그래 달라고 매달려 부탁하고 싶었다.

하지만 검치는 다수의 의견을 조용히 배반했다. 그러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업자득이었을지도 모르지……..

“나는 그에게서 공포나 경외보다는 질투를 느꼈다네! 그래, 노부가 느낀 것은 강한 질투심이었어.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자에 대한 강렬한 질투 말 일세!

그것은 산 밑바닥을 기는 자의 산 정상에 오른 자에 대한 질투였다.

문제는 그 산이 노력만으로는 결코 오를 수 없는 산이란 것이었다. 신의 선택을 받은 자만이 오를 수 있는 산, 혹은 신을 거역하고 하늘을 거부한 자만이 오를 수 있 는 그 산에 ‘그’는 오르고 검치는 오르지 못했다.

같은 한 사람을 만났지만 그들 세 사람이 느낀 감정은 모두 틀렸다.

비공답운 종쾌의 공포, 도제 용경의의 경외, 그리고 검치 섭운명의 질투!

“그러고는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스스로를 패배자로 전락시켰지.”

검치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 세 사람이 그에게 느낀 감정은 모두가 틀렸지만 세 사람 모두 그의 잔상에 영혼이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같았다.

“그 이상의 이야기는 해줄 수 없지만 그후의 이야기는 해줄 수가 있네! 혈신이 기적적으로 패퇴하고 천겁혈세가 끝난 이후, 강호의 수뇌들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 했다네. 그가 남긴 흔적을 강호상에서 제거하기로 말일세!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징표는 남아 있어 봤자 공포 이상을 낳을 수 없다는 결론이었지. 그러나 이 강호 상에서 단 한 곳, 이곳만은 남겨두었네. 후일 등장할 인재가 ‘그’를 뛰어넘을 수 있을지 없을지 시험하는 장소로서 말일세. 무신과 무신마께서는 강호 무림에 그런 인재들을 길러내기 위한 토양을 마련하기 위해 천무학관과 마천각을 각각 세우고 백 년 동안 교육에 힘썼다네. 그리고 백 년 만에 천무봉의 봉인이 풀리고 자네들이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일세! 시험과 시련을 받기 위해서!

검치의 말은 엄숙하기 그지없었다.

“아직도 천겁의 그림자는 완전히 씻겨 나가지 않았네. 뿐만 아니라 점점 더 어둠 속에서 그 힘들은 강대해져 왔네. 이제 자네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게! 자네들의 실력을! 과연 자네들이 이곳을 통과할 자격이 있는지 시험해 보겠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

비류연이 말했다.

“물론 폐가 되지 않으니 뭐든지 물어보게나!”

섭운명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러자 비류연이 곤란하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남에게 오해를 사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저기, 폐가 된다는 생각은 추호도 한 적이 없는데요?”

그러자 검치 섭운명의 시선이 비류연을 향했다.

“재미있는 젊은이로군! ”

무뚝뚝하던 노인의 검흔투성이 얼굴에 처음으로 유쾌한 감정이라 부를 만한 것이 떠올랐다.

이건 이것대로 상당히 괴기스럽다고 마하령은 생각했다. 물론 무례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라고 남들이 쉬쉬거리는 그 남자. 에, 그러니깐 천(天劫) 혈신(神) 위천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작자입니까? 이렇게 계

속 듣고 있다 보니 혹시나 손발이 합쳐서 열여덟 개는 아닌지 문득 걱정이 들어서요.”

비류연은 그에 관해 좀더 알아야 될 필요성을 느꼈다. 그것은 어떤 예감 같은 것이었다.

검치는 그의 물음에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스무 개라네!”

“네?”

이건 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뭘 그리 놀라나? 손가락과 발가락이 합쳐서 스무 개라는 이야기였네!”

별거 아니라는 투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을 당황시키는 노인장이었다. 검치의 이런 행동에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할아버지도 꽤 하시는군요.”

비류연이 감탄하며 말했다.

섭운명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고는 곧 결정을 내렸다.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네! 그의 인상착의를 알고 있는 사람은 현 무림에 아무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백 년 전 그와 직접 대면한 노부 또한 그가 어떻게 생겼냐고 물으면 대답해줄 말이 궁하다네. 왜냐하면 그는 항상 얼굴의 반을 덮는 기묘한 모양의 은가면(銀假面)을 쓰고 사람들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지. 그 가면 밑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네. 그러나 다들 단 한 가지 기억하고 있는 사실이 있지.”

그것은 이 노인뿐만 아니라 그를 만난 모든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일이었다. 그것은 간절히 원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호기심이 격발된 비류연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까 전부터 자꾸만 이상한 예감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에게는 한 가지 특이한 신체적 특징이 있었지. 그것은 바로 은가면 밖으로 드러난 그의 두 눈이 때때로 황금빛으로 번뜩인다는 것이었어. 사람들은 그것을 금 색의 마안(魔眼)이라 부르고, 그를 황금안의 마신(魔神)이라 부르며 두려워했지!

‘황금안?’

남궁상을 위시한 주작단들은 그것을 어디선가 자신들이 보았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황금빛 눈이라는 것이 그들에게는 전혀 생소하거나 생경하게 들리지 않 았던 것이다. 그러나 상세한 기억은 나질 않았다.

나예린의 눈이 자연스럽게 비류연을 향했다. 앞머리에 가려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의 두 눈은 바람이 잠든 날의 호수처럼 고요했으며, 물론 아무런 기운도 발산되지 않고 있었다.

나예린은 내심 실소를 터트리며 다시 고개를 원래대로 돌렸다.

그렇다! 너무나 쓸데없는 기우였다. 자신의 돌연한 엉뚱함에 그녀 자신조차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내가 이렇게 실없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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