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3권 9화 – 거리와 실력의 상관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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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3권 9화 – 거리와 실력의 상관관계

거리와 실력의 상관관계

– 세치

“이보게나! 재미있는 청년!

재미있는 청년? 아마 비류연을 지칭하는 것이리라.

지명(?)당한 비류연이 노인을 쳐다보았다.

“자네는 자네의 실력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흐음.”

비류연은 갑자기 어려운 난제라도 만난 사람처럼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뭐 상대적으로 말하자면 현재 상태로는 세 치(약 9cm)라고 할 수 있죠.”

현재 상태라 함은 묵룡환을 차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물론 검치는 그런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대표단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무공의 경지를 묻는데 세 치라니?

그러나 검치만은 놀란 표정이었다. 부르르 떨 정도의 경악이라 해야 더 옳을 것이다.

“세 치라고? 허허, 참으로 광오한 젊은이로군.”

그것은 감탄이라기보다는 조소, 아니면 그저 농을 즐기는 것에 불과했다.

“전 정직을 신조로 삼고 있죠. 이런 시시한 일로 거짓말 따위는 하지 않아요. 뭐 못 믿겠으면 시험해 봐도 상관없어요. 굳이 그런 번거로움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요.”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것도 아닌데 위축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비류연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젊은이, 그 패기만은 높이 사줄 만하군. 그 패기와 당당함을 높게 사서 용서해주겠네.”

자신의 자비심 깊은 자애로움에 노인 스스로도 놀랐다. 저 무모, 광오, 시건방의 삼중주에 황당해져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믿음이… 부족하시군요.”

애석하다는 투로 비류연이 말했다.

사실 세 치라 함은 검치 섭운명과의 간합(合)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간합(間合)!

여기서 간(間)은 시간적인 개념을 가리키며 합(合)은 공간적 개념을 나타낸다. 간단하게 말해서 상대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시공간적 거리 간격이라 할 수 있다. 즉 비류연이 말한 세 치라는 것은 검치 섭운명의 검격(劍擊) 유효거리 세 치 안까지 들어가고도 그의 검을 받아낼 수 있다고 장담한 것이다. 쉽게 말해서 상대의 코 앞에 서 있어도 안 죽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이야기로 어떤 상황 하에서도 검치 섭운명의 검이 그의 몸에 위해(危害)를 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나 진배 없는 이야기였다.

“사람은 자신이 내뱉은 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네!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

이번에 솔직히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빌면 용서해주자고 노인은 내심 작정하고 있었다. “물론이죠.”

그러나 대답은 한결같았다.

“요즘 젊은이들 중에는 꽤 재미있는 청년들이 많군. 그렇다면 어디 그 실력을 증명해 보이시게. 자네가 현재 도달한 경지가 어디까지인지 말일세.”

검치의 실눈 안 깊숙한 곳에서 벼려진 검광과도 같은 것이 날카롭게 빛을 발했다.

이 두 사람의 대화를 알아들은 사람은 이 중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용천명도 그 소수 중 한 명이었다.

‘설마?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아무리 오른손이 없다 해도 조금 전의 신위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일 장 안에 들어가기도 힘들었다. 모험을 한다면 다 섯 자 앞! 그러나 그것은 생사를 건 모험.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 그런데 세 치? 그런 터무니없는 만용을.

모용휘 또한 생각했다.

‘무모해. 검치 섭운명의 검격 안에 그토록 다가간다는 것은 단순한 자살행위일 뿐! 가치가 없다. 안전거리는 일 장, 유효거리는 다섯 자! 생명을 걸면 넉 자까지 다 가갈 수 있을지도…….?

이 젊은 기재는 새로운 눈으로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예기를 머금고 빛나는 그의 두 눈이 외치고 있었다.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지 내 앞에서 보여다오.’

그것은 검치도 마찬가지였다.

“자네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청년이었으면 좋겠군.”

섭운명이 말했다.

“사람은 믿음이 부족해 항상 증거를 바라지요. 좀더 상대방을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는 게 중요한 데도 말이죠.”

비류연은 믿음과 신뢰가 부재하는 현 강호의 현실에 개탄했다. 그러나 섭운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입을 놀리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노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은 필요 없네. 하지만 누구 나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필요하지. 단지 그것뿐이네.”

“그것도 그렇군요.”

검치의 말에 납득했는지 비류연이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찾는 눈치다. 뭐가 좋을까……. 그의 두 눈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때 비류연 의 눈에 어떤 생물 하나가 잡혔다. 단풍 덮인 가을 산처럼 붉은 몸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날갯짓하는 네 장의 늠름한 날개, 사방을 감시하는 커다란 두 눈. 그것은 바로 잠자리(晴궜였다.

“여기 마침 좋은 게 있군요.”

비류연이 자신의 가슴 앞쪽을 날아다니는 잠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무엇을 보여줄 건가, 류연?’

장홍의 꿰뚫는 듯한 시선이 비류연을 향했다. 이것으로 조금이나마 그 안에 숨겨진 비밀을 훔쳐볼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네까짓 게 감히! ’

마하령의 표독스런 눈빛이 비류연을 향해 폭사되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가 창피를 당한다면 그것만큼 그녀를 기쁘게 하는 것은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이 모 종의 기대로 가득 찼다.

그 외에도 염도, 빙검, 독고령, 주작단 등 수많은 시선이 비류연을 향해 집중되었다.

‘류연…….?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예린의 눈에 담긴 은하수 같은 시선이 비류연을 향해 흘렀다.

자신의 한 몸에 집중되는 뜨거운 관심과 미움과 살의의 폭포수에 마음의 명경지수가 흔들릴 만큼 공부가 얕지는 않았다. 긴장이나 부끄러움, 혹은 중압감에 동요 하면 동요할수록 일에 대한 성공 확률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그런 잡다한 감정들은 쌓이면 쌓일수록 인간의 몸 속에 잠재된 무한의 가능성을 점점 더 한계 짓고 줄 여 나가기 때문이다. 때문에 가끔은 강철 같은 의지력으로 마음에 철판을 깔 필요가 있다.

비류연은 이 마음의 고요를 지키기 위해 어떤 추가된 의지력을 소모할 필요가 없었다. 왜 숨을 쉬는 것과 다름없는 일에 다른 힘이 필요하겠는가!

비류연은 고요한 시선으로 잠자리를 바라보았다. 상하 좌우로 날갯짓하는 잠자리의 모습이 점점 더 느리게 다가왔다. 거북이의 한 걸음도 이보다는 훨씬 빠를 것 같았다.

위로 한 번, 아래로 한 번, 다시 위로 한 번.

잠자리의 날갯짓 한 동작 한 동작이 눈에 명확하게 들어왔다. 한 번의 날갯짓을 위해 잠자리의 어느 관절과 어느 근육이 움직이는지 등등의 미세한 부분 하나하나 까지 감지해낼 수 있었다.

긴 앞머리 뒤에 가려진 비류연의 눈이 한순간 황금빛으로 빛났다. 그 순간 가볍게 늘어뜨려져 있던 그의 오른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거대한 심해 속에 가라앉아 있 는 사람의 움직임처럼 매우 느린 동작이었다. 보는 이들이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의 둔중한 한 수.

그 손이 아주 천천히 잠자리의 아래 부분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손끝에서 하나의 백광이 번뜩였다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목적지는?”

“제가 듣기로는 이 근방 어디쯤이라고 들었습니다. 걸을 만큼 걸었고, 올라올 만큼 올라왔으니 곧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까요?”

“도대체 홍매곡이라는 데가 어디야? 절세 기연이 숨겨진 비밀동부도 아닌 주제에 왜 이렇게나 복잡한 거야? 건방지군. 안내판 하나 없다니 정말 불친절해! 불친 절!”

염도가 화산규약지회의 대회운영체제 전반에 대한 무성의함과 불친절성에 대해 가차없는 비판의 칼날을 휘둘렀다. 햇빛도 가릴 만큼 거대하게 자란 수림이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걷기 불편한 데다 때로는 짜증까지 유발시키는 짐승들의 길이 그들의 불만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었다. 들쭉날쭉한 무성한 풀들과 얽히고 설킨 나무뿌리들 때문에 발밑이 불안정해 경공을 쓰기도 마땅치 않았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길 잃은 낙오자까지 양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쩝, 첫 눈 오기 전에 도착할 수는 있는 건가요?”

비류연의 질문에 염도가 힐끗 아직 식지 않은 가을 태양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만일 그분의 설명이 틀리지 않다면.”

‘도대체 뭘 보고 우리를 보내주셨을까?’

눈치로 찍어봐서는 빙검도 그 이유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까 전부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저 삐쩍 마른 얼굴을 보니 분명했다. 염도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 다. 둘 다 몰랐다. 만일 자신이 알아채지 못했는데 빙검이 알아챘다면.. 생각만 해도 창피한 일이었다.

꽤나 오랫동안 같이 다녔지만 여전히 의문투성이의 인간이었다. 도대체 그 정체가 뭘까? 염도는 아직도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정체불명의 인간이 두 명씩이나 자신의 곁에 있다니……. 절대 기분이 삼삼할 리 만무했다.

내심 투덜투덜거리며 산길을 앞장서 올라가는 염도의 뒤에서 회의노인이 묘한 시선으로 비류연의 등을 바라봤다. 비류연은 나예린에게 뭐라고 말을 건네고 있었 다. 전신의 감각을 날카롭게 모아봐도 그에게선 여전히 특별한 구석이 느껴지지 않는다.

‘반박귀진?’

설마. 저 나이에 오르기에는 힘든 경지였다. 하지만…….

확실히 방금 전 선보인 한수는 대단했다. 기억에 담아둘 만했다.

‘그걸 제대로 알아본 사람은 없겠지만 말이야…….?’

아마 검치 섭운명 정도였을 것이다.

“응?”

“엉?

“엥?”

보여준다더니 도대체 무엇을 보여줬단 말인가? 문자 그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단 한 가지 일어난 일은 있었다. 비류연의 손이 스치고 지나간 그 잠 자리가 서서히 날아가더니 손바닥을 펴고 있는 검치의 손바닥에 착륙했던 것이었다. 뭐 나름대로 대단한 일이라고 우긴다면 대단해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 뿐이었다.

검흔투성이 섭운명의 시선이 조용히 자신의 손바닥에 착륙한 잠자리를 건성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말뿐이었는가?’

역시 입으로만 떠드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라고 생각하던 그 순간!

“흡!”

그때 검치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에 동화된 사람들은 감히 말을 걸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후!

굳게 다물어져 있던 검치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가라!”

“네?”

염도가 되묻자 검치는 다시 한번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며 자신의 말을 각인시켜 주었다.

“…가라! 너희들은… 합격이다.”

검치 섭운명은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은 채 자신의 손바닥에 날개를 내리고 앉아 있는 잠자리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믿을 수가 없군! ‘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봤지만 역시 힘들었다.

“내가 일 갑자(60년)나 걸려 겨우 도달한 경지를 그 젊은 나이에 벌써 성취했다는 것인가?’

어느 순간부터 잠자리는 그 주위의 시간이 얼어붙어 있는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생명이 생명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요소가 이 잠자리에서는 느 껴지지 않았다.

‘그놈은 괴물인가? 아니면.

쩌억!

검치의 손바닥 위에 올려져 얼어붙은 시간 속에 사로잡혀 있던 잠자리가 변화를 일으켰다. 미간 사이부터 꼬리 끝까지 두 조각으로 깨끗하게 갈라졌던 것이다. 갈 라진 절단면은 마치 거울의 그것처럼 반질반질했다.

그들은 수림을 헤치며 계속해서 걸었다. 산은 가을을 맞이하여 형형색색 고운 빛깔을 띤 새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긴 있었다.

아직 철이 아니라 화산의 자랑이라 할 수 있는 만개한 매화를 보는 행운을 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진설은 그것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소문에 의하면 화산 어딘가에 사시사철 매화가 피어 있는 신비한 골짜기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 도원경의 아름다움은 필설로 형용할 수가 없으며, 그 신비한 향기는 사람의 정신을 마비시켜버릴 정도로 향기로우며, 그곳에는 매화의 정령이 살고 있다고들 하더군요! ”

이진설의 말에 조천우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하하! 저도 소문과 전설로만 들었지 실제로 그런 장소가 있는지는 본 적이 없답니다. 중원 오악쯤 되면 다들 그런 사람의 심상을 자극하는 신비한 전설 한두 개 쯤은 있는 법이지요.”

바로 그 순간 윤준호는 온몸에 벼락이 훑고 지나가는 듯한 전율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있었다.

“서, 설마…….”

코끝을 간질이는 단아한 향기. 다른 사람들에게는 즐거움일지 모르지만 윤준호에게는 맹독만큼이나 무서운 냄새였다.

“하지만 아직 계절이 안 되었을 텐데…….’

황금빛으로 빛나는 가을의 태양은 아직 차갑게 식지 않았다. 꽃망울을 터트리기에는 이른 시기였다.

홍매곡이라 했다. 분명 검치는 그들이 도착해야 할 장소의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

홍매곡(紅梅谷)…….

그러자 태사부님이 그에게 해주었던 옛날 이야기가 불현듯 생각났다. 사시사철 매화가 지지 않는 신비한 비경. 그곳의 이름이 또한 홍매곡이었다.

그냥 이야기 속의 한 토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윤준호가 맡은 냄새! 그것은 분명 아직은 꽃망울을 터트릴 리 없는 매화의 향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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